가와시마 쇼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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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와시마 쇼지로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890년 지바현에서 태어나 센슈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내무성에서 근무하며 정계에 입문하여 중의원 의원을 여러 차례 역임했고, 자유민주당 간사장, 부총재를 거치며 당내 '넘버 2'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안보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오키나와 반환 협상에도 깊이 관여했다. 또한, 도쿄 국제공항 대체 신공항 건설 과정에서 나리타시 산리즈카를 건설지로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70년 천식으로 사망했으며, 자유민주당 부총재와 교육, 문화,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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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시마 쇼지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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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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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명 | 川島 正次郎 |
로마자 표기 | Kawashima Shōjirō |
출생 | 1890년 7월 10일 |
출생지 | 지바현 히가시카쓰시카군 교토쿠정 |
사망 | 1970년 11월 9일 |
사망지 | 도쿄도 오타구 산노 |
출신 학교 | 센슈 대학 경제학부 경제학과 졸업 |
소속 정당 | 입헌정우회 무소속 자유당 일본민주당 자유민주당 |
칭호 및 훈장 | 종2위 [[File:JPN Toka-sho BAR.svg|38px]]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
주요 직책 | |
전직 | 센슈 대학 총장 지바 공업대학 이사장 |
현직 | 해당 없음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자유민주당 |
행정 관리청 장관 | 제13대 제22대 |
내각 | 제2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 제2차 이케다 제1차 개조 내각 제2차 이케다 제2차 개조 내각 |
임기 시작 | 1955년 3월 19일 1961년 7월 18일 |
임기 종료 | 1963년 7월 18일 |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 제20대 |
내각2 | 제2차 이케다 제1차 개조 내각 제2차 이케다 제2차 개조 내각 |
임기 시작2 | 1961년 7월 18일 |
임기 종료2 | 1963년 7월 18일 |
도쿄 올림픽 담당 대신 | 도쿄 올림픽 담당 대신 |
내각3 | 제2차 이케다 제1차 개조 내각 제2차 이케다 제2차 개조 내각 |
임기 시작3 | 1962년 6월 1일 |
임기 종료3 | 1963년 7월 18일 |
수도권 정비위원회 위원장 | 제9대 |
내각4 | 제2차 이케다 제2차 개조 내각 |
임기 시작4 | 1962년 7월 18일 |
임기 종료4 | 1962년 11월 2일 |
자치 대신 | 제5대 자치청 장관 |
내각5 | 제2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 |
임기 시작5 | 1955년 3월 19일 |
임기 종료5 | 1955년 11월 22일 |
기타 직책 | 중의원 의원 |
선거구 | 지바현 제1구 |
당선 횟수 | 14회 |
임기6 | 1928년 2월 21일 - 1945년 12월 18일 1952년 10월 2일 |
임기 종료6 | 1970년 11월 9일 |
자유민주당 부총재 | 총재: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
임기7 | 1964년 7월 1966년 12월 1967년 11월 - 1970년 11월 |
자유민주당 간사장 | 제4대, 제6대 |
총재 | 기시 노부스케 |
임기8 | 1957년 7월 - 1959년 1월 1959년 6월 |
임기 종료8 | 1960년 7월 |
2. 생애
2. 1. 학창 시절부터 정계 입문까지
가와시마 쇼지로는 1890년 지바현 히가시카쓰시카군 교토쿠정(현 이치카와시)에서 태어났다.[3] 출생 직후 어머니를 여의고 니혼바시의 별갑 가게를 운영하는 가와시마 사이지로의 양자로 입적되어 도쿄부 도쿄시 니혼바시구 출신으로 간주되기도 한다.[1]어린 시절부터 미소년으로 알려져, 극장 주인이 양자로 삼고 싶어할 정도였다.[4] 구마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희망했으나, 양부의 가게 일을 돕기 위해 1년간 견습으로 일했다. 그러나 학업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하고, 의붓어머니를 설득하여 간다 중학교 야간 학교와 세이소쿠 영어 학교를 거쳐 센슈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다.[1]
내무성에서 필생으로 일하면서 대학을 졸업한 뒤 내무성 경보국에서 나가타 히데지로 밑에서 일했다.[1] 제1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내무상 고토 신페이의 전화를 받고 입후보자 일람표를 작성하여 고토 신페이에게 높이 평가받았고, 선거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1]
데라우치 내각이 총사직하고 고토 신페이가 물러난 뒤, 나가타 히데지로의 소개로 《도쿄니치니치 신문》 정치부 기자가 되었다.[1] 고 스톱 사건을 보도한 다카이시 신고로의 지도를 받았으며, 하라 내각의 중의원 해산을 특종 보도하기도 했다.[1]
1920년 고토 신페이가 도쿄시장이 되자 나가타 히데지로의 추천으로 도쿄 시장 비서가 되었다. 이후 고토 신페이의 뜻에 따라 도쿄시 상공과장이 되었고, 중앙도매시장 창설에 기여했다.[1]
2. 2. 정계 입문
1924년 제2차 호헌 운동의 여파로 실시된 제1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지바현에서 출마했으나, 게이세이 전철 창업자인 혼다 데이지로와 박빙의 승부 끝에 낙선했다. 1928년 제1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국민적 인기를 끌던 고토 신페이 밑에서 일했던 경력과 대학생 변사를 활용한 유세를 통해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입헌정우회에 입당하여 원내 간사로 발탁되었다.정계 입문 초기에는 모리 가쿠와 함께 행동했고, 모리 사망 후에는 마에다 요네조와 행동을 같이 했다. 마에다는 가와시마에게 "정계에선 욕심을 드러내지 말고 넘버 2로 있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조언을 했고, 가와시마는 이후 넘버 2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1932년 친분이 있던 홋타 마사쓰네가 해군차관이 되자 가와시마는 해군참여관이 되었고, 육군에 대항해 정당 정치 재건을 꾀했다. 1939년 정우회가 분열되자 마에다와 함께 나카지마 지쿠헤이의 혁신파에 속했다. 1942년 익찬 선거에서 비추천으로 당선되었고, 1945년 대일본정치회 정보부장을 역임했다.
2. 3. 전후 정치 활동과 보수합동
일본의 항복 이후 가와시마는 공직 추방을 당했다가 1952년 정계에 복귀했다. 1955년 제2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에서 자치청 장관 겸 행정관리청 장관으로 첫 입각했다. 보수합동을 추진하여 자유민주당 창설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하토야마 이치로의 소선거구제 도입 시도에 관여했다.1957년 기시 노부스케가 총리대신이 되자 가와시마는 자유민주당 간사장이 되었다. 1960년 안보 투쟁 때는 오자와 사에키를 안보특별위원장으로 기용하여 강행 표결을 통해 「일본과 미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 비준을 이끌어냈다.
기시가 사임하고 진행된 총재 선거에서 가와시마는 처음에는 오노 반보쿠를 지지했지만, 오노에게 후보 단일화를 요구한 뒤 이케다 하야토 지지를 선언하여 이케다의 당선에 기여했다. 1962년 10월 기시파가 해산될 때 가와시마계 의원 11명은 후쿠다 다케오를 따르지 않고 교우 클럽을 결성해 파벌이 분열되었다.
1964년 이케다가 3선에 성공하도록 지원한 가와시마는 자유민주당 부총재가 되었다. 이케다가 병으로 사임하고 사토 에이사쿠가 후임 총재가 될 때도 가와시마의 역할이 커 부총재 자리를 유지했다. 이후 가와시마는 잠시 물러났다가 복귀하여 죽을 때까지 부총재를 역임하며 사실상 여당의 2인자가 되었다.
1968년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오키나와 반환에 합의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의 기록을 통해 나중에 알려졌다.
1970년 천식이 악화되어 요양을 했지만, 자민당 총재 선거 준비 과정에서 격무를 보다가 건강을 해쳤다. 가와시마는 사토의 후임으로 후쿠다 다케오 대신 다나카 가쿠에이를 지지했다. 다나카는 사토의 4선을 추진했고, 가와시마는 오키나와 반환을 완수해야 한다며 사토를 설득해 4선을 도왔다.
총재 선거가 끝난 후 1970년 11월 9일 가와시마는 도쿄도 오타구 산노의 자택에서 천식 발작으로 급사했다. 일본무도관에서 자민당장이 거행되었으며, 일본사회당의 미야케 쇼이치가 추도 연설을 했다. 가와시마의 지역구는 소메야 마코토가 물려받았다. 가와시마파는 시나 에쓰사부로가 계승했지만 시나 사후 소멸했다.
2. 4. 자유민주당 간사장과 안보 투쟁
1957년 기시 노부스케가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하자 가와시마는 자유민주당 간사장이 되었다. 1960년 안보 투쟁 때 당내에 동요와 혼란이 일자 이를 억제하고 오자와 사에키를 안보특별위원장으로 기용하여 강행 표결에 나섰다. 자위대의 치안출동도 검토하는 등 과정이 매끄럽진 못했지만 「일본과 미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을 비준하는 데 성공했다. 비준 이후 기시는 중의원 해산을 꾀했지만 당내에서도 반발이 심하자 기시는 이를 단념하고 내각을 총사직했다.2. 5. 자유민주당 부총재와 '넘버 2'의 길
가와시마 쇼지로는 기시 노부스케 내각에서 자유민주당 간사장을 역임하며, 일본과 미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 비준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기시의 퇴진 후, 총재 선거에서 오노 반보쿠를 지지하는 척하다가 이케다 하야토 지지로 돌아서는 노련한 정치 কৌশল을 보였다.1962년 기시파가 해산되자, 가와시마는 자신의 파벌인 교우 클럽(가와시마 파)을 결성했다. 1964년 총재 선거에서 이케다 하야토의 3선에 기여한 후 자유민주당 부총재에 취임했다. 이케다의 병으로 인한 사임 이후 사토 에이사쿠 정권에서도 부총재직을 유지하며 당내 '넘버 2'로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68년 미국과의 오키나와 반환 협상에 깊이 관여했으며, 이 사실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의 기록을 통해 뒤늦게 밝혀졌다.
1970년 천식으로 사망하기 직전까지, 가와시마는 사토 에이사쿠의 후임으로 다나카 가쿠에이를 지지했다. 그는 "기시, 이케다, 사토까지 관료 출신이 내각을 계속 이끌었다. 민심은 관료 출신자들에게 싫증이 나 있다"라며, 당인파 정치인인 다나카가 총재가 되는 길을 닦아주었다.
총재 선거 9일 후인 11월 9일, 가와시마는 기관지 천식 발작으로 급사했다. 일본무도관에서 자민당장이 거행되었으며, 일본사회당 의원 미야케 쇼이치가 추도 연설을 했다.
2. 6. 다나카 가쿠에이 지지와 사망
3. 나리타 공항 문제
가와시마 쇼지로는 제2차 이케다 내각에서 수도권정비위원장을 역임하며 도쿄 국제공항을 대체할 신공항 건설을 추진했다.[11] 초기에는 도쿄만 매립을 통한 공항 건설을 지지하며 지바현 개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11] 1962년 11월 16일, 이케다 총리가 외유 중일 때 임시 총리대신으로서 제2국제공항 건설 방침을 각의결정했다.[11]
그러나 공항 건설 위치를 두고 정부 부처 간 갈등이 심화되었다. 특히 운수성과 건설성 간의 의견 대립이 첨예했는데, 가와시마는 아야베 겐타로 운수상, 고노 이치로 건설상, 도모노 다케토 지바현지사와 4자 협의를 진행하며 중재에 나섰다.[11] 우라야스시, 기사라즈시 등 여러 후보지가 거론되었고, 운수성은 도미사토시를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11] 가와시마는 도미사토시의 농가 이전 문제를 지적하며 내륙 공항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며 도쿄만 매립을 주장했다.[11][13]
1965년 11월 18일, 정부가 도미사토시를 신공항 부지로 내정하자 현지에서 격렬한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14][15] 가와시마는 운수성의 방식으로는 신공항을 건설할 수 없다며 비판하고, 도쿄 국제공항을 축소하고 도쿄만을 매립하여 기사라즈시에 공항을 건설할 것을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궁내청이 궁내청 시모후사 어료목장을 제공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혔고, 운수성과 지바현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16]
운수성은 도미사토시를 고집했지만, 가와시마는 도미사토시의 반대 여론을 이유로 산리즈카를 대안으로 제시했다.[17] 이는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 교통부회와도 논의된 사안이었다.[14][18][19] 결국 나카무라 도라타 운수상이 기사라즈시는 부적합하다고 자민당에 보고하면서 산리즈카에 신공항을 건설하기로 결정되었다.[20]
1966년 6월, 현재의 나리타 국제공항 위치인 나리타시 산리즈카로 건설지를 옮기는 교통부회 안이 결정되었고, 가와시마는 이 결과를 도모노 다케토 지사에게 전달했다.[20] 이 결정은 이후 '산리즈카 투쟁'으로 불리는 격렬한 반대 운동으로 이어졌다.
4. 평가 및 비판
가와시마 쇼지로는 뛰어난 정치 감각과 협상 능력을 바탕으로 자유민주당 내에서 '넘버 2'의 위치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의 정치 활동은 종종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5. 기타
가와시마는 자신의 파벌인 교우 클럽을 운영할 때 경제적 합리성과 효율성을 추구했다. 가입 희망자가 많았지만, 가와시마는 자금 조성이 어렵다는 이유로 파벌 규모를 20명 안팎으로 유지했다. 당시 파벌 구성원 17명 정도당 국무대신 자리 하나를 배분하는 것이 관행이었기에, 20명 정도의 규모는 국무대신 자리를 확보하고 파벌 내에서 경쟁 없이 배분하는 데 효율적이었다. 가와시마는 파벌의 결속을 다지면서도 당내 캐스팅 보트 역할을 확보하여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제2차 이케다 내각 (제1차 개조) 때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겸 행정관리청 장관으로 입각했으며, 1964년 하계 올림픽 담당상도 겸했다.[2]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도카이도 신칸센, 수도고속도로 등의 기반 시설을 구축했고 고도경제성장을 이끌어 이케다가 추진하던 소득 배증 계획의 성공에 공헌했다.[2]
외무성에 파견되어 홍콩 영사를 경험한 사사 아쓰유키는 필리핀에 대한 「조건부 원조」로부터의 킥백이 가와시마의 자금원이었다고 주장했다.[10]
가와시마는 교육계 발전에 기여했다. 모교인 센슈 대학 총장을 맡아 대학 발전에 힘썼으며, 지바 공업 대학 이사장도 역임했다.[26] 중앙학원대학 설립 당시에는 조카인 히라야마 젠지의 요청으로 아비코시의 토지 정리를 하기도 했다.[26] 일본 프로레슬링 링 커미셔너,[26] 일본 학생 탁구 연맹 회장, 일본 볼링 협의회 총재, 일본 소방 협회 회장, 에도 소방 기념회 명예 회장, 에도 화재 소방 존속회 회장, 하타케야마 미도리 후원회 회장 등 교육, 스포츠, 문화, 연예 분야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했다.[26]
5. 1. 파벌 운영
가와시마는 자신의 파벌인 교우 클럽을 운영할 때 경제적 합리성과 효율성을 추구했다. 가입 희망자가 많았지만, 가와시마는 자금 조성이 어렵다는 이유로 파벌 규모를 20명 안팎으로 유지했다. 당시 파벌 구성원 17명 정도당 국무대신 자리 하나를 배분하는 것이 관행이었기에, 20명 정도의 규모는 국무대신 자리를 확보하고 파벌 내에서 경쟁 없이 배분하는 데 효율적이었다. 가와시마는 파벌의 결속을 다지면서도 당내 캐스팅 보트 역할을 확보하여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했다.5. 2. 인프라 정비
제2차 이케다 내각 (제1차 개조) 때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겸 행정관리청 장관으로 입각했으며, 1964년 하계 올림픽 담당상도 겸했다.[2]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도카이도 신칸센, 수도고속도로 등의 기반 시설을 구축했고 고도경제성장을 이끌어 이케다가 추진하던 소득 배증 계획의 성공에 공헌했다.[2]외무성에 파견되어 홍콩 영사를 경험한 사사 아쓰유키는 필리핀에 대한 「조건부 원조」로부터의 킥백이 가와시마의 자금원이었다고 주장했다.[10]
5. 3. 교육 및 문화 활동
가와시마는 교육계 발전에 기여했다. 모교인 센슈 대학 총장을 맡아 대학 발전에 힘썼으며, 지바 공업 대학 이사장도 역임했다.[26] 중앙학원대학 설립 당시에는 조카인 히라야마 젠지의 요청으로 아비코시의 토지 정리를 하기도 했다.[26] 일본 프로레슬링 링 커미셔너,[26] 일본 학생 탁구 연맹 회장, 일본 볼링 협의회 총재, 일본 소방 협회 회장, 에도 소방 기념회 명예 회장, 에도 화재 소방 존속회 회장, 하타케야마 미도리 후원회 회장 등 교육, 스포츠, 문화, 연예 분야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했다.[26]6. 가와시마 쇼지로를 연기한 배우
아사노 다다노부가 2019년 NHK 대하드라마 《이다텐~도쿄 올림픽 이야기~》에서 가와시마 쇼지로를 연기했다.
7. 역대 선거 기록
선거명 | 선거일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제1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24년 | 무소속 | 낙선 | 중선거구제 | |||
제1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28년 | 입헌정우회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제1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30년 | 입헌정우회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제1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32년 | 입헌정우회 | 4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제1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36년 | 입헌정우회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제2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37년 | 입헌정우회 | 4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제2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42년 | 무소속 | 4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제2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52년 | 자유당 | 36,558표 | 12.5%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제2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53년 | 자유당 | 37,079표 | 13.2%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제2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55년 | 일본민주당 | 59,652표 | 20.4%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제2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58년 | 자유민주당 | 90,984표 | 25.4%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제2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60년 | 자유민주당 | 92,175표 | 25.2%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제3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63년 | 자유민주당 | 101,919표 | 24%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제3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66년 | 자유민주당 | 108,388표 | 16.8%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제3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69년 | 자유민주당 | 142,044표 | 19.2%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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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保改定の真実(8)完】岸信介の退陣 佐藤栄作との兄弟酒「ここで二人で死のう」 吉田茂と密かに決めた人事と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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陽気な寝業師 川島正次郎(4)中間派率いて政局動か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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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晩年に、日米関係をめぐる提言「七〇年代日本外交の展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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詰めかける自民首脳 川島氏死去 政財界に波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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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24]
서적
ドキュメント成田空港
東京新聞出版局
1978
[25]
서적
成田空港問題シンポジウム記録集 資料編
1995
[26]
뉴스
川島氏に桐花大綬章
朝日新聞
1970-11-10
[27]
문서
[28]
문서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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