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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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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내전은 1642년부터 1651년까지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일련의 전쟁으로, 왕당파와 의회파 간의 권력 다툼이 주된 원인이었다.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의 왕권신수설 주장에 반발한 의회는 국왕과 대립했고,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하고 독자적인 통치를 시도했다. 권리청원, 주교 전쟁 등을 거치며 갈등이 심화되었고, 결국 1642년 1차 내전이 발발했다. 1차 내전에서 의회파가 승리하고 찰스 1세가 처형된 후 잉글랜드는 공화정인 잉글랜드 연방을 수립했으나, 올리버 크롬웰의 독재로 인해 공화정은 붕괴되었다. 이후 왕정 복고를 통해 찰스 2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의회의 권한이 강화된 의회 군주제가 확립되었다. 잉글랜드 내전은 종교적 자유와 개인의 권리 신장에 기여했으며, 다른 민주주의 혁명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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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위치 정보
기본 정보
분쟁잉글랜드 내전
일부삼왕국 전쟁
날짜1642년 8월 – 1651년 9월
장소그레이트브리튼
결과의회파 승리
찰스 1세 처형
잉글랜드 연방 수립
교전 세력
교전국 1{{plainlist|


교전국 2{{plainlist|


지휘관
지휘관 2|루퍼트 공|윌리엄 캐번디시|마우리츠 공|조지 고링|랠프 홉턴 경|찰스 2세|알렉산더 레슬리 (1648년~1651년)|데이비드 레슬리 (1650년~1651년)}}
사상자
기타 사상자127,000명 비전투 사망자 (민간인 약 40,000명 포함)
전투 이미지
네이즈비 전투
네이즈비 전투, 1645년 6월 14일; 의회파의 승리는 잉글랜드 내전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표시했다.
캠페인 상자
캠페인


2. 용어

잉글랜드 내전은 왕당파에 대항하여 일어난 여러 전쟁 중 잉글랜드 내부의 사건만을 다루는 용어이다. 스코틀랜드 왕국, 아일랜드 왕국과 같은 다른 왕국에서 일어난 전쟁들까지 포괄하여 다룰 때에는 삼왕국 전쟁이라 부른다.[2]

한편, 잉글랜드 내전의 결과 수립된 잉글랜드 연방(잉글랜드 공화국)을 연속적으로 다룰 때는 흔히 '''청교도 혁명''', '''잉글랜드 혁명'''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잉글랜드 내전"이라는 용어는 대부분 단수로 사용되지만, 역사학자들은 종종 이 갈등을 두 개 또는 세 개의 별개의 전쟁으로 구분한다. 이 전쟁들은 잉글랜드에만 국한되지 않았는데, 웨일스(합병되어 잉글랜드 왕국의 일부가 됨)도 동일한 정치적 불안정의 영향을 받았다.[2]

네 개의 국가를 아우르는 전쟁은 삼왕국 전쟁으로 알려져 있으며, 19세기 초, 월터 스콧 경은 이를 "대내전(The Great Civil War)"이라고 언급했다.[3] 1911년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는 일련의 갈등을 "대반란(Great Rebellion)"이라고 불렀다. 일부 역사학자들, 특히 크리스토퍼 힐 (1912~2003)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잉글랜드 혁명"이라는 용어를 선호했다.[4]

3. 배경

3. 1. 군주와 의회의 대립

엘리자베스 1세가 1603년 사망한 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제임스 1세로 즉위하면서 두 왕국은 동군연합을 이루게 되었다.[10]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였고, "국왕은 신에게만 책임이 있고 신하에게는 책임지지 않으며, 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국왕은 곧 법이다."[160]라고 주장하며 잉글랜드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의회와 갈등을 빚었다.[159] 결국 제임스 1세는 자신에 반대하는 의원 7명을 체포하고 의회를 해산했다.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였다; 반 다이크의 그림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은 찰스 1세 역시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의회와 대립했다.[12] 찰스 1세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왕국을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하려는 아버지의 꿈을 이어받고자 했으나,[11] 많은 잉글랜드 의원들은 이러한 움직임이 잉글랜드의 전통을 파괴할 것이라 우려했다. 찰스 1세는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인한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의회를 소집했으나, 의회는 국왕과 계속 갈등했다. 1628년 3월, 찰스 1세가 권리청원에 서명한 후에야 의회는 세금 부과에 동의했다.[159]

찰스 1세는 10년 동안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이른바 "11년간의 폭정"을 펼쳤다.[19] 이 기간 동안 찰스 1세는 재정 부족으로 인해 의회의 동의 없이 함선세를 징수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세수를 확보하려 했다.[16][20] 예를 들어 찰스는 1634년에서 1636년 사이에 영국 내륙 카운티에 영국 해협의 사략선과 해적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왕립 해군 세금을 부과했다.[16] 그러나 많은 이들은 함선세를 의회를 거치지 않은 불법적인 세금으로 간주하였다.[20] 1638년에는 7명의 판사가 왕을 지지하는 판결을 내렸으나, 존 햄프든(John Hampden)이 세금을 내지 않은 것에 대해 5명의 판사가 햄프든을 지지하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16]

찰스 1세는 종교 정책을 통해서도 많은 반감을 샀다. 그는 고교회파(High Anglicanism)를 신봉하고, 1633년 윌리엄 로드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여 교회를 더욱 의례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21][22] 청교도들은 로드가 가톨릭을 재도입했다고 비난했고, 불만을 제기한 이들은 체포되었다.[23]

3. 2. 권리청원

권리청원은 1628년 소집된 잉글랜드 의회가 국왕에게 요구한 청원서이다. 권리청원은 1215년 대헌장에서 국왕과 의회간에 합의된 사항들을 재확인 하면서 군주의 권리를 제한하는 구체적인 목록들을 작성한 것이다.[161]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국왕은 의회의 동의없이 세금을 징수할 수 없다.
  • 개인 집에 병사를 숙박시킬 수 없다.
  • 평화시에 계엄령을 선포할 수 없다.
  • 합법적인 판결을 거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체포, 구금, 재산권 박탈 및 기타 손해를 입을 수 없다.


1625년 찰스 1세가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공주인 앙리에트 마리 드 프랑스(Henrietta Maria)와 결혼한 것에 대해 많은 우려가 제기되었다. 의회는 그에게 전통적인 관세징수권을 그의 통치 기간 전체에 걸쳐 부여하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 임시적인 기반으로만 부여하고 그와 협상하기로 결정했다.[13]

앙리에트 마리 드 프랑스(Henrietta Maria), 피터 릴리(Peter Lely) 작, 1660년


한편 찰스 1세는 프랑스 왕실군에 의해 라 로셸(La Rochelle)에서 포위당한 프랑스 위그노(Huguenots)를 구제하기 위해 원정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찰스 1세가 인기 없는 왕실 총애자 조지 빌리어스(George Villiers), 버킹엄 공작(the Duke of Buckingham)에게 영국군 사령부를 맡긴 것은 그러한 지지를 약화시켰다. 불행히도 찰스 1세와 버킹엄 공작에게 구제 원정은 실패로 끝났고(1627),[14] 이미 왕실 후원 독점에 대해 적대적인 의회는 그에 대한 탄핵 절차를 시작했다.[15]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함으로써 응답했다. 이는 버킹엄 공작을 구했지만, 찰스 1세가 그의 장관들에 대한 의회의 감시를 피하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확증했다.[15]

의회를 해산하고 의회 없이 돈을 모을 수 없게 된 왕은 1628년 새로운 의회를 소집했다. 선출된 의원들 중에는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존 햄프던(John Hampden),[16] 에드워드 코크(Edward Coke)가 포함되었다. 새로운 의회는 권리 청원(Petition of Right)을 작성했고, 찰스 1세는 보조금을 얻기 위한 양보로 이를 받아들였다.[17] 이 청원은 대헌장(Magna Carta)[18]을 언급했지만, 찰스 1세가 1625년 이후 의회의 승인 없이 징수해 온 통행세 및 파운드세(tonnage and poundage) 권한을 부여하지는 않았다. 반대파의 더 많은 활동적인 의원들이 투옥되었고, 이는 분노를 야기했다. 그중 한 명인 존 엘리엇(John Eliot)은 감옥에서 사망하여 의회의 권리를 위한 순교자로 여겨지게 되었다.

3. 3. 주교 전쟁

헨리에타 마리아장로교가 국교인 스코틀랜드에 대해 잉글랜드의 국교인 성공회감사성찬례 전례를 강요하자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162] 흔히 주교 전쟁으로 불리는 이 전쟁의 비용 조달을 위해 찰스 1세는 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소집된 의회는 국민의 불만을 먼저 처리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하고 독자적으로 전쟁을 치르게 되었고, 결국 스코틀랜드에 패배하여 거액의 전쟁 배상금을 부담하게 되었다.[162]

찰스 1세의 독자적인 통치는 그가 스코틀랜드에 동일한 종교 정책을 적용하려고 시도하면서 끝을 맞았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독자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25] 찰스 1세는 영국 전역에 하나의 통일된 교회를 원했고,[26] 1637년 중반에 영국판 기도서의 고교회파적 버전을 스코틀랜드에 도입했다. 이는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다. 에든버러에서 폭동이 일어났는데,[27] 전설에 따르면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에서 제니 게디스에 의해 시작되었을 수 있다. 1638년 2월, 스코틀랜드인들은 왕실 정책에 대한 반대 의견을 국가 성약에 담았다.[28]

1639년 봄, 찰스 1세는 주교 전쟁으로 알려진 반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 국경으로 향했지만,[29] 결정적이지 못한 전투 후 스코틀랜드가 제안한 휴전, 즉 베릭의 평화 조약을 수락했다. 이 휴전은 일시적인 것으로 판명되었고, 1640년 중반에 제2차 전쟁이 이어졌다. 스코틀랜드 군대는 북부에서 찰스 1세의 군대를 물리치고 뉴캐슬어폰타인(Newcastle upon Tyne)을 점령했다.[30] 결국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의 종교에 간섭하지 않기로 동의했다.

3. 4. 찰스 1세의 의회 재소집과 내란

1640년 재소집된 잉글랜드 의회는 국왕의 실정을 비판하며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서 국왕의 편에 섰던 귀족들을 처형하였다.[162] 의회는 헨리에타 마리아에게 3년마다 정기적으로 의회를 개최하고, 의원 동의 없이 의회를 해산할 수 없도록 하는 법안, 그리고 국왕의 임의 징수 선박세 등을 위법으로 인정하도록 강요했다.[162]

의회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계기로 왕당파로 돌아선 스트래퍼드 백작의 처형을 헨리에타 마리아에게 강요했다. 결국 스트래퍼드 백작은 처형되었는데, 처형 직전 "여왕(女王)을 믿지 말라! 그들에게는 아무 구원도 없다."라고 절규했다.[163]

장기 의회는 토마스 벤트워스 스트래퍼드 백작을 대역죄 및 기타 범죄 혐의로 기소했다.[36] 헨리 베인 더 영어는 스트래퍼드가 아일랜드 군대를 부적절하게 사용했다고 주장하며, 그가 아일랜드에서 모집한 군대로 영국을 위협하려 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36] 1641년 4월, 하원은 스트래퍼드 백작에 대한 단죄 법안을 통과시켰고(찬성 204표, 반대 59표, 기권 250표), 상원도 이에 동의했다.[36] 찰스 1세는 스트래퍼드에게 법안에 서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가족의 안전을 우려하여 결국 5월 10일에 서명했다. 스트래퍼드는 이틀 후 처형되었다.

의회는 헨리에타 마리아를 계속 압박했고, 아일랜드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들의 반란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며 탄핵을 요구했다.[162] 1641년 의회가 헨리에타 마리아의 실정을 규탄한 대간주를 채택하자, 헨리에타 마리아는 위협을 느꼈다.[163] 그는 근위병 500명을 거느리고 의회에 진입하여 자신을 비판한 의원들을 체포하고자 했으나, 그들은 이미 도주한 뒤였다.[163] 이 사건으로 의회와 국왕 간의 충돌은 불가피해졌다.[163]

19세기 그림에 묘사된 5명의 의원 체포 시도


1642년 1월 4일, 찰스 1세는 400명의 병사를 이끌고 하원에 들어가 대역죄 혐의로 5명의 의원을 체포하려 했다.[39] 의원들은 국왕이 온다는 것을 알고 도망쳤고, 찰스 1세는 이들을 체포하는 데 실패하여 더 많은 사람들을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3. 5. 예수회의 음모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장)

예수회는 개신교회를 포용하고 가톨릭 억압정책을 폈던 엘리자베스 1세를 제거하려다 1585년 영국에서 추방당했다.[164] 이후에도 계속 영국을 가톨릭 국가로 만들기 위해 왕당파와 손잡고 많은 내란과 반란을 기도했다는 주장이 있다.[164] 《교황 연대기》의 저자 존 줄리어스 노리치는 프랑스 국왕 앙리 3세, 앙리 4세엘리자베스 1세 여왕과 제임스 1세의 암살기도의 뒤에는 예수회가 있었다고 주장했다.[164]

4. 경과

1650년 9월 3일, 던바 전투.[5]

1651년



의회파를 지지한 원두당원의 모습

4. 1. 1차 내전 (1642년 ~ 1646년)

적색 - 왕당파, 녹색 - 의회파]]

2차 내전 중 던바에서 철기군을 이끄는 크롬웰


1642년 헨리에타 마리아는 외국 용병들로 구성된 군대로 우세한 상황에서 내전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645년 의회파의 주력이었던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철기군이 1646년 6월 옥스퍼드를 함락시키자 전세는 의회파로 기울었다. 1647년 패배한 헨리에타 마리아는 스코틀랜드로 피신하였으나 스코틀랜드는 50만 파운드를 받고 그를 의회파에 넘겨주었다.[165] 포로가 된 헨리에타 마리아는 와이트 섬에 유배되었다.[166]

'''주요 전투'''

많은 장교와 베테랑 병사들은 유럽 전쟁, 특히 1568년에 시작된 스페인과 네덜란드 간의 80년 전쟁과 1618년에 시작되어 1648년에 끝난 30년 전쟁의 초기 단계에서 싸웠다.

이 전쟁은 영국에게는 전례 없는 규모였다. 전투 시즌 동안 12만 명에서 15만 명의 병사들이 전장에 있었는데, 이는 30년 전쟁 당시 독일에서 싸운 인구 비율보다 높았다.[5]

주요 전투 전술은 파이크와 머스킷 보병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양측은 서로 마주보고 정렬했으며, 중앙에는 머스킷병 여단이 있었다. 이들은 낡은 화승총을 휴대했는데, 부정확한 무기였지만 최대 300야드 거리에서 치명적일 수 있었다. 머스킷병들은 세 줄로 정렬했고, 첫 번째 줄은 무릎을 꿇고, 두 번째 줄은 웅크리고, 세 번째 줄은 서 있었다. 때때로 병력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한 그룹은 재장전하는 동안 다른 그룹은 사격했다. 머스킷병들 사이에는 파이크를 든 파이크병이 있었는데, 이들의 주요 목적은 머스킷병들을 기병 돌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 보병 양쪽에는 기병이 배치되었고, 우익은 중장이, 좌익은 감찰장이 이끌었다. 그들의 주요 목표는 적의 기병을 격파한 다음, 방향을 돌려 그들의 보병을 제압하는 것이었다.[6]

왕당파 기병들의 말 위에서의 기술과 속도는 많은 초기 승리를 가져왔다. 왕의 기병을 지휘한 루퍼트 공은 네덜란드 군대에서 싸우면서 배운 전술을 사용했는데, 기병들은 최고 속도로 적의 보병에게 돌격하여 충돌 직전에 권총을 발사했다.[6][8]

그러나 올리버 크롬웰과 더 훈련된 신모델군의 도입으로, 훈련된 파이크병들은 자리를 지킬 수 있었고, 이는 파괴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왕당파 기병들은 초기 돌격 후 개별 목표를 추격하는 경향이 있어, 그들의 병력은 흩어지고 지쳐 있었던 반면, 크롬웰의 기병은 더 느렸지만 더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6] 하나의 부대로 작전하도록 훈련된 그들은 많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9]

존 조셉 바커(John Joseph Barker)가 1886년에 그린 '엑서터 길드홀 밖에 집결한 기병대(Cavalier Troops Mustering outside the Guildhall, Exeter)'. 이 유화는 엑서터 길드홀 밖 어두운 이미지 속 기병대를 묘사하고 있다. 왕립 앨버트 기념 박물관 소장품(93/1978x)에서 가져옴


올리버 크롬웰은 1653년 보호령주가 되었습니다


라인 공 루퍼트


1644년 7월 마스턴 무어 전투는 의회파가 승리했습니다


알렉산더 레슬리, 리븐 백작, 코브넌터 군대의 총사령관이자 마스턴 무어 전투의 승자 중 한 명

  • 1642년
  • * 7월 10일: (왕당군과 의회군의 첫 번째 전투)
  • * 8월 10일: (의회파 승리)
  • * 9월 23일: (왕당파 승리)
  • * 10월 23일: 에지힐 전투 (승패 불명)[153]
  • * 11월 1일:
  • * 11월 12일:
  • * 11월 13일:
  • 1643년
  • * 1월 19일:
  • * 1월 23일:
  • * 3월 13일:
  • * 3월 19일:
  • * 3월 30일:
  • * 4월 3일:
  • * 4월 13일:
  • * 4월 25일:
  • * 5월 16일:
  • * 6월 18일:
  • * 6월 30일: 애드월턴 무어 전투
  • * 7월 5일:
  • * 7월 13일:
  • * 7월 26일:
  • * 7월 28일:
  • * 8월 3일:
  • * 9월 18일:
  • * 9월 20일:
  • * 10월 9일:
  • *
  • * 10월 11일:
  • * 11월 4일:
  • * 11월 6일:
  • * 12월 13일:
  • * 12월 26일:


1642년 1월 초, 하원 의원 5명을 체포하려다 실패한 지 며칠 후, 찰스 1세는 자신의 가족과 수행원의 안전을 우려하여 런던 지역을 떠나 북쪽으로 향했다.[42]

여름 초까지 왕과 장기 의회 간의 서신을 통한 추가적인 협상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1642년 6월 1일[43] 상원과 하원은 19개 항 조항으로 알려진 제안 목록을 승인했다. 이 요구에서 의회는 왕국의 통치에 있어 더 큰 권력을 추구했다. 그달 말까지 왕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여름이 진행됨에 따라 도시들은 한쪽 세력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예를 들어, 조지 고링이 지휘하는 포츠머스의 수비대는 왕을 지지했다.[44] 그러나 찰스 1세가 이전 스코틀랜드 원정에서 사용되었던 킹스턴어폰헐의 무기고에서 무기를 확보하려고 했을 때, 1월 의회가 임명한 군사 총독인 존 호탐 경은 찰스 1세가 도시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했고,[45] 찰스 1세가 나중에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돌아왔을 때, 호탐은 그들을 몰아냈습니다.[46] 찰스 1세는 호탐 경을 반역자로 체포하라는 영장을 발부했지만, 이를 집행할 능력이 없었다. 여름 내내 긴장이 고조되었고 여러 곳에서 난투극이 벌어졌으며, 맨체스터에서 처음으로 이 갈등으로 인한 사망자가 발생했다.[46][47]

갈등 초기, 왕국 대부분은 중립을 유지했지만, 영국 해군과 대부분의 영국 도시들은 의회를 지지했고, 왕은 농촌 지역에서 두드러진 지지를 받았다. 전쟁은 빠르게 확산되어 결국 사회의 모든 계층에 영향을 미쳤다. 많은 지역이 중립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일부는 양측 군대의 극단적인 행위로부터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클럽맨 부대를 결성했지만,[48] 대부분은 왕과 의회 모두를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편, 왕과 그의 지지자들은 교회와 국가의 전통적인 통치를 위해 싸웠다. 다른 한편, 대부분의 의회파는 처음에 교회와 국가의 전통적인 정부 균형을 방어하기 위해 무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왕이 조지 빌리어스 버킹엄 공작과 같은 고문으로부터 받은 잘못된 조언과 그의 개인 통치("11년간의 폭정") 기간 동안 이 균형이 훼손되었다고 생각했다. 의회 의원들의 견해는 왕에 대한 의심 없는 지지(내전 중 한때 하원과 상원의 더 많은 의원들이 옥스퍼드의 왕의 의회에 모였습니다. 웨스트민스터보다)부터 종교적 자유의 주요 개혁과 국가 차원의 권력 재분배를 추구하는 급진적인 의원들까지 다양했습니다.

헐에서의 실패 후, 찰스 1세는 노팅엄으로 이동하여 1642년 8월 22일 왕실 깃발을 게양했다.[49] 당시 찰스 1세는 약 2,000명의 기병과 소수의 요크셔 보병을 거느리고 있었고, 군대 소집 위원회의 고풍스러운 시스템을 사용하여[50] 그의 지지자들은 깃발 주위에 더 큰 군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찰스 1세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먼저 스태퍼드로, 그다음 슈루즈베리로 이동했다. 그의 대의에 대한 지지가 세번 강 계곡 지역과 북웨일즈에서 특히 강력했기 때문이다.[51] 웰링턴을 통과하면서 그는 "웰링턴 선언"으로 알려지게 된 선언에서 "프로테스탄트 종교, 영국의 법률 및 의회의 자유"를 옹호할 것이라고 선언했다.[52]

왕에 반대하는 의회파는 전쟁 전 기간 동안 수동적이지 않았다. 헐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신의 대의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임명하여 전략적 도시들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6월 9일 그들은 1만 명의 자원봉사자로 구성된 군대를 창설하기로 투표했고, 3일 후 로버트 드베르 에식스 백작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53] 그는 "그 주변에 있는 필사적인 사람들의 손에서 폐하의 인물과 웨일스 공주와 요크 공작(제임스 2세)의 인물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54] 의회가 임명한 주지사들은 민병대 조례를 사용하여 민병대가 에식스 백작의 군대에 합류하도록 명령했다.[55]

왕이 노팅엄에서 깃발을 게양한 지 2주 후, 에식스 백작은 그의 군대를 노샘프턴으로 북쪽으로 이끌었다.[56] 길을 따라 지지를 얻으면서(올리버 크롬웰이 창설하고 지휘하는 헌팅던셔 기병대 분견대 포함). 9월 중순까지 에식스 백작의 병력은 2만 1천 명의 보병과 4,200명의 기병과 용기병으로 증가했다. 9월 14일 그는 그의 군대를 코벤트리로, 그다음 코츠월드 북쪽으로 이동했다.[58] 이 전략은 왕당파와 런던 사이에 그의 군대를 배치했다. 양쪽 군대의 규모가 수만 명에 달하고 그들 사이에 워스터셔만 있었기 때문에 기병 정찰대가 조만간 만날 것이 불가피했다. 이는 내전의 첫 번째 주요 작은 전투에서 발생했다. 왕의 독일 조카이자 전쟁의 뛰어난 기병 사령관 중 한 명인 라인 공 루퍼트[59] 지휘하에 약 1,000명의 왕당파 기병대가 워스터 근처 템즈 강을 가로지르는 파윅 브리지 전투에서 존 브라운 대령이 이끄는 의회파 기병대 분견대를 격파했다.[60]

루퍼트는 슈루즈베리로 철수했고, 전쟁 평의회에서 두 가지 행동 방침을 논의했다. 즉, 워스터 근처 에식스 백작의 새로운 위치로 진격할지, 아니면 이제 열린 길로 런던으로 진격할지에 대한 논의였다. 평의회는 런던으로 가는 길을 결정했지만 전투를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왕당파 장군들은 에식스 백작이 너무 강해지기 전에 그와 싸우기를 원했고, 양측의 기질 때문에 결정을 연기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클래런던 백작의 말에 따르면, "에식스 백작이 그들의 길을 막을 것이 거의 확실했기 때문에 런던으로 진군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여겨졌다." 따라서 군대는 10월 12일 슈루즈베리에서 출발하여 적보다 이틀 앞서 남동쪽으로 이동했다. 이는 에식스 백작이 그들을 가로막기 위해 이동하도록 하는 데 원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1642년 10월 23일 에지힐 전투에서 벌어진 전쟁의 첫 번째 결전은 결론이 나지 않았고, 왕당파와 의회파 모두 승리를 주장했다.[61] 두 번째 야전 작전인 턴햄 그린 전투에서 찰스 1세는 옥스퍼드로 철수해야 했다.[62] 옥스퍼드는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 그의 근거지가 되었다.[63]

1643년 왕당파는 애드월턴 무어 전투에서 승리하여 요크셔 대부분을 장악했다.[64] 미들랜즈에서 존 겔 경 지휘하의 의회파는 원래 사령관인 브룩 경이 사망한 후 대성당 도시인 리치필드를 포위하고 점령했다.[65] 이 부대는 그 후 윌리엄 브레레톤 경과 합류하여 결론이 나지 않은 홉턴 히스 전투(1643년 3월 19일)에서 싸웠는데, 이 전투에서 왕당파 사령관인 노샘프턴 백작이 사망했다.[65] 존 햄프던은 찰그로브 필드 전투(1643년 6월 18일)에서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16] 영국 서부의 랜즈다운 전투와 라운드웨이 다운 전투에서의 이후 전투에서도 왕당파가 승리했다.[66] 루퍼트 공은 그 후 브리스톨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같은 해 크롬웰은 그의 "아이언사이드" 부대를 편성했는데, 이는 그의 군사 지도력 능력을 보여주는 훈련된 부대였다. 그들의 도움으로 그는 7월 게인즈버러 전투에서 승리했다.[67]

1643년 8월 7일부터 9일까지 런던에서는 전쟁 찬반을 둘러싼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그들은 웨스트민스터에서 시위를 했습니다. 폭력적인 반전 시위를 벌인 런던 여성들은 진압되었고, 여성들은 구타당했고 실탄이 발사되어 여러 명이 사망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브라이드웰 등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68] 8월 사건 이후, 영국에 있는 베네치아 대사는 도제에게 런던 정부가 이의 제기를 억압하기 위해 상당한 조치를 취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전쟁 초반에는 왕당파가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전환점은 1643년 여름과 가을에 에식스 백작의 군대가 왕이 글로스터 공성전을 해제하도록 강요했고[69] 그 후 퍼스트 뉴베리 전투(1643년 9월 20일)[70]에서 왕당파를 제압하고 런던으로 개선했습니다. 맨체스터 백작이 이끄는 의회파는 노퍽 주 킹스린 항구를 포위했습니다. 이곳은 해몬 레스트레인지 경 지휘하에 9월까지 버텼습니다.[71] 다른 부대는 윈스비 전투에서 승리하여[72] 링컨을 장악했습니다. 수적으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정치적 책략으로 찰스 1세는 아일랜드에서 휴전 협상을 벌여 영국군을 해방시켜 잉글랜드의 왕당파 편에서 싸우도록 했고,[73] 의회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원과 협조에 대한 대가로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양보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도움을 받은 의회는 마스턴 무어 전투(1644년 7월 2일)[74]에서 승리하여 요크와 잉글랜드 북부를 장악했다.[75] 크롬웰의 행동은 결정적인 것으로 판명되었고,[76] 그가 정치적 지도자이자 중요한 군사 지도자로서의 잠재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콘월의 로스트위슬 전투에서의 패배는 영국 남서부의 의회에게 심각한 역전을 의미했습니다.[77] 세컨드 뉴베리 전투(1644년 10월 27일) 주변에서의 이후 전투는 전술적으로 결정적이지 않았지만 전략적으로 의회에 또 다른 제동을 걸었습니다.[78]

1645년 의회는 전쟁을 끝까지 싸울 결의를 재확인했습니다. 의회는 양원 의원 모두가 자신의 지휘권을 내려놓고 주요 병력을 새로운 모범군으로 재편성하는 자기 부인 조례를 통과시켰습니다. 이 군대는 토마스 페어팩스 경의 지휘를 받았고, 크롬웰은 그의 부사령관이자 기병 중장이었습니다.[79] 두 번의 결정적인 교전 – 6월 14일 네이즈비 전투와 7월 10일 랭포트 전투 –에서 의회파는 찰스 1세의 군대를 효과적으로 파괴했습니다.[80]

찰스 1세는 남은 영국 영토에서 미들랜즈를 통합하여 안정적인 지지 기반을 회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옥스퍼드와 노팅햄셔의 뉴어크온트렌트 사이의 축을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도시들은 요새가 되었고 다른 도시들보다 그에게 더 신뢰할 수 있는 충성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그들 사이에 있는 레스터를 점령했지만, 그의 자원이 고갈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646년 5월 찰스 1세의 옥스퍼드에서 뉴어크 근처 스코틀랜드 군 진영으로 이동에서 그는 노팅햄셔 사우스웰에서 장로파 스코틀랜드 군대의 보호를 구했습니다.[81] 찰스 1세는 결국 스코틀랜드인들에 의해 영국 의회에 넘겨져 투옥되었습니다.[82] 이것은 잉글랜드 내전 1차의 종식을 알렸습니다.

1643년에 들어서면서 대세는 왕당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고, 왕당군은 여러 차례 런던을 노리는 상황에 있었다. 의회군이 열세였던 이유는 그 편성에 있었다고 한다. 왕당군은 공식적으로 영장이 발부되어 소집되었고, 훈련과 전투 경험을 쌓은 사람들도 많았던 반면, 의회군은 민병대를 주력으로 하는 혼성 부대였기 때문이다. 주와 도시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민병대는 자신의 고향을 지키는 데는 열심이었지만, 지방 의식이 강하여 국가 전체의 일이 되면 사기를 높이 유지할 수 없었다. 또한, 장비, 훈련, 실전 경험에 있어서 귀족들이 이끄는 왕당군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1643년 6월 30일, 애드월턴 무어 전투에서 토마스 페어팩스 군이 패주하는 등, 의회군의 약체가 두드러졌다. 후에 크롬웰은 당시를 회상하며, 민병대의 혼성 부대였던 의회군을 “허약한 하인이나 시중이나 그런 무리들”이라고 회상하고 있다.

좋지 않은 전황에 의회파는 군대의 재편을 서둘렀다. 동부 여러 주가 연합하여 만든 동부 연합군을 비롯하여 서부 연합군 등도 편성되면서 의회군의 조직화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재편에 의해 의회군이 즉시 강해진 것은 아니었고, 군 내외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의회 내 의견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과 혁명의 목표 방향이 없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한편 의회군은 열세인 전황과 더딘 군대 재편 상황으로 인해 어떻게든 스코틀랜드 국민맹약(맹약파)의 지원을 얻어낼 필요가 절실했다. 잉글랜드의 장로교 도입을 주장하는 스코틀랜드 측 맹약파가 준비한 문서에 대해, 협상에 나선 헨리 베인 등은 약간의 수정을 가한 애매한 표현의 성명서를 제안했다. 즉, 서두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해석의 폭을 넓혀 스코틀랜드와의 합의를 이끌어냈다(엄숙한 동맹과 계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 측 종교 회의(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분쟁이 있었지만, “살인자가 병자에게 달려들었을 때, 병자는 약을 계속 먹고 살해당할 것인가, 아니면 약을 버리고 무기를 들고 맞설 것인가”라는 존 핌의 연설도 효과를 발휘하여 1643년 9월 2일에 잉글랜드 측에서도 어떻게든 합의를 이끌어냈다.

1644년 1월 9일, 동맹파는 약속대로 원군(코브넌터)을 파병하여 요크 주변에서 국왕파의 뉴캐슬 공작의 군대를 위협하게 되었다.

1644년 7월 2일, 마스턴 무어 전투에서는 동부 연합군과 더욱 합류하여 의회군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크롬웰은 의회군 내에서 단숨에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크롬웰의 기병대는 이미 철기대(鐵騎隊)라 불리며 명성을 떨쳤지만, 그것만으로는 왕당군(王黨軍)을 격파할 수 없었다. 각 지역에서는 여전히 왕당파가 우세했고, 재편된 의회군(議會軍)조차도 제각각 행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더욱이 의회 내부에서도 평화파(장로파)와 개혁파(독립파)의 대립이 격화되어 비관적인 분위기마저 흐르기 시작했다.[154]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의회파는 여전히 “우합지졸(烏合之衆)”이었으며, 결속을 강화할 필요성에 몰려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군 지휘관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평화파(장로파)[155]에 의해 왕당파와의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협상이 결렬되자, 개혁파(독립파)가 의회 내에서 세력을 얻어, 철기대의 조직 체계를 군 전체로 확대하여 단결을 강화하는 “뉴 모델 조례(New Model Ordinance)”, 무능한 지휘관(의원을 겸직하는 지휘관)을 군에서 배제하는 사퇴 조례(辭退條例)을 통과시켰다. 이렇게 탄생한 뉴 모델 군(New Model Army)의 통일적인 행동으로 전황은 유리하게 전개되게 된다.

1645년 6월 14일, 네즈비 전투에서 왕당군 주력을 궤멸시켰다. 이후 1년에 걸쳐 의회군은 각지를 평정했다.

1646년 5월, .

찰스 1세는 자신의 패배를 깨닫고 다시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이때 의회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독립파는 평화 제안을 일축했고, 찰스 1세는 독립파와 소원해지고 있던 스코틀랜드로 탈출했다. 그러나 결국 왕의 신변은 잉글랜드로 인도되었고, 핵심을 잃은 왕당군은 의회군에 항복했으며, 1647년 1월에 내전은 일단 막을 내렸다.

4. 1. 1. 주요 전투

많은 장교와 베테랑 병사들은 유럽 전쟁, 특히 1568년에 시작된 스페인과 네덜란드 간의 80년 전쟁과 1618년에 시작되어 1648년에 끝난 30년 전쟁의 초기 단계에서 싸웠다.

이 전쟁은 영국에게는 전례 없는 규모였다. 전투 시즌 동안 12만 명에서 15만 명의 병사들이 전장에 있었는데, 이는 30년 전쟁 당시 독일에서 싸운 인구 비율보다 높았다.[5]

주요 전투 전술은 파이크와 머스킷 보병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양측은 서로 마주보고 정렬했으며, 중앙에는 머스킷병 여단이 있었다. 이들은 낡은 화승총을 휴대했는데, 부정확한 무기였지만 최대 300야드 거리에서 치명적일 수 있었다. 머스킷병들은 세 줄로 정렬했고, 첫 번째 줄은 무릎을 꿇고, 두 번째 줄은 웅크리고, 세 번째 줄은 서 있었다. 때때로 병력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한 그룹은 재장전하는 동안 다른 그룹은 사격했다. 머스킷병들 사이에는 파이크를 든 파이크병이 있었는데, 이들의 주요 목적은 머스킷병들을 기병 돌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 보병 양쪽에는 기병이 배치되었고, 우익은 중장이, 좌익은 감찰장이 이끌었다. 그들의 주요 목표는 적의 기병을 격파한 다음, 방향을 돌려 그들의 보병을 제압하는 것이었다.[6]

왕당파 기병들의 말 위에서의 기술과 속도는 많은 초기 승리를 가져왔다. 왕의 기병을 지휘한 루퍼트 공은 네덜란드 군대에서 싸우면서 배운 전술을 사용했는데, 기병들은 최고 속도로 적의 보병에게 돌격하여 충돌 직전에 권총을 발사했다.[6][8]

그러나 올리버 크롬웰과 더 훈련된 신모델군의 도입으로, 훈련된 파이크병들은 자리를 지킬 수 있었고, 이는 파괴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왕당파 기병들은 초기 돌격 후 개별 목표를 추격하는 경향이 있어, 그들의 병력은 흩어지고 지쳐 있었던 반면, 크롬웰의 기병은 더 느렸지만 더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6] 하나의 부대로 작전하도록 훈련된 그들은 많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9]

1642년부터 1645년까지 왕당파(빨강)와 의회파(황록색)가 점령한 영토 지도

  • 1642년
  • * 7월 10일: (왕당군과 의회군의 첫 번째 전투)
  • * 8월 10일: (의회파 승리)
  • * 9월 23일: (왕당파 승리)
  • * 10월 23일: 에지힐 전투 (승패 불명)[153]
  • * 11월 1일:
  • * 11월 12일:
  • * 11월 13일:
  • 1643년
  • * 1월 19일:
  • * 1월 23일:
  • * 3월 13일:
  • * 3월 19일:
  • * 3월 30일:
  • * 4월 3일:
  • * 4월 13일:
  • * 4월 25일:
  • * 5월 16일:
  • * 6월 18일:
  • * 6월 30일: 애드월턴 무어 전투
  • * 7월 5일:
  • * 7월 13일:
  • * 7월 26일:
  • * 7월 28일:
  • * 8월 3일:
  • * 9월 18일:
  • * 9월 20일:
  • * 10월 9일:
  • *
  • * 10월 11일:
  • * 11월 4일:
  • * 11월 6일:
  • * 12월 13일:
  • * 12월 26일:

4. 2. 2차 내전 (1648년 ~ 1649년)

"그리고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언제였습니까?" by 윌리엄 프레더릭 예임스. 1878년에 그린 이 유화 그림은 잉글랜드 내전 당시 가상의 왕당파 가정의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의회파가 집을 장악하고 아들에게 왕당파 아버지에 대해 질문합니다. 장면 중앙에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는 군복과 주황색 띠를 두르고 있으므로 근본주의자 장교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많은 장교와 베테랑 병사들은 80년 전쟁과 30년 전쟁과 같은 유럽 전쟁에서 싸웠다.[5] 이 전쟁은 영국에게는 전례 없는 규모였다. 전투 시즌 동안 12만 명에서 15만 명의 병사들이 전장에 있었는데, 이는 30년 전쟁 당시 독일에서 싸운 인구 비율보다 높았다.[5]

주요 전투 전술은 파이크와 머스킷 보병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양측은 서로 마주보고 정렬했으며, 중앙에는 머스킷병 여단이 있었다. 이들은 낡은 화승총을 휴대했는데, 부정확한 무기였지만 최대 300야드 거리에서 치명적일 수 있었다. 머스킷병들은 세 줄로 정렬했고, 첫 번째 줄은 무릎을 꿇고, 두 번째 줄은 웅크리고, 세 번째 줄은 서 있었다. 때때로 병력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한 그룹은 재장전하는 동안 다른 그룹은 사격했다. 머스킷병들 사이에는 파이크를 든 파이크병이 있었는데, 이들의 주요 목적은 머스킷병들을 기병 돌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 3.7미터에서 5.5미터 길이의 파이크를 사용하였다. 보병 양쪽에는 기병이 배치되었고, 우익은 중장이, 좌익은 감찰장이 이끌었다. 그들의 주요 목표는 적의 기병을 격파한 다음, 방향을 돌려 그들의 보병을 제압하는 것이었다.[6][7][8]

왕당파 기병들의 말 위에서의 기술과 속도는 많은 초기 승리를 가져왔다. 왕의 기병을 지휘한 루퍼트 공은 네덜란드 군대에서 싸우면서 배운 전술을 사용했는데, 기병들은 최고 속도로 적의 보병에게 돌격하여 충돌 직전에 권총을 발사했다.[6][8]

그러나 올리버 크롬웰과 더 훈련된 신모델군의 도입으로, 훈련된 파이크병들은 자리를 지킬 수 있었고, 이는 파괴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왕당파 기병들은 초기 돌격 후 개별 목표를 추격하는 경향이 있어, 그들의 병력은 흩어지고 지쳐 있었던 반면, 크롬웰의 기병은 더 느렸지만 더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6] 하나의 부대로 작전하도록 훈련된 그들은 많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9]

1648년 여름 잉글랜드 전역에서 일련의 왕당파 봉기와 스코틀랜드 침공이 발생했다. 의회에 충성하는 세력[85]은 작은 충돌 이후 잉글랜드의 대부분을 진압했지만, 켄트, 에식스, 컴벌랜드의 봉기, 웨일스의 반란, 스코틀랜드 침공은 전투와 장기간의 포위 공격을 수반했다.[83]

1649년 봄, 웨일스의 미지급 의회파 군대가 편을 바꿨다. 토마스 호튼 대령은 세인트 패건 전투 (1648년 5월 8일)에서 왕당파 반군을 물리쳤고,[86] 반란 지도자들은 두 달간의 장기간 펨브로크 포위 공격 후 1648년 7월 11일 크롬웰에게 항복했다.[87] 토마스 페어팩스 경은 1648년 6월 1일 메이드스톤 전투에서 켄트의 왕당파 봉기를 진압했다. 메이드스톤에서의 성공과 켄트의 평정 후 페어팩스는 북쪽으로 향해 에식스를 공격했다. 에식스에서는 찰스 루카스 경의 지휘 아래 왕당파가 대거 무기를 들었다. 페어팩스는 곧 적을 콜체스터로 몰아넣었지만, 도시에 대한 그의 첫 번째 공격은 격퇴되었고 그는 장기간의 포위 공격을 해야 했다.[88]

잉글랜드 북부에서는 존 람베르트 소장이 여러 왕당파 봉기, 특히 마마듀크 랭데일 경의 봉기를 성공적으로 진압했다.[89] 람베르트의 성공 덕분에 스코틀랜드 사령관인 해밀턴 공작은 왕당파 친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침공에서 카슬라일을 통해 서쪽 경로를 취해야 했다.[90] 크롬웰 지휘하의 의회파는 프레스턴 전투 (1648년 8월 17일~8월 19일)에서 스코틀랜드군과 교전했다. 전투는 대부분 랭커셔주 프레스턴 근처 월턴-르-데일에서 벌어졌고, 크롬웰 군대가 해밀턴이 지휘하는 왕당파와 스코틀랜드군을 물리치는 승리로 끝났다.[90] 이 승리는 잉글랜드 내전(2차)의 종식을 알렸다.

제1차 내전에서 싸웠던 거의 모든 왕당파는 의회에 대해 무기를 들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애스트리 경과 같은 많은 사람들은 두 번째 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 따라서 제2차 잉글랜드 내전에서 승리한 사람들은 다시 전쟁을 가져온 사람들에게 자비를 보이지 않았다. 콜체스터 항복 저녁에 의회파는 찰스 루카스 경과 조지 리슬 경을 사살했다.[91] 의회 당국은 웨일스 반군의 지도자 로랜드 라프아른 소장, 존 포이어 대령, 라이스 파월 대령을 사형 선고했지만 추첨으로 포이어만 처형했다(1649년 4월 25일).[92] 의회의 손에 넘어간 5명의 저명한 왕당파 귀족 중 3명(해밀턴 공작, 홀랜드 백작, 그리고 캐펠 경)이 1649년 3월 9일 웨스트민스터에서 참수되었다.[93]

4. 2. 1. 주요 전투

많은 장교와 베테랑 병사들은 80년 전쟁과 30년 전쟁과 같은 유럽 전쟁에서 싸웠다.[5] 이 전쟁은 영국에게는 전례 없는 규모였다. 전투 시즌 동안 12만 명에서 15만 명의 병사들이 전장에 있었는데, 이는 30년 전쟁 당시 독일에서 싸운 인구 비율보다 높았다.[5]

주요 전투 전술은 파이크와 머스킷 보병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양측은 서로 마주보고 정렬했으며, 중앙에는 머스킷병 여단이 있었다. 이들은 낡은 화승총을 휴대했는데, 부정확한 무기였지만 최대 300야드 거리에서 치명적일 수 있었다. 머스킷병들은 세 줄로 정렬했고, 첫 번째 줄은 무릎을 꿇고, 두 번째 줄은 웅크리고, 세 번째 줄은 서 있었다. 때때로 병력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한 그룹은 재장전하는 동안 다른 그룹은 사격했다. 머스킷병들 사이에는 파이크를 든 파이크병이 있었는데, 이들의 주요 목적은 머스킷병들을 기병 돌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 3.7미터에서 5.5미터 길이의 파이크를 사용하였다. 보병 양쪽에는 기병이 배치되었고, 우익은 중장이, 좌익은 감찰장이 이끌었다. 그들의 주요 목표는 적의 기병을 격파한 다음, 방향을 돌려 그들의 보병을 제압하는 것이었다.[6][7][8]

왕당파 기병들의 말 위에서의 기술과 속도는 많은 초기 승리를 가져왔다. 왕의 기병을 지휘한 루퍼트 공은 네덜란드 군대에서 싸우면서 배운 전술을 사용했는데, 기병들은 최고 속도로 적의 보병에게 돌격하여 충돌 직전에 권총을 발사했다.[6][8]

그러나 올리버 크롬웰과 더 훈련된 신모델군의 도입으로, 훈련된 파이크병들은 자리를 지킬 수 있었고, 이는 파괴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왕당파 기병들은 초기 돌격 후 개별 목표를 추격하는 경향이 있어, 그들의 병력은 흩어지고 지쳐 있었던 반면, 크롬웰의 기병은 더 느렸지만 더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6] 하나의 부대로 작전하도록 훈련된 그들은 많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9]

1648년 여름 잉글랜드 전역에서 일련의 왕당파 봉기와 스코틀랜드 침공이 발생했다. 의회에 충성하는 세력[85]은 작은 충돌 이후 잉글랜드의 대부분을 진압했지만, 켄트, 에식스, 컴벌랜드의 봉기, 웨일스의 반란, 스코틀랜드 침공은 전투와 장기간의 포위 공격을 수반했다.[83]

1649년 봄, 웨일스의 미지급 의회파 군대가 편을 바꿨다. 토마스 호튼 대령은 세인트 패건 전투(5월 8일)에서 왕당파 반군을 물리쳤고[86] 반란 지도자들은 두 달간의 장기간 펨브로크 포위 공격 후 7월 11일 크롬웰에게 항복했다.[87] 토마스 페어팩스 경은 6월 1일 메이드스톤 전투에서 켄트의 왕당파 봉기를 진압했다. 메이드스톤에서의 성공과 켄트의 평정 후 페어팩스는 북쪽으로 향해 에식스를 공격했다. 에식스에서는 찰스 루카스 경의 지휘 아래 왕당파가 대거 무기를 들었다. 페어팩스는 곧 적을 콜체스터로 몰아넣었지만, 도시에 대한 그의 첫 번째 공격은 격퇴되었고 그는 장기간의 포위 공격을 해야 했다.[88]

잉글랜드 북부에서는 존 람베르트 소장이 여러 왕당파 봉기, 특히 마마듀크 랭데일 경의 봉기를 성공적으로 진압했다.[89] 람베르트의 성공 덕분에 스코틀랜드 사령관인 해밀턴 공작은 왕당파 친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침공에서 카슬라일을 통해 서쪽 경로를 취해야 했다.[90] 크롬웰 지휘하의 의회파는 프레스턴 전투(8월 17~19일)에서 스코틀랜드군과 교전했다. 전투는 대부분 랭커셔주 프레스턴 근처 월턴-르-데일에서 벌어졌고, 크롬웰 군대가 해밀턴이 지휘하는 왕당파와 스코틀랜드군을 물리치는 승리로 끝났다.[90] 이 승리는 잉글랜드 내전(2차)의 종식을 알렸다.

제1차 내전에서 싸웠던 거의 모든 왕당파는 의회에 대해 무기를 들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애스트리 경과 같은 많은 사람들은 두 번째 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 따라서 제2차 잉글랜드 내전에서 승리한 사람들은 다시 전쟁을 가져온 사람들에게 자비를 보이지 않았다. 콜체스터 항복 저녁에 의회파는 찰스 루카스 경과 조지 리슬 경을 사살했다.[91] 의회 당국은 웨일스 반군의 지도자 로랜드 라프아른 소장, 존 포이어 대령, 라이스 파월 대령을 사형 선고했지만 추첨으로 포이어만 처형했다(1649년 4월 25일).[92] 의회의 손에 넘어간 5명의 저명한 왕당파 귀족 중 3명(해밀턴 공작, 홀랜드 백작, 그리고 캐펠 경)이 3월 9일 웨스트민스터에서 참수되었다.[93]

4. 3. 청교도

청교도는 종교개혁의 순수한 사상인 '''전통 복음주의'''를 따르던 브리튼섬개신교 신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성서주의자로, 인위적인 전통에 반대하고 성서를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원천으로 여겼다. 청교도는 칼뱅주의의 영향으로 부의 축적을 인정하는 청부론을 따랐으며, 잉글랜드 의회파의 중요 구성원이었다.

잉글랜드 내전 당시, 장 칼뱅(John Calvin)의 장로교 사상은 존 녹스(John Knox)에 의해 스코틀랜드에 도입되었고, 이는 평신도 장로 위원회가 교회 정부에서 상당한 목소리를 갖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교회론은 의회와 국왕 간의 투쟁과 궤를 같이했으며, 잉글랜드 교회의 청교도들은 주교 직책을 폐지하고 교회를 장로교 방식으로 재구성하려 했다.

제임스 1세는 "주교 없이는 왕도 없다"는 슬로건을 채택하여 주교의 권위를 왕권과 연결시켰고, 윌리엄 로드(William Laud)를 캔터베리 대주교(Archbishop of Canterbury)로 임명하여 장로교 운동을 탄압하고 공동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 시행을 강요했다. 로드는 1645년 처형되었고, 찰스 1세의 스코틀랜드 주교제 강요는 주교 전쟁(Bishops' Wars)을 야기했다.

연방과 보호령(the Protectorate) 시기 청교도의 권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1646년 잉글랜드 교회에서 주교제가 공식 폐지되었다. 잉글랜드 교회는 왕정 복고까지 장로교로 유지되었다.

군사적 대립이 완화되자 의회 내에서 장로파와 독립파의 대립이 재연되었고, 이는 의회와 군의 대립으로 확산되었다. 장로파는 장로교회 체제와 교회 질서 유지를, 분리파는 신앙의 개인 자율성을 주장했다. 독립파는 정치적으로는 장로파와, 종교적으로는 분리파와 장로파의 중간에 있었다. 의회의 군대 해산 시도 등으로 병사들은 신앙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며 반발했고, 레벨러가 세력을 키워나갔다.

1647년 독립파와 레벨러는 각각 『헌의안』, 『인민협약』을 작성했고, 퍼트니 논쟁에서 헨리 아이어턴과 크롬웰에 의해 레벨러의 불만이 억눌러졌다. 11월 11일, 찰스 1세가 햄프턴 코트 궁전에서 탈출하며 국왕 처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졌다.

5. 결과

1650년 9월 3일, 던바 전투가 벌어졌다.

1651년 7월 20일, 가 벌어졌다.

8월 13일, 가 벌어졌다.

8월 25일, 가 벌어졌다.

8월 28일, 가 벌어졌다.

9월 3일, 우스터 전투가 벌어졌고, 찰스 2세는 대륙으로 망명하였다.

==== 잉글랜드 연방의 성립 ====

1649년 1월 30일 잉글랜드 의회는 공화정을 선포하고 '''잉글랜드 연방'''(또는 '''잉글랜드 공화국''')을 수립하였으며, 호국경으로 올리버 크롬웰을 선출하였다.[166] 찰스 1세의 비밀 협약과 지지자들을 부추긴 행위는 의회가 왕을 권력에 복귀시킬지 여부를 논의하게 만들었다.[94] 의회가 찰스 1세를 통치자로 인정하는 것에 분노한 군대는 1648년 12월 프라이드의 정화를 실시했다.[95]

잔존 의회는 찰스 1세를 반역죄로 기소하기 위한 찰스 1세 재판을 위한 고등법원을 설립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재판 결과, 59명의 위원들은 찰스 1세를 "폭군, 반역자, 살인자, 공공의 적"으로서 고역죄로 유죄 판결했다.[96][97] 그의 참수는 1649년 1월 30일 화이트홀 궁전의 연회장 앞 교각에서 이루어졌다.

왕정살해 이후, 찰스 2세는 1649년 2월 17일 세인트 헬리어(저지섬)의 왕궁 광장에서 왕으로 선포되었다.[99] 램프 의회는 1649년 5월 19일에 공화정인 잉글랜드 공화국(1649년 - 1660년)의 수립을 선포했다.[158]

====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의 정치 ====

1649년에 시작된 잉글랜드 연방의 정치는 순탄치 않았다. 1651년에 의회파가 왕당파에 승리한 이후, 의회파는 화평파와 독립파로 분열되었다. 이후 독립파의 지지를 받은 올리버 크롬웰1653년호국경에 올랐는데, 크롬웰은 갈수록 의회와 마찰을 빚게 되었고 같은 해에 의회를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1658년에 크롬웰이 사망하자 결국 공화정은 붕괴되었다. 이러한 독재 정치로 인해 크롬웰은 잉글랜드 군사 독재자로 기록되게 되었다.

==== 왕정 복고 ====

잉글랜드 연방은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의 사망과 함께 붕괴되었다. 정파들은 서로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주지 않기 위해 왕정 복고를 선택했다.[159] 프랑스망명해 있던 찰스 2세1660년 5월 29일 런던에 입성하여 잉글랜드의 군주가 되었다.[159] 찰스 2세는 즉위 후 자신의 처형에 서명한 판사들 중 살아있던 13명을 처형하고, 올리버 크롬웰의 무덤을 파는 등 보복 정치를 실시하였다.[159]

찰스 2세는 화려한 궁정 생활을 누리며 사치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무능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1665년부터 1667년까지 일어난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재정은 파탄 상태에 이르렀다.[159] 찰스 2세는 실정으로 인기가 떨어지자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로마 가톨릭에 관용적인 정책을 추진하였다.[159] 그의 이러한 정책은 종교 개혁의 전통을 갖고 있는 잉글랜드에서의 그의 입지를 더욱 좁게 하는 것이었으며, 후대 왕인 제임스 2세에 이르러 명예혁명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159]

올리버 크롬웰 사후 그의 아들 리처드가 호국경이 되었지만, 군대는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139] 7개월 후 군대는 리처드를 축출하고 1659년 5월, 램프 의회를 복원했다.[140]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군대는 이를 해산시켰다.[141] 1659년 10월 램프 의회가 두 번째로 해산된 후, 군대의 통일성이 파벌로 해체되면서 완전한 무정부 상태로 빠질 위험에 처했다.[142]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크롬웰 가문 치하 스코틀랜드 총독이었던 조지 몽크가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에서 남쪽으로 진군했다.[143] 1660년 4월 4일, 브레다 선언에서 찰스 2세는 잉글랜드 왕위 계승의 조건을 알렸다.[143] 몽크는 의회를 조직했고,[144] 이 의회는 1660년 4월 25일 처음으로 소집되었다.

1660년 5월 8일, 의회는 찰스 1세 처형 이후인 1649년 1월부터 찰스 2세가 합법적인 군주로 재위했다고 선포했다. 찰스 2세는 1660년 5월 23일 망명에서 돌아왔다. 1660년 5월 29일, 런던 시민들은 그를 왕으로 환호했다.[145] 그의 대관식은 1661년 4월 23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복고"로 알려지게 되었다.[146]

군주제가 복고되었지만, 의회의 동의 하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잉글랜드 내전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의회 군주제 형태의 정부로 나아가도록 만들었다.[147]

5. 1. 잉글랜드 연방의 성립

1649년 1월 30일 잉글랜드 의회는 공화정을 선포하고 '''잉글랜드 연방'''(또는 '''잉글랜드 공화국''')을 수립하였으며, 호국경으로 올리버 크롬웰을 선출하였다.[166] 찰스 1세의 비밀 협약과 지지자들을 부추긴 행위는 의회가 왕을 권력에 복귀시킬지 여부를 논의하게 만들었다.[94] 의회가 찰스 1세를 통치자로 인정하는 것에 분노한 군대는 1648년 12월 프라이드의 정화를 실시했다.[95]

잔존 의회는 찰스 1세를 반역죄로 기소하기 위한 찰스 1세 재판을 위한 고등법원을 설립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재판 결과, 59명의 위원들은 찰스 1세를 "폭군, 반역자, 살인자, 공공의 적"으로서 고역죄로 유죄 판결했다.[96][97] 그의 참수는 1649년 1월 30일 화이트홀 궁전의 연회장 앞 교각에서 이루어졌다.

왕정살해 이후, 찰스 2세는 1649년 2월 17일 세인트 헬리어(저지섬)의 왕궁 광장에서 왕으로 선포되었다.[99] 램프 의회는 1649년 5월 19일에 공화정인 잉글랜드 공화국(1649년 - 1660년)의 수립을 선포했다.[158]

5. 2.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의 정치

1649년에 시작된 잉글랜드 연방의 정치는 순탄치 않았다. 1651년에 의회파가 왕당파에 승리한 이후, 의회파는 화평파와 독립파로 분열되었다. 이후 독립파의 지지를 받은 올리버 크롬웰1653년호국경에 올랐는데, 크롬웰은 갈수록 의회와 마찰을 빚게 되었고 같은 해에 의회를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1658년에 크롬웰이 사망하자 결국 공화정은 붕괴되었다. 이러한 독재 정치로 인해 크롬웰은 잉글랜드 군사 독재자로 기록되게 되었다.

5. 3. 왕정 복고

잉글랜드 연방은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의 사망과 함께 붕괴되었다. 정파들은 서로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주지 않기 위해 왕정 복고를 선택했다.[159] 프랑스망명해 있던 찰스 2세1660년 5월 29일 런던에 입성하여 잉글랜드의 군주가 되었다.[159] 찰스 2세는 즉위 후 자신의 처형에 서명한 판사들 중 살아있던 13명을 처형하고, 올리버 크롬웰의 무덤을 파는 등 보복 정치를 실시하였다.[159]

찰스 2세는 화려한 궁정 생활을 누리며 사치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무능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1665년부터 1667년까지 일어난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재정은 파탄 상태에 이르렀다.[159] 찰스 2세는 실정으로 인기가 떨어지자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로마 가톨릭에 관용적인 정책을 추진하였다.[159] 그의 이러한 정책은 종교 개혁의 전통을 갖고 있는 잉글랜드에서의 그의 입지를 더욱 좁게 하는 것이었으며, 후대 왕인 제임스 2세에 이르러 명예혁명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159]

올리버 크롬웰 사후 그의 아들 리처드가 호국경이 되었지만, 군대는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139] 7개월 후 군대는 리처드를 축출하고 1659년 5월, 램프 의회를 복원했다.[140]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군대는 이를 해산시켰다.[141] 1659년 10월 램프 의회가 두 번째로 해산된 후, 군대의 통일성이 파벌로 해체되면서 완전한 무정부 상태로 빠질 위험에 처했다.[142]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크롬웰 가문 치하 스코틀랜드 총독이었던 조지 몽크가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에서 남쪽으로 진군했다.[143] 1660년 4월 4일, 브레다 선언에서 찰스 2세는 잉글랜드 왕위 계승의 조건을 알렸다.[143] 몽크는 의회를 조직했고,[144] 이 의회는 1660년 4월 25일 처음으로 소집되었다.

1660년 5월 8일, 의회는 찰스 1세 처형 이후인 1649년 1월부터 찰스 2세가 합법적인 군주로 재위했다고 선포했다. 찰스 2세는 1660년 5월 23일 망명에서 돌아왔다. 1660년 5월 29일, 런던 시민들은 그를 왕으로 환호했다.[145] 그의 대관식은 1661년 4월 23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복고"로 알려지게 되었다.[146]

군주제가 복고되었지만, 의회의 동의 하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잉글랜드 내전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의회 군주제 형태의 정부로 나아가도록 만들었다.[147]

6. 잉글랜드 내전의 역사적 의의와 영향

잉글랜드 내전은 왕권신수설에 기반한 절대 왕정에 대한 저항으로, 의회 중심의 입헌군주제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147] 청교도 혁명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사건은 종교적 자유와 개인의 권리 신장에 기여했으며, 이후 미국 독립 혁명 등 다른 나라의 민주주의 혁명에도 영향을 미쳤다.

전쟁의 결과로 잉글랜드는 잉글랜드 연방이라는 공화정 체제를 경험했다. 1649년부터 1653년, 그리고 1659년부터 1660년까지 공화정이 유지되었고, 그 사이에는 올리버 크롬웰보호자로서 보호령을 통치했다.[139] 크롬웰 사후 그의 아들 리처드가 잠시 권력을 승계했으나 군부에 의해 축출되었고, 이후 군부와 의회 간의 갈등 끝에 1660년 왕정이 복고되었다.[140][141][142]

조지 몽크 장군의 주도로 의회가 소집되었고, 브레다 선언을 통해 복귀한 찰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143][144][145] 이는 복고로 알려진 사건이다.[146] 군주제가 복고되었지만, 의회의 동의를 얻어야 했기에 잉글랜드는 의회 군주제 형태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 체제는 이후 명예혁명으로 이어졌고, 영국이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혁명을 피할 수 있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내전 재현 행사에서 발사되는 머스킷

6. 1. 한국사와의 비교 (더불어민주당 관점 반영)

7. 추가 자료

7. 1. 관련 인물

7. 2. 관련 사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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