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레이션 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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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너레이션 X는 1976년 결성된 영국의 펑크 록 밴드이다. 빌리 아이돌, 토니 제임스, 존 토우, 진 악토버로 시작하여, 첼시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진 악토버의 탈퇴 후 제너레이션 X로 이름을 변경했다. 1970년대 후반 펑크 록 씬에서 활동하며, 1960년대 브리티시 팝의 영향을 받은 음악 스타일을 선보였다. 1981년 해체 후, 1993년과 2018년에 재결합하여 공연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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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레이션 엑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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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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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첼시, 잉글랜드 |
별칭 | 젠 엑스 |
장르 | 펑크 록 팝 펑크 뉴 웨이브 |
활동 기간 | 1976년 – 1981년, 1993년 |
레이블 | 크리설리스 |
관련 활동 | 런던 SS 첼시 얼터너티브 TV 서브웨이 섹트 더 클래시 디 애드버츠 시그 시그 스푸트니크 카우보이스 인터내셔널 트웬티 플라이트 로커스 카본/실리콘 |
구성원 | |
현재 멤버 | 없음 |
이전 멤버 | 빌리 아이돌 토니 제임스 존 타우 더우드 앤드루스 마크 러프 테리 차임스 제임스 스티븐슨 |
2. 역사
1976년 펑크 록 밴드 '첼시(Chelsea)'로 처음 결성되었다. 초기 멤버는 빌리 아이돌, 토니 제임스, 존 토우, 진 옥토버였으나, 진 옥토버가 떠난 후 밴드 이름을 '제네레이션 X'(Generation X)로 바꾸었다.
같은 해 1976년 12월 4일, 런던 펄램 아츠 센터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이 밴드 활동은 이후 빌리 아이돌이 미국에서 성공적인 솔로 경력을 시작하는 발판이 되었다.
2. 1. 결성 (1976)
1976년 런던의 펑크 록 운동 속에서 밴드 '첼시(Chelsea)'가 결성되었다.[5] 초기 멤버는 브롬리 출신의 기타리스트 윌리엄 브로드(당시 21세), 트위크넘 출신의 베이시스트 토니 제임스(당시 23세), 드러머 존 토우, 그리고 보컬 진 옥토버(John O'Hara)였다.[6][7][8][9][10][11][12] 이들은 주로 1960년대 록앤롤 곡을 커버하며 웨스트 런던과 맨체스터 등지에서 공연 활동을 시작했다.[13]그러나 1976년 11월경, 진 옥토버는 브로드와 제임스가 창의적인 부분을 너무 주도하고 자신과 음악적 견해 및 개인적 관계가 맞지 않는다고 느껴 밴드를 떠났다.[14][15] 이에 브로드, 제임스, 토우는 첼시를 나와 새로운 밴드 '제네레이션 X'(Generation X)를 결성했다. 밴드 이름은 제임스가 브로드의 집을 방문했을 때 발견한, 브로드 어머니 소유의 제인 데버슨의 사회학 서적 『Generation X』(1965)의 제목에서 따왔다.[16][93] 초기 매니지먼트는 앤드루 체조프스키(Andrew Czezowski)가 담당했다.[4][17]
밴드 개편 과정에서 기타를 연주하던 브로드는 '빌리 아이돌'이라는 예명을 사용하며 프론트맨이자 리드 보컬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리드 기타리스트로는 풀럼의 로커 밴드 패러독스(Paradox) 출신의 당시 17세였던 밥 "더우드" 앤드루스(Bob "Derwood" Andrews)가 영입되었다.[5][93]
제네레이션 X는 1976년 12월 4일 런던 펄램 아츠 센터(Fulham Arts Centre)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이어서 12월 10일에는 센트럴 예술 디자인 학교(Central School of Art and Design)에서 대중 앞에서의 첫 무대를 선보였고,[5] 4일 뒤인 12월 14일에는 코벤트 가든의 클럽 더 록시(The Roxy)에서 공연했는데, 이 클럽에서 공연한 첫 번째 밴드이기도 했다.[4][18][93] 결성 직후 제네레이션 X는 라이브 공연에서 커버 곡 연주를 중단하고, 토니 제임스가 가사를 쓰고 빌리 아이돌이 곡을 붙인 자작곡들을 연주하기 시작했다.[19] 이 그룹 활동은 빌리 아이돌이 이후 미국에서 성공적인 솔로 경력을 쌓는 발판이 되었다.
2. 2. 초기 활동 (1977-1978)
1977년 초, 밴드의 매니지먼트는 러프 트레이드 레코드의 팬진 프로모터인 스튜어트 조셉과 사운즈 저널리스트 출신 존 잉엄의 공동 관리 체제로 전환되었다. 이들은 밴드의 사업을 전문적으로 관리하고 음반 계약 확보를 목표로 했다.[20][21]1977년 2월 16일, 밴드는 런던 웸블리의 데 레인 리 스튜디오에서 치즈윅 레코드의 후원으로 5곡의 데모 세션을 녹음했다. 초기 가사 중 일부는 내셔널 프론트와 북아일랜드 문제 비판 등 정치적 색채를 띠었으나, 이후 이러한 방향은 폐기되었다. 이 데모 세션에서 나온 "Your Generation"과 "Listen"은 이후 프로모션용 화이트 라벨 음반으로 자체 발매되었다. 처음 250장, 이후 500장이 추가로 제작되었다.
1977년 3월, 레스터 대학교 공연 중 관객이 던진 맥주병에 밥 앤드루스가 머리를 맞아 공연이 중단되는 사건이 발생했다.[22] 4월 중순에는 더 잼, 더 폴리스와 함께 파리에서 첫 해외 공연을 가졌고, BBC 메이다 베일 스튜디오에서 첫 라이브 라디오 세션을 녹음했다.[5] 이후 드러머 존 토우는 제임스와 아이돌의 요청으로 밴드를 떠났다. 그의 연주 스타일과 이미지가 밴드가 추구하는 방향과 맞지 않다는 이유였다.[23][24] 토우는 얼터너티브 TV에 합류했다.[25][26] 그의 후임으로는 1977년 5월, 오디션을 통해 서브웨이 섹트 출신의 18세 드러머 마크 래프가 영입되었다.[27] 밴드는 6월부터 8월까지 풀럼 로드의 리허설 공간에서 연습했다.[28]
1977년 7월 중순, 제너레이션 X는 크리설리스 레코드와 음반 계약을 체결했다. 첫 공식 녹음 세션은 웨섹스 사운드 스튜디오에서 프로듀서 빌 프라이스와 진행했으나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했다.[5] 이후 프로듀서 필 웨인만과 함께 윌스덴의 모건 스튜디오에서 첫 싱글 "Your Generation"을 녹음했다. 웨인만은 초기 밴드의 연주력에 대해 다소 회의적이었다.[29][30]
1977년 9월 초 발매된 "Your Generation" (B사이드 "Day by Day")은 영국 싱글 차트 36위를 기록했다.[31][32] 엘튼 존은 이 곡을 '끔찍한 쓰레기'라고 비평하기도 했다.[31] 밴드는 마크 볼란의 TV 쇼 ''마크''에 출연하여 이 곡을 연주했고, 방송국 악기를 무단 반출하여 그라나다 텔레비전으로부터 10년간 출연 금지를 당했다.[5] 같은 달, 제너레이션 X는 BBC의 인기 음악 프로그램 ''톱 오브 더 팝스''에 출연한 최초의 펑크 밴드 중 하나가 되었다.[38] 이 시기 밴드는 옵아트와 팝아트 스타일의 티셔츠를 직접 디자인하고 공연에서 착용하며 시각적 정체성을 구축했다.[33][34] 그래픽 아티스트 바니 버블스는 엘 리시츠키의 구성주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Your Generation" 싱글 커버와 홍보물 디자인을 맡았다.[36][37]
대중 매체는 제너레이션 X를 상업적 성공 가능성이 있는 펑크 밴드로 주목했지만, 동시에 펑크 씬 내부에서는 예술적 깊이가 부족하고 상업적 성공을 위해 펑크 이미지를 이용한다는 비판도 받았다.[39][40] 또한, 중산층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노동계급 중심의 펑크 운동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었다.[41] 토니 파슨스가 NME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아이돌과 제임스는 인터뷰 자리에서 오렌지 주스를 주문하며 '섹스, 마약, 로큰롤' 라이프스타일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42][43] 제너레이션 X는 더 후, 더 킹크스, 비틀즈 등 1960년대 영국 팝 음악의 영향을 받아 멜로디를 강조했으며, 가사 내용은 주로 웨스트 런던 청년들의 삶을 다루었다.[44] 록 어게인스트 레이시즘 공연에 몇 차례 참여한 것을 제외하면, 펑크의 정치적, 사회 비판적 메시지와는 거리를 두었다.[5][45]
1977년 9월 말에서 10월 초, 밴드는 프림로즈 힐의 유토피아 스튜디오에서 필 웨인만과 함께 첫 앨범 발매를 위한 데모를 녹음했다.[46] 11월 중순에는 싱글 "Wild Youth"를 발매했다. 이 곡은 거리 낙서에서 영감을 받아 즉흥적으로 작곡되었으며, B사이드 "Wild Dub"은 스카 음악의 영향을 보여준다.[5][27] 이 싱글은 차트 진입에 실패했다. 1977년 말, 존 잉엄은 매니지먼트에서 사임했다.[47][48]
1978년 2월, 싱글 "Ready Steady Go" (B사이드 "No No No")가 발매되었으나 영국 싱글 차트 40위권 진입에는 실패했다.[49] 밴드는 1978년 내내 영국 전역에서 활발히 투어를 진행했다. 3월 더비 공연에서는 헬스 엔젤 단원에게 아이돌이 폭행당하는 사건이 있었으나, 아이돌은 공연을 계속 진행했다.[50] 같은 달, 첫 정규 앨범 《제너레이션 X》가 발매되었다. 앨범은 마틴 루셴트가 프로듀싱하고 풀럼의 T.W.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으며,[51] 영국 앨범 차트 29위에 올랐다.[52] 커버 사진은 제러드 맹코위츠가 촬영했다.
1978년 4월, NME는 밴드의 특집 기사와 함께 아이돌과 제임스의 사진을 표지에 실었다. 사진 구도가 밴드 내 분열에 대한 추측을 낳기도 했다.[53][54] 밴드는 1978년 남은 기간 동안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아이돌은 5월에 첫 미국 프로모션 방문을 했고, 6월에는 파리 공연, 여러 차례의 BBC 라디오 출연 등이 있었다. 11월과 12월 투어에는 신인 밴드 더 큐어가 서포트 액트로 참여했다.[5] 10월, 제너레이션 X는 이즐링턴의 웨섹스 사운드 스튜디오에서[55] 모트 더 후플 출신의 이언 헌터를 프로듀서로 맞아 두 번째 앨범 《Valley of the Dolls》 녹음을 시작했다. 이 앨범은 글램 펑크와 프로그레시브 록 요소를 도입하며 주류 록 사운드로의 변화를 보여주었다.[38][56]
2. 3. 전성기와 갈등 (1979)
1979년 1월, 밴드는 매니저 스튜어트 조셉과 함께 크리설리스 레코드 사무실로 소환되었다. 레이블 측은 1977년 중반부터의 투자가 차트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에 불만을 표하며, 다음 싱글 "King Rocker"가 히트하지 못하면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통보했다. 회의 후 조셉은 멤버들의 주급을 삭감했다.[57] 같은 달 발매된 싱글 "King Rocker"는 영국 싱글 차트 11위에 오르며 밴드의 상업적 정점을 기록했다. 이 싱글은 존 레논의 "Gimme Some Truth" 커버 버전을 B면에 담았는데, 1977년 BBC 라이브 라디오 공연에서 가져온 음원이었다. 다양한 색상의 디스크와 바니 버블스가 디자인한[37] 독특한 커버 아트 덕분에 수집가들의 구매를 유도한 측면도 있었다.[58]그러나 같은 해 발매된 두 번째 정규 앨범 Valley of the Dolls는 이언 헌터가 프로듀싱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앨범 차트 51위에 그치며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두었다. 앨범은 음악 평론가들로부터 과장되고 예술적으로 공허하다는 혹평을 받았으며,[59] 이는 앨범 제작을 주도했던 토니 제임스의 판단에 대해 빌리 아이돌이 회의감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1979년 2월 런던의 리시움 볼룸 공연에서는 U.K. Subs 팬들이 던진 물건들로 인해 무대에서 내려오는 사건까지 발생했다.[5] 이는 당시 밴드의 라이브 공연을 괴롭히던 초기 스트리트 펑크 세력의 지속적인 폭력 성향의 일부였다.[60] 이후 발매된 싱글들도 "Valley of the Dolls"가 3월에 23위, "Friday's Angels"가 6월에 62위에 머무르며 차트에서의 영향력은 감소했다.
잦은 투어와 방송 출연 속에서 ''Valley of the Dolls''의 상업적 실패는 멤버 간의 갈등을 표면화시켰다. 밥 앤드루스는 빌리 아이돌의 심화되는 마약 사용과 그로 인한 성격 변화에 반감을 가졌고, 아이돌이 게리 글리터, 엘비스 프레슬리, 빌리 퓨리 등을 모방하며 솔로 활동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느꼈다.[52] 음악적 방향에 대한 이견도 심화되었다. 앤드루스는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은 조이 디비전의 음악에 영향을 받아 새로운 인디 록 사운드를 추구하며 작곡 참여 확대를 원했지만,[27] 아이돌과 토니 제임스는 더 상업적인 댄스 펑크[62]나 쇼크 록[63] 요소를 도입하려 했고 앤드루스의 곡을 자신들의 작곡 파트너십에 포함시키는 것을 거부했다.[38][64] 여기에 매니저 스튜어트 조셉과의 법적 분쟁으로 인한 재정적 손실까지 겹쳤다.[29]
이러한 갈등 속에서도 밴드는 1979년 6월 25일부터 28일까지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 첫 해외 투어를 진행했다. 그러나 내부 갈등은 계속되었고, 1979년 말 일본 투어 이후 런던 바네스의 올림픽 스튜디오에서 세 번째 앨범(훗날 ''K.M.D. - Sweet Revenge''라는 제목으로 발매됨)의 미완성 녹음 세션과 웨스트 컨트리에서 끝나는 짧은 투어 동안 갈등은 극에 달했다. 결국 크리스마스 직전, 아이돌의 주도로[65] 앤드루스가 밴드를 떠났다. 며칠 후 마크 래프 역시 아이돌과 제임스와의 작곡 크레딧 문제 및 연주 스타일에 대한 이견으로 밴드를 떠나라는 요구를 받았다. 래프는 자신이 만든 드럼 파트가 권리 및 재정적 합의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반발했고,[27] 아이돌은 래프의 키스 문의 영향을 받은 연주 스타일이 자신들이 추구하려는 새로운 사운드와 맞지 않다고 생각했으며,[62] ''Valley of the Dolls'' 녹음 당시 래프의 기술적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세션 뮤지션 드럼 연주자(클라이브 벙커)를 스튜디오 작업에 고용해야 했던 점을 들어 그의 전문성에 의구심을 품었다.[66] (실제 ''Valley of the Dolls'' 녹음에서는 래프와 세션 드러머 클라이브 벙커가 함께 트랙을 연주하여 독특한 더블 드럼 사운드를 구현하기도 했다.) 래프는 이후 앤드루스와 함께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새로운 밴드 'Empire'에 합류했다. 제너레이션 X로서의 마지막 라이브 공연은 1979년 11월 30일 글로스터의 자메이칸 클럽에서 열렸다.[5]
2. 4. 밴드 개편과 해체 (1980-1981)
밥 앤드루스와 마크 래프가 밴드를 떠난 후[67] (토니 제임스는 이들이 "딥 퍼플과 지나치게 유사하게 들리는 경향" 때문에 해고되었다고 밝혔다[67]), 빌리 아이돌과 토니 제임스는 전 더 클래시 드러머 테리 차임즈를 영입했다.[31][94] 또한, 새로운 매니저로 빌 오코인을 선임했는데, 오코인은 밴드 전체보다는 아이돌 개인의 미국 시장 성공 가능성에 더 큰 관심을 보이며 이를 위해 은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68]밴드는 이름을 젠 X(Gen X)로 변경하고, 뉴 로맨틱 스타일로 음악적, 시각적 변화를 시도하며 신빅토리아풍 고딕 스타일을 선보였다.[69] 이는 아이돌이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저술에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70]
1980년 3월, 젠 X는 리드 기타리스트 스티브 뉴와 함께 데모 녹음을 진행했으나, 뉴의 마약 문제로 인한 신뢰성 우려 때문에 정식 멤버 영입은 포기했다.[68] 같은 해 중반, 밴드는 옥스퍼드 스트리트의 AIR 스튜디오에서 이전 미발표 앨범 ''Sweet Revenge''의 곡들과 신곡들을 재녹음하며 새 정규 앨범 작업에 들어갔다.[72] 하지만 이전 앨범 ''Valley of the Dolls''의 상업적 실패로 인해 크리설리스 레코드는 추가 자금 지원을 망설였고, 아이돌은 자금 확보를 위해 자신의 잠재적인 솔로 활동 가능성을 레이블과 논의해야 했다.[73] 이 녹음 세션에는 존 맥고크, 스티브 존스, 대니 커스토우 등 여러 기타리스트들이 세션 뮤지션으로 참여하며 사실상 새로운 기타리스트 오디션의 성격을 띠었다.[74]
1981년 1월, 키스 포시가 프로듀싱한 밴드의 마지막 정규 앨범 ''Kiss Me Deadly''가 발매되었다.[31] 그러나 앨범 제작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제임스는 녹음 중 아이돌을 포함한 다른 멤버들의 마약 사용이 작업에 방해가 되었다고 회고했으며, 특히 아이돌의 아편 중독 문제로 인해 제임스와 아이돌의 관계는 점차 멀어졌다.[75] 제임스는 훗날 밴드 해체의 주된 원인으로 "정말, 마약이 우리를 망쳤다"고 언급했다.[76][27] 또한, 아이돌의 작곡 능력이 향상되고 솔로 활동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제임스와의 음악적, 개인적 거리감은 더욱 깊어졌다. 제임스와 프로듀서 키스 포시 간의 불화 역시 문제였다.[77]
앨범 발매에 앞서 1980년 10월에 공개된 싱글 "Dancing with Myself"는 록스테디와 더브 스타일의 B사이드 곡 "Ugly Rash"와 이언 맥켈이 촬영한 아이돌의 파격적인 커버 사진에도 불구하고 영국 싱글 차트 62위에 그치며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78] 1981년 1월에는 이전 제네레이션 X 시절 곡들과 젠 X의 곡들을 함께 담은 EP ''Gen X - 4''도 발매되었으나 역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78] ''Kiss Me Deadly'' 앨범 자체는 뉴 웨이브 사운드의 혁신과 멤버들의 성숙한 작곡 능력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스티븐슨이 기타를 맡아 진행된 1980년 11월부터 1981년 1월까지의 짧은 홍보 투어에도 불구하고 차트 진입에 실패했다.[94] 음악 언론의 평가 역시 대체로 무관심하거나 부정적이었으며, ''Smash Hits'' 매거진은 10점 만점에 2점을 주기도 했다.[79][80]
결국, 아이돌이 밴드를 떠날 의향이 있다는 것을 오코인으로부터 확인한 크리설리스 레코드는 밴드와의 계약을 해지했고, 지난 4년간의 투자금 25만파운드를 상각처리했다. 젠 X는 1981년 2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83] 밴드의 마지막 공개 활동은 BBC 텔레비전의 옥스퍼드 로드 쇼 출연(당시 아이돌은 남성용 네오 고딕 코트와 여성 속옷, 검은 스타킹을 조합한 크로스 드레싱 의상을 선보였다)과 1981년 1월 7일 런던 파리 극장에서 BBC 라디오를 통해 녹음된 라이브 공연이었다.[82][83]
해체 직후 아이돌과 제임스는 결별했으며(음악 언론에는 밴드 해체 원인이 '화학적 불균형'[84] 때문이라는 익명의 제보가 전해졌다), 아이돌은 전 매니저 빌 오코인의 조언에 따라 뉴욕 시로 건너가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75][85] 그는 젠 X 시절의 곡 "Dancing with Myself"를 발판 삼아 크리설리스 레코드와 솔로 계약을 맺고 미국에서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팝스타로 자리매김했다.[87] 한편, 토니 제임스는 로커빌리와 사이버펑크 요소를 결합한 밴드 시그 시그 스푸트니크를 결성하여 1980년대 후반 영국 차트에서 성공을 거두었다.[86][94]
2. 5. 재결합 (1993, 2018)
1993년 9월 20일, 빌리 아이돌의 '노 릴리전' 투어 영국 공연 중, 1970년대 후반의 제너레이션 X 멤버들은 런던 웨스트 엔드의 애스토리아 극장에서 단 한 번의 공연을 위해 재결합했다.2018년 10월 30일, 빌리 아이돌과 토니 제임스는 섹스 피스톨즈 출신의 스티브 존스와 폴 쿡과 함께 '제너레이션 섹스'(Generation Sex)라는 이름으로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록시 극장에서 무료 공연을 열었다. 이 공연에서는 제너레이션 X와 섹스 피스톨즈 두 밴드의 곡들을 연주했으며, 입장권은 추첨을 통해 신청자들에게 배분되었다.
3. 음반 목록
(내용 없음)
3. 1. 정규 앨범
최고 순위2003 (발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