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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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방 십자군은 1193년 교황의 요청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이전부터 스웨덴과 신성 로마 제국은 비기독교 민족을 정복하고 무역로를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이 십자군은 종교적 이유뿐만 아니라 영토 확장과 경제적 이익을 추구했으며,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등 발트해 연안 지역을 침략했다. 주요 십자군으로는 웬드 십자군, 스웨덴 십자군, 덴마크 십자군, 리보니아 십자군 등이 있으며, 튜턴 기사단은 이 과정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발트해 지역 지배권을 확대했다. 튜턴 기사단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과의 갈등을 겪었으며,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세력이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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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중반 스웨덴이 비르예르 야를의 주도하에 핀란드, 특히 타바스티아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 했던 군사 원정인 제2차 스웨덴 십자군은 《에리크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으나, 시기와 성격에 대한 논쟁이 있으며, 이후 핀란드는 스웨덴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 유럽의 기독교화 - 키예프 루스의 기독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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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십자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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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193년 교황 첼레스티노 3세의 요청은 북방 십자군의 공식적인 시작이었으나, 스웨덴과 신성 로마 제국은 이미 주변의 비기독교 민족에 대한 정복 활동을 하고 있었다.
작센족과 덴마크는 북방 십자군 기간 동안 핀족, 발트족, 슬라브족과 싸웠다. 북방 십자군 전쟁은 종교적인 이유 외에도 주요 거점 확보와 무역로 독점을 위한 것이었다.[5]
북방 십자군 시작 무렵, 북유럽의 기독교 군주들은 오늘날 에스토니아, 핀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러시아를 포함하는 영토에 대한 침략을 명령했다. 이교도 원주민들은 강제 세례와 군사 점령의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침략을 주도했지만 독점하지는 않았던 튜턴 기사단은 이 십자군 전쟁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었고, 발트해 국경을 가로지르는 무역로를 따라 진출한 독일 상인들도 마찬가지였다.[5]
북방 십자군의 공식적인 시작 시점은 1195년 교황 첼레스티누스 3세의 호소였지만,[6] 스칸디나비아, 폴란드, 신성 로마 제국의 가톨릭 왕국들은 그 이전부터 이교도 이웃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폼메라니아의 기독교화 참조).[7]
발트해 연안에 거주하던 발트 핀족, 발트인, 슬라브족과 북쪽과 남쪽의 작센인 및 덴마크인 이웃들 사이의 무력 충돌은 십자군 전쟁 이전 수 세기 동안 흔했다. 이전 전투는 주로 지역 내 경제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성과 해상 무역로를 파괴하려는 시도로 인해 발생했으며, 십자군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분쟁의 패턴을 계속했지만, 교황의 영감을 받고 규정에 따라 교황의 기사들과 무장한 수도승들이 수행했다.
1147년에 시작된 벤디쉬 원정은 오늘날 독일 북부와 동부에 거주하던 폴라비아 슬라브족(또는 "벤드족")을 겨냥한 십자군 원정이었다. 이 원정은 예루살렘으로 향한 제2차 십자군과 동시에 일어났으며, 16세기까지 불규칙적으로 계속되었다.
스웨덴 십자군은 1150년부터 1293년까지 스웨덴이 핀란드인, 타바스티아인, 카렐리야인을 상대로 벌인 군사 원정을 말한다. 동방 정교회 노브고로드 공화국과의 전쟁에도 종교적인 측면이 있었다.
덴마크인들은 핀란드에 적어도 세 차례의 십자군 원정을 감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십자군 원정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1187년으로, 십자군 전사 에스베른 스나레가 크리스마스 연회 연설에서 핀란드인들에 대한 대승리를 언급한 것이다.[8] 다음으로 알려진 두 차례의 십자군 원정은 1191년과 1202년에 있었다. 후자의 원정은 룬드의 주교 안데르스 수네센이 그의 형제와 함께 이끌었다.[9]
12세기까지, 현재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로 알려진 땅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점점 강력해지는 기독교 국가들 – 동쪽의 정교회와 서쪽의 가톨릭교회 – 사이에 이교도의 쐐기 역할을 했다. 신앙의 차이는 그들이 다른 종교로 강제 개종되는 것을 저항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북방 십자군은 12세기 말 팔레스타인에서 설립된 독일 십자군 기사단인 튜턴 기사단의 성장과 확장에 대한 명분을 제공했다.
2. 1. 십자군의 공격 지역
교황 첼레스티노 3세의 요청으로 시작된 북방 십자군은 스웨덴과 신성 로마 제국이 주변의 비기독교 민족을 정복하면서 시작되었다. 북방 십자군의 공격 지역은 다음과 같다.공격 주체 | 공격 지역 | 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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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족, 덴마크, 폴란드인 | 엘베강과 오데르강 사이의 폴라비아 슬라브족, 소르브인, 오보트리트인 (웬드 십자군) | 제2차 십자군과 함께 시작 |
스웨덴 | 오늘날의 핀란드 지역 | 1154년~1249년, 1293년 |
독일, 덴마크 | 리보니아인, 라트갈리아인, 에스토니아인 | 1193년~1227년 |
독일, 덴마크 | 세미갈리아인과 쿠로니아인 | 1219년~1290년 |
독일, 덴마크 | 발트 프러시아인 | 해당사항 없음 |
독일 | 리투아니아, 사모기티아 (실패) | 1236년~1316년 |
북방십자군 초기, 북유럽의 기독교 군주들은 오늘날 에스토니아, 핀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러시아를 포함하는 영토에 대한 침략을 명령했다. 이교도 원주민들은 강제 세례와 군사 점령의 피해를 입었다. 튜턴 기사단은 이러한 침략을 주도하며 발트해 국경을 가로지르는 무역로를 따라 진출한 독일 상인들과 함께 십자군 전쟁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5]
작센족과 덴마크는 북방 십자군 기간 동안 핀족, 발트족, 슬라브족과 싸웠다. 이 전쟁은 종교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주요 거점 확보와 무역로 독점을 위한 것이었다.[5]
3. 주요 십자군
북방십자군의 공식적인 시작은 1195년 교황 첼레스티누스 3세의 호소였지만,[6] 스칸디나비아, 폴란드, 신성 로마 제국의 가톨릭 왕국들은 그 이전부터 이교도 이웃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7]
다음은 다양한 시기에 전쟁의 대상이 된 비기독교인들이다.대상 시기 공격 주체 비고 폴라비아 벤드족, 소르브족, 오보트리테족 1147년 벤드 십자군부터 작센인, 덴마크인, 폴란드인 엘베 강과 오데르 강 사이 핀란드인 1150년대, 1191년, 1202년, 1249년, 1293년 스웨덴인, 덴마크인 제1차 스웨덴 십자군, 제2차 스웨덴 십자군, 제3차 스웨덴 십자군, 카렐리야 점령 리보니아인, 라트갈리아인, 셀로니아인, 에스토니아인 1193년–1227년 독일인, 덴마크인 세미갈리아인, 쿠로니아인 1219년–1290년 독일인 구 프로이센인 독일인 리투아니아인, 사모기티아인 1236년–1410년 독일인 실패
발트해 연안의 발트 핀족, 발트인, 슬라브족과 작센인, 덴마크인 이웃들 간의 무력 충돌은 십자군 전쟁 이전 수 세기 동안 흔했다. 이전 전투는 주로 지역 내 경제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고, 십자군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분쟁의 패턴을 계속했지만, 교황의 영감을 받은 기사들과 수도승들이 수행했다.
튜턴 기사단은 동방 정교회 러시아(특히 프스코프 공화국과 노브고로드 공화국) 정복 시도를 북방십자군과 함께 진행했다.[1] 1242년 얼음 전투는 러시아 정복에 대한 주요 타격 중 하나였다. 스웨덴도 정교회 노브고로드에 대한 십자군을 수행했다.
에스토니아에서의 리보니아 선교와 십자군 활동은 노브고로드 공화국과의 갈등을 야기했다. 에스토니아인들은 때때로 십자군에 대항하여 러시아인과 동맹을 맺으려고 시도했다.[26] 두 세력 간의 전쟁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지만, 노브고로드의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 점령 시도는 실패했고, 그 지역은 튜턴 기사단이 확고하게 지배했다.
3. 1. 웬드 십자군 (1147년)
1147년에 시작된 웬드 십자군은 오늘날 독일 북부와 동부에 거주하던 폴라비아 슬라브족(또는 "웬드족")을 겨냥한 십자군 원정이었다. 이 원정은 제2차 십자군과 동시에 일어났으며, 16세기까지 불규칙적으로 계속되었다.[5] 덴마크와 독일이 이 원정을 주도했다.
3. 2. 스웨덴 십자군
스웨덴 십자군은 1150년부터 1293년까지 스웨덴이 핀란드인, 타바스티아인, 카렐리야인을 상대로 벌인 군사 원정을 말한다. 동방 정교회 노브고로드 공화국과의 전쟁에도 종교적인 측면이 있었다.
스웨덴은 핀란드 남부를 병합하고, 1240년에는 노브고로드 공화국까지 침공했으나, 같은 해 알렉산드르 넵스키에게 패배하여 이후 스웨덴의 십자군 활동은 축소되었다.[5] 스웨덴과 노브고로드는 현재 러시아령 비보르크를 경계로 1300년경까지 항쟁을 계속했지만, 스웨덴은 그 무렵 십자군 활동을 중단했다. 1323년 두 나라 사이에 노테보리 조약이 성립되면서 스웨덴의 십자군은 종식되었다. 그러나 두 나라의 군사적 충돌은 십자군이 종식된 후에도 15세기 중반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고, 노브고로드 공화국이 모스크바 대공국에 흡수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1193년, 교황은 발트해 연안 이교도들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했다. 독일인 상인들이 흥기하여 1180년에는 마인하르트라는 승려가 현재 라트비아에 해당하는 다우가바 강 어귀에 상륙했고, 1186년에는 주교로 서임되었다. 1198년 마인하르트의 후계자 베르홀트가 이끄는 십자군 사절단이 리보니아(현재 라트비아의 리가 만에 둘러싸인 지역)에 상륙했다. 십자군은 첫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베르홀트 주교는 중상을 입고 십자군은 물러났다.
1199년, 알베르트 폰 부크스호벤은 브레멘 대주교에 의해 발트 국가들의 기독교화를 담당하도록 임명되어 파견되었다. 현재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북부의 정복과 공식적인 기독교화가 완료되자, 알베르트는 교황의 교서를 가지고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십자군 병사들을 모집했다. 1200년, 다우가바 강 어귀에 겨우 23척의 배와 500명의 병사와 함께 상륙했지만, 이후 독일에서 많은 병사들이 파병되었다.
초기 십자군은 보통 봄에 전투를 위해 도착하여 가을에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상주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리보니아 검을 찬 형제단이 1202년에 설립되었다. 1201년 알베르트 주교에 의한 리가 시장의 개설은 제국으로부터 많은 시민들을 끌어들여 경제적 번영을 가져왔다. 알베르트의 희망에 따라,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육군 모집을 증진하기 위해 발트 해 연안 국가들에 성모 마리아의 이름을 봉헌하고, 테라 마리아나라고 명명했다.
덴마크와 스웨덴은 발트해 동쪽 해안 정복을 시도했다. 스웨덴은 1220년에 서에스토니아를 한 번 침략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덴마크의 발데마르 2세는 1219년 현재 탈린 근처에 상륙하여 요새를 건설했다. 이 요새는 1220년과 1223년에 에스토니아인들에게 포위되었지만 버텼다. 북에스토니아 전체가 덴마크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이러한 침략자들에게 끝까지 저항한 에스토니아 지역은 사레마 섬 지역이었고, 그들의 함대는 독일 십자군과의 전투 중에도 덴마크와 스웨덴을 공격할 정도였다. 1227년 1월, 사레마 함대가 얼어붙은 바다에 갇히는 동안, 교황 특사 빌헬름 폰 모데나가 지휘하는 2만 명의 육군이 얼어붙은 바다를 건너 사레마를 멸망시켰다. 에스토니아 정복 후, 십자군은 다우가바 강 남쪽과 서쪽에 살던 라트비아 민족, 쿠로니아와 세미갈리아 지역으로 침공했다.
3. 3. 덴마크 십자군
덴마크는 핀란드에 최소 세 차례 십자군 원정을 감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초의 언급은 1187년 십자군 전사 에스베른 스나레가 크리스마스 연회 연설에서 핀란드인들에 대한 대승리를 언급한 것이다.[8] 이후 1191년과 1202년에 두 차례의 십자군 원정이 있었다. 1202년 원정은 룬드의 주교 안데르스 수네센이 그의 형제와 함께 이끌었다.[9]
1193년 교황은 발트해 연안 이교도들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했으며, 1199년 알베르트 폰 부크스호벤은 브레멘 대주교에 의해 발트 국가들의 기독교화를 담당하도록 임명되었다.
스웨덴과 덴마크는 발트해 동쪽 해안 정복을 시도했다. 스웨덴은 1220년 서에스토니아를 침략했지만 실패했다. 덴마크의 발데마르 2세는 1219년 현재의 탈린 근처에 상륙하여 요새를 건설했다. 이 요새는 1220년과 1223년에 에스토니아인들에게 포위되었지만 버텼다. 북에스토니아 전체가 덴마크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3. 4. 리보니아 십자군 (1198년-1290년)
12세기부터 오늘날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 해당하는 리보니아 지역에 대한 십자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덴마크와 스웨덴으로 대표되는 로마 가톨릭교회 세력과 루스 공국으로 대표되는 동방 정교회 세력이 이 지역의 개종을 명분으로 공격했다.[5] 이로 인해 에스토니아는 150년 동안 13번의 침략을 받았다. 브레멘의 주교였던 아달베르트가 1045년에서 1075년 사이에 평화적인 개종 사업을 벌였으나, 십자군의 공격으로 이러한 평화는 깨졌다.
북방 십자군의 공식적인 시작은 1195년 교황 첼레스티누스 3세의 호소였지만,[6] 스칸디나비아, 폴란드, 신성 로마 제국의 가톨릭 왕국들은 그 이전부터 이교도 이웃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7]
발트해 연안에 거주하던 발트 핀족, 발트인, 슬라브족과 북쪽과 남쪽의 작센인 및 덴마크인 이웃들 사이의 무력 충돌은 십자군 전쟁 이전 수 세기 동안 흔했다. 이전 전투는 주로 지역 내 경제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성과 해상 무역로를 파괴하려는 시도로 인해 발생했으며, 십자군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분쟁의 패턴을 계속했지만, 교황의 영감을 받고 규정에 따라 교황의 기사들과 무장한 수도승들이 수행했다.
12세기까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정교회와 가톨릭교회 사이에 이교도의 쐐기 역할을 했다. 신앙의 차이는 그들이 다른 종교로 강제 개종되는 것을 저항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이 지역에 독일 십자군이 도착하기까지 1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에스토니아는 러시아 공국과 덴마크, 스웨덴으로부터 13번의 공격을 받았다. 아달베르트 브레멘 대주교가 1045년부터 1072년까지 파견한 선교를 시작으로 일부 가톨릭교도들이 에스토니아인들을 평화적으로 개종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제한적인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독일 상인들이 바이킹들의 옛 무역로를 따라 이동함에 따라, 마이나드라는 수도사가 1180년 현재 라트비아의 다우가바 강 어귀에 상륙하여 1186년 주교가 되었다. 첼레스티누스 3세는 1195년 발트해 이교도들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했고, 이는 인노첸티우스 3세에 의해 재확인되었으며, 마이나드의 후계자인 하노버의 베르톨트 주교가 이끄는 십자군 원정이 1198년 리보니아(현재 라트비아의 일부, 리가 만 주변)에 상륙했다. 십자군은 첫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베르톨트 주교는 치명상을 입었고 십자군은 격퇴되었다.
1199년, 뷔크스호베덴의 알베르트는 브레멘의 하르트비히 2세 대주교에 의해 발트해 국가들을 기독교화하도록 임명되었다. 알베르트가 30년 후 사망할 때까지, 현재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북부의 정복과 공식적인 기독교화는 완료되었다. 알베르트는 제국을 순회하며 발트해 국가들에 대한 십자군을 설교하며 시작했고, 발트해 이교도들과 싸우는 것이 성지 십자군에 참여하는 것과 같은 순위라고 선언한 교황령에 의해 이 일을 도왔다. 1200년 다우가바 강 어귀에 23척의 배와 500명의 병사만으로 상륙했지만, 주교의 노력으로 끊임없는 지원병들이 뒤따랐다. 최초의 십자군들은 보통 봄에 싸우러 와서 가을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영구적인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 1202년 리보니아 검의 형제단이 설립되었다. 알베르트 주교가 1201년 리가에 시장을 설립함으로써 제국에서 시민들이 유입되어 경제적 번영이 이어졌다. 알베르트의 요청으로 인노첸티우스 3세는 발트해 국가들을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여 그의 군대에 대한 모병을 대중화했고, "마리아의 땅"이라는 이름은 현대까지 전해진다.
1206년, 십자군은 가우야 강 우안에 있는 투라이다의 리보니아 요새를 정복했다. 가우야 강 좌안을 장악하기 위해, 1210년 이전에 시굴다에 석조 성채가 건설되었다. 1211년까지, 리보니아의 메체폴레(현재 림바지구) 지역과 리보니아인과 라트갈리아인이 혼합 거주하는 이두메아(현재 스트라우페) 군이 로마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했다. 리보니아인들과의 마지막 전투는 1212년 시굴다 근처 사테젤레 산성 공방전이었다. 동슬라브 공국 폴로츠크에 조공을 바치던 리보니아인들은 처음에 독일인들을 유용한 동맹으로 여겼다. 세례를 받은 최초의 저명한 리보니아인은 그들의 지도자 카우포였다. 독일의 지배가 강화됨에 따라, 리보니아인들은 십자군과 세례받은 수장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다. 카우포는 1217년 성 마태오의 날 전투에서 사망할 때까지 십자군의 동맹으로 남았다.[10]
독일 십자군은 새로 세례받은 리보니아 전사들을 라트갈리아인과 셀로니아인(1208-1209), 에스토니아인(1208-1227)에 대한 원정, 그리고 세미갈리아인, 사모기티아인, 쿠로니아인(1219-1290)에 대한 원정에 참여시켰다.
리보니아인을 정복한 후, 십자군은 가우야 강과 다우가바 강을 따라 동쪽에 있는 라트갈리아 공국으로 눈을 돌렸다. 1208년의 군사 동맹과 이후 탈라바 공국의 그리스 정교회에서 로마 가톨릭으로의 개종은 북방 십자군 중 발트족의 평화적인 정복의 유일한 사례였다. 탈라바의 통치자, 탈리발디스(Talibaldus de Tolowa|탈리발두스 데 톨로와la)는 에스토니아인에 대항하는 독일 십자군의 가장 충실한 동맹자가 되었고, 1215년 가톨릭 순교자로 죽었다. 다우가바 강 수로를 따라 라트갈리아와 셀로니아 국가들에 대한 전쟁은 1208년 정교회 코크네세 공국과 셀로니아 셀필스 산성의 점령으로 시작되었다. 이 전투는 1209년 리투아니아 이교도들과 동맹을 맺었다는 십자군의 비난을 받은 정교회 예르시카 공국(Lettia|레티아la) 공격으로 이어졌다. 패배 후, 예르시카의 왕 비스발디스는 리보니아 주교의 봉신이 되었고, 그의 영토(남부 라트갈레)의 일부를 봉토로 받았다. 셀로니아의 요새 셀필스는 잠시 셀로니아 주교구(1218~1226년)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 후 리보니아 기사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결국 그 자리에 젤부르크의 석성이 건설되었다). 1224년에야 리가 주교와 검 기사단이 탈라바와 아젤레 백국을 분할하면서 라트갈리아 국가들이 마침내 독일 정복자들의 소유가 되었다. 전 예르시카 공국의 영토는 1239년 리가 주교와 리보니아 기사단 사이에 분할되었다.
1208년, 독일인들은 당시 서로 협력이 제한적인 장로들이 이끄는 8개의 주요 지역과 여러 개의 소규모 지역으로 나뉘어 있던 에스토니아인들에 대한 작전을 시작할 만큼 강해졌다. 1208년부터 1227년까지, 양측의 전쟁 부대는 리보니아, 북부 라트갈리아, 에스토니아 지역을 휩쓸고 다녔으며, 리보니아인과 라트갈리아인은 보통 십자군의 동맹국이었고, 폴로츠크와 프스코프 공국은 시기에 따라 다른 편의 동맹국으로 등장했다. 에스토니아 지역의 핵심 중심지였던 언덕 요새들은 여러 차례 포위되고 함락되었다. 전쟁에 지친 양측 간의 휴전이 3년(1213년~1215년) 동안 체결되었고, 일반적으로 독일인들에게 더 유리하게 작용하여 그들의 정치적 지위를 강화한 반면, 에스토니아인들은 느슨한 동맹 시스템을 중앙집권화된 국가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리보니아 지도자 카우포는 1217년 9월 21일 빌랸디(펠린) 근처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이 전투는 에스토니아인들의 지도자 렘비투도 전사한 에스토니아인들에게 압도적인 패배였다. 1211년부터 그의 이름은 독일 연대기에 주목할 만한 에스토니아 장로로 등장했고, 그는 에스토니아 저항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덴마크와 스웨덴의 기독교 왕국들 또한 발트해 동쪽 해안의 정복에 탐욕스러웠다. 스웨덴인들은 1220년 서부 에스토니아에 단 한 번의 실패한 침입만을 시도했지만, 발데마르 2세 국왕이 이끄는 덴마크 함대는 1219년 에스토니아 도시 린다니세[11](오늘날 탈린)에 상륙했다. 린다니세 전투 이후 덴마크인들은 요새를 세웠고, 이 요새는 1220년과 1223년에 에스토니아인들에게 포위되었지만 버텼다. 결국 북부 에스토니아 전체가 덴마크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침략자들에 맞서 끝까지 저항한 마지막 에스토니아 주는 사레마 섬 주였는데, 이곳의 함대는 독일 십자군과 싸우는 동안 덴마크와 스웨덴을 습격했다.
1206년, 발데마르 2세 왕과 룬드 주교 안드레아스가 이끄는 덴마크 군대가 사레마에 상륙하여 거점을 마련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216년 리보니아 검의 형제단과 테오도리히 주교가 연합하여 얼어붙은 바다를 건너 사레마를 침략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사레마인들은 이듬해 봄 독일의 지배를 받는 라트비아 영토를 습격했다. 1220년, 요한 1세 왕과 링쾨핑 주교 카를이 이끄는 스웨덴 군대는 서에스토니아 레알라의 리훌라를 정복했다. 같은 해 사레마인들이 스웨덴의 거점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링쾨핑 주교를 포함한 스웨덴 수비대 전원을 살해했다.
1222년, 발데마르 2세는 사레마 정복을 두 번째로 시도하여 이번에는 강력한 수비대를 배치한 석조 요새를 건설했다. 덴마크 요새는 5일 만에 포위되어 항복했고, 덴마크 수비대는 탈린으로 돌아갔으며, 리가 주교의 형제 테오도리히와 소수의 인원만이 평화를 위한 인질로 남았다. 사레마인들은 성을 완전히 파괴했다.[12]
1227년 1월, 사레마 함대가 얼음에 갇히는 동안 교황 특사 빌헬름이 이끄는 2만 명의 군대가 얼어붙은 바다를 건넜다. 사레마의 주요 거점인 무후와 발랼라가 항복한 후, 사레마인들은 공식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1236년, 사울레 전투에서 리보니아 검의 형제단이 패배한 후, 사레마에서 다시 군사 행동이 시작되었다. 1261년, 사레마인들이 다시 기독교를 배척하고 섬의 모든 독일인을 죽이면서 전쟁이 계속되었다. 리보니아 기사단, 외셀-비크 주교령, 덴마크 에스토니아의 연합군이 본토 에스토니아인과 라트비아인을 포함하여 사레마인들을 카르마의 거점을 함락시켜 패배시킨 후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직후 리보니아 기사단은 푀이데에 석조 요새를 건설했다.
쿠론인들은 1201년과 1210년에 리가를 공격했지만, 부크스호에펜의 알베르트는 쿠를란트를 덴마크의 발데마르 2세의 속국으로 여겨 대규모 원정을 주저했다. 1229년 알베르트 사후, 십자군은 1230년 조약을 통해 바네마네(쿠를란트 북동부에 위치한 리보니아인, 오셀리아인, 쿠론인이 혼재하는 지역)의 평화적인 항복을 확보했다. 같은 해, 교황 특사 알네아의 발두인은 이 협정을 무효화하고 중앙 쿠를란트 람메키누스의 반다바 통치자 (rex|렉스la)와 협정을 맺어 그의 왕국을 교황청에 넘겼다. 발두인은 쿠를란트의 교황 특사이자 세미갈리아 주교가 되었으나, 독일인들이 로마 교황청에 그를 고발했고, 123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발두인을 특사직에서 해임했다.
사울레 전투에서 사모기티아인과 세미갈리아인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후, 검의 형제단의 잔여 세력은 1237년 튜턴 기사단의 하부 조직으로 재편되어 리보니아 기사단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242년, 리보니아 기사단장 그로닝겐의 안드레아스의 지휘 아래 십자군은 쿠를란트 정복 전쟁을 시작했다. 그들은 리투아니아와의 현대 국경 근처 엠부테까지 쿠론인들을 남쪽으로 몰아붙였고, 쿨디가에 주요 요새를 건설했다. 1245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정복한 쿠를란트의 3분의 2를 리보니아 기사단에, 3분의 1을 쿠를란트 주교구에 할당했다.
1260년 두르베 전투에서 사모기티아인과 쿠론인 연합군은 리보니아 기사단과 튜턴 기사단 연합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그 후 몇 년 동안 십자군은 점차 쿠론인들을 복속시켰고, 1267년 패배한 적들의 의무와 권리를 명시한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정복되지 않은 남부 지역(체클리스와 메가바)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지배하에 통합되었다.
세미갈리아 지역 정복은 1219년 리가 출신 십자군이 리엘루페 강 수로의 주요 항구인 메조트네를 점령하고 세미갈리아 주교구를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이교도 세미갈리아 공작 비에스타르다스와 그의 사모기티아 친족들에 대한 여러 차례의 실패한 원정 이후, 로마 교황청은 1251년 세미갈리아 주교구를 폐지하고 그 영토를 리가 주교구와 리보니아 기사단에 분할하기로 결정했다. 1265년 리엘루페 강변 옐가바에 석조 성이 건설되어 세미갈리아인에 대한 십자군 공격의 주요 군사 기지가 되었다. 1271년 수도였던 언덕 요새 테르베테가 함락되었지만, 공작 나메이시스의 지휘 아래 세미갈리아인들은 1279년 반란을 일으켰고, 트라이데니스 지휘하의 리투아니아군은 아이츠크라우클레 전투에서 리보니아 기사단군을 패퇴시켰다. 나메이시스 공의 병사들은 1280년 리가를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약 1만 4천 명의 십자군이 1281년 투라이다 성을 포위했다. 남은 세미갈리아 언덕 요새들을 정복하기 위해 기사단장 엔도르페의 빌레킨은 1287년 테르베테 성 바로 옆에 Heiligenberg|하일리겐베르크de를 건설했다. 같은 해 세미갈리아인들은 다시 리가를 정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귀환길에 리보니아 기사단들이 그들을 공격했지만 가로자 전투에서 패배했고, 기사단장 빌레킨과 기사 35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새로운 기사단장 콘라드 폰 하트슈타인은 1289년과 1290년 세미갈리아인에 대한 마지막 원정을 조직했고, 도벨레, 라크테, 시다브레의 언덕 요새가 함락되었으며 대부분의 세미갈리아 전사들은 사모기티아인과 리투아니아군에 합류했다.
3. 5. 프로이센과 리투아니아 십자군
튜턴 기사단은 북방십자군을 통해 발트해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프로이센과 리투아니아 지역을 침략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 상인들도 발트해 무역로를 따라 진출하며 이익을 얻었다.[5]
1226년, 마조프셰 공 콘라트 1세는 이교도 프로이센인 정벌에 어려움을 겪자[30] 튜턴 기사단을 초청했다. 기사단은 쿨란트 영유권을 받는 조건으로 프로이센 정복에 나섰고, 이후 리투아니아 대공국과도 전쟁을 벌였다. 교황의 명의 하에 기사단은 프로이센을 통치했다.[31]
이에 앞서 콘라트 1세는 1219년과 1222년, 십자군을 일으켜 프로이센 정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14] 그는 프로이센의 초대 주교 올리브의 크리스티안의 조언을 받아 1220년 도브르진 기사단을 창설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오히려 프로이센의 반격으로 쿨머란트(헬름노 땅)가 침략당했다. 콘라트 1세는 헬름노 땅 국경을 안정시키고 마조비아 공국의 북부를 방어하고자 했다. 당시 마조비아 북부에는 구 프로이센인, 요트빙기아인, 리투아니아인이 거주하며 명확한 국경이 없었다. 콘라트 1세는 군사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튜턴 기사단에게 구 프로이센인 진압을 요청한 것이다.
1248년부터 1282년까지 볼레스와프 겸손왕과 레셰크 흑왕은 요트빙기아인과 리투아니아인을 상대로 여러 차례 원정을 벌였다. 이들은 마조비에, 쿠야비, 루블린 지역을 침략한 이교도 세력을 물리치고 요트빙기아인 영토를 공격했다.[15]
1236년 사울레 전투에서 리보니아 검 기사단이 패배하고 에스토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리보니아 기사단은 튜턴 기사단에 흡수 합병되었다. 튜턴 기사단은 발트해 지역 지배권을 강화하고 리투아니아 정복을 추진했다. 리투아니아 국왕과 왕비는 1253년 기독교로 개종(세례)했고, 1385년 리투아니아는 공식적으로 기독교를 수용했다.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은 타타르인과 체코인의 지원을 받아 튜턴 기사단을 격파했다. 13년 전쟁에서 폴란드 왕국은 튜턴 기사단과 다시 싸웠고, 프로이센 연합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과 연합하여 튜턴 기사단에 대항했다. 그 결과 프로이센 서부 지역은 왕령 프로이센이 되었다.[31]
4. 튜튼 기사단의 역할과 영향
북방십자군과 함께 튜턴 기사단은 큰 이익을 얻었다.[5] 튜턴 기사단은 12세기 말 팔레스타인에서 설립된 독일 십자군 기사단으로, 북방십자군은 이들의 성장 명분을 제공했다.
1226년, 마조비아 공 콘라드 1세는 구프러시아인 진압을 위해 튜턴 기사단을 프로이센으로 불렀다. 마조비아는 10세기에 폴란드 일부가 되었지만, 구 프로이센인, 요트빙기아인, 리투아니아인이 마조비아 북부 국경 없는 영토에 거주하고 있었다. 콘라드 1세는 군사적 약세 때문에 튜턴 기사단을 요청했다.
튜턴 기사단은 동방 정교회 러시아(특히 프스코프 공화국과 노브고로드 공화국) 정복도 시도했는데,[1] 이는 북방십자군과 함께 진행되었다. 1242년 얼음 전투는 러시아 정복 시도에 큰 타격을 주었다.
1236년 사울레 전투에서 리보니아 기사단이 자모기티아인과 세미갈리아인에게 패배하고 에스토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리보니아 기사단은 튜턴 기사단에 흡수되어 발트해 지역의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
4. 1. 튜튼 기사단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과의 갈등
튜턴 기사단은 12세기 말 팔레스타인에서 설립된 독일 십자군 기사단으로, 북방십자군은 이들의 성장과 확장에 명분을 제공했다. 1226년 폴란드 서중부의 마조비아 공 콘라드 1세는 기사단에게 국경 방어와 이교도 구프러시아인 정복을 요청했다. 1234년에는 마조비아 콘라드의 폴란드 군대와 튜턴 기사단이 연합하여 제르즈곤 강 전투에서 발트해 프러시아인을 패배시켰다.[16] 프러시아인을 정복한 후, 튜턴 기사단은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전투를 벌였다.1236년 사울레 전투에서 리보니아 기사단이 자모기티아인과 세미갈리아인에게 패배하고 에스토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리보니아 기사단은 튜턴 기사단에 흡수되었다. 이로써 튜턴 기사단은 발트해 지역의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 리투아니아의 왕 민다우가스는 1253년 즉위 후 아내와 함께 세례를 받았지만, 십자군의 공격을 막지는 못했다.
요가일라 대공이 11세의 여왕 폴란드의 야드비가와 결혼한 1386년에 리투아니아는 공식적으로 (가톨릭)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러나 국가 개종 후에도 갈등은 계속되어, 1410년 그룬발트 전투(탄넨베르크 제1차 전투)에서 리투아니아인과 폴란드인은 타타르인, 몰도바인, 체코인의 도움을 받아 튜턴 기사단을 패배시켰다.
1226년, 폴란드 마조프셰 공 콘라트 1세는 이교도 프로이센인에 대한 정벌과 개종에 어려움을 겪어[30] 쿨란트의 영유권과 맞바꾸는 조건으로 당시 헝가리에 있던 독일 기사단을 초청하였다. 기사단은 프로이센을 정복하고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싸웠다. 교황의 명의 하에 기사단은 프로이센을 통치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은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타타르인과 체코인의 지원을 받아 튜턴 기사단을 패배시켰다. 폴란드 왕국은 13년 전쟁에서 독일 기사단과 싸웠고, 프로이센은 프로이센 연합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과 결성하여 독일 기사단과 대립하였으며, 서부 지역은 왕령 프로이센이 되었다.
5. 결과 및 역사적 의의
북방 십자군은 12세기 말, 튜턴 기사단의 성장과 확장에 명분을 제공했다.[16] 1226년, 마조비아 공 콘라드 1세는 튜턴 기사단에게 국경 방어와 구프러시아인 정복을 요청했다. 프러시아인 정복 후, 튜턴 기사단은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전쟁을 벌였다.[16]
1236년 사울레 전투에서 리보니아 기사단이 패배하고 에스토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리보니아 기사단은 튜턴 기사단에 흡수되었고, 튜턴 기사단은 발트해 지역의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 민다우가스는 1253년 즉위 후 세례를 받았지만, 십자군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튜턴 기사단은 리투아니아를 정복하지 못했고, 리투아니아는 1386년 리투아니아의 기독교화를 통해 가톨릭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1410년 그룬발트 전투까지 갈등이 계속되었고, 이 전투에서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연합군은 튜턴 기사단을 패배시켰다.[16]
1221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핀란드-노브고로드 전쟁 상황에 대해 우려하며, 핀란드 주교에게 "야만인"에 대한 무역 금지를 설정하도록 허가했다.[17] 8년 후, 무역 금지는 러시아인에 대한 것으로 명시되었다.[18][19] 1229년, 핀란드의 주교는 교황에게 비스뷔, 리가, 뤼베크에서 노브고로드인에 대한 무역 금지를 시행해 줄 것을 요청했다. 몇 년 후, 교황은 리보니아 검의 형제단에게 핀란드 보호를 위한 군대 파견을 요청했다.[25]
튜턴 기사단의 동방 정교회 러시아(프스코프 공화국, 노브고로드 공화국) 정복 시도는 북방 십자군과 함께 진행되었다.[1] 1242년 얼음 전투는 러시아 정복 시도에 큰 타격을 주었다. 스웨덴도 정교회 노브고로드에 대한 십자군을 수행했다.
에스토니아에서의 리보니아 선교와 십자군 활동은 노브고로드 공화국과의 갈등을 야기했다. 에스토니아인들은 때때로 십자군에 대항하여 러시아인과 동맹을 맺으려고 시도했다.[26] 두 세력 간의 전쟁은 튜턴 기사단의 동쪽 확장을 막았지만, 노브고로드의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 점령 시도도 실패했고, 그 지역은 튜턴 기사단이 지배했다.
발트인과 발트해 연안 슬라브인 사이의 무력 충돌은 십자군 이전부터 빈번했으며, 작센인과 덴마크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십자군 이전의 전투는 육상 및 해상 무역로 장악을 위한 것이었고, 십자군도 이러한 패턴을 계승했다. 군사 작전은 교황의 호소로 정당화된 기사단과 무장 승려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최초의 원정은 제2차 십자군과 동시에 1100년대 중반에 시작되어 16세기까지 지속되었다.
12세기까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지역의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 국가들 사이에 "이교의 쐐기"를 형성했다. 150년 이상, 독일인의 십자군 원정으로 에스토니아는 러시아 공국들과 덴마크, 스웨덴 왕국으로부터 13차례 공격받았다. 일부 에스토니아인들은 덴마크와 스웨덴에 맞서 반격했다.
함부르크의 아달베르트의 파견을 통한 에스토니아인 기독교인 개종 시도는 제한적인 성공만 거두었다. 1180년 독일인 상인들이 다우가바 강 어귀에 상륙했고, 1186년 마인하르트는 주교로 서임되었다.
1193년 교황은 발트해 연안 이교도들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했고, 1198년 베르홀트가 이끄는 십자군이 리보니아에 상륙했다. 십자군은 첫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베르홀트 주교는 중상을 입고 물러났다.
1199년 알베르트 폰 부크스호벤은 발트 국가들의 기독교화를 담당하도록 임명되었다.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북부 정복과 기독교화가 완료되자, 알베르트는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십자군 병사들을 모집했다. 1200년 다우가바 강 어귀에 상륙했지만, 이후 독일에서 많은 병사들이 파병되었다.
리보니아 검을 찬 형제단은 1202년 설립되었다. 1201년 알베르트 주교에 의한 리가 시장 개설은 경제적 번영을 가져왔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발트 해 연안 국가들에 성모 마리아의 이름을 봉헌하고, 테라 마리아나라고 명명했다.
덴마크와 스웨덴도 발트해 동쪽 해안 정복을 시도했다. 스웨덴은 1220년 서에스토니아를 침략했지만 실패했다. 덴마크의 발데마르 2세는 1219년 현재 탈린 근처에 상륙하여 요새를 건설했다. 북에스토니아 전체가 덴마크의 지배하에 놓였다.
사레마 섬 지역은 끝까지 저항했고, 그들의 함대는 독일 십자군과의 전투 중에도 덴마크와 스웨덴을 공격했다. 1227년 1월, 교황 특사 빌헬름 폰 모데나가 지휘하는 육군이 얼어붙은 바다를 건너 사레마를 멸망시켰다. 에스토니아 정복 후, 십자군은 쿠로니아와 세미갈리아 지역으로 침공했다.
스웨덴은 핀란드 남부를 병합하고, 1240년 노브고로드 공국을 침공했다. 그러나 같은 해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에게 패배하여 스웨덴의 십자군 활동은 축소되었다. 스웨덴과 노브고로드는 1300년경까지 항쟁했지만, 스웨덴은 그 무렵 십자군 활동을 중단했다. 1323년 두 나라 사이에 "슈르셀부르크의 화의"가 성립되면서 스웨덴의 십자군은 종식되었다. 그러나 두 나라의 군사적 충돌은 15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었고, 노브고로드 공국이 모스크바 대공국에 흡수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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