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대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는 1507년 아빌라에서 태어난 제3대 알바 공작이다. 그는 카스티야 왕국의 귀족으로,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교육을 받았으며, 1524년 푸엔테라비아 총독을 거쳐 1531년 알바 공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1541년 스페인 국왕의 최고 재무관, 1546년 황금 양모 기사단 그랜드 마스터가 되었으며, 펠리페 2세 치세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네덜란드 총독으로 부임하여 '피의 법정'을 설치하는 등 가혹한 통치를 펼쳐 "철의 공작"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네덜란드 반란을 진압하지 못하고 귀국했다. 이후 포르투갈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하여 펠리페 2세의 포르투갈 왕위 계승에 기여했으며, 1582년 리스본에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제3대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 이 피멘텔 |
출생일 | 1507년 10월 29일 |
출생지 | 피에드라히타, 스페인 |
사망일 | 1582년 12월 11일 |
사망지 | 리스본, 이베리아 연합, 스페인 제국, 현대의 포르투갈 |
배우자 | 마리아 엔리케스 데 톨레도 이 구스만 |
자녀 | 페르난도 데 톨레도 가르시아 알바레스 데 톨레도 이 엔리케스 데 구스만 파드리케 알바레스 데 톨레도 이 엔리케스 데 구스만 디에고 알바레스 데 톨레도 이 엔리케스 데 구스만 베아트리스 알바레스 데 톨레도 이 엔리케스 데 구스만 |
직업 | 군인 외교관 정치가 |
충성 | 스페인 왕국 |
계급 | 대장 |
작위 | |
작위 | 제3대 알바 공작 |
존칭 | 가장 뛰어난 분 |
주요 직책 | |
밀라노 총독 | 시작: 1555년 종료: 1556년 군주: 카를 5세 전임자: 페란테 1세 곤차가 후임자: 크리스토포로 마드루초 |
나폴리 부왕 | 시작: 1556년 종료: 1558년 군주: 카를 5세 전임자: 베르나르디노 데 멘도사 후임자: 후안 페르난데스 만리케 데 라라 |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총독 | 시작: 1567년 종료: 1573년 군주: 펠리페 2세 전임자: 마르게리타 디 파르마 후임자: 루이스 데 레케센스 이 수니가 |
포르투갈과 알가르베 부왕 | 시작: 1580년 7월 18일 종료: 1582년 12월 11일 군주: 펠리페 1세 전임자: 신설 후임자: 알브레히트 7세 폰 외스터라이히 대공 |
포르투갈 무관장 | 시작: 1581년 종료: 1582년 군주: 펠리페 1세 전임자: 주앙 6세 데 브라간사 공작 후임자: 테오도시우 2세 데 브라간사 공작 |
군사 경력 | |
참전 전투 | 4년 전쟁 푸엔테라비아 공성전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 튀니스 정복 알제 원정 이탈리아 전쟁 페르피냥 공성전 스페인의 로마 침공 슈말칼덴 전쟁 뮐베르크 전투 비텐베르크 공성전 네덜란드 반란 예밍겐 전투 조동뉴 전투 몽스 공방전 포르투갈 왕위 계승 전쟁 알칸타라 전투 |
기타 정보 | |
![]() |
2. 초기 생애 및 교육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는 1507년 아빌라도 피에드라히타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인 제2대 알바 공작 밑에서 성장하며 카스티야 왕국 귀족으로서 교육을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군사 작전에 참여했으며, 르네상스 인문주의 교육과 함께 여러 언어를 습득했다. 1524년 푸엔테라비아 탈환 작전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고, 1531년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3대 알바 공작 작위를 계승했다. 이후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와 펠리페 2세를 섬기며 군인으로서 경력을 쌓았다.
2. 1. 가문 배경
페르난도는 1507년 10월 29일 아빌라도 피에드라히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파드리케 알바레스 데 톨레도, 2대 알바 공작의 상속자였던 가르시아 알바레스 데 톨레도 이 수니가였고, 어머니는 제4대 백작이자 초대 베나벤테 공작 로드리고 알론소 피멘텔과 그의 아내 마리아 파체코의 딸인 베아트리스 피멘텔이었다. 페르난도는 1510년, 아버지가 아프리카 제르바 섬 원정 중 사망하면서 세 살의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다. 여섯 살에는 할아버지인 제2대 알바 공작을 따라 나바라 정복을 위한 군사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의 어린 시절 교육은 당시 카스티야 왕국 귀족의 전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알바 데 토르메스의 성 궁전에 있는 알바 가문의 공작 궁정에서 이탈리아인 교사 두 명, 즉 시칠리아 출신 베네딕토회 수도사 베르나르도 젠틸레와 세베로 마리니, 그리고 스페인 르네상스 시인이자 작가인 후안 보스칸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는 로마 가톨릭 신앙과 인문주의 사상을 배웠으며, 라틴어를 능숙하게 구사했고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도 알고 있었다.
1524년, 열일곱 살이 된 페르난도는 당시 카스티야의 섭정이었던 이 니고 페르난데스 데 벨라스코, 제2대 프리아스 공작의 군대에 합류하여 프랑스와 나바라 군이 점령하고 있던 푸엔테라비아를 탈환하는 작전에 참여했다. 이 포위 작전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푸엔테라비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531년 할아버지 파드리케가 사망하자, 아버지 가르시아의 장남이었던 페르난도가 알바 공작 작위를 계승했다. 그는 성인이 된 이후 스페인의 군주 카를로스 1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그의 후계자인 펠리페 2세를 섬기며 군사 및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2. 2. 유년 시절 및 교육
페르난도는 1507년 10월 29일 아빌라도 피에드라히타에서 태어났다. 그는 파드리케 알바레스 데 톨레도, 2대 알바 공작의 상속자인 가르시아 알바레스 데 톨레도 이 수니가와 베아트리스 피멘텔의 아들이었다. 어머니 베아트리스는 제4대 백작이자 초대 베나벤테 공작 로드리고 알론소 피멘텔과 그의 아내 마리아 파체코의 딸이었다. 페르난도는 1510년 아버지 가르시아가 아프리카 제르바 섬 원정 중 사망하면서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여섯 살 때 페르난도는 할아버지인 제2대 알바 공작을 따라 나바라 정복을 위한 군사 작전에 참여했다.
그의 유년 시절과 교육은 당시 카스티야 왕국 귀족의 전형적인 방식대로 이루어졌다. 그는 알바 데 토르메스의 성 궁전에 있는 알바 가문의 공작 궁정에서 교육을 받았다. 교사로는 이탈리아인 교사 두 명, 즉 시칠리아 출신 베네딕토회 수도사 베르나르도 젠틸레와 세베로 마리니, 그리고 스페인 르네상스 시인이자 작가인 후안 보스칸이 있었다. 그는 로마 가톨릭 신앙과 인문주의 사상을 배웠으며, 라틴어를 능숙하게 구사했고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도 알고 있었다.
1524년, 열일곱 살이 되자 그는 당시 카스티야의 섭정이었던 이 니고 페르난데스 데 벨라스코, 제2대 프리아스 공작의 군대에 합류하여, 프랑스와 나바라 군대가 점령하고 있던 푸엔테라비아를 탈환하는 작전에 참여했다. 이 포위 작전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푸엔테라비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531년 할아버지 파드리케가 사망하자, 아버지 가르시아의 장남인 페르난도가 제3대 알바 공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성인이 된 후 그는 스페인의 군주 카를로스 1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그의 후계자인 펠리페 2세를 섬기며 경력을 쌓아나갔다.
3. 스페인 국왕의 최고 재무관
1541년,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는 스페인 국왕 카를 1세에 의해 스페인 국왕의 최고 재무관(Mayordomo Mayor del Rey de España)으로 임명되었다.[7] 그는 카를 1세에 이어 펠리페 2세 시대에도 이 직책을 유지하며, 1582년 사망할 때까지 국왕을 보좌했다.[7]
3. 1. 카를 5세 시대
1541년,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는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스페인 국왕이었던 카를 5세(스페인에서는 카를 1세)에 의해 스페인 국왕의 최고 재무관(Mayordomo Mayor del Rey de España)으로 임명되었다.[7] 그는 카를 5세가 사망하는 1556년까지 이 중요한 궁정 직책을 유지했다.1546년에는 황금 양모 기사단의 기사로 임명되어 그의 높은 지위를 다시 한번 확인받았다.
1548년부터 카를 5세는 아들 펠리페 왕자를 자신의 후계자로 본격적으로 준비시키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알바 공작은 펠리페 왕자가 후계자로서 역할을 준비하도록 돕는 마요르도모 마요르로 임명되었다. 그는 펠리페 왕자와 함께 1551년까지 이어진 유럽 여행에 동행했다. 또한 1554년에는 펠리페 왕자가 메리 튜더와 결혼하기 위해 잉글랜드를 방문했을 때 동행했으며, 같은 해 7월 25일 윈체스터 수도원에서 열린 결혼식에 참석한 15명의 스페인 귀족 중 한 명이기도 했다.
3. 2. 펠리페 2세 시대
카를 1세가 사망한 후, 새로운 국왕 펠리페 2세는 알바 공작을 계속 신임하여 1582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최고 재무관으로 두었다.[7] 펠리페 2세는 1563년 우에스카 공작이라는 칭호를 새로 만들어 알바 공작의 아들이자 상속자인 페드리케 알바레스 데 톨레도에게 수여했다.그러나 알바 공작과 펠리페 2세 사이에 항상 순탄한 관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566년, 알바 공작의 아들 페드리케는 오스트리아의 안나 여왕의 시녀인 마그달레나 데 구즈만과의 결혼 약속을 어겨 바야돌리드의 라 모타 성에 투옥되었다. 그는 다음 해 아버지와 함께 플랑드르에서 군 복무를 하는 조건으로 풀려났지만, 1578년 펠리페 2세는 이 사건을 다시 조사하도록 명령했다. 조사 결과, 페드리케는 결혼을 피하기 위해 아버지 알바 공작이 발급한 허가를 이용해 가르시아 알바레스 데 톨레도 이 오소리오의 딸 마리아 데 톨레도와 비밀리에 결혼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로 인해 페드리케는 다시 라 모타 성에 갇혔고, 알바 공작 역시 "엄격한 궁정 의례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1년간 궁정에서 추방되어 우세다로 물러나야 했다.[8] 그의 비서들 역시 처벌을 받았다.[9]
펠리페 2세를 섬기며 알바 공작은 프로테스탄트 세력과의 전쟁에 계속 참여했다. 1559년 카토-캉브레시 조약 체결 이후, 그는 1567년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네덜란드에서 알바 공작은 강압적인 통치를 펼쳤다. 그는 '피의 심판소'라 불린 특별 법정을 설치하여 에흐몬트 백작 라모랄을 비롯한 많은 신교도를 처형했다. 이러한 공포 정치에도 불구하고, 오라녜 공 빌럼 1세를 중심으로 한 북부 네덜란드 지역의 저항은 꺾이지 않았다. 결국 1573년, 알바 공작은 후임 총독인 레케센스와 교체되어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스페인으로 돌아온 후에도 알바 공작은 군사 활동을 이어갔다. 포르투갈 왕위 계승 문제로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알칸타라 전투에서 왕위를 주장하던 돈 안토니우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 승리는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위를 계승하여 이베리아 연합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4. 군사 경력
제3대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는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 치하에서 스페인의 가장 중요한 군사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 그의 군사 경력은 유럽 전역에 걸쳐 있었으며, 여러 주요 전쟁과 군사 작전에 참여하며 명성과 논란을 동시에 얻었다.
초기 경력에서 알바 공작은 오스만 제국의 빈 침공 방어 임무를 맡았고(1532년), 튀니스 정복(1535년)에서 첫 전투 지휘를 경험했다. 이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페르피냥 포위전(1542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슈말칼덴 전쟁 중 뮐베르크 전투(1547년)에서 테르시오를 지휘하여 카를 5세의 결정적 승리에 기여했다.
이후 이탈리아 반도로 활동 무대를 옮겨 스페인-합스부르크 군대의 총사령관을 맡았고, 밀라노 총독(1555년)과 나폴리 부왕(1556년)을 역임하며 교황 바오로 4세 및 프랑스군과의 전쟁(1556-1557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의 경력 중 가장 논란이 되는 시기는 네덜란드 총독(1567-1573년) 재임 기간이다. 펠리페 2세의 명을 받아 네덜란드 독립 전쟁 초기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고난 위원회'(일명 '피의 법정')를 설치하고 수많은 처형을 단행하는 등 극도로 강경한 탄압 정책을 펼쳤다. 이는 네덜란드인들에게 깊은 반감을 샀고, 그에게 '철의 공작'이라는 악명을 안겨주었다.[16][17][18] 그의 잔혹한 통치는 반(反)스페인 흑색 선전의 주요 소재가 되기도 했다.[19]
말년에는 1580년 포르투갈 왕위 계승 위기 당시 군대를 이끌고 리스본을 점령하여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위를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1580년), 초대 포르투갈 부왕으로 임명되어 사망할 때까지(1582년) 그 직위를 유지했다.[30]
4. 1. 오스만 제국 및 프랑스와의 전쟁 (1532-1547)
1532년 페르난도가 제3대 알바 공작이 되자, 카를 5세는 그를 빈으로 파견하여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겼다. 하지만 오스만 군대가 귄스 포위전에서 시간을 지체하며 기세가 꺾여 빈을 공격하지 않고 철수했기 때문에 실제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이 시기 알바 공작은 유럽 전역을 여행했는데, 이때 병사이자 시인인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가 동행했다. 가르실라소는 알바 공작과 가까이 지내며 그의 글쓰기 능력을 활용하여, 전쟁 중 겪는 고된 여정과 알바 공작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담긴 정서적 갈망 등 그의 깊은 감정을 기록으로 남겼다.[10] 이는 후대 역사가들이 알바 공작의 내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알바 공작이 처음으로 전투를 지휘한 것은 1535년 튀니스 정복 때였다. 그는 1535년 6월 초 칼리아리에서 바스토 후작이 이끄는 군대와 함께 출정했다. 7월 14일에는 라 굴레트 요새를 점령했고, 일주일 뒤에는 하이레딘 바르바롯사가 방어하던 튀니스 시를 함락시켰다. 이 승리로 스페인은 서부 지중해에 대한 지배력을 다시 확보하게 되었다.
1542년에는 스페인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군에 맞서 페르피냥 포위전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이 포위전에서의 승리는 알바 공작에게 중요한 군사적 성과였으며, 당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겪었던 주요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된다.
154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로서의 카를 1세는 슈말칼덴 전쟁에서 프로테스탄트 세력과 싸웠다. 이때 알바 공작은 엘베강 유역에서 벌어진 뮐베르크 전투 당시 정예 스페인 육군인 테르시오를 지휘했다. 알바의 테르시오가 감행한 측면 공격은 황제 군대가 작센 선제후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데 크게 기여했다.
4. 2. 밀라노와 나폴리 총독 (1555-1559)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갈등이 이탈리아 반도로 옮겨가면서, 알바 공작은 이탈리아 주둔 스페인-합스부르크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1555년 밀라노 총독, 1556년에는 나폴리 부왕으로 임명되었다.
새로 즉위한 교황 바오로 4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적대적이었고, 프랑스의 앙리 2세에게 스페인군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낼 것을 촉구했다. 교황군은 이 목표를 위해 프랑스군과 연합했다. 1556년 7월, 교황은 펠리페 2세가 나폴리 국왕의 지위를 상실했음을 선언했다. 이에 알바 공작은 주저하지 않고[11] 12,000명의 스페인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이 원정 자금의 일부는 폴란드의 과부 왕비였던 보나 스포르차로부터 빌린 43만 두카트로 충당되었는데, 이 대출금은 '나폴리 자금'으로 알려졌으며 상환되지 않았다.[12] 교황은 휴전을 요청하여 기즈 공작 프랑수아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나폴리로 진군할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스페인군은 프랑스군을 저지하고 생 캉탱 전투에서 격파했다. 프랑스의 지원을 잃은 교황군은 스페인군에게 압도당했고, 알바 공작은 1557년 9월 로마에 입성했다. 결국 교황은 평화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13]
1559년 4월, 알바 공작은 카토-캉브레지 조약의 서명자 중 한 사람이었다. 이 조약은 프랑스와의 전쟁을 종결시키고 스페인이 누에바 에스파냐에 대한 경제적 착취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이탈리아 반도는 오랜 평화의 시기로 접어들었으며, 이는 두 번이나 아내를 잃었던 펠리페 2세와 프랑스의 앙리 2세의 딸 발루아의 이사벨의 결혼으로 더욱 공고해졌다. 알바 공작은 파리에서 열린 이 결혼식에서 펠리페 2세를 대리했다.[14]
4. 3. 네덜란드 총독 (1567-1573)
1566년 네덜란드에서 발생한 성상 파괴 운동(Beeldenstormnl)은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국왕은 이 사태에 대응하고 네덜란드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1567년 8월 알바 공작에게 강력한 군대를 주어 브뤼셀로 파견했다.[15] 알바 공작은 도착 직후 기존 총독이었던 파르마의 마르가레타를 대신하여 실권을 장악하고 네덜란드 총독으로서 통치를 시작했다.알바 공작은 네덜란드 귀족들이 국왕에게 반기를 들고 프로테스탄트 이단 사상을 지지한다고 판단하여 강경책을 펼쳤다. 그는 1567년 9월, 반란 가담자와 이단자를 처벌하기 위해 '고난 위원회'를 설치했는데, 이는 네덜란드인들에게 '피의 법정'으로 불리며 공포 정치의 상징이 되었다. 이 위원회를 통해 에그몬트 백작, 호른 백작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다. 또한, 군대 유지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려 했으나 이는 네덜란드 도시들의 거센 반발을 샀고, 빌럼 1세가 이끄는 전면적인 반란으로 이어졌다.
알바 공작은 군사 작전을 통해 반란 진압을 시도했으나, 할렘 포위전 등에서의 잔혹한 진압에도 불구하고 알크마르 포위전에서 패배하는 등 저항을 완전히 꺾지 못했다. 그의 가혹한 통치 방식은 네덜란드인들에게 깊은 반감을 심어주었고, "철의 공작"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16][17][18] 결국 5년 간의 강경 통치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자, 펠리페 2세는 1573년 알바 공작을 해임하고 루이스 데 레케센스를 후임 총독으로 임명했다. 알바 공작은 같은 해 스페인으로 귀국했다.[20]
4. 3. 1. 네덜란드에서의 탄압과 저항



1566년 12월 26일, 알바 공작은 교황 비오 5세로부터 황금 장미와 축복받은 칼과 모자를 수여받았다. 이는 교황이 교황 칙서 ''솔렌트 로마니 폰티피체스''를 통해 그의 가톨릭 신앙 수호 노력을 인정한 것이었다.[15]
같은 해 8월부터 10월까지 네덜란드에서는 칼뱅주의자들이 가톨릭 교회와 수도원을 공격하고 파괴하는 성상 파괴 운동 (Beeldenstormnl)이 발생했다. 이에 펠리페 2세는 1567년 8월 22일, 알바 공작에게 강력한 군대를 주어 브뤼셀로 파견했다. 알바 공작은 도착 즉시 기존의 총독이었던 파르마의 마르가레타를 대신하여 통치권을 장악했다. 그는 네덜란드 귀족들이 국왕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프로테스탄트 교리를 지지한다고 판단했다.
1567년 9월 5일, 알바 공작은 1566년 소요 사태의 책임을 묻고 이단자를 처벌하기 위해 '고난 위원회'를 설립했다. 이 기구는 네덜란드인들에게 '피의 법정'으로 불리며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알바 공작은 대화를 선호하던 온건파 가톨릭 귀족들까지 탄압의 대상으로 삼았다. 대표적으로 펠리페 2세를 위해 싸웠던 가톨릭 장군 에그몬트 백작과 호른 백작이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안트베르펜 시장 안토니 반 스트랄렌, 메르크셈 영주와 얀 반 카셈브로트 등 많은 이들이 이 시기 탄압의 희생양이 되었다. 에그몬트 백작과 호른 백작은 1568년 6월 5일 브뤼셀 시청 광장에서 처형되었으며, 알바 공작은 직접 처형을 지켜보았다. 그는 기존 플랑드르 사법부가 피고인에게 관대할 수 있다고 불신했으며, 나중에는 '고난 위원회'의 현지 협력자들조차 독자적인 목적을 가질 수 있다며 의심했다.
플랑드르에 주둔한 스페인 군대를 유지하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알바 공작은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고 법 제도를 개혁하려 했다. 위트레흐트를 포함한 일부 도시들은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반란을 선포했으며, 이는 곧 네덜란드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침묵공 윌리엄은 프랑스 위그노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윌리엄과 위그노 세력은 여러 네덜란드 도시를 장악했다. 스페인군은 "법, 왕, 그리고 백성을 위해" (Pro lege, rege, et gregela)라는 문구가 적힌 깃발 아래 진군했다.
1572년, 스페인군은 반란군 수비대가 떠난 메헬렌을 점령하고 약탈하는 메헬렌의 스페인 학살을 자행했다. 이후 주트펜과 나르덴을 탈환했다. 할렘 포위전에서는 양측 모두 잔혹한 모습을 보였으며, 결국 할렘이 항복하고 약 2,000명으로 추정되는 수비대 전원이 처형당하는 비극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어진 알크마르 포위전에서는 스페인군이 패배했는데, 이는 네덜란드 반란 중 스페인 정규군이 겪은 첫 번째 주요 패배였다. 알바 공작의 오랜 군사 작전과 가혹한 탄압 정책은 그에게 "철의 공작"이라는 별명을 안겨주었으며,[16][17][18] 이는 반(反)스페인 흑색 선전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19] 그의 악명은 반란 지도자 중 한 명인 필립스 오브 마르닉스, 생트알데고드 영주에 의해 네덜란드 내 반스페인 감정을 고조시키는 선전 활동에 활용되었다.
계속되는 군사 작전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의 상황은 스페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5년간의 탄압, 5,000명 이상의 처형,[20] 그리고 스페인 궁정에 대한 수많은 불만 이후, 펠리페 2세는 결국 정책을 바꿔 알바 공작을 해임하기로 결정했다. 1573년, 루이스 데 레케센스가 후임 총독으로 부임하여 반란군에게 양보하는 유화책을 시도했다. 알바 공작은 같은 해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스페인으로 돌아온 후에도 알바 공작은 왕실 평의회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알비스타스(Albistas)"라고 불리는 보수 강경파의 핵심 인물이었다. 이 파벌에는 이단 심문관 페르난도 데 발데스 이 살라스, 피멘텔 가문, 알부케르케 공작 등이 속해 있었으며, 네덜란드에 대한 강경 노선을 주장했다. 반면, 에볼리 공작과 그의 비서 프란시스코 데 에라소가 이끌던 자유주의적 성향의 "에볼리스타스(Ebolistas)"는 이에 강력히 반대했다. 1573년 에볼리 공작이 사망한 후에는 왕실 비서 안토니오 페레즈가 자유주의 파벌을 이끌었다. 알비스타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펠리페 2세는 직접 "전쟁만으로는 플랑드르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하기도 했다.[21] 그러나 루이스 데 레케센스의 유화책 역시 네덜란드 반란을 종식시키지 못하고 적대 행위가 재개되면서, 펠리페 2세는 다시 알바 공작에게 중요한 궁정 직위를 부여했다.
4. 3. 2. 정책 변화와 귀국
1567년 9월 5일, 알바 공작은 네덜란드에서 "고난 위원회"를 설립했다. 이 기구는 1566년 성상 파괴 운동 당시 가톨릭 교회와 수도원을 공격했던 이들의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었으나, 네덜란드인들에게는 "피의 법정"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알바 공작은 펠리페 2세에게 반기를 들고 새로운 프로테스탄트 교리를 지지한다고 판단한 네덜란드 귀족들을 탄압의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에그몬트 백작과 호른 백작과 같이 펠리페 2세를 위해 싸웠던 가톨릭 귀족들조차 반역죄로 기소되어 1568년 6월 5일 브뤼셀 시청 광장에서 처형되었다. 알바 공작은 기존의 플랑드르 사법부를 불신하여 직접 처형을 지켜보았다. 안트베르펜 시장 안토니 반 스트랄렌, 메르크셈 영주 등 다른 많은 이들도 이 시기 탄압의 희생양이 되었다.
알바 공작은 네덜란드 주둔군 유지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주민들에게 새로운 세금을 부과했다. 위트레흐트를 포함한 일부 도시들이 이에 반발하며 반란을 선포했고, 반란은 곧 네덜란드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프랑스 위그노의 지원을 받은 오라녜 공 빌럼 1세는 반란을 적극적으로 이끌며 많은 네덜란드 도시를 점령했다. 이에 스페인군은 "법, 왕, 그리고 백성을 위해(Pro lege, rege, et grege)"라는 기치 아래 반격에 나섰다.
1572년 스페인군은 반란군이 떠난 메헬렌을 점령하고 약탈하는 메헬렌의 스페인 학살을 자행했으며, 이후 주트펜과 나르덴을 탈환했다. 할렘 포위전에서는 도시가 항복한 후 약 2,000명에 달하는 수비대 전원을 처형하는 잔혹함을 보였다. 그러나 알크마르 포위전에서는 네덜란드 반란군에게 패배하며 스페인 군대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러한 오랜 군사 작전과 가혹한 탄압으로 인해 알바 공작은 네덜란드에서 "철의 공작"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16][17][18] 그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반(反)스페인 흑색 선전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19]
계속되는 군사 작전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의 상황은 스페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5년간의 탄압 동안 5,000명 이상이 처형되었고,[20] 스페인 궁정에도 수많은 불만이 제기되자 펠리페 2세는 결국 정책을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알바 공작을 해임하고 루이스 데 레케센스를 후임 총독으로 임명했다. 데 레케센스는 반란군에게 양보하는 유화책을 시도했다. 알바 공작은 1573년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귀국 후에도 알바 공작은 왕실 평의회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알비스타스(Albistas)"라 불리는 보수적인 제국주의 파벌의 중심인물이었으며, 이 파벌에는 이단 심문관 페르난도 데 발데스 이 살라스, 피멘텔 가문, 알부케르케 공작 등이 속해 있었다. 알비스타스는 펠리페 2세에게 네덜란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유지할 것을 조언했다. 이는 에볼리 공작과 그의 비서 프란시스코 데 에라소가 이끌던 자유주의적인 "에볼리스타스(Ebolistas)" 파벌과 극심한 대립을 이루었다. 1573년 에볼리 공작이 사망한 후에는 왕실 비서 안토니오 페레즈가 자유주의 파벌을 이끌었다. 알비스타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펠리페 2세는 "전쟁을 통해서는 플랑드르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없다"고 인정하기도 했다.[21] 그러나 루이스 데 레케센스의 유화책 역시 네덜란드 반란을 종식시키지 못하고 적대 행위가 재개되자, 펠리페 2세는 다시 알바 공작에게 중요한 궁정 직위를 맡기며 신뢰를 보였다.
이후 알바 공작은 포르투갈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하여 알칸타라 전투에서 돈 안토니우가 이끄는 군대를 격파하고,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위를 계승하여 이베리아 연합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4. 4. 포르투갈 왕위 계승 전쟁 (1580-1582)
1578년 알카세르 키비르 전투에서 후계자 없이 사망한 포르투갈 국왕 세바스티앙 1세 이후, 왕위는 그의 증조부인 추기경 포르투갈 국왕 엔히크 1세에게 넘어갔다.[22] 엔히크 1세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사망하여 1580년 포르투갈 왕위 계승 위기가 발생했다.[23]왕위 계승자 중 한 명인 크라투의 안토니우는 베자 공작 루이스 인판테의 사생아이자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의 유일한 남자 혈통 손자였다. 그는 1580년 6월에 스스로 왕으로 선포했다.[24][25]
그러나 포르투갈의 이사벨라를 통해 마누엘 1세의 또 다른 손자였던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안토니우를 포르투갈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펠리페 2세는 알바 공작 페르난도를 군대의 대장으로 임명했다.[26] 당시 알바 공작은 73세였으며 병을 앓고 있었다.[27] 그는 바다호스에서 약 20,000명의 군대를 소집하여[28] 1580년 6월 스페인-포르투갈 국경을 넘어 리스본으로 진격했다. 8월 말, 알바 공작은 알칸타라 전투에서 크라투의 안토니우가 이끄는 포르투갈 군대를 격파하고 리스본에 입성했다. 이 승리로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의 펠리페 1세로 즉위했으며, 스페인 왕가의 지배하에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이베리아 연합이 성립되었다.[29]
펠리페 2세는 1580년 7월 18일 페르난도에게 초대 포르투갈 부왕 및 포르투갈 대사령관 칭호를 수여했다. 이 칭호는 페르난도가 포르투갈에서 스페인 군주를 대표하며 국왕 다음가는 지위를 가졌음을 의미했다. 페르난도는 1582년 사망할 때까지 이 두 칭호를 유지했다.[30]
5. 결혼과 자녀
그의 첫 아이인 페르난도 데 톨레도(1527–1591)는 라 알데우엘라 마을의 방앗간집 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31]
1529년 4월 27일[32] 공작은 사촌인 마리아 엔리케스 데 톨레도 이 구스만(1583년 사망)과 결혼했다. 그녀는 알바 데 리스테 3대 백작인 디에고 엔리케스 데 구스만의 딸이었으며, 둘 사이에는 네 명의 자녀가 있었다.
이름 | 생몰년 | 비고 |
---|---|---|
가르시아 알바레스 데 톨레도 이 엔리케스 데 구스만 | 1530–1548 | |
파드리카 알바레스 데 톨레도 이 엔리케스 데 구스만 | 1537–1585 | 알바 4대 공작 |
디에고 알바레스 데 톨레도 이 엔리케스 데 구스만 | 1541–1583 | 1565년 3월 24일 브리안다 보몽(1540–1588)과 결혼. 레린 백작, 나바라 치안 판사 역임. 아들 안토니오 알바레스 데 톨레도 이 보몽(1568–1639)이 알바 5대 공작 계승. |
베아트리스 알바레스 데 톨레도 이 엔리케스 데 구스만 | ? – 1637 | 아스토르가 5대 후작 알바로 페레즈 오소리오와 결혼. |
6. 말년과 죽음
알바는 1582년 12월 11일 리스본에서 7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유명한 루이스 데 그라나다가 그의 임종을 지켰다.
그의 유해는 알바 데 토르메스로 옮겨져 산 레오나르도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1619년에는 살라망카의 산 에스테반 수도원으로 이장되었다. 1983년 살라망카 지방 의회 기금으로 그의 무덤 위에 묘소가 세워졌다.
7. 유산 및 평가
1904년 네덜란드 언론과 네덜란드 하원에서는 당시 진행 중이던 아체 전쟁 중 북부 수마트라의 아체 정복 과정에서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수많은 민간인을 살해한 혐의를 받은 네덜란드 지휘관 고트프리트 코엔라트 에른스트 판 달렌의 행위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판 달렌을 비판하는 일부는 그의 행위를 네덜란드 역사 속에서 여전히 부정적으로 기억되는 알바 공작이 저지른 잔혹 행위와 비교했다.[35] 이는 알바 공작이 후대에도 여전히 폭압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이다.
참조
[1]
웹사이트
Spain and Felipe II 1556–64
https://web.archive.[...]
2018-10-26
[2]
서적
Fisiografía e historia del Barco de Ávila
Tipografía y encuadernación de Senén Martín
[3]
서적
The World's Great and Eccentric Characters: Their Lives and Their Deeds
[4]
간행물
The London Magazine; Or, Gentleman's Monthly Intelligencer
[5]
서적
Grandes personajes del Siglo de Oro español
Ediciones Palabra S.A.
[6]
서적
The Rise of the Dutch Republic
London
[7]
간행물
La obra de Julio de Atienza y Navajas, barón de Cobos de Belchite y marqués del Vado Glorioso en "Hidalguía"
Instituto Salzar y castro
[8]
문서
Por romper el estricto protocolo de La Corte.
[9]
문서
Documents about the causes that motivated the prission of D. Fadrique, son of the duke of Alba, and that the same time, the duke himself
[10]
서적
Soldado de La España Imperial, El Duque de Alba
La Esfera de los Libros
[11]
문서
Letter from the Duque of Alba to Paul IV
https://archive.org/[...]
[12]
서적
The Papacy and the Levant, 1204–1571
https://archive.org/[...]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13]
문서
Virreyes de Nápoles
https://archive.org/[...]
[14]
웹사이트
Los escritos de Herrera Casado. Artículos y comentarios sobre Guadalajara. Diciembre 2010. La boda de Felipe II en Guadalajara – 1560. (Herrera Casado's writings. Articles and opinions on Guadalajara. December 2010. The wedding of Felipe II in Guadalajara – 1560
http://www.herreraca[...]
2013-11-17
[15]
서적
La Casa de Alba
La Esfera de los Libros, S. L.
[16]
서적
One Allied Sailor
https://books.google[...]
Lulu.com
2023-03-13
[17]
서적
Great Economic Thinkers from Antiquity to the Historical School: Translations from the series Klassiker der Nationalökonomie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23-03-13
[18]
웹사이트
De leerschool: tijdschrift voor kweekelingen
https://books.google[...]
J. van Noorduyn en Zoon
2023-03-13
[19]
학술지
El duque de Alba en la conciencia colectiva de los flamencos
https://www.academia[...]
2017-11-02
[20]
서적
The Dutch Republic: its Rise, Greatness, and Fall 1477–1806
Clarendon Press
[21]
문서
No es posible llevar adelante lo de Flandes por la vía de la guerra.
[22]
서적
Epítome de la vida, y hechos de don Sebastián Dezimo Sexto Rey de Portugal
[23]
서적
Colección de documentos inéditos para la historia de España
Academia de la Historia
[24]
웹사이트
Castro
https://books.google[...]
UC Biblioteca Geral 1
2020-11-11
[25]
서적
The Making of an Enterprise: The Society of Jesus in Portugal, Its Empire, and Beyond, 1540–1750
https://books.goo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2020-11-11
[26]
문서
Disposition of Philip II about giving the duke the control of the army
https://archive.org/[...]
[27]
서적
The Baker Who Pretended to Be King of Portuga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8]
서적
The Baker Who Pretended to Be King of Portugal
[29]
서적
España en Europa: Estudios de historia comparada: escritos seleccionados
Universitat de València
[30]
서적
Grandes personajes el Siglo de Oro español
Palabra
[31]
웹사이트
Tercio
https://web.archive.[...]
[32]
웹사이트
Fernando Álvarez de Toledo
https://dbe.rah.es/b[...]
2023-01-10
[33]
문서
Notice about the translación of the body of the Duke of Alba
https://archive.org/[...]
[34]
뉴스
Traslado definitivo de los restos del gran duque de Alba a un mausoleo de Salamanca
http://elpais.com/di[...]
El País
1983-03-26
[35]
문서
DAALEN, Gotfried Coenraad Ernst van (1863–1930)
https://resources.hu[...]
Huygens Institute for the History of the Netherlands
1989
[36]
서적
Fisiografía e historia del Barco de Ávila
Tipografía y encuadernación de Senén Martín
1925
[37]
서적
Grandes personajes del Siglo de Oro español
Ediciones Palabra S.A.
201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