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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랜즈다운 후작 헨리 페티피츠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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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헨리 찰스 키스 페티피츠모리스는 제5대 랜즈다운 후작으로, 1845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는 1866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21세의 나이로 랜즈다운 후작 작위를 상속받았으며, 캐나다 총독(1883-1888), 인도 총독(1888-1894)을 역임했다. 이후 영국 정계에 복귀하여 보수당 야당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전시 연립 내각에서 무임소 장관을 지냈다. 그는 1927년 아일랜드 클론멜에서 사망했으며, 여러 지역과 건물에 그의 이름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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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랜즈다운 후작 헨리 페티피츠모리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랜즈다운 후작
랜즈다운 후작
공식 직함그의 훌륭하신 칭호, 가장 명예로운 랜즈다운 후작
출생 이름헨리 찰스 키스 페티피츠모리스
출생일1845년 1월 14일
출생지영국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런던
사망일1927년 6월 3일
사망지아일랜드, 티퍼레리 주, 클론멜
국적영국
모교옥스퍼드 대학교 베일리얼 칼리지
배우자모드 페티피츠모리스 (랜즈다운 후작 부인)
자녀에블린 캐번디시 (데번셔 공작 부인)
헨리 페티피츠모리스 (제6대 랜즈다운 후작)
찰스 페티피츠모리스 경
베아트릭스 보클레어크 (세인트올번스 공작 부인)
부모헨리 페티피츠모리스 (제4대 랜즈다운 후작)
에밀리 페티피츠모리스 (랜즈다운 후작 부인), 제8대 네언 여경
경력
귀족원 의원임기 시작: 1866년 7월 5일
임기 종료: 1927년 6월 3일
이전: 헨리 페티피츠모리스 (제4대 랜즈다운 후작)
이후: 헨리 페티피츠모리스 (제6대 랜즈다운 후작)
재무위원회 위원임기 시작: 1868년 12월 16일
임기 종료: 1872년 4월 25일
이전: 클로드 해밀턴 경 (1813년–1884년)
이후: 프레더릭 캐번디시 경
육군부 정무차관임기 시작: 1872년 4월 25일
임기 종료: 1874년 2월 17일
이전: 토머스 베어링 (제1대 노스브룩 백작)
이후: 조지 허버트 (제13대 펨브로크 백작)
인도부 정무차관임기 시작: 1880년 4월 29일
임기 종료: 1880년 9월 1일
이전: 에드워드 스탠호프
이후: 조지 빙 (제3대 스트래퍼드 백작)
캐나다 총독임기 시작: 1883년 10월 23일
임기 종료: 1888년 6월 11일
이전: 존 캠벨 (제9대 아가일 공작)
이후: 프레더릭 스탠리 (제16대 더비 백작)
인도 총독임기 시작: 1888년 12월 10일
임기 종료: 1894년 10월 11일
이전: 프레더릭 해밀턴템플블랙우드 (제1대 더퍼린 에이버 후작)
이후: 빅터 브루스 (제9대 엘긴 백작)
육군부 장관임기 시작: 1895년 7월 4일
임기 종료: 1900년 11월 12일
이전: 헨리 캠벨배너먼
이후: 세인트존 브로드릭 (제1대 미들턴 백작)
외무부 장관임기 시작: 1900년 11월 12일
임기 종료: 1905년 12월 4일
이전: 로버트 개스코인세실 (제3대 솔즈베리 후작)
이후: 에드워드 그레이 (제1대 그레이 오브 폴로던 자작)
귀족원 원내대표임기 시작: 1903년 10월 13일
임기 종료: 1905년 12월 4일
이전: 스펜서 캐번디시 (제8대 데번셔 공작)
이후: 조지 로빈슨 (제1대 리폰 후작)
무임소 장관임기 시작: 1915년 5월 25일
임기 종료: 1916년 12월 10일
이전: 마이클 힉스 비치 (제1대 세인트 올드윈 백작)
이후: 아서 헨더슨
소속 정당
정당자유당 (1886년까지)
자유통일당 (1886년-1912년)
보수당 (1912년-1927년)
서훈
훈장KG
GCSI
GCMG
GCIE
PC

2. 초기 생애 및 배경 (1845–1882)

랜즈다운 후작의 캐리커처 (1874년 4월 4일 『배니티 페어』지)


헨리 찰스 키스 페티-피츠모리스는 1845년 런던의 가족 저택인 랜즈다운 하우스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는 헨리 페티-피츠모리스, 4대 랜즈다운 후작이었고, 어머니는 에밀리였다. 그는 영국 총리를 지낸 셸번 경(초대 랜즈다운 후작)의 증손자이며, 외가로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시대의 프랑스 장군 샤를 드 플라오 백작과 영국 해군 제독 조지 엘핀스톤, 1대 키스 자작 등의 후손이다.[2][3]

1863년까지 '클란모리스 자작'이라는 예칭 작위를 사용했고, 이후 아버지의 작위를 계승하기 전까지 '케리 백작'으로 불렸다. 이튼 칼리지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후, 1866년 6월 5일, 21세의 젊은 나이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5대 랜즈다운 후작 작위와 제6대 케리 백작 작위를 계승했다. 이와 함께 윌트셔의 보우드 하우스를 포함한 광대한 영지(142000acre 이상)와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다.[6] 그는 당시 영국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귀족이자 대지주 중 한 명이었다.[1] 상속받은 영지 중 하나인 아일랜드 케리 주의 데린 하우스에서는 1871년부터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다.

작위 계승과 함께 1866년 자유당 소속으로 귀족원에 들어가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 정부 하에서 1869년부터 1872년까지 재무성 경으로 일했고,[39] 1872년부터 1874년까지는 육군 차관을 지냈다.[34][35] 1880년에는 다시 글래드스턴 내각에서 인도 차관으로 임명되어[34][35] 해외 행정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그는 런던의 사교 클럽인 브룩스 클럽의 회원이기도 했다.[7]

2. 1. 가문 및 출생

보우드 하우스, 랜즈다운 가문이 상속받은 주요 영지 중 하나


헨리 찰스 키스 페티-피츠모리스는 1845년 런던의 가족 저택인 랜즈다운 하우스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는 헨리 페티-피츠모리스, 4대 랜즈다운 후작이며, 어머니는 에밀리 (결혼 전 성은 드 플라오, Emily Jane Mercer Elphinstone de Flahautsco, 8대 네언 여경)이다.

그의 가문인 페티-피츠모리스 가문은 아일랜드의 유서 깊은 피츠제럴드 가문의 방계이다.[4][5] 대대로 휘그당 계열의 정치인을 배출한 명문가로, 증조부는 영국 총리를 지낸 윌리엄 페티 (초대 랜즈다운 후작)이며,[36] 조부는 재무상, 내무상, 추밀원 의장 등을 역임한 헨리 페티-피츠모리스, 3대 랜즈다운 후작이다.[36]

외가 역시 저명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외할아버지인 샤를 드 플라오 백작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휘하의 프랑스 장군이자 외교관이었으며,[2] 외증조부인 조지 엘핀스톤, 1대 키스 자작은 워털루 전투 이후 나폴레옹의 프랑스 탈출을 저지하고 세인트헬레나로의 마지막 항복을 감독한 영국 해군 제독이었다.[3] 또한 어머니 에밀리를 통해 나폴레옹 3세 황제와는 외사촌 관계였고, 오르탕스 보나파르트 여왕의 의붓 손자였으며, 프랑스의 외무장관이었던 탈레랑 공의 증손자이기도 했다.[2]

아버지의 작위를 계승하기 전까지 그는 예칭 작위를 사용했다. 1863년까지는 '클랜모리스 자작'(Viscount Clanmaurice영어)으로 불렸고, 1863년부터 아버지가 사망한 1866년까지는 '케리 백작'(Earl of Kerry영어)이라는 예칭 작위를 사용했다.

2. 2. 귀족 작위 및 영지 상속



1863년까지 예칭 작위인 '클란모리스 자작'으로 불렸으며, 1866년 6월 5일 아버지 헨리 페티-피츠모리스, 4대 랜즈다운 후작이 사망하자 21세의 나이로 영국 귀족 작위인 제5대 랜즈다운 후작과 아일랜드 귀족 작위인 제6대 케리 백작 작위를 계승했다. 작위 계승 전까지는 '케리 백작'이라는 예칭 작위를 사용하기도 했다. 작위와 함께 그는 윌트셔의 보우드 하우스를 포함한 142000acre가 넘는 광대한 영지와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다.[6] 그는 당시 영국에서 16번째로 부유한 귀족이자 4번째로 큰 토지 소유주로 추정되었다.[1]

랜즈다운 후작가는 아일랜드의 대지주였으며, 1876년 기준으로 소유한 주요 영지는 다음과 같다.[37]

지역면적
케리주94983acre
미스주12995acre
퀸스 카운티 (리시주)8980acre
더블린주2132acre
림릭주1526acre
킹스 카운티 (오펄리주)617acre
리머릭 시116acre



이 영지들의 연간 수입은 32342GBP에 달했지만, 동시에 상당한 부채를 안고 있어 가계 운영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38]

상속받은 영지 중 하나인 아일랜드 공화국 케리 주의 데린 하우스에서는 1871년부터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으며, 이후 생애의 상당 기간 동안 매년 3개월을 이곳에서 보냈다.

1895년에는 어머니 에밀리가 사망하면서 스코틀랜드 귀족 작위인 제9대 네언 자작 작위도 계승했다.[60]

2. 3. 학력 및 정치 입문

이튼 칼리지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1866년 6월 5일, 21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국 귀족 작위에서 5대 랜즈다운 후작이 되었고, 아일랜드 귀족 작위에서는 6대 케리 백작 작위를 계승했다. 같은 해 자유당 소속으로 귀족원에 입성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의 제1차 글래드스턴 내각 하에서 1868년부터 1872년까지 재무성 경[39]을, 1872년부터 1874년까지 육군 차관[34][35]을 역임했다.

1880년 제2차 글래드스턴 내각이 출범하자 인도 차관[34][35]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아일랜드 자치 문제에 대한 글래드스턴의 정책에 반대하여 사임[35]했으며, 이후 자유당을 탈당했다. 해외 행정 경험을 쌓은 후 1883년 캐나다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2. 4. 사교 활동

그는 챗스워스 하우스의 스펜서 캐번디시, 8대 데번셔 공작, 멘트모어 타워의 로즈베리 경, 트링 파크의 남작 라이오넬 드 로스차일드, 건너스베리 공원의 나단 마이어의 아들이자 로스차일드 가문의 창시자인 마이어 암셸의 손자와 같은 저명한 회원들이 있는 런던의 브룩스 클럽 회원 겸 이사였다.[7]

1897년에는 캐슬 하워드의 조지 하워드, 9대 칼라일 백작, 벨턴 하우스의 페레그린 커스트, 6대 브라운로우 남작, 할턴 하우스의 알프레드 드 로스차일드, 스코틀랜드 국경의 더 글렌의 찰스 테넌트 경, 월햄프턴 하우스의 존 포스틀 헤셀틴, 그리고 존 머레이 스콧 경과 함께 영국 국립 미술관의 창립 이사가 되었다.[9]

3. 캐나다 총독 (1883–1888)

1883년부터 1888년까지 캐나다 총독을 역임했다.[40] 랜즈다운 후작이 총독으로 부임했을 당시 캐나다는 격동적인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의 개신교 아일랜드 출신 배경은 가톨릭 아일랜드계에게는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0] 그는 1884년 1월 GCMG 기사 작위를 받았다.[11]

당시 존 A. 맥도널드 경의 내각은 두 번째 임기를 맞이하고 있었으나, 철도 건설과 관련된 스캔들(태평양 스캔들) 의혹과 경제 침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더욱이 1885년에는 노스웨스트 반란과 그 지도자 루이 리엘이 일으킨 논란으로 캐나다 정치의 안정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상황이었다.[14][41]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랜즈다운 후작은 민심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1885년 서부 캐나다 전역을 광범위하게 순방하며 캐나다의 많은 원주민들과 직접 만났다.[41] 이 과정에서 그는 인디언 담당관의 원주민 처우에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추장 크로우풋과 파운드메이커를 지지하는 등 원주민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12]

서부 캐나다에서의 경험은 랜즈다운에게 캐나다의 야외 활동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깊은 애정을 심어주었다. 그는 열렬한 낚시꾼이었으며 겨울 스포츠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캐나다 자연에 대한 애정은 그가 퀘벡 가스페 반도의 캐스카페디아 강 유역에 두 번째 거주지(뉴 디린 캠프, 1884년 건설[13])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14] 이 지역은 이전 총독이었던 아길 공작 존 캠벨과 그의 부인이자 빅토리아 여왕의 딸인 아길 공작부인 루이즈 여사가 사용했던 곳이기도 하다.[12]

랜즈다운은 외교 분야에서도 역량을 발휘하여, 1886년부터 1887년까지 이어진 캐나다와 미국 간의 어업권 분쟁 해결에 기여했다.[14][41] 그는 그로버 클리블랜드 미국 대통령과 새로운 무역 협정을 성공적으로 협상하기도 했으나, 이 협정은 미국 상원에서 최종 비준되지는 못했다. 또한 그는 과학 발전을 지지하여 1884년 영국 과학 진흥 협회의 창립 회의를 주재하기도 했다.[14][41]

그는 퀘벡에서 특히 인기가 높았는데, 유창한 프랑스어 구사 능력 덕분에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의 첫 연설은 큰 박수를 받았다.[12] 그의 프랑스어 실력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휘하의 프랑스 장군이었던 외할아버지 샤를 드 플로 백작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랜즈다운 경은 샤토 프롱트낙 인근의 퀘벡 시타델에서 여러 차례 연설했으며, 몬트리올 겨울 카니발에도 참여하여 부인과 함께 총독 부부로서는 최초로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12]

랜즈다운은 "맑은 하늘, 짜릿한 스포츠, 가티노 통나무의 밝은 불꽃 속에서, 우리 아이들과 친구들이 우리 주변에 모여 있는" 캐나다를 아쉬워하며 임기를 마쳤다.[14] 그는 캐나다에서의 성공에 아내의 공이 컸다고 회고했다. 리도 홀에서 그의 부인이 주최한 행사 중 가장 성공적인 것 중 하나는 400명의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위해 열었던 파티였다. 랜즈다운 부인은 빅토리아 여왕 및 앨버트 왕자 훈장과 제국 인도 왕관 훈장을 받았다. 랜즈다운 경의 군사 비서였던 멜군 경은 훗날 민토 백작 길버트 엘리엇 머리-키닌먼드가 되어 1898년부터 1904년까지 캐나다 총독을 역임했다. 몬트리올 웨스트마운트의 웨스트마운트 공원 옆에 있는 랜즈다운 공원과 랜즈다운 애비뉴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웨스트마운트 정상에 위치한 랜즈다운 리지 및 어퍼-랜즈다운은 빌라 생 마르셀린과 생 조셉 성당 인근에 자리 잡고 있다.[15][4] 전반적으로 그는 캐나다의 안정을 회복하는 데 기여한 훌륭한 총독으로 평가받는다.[41]

4. 인도 총독 (1888–1894)

캐나다 총독 임기를 마친 1888년, 인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GCSI[16]와 GCIE[17] 기사 작위를 받았다. 1888년부터 1894년까지 재임한 이 자리는 당시 영국 총리였던 보수당의 로버트 가스코인-세실, 제3대 솔즈베리 후작이 제안한 것으로, 그의 경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총독 재임 기간 동안 군대, 경찰, 지방 정부, 조폐국 등 여러 분야에서 개혁을 추진했다. 1890년에는 안글로-마니푸르 전쟁이 일어나 마니푸르 왕국이 영국령 인도 제국에 복속되었다. 랜즈다운은 영국 본국에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 주동자 처형을 강행했다. 하지만 1893년 배심제 재판을 제한하려던 시도는 영국 정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경제적으로는 당시 루피 가치 하락으로 영국의 대(對)인도 투자가 줄어드는 문제가 발생하자, 1893년 6월 변동환율제를 폐지하고 1루피당 1실링 4펜스의 고정환율제를 도입했다. 또한 금본위제 도입을 목표로 은화의 자유 주조를 중단시켰다. 이 조치로 루피 환율은 안정되었으나, 인도 내 통화량이 줄어들어 경제 활동이 위축되는 부작용이 나타났다.[43]

대외적으로는 아프가니스탄 국경 지역의 소국인 훈자와 나가르를 병합하고, 시킴 왕국과 치트랄을 보호국으로 삼는 등 제국주의적 확장 정책을 추진했다.[44] 그의 통치 정책은 결과적으로 힌두교도와 무슬림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18]

1894년 임기를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5. 영국 정계 복귀 및 활동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히 다루므로 중복 방지를 위해 생략)

5. 1. 육군 장관 (1895–1900)

제3차 솔즈베리 후작 내각의 방위 위원회 회의. 왼쪽부터 고셴 재무 장관, 솔즈베리 후작 수상, 랜즈다운 후작(당시 육군 장관), 데본셔 공작 추밀원 의장, 아서 밸푸어 하원 원내 총무


영국 귀국 후, 랜즈다운은 자유 연합당 소속으로 보수당과 연합했다.[35] 1895년 6월, 솔즈베리 경을 수상으로 하는 보수당과의 연립 정권에서 육군 장관으로 임명되었다.[45] 그는 육군 총사령관으로 가넷 울슬리 원수를 임명하고, 에드워드 카드웰의 노선을 이어받아 육군에 대한 문민 통제를 강화하고자 했다.[35]

그러나 1899년 제2차 보어 전쟁이 발발했을 때, 영국 육군의 준비 부족 문제가 드러나면서 랜즈다운은 비판에 직면했다. 당시 육군 총사령관이었던 울슬리는 보어 군의 규모를 5만 명 이상으로 예상하고 최소 3만 5천 명의 병력 동원이 필요하다고 건의했지만, 랜즈다운은 영국군이 "철저하게 효율적인 상태에 있다"고 판단하며 1만 명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판단 착오로 인해 전쟁 준비가 미흡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그의 탄핵 요구까지 제기되었다.[35][14]

그의 전기 작가 P. B. 웨이트는 랜즈다운이 영국의 군사적 실패에 대해 부당하게 비판받았다고 평가하며, 그가 훌륭한 장관으로서 모든 책임을 지고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주장했다.[14]

5. 2. 외무 장관 (1900–1905)

1900년 10월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하자, 솔즈베리 총리는 내각을 개편하며 외무 장관직에서 물러나고 랜즈다운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랜즈다운은 솔즈베리의 후임인 아서 밸푸어 총리 아래에서도 외무 장관직을 유지했다.

외무 장관으로서 랜즈다운은 우간다 보호령의 위원 윌슨이 안코레 왕국과 맺은 1901년 영국-안코레 협정을 승인했다. 또한 1902년에는 영일 동맹을 런던 자택에서 체결했으며, 이 건물 뒷편은 현재 렌즈다운 클럽으로 사용되고 있다. 1904년에는 프랑스 외무 장관 테오필 델카세영불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19]

당시 영국의 외교 정책 방향을 둘러싸고 내각 내에서는 논쟁이 있었다. G. W. 몽거는 1900년부터 1902년까지의 내각 논의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조지프 체임벌린은 독일과의 동맹을 통해 영국의 '화려한 고립' 정책을 끝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솔즈베리 총리는 기존 정책 유지를 선호했다. 그러나 의화단의 난으로 중국에서의 위기가 고조되고 1900년 랜즈다운이 외무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변화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랜즈다운은 독일 및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 1901년의 이 결정은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영국의 정책은 여러 사건의 영향을 받아 변화했지만, 몽거는 랜즈다운이 이러한 상황 변화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으며, 정책 변화는 그에게 강요된 측면이 있고 이는 영국의 약점을 인정한 것이라고 평가했다.[20]


1903년 6월 15일, 랜즈다운은 귀족원 연설에서 높은 관세를 부과하고 자국 상품에 보조금을 지급하여 영국 시장에서 저가로 판매하는 국가들(이른바 '보조금 지급 제품', 즉 덤핑)에 대해 재정적 보복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해당 국가 상품에 대해 보복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위협을 통해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그의 소속 정당인 자유 연합당은 본래 자유 무역을 지지하던 자유당에서 분리된 정당이었기에, 이 연설은 보호 무역으로의 정책 전환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졌다. 랜즈다운은 보복 관세 위협을 "다른 모든 사람보다 약간 더 큰 리볼버"를 보여주며 존경을 얻는 것에 비유했고, 이 "빅 리볼버(Big Revolver)"라는 표현은 당시 유행어가 되어 연설과 만평 등에서 자주 인용되었다.

1905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같은 해 1월 뤼순을 함락시키자, 랜즈다운은 1월 16일 밸푸어 총리에게 서한을 보내 메이지 천황에게 가터 훈장을 수여하고 영일 동맹을 연장할 것을 제안했다. 5월 동해 해전(쓰시마 해전)에서 일본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자 랜즈다운은 다시 한번 훈장 수여를 건의했다. 이러한 제안은 받아들여져, 국왕 에드워드 7세의 측근인 제2대 이셔 자작 등이 국왕 비서관과 협의하여 훈장 수여에 동의했다. 결국 에드워드 7세는 10월 8일 훈장 수여를 결정하고 이를 랜즈다운에게 통보했다. 다음 해인 1906년, 코넛 공작 아서 왕자를 단장으로 하는 가터 훈장 사절단이 일본에 파견되어 메이지 천황에게 훈장을 수여했다.[50]

5. 3. 보수당 야당 지도자 (1906-1915)

1906년 총선거에서 자유당이 압승하면서 랜즈다운 후작은 귀족원에서 야당 지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는 이미 1903년부터 귀족원 내 보수당 및 자유 연합당 귀족들로 구성된 연합주의자들의 지도자였다.[14] 자유당 정부의 정책 추진을 저지하기 위해, 당시 보수당 대표였던 아서 밸푸어는 귀족원에서 보수당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는 점을 이용하려 했고, 랜즈다운은 이 계획에 핵심적인 협력자였다.[52]

그는 귀족원의 다수 의석을 활용하여 자유당 정부가 추진한 주요 법안들을 부결시키는 데 앞장섰다. 대표적인 예로 초등 교육에서 종교 교육을 배제하려던 '교육 법안'이나 부유한 양조업자의 독점을 제한하려던 '주류 판매 면허 법안' 등이 그의 주도로 귀족원에서 폐기되었다.[52]

필립 알렉시우스 드 라즐로가 그린 랜즈다운 후작, 1920년


1909년, 랜즈다운은 오랜 관례를 깨고 귀족원이 예산안을 심의하여 '인민 예산'을 부결시키는 결정을 주도했다.[53] 이 예산안에는 토지세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지주 귀족들 사이에서 사실상 토지 국유화를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적 예산'이라는 거센 반발을 샀다. 랜즈다운 역시 "토지 과세는 토지 평가를 전제로 하며, 이는 결국 토지 국유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비판하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53]

1911년 정계를 그린 풍자화.
화가 난 환자(의회)에게, 오른쪽에 있는 애스퀴스 의사가 '의회법'이라는 극약을 권하는 한편, 왼쪽에 있는 랜즈다운 의사는 다소 미온적인 '의원 개혁' 정도의 약을 권하고 있다.


예산안 부결은 정치적 위기를 초래했고,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총리는 하원을 해산했다. 1910년 1월 총선거같은 해 12월 총선거 이후에도 자유당은 아일랜드 의회당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유지했고, 예산안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54] 더 나아가 자유당 정부는 귀족원의 거부권을 대폭 축소하는 의회법안을 제출했다.

랜즈다운은 처음에 이 법안에 강하게 반대하며 저항했으나, 자유당 정부는 법안이 부결될 경우 국왕 조지 5세에게 요청하여 법안 통과에 필요한 수백 명의 새로운 자유당 성향 귀족을 임명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55] 상황이 이렇게 되자 랜즈다운은 밸푸어와 함께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귀족원 내 보수당 의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강경한 반대 여론이 높았다.[55] 결국 랜즈다운을 포함한 일부 보수당 귀족들은 투표에 기권하거나("헤저", hedgers) 심지어 법안에 찬성("랫", rats)하는 방식으로 의회법 통과를 도왔다. 법안은 찬성 131표, 반대 114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가결되었다.[55] 이로써 영국 정치사에서 하원의 우위가 확립되는 중요한 계기가 마련되었다.

의회법 통과 이후에도 랜즈다운은 귀족원에서 야당 대표직을 계속 수행했다. 하원에서 아서 밸푸어가 사임하고 내각 경험이 없는 보나 로가 당 대표가 되면서, 상원에서의 랜즈다운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더욱 커졌다. 1914년에는 여성 참정권 운동가인 플로라 드럼몬드와 노라 데이커 폭스(노라 일람)가 그의 자택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들은 얼스터 문제에 대한 정부의 미온적 태도를 비판하며 서프러제트 운동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으나, 결국 기소되어 투옥되었다.[22]

1915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랜즈다운은 H. H. 아스퀴스가 이끄는 전시 연립 내각에 무임소 장관으로 참여했다.

5. 4.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1915-1918)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5년, 갈리폴리 전투를 비롯한 전황이 호전되지 않자 H. H. 아스퀴스 총리는 보수당을 포함한 연립 내각을 구성했다. 랜즈다운 경은 이 연립 내각에 보수당 출신 무임소 장관으로 참여하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1916년 총리로 교체될 때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34][35]

전쟁이 길어지며 전사자가 급증하고 병력 부족 문제가 심각해지자, 랜즈다운 경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윈스턴 처칠, 커존 백작, 오스틴 체임벌린 등과 함께 징병제 도입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징병제 도입에 신중했던 각료들을 설득하여 1916년 5월, 18세에서 41세까지의 남성을 즉시 징병하는 내용의 1916년 병역법 통과를 이끌었다.[56]

그러나 전쟁의 막대한 인적, 재정적, 물적 피해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랜즈다운 경의 입장은 점차 변화했다. 1916년 11월, 그는 강화 각서를 작성하여 동료 각료들에게 회람했다. 이 각서에서 그는 영국의 막대한 전쟁 손실을 지적하며 "가까운 장래에 적국을 타도하고 무조건 항복을 받아낼 수 있을지는 매우 의심스럽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쟁을 불필요하게 길게 끌 경우 발생할 책임 문제를 제기하며, 독일과의 강화 교섭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당시 육군 장관이었던 로이드 조지를 비롯한 강경파 각료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57]

1916년 12월, 아스퀴스 내각이 무너지고 로이드 조지가 이끄는 새 내각이 들어서면서 랜즈다운 경은 각료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또한 보수당 상원 원내대표 자리도 커존 경에게 넘겨주었다.[58]

정부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랜즈다운 경은 전쟁 지속에 대한 회의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1917년 11월 29일, 그는 『데일리 텔레그래프』지에 "랜즈다운 서한"으로 알려진 글을 발표했다. 이 서한에서 그는 연합국이 전후 처리 계획을 명확히 밝히고, 현상 유지를 기반으로 독일과의 조기 강화를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서한은 당시 전쟁 수행 중이던 정부 정책에 반하는 것으로 여겨져 큰 논란을 일으켰다.[23][24][25]

6. 사망 및 유산

1927년 6월 3일, 아일랜드 클론멜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당시 나이는 82세였다.[14] 그의 작위는 장남인 케리 백작 헨리가 상속했다. 그의 유산은 토지가 1044613GBP, 기타 자산이 233888GBP로 평가되어 상속이 허가되었다.[26] 그의 묘는 윌트셔에 있는 그의 보우드 저택 근처 데리힐의 묘지에 있다. 그의 미망인은 1932년에 사망하여 함께 묻혔다.[27]

7. 가족 관계

1869년 11월 8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레이디 모드 에블린 해밀턴(Lady Maud Evelyn Hamilton)과 결혼했다.[34] 그녀는 제임스 해밀턴, 초대 애버콘 공작과 그의 아내 레이디 루이자 제인 러셀(존 러셀, 제6대 베드포드 공작의 딸)의 딸이었다.

모드 에블린 해밀턴, 랜즈다운 후작 부인


부부는 슬하에 2남 2녀, 총 네 자녀를 두었다.

  • 레이디 에블린 에밀리 메리 페티피츠모리스 (1870년 8월 27일 – 1960년 4월 2일): 빅터 캐번디시, 제9대 데본셔 공작과 결혼했다.
  • 헨리 윌리엄 에드먼드 페티피츠모리스, 제6대 랜즈다운 후작 (1872년 1월 14일 – 1936년 3월 5일):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6대 랜즈다운 후작위를 계승했다.
  • 찰스 조지 프랜시스 페티피츠모리스 경 (1874년 2월 12일 – 1914년 10월 30일): 육군 군인이자 시종으로 활동했다.
  • 레이디 비아트릭스 프란시스 페티피츠모리스 (1877년 3월 25일 – 1953년 8월 5일):[28] 첫 번째로 헨리 베레스포드, 제6대 워터퍼드 후작과 결혼했고, 사별 후 오스본 보클레르, 제12대 세인트 올번스 공작과 재혼했다.

8. 서훈 및 명예

9. 기타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로버트 스트리트에 있는 랜즈다운 공립학교. 랜즈다운 후작의 이름을 딴 여러 장소 중 하나이다.


랜즈다운 후작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여러 지명, 건물, 학교 등이 있다.

'''지리적 위치'''

국가지역명칭
-- 인도우타라칸드 가르왈랜즈다운 마을
-- 캐나다 온타리오토론토랜즈다운 애비뉴(Lansdowne Avenue)
-- 캐나다 온타리오그레이터 서드베리랜즈다운 스트리트
-- 캐나다 온타리오오타와랜즈다운 파크
-- 캐나다 온타리오피터버러랜즈다운 스트리트
-- 캐나다 온타리오사르니아랜즈다운 애비뉴
-- 캐나다 뉴브런즈윅캠벨턴랜즈다운 스트리트
-- 캐나다 뉴브런즈윅프레더릭턴랜즈다운 스트리트
-- 캐나다 퀘벡웨스트마운트(어퍼) 랜즈다운 애비뉴
-- 캐나다 서스캐처원임페리얼랜즈다운 애비뉴
-- 캐나다 유콘-마운트 랜즈다운
-- 인도콜카타랜즈다운 로드 (Sarat Bose Road)
-- 캐나다 노바스코샤-랜즈다운(Lansdowne, Nova Scotia)
--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사니치랜즈다운 로드



'''학교'''

국가지역학교명
-- 캐나다 온타리오그레이터 서드베리랜즈다운 공립학교(Lansdowne Public School)
-- 캐나다 온타리오토론토로드 랜즈다운 공립학교(Lord Lansdowne Public School)
-- 캐나다 매니토바위니펙랜즈다운 공립학교(Lansdowne Public School)
-- 캐나다 온타리오사르니아랜즈다운 공립학교(Lansdowne Public School)



'''교량'''


  • -- 파키스탄 신드 로리: 랜즈다운 다리. 1879년부터 1887년 사이에 건설된 철도 교통용 강철 거더 다리이다.


'''건물'''

  • -- 인도 카르나타카 마이소르: 랜즈다운 빌딩(Lansdowne Building). 1892년경 건설된 시장 건물로, 2012년 부분 붕괴 후 수리 및 복원 중이다.
  • -- 인도 콜카타: 랜즈다운 코트(Lansdowne Court). 주거 개발 지구이다.
  • -- 인도 쿠치베하르: 랜즈다운 홀(Lansdowne Hall). 커뮤니티 홀, 도서관, 프리메이슨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쿠치베하르 지역 행정관 사무실이다.


'''시장'''

'''역'''

'''교육 및 명예'''

1895년 추밀 고문관(PC)에 임명되었다.[45] 또한 여러 대학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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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논문 The Lansdowne Letter 1968
[24] 논문 The Lansdowne 'Peace Letter' of 1917 and the Prospect of Peace by Negotiation with Germany.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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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문서 秦(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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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문서 秦(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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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웹사이트 Sir Henry Charles Keith Petty-FitzMaurice, 5th Marquess of Lansdowne http://www.thepeerag[...] 2010-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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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문서 坂井(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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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문서 中村(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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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간행물 LondonGazette 2010-11-28
[62] 간행물 LondonGazette 2010-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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