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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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치 칸은 칭기즈 칸의 장남으로, 1177년 또는 1184년경에 태어났다. 몽골 제국 초기에 여러 전투에 참여하여 활약했으며, 1206년 칭기즈 칸의 몽골 고원 통일 후에는 영토를 하사받았다. 그는 서방 원정에도 참여하여 중앙아시아 북부를 정복했으나, 동생 차가타이와의 불화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225년경, 칭기즈 칸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그의 영토는 아들 바투에게 상속되어 킵차크 한국의 기반이 되었다. 주치의 출생에 대한 논란과 칭기즈 칸과의 관계는 여러 역사 소설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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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 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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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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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 주치 울루스의 칸 |
출생 | 1182년경 |
사망 | 1225년경 |
군사 정보 | |
전투 | 이르티시 강 전투 금나라 정복 전쟁 이르기즈 강 전투 (미확인) 호라즘 제국 침공 구르간지 공성전 |
신상 정보 | |
왕조 | 보르지긴 가문 |
아버지 (법적) | 칭기즈 칸 |
어머니 | 보르테 |
기타 정보 | |
이름 |
2. 생애
1177년, 1184년 등 여러 해에 출생했다는 설이 있는 주치는 칭기즈 칸의 첫 번째 부인 보르테를 어머니로 둔 장남이었다. 동복 동생으로는 차카타이, 오고타이, 톨루이가 있었다. 당시 몽골에는 적장자 상속 제도가 없었기에 주치는 장남이라는 이유로 특별 대우를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력한 후계자 후보였던 막내 동생 톨루이와 함께 케레이트부 왕 옹 칸의 조카딸과 혼인할 뻔하는 등, 장남으로서 유력한 위치에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젊어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몽골 고원 통일 전쟁에 참전했으며, 특히 서쪽의 강국 나이만과의 전투에서 활약했다.
1206년 칭기즈 칸이 고원을 통일한 후, 주치는 고원 서쪽 알타이 산맥 북부에서 이르티시강 상류 유역에 4개의 천인대를 영토(울루스)로 받았다.[2] 1207년에는 아버지의 명으로 우군을 맡아 숲의 백성(호이인 이르겐)을 평정했다. 오이라트의 쿠도카 베키를 비롯하여, 바이칼호 방면의 부랴트, 바르군, 예니세이강 상류 유역의 토바스, 동강 하류 유역의 키르기스 등이 주치에게 복속되었다.
1211년부터 칭기즈 칸의 금 원정에 동생 차카타이, 오고타이와 함께 우익군(서부군) 장령으로 참여하여 산시 지방을 석권하고 여러 성을 함락시켰다. 이 공으로 핑양 일대를 투하령으로 받아, 이후 핑양로는 대대로 주치 가문의 영토가 되었다.
메르키트 잔당을 쫓아 키프차크 초원까지 간 군단은 카라쿰 전투에서 알라웃딘 무함마드가 이끄는 호라즘 군을 격파했다. 1219년부터 시작된 서방 원정에서 우익 지휘관으로서 중앙아시아 북부를 진격하여, 전역의 발단이 된 도시 오트라르를 공략하고 시르다리야강을 따라 시그나크, 잔드, 얀기칸트를 정복했다. 시그나크에서는 주민들이 주치의 항복 요구 사자를 참살했기 때문에 몽골군은 공략 후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고 주민을 몰살했다고 한다.
이후 중앙아시아의 마 와라 안 나흐르에서 아무다리야강을 따라 호라즘 샤 왕조의 본거지 호라즘의 주읍 우르겐치를 공격했으나, 동생 차카타이와의 불화로 공략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 때문에 칭기즈 칸의 불만을 샀지만, 사이가 좋은 동생 오고타이가 형들 사이에 끼어 지휘를 맡아 무사히 해결했다. 주치는 성을 함락한 후 약탈과 파괴를 꺼렸기 때문에 항복을 기다리는 전법을 취하는 경우가 많아 진군 속도가 늦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러 사료에 따르면, 칭기즈 칸은 4명의 적자 중 후계자를 선택했고, 온화한 셋째 아들 오고타이가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칭기즈 칸은 아들들을 모아 후계자로 누가 적합한지 의견을 나눴지만, 주치와 차카타이가 말다툼을 벌였고, 두 사람이 서로 칸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기 때문에 오고타이가 세워졌다고 한다.[3]
중앙아시아 원정 후, 주치는 몽골 제국 영토 중 북부의 양질의 초원을 유목지로 받았다. 주치의 울루스는 이르티시강 상류 유역에서 발하슈호 북쪽에서 아랄해 방면에 이르는 초원 지대(현재의 카자흐스탄)로 뻗어 나갔다. 주치는 칭기즈 칸에 의해 아랄해 북쪽에서 카스피해 북쪽에 걸쳐 있는 초원 지대의 여러 종족을 정복하는 임무를 맡았고, 칭기즈 칸이 몽골 고원으로 귀환한 후에도 카자흐 초원에 남아 북서방으로의 확대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 사이에 주치는 병을 얻어 군을 진격시킬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몽골 고원에는 주치가 사냥에 몰두하여 군사를 소홀히 하고 있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격노한 칭기즈 칸은 주치에게 소환 명령을 내렸지만, 주치는 병 때문에 귀환할 수 없었고, 1225년경 아버지보다 먼저 병사했다. 칭기즈 칸은 주치가 소환 명령을 따르지 않자 토벌군을 보내려 했지만, 병사 소식이 전해져 크게 슬퍼하고 낙담했다고 전해진다.
2. 1. 출생과 생애 초반
1182년경 칭기즈 칸과 보르테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년도는 1180년, 1184년 설도 있다.[2] 주치의 출생에는 논란이 있는데, 보르테가 메르키트족에게 납치되었다가 구출된 후 9개월 만에 태어났기 때문이다.[4][5] '주치'라는 이름은 중세 몽골어로 '손님', '여행객'을 의미하며,[4] 출생의 불확실성을 반영한다.칭기즈 칸은 주치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했지만, 동생 차가타이를 비롯한 일부 몽골인들은 주치를 사생아로 여겼다.[5] 몽골, 튀르크, 타타르 부족들 사이에서는 주치가 메르키트족의 자식일 것이라는 소문이 확산되었다.[3] 칭기즈 칸은 주치의 혈통에 대한 언급을 금지했으나, 차가타이는 공공연하게 주치의 혈통을 문제 삼았다.
주치는 차가타이와는 갈등이 있었지만, 다른 형제들과는 대체로 우호적이었다.
2. 2. 정복 활동
1206년 이전에 주치는 아버지 칭기즈 칸을 따라 나이만족과의 전투에 참여했다. 1207년 주치는 예니세이 강변의 키르기스, 이만 족을 포함한 시베리아 부족들을 정복했다.[2] 1211년부터 금나라 원정에 참여하여 산시성 지방을 공략했다. 1213년 금나라를 공격할 때, 주치는 황하 강 북쪽 기슭에 도착하여, 군대를 나누어 황하 유역의 부유한 지역을 공략했다.차가타이는 주치를 형으로 인정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공격하며 분쟁을 일으켰다.[3] 1218년 주치는 칭기즈 칸의 지시로 키르키즈를 원정했고, 예니세이 강에 있던 키르키스 족을 중앙에서 공격했다. 같은 해, 화레즘으로 들어가 6만 명의 군사를 격파했다.
2. 3. 호라즘 원정
1219년 칭기즈 칸이 15만~2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서방 원정을 시작했을 때 주치도 참전했다.[8] 주치는 호라즘 원정에 참여하여 시르다리야강 하류 유역을 점령하고, 그해 오타르를 점령했다.[8] 1220년 4월까지 주치는 시그나크, 잔드, 야나칸트 등을 정복하였다.1220년 4월부터 차가타이, 오고타이와 함께 우르겐치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차가타이와 갈등을 빚었다. 칭기즈 칸은 오고타이를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주치와 차가타이를 지휘하게 했다. 1220년 가을부터 주치는 본군을, 오고타이와 차가타이는 우익군 3천 호를 이끌고 우르겐치 성을 공략하였다.
주치는 기존의 몽골군이 성을 함락한 후 약탈과 방화를 일삼는 것과는 달리, 상대가 항복할 때까지 기다리고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러한 전략은 빠른 진군을 어렵게 만들었고, 약탈과 방화를 선호하는 차가타이와 전략과 전술을 놓고 갈등을 일으켰다. 실제로 우르겐치 전투에서 주치는 공성전과 동시에 우르겐치 측에 사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고 협상을 진행했다.
1220년부터 1222년까지 주치는 군사를 이끌고 오트라르, 시가낙, 우즈켄트, 바샨켄트, 잔켄트 일대와 시르다리아 등의 도시를 점령했다.
2. 4. 생애 후반
1218년, 칭기즈 칸은 몽골 무역 상단이 오트라르의 총독에게 살해당하고, 외교적 제안마저 실패하자 중앙아시아의 호라즘 제국에 대한 몽골의 호라즘 제국 침공을 시작했다. 몽골군은 1219년 말 오트라르로 진격했다. 칭기즈 칸은 차가타이와 오고타이를 남겨 도시를 포위하게 하고, 툴루이를 데리고 크즐쿰 사막을 횡단하여 부하라를 공격했다.[1] 한편, 조치는 시르다리야 강을 따라 호라즘의 수도 구르간지 방향으로 진격하여 "가는 길"에 있는 모든 도시를 정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칭기즈 칸은 이 지역을 조치의 영토로 만들 의도였다.[1] 시그나크와 아사나스는 강력하게 저항하여 주민들이 학살되었고, 잔드와 야니칸트는 큰 어려움 없이 점령되었다.[1]1220년 말, 조치는 아랄 해 해안을 따라 남서쪽으로 구르간지로 이동했고, 형제 차가타이와 오고타이는 오트라르를 점령한 후 합류했다.[1] 구르간지 포위전은 4~7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매우 치열했다. 호라즘의 저항군은 몽골군에게 격렬한 시가전을 강요했고, 도시의 많은 부분이 나프타를 태우거나 댐이 붕괴되어 물에 잠겼다.[1] 1221년 도시가 함락된 후, 주민들은 살해당하거나 노예가 되었다.[1]
조치와 차가타이가 구르간지 포위전 진행 방식을 놓고 다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치는 이 도시가 자신의 영토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가능한 한 피해를 줄이고 싶어했다. 칭기즈 칸은 이 내분을 듣고 오고타이가 형제들을 지휘하도록 했다.[1] 그러나 이 이야기는 오고타이의 통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며, 조치가 실제로는 포위전 전체에서 우위를 유지했다는 주장도 있다.[1]
중앙아시아 원정 후, 주치는 몽골 제국 영토 중 북부의 양질의 초원을 유목지로 받았다. 주치의 울루스는 이르티시강 상류 유역에서 발하슈호 북쪽에서 아랄해 방면에 이르는 초원 지대(현재의 카자흐스탄)로 뻗어 나갔다. 또한 주치는 칭기즈 칸에 의해 아랄해 북쪽에서 카스피해 북쪽에 걸쳐 있는 초원 지대의 여러 종족을 정복하는 임무를 맡았다. 칭기즈 칸이 몽골 고원으로 귀환한 후에도 카자흐 초원에 남아 북서방으로의 확대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 사이에 주치는 병을 얻어 군을 진격시킬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몽골 고원에는 주치가 사냥에 몰두하여 군사를 소홀히 하고 있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격노한 칭기즈 칸은 주치에게 소환 명령을 내렸지만, 주치는 병 때문에 귀환할 수 없었다.
2. 4. 1. 최후
1227년 2월, 주치는 병으로 사망했다. 정확한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2] 일설에는 칭기즈 칸이 암살했다는 설, 쿨란 카툰에게 암살당했다는 설, 피마자 용액에 중독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2] 자말 알딘 가즈자니에 의하면, 주치는 칭기즈 칸 암살을 시도했다고 한다.[2]1226년 주치는 병이 들어 아버지 칭기즈 칸의 명을 받고도 직접 움직이지 못했다. 칭기즈 칸은 사람을 보내 빨리 그에게 연락할 것을 요청했으나 주치는 주저하였다. 칭기즈 칸이 보낸 다른 정탐꾼들은 주치가 건강하고 사냥을 자주 간다고 보고했다. 주치가 움직이지 않자, 칭기즈 칸은 주치를 의심하여 군사를 보내 토벌을 계획하였으나, 주치의 병사 소식으로 취소하였다.
이야기의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주치는 포위 작전 이후 아버지의 호의를 잃었다. 칭기즈는 그 기간과 파괴 때문에 군사적 실패로 여겼을 것이고, 주치는 또한 전리품의 정당한 몫을 아버지에게 보내지 않는 실수를 범했다. 작전이 끝난 후, 차가타이와 오고타이는 아버지와 합류하기 위해 남쪽으로 가서 반역자 호라즘의 왕자 잘랄 웃 딘을 추격했고, 주치는 북쪽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영토에서 캉글리를 제압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추 강 서쪽의 초원이 포함되었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그는 사냥하는 데 시간을 보내는 것을 선호했는데, 그는 이 활동을 매우 좋아했다. 그가 다시 아버지와 만났는지는 불분명하다.
주치는 칭기즈에게 엄청난 수의 야생 당나귀와 20,000마리의 흰 말을 선물로 보냈지만, 주치가 자신의 영토에 몰두하면서 관계는 꾸준히 악화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칭기즈는 주치에게 자신과 합류하라고 명령했지만, 주치는 그렇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병이 심하다고 주장했다. 한 여행자가 그가 아프지 않고 사냥만 하고 있다고 주장하자 칭기즈는 그를 제압하기로 결심했다. 그럴 수 있기 전에, 1225년 또는 1227년 주치가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주치가 구르간지에서 벌어진 파괴에 너무 분개하여 호라즘인과 비밀 동맹을 맺었고, 이를 알게 된 칭기즈가 주치를 독살하라고 명령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는 조작된 것으로 보인다.
바투는 칭기즈에 의해 아버지의 영토의 통치자로 확정되었고, 그의 형인 오르다는 하위 직위를 맡았으며, 그들의 남동생들은 각각 통치할 땅을 받았다. 주치의 후손들은 더욱 독립적으로 성장하여 결국 킵차크 칸국으로 알려진 국가를 통치하게 되었다. 카자흐스탄 울리타우 지역의 큰 영묘가 전통적으로 주치의 유해의 안식처로 여겨져 왔지만,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에 따르면 훨씬 후에 지어졌으며 무덤의 자리가 아니다.
2. 5. 사후

주치가 사망한 후, 칭기즈 칸의 승인을 받아 그의 둘째 아들 바투가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주치는 카자흐스탄 제즈카잔에서 북동쪽으로 50km 떨어진 카라간다주 울르타흐 산의 영묘에 묻혔다.[9] 그의 묘소는 켄기르 강 왼편 연안 북동쪽, 강변 왼쪽 제방에 있다. 큰 영묘는 그의 묘소이고, 묘소 건물 입구 오른쪽에는 그의 아내로 추정되는 작은 규모의 묘소가 있다. 그가 낙마하여 사망했다는 전설은 제즈카즈잔 인근 지역에 절름발이 전설로 전해졌으며, 후에 '절름발이 엉덩이'라는 만화의 소재가 되었다고 한다.
주치의 장남 오르다 칸은 백장 한국을 건국했고, 투르가이와 우랄스크는 그의 차남인 바투가 아버지의 속령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그 밖의 주치에게 분배된 영지는 주치의 자손들 사이에 여러 개의 소 울루스로 운영되었으나, 이 소 울루스들은 몽골 본국과는 다르게 다소 자치적인 성격으로 운영되었다.
킵차크 한국, 청장 한국, 백장 한국이 붕괴된 이후에도 그의 둘째 아들 샤이반의 5대손 블라드의 장남 아랍샤의 후손이 히바 한국을, 차남 이브라힘 올란의 손자 아불 하이르 칸은 우즈벡 칸국을, 아불 하이르 칸의 손자이자 샤이반의 10대손 무함마드 샤이바니는 부하라 칸국을 세웠다. 그의 13남 토크 테무르의 자손들은 크림 칸국, 카잔 칸국, 카자흐 칸국을 세웠다.
그의 묘소는 잊혀졌다가 16세기 사라프 네이 미 샤리(Sharaf-name-yi shahi)의 기록에 나타나며, 1582년 부하라 칸국의 칸 압둘라 칸 2세의 원정 대목에 나타난다.[10] 1946년 소련의 고고학자에 의해 카자흐스탄 카라간다주 카라간다 시내에서 2km 떨어진 영묘에서 주치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무덤에서 발견된 유골은 오른손이 없었고, 두개골 일부가 파손된 상태였다.
러시아의 고고학자 겸 인류학자 레프 사무이로비치 클라인은 그가 칭기즈 칸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11]
주치에게는 40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후손을 남긴 아들은 14명이었다. 그 중에서도 16세기 이후에도 후손이 살아남은 것은 백장 한국을 다스리던 오르다, 바투 사후 조카들을 대신해 주치 울루스의 가독을 계승한 베르케, 샤이반 왕조의 원조가 되었으며 주치 울루스의 서북쪽 소 영토를 다스린 시반, 주치의 13째 아들로 아스트라한 칸국, 울루그 무하마드, 카잔 칸국, 크리미아 칸국, 하지 길레이 가문의 선조가 된 토가 테무르 등이다.
3. 칭기즈 칸 암살 미수 논란
자말 알딘 가즈자니에 따르면, 주치는 우르겐치 공성전 이후 칭기즈 칸에게 불만을 품고 호라즘 술탄 알라 웃딘 무함마드와 공모하여 칭기즈 칸을 암살하려 했다고 한다.[1] 칭기즈 칸은 주치가 호라즘에 머무른다면 조용히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1]
가즈자니는 주치가 우르겐치 공성전 이후부터 칭기즈 칸에 대한 불만을 품었고, 호라즘 술탄 알라 웃딘 무함마드와 공모하여 칭기즈 칸이 사냥 나갔을 때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가 차가타이가 이를 알고 칭기즈 칸에게 보고하였다고 기록했다.[1] 칭기즈 칸은 "주치가 여기 오는 것을 피하고 호라즘에 머무른다면, 조용히 그를 찔러 말도 없이 죽여라!"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가즈자니는 기록했다.[1]
공식적인 균열은 없었지만, 칭기즈 칸과 주치의 관계는 그의 생애 후반 냉각되었다.[1] 일부 연구자들은 이민족에 대한 주치의 부드러운 태도가 관계 악화의 원인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1]
4. 주치 영묘
1946년 소련의 고고학자에 의해 카자흐스탄 카라간다주 시내 외곽의 영묘에서 주치의 유골이 발굴되었다.[1] 카자흐스탄 제즈카잔에서 북동쪽으로 50km 떨어진 울르타흐 산에 주치의 영묘가 있다.[1] 주치 영묘에서는 오른손이 없고, 두개골의 일부분이 잘린 유골이 발견되었다.[1]
5. 가계
주치는 많은 아내를 두었으며, 그 중 이름이 알려진 아내는 다음과 같다.
- 케레이트족 토그릴 옹 칸의 동생 자하 캄보의 딸 닉투미시 푸진
- 옹기라트 부족의 사르카르두 카툰
- 베르케, 바르카차르와 부리의 어머니 울탄 카툰
- 침파이의 어머니인 보르구트 부족 쿠툴룩 카툰
- 케레이트족 출신으로 탕구트의 어머니 쿠이키 카툰
- 바투의 어머니인 옹기라트 부족 출신으로 보르테 카툰의 조카 알티 노얀의 딸 우키 푸진
- 샤이반의 어머니 네세르
- 신쿰의 어머니 파리스[6]
주치의 첩은 무수히 많았다고 한다. 주치의 아들은 40명이라고 하며, 이 중 이름이 전하는 아들들과 킵차크 한국과 주변 지역의 제후로 활동한 아들들은 18명의 이름이 전한다.[6] 라시드 알딘이 기록한 주치의 아들은 14명이며, 1426년 티무르 제국에서 티무르가 편찬한 칭기즈칸 가문의 족보에는 4명이 더 나타나, 주치의 아들 18명의 이름이 전해진다.[7]
항목 | 내용 |
---|---|
부황 | 태조 철목진(太祖 鐵木眞) - 몽골 제국의 초대 대칸 |
모후 | 광헌익성황후 홍길랄씨(光獻翼聖皇后 弘吉剌氏) |
동생 | 칠합대(察合臺) |
동생 | 태종 와할대(太宗 窩闊臺) - 몽골 제국의 2대 대칸 |
동생 | 예종 타뢰(睿宗 拖雷) - 추존황제(追尊皇帝) |
황후 | 올걸욱진 황후 홍길랄씨(兀乞旭眞 皇后 弘吉剌氏) |
황후 | 소단 황후(蘇丹 皇后) |
주요 아들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생모 | 비고 | |
---|---|---|---|
오르다 칸(斡兒答汗) | 올걸욱진 황후(兀乞旭眞 皇后) | 백장 한국의 초대 대칸 | |
바투 칸(拔都汗) | 우키 푸진 | 청장 한국의 초대 대칸 | |
베르케 칸(別兒哥汗) | 소단 황후(蘇丹 皇后) | 청장 한국의 3대 대칸 | |
베르케체르(別兒哥徹兒) | 미상 | ||
석반(昔班) | 미상 | ||
당올척(唐兀惕) | 미상 | ||
불왜륵(不哇勒) | 미상 | ||
적로혼(赤老渾) | 미상 | ||
승활아(升豁兒) | 미상 | ||
침백(沉白) | 미상 | ||
마합모(馬合謀) | 미상 | ||
올도아(兀都兒) | 미상 | ||
독화첩목아(禿花帖木兒) | 미상 | ||
승고아(升古兒) | 미상 | ||
딸 | 대로한 공주(大魯罕 公主) | 미상 | 탈렬륵적(脫列勒赤)에게 하가(下嫁) |
6. 현대의 평가 및 묘사
주치는 몽골 제국의 장군이자 정치가로, 그의 삶은 영광과 논란으로 가득했다. 군사적 업적과 정치적 영향력은 몽골 제국의 확장과 중앙아시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의 관점에서는 몽골 제국의 서방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주치의 출생에 대한 논란은 여러 역사 소설에서 다뤄진다. 그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는 페르시아어 역사서 『집사』와 몽골어 역사서 『원조비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두 기록은 서로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4] 『집사』에 따르면, 주치는 칭기즈 칸의 부인 보르테가 메르키트 부족에게 납치되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태어났다.[4] 반면, 『원조비사』에서는 보르테가 납치되었다가 돌아왔을 때 이미 임신한 상태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치가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5] 이러한 출생의 비밀 때문에 주치는 '손님', '여행자'라는 뜻의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그의 출신에 대한 의혹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4]
이러한 출생 배경은 주치와 그의 동생 차카타이 사이의 갈등 원인이 되기도 했다. 『원조비사』에 따르면, 차카타이는 주치를 '메르키트의 자식'이라고 비난하며 그가 칸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반대했다.[5]
일본 작가 이노우에 야스시는 소설 『푸른 늑대』에서 주치의 출생에 얽힌 의혹과 칭기즈 칸과의 복잡한 관계를 묘사했다. 이 외에도 진순신의 『칭기즈 칸의 일족』,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작품 등 여러 역사 소설에서 주치의 출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등장한다.
참조
[1]
문서
13世紀前半に編纂された[[世界征服者の歴史]]などでは توشى tūshīとも記され、これに影響されたためか[[プラノ・カルピニ]]もTosu ccanと記す。しかし、14世紀初頭に編纂された『[[集史]]』以降では[[テュルク語]]・[[モンゴル語]]原音に近い表記である جوچى خان jūchī khān と綴られる(村上1976、192-193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문서
『集史』、『五族譜』(Shu‘ab-i Panjgāna)などの記述から
[7]
서적
[8]
서적
A History of Inner Asia
[9]
웹인용
Казахи всегда понимали сакральное значение земли Улытау, — С. Сакенов
http://www.centrasia[...]
2021-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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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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