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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계 인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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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계 인도인은 인도에 거주하는 중국인과 그 후손을 지칭한다. 18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콜카타를 중심으로 정착했으며, 19세기 영국령 인도 제국 시기에 이주가 증가했다. 1962년 중-인 전쟁 이후 억류, 강제 추방, 이동 제한 등 어려움을 겪었지만, 1976년 국교 정상화 이후 상황이 완화되었다. 현재 콜카타와 뭄바이에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으며, 인도-중국 요리의 발전에 기여했다. 주요 인물로는 배우 메이양 창, 배드민턴 선수 자와라 구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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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계 인도인
기본 정보
이름중국계 인도인
원어명印度華人/印度华人
인구85,000명 티베트 공동체 (2018년)
150,000명 티베트 공동체 (2011년)
2,000명 콜카타 거주 중국인 (2013년)
189,000명 중국계 티베트인 및 인도 혈통 포함 (0.01%, 2005년)
5,000–7,000명 중국인 해외 거주자 (2015년)
거주 지역중국인 공동체: 아삼주, 콜카타, 뭄바이
중국인 해외 거주자: 뭄바이, 구르가온, 벵갈루루
사용 언어영어
아삼어
티베트어
암도 티베트어
남서 관화
광둥어
객가어
벵골어
힌디어
마라티어
종교불교
도교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관련 집단중국인
티베트인
부탄인
추가 정보

2. 역사

중국인의 인도 방문은 서기 5세기 승려 법현의 기록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벵골어의 일부 어휘에서도 그 영향을 엿볼 수 있다.[35][40] 하지만 인도 내 중국인 공동체의 본격적인 역사는 18세기 후반, 콜카타 인근에 정착한 무역상 통 아추(Tong Atchew)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41] 그는 설탕 공장을 세우고 중국인 노동자들을 데려와 인도 최초의 중국인 정착지를 형성했다.[11]

이후 콜카타는 중국계 인도인 사회의 중심지가 되었고, 특히 Tiretta Bazaar와 탕그라(Tangra) 지역에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었다.[32] 이들은 주로 상공업에 종사했으며, 특히 피혁 가공, 제화, 중국 요리점 운영 등이 두드러졌다.[32] 20세기 들어 중국 내 정세 불안과 제2차 세계 대전 등의 영향으로 이주민 수가 증가하여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시점에는 그 수가 약 3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부터 티베트 문제와 국경 문제로 중국-인도 관계가 악화되었고, 1962년 중국-인도 국경 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나빠졌다. 많은 중국계 인도인들이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되어 이동의 자유를 제한받고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수천 명이 서부 라자스탄주의 수용소에 강제로 구금되는 등 박해를 겪었다. 이 사건 이후 상당수의 중국계 인도인들은 인도를 떠나 중국으로 귀환하거나 캐나다, 미국, 호주 등지로 이주했다.[32]

1976년 양국 간 외교 관계가 복원되고 1988년 라지브 간디 당시 인도 총리의 중국 방문 등을 계기로 관계 개선 노력이 이루어졌지만, 과거의 상처와 지속적인 해외 이주 등의 영향으로 인도 내 중국계 공동체의 규모는 계속해서 축소되는 경향을 보인다.[32]

2. 1. 초기 역사 (18세기 ~ 20세기 초)

아소카 궁전의 폐허에 있는 중국 승려 법현


중국인이 인도를 방문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서기 5세기, 현재의 탐루크인 탐랄립타(Tamralipta)를 잠시 찾았던 승려 법현의 여행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후 약 16세기 동안의 이민 기록은 명확하지 않으나[35], 벵골어 어휘에는 중국의 영향이 남아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설탕'을 뜻하는 벵골어 단어 chini|치니bn는 중국을 가리키는 단어에서 유래했으며, 도자기를 뜻하는 Chinamati|치나마티bn 같은 단어도 중국의 영향을 시사한다.[10][40]

인도에 정착한 최초의 중국인으로 기록된 인물은 18세기 후반 Budge Budge 근처에 도착한 상인 통 아추(Tong Atchew, 또는 양 다 자오(Yang Da Zhao))이다. 당시 인도 총독이었던 워렌 헤이스팅스는 아추에게 현재 후글리 강변의 부지-부지(Budge Budge) 마을 근처 아치푸르(Achipur) 지역에 사탕수수 농장과 설탕 공장을 세울 수 있도록 토지를 제공했다.[12] 동인도 회사의 1778년 기록에 따르면, 아추는 부지-부지에서 남쪽으로 약 약 9.66km 떨어진 곳에 연간 임대료 45루피로 650비가(약 130 에이커)의 토지를 받았다.[12] 아추는 자신의 농장과 공장에서 일할 중국인 노동자들을 데려왔고, 이는 인도 최초의 중국인 정착지가 되었다. 그러나 아추는 1783년경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22], 이후 중국인 정착민들은 콜카타로 이주했다. 아추가 정착했던 곳은 그의 이름을 따 '아치푸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그의 무덤과 중국 사원은 여전히 남아 있어 중국 설날에는 많은 중국계 인도인들이 방문한다.[41] 아추 사망 후 광둥어를 사용하던 공동체는 콜카타의 Tiretta Bazaar 지역으로 옮겨갔다.[12] 1804년 콜카타 가제트에는 아추의 설탕 공장이 매물로 나왔다는 광고가 실리기도 했다.[22]

콜카타 남순회관(Nam Soon Church, 南顺会馆) 입구


과거 영국령 인도의 수도(1772년~1911년)였던 콜카타는 지리적으로 중국에서 가장 접근하기 쉬운 대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에는 중국인 인구가 많지 않았다. 당시 중국 이민자들은 버마로 가는 것을 더 선호했기 때문이다. 초기 중국 이민자 중 다수는 키더포르(Kidderpore) 부두에서 일했으며, 1788년 경찰 보고서에는 보 바자르 스트리트(Bow Bazar Street) 인근에 상당수의 중국인이 정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837년 영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콜카타의 중국인 인구는 362명에 불과했으며, 이들은 대부분 남성이었고 영국 식민지 시대 인도의 기근 이후 목공 사업을 돕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주요 만남의 장소는 다름탈라(Dharmatolla) 근처 중국인 거리에 위치한 전쟁의 신 관우를 모시는 사원이었다.

한편, 아삼 지역에서는 1838년부터 차 재배지가 조성되면서 영국 당국이 중국인 노동자, 장인, 차 재배자들의 이주를 장려했다. 이들은 영국 소유의 차 농장에서 일했으며, 점차 언어 장벽을 극복하고 현지 아삼인과 교류하며 정착했다. 많은 중국인 남성들이 현지 여성과 결혼하면서 혼혈 후손들이 태어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의 외모는 현지인과 구별하기 어려워졌으며 후손들은 중국어를 잊게 되었다.[23] 이후에도 중국에서 자발적인 이주가 이어지면서 아삼의 중국계 사회는 더욱 다문화적이고 다민족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들은 고된 노동과 끈기로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번영했으며, 아삼 여러 지역에 '차이나 패티'(China Patty)라고 불리는 작은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었는데, 그중 마쿰(Makum)의 차이나 패티가 가장 컸다.[24]

19세기 콜카타의 중국인들은 목수 외에도 돼지기름 제조업자, 구두 제조공 등으로 일했다. 특히 가죽을 다루는 무두질과 가죽 제품 제작은 전통적인 카스트 제도 하에서 힌두교 상위 카스트들이 기피하는 일이었기에 주로 하위 카스트에게 맡겨졌는데, 식민지 인도에서는 고품질 가죽 제품에 대한 수요가 높았고 중국인들이 이 수요를 충족시켰다. 알라바스터(Alabaster)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콜카타에는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면허를 받은 아편굴과 밀수품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치나 바자르'(Cheena Bazaar)도 있었다고 한다. 다만 아편은 1947년 인도 독립 이전까지는 불법이 아니었다.[12]

20세기 초, 객가 공동체는 콜카타의 탕그라(Tangra) 지역으로 이주하여 가죽 무두질 공장과 중국 식당들을 세우며 새로운 거점을 마련했다. 또한 만주 침략과 중일 전쟁의 영향으로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중국 본토에서의 이민이 크게 증가하기도 했다.[12]

2. 2. 중인 전쟁과 그 이후 (20세기 중반 ~ 현재)

1962년 중국-인도 전쟁 발발 이후, 인도 내 중국계 주민들은 인도인들로부터 반인도적 정서를 품고 있다는 의심과 비난에 직면했다. 전쟁의 여파로 인도 정부는 1962년 12월, '인도 방위법'을 통과시켰다.[25] 이 법은 "적대 세력 출신으로 의심되는 모든 사람을 체포 및 구금"할 수 있도록 규정했는데, 적용 범위가 매우 넓어 단순히 중국식 성씨를 가졌거나, 중국 혈통이 조금이라도 섞였거나, 중국인 배우자가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체포될 수 있었다.[26]

이 법에 따라 약 10,000명에 달하는 중국계 사람들이 라자스탄주 데올리에 위치한 사막의 수용소에 구금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모두 스파이 혐의를 받았지만, 단 한 건의 혐의도 법적으로 입증된 바는 없다.[25] 1964년부터 많은 억류자들이 강제로 추방되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비극을 겪었다.[25] 남아있던 사람들은 1965년부터 점차 풀려나기 시작했으며, 마지막 억류자들은 4년 반이라는 긴 구금 생활 끝에 1967년 중반 데올리 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25]

아삼 주에 거주하던 중국계 주민들 역시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여러 지역에서 중국인들은 무장 부대에 의해 갑작스럽게 체포되어 집을 떠나야 했다. 행정 당국은 2~3일 동안 더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이는 사실과 달랐다. 마쿰 지역에서는 체포된 이들이 외양간에 갇혔다가 디브루가르 교도소로 이송되었고, 다른 지역에서도 경찰서 유치장을 거쳐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이들은 창문이 폐쇄된 기차에 태워져 라자스탄주의 데올리 수용소까지 7일간의 고통스러운 여정을 강요당했다. 이 과정에서 유아, 임산부, 노인, 환자 등 사회적 약자들도 예외 없이 체포되어 기본적인 인권마저 침해당했다. 얼마 후 인도 정부는 억류자들을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으로 추방하기로 결정했는데, 정부가 무작위로 추방 대상자 이름을 선정하면서 이미 흩어진 가족들이 다시 헤어지는 비극이 반복되었다. 상당수의 중국계 인도인들이 이렇게 중국으로 추방되었으며, 많은 아삼인 아내들도 자녀와 함께 남편을 따라 중국으로 떠났다. 몇 년 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소수의 억류자들은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했다. 대부분의 재산은 이미 '적성국 재산'으로 간주되어 경매에 넘어간 상태였고, 사회나 정부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채 극심한 고통과 고립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추방된 가족들과는 다시 만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24]

이러한 박해의 결과로 콜카타의 중국인 인구는 전쟁 이전 2만 명에서 절반인 1만 명 수준으로 급감했다. 인도에 남은 중국계 주민들은 여전히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되었고, 대부분 식당 운영, 가죽 가공, 신발 제조 외의 직업을 갖기 어려웠다. 또한 이동의 자유도 엄격히 제한되었다. 이들은 한 달에 한 번 지정된 경찰서에 출석하여 신원을 보고해야 했으며, 1990년대 중반까지는 집에서 몇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으로 여행하려면 사전에 특별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25] 많은 이들이 인도를 떠나 중국으로 돌아가거나 캐나다, 미국, 호주 등 다른 나라로 재이주했다. 특히 중국계 캐나다인 중 객가(客家) 출신 약 2만 명의 대다수가 인도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라는 통계도 있다.

1976년 인도와 중국이 다시 외교 관계를 수립하면서 중국계 인도인들에 대한 억압적인 분위기는 다소 완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인도 국적이 정식으로 허용된 것은 그로부터 20년 이상이 지난 1998년에 이르러서였다. 2005년에는 콜카타의 차이나타운인 탕그라 지역에 처음으로 중국어 간판이 세워지기도 했다.

20세기 말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인도 관계는 여전히 긴장과 협력이 교차하는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1988년 당시 인도 총리였던 라지브 간디의 중국 방문을 계기로 관계 개선의 노력이 시작되었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콜카타의 차이나타운을 관광 자원으로 개발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하지만 오랜 차별과 해외 이주 등의 영향으로 중국계 인도인 공동체의 규모는 계속해서 축소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32]

3. 공동체

오늘날 인도 내 중국계 공동체는 주로 콜카타뭄바이의 특정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36][7]

인도 전체 인구 약 13억 명 중 한족 혈통의 화교는 약 2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들 중 상당수는 광둥성 출신의 객가인이다. 또한, 인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약 10만 명 이상의 티베트족도 거주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중국인 커뮤니티는 콜카타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곳에는 인도에서 유일하게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어 있다.[32]

3. 1. 콜카타 차이나타운

콜카타에서 2014년 새해맞이


티레타 바자르에서의 중국식 아침 식사


콜카타는 인도에서 유일하게 차이나타운을 가지고 있는 도시이다[32]. 콜카타의 차이나타운은 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한 티레타 바자르(Tiretta Bazaar, 때로는 구 차이나타운이라고 불린다)와 교외 지역인 탕그라(Tangra) 두 곳에 형성되어 있다.

콜카타 최초의 중국인 정착은 18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778년 양 타이 차우(통 아체우)가 당시 인도 총독 워렌 헤이스팅스의 허가를 받아 후글리 강변 아치푸르에 설탕 공장을 세우면서 초기 공동체가 형성되었고[12], 1788년 경찰 보고서에는 티레타 바자르 인근에 상당한 중국인 인구가 정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초기 이민자들은 키더포어 부두 노동자나 목수로 일했으며, 이후 객가인들이 가죽 무두질과 제화업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카스트 제도의 영향으로 상위 힌두교도들이 기피했던 가죽 관련 산업은 중국인들에게 중요한 생계 수단이 되었다. 1900년대 초, 객가 공동체는 탕그라 지역으로 이주하여 가죽 무두질 공장과 중국 식당을 설립했다[12]. 만주 침략과 중일 전쟁 시기인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이민이 크게 증가하기도 했다[12].

오늘날 콜카타 차이나타운의 중국계 인도인들은 주로 상공업에 종사한다. 전통적으로 틀니 제작, 가죽 제품 생산, 제화업에 강점을 보였으나[32], 1990년대 이후 콜카타 시의 환경 규제 강화로 피혁 산업이 위축되면서 많은 이들이 중국 요리 식당 운영으로 전환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 요리와 인도 요리가 융합된 독특한 인도식 중식 요리가 발달했다. 현재 차이나타운의 노년층은 가죽 공장, 소스 제조, 신발 가게(다르마톨라 근처 벤틱 거리에 밀집), 식당, 미용실 등을 운영하며, 젊은 세대는 치과 분야로 진출하는 경향이 있다.

차이나타운의 중국계 커뮤니티는 고유한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콜카타의 중국 사원들은 공동체의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한다. 중국 설(음력 설, 农历新年|눙리신녠중국어), 중원절( 中元节|중위안제중국어), 중추절( 中秋节|중추제중국어)과 같은 전통 명절을 기념하며[29], 특히 설날에는 화려한 사자춤( 舞狮|우시중국어)과 용춤( 舞龙|우룽중국어) 공연이 펼쳐진다[30]. 중국어 신문인 ''商报|상바오중국어''(Seong Pow, 인도 해외 중국 상업)가 발행되고 있지만, 2005년 기준 발행 부수는 500부에서 300부로 줄어드는 등 감소 추세이다. 과거 중국계 학생 비율이 높았던 그레이스 링 리앙 영어 학교 역시 2003년 기준 1500명 학생 중 중국계는 약 15%에 불과했다. 종교적으로는 전통 신앙과 더불어 선교 학교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티레타 바자르와 탕그라의 중국인 인구는 점차 감소하고 있다. 2013년 기준으로 콜카타에는 약 2,000명의 중국계 인구가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2]. 콜카타 중국인에 대한 상세한 연구는 장싱(Zhang Xing)에 의해 이루어졌다[8].

3. 2. 뭄바이 및 기타 지역

오늘날 중국계 인도인들은 콜카타뭄바이의 민족 지역에 위치해 있다.[36][7] 뭄바이의 차이나타운에는 400명의 중국계 인도인 가족이 살고 있으며,[36] 2015년 기준 뭄바이의 중국인 인구는 4,000명이다.[36][7]

3. 3. 국외 거주자

인도에 거주하는 중국 국적자들은 주로 뭄바이, 델리, 첸나이, 벵갈루루와 같은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다.[34][4] 특히 뭄바이 인근의 포와이 지역은 ''이코노믹 타임스''에 의해 중국인 국외 거주자들이 "그들끼리 폐쇄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향후 허브" 또는 "떠오르는 중심지"로 묘사되기도 했다.[34][4]

이들 중국 국외 거주자들이 인도 현지 사회에 통합되는 데에는 몇 가지 어려움이 따른다. 우선, 근로 계약에 따라 보통 2~3년 정도만 머무르는 단기 체류가 일반적이어서 지역 사회와 깊은 관계를 맺기 어렵다.[34][4] 또한, 인도의 비자 규정을 준수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인도를 출국했다가 다시 입국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34][4]

4. 문화

(내용 없음)

4. 1. 인도-중국 요리

중국계 인도인들은 인도 요리와 중국 요리의 특징을 결합한 독특한 퓨전 요리인 인도-중국 요리(Indo-Chinese cuisine)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42][27] 이 요리는 오늘날 인도 요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43][28] 특히 벵골 요리에서는 중국 요리의 영향을 뚜렷하게 찾아볼 수 있다.[43][28] 인도 화교와 관련된 문화로서, 인도식으로 현지화된 중화 요리를 가리키는 "인도 차이니즈"라는 용어도 사용된다.[42]

5. 주요 인물

주목할 만한 중국계 인물로는 인도인중국인의 혼혈 후손인 친디언이 있다.[31]


  • 자와라 구타: 배드민턴 선수. 어머니는 중국계 혼혈 인도인이고, 아버지는 인도인이다.
  • 로렌스 리앙: 법률 연구원이자 변호사.
  • 메이양 창: 배우이자 가수.
  • 넬슨 왕: 요식업자. 인도 차이나에서 만주 요리를 고안한 인물이다.[33]
  • 아난드 양: 역사학자.
  • 얀 로: 축구 감독.
  • 제이슨 탐: 무용가, 안무가이자 배우.

참조

[1] 뉴스 Latest India-China border clash turns spotlight on Tibetan refugees in Special Frontier Force https://www.scmp.com[...] 2020-09-04
[2] 뉴스 India's dwindling Chinatown http://www.dw.de/ind[...] 2013-10-17
[3] 웹사이트 僑委會全球資訊網 http://www.ocac.gov.[...]
[4] 뉴스 Why India remains a difficult terrain for 7,000 Chinese expatriates living in the country http://economictimes[...] 2015-08-28
[5] 뉴스 The Assamese Chinese story https://www.thehindu[...] 2020-01-29
[6] 뉴스 Assamese of Chinese origin facing severe identity crisis https://economictime[...]
[7] 뉴스 Mumbai's 3rd generation Chinese eye global jobs, learn Mandarin https://timesofindia[...] 2015-11-03
[8] 서적 The Chinese Community in Calcutta: Preservation and Change https://books.google[...] Universitätsverlag Halle-Wittenberg 2020-06-08
[9] 웹사이트 Xing – The Chinese Community in Calcutta: Preservation … - Miscellaneen - Universitätsverlag Halle-Wittenberg https://uvhw.de/misc[...]
[10] 간행물 The Origin and Development of Bengali Language University of Calcutta Press 1926
[11] 뉴스 Next weekend you can be at ... Achipur https://archive.toda[...] 2014-02-01
[12] 웹사이트 Glimpses from Calcutta’s Old Chinatown: The Oldest Chinatown outside Southeast Asia https://immersivetra[...] 2024-08-16
[13] 서적 Fidalgos in the Far East, 1550-1770: fact and fancy in the history of Macao https://books.google[...] M. Nijhoff 2012-03-02
[14] 서적 T'ien Hsia monthly, Volume 9 https://books.google[...] Original from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Digitized 9 January 2007 2012-03-02
[15] 서적 T'ien Hsia monthly, Volume 9 https://books.google[...] Original from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Digitized 9 January 2007 2012-03-02
[16] 서적 T'ien Hsia monthly, Volume 9 https://books.google[...] Original from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Digitized 9 January 2007 2012-03-02
[17] 서적 The voyage of François Pyrard of Laval to the East Indies, the Maldives, the Moluccas and Brazil, Issue 80, Volume 2, Part 2 https://books.google[...] Printed for the Hakluyt society 2012-03-02
[18] 서적 A handbook of Kerala, Volume 1 https://books.google[...] International School of Dravidian Linguistics 2012-03-02
[19] 서적 The Kunjalis, admirals of Calicut https://books.google[...] Asia Pub. House 2012-03-02
[20] 서적 Indian Pirates https://books.google[...] Concept Publishing Company 2012-03-02
[21] 서적 The voyage of François Pyrard of Laval to the East Indies, the Maldives, the Moluccas and Brazil, Issue 80, Volume 2, Part 2 https://books.google[...] Printed for the Hakluyt society 2012-03-02
[22] 뉴스 The legend of Tong Atchew, the 'first ancestor of the Chinese in India' https://scroll.in/ma[...] 2018-11-18
[23] 뉴스 The Assamese Chinese story http://www.thehindu.[...] 2014-05-17
[24] 뉴스 The Assamese Chinese story https://www.thehindu[...] 2012-11-18
[25] 웹사이트 The 1962 jailing of Chinese Indians http://www.openthema[...] OPEN (Indian magazine) 2014-11-17
[26] 웹사이트 India's Forgotten Chinese Internment Camp https://www.theatlan[...] The Atlantic 2014-11-17
[27] 논문 Creation of Indian–Chinese cuisine: Chinese food in an Indian city 2017-12
[28] 서적 Chinese Cooking ( Non-Veg) Popular Prakashan
[29] 뉴스 City Scope: Dancing to a new tune http://www.scmp.com/[...] 2014-02-04
[30] 뉴스 Chinese New Year Celebration https://web.archive.[...] 2014-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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