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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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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창극은 판소리가 쇠퇴한 후 개화기에 등장한 민속극으로, 여러 배우가 역할을 나누어 연기하는 형식을 취한다. 1908년 원각사 개관을 계기로 창극이 형성되었고, 이후 조선성악연구회를 통해 발전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서양 근대극의 영향을 받았으며, 광복 후 국극으로 불리며 전성기를 맞았으나 6·25 전쟁 이후 쇠퇴했다. 현재는 국립창극단을 중심으로 전통을 잇고 있으며, 판소리, 고대소설, 창작극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다. 창극은 창, 대사, 연기, 연출 등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며, 21세기에는 뮤지컬 등 다른 장르와의 융합을 시도하며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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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
기본 정보
장르한국의 오페라
시작20세기 초
특징판소리의 서사적 전통과 연극적 요소를 결합
역사
기원판소리
발전창극좌를 중심으로 발전
주요 작품춘향전
《심청전》
《흥보전》
특징판소리의 창법과 음악적 특징을 계승
등장인물이 배역을 나누어 연기
무대 장치와 의상, 분장 등을 활용
창극의 형식
등장인물여러 명의 창자들이 배역을 맡아 연기
음악판소리의 선율과 장단을 기본으로 함
연출극적인 요소를 강조하기 위해 다양한 무대 장치와 연출 기법을 사용
창극의 의의
한국 전통 음악극의 대표적인 장르판소리의 대중화와 현대화에 기여
한국 문화의 중요한 자산한국인의 정서와 문화를 담고 있음
창극의 현대적 변화
새로운 소재와 주제현대 사회의 문제와 이슈를 다루는 창극 등장
다양한 장르와의 융합뮤지컬, 연극 등 다른 장르와 결합 시도
해외 진출해외 공연을 통해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알림

2. 창극의 태동과 발전

판소리를 바탕으로 한 창극은 개화기 이후 여러 배우들이 역할을 분담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19세기 중엽 신재효는 판소리를 집대성하여 고정된 형태로 만들었으며, 1908년 원각사 개관과 함께 판소리에 배역과 분창 형식이 도입되면서 창극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7]

창극 형성에는 일본을 통한 서양 근대극의 영향도 있었으며, 신재효는 이러한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했다. 1902년 최초의 황실 극장인 협률사가 개장되어 판소리와 기생들의 가무를 공연했고, 이후 1914년경까지 지방 순회공연이 이어졌다.[7]

1910년대와 20년대에는 광무대, 장안사, 연흥사 등에서 명창들의 독창과 민요를 곁들인 토막극 형태의 공연이 이루어졌으나, 큰 발전은 없었다. 1930년 조선음률협회 조직과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 결성을 계기로 본격적인 창극 운동이 시작되었고, 송만갑, 이동백, 정정렬, 김창룡 등 당대 최고의 명창들이 중심이 되어 창극의 재건과 부흥을 이끌었다.[7]

조선성악연구회 산하 창극좌는 판소리 형식의 잔재를 없애고 무대 미술에 진전을 보이며 창극 형식을 확립했다. 이후 화랑창극단과 합동하여 조선창극단을 만들고 다양한 레퍼토리를 공연했다.[7] 1939년 화랑창극단의 <봉덕사의 종소리>, 동일창극단의 <일목장군>이 공연되었고, 1942년 조선창극단은 <입담춘몽>, <항우와 우미인>, <장화홍련전> 등을 상연했다.[21]

1945년 광복 이후 조선창극단이 발족하고, 1946년 국극 <춘향전>과 <대심청전>이 공연되었다. 국악원 산하 단체들이 <선화공주>, <논개> 등을 공연하며 창극 전성기를 맞았으나, 6·25 전쟁 이후 대부분 분산되었다.[7] 1962년 국립창극단이 창립되어 창극 정립화를 시도하고 있으며, 판소리 재창작, 외국 고전극 각색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해 현대 관객들에게 창극의 매력을 알리고 있다.[3]

2. 1. 창극의 형성 배경

판소리는 한 명의 광대가 여러 역할을 소화하며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었으나, 개화기 이후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판소리를 바탕으로 여러 배우가 역할을 분담하는 형식의 창극이 등장했다. 창극은 판소리의 본질과는 다른 형식을 취한다.[7]

19세기 중엽 신재효는 판소리를 집대성하여 고정된 형태로 만들었다. 그는 판소리 이론가이자 교육가로서 판소리 다섯 마당을 정리하여 전승에 기여했다.[7]

판소리는 시대에 따라 타령, 극가, 구극, 창극, 국극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1908년 원각사 개관과 함께 판소리에 배역과 분창 형식이 도입되면서 창극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1932년 조선성악연구회에 이르기까지 발전했다. 이 시기부터 창극은 구극(舊劇)이라고도 불렸다.[7]

창극 형성에는 일본을 통한 서양 근대극의 영향도 있었다. 신재효는 <춘향가>에서 배역 분창 형태를 시도하고 여자 광대를 양성하는 등 이러한 영향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7]

1902년 최초의 황실 극장인 협률사가 개장되어 판소리와 기생들의 가무를 공연했다. 1914년경까지 협률사와 원각사 일행은 <춘향타령> 등을 가지고 지방 순회공연을 했다. 송만갑 일행도 1914년경 지방 순회공연을 했다.[7]

1910년대 초창기를 지나 20년대에는 광무대(光武臺), 장안사, 연흥사(延興社) 등에서 창극과 유사한 형태의 공연이 이루어졌다. 명창들의 독창과 민요를 곁들인 토막극 형태로 <춘향가>의 일부를 공연하는 수준이었다. 광월단(光月團), 대동가극단(大同歌劇團) 등이 창극 공연을 했으나,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가 발족되기 전까지 큰 발전 없이 답보 상태에 머물렀다.[7]

1930년 조선음률협회 조직과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 결성을 계기로 본격적인 창극 운동이 일어났다. 송만갑, 이동백, 정정렬, 김창룡 등이 중심인물이었고, 오태석, 김연수, 강장원, 김초향, 박녹주, 김소희 등 중견 및 소장 배우들이 참여하여 창극의 재건과 부흥을 목표로 활동했다.[7]

2. 2. 초기 창극

창극은 판소리가 쇠퇴하던 개화기 이후에 형성된 민속악극이다. 판소리는 한 명의 광대가 여러 역할을 소화하며 이야기를 전달하는 반면, 창극은 판소리를 바탕으로 여러 명의 배우가 역할을 분담하는 형식이다.[7]

신재효는 19세기 중엽, 판소리를 집대성하여 고정된 형태로 만든 인물이다. 그는 판소리 작가이자 이론가, 교육가로서 기존의 열두 마당 판소리를 여섯 마당으로 정리했으며, 그 중 다섯 마당은 현재까지 판소리의 고전으로 전해진다.[7]

판소리는 타령, 극가, 구극, 창극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으며, 광복 후에는 국극이라고도 불렸다. 창극은 1908년 궁내부 직할 원각사 개관과 함께 판소리에 배역과 분창 형식을 도입하면서 시작되었고, 1932년 조선성악연구회에 이르기까지 형성되었다. 이 시기부터 창극은 구극(舊劇)이라고도 불렸다.[7]

창극 형성에는 일본을 통한 서양 근대극의 영향도 있었으며, 신재효는 <춘향가>에서 배역 분창 형태를 시도하고 여자 광대를 양성하는 등 이러한 영향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7]

1902년 12월, 한국 최초의 황실 극장인 협률사가 개장되어 기생, 광대, 무동의 공연을 선보였다. 주요 레퍼토리는 광대들의 판소리와 기생들의 가무였다. 협률사와 원각사 이후, 1914년경까지 협률사 일행은 <춘향타령> 등을 가지고 지방 순회공연을 했다. 송만갑 일행도 1914년경 지방 순회공연을 했다.[7]

1910년대 초창기를 지나 20년대에는 광무대, 장안사, 연흥사 등에서 창극과 유사한 입체창 공연이 있었다. 주로 명창의 독창과 민요, 아가 등이 곁들여진 짧은 극 형태로, <춘향가>의 한 부분을 공연하는 정도였다. 광월단, 대동가극단 등이 창극 공연을 했으나,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가 발족되기 전까지 큰 발전 없이 답보 상태였다.[7]

2. 3. 일제강점기 창극

1908년 궁내부 직할 원각사가 개관하면서 기존의 판소리에 배역과 분창 형식을 도입한 창극이 나타났다. 창극은 1932년 조선성악연구회가 결성되기까지 형성기를 거쳤으며, 이 시기부터 '구극(舊劇)'이라고도 불렸다.[7]

1902년 12월, 한국 최초의 황실극장인 협률사가 개장되어 기생, 광대, 무동의 연예를 상연했는데, 주요 레퍼토리는 광대들의 판소리와 기생들의 각종 가무였다. 1914년경까지 협률사 일행은 <춘향가>나 잡가를 가지고 지방 순회공연을 계속하였고, 명창 송만갑 일행도 지방 순회공연을 했다.[7]

1910년대 초창기를 지나 20년대에는 광무대, 장안사, 연흥사 등에서 창극과 비슷한 입체창(立體唱)이 공연되었는데, 명창의 독창이 주를 이루고 민요와 아가(雅歌)를 곁들인 토막극 형태로 <춘향가>의 한 부분을 공연하는 정도였다. 광월단, 대동가극단 등이 광무대 등에서 창극 공연을 했으나,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가 발족될 때까지 큰 발전 없이 답보 상태에 머물렀다.[7]

본격적인 창극 운동은 1930년 조선음률협회 조직과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 결성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송만갑, 이동백, 정정렬, 김창룡 등이 중심인물이었고, 오태석, 김연수, 강장원, 김초향, 박녹주, 김소희 등 중견 및 소장층이 참여하여 창극의 재건, 개혁, 부흥을 목표로 삼았다.[7]

조선성악연구회 산하 단체인 창극좌는 첫 공연으로 <배비장전>을 공연한 이후 광복 전까지 존속하며 상업 극단이 활발하던 시절에 참여했다. 창극좌의 공연은 판소리 형식의 잔재인 도창(導唱), 방창(傍唱), 겸역(兼役) 등을 없애고 무대 미술에도 진전을 보여 창극 형식이 확립되었다고 평가된다. 이후 이들은 화랑창극단과 합동하여 조선창극단을 만들었으며, 판소리 5가와 고대 소설, 각색 사극, 신파 창극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공연했다.[7]

1939년에는 화랑창극단이 <봉덕사의 종소리>를 상연했고, 같은 해 동일창극단이 <일목장군>을 가지고 지방을 순회했다.[21] 1942년 창극좌화랑창극단이 합동하여 조선창극단을 결성하고 <입담춘몽>, <항우와 우미인>, <장화홍련전>을 차례로 상연했다.[21]

2. 4. 해방 이후 창극

1945년 광복 이후, 조선성악연구회의 후신으로 조선창극단이 발족했다. 1946년에는 창악인들을 총망라한 국극(國劇) <춘향전>을 공연했고, 이듬해에는 <대심청전>을 공연했다.[7] 이 해에 국악원 산하의 국극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이들 단체에서 <선화공주>, <논개>, <옥중화(獄中花)>, <해님과 달님> 등을 공연하여 창극의 전성기를 이루었다.[7]

그러나 6·25 전쟁 이후 대부분의 단체들이 분산되었고, 그나마 명맥을 이어오던 몇몇 단체마저 국산 영화 붐 이후 상업 극단으로서의 존립이 어렵게 되었다.[7] 1949년에는 여성 명창들로 구성된 여성국악동호회가 <옥중화와 해님달님>을 공연하여 인기를 끌자, 기성 창극단들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8] 6·25 전쟁 당시 여성 국극단이 난립하면서 1950년 중반에는 창극이 쇠퇴하였다.[8]

1962년 국립극장 산하에 국립창극단이 창립되어 연 3~4회의 공연을 통해 연극으로서의 창극 정립화를 시도하고 있다.[7] 국립창극단은 판소리 다섯 바탕을 창극으로 재창작하고, 부분적으로 전해지는 판소리 고전들을 창극으로 각색하며, 외국 고전극을 창극으로 각색하는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3] 또한 해외 유명 연출가들을 초청하여 창극 작품을 새롭게 재해석하는 "세계 명작 창극" 프로그램을 시작했다.[3]

국립창극단의 노력으로 창극은 현대 관객들에게 다시금 주목받게 되었다. 예를 들어, 2011년 11월에는 한국 고전 소설을 스릴러로 각색한 한태숙 연출의 "장화홍련"이 공연되었고, 2013년 5월에는 고대 그리스 비극 "메데이아"가 창극으로 각색되어 초연되었다.[3] 2014년 3월에는 영화 "서편제"에서 영감을 받은 동명의 판소리 오페라가 무대에 올려졌고, 2015년 3월에는 재일 한국인 연출가 정의신이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코카서스의 백묵원"을 판소리 오페라로 각색하여 호평을 받았다.[3]

3. 창극의 종류

창극은 유래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판소리를 바탕으로 한 창극, 고대소설을 바탕으로 한 창극, 그리고 순수 창작 창극이 있다.[9] 창극은 순수 연극과 연출 과정에서 큰 차이는 없지만,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연출 방법에 차이가 있다.[14]

오페라에서는 창자의 음역에 따라 배역이 결정되기도 하지만, 창극에서는 성별 구분만 있을 뿐 음역 구분은 없다. 따라서 창극의 배역은 음역이 아닌 연기자의 개성과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14] 다만, 여성 창극단의 경우 중후한 음질을 가진 배우가 남자 역할을 맡는 등 음질이 배역 결정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14] 판소리에서는 아니리발림이 서툴러도 창으로 청중을 감동시키는 '소리광대'가 있을 수 있지만, 창극에서는 창뿐만 아니라 아니리와 발림, 즉 연기력이 필수적이다.[14]

3. 1. 판소리 기반 창극

창극은 그 기원에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판소리를 창극화한 것으로, 판소리의 '더늠'과 사설을 그대로 가져와 창극으로 만든 것이다. 《춘향전》, 《심청전》, 《재명전》, 《수궁가》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창극은 판소리의 뛰어난 음악성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지만, 극의 구성이 산만해지는 단점이 있다.[9]

둘째, 더늠이 사라진 판소리 사설이나 고대소설을 바탕으로 창극을 만든 것이다. 더늠의 제약이 없어 연극에 맞는 구성으로 각색할 수 있지만, 음악은 임시로 작곡하거나 편곡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첫 번째 유형보다 음악성이 떨어진다. 《장화홍련전》, 《배비장전》 등이 여기에 속한다.[9]

셋째, 순수 창작 창극으로, 대본을 새롭게 창작한 것이다. 음악은 두 번째 유형과 마찬가지로 임시 작곡 또는 편곡된 것을 사용한다. 《아아앙》, 《해님 달님》 등이 있다.[9]

3. 2. 고대소설 기반 창극

판소리를 창극화시킨 것으로 《춘향전》, 《심청전》, 《재명전》, 《수궁가》 등이 있다. 이것들은 판소리의 기존 가락인 더늠을 그대로 쓰기 때문에 판소리의 고도한 음악성을 차용할 수 있으나 판소리의 구성을 살리다 보니 극으로서 구성이 산만해진 것이 결점이다.[9]

더늠이 소멸된 판소리 사설이나 고대소설의 내용을 창극으로 꾸민 것들도 있는데, 《장화홍련전》, 《배비장전》 등이 있으며, 더늠의 구애가 없으므로 연극에 알맞은 구성으로 각색하여 쓸 수 있다. 다만, 음악은 임시로 작곡 및 편곡하여 쓰므로 음악적으로 보아 판소리를 창극화시킨 것보다는 떨어진다.[9]

3. 3. 순수 창작 창극

창극은 대본을 새로 창작한 형태이며, 음악은 임시로 작곡 및 편곡하여 사용한다. 《아아앙》, 《해님 달님》 등이 순수 창작 창극에 해당한다.[9] 1908년 최초의 창극 공연인 "은세계"는 한국 근대 음악극의 시작을 알렸지만, 창극은 창작 소재 부족 등의 이유로 오랫동안 침체되었다.[2]

최근 국립창극단을 중심으로 창극 부흥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국립창극단은 판소리 완창 및 고전 7바탕을 창극으로 재창작하고, 외국 고전극을 창극으로 각색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3] 또한 해외 유명 연출가들을 초청하여 창극 작품을 새롭게 해석하는 "세계 명작 창극"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3]

이러한 노력으로 현대 관객들에게 호평을 받은 창극 작품들이 다수 제작되었다. 예를 들어 2011년에는 한국 고전 소설을 스릴러로 각색한 한태숙 연출의 "장화홍련"이 공연되었고,[3] 2013년에는 고대 그리스 비극 "메데이아"가 서재형 연출로 창극화되어 초연되었다.[3] 2015년에는 정의신 연출이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코카서스의 백묵원"을 판소리 오페라로 각색하여 큰 호평을 받았다.[3]

4. 창극의 구성 요소

1908년 원각사 창립과 함께 발전하기 시작한 창극은 판소리와 달리 여러 구성 요소를 가진다. 판소리는 1인이 모든 역할을 소화하는 반면, 창극은 여러 명의 창자가 배역을 나눠 맡아 연기와 노래로 극을 이끌어 간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10]

초기 창극은 전문 연출가 부재, 미흡한 무대 장치와 조명 시설 등 여러 한계를 보였다. 배우들은 즉흥적인 연기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10]

1930년대 조선음률협회와 조선성악연구회의 등장으로 창극은 발전했지만, 여전히 신극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49년 이후 여성국극단의 활동은 오히려 창극 발전을 저해하기도 했다.[10]

1962년 국립국극단 창단은 창극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국립국극단은 한국 고유 형식을 살린 창극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흥보가> 공연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로, 무대 장치는 간소화하면서도 다목적으로 활용하고, 무대 좌우에 악사석과 도창석을 배치하여 극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조절했다. 도창은 창, 아니리, 발림을 통해 극의 시작과 끝, 장면 전환을 유기적으로 연결했다.[10]

창극 연기자들은 판소리의 아니리와 발림을 적극 활용하고, 탈춤, 가면극, 인형극 등 한국 전통 민속극 요소를 도입하여 연기의 폭을 넓혔다. 또한, 신극 대사 대신 아니리 조(調)의 대사를 사용했다.[10]

이러한 과정을 통해 창극은 대본, 작곡, 연출, 연기 등 다양한 구성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종합예술로 발전해 왔다.

4. 1. 대본

창극에서도 신극에서와 같이 대본이 필수적이다. '원각사' 시절의 창극 형태와 같이, 판소리의 창자(唱者)들이 배역을 나누어 판소리를 분창(分唱)하는 소박한 형태에서는, 판소리 창자들이 판소리의 사설과 가락을 모두 외고 있으므로 간단한 약속 하에 서로 교대하며 불러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창극이 창극다운 형태를 갖추기 위해서나 판소리를 창극으로 편극하는 경우에는 대본이 필요하다. 창작 창극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오페라의 대본이 순수연극의 대본과 다른 만큼, 창극의 대본도 순수연극의 대본과 다른 면이 있다.[11]

우선 창극은 극중인물의 창과 대사, 그리고 무대 밖에서의 도창(導唱)으로 엮어가므로 이 세 가지를 적당히 배합해야 한다. 춘향전의 경우, 흔히 광한루 장면과 어사 출도 장면은 많은 대조가 된다. 전자에서는 본래 판소리의 이 대목이 방자와 이도령의 대화가 창으로 아기자기하게 엮어져 있으므로 그것을 그대로 옮겨 씀으로써 창이 주가 되게 구성하는 일이 많은 반면, 어사 출도 장면에서는 본래 판소리의 이 대목에서 자진모리 장단의 서사적인 장면 묘사를 빼면 아니리로만 구성되므로, 이것을 창극으로 무대화했을 경우 자진모리로 부르는 대목은 극중 인물의 연기로 대체되고 아니리 부분은 모두 대사로 엮어가므로 창이 결핍된다. 따라서 광한루 장면과 어사 출도 장면은 음악적 균형이 깨지고 있다.[11]

창극은 판소리형 가락으로 부르는 것이 원칙이므로, 대본에서 창 및 도창으로 불리는 부분은 판소리 사설과 같이 4·4조의 운문으로 쓰는 것이 무리가 없다. 판소리를 창극으로 편극할 경우에는 될 수 있는 한 현행 판소리의 사설을 차용하는 것이 판소리 '더늠'을 살리는 데 좋고, 그 더늠을 외고 있는 창자들에게도 편리하다. 따라서 현행 판소리 사설이 아닌 고본(古本)을 차용하면 그만큼 창자들에게 불편하다.[11]

진양과 같은 느린 장단과 자진모리와 같은 빠른 장단으로 부를 경우, 다 같은 길이의 대사일지라도 그 시차가 크므로, 이 점은 창극의 대본 작가·작곡가·연출가·연기자가 고찰해야 할 문제이다. 또 오페라에서 '아리아'와 '레치타티보'가 있는 것처럼, 창극에도 간단한 대사로 처리하는 경우와 극중 인물이 한바탕 소리하여 연기자의 창에 대한 기량을 발휘하는 '아리아' 부분의 설정을 대본에서 미리 시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대에서 벌어지는 극중 장면을 동시에 도창으로 묘사할 경우에는 극중 장면과 도창과의 시차가 없도록 해야 한다.[11]

4. 2. 작곡

창극에서는 오페라와 같이 대본을 바탕으로 작곡이 이루어진다. 창극의 작곡은 대본을 기반으로 하되, 판소리의 음악적 요소를 적극 활용한다. 창극 작곡가는 대본의 사설을 4·4조 운율에 맞게 고치고, 독창, 교창, 제창 등을 설정한다. 또한, 판소리에서 사용되는 장단(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엇모리 등)과 (우조, 평조, 계면조, 경조, 설렁제 등)를 적절히 배치한다.[12]

가락은 대부분 판소리의 것을 차용하므로 엄밀한 의미의 작곡보다는 편곡에 가깝다. 창자의 즉흥적인 창에 맡기는 부분도 있어 엄격하게 고정된 선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12] 창극에는 아직 서양음악에서 말하는 작곡가가 따로 없으며, 판소리 및 창극 연기자 중 작곡 능력이 있는 사람이 이 역할을 맡는다. 이들은 서양음악처럼 악보를 만들기보다는 대본의 극중 인물과 상황에 따라 판소리의 음악적 틀에 맞게 장단과 조를 구전(口傳)으로 전수하여 음악을 지도한다.[12]

창극은 판소리형 가락으로 부르는 것이 원칙이므로, 대본에서 창 및 도창 부분은 판소리 사설과 같이 4·4조의 운문으로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 판소리를 창극으로 편극할 때에는 가능한 한 현재 판소리의 사설을 사용하는 것이 판소리 '더늠'을 살리고 창자들에게도 편리하다.[11]

진양조와 같이 느린 장단과 자진모리와 같이 빠른 장단으로 부를 때, 같은 길이의 대사라도 시간 차이가 크므로, 대본 작가, 작곡가, 연출가, 연기자는 이 점을 고려해야 한다. 오페라의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처럼, 창극에서도 간단한 대사로 처리하는 부분과 극중 인물이 한바탕 소리하여 연기자의 기량을 발휘하는 '아리아' 부분의 설정을 대본에서 미리 시도하는 것이 필요하다.[11]

4. 3. 연출

1908년 '원각사' 창립은 신극(新劇)의 시발점인 동시에 창극의 무대를 보게 되는 귀중한 출발점이었다. 1인기(一人技)인 판소리 형식이 분창(分唱)이 되고, 배역을 맡아 연기하며 노래로 표현하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10]

초기 창극 연출은 전문 연출가가 없었고, 무대 표현도 유치하였다. 1908년대는 서구에서 근대극 수립을 위해 사실주의 연출과 연기가 논의될 때였지만, 원각사 무대는 흰 포장으로 뒤를 막고 배경도 고정되지 않은 미비한 화폭이었다. 중국 경극이나 일본 가부키 무대는 전통예술로 계승·발전했지만, 창극은 고유 형식 무대와 연출·연기를 갖지 못해 배우들이 무계획한 연기를 하는 연출이었다. 조명 시설도 없어 백광(白光) 전등불이 고작이었다.[10]

1930년 '조선음률협회' 조직과 1932년 '조선성악연구회' 발족은 창극을 전진시켰지만, 연출 방법은 신극의 아류였다. 신극적 연출, 연기에 창을 붙이고 춤을 가미한 것이다. 1949년부터 시작된 여성국극단의 공연은 오히려 후퇴한 느낌이었다.[10]

1962년 '국립국극단'은 국극정립정신에 의해 형식에 혁신을 가져왔다. <흥보가>(연출 이진순)는 한국적 고유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10]

무대장치는 다목적 사용무대로, 동양화적 화풍에 한 장면이 다음 장면에 응용되거나 변화로 다른 장소로 변경될 수 있었고, 무대 전면 좌측에는 악사석, 우측은 도창석(導唱席)으로 설정하였다. 도창은 창극의 시작과 끝을 창, 아니리, 발림으로 진행하고, 극 사이에 설명과 묘사를 하여 장면을 유기적으로 이끌어간다. 연기 방법은 신극적 연기에서 벗어나 판소리의 아니리(대사)와 발림(형용동작)을 주로 사용한다. 탈춤, 가면극, 인형극의 극적 형식을 가미하여 서구적 연극 형태를 빌리지 않는 독특한 창극으로 무대화하고, 신극적 대사는 아니리 조(調)로 사용한다.[10]

연출은 전문 지식을 이해하고 전공한 사람이 맡아 창극 무대미학을 추구해야 한다. 창극 연기는 창을 전공하고, 창극 무대를 이해하며 표현할 능력을 갖춘 연기인이어야 한다. 창극 연기자는 창, 고전무용, 탈춤, 민속극의 기본 훈련을 거치고 전문적 연기공부와 신체 훈련을 받아야 한다. 창극 자체도 정립되지 못했고, 연출과 연기에 개발할 문제점이 많다.[10]

창극 연출가는 순수 연극의 연기뿐 아니라 연기, 대사, 창, 음악, 무용, 도창, 민속놀이, 한국적 몸짓(mime) 등을 종합·통일하여 종합예술로 완성시키는 어려운 작업이 부과된다. 창극은 중국 경극이나 일본 가부키처럼 형식으로 굳어져 계승·발달된 것이 아니므로, 한국적 양식의 종합예술적 창조는 어려운 과업이다. 창극 연출가는 한국 고유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창조적 능력을 겸해야 한다. 대본에 나타난 극작가의 표현과 창극 형식 창출 작업은 순수연극 연출 이상을 요구한다. 과거 신극식 연출을 창극에 적용하여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것은 창극사에 교훈을 준다.[13]

중국 경극이나 일본 가부키는 전통적 연기나 몸짓이 형식화되어 연출자와 연기자가 공통된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창극은 그렇지 못하다. 판소리 아니리와 발림에 기초를 둔 대사와 연기를 하되, 표현능력을 확대, 보완해야 한다.[17]

탈춤, 가면극, 인형극, 광대소학지희(廣大笑謔之戱), 전통무용 등에서 한국 고유 동작을 발굴하여 창극에 도입해야 한다. 무언극(無言劇)이나 무용극처럼 몸짓(mime)으로 표현할 경우 더욱 강조되며, 반복 리듬으로 몸짓을 할 경우 한국 전통음악 리듬을 활용해야 한다. 연기자와 관객이 공감하는 무언의 약속된 몸짓을 찾는 것은 창극 정립에 중요하며, 창과 접합할 때 배합을 고려하는 것이 음악적 과제다. 창, 몸짓, 반주음악 리듬의 최대 공약수를 찾아야 한다.[17]

17세기 동안, 한국은 쇄국 정책으로 은둔의 왕국으로 변모했다. 이 시기는 20세기 초까지 지속되었으며, "쇄국 정책"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국이 외국에 문호를 개방한 후, 일본 신파극이나 서양 현대 연극이 소개되어 인기를 얻었고, 전통 판소리 인기는 감소했다.[2] 그 후 창극이 등장했다. 1908년은 최초 창극 공연 "은세계"를 시작으로 한국 근대 음악극의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창극은 창작 소재 부족 등으로 오랫동안 침체되었다. 최근 창극 부흥을 이끈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이 부흥 중심에는 1962년 국립극장 산하 극단으로 창단된 국립창극단이 있다. 국립창극단은 신선한 해석과 세련된 무대 연출을 특징으로 하는 창작 작품을 제작하여 창극을 전국적으로 부각시켰다. 국립창극단은 판소리 완창 5바탕(심청가, 춘향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재창작, 부분적으로 전해지는 판소리 고전 7바탕(변강쇠 타령, 배비장 타령, 병강쇠가 등) 각색, 외국 고전극 각색의 세 가지 주요 사업을 운영한다. 국립창극단은 해외 유명 연출가들을 초청하여 창극 작품을 재해석하는 "세계 명작 창극"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국립창극단의 노력은 성공적이었고 현대 관객들로부터 열렬한 반응을 얻었다. 2011년 11월, 한국 고전 소설을 한태숙 연출의 스릴러 "장화홍련"으로 각색했다. 공원과 연못이 있는 교외 주택 단지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현대 사회의 나르시시즘과 무관심을 보여준다. 2013년 5월, 서재형 연출의 고대 그리스 비극 "메데아"가 창극으로 각색되어 초연되었다. 2014년 3월, 윤호진 연출로 1993년 영화 "서편제"에서 영감을 받은 판소리 오페라가 무대에 올려졌다. 2015년 3월, 재일 한국인 연출가 정의신이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코카서스의 백묵원"을 판소리 오페라로 각색하여 호평을 받았다.[3]

4. 4. 연기

1908년 원각사 창립은 판소리가 분창(分唱)되고, 배역에 따라 연기와 노래로 인물을 표현하는 창극의 무대를 보게 되는 귀중한 출발점이었다.[10]

초기 창극은 전문적인 연출가 없이 흰 포장으로 뒤를 막고 흔들리는 배경을 사용하는 등 유치한 무대 표현을 보였다. 중국경극이나 일본가부키와 달리, 창극은 고유의 형식 무대와 연출, 연기를 갖지 못해 배우들이 무계획한 연기를 하는 수준이었다.[10]

1930년 조선음률협회와 1932년 조선성악연구회 발족은 창극을 발전시켰지만, 신극의 연출과 연기에 창과 춤을 더한 수준에 머물렀다. 1949년 이후 여성국극단의 공연은 오히려 퇴보한 느낌을 주었다.[10]

1962년 국립국극단은 창극 형식의 혁신을 시도했다. <흥보가>(연출 이진순)는 한국적인 고유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무대장치는 동양화적인 화풍에 다목적 사용이 가능하도록 간략하게 만들어졌고, 무대 전면 좌측에는 악사석, 우측에는 도창석(導唱席)을 설정했다. 도창은 창극의 시작과 끝, 극 사이사이에 창, 아니리, 발림으로 설명과 묘사를 하여 무대 장면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10]

창극 연기자들은 신극적인 연기에서 벗어나 판소리의 아니리(대사)와 발림(형용동작)을 주로 사용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탈춤, 가면극, 인형극 등 한국 민속에서 극적 요소와 연기를 보충해야 한다. 신극적인 대사는 창극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아니리 조(調)로 대사를 사용해야 한다.[10]

창극 연출가는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창극 무대 미학을 추구해야 한다. 창극 연기자는 창을 전공하고 창극 무대를 이해하며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어야 하며, 고전무용, 탈춤, 민속극 등의 훈련과 전문적인 연기 공부가 필요하다. 그러나 아직 창극 자체와 연출, 연기는 앞으로 개발해야 할 부분이 많다.[10]

창극 연출가는 순수 연극의 연기뿐 아니라 연기, 대사, 창, 음악, 무용, 도창, 민속놀이, 한국적인 몸짓(mime) 등을 종합하여 하나의 종합예술로 완성해야 한다. 창극은 경극이나 가부키처럼 정해진 형식이 없으므로 한국적인 양식의 창조는 어려운 과제이다. 창극 연출가는 한국 고유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창조적인 능력을 겸비해야 하며, 과거 신극식 연출의 시행착오는 창극사에 귀중한 교훈을 준다.[13]

대본의 창 및 도창 부분은 창극 작곡자의 지도로 시작된다. 오페라처럼 악보에 의한 개인 연습이 아닌, 작곡자가 직접 창을 불러서 구전심수(口傳心受)하는 방식이다. 판소리는 고정 선율이 있어 창법까지 교수하지만, 창극은 창자의 기량에 맡기는 부분이 있어 배역마다 개성이 드러나기도 한다. 도창은 원로급 창자가 맡아 장단과 조(調)만 지시하고 나머지는 창자의 음악성과 표현력에 맡긴다. 제창은 합동 창 연습이 필요하다.[15]

창극 연기자에게는 연출 의도를 지시하되, 판소리와 창극의 아니리 및 발림의 차이점, 창극과 신극 연기의 차이점을 미리 알려줄 필요가 있다.[16]

경극이나 가부키는 전통적인 연기나 몸짓이 형식화되어 있지만, 창극은 그렇지 못하다. 판소리의 아니리와 발림을 기초로 하되, 표현 능력을 확대, 보완해야 한다.[17]

이때 탈춤, 가면극, 인형극, 광대소학지희(廣大笑謔之戱), 전통무용 등에서 한국 고유의 동작을 발굴하여 창극에 도입해야 한다. 무언극(無言劇)이나 무용극처럼 몸짓(mime)으로 표현할 경우, 한국 전통음악의 리듬을 활용해야 한다. 창극 정립을 위해서는 연기자와 관객 모두 공감하는 무언의 약속된 몸짓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창, 몸짓, 반주 음악 리듬의 최대 공약수를 찾는 것도 음악적인 과제이다.[17]

5. 21세기 창극의 현황과 과제

21세기에도 창극은 꾸준히 명맥을 유지하며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서울의 여러 극장에서는 창극과 함께 뮤지컬을 상연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창극, 음악, 뮤지컬 간의 관계를 논하기보다, 각 장르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각자의 방식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21]

세계화와 국제화 시대에 예술적 표현의 요구가 더욱 커짐에 따라, 창극 고유의 특징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21]

5. 1. 대표적인 창극 배우

창극은 판소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초기에는 판소리 명창들이 창극 배우로 활동했다.[20] 원각사 시절에는 협률사 소속으로 김창환, 송만갑, 염덕준, 유공렬, 이동백 등이 활동했는데, 이들은 모두 뛰어난 판소리 명창이었다.[20]

광무대, 연흥사, 조선성악연구회 시절에는 창극이 서울과 지방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 김연수, 오태석, 이화중선, 김여란, 박녹주, 김소희, 임방울 등이 판소리와 창극 무대에 함께 올랐다.[20] 지방에서는 김정문, 박중근, 공창식 등이 창극 배우로 활동했는데, 특히 김정문은 뛰어난 소리와 연기로 인기를 얻었다.[20] 반면, 유성준, 전도성, 이선유, 정응민 등은 창극보다는 판소리에 전념했다.[20]

1939년 창극좌, 화랑, 조선창극단 시절에는 정정렬이 창극 대본을 쓰는 데에도 재능을 보였다.[20] 박녹주, 김여란, 김연수, 오태석, 김소희, 임방울, 박초월, 박귀희 등은 판소리와 창극 모두에서 활약했다. 박후성, 김득수, 김옥련 등은 판소리보다는 창극에서 두각을 나타낸 새로운 배우들이었다.[20]

광복 직후에는 국극사, 국극협회, 장악회, 조선창극단 등 여러 창극 단체가 생겨났다.[20] 국극사에서는 오태석, 조상선, 강장완, 신숙, 박귀희, 양상식, 김원길, 박보아 등이, 국극협회에서는 박후성, 김득수, 김소희, 한일섭 등이, 조선창극단에서는 김연수, 박보아, 박옥진 등이 활동했다.[20]

1949년에는 김아부를 중심으로 여성국극동호회가 만들어져 여성 배우들로만 구성된 여성 창극단이 등장하기 시작했다.[20] 1950년대는 여성 창극단의 전성기로, 임춘앵, 박보아, 박옥진, 김경애, 조금앵, 김진진, 김경수 등이 활약했다.[20] 하지만 여성 창극단의 난립과 경쟁 과열, 예술성 저하로 인해 1960년대에는 대부분 해체되었다.[20]

1962년에는 국립극장 소속 국립창극단이 창단되어 김연수가 단장을 맡았다.[20] 박동진, 박후성, 김득수, 홍갑수, 성순종, 강종철, 장영찬, 박초월, 김소희, 박귀희, 박도아, 조순애, 박옥진, 성창순, 성우향 등이 국립창극단에서 활동했다.[20]

창극 60년 역사 동안 정정렬, 김연수, 박귀희, 김정문 등은 판소리와 창극 모두에 뛰어났고, 송만갑, 김창룡, 이동백, 임방울, 이화중선 등은 판소리에 더 강점을 보였으며, 박후성, 성순종, 한일섭, 임춘앵, 박보아 등은 창극 전문 배우로 활동했다.[20]

참조

[1] 웹사이트 National Changgeuk Company of Korea https://www.ntok.go.[...]
[2] 논문 Development of the modern musical in Korea 2001
[3] 논문 Changgeuk enjoys a renaissance 2016
[4] 논문 Korea’s indigenous musical arts: Pansori and Changgeuk 2001
[5] 논문 Review of A FAIRY IN THE WALL, by S. Jin-chaek, P. Sam-sik, & K. Cheol-hwan http://www.jstor.org[...] 2015
[6] 뉴스 Opera director Achim Freyer leads The National Changgeuk Company’s ‘Mr. Rabbit and the Dragon King’ http://www.koreahera[...] The Korea Herald 2011-03-29
[7] 백과사전 창극[서설] 글로벌 세계 대백과
[8] 백과사전 창극 글로벌 세계 대백과
[9] 백과사전 창극의 종류 글로벌 세계 대백과
[10] 백과사전 창극의 연출과 연기 [개설] 글로벌 세계 대백과
[11] 백과사전 창극의 대본 글로벌 세계 대백과
[12] 백과사전 창극의 작곡 글로벌 세계 대백과
[13] 백과사전 창극 연출가의 준비 글로벌 세계 대백과
[14] 백과사전 창극의 배역 결정 글로벌 세계 대백과
[15] 백과사전 창의 연습 글로벌 세계 대백과
[16] 백과사전 창극의 대본 읽기 글로벌 세계 대백과
[17] 백과사전 창극의 동작 연습 글로벌 세계 대백과
[18] 백과사전 창극의 일관연습 글로벌 세계 대백과
[19] 백과사전 창극의 총연습 글로벌 세계 대백과
[20] 백과사전 창극의 창우 글로벌 세계 대백과
[21] 백과사전 창극의 작품과 감상 글로벌 세계 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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