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로이 미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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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로이 미하이는 1875년 헝가리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구순구개열로 인해 어린 시절 어려움을 겪었지만 수술 후 3개 국어를 구사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는 정치에 입문하여 점차 진보적인 성향을 띠었으며, 1909년에는 전국 농업 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평화를 옹호하며 헝가리 민주 공화국을 수립하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나,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으로 인해 망명했다. 이후 프랑스 대사 등을 역임했으며, 1955년 사망했다. 헝가리에서는 그의 업적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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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로이 미하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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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미하이 카로이 |
출생 이름 | 아담 죄르지 미클로시 카로이 데 너지카로이 |
로마자 표기 | Ádám György Miklós Károlyi de Nagykároly |
출생일 | 1875년 3월 4일 |
출생지 | 포트, 오스트리아-헝가리 |
사망일 | 1955년 3월 19일 (향년 80세) |
사망지 | 방스, 프랑스 |
배우자 | 커팅커 언드라시 |
자녀 | 에버 아담 유디트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국민 독립 코슈트 당 |
직책 | |
헝가리 대통령 | 재임 시작: 1918년 11월 16일 재임 종료: 1919년 3월 21일 총리: 데네시 베린케이 이전: 직책 신설 다음: 샨도르 거르버이 |
헝가리 총리 | 재임 시작: 1918년 10월 31일 재임 종료: 1919년 1월 11일 군주: 카를 4세 (1918년 11월까지) 대통령: 자신 (1918년 - 1919년) 이전: 야노시 허디크 다음: 데네시 베린케이 |
2. 초기 생애와 가문
카로이 가문은 17세기부터 헝가리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온, 유명하고 매우 부유한 가톨릭 귀족 가문이었다. 미하이 카로이의 아버지 카운트 줄러 카로이(1837-1890)와 어머니 카운테스 게오르기네 카로이는 서로 사촌 관계였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카로이 가문은 17세기부터 헝가리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온, 유명하고 매우 부유한 가톨릭 귀족 가문이었다. 그의 부모는 사촌 관계였으며, 아버지는 카운트 줄러 카로이(1837-1890), 어머니는 카운테스 게오르기네 카로이였다.
미하이 카로이는 1875년 3월 4일, 페스트의 귀족 저택 지구에 있는 카로이 궁전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구순구개열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그의 어린 시절과 인격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어머니는 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곧 재혼했다. 아버지는 그의 언어 장애 때문에 미하이가 중요한 직업을 갖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구순구개열 때문에 어린 미하이는 사촌들과 또래 친척들에게 종종 조롱과 굴욕을 당했고, 이는 그의 자존심과 야망, 권력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가였던 아버지가 그에게 충분한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미하이는 포트에 있는 할머니의 성에서 할머니의 헌신적인 보살핌 아래 자랐다. 14세에 할머니는 그를 빈의 한 병원으로 보내 구순구개열 복원 수술을 받게 했다. 이 수술은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몇 주간의 회복기를 거친 후, 미하이는 가족과 친척들이 그가 말을 제대로 못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빠르고 유창하며 매우 정교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심각한 발달 장애를 극복하고 말하기를 배우며 완전한 삶을 살기 위한 그의 노력은 그의 강한 의지력을 길러주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강철 같은 의지, 야망, 끈기, 그리고 엄청난 부의 안정성'이 그의 정치 경력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평생 영어를 포함한 3개의 외국어를 거의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하게 되었다. 그의 사고방식과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는 합스부르크 왕조에 대한 증오, 가문의 전통적인 반독일 감정, 양아버지와 삼촌 샌더 카로이의 세계관, 1848년 헝가리 혁명에 대한 숭배, 농민을 농업 협동조합으로 조직하려는 구상 등이 있었다. 또한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믿었던 과학 기술의 급속한 발전에 대한 변함없는 낙관적인 믿음을 가졌으며, 프랑스 백과사전과 쥘 베른의 소설을 포함한 독서 경험을 통해 사회 정의에 대한 이상적인 헌신을 발전시켰다.
그는 대학교 강의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가정교사의 도움을 받아 시험에 합격하고 법학 학위를 받았다. 24세가 되자 그는 자유분방한 성인이 되었다. 어린 시절 놓쳤던 것들을 만회하려는 듯, 열정적으로 밤문화에 빠져들었다. 그는 카드 놀이, 사냥, 승마, 폴로 등을 즐기며 시간을 보냈고, 프랑스 온천 도시 등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카로이의 청년 시절은 당시 귀족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이후 정치적 반대자들이 그의 향락적인 생활을 비난하기도 했다. 그는 여행을 매우 좋아하여 실론 섬까지 갔으며,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와 미국을 네 차례 방문했다.
그는 모든 기술 혁신에 관심이 많았고, 자동차 운전을 즐겼으며, 경주용 자동차와 요트 수집가가 되었다. 한 번은 루이 블레리오의 동료 조종사가 영국 해협을 건너 헝가리로 비행기를 몰고 왔을 때, 카로이는 조종사와 흥정하여 그 유명한 비행기에 탑승해 부다페스트 상공을 비행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이때 그는 단좌 비행기의 프레임에 앉아 쇠막대에 매달려 다리를 공중에 매달고 비행했는데, 이는 젊은 시절 그의 무모함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가족 전통에 따라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던 그는 파리에서 여러 해를 보냈고, 영국과 미국을 여행했다. '도박 중독자'로 불릴 정도로 카드 놀이를 즐겼으며, 서유럽의 유명 카지노에서 손실을 보면서도 '멋쟁이' 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30세 무렵부터 그는 점차 진지해지며 정치와 공적 생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 2. 가문의 정치적 성향
카로이 가문은 17세기부터 헝가리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온 유명하고 부유한 가톨릭 귀족 가문이었다. 미하이 카로이의 사고방식과 성격은 여러 외부 요인에 의해 형성되었는데, 특히 가문의 전통적인 반독일 감정과 합스부르크 왕조에 대한 증오가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의 양아버지이자 삼촌인 샌더 카로이의 세계관과 1848년 헝가리 혁명에 대한 깊은 숭배 역시 그의 정치적 사상 형성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가문의 배경과 역사적 인식은 카로이가 이후 정치 활동에서 보여준 노선의 바탕이 되었다. 더불어 그는 농민을 농업 협동조합으로 조직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쥘 베른의 소설 등을 읽으며 사회 정의에 대한 이상적인 헌신을 키워나갔다.3. 정치 입문 및 활동
카로이 가문은 17세기부터 헝가리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온 유서 깊고 부유한 가톨릭 귀족 가문이었다. 미하이 카로이는 1875년 3월 4일, 페스트의 카로이 궁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사촌 관계였으며, 그는 태어날 때부터 구순구개열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의 어린 시절과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어머니는 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재혼 후 그에게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의 언어 장애 때문에 그가 진지한 직업을 갖기 어렵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구순구개열로 인해 사촌들과 또래들에게 조롱과 굴욕을 당하는 경험은 그의 자존심, 야망, 권력에 대한 갈망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주로 포트에 있는 할머니의 성에서 자랐다. 14세 때 빈의 병원에서 입천장 복원 수술을 받았고, 이는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수술 후 회복기를 거치자, 주변의 예상과 달리 그는 빠르고 유창하며 정교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강한 의지력과 끈기는 훗날 그의 정치 경력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평생 영어를 포함한 세 개의 외국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하게 되었다.
그의 사상과 성격은 여러 요인의 영향을 받았다. 합스부르크 왕조에 대한 반감, 가문의 전통적인 반독일 감정, 양아버지이자 삼촌인 샌더 카로이의 세계관, 1848년 헝가리 혁명에 대한 숭배 등이 그의 정치적 성향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는 과학 기술의 발전에 대한 낙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프랑스 백과사전과 쥘 베른의 소설 등을 읽으며 사회 정의에 대한 이상을 키웠다. 대학 강의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가정교사의 도움으로 법학 학위를 취득했다.
24세 무렵, 그는 젊은 시절 누리지 못했던 자유를 만끽하며 밤문화, 카드 놀이, 사냥 등으로 호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프랑스 온천 도시에 머물거나 유럽 각지의 경마 대회, 초기 자동차 경주 등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러한 젊은 시절의 모습은 당시 귀족 청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훗날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비판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는 여행을 매우 즐겨 유럽 대부분의 국가와 미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으며, 실론 섬까지 가기도 했다. 승마, 폴로, 사냥 외에도 카드와 체스를 즐겼다.
특히 새로운 기술에 관심이 많아 자동차 운전을 즐겼고, 경주용 자동차와 요트를 수집하기도 했다. 한번은 루이 블레리오의 동료 조종사가 영국 해협을 건너 헝가리로 비행기를 몰고 왔을 때, 그 비행기에 탑승하여 부다페스트 상공을 비행하는 대담함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그는 단좌 비행기의 프레임에 앉아 다리를 공중에 매달고 비행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던 그는 파리에서 여러 해를 보냈으며, 영국과 미국도 여행했다. 한때는 카드 도박과 서유럽 카지노에서의 호화로운 생활로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30세 무렵, 카로이는 점차 진지한 삶의 태도를 갖추기 시작하며 정치와 공적인 활동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3. 1. 의회 진출과 정치적 성장
카로이는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했으나 점차 정치와 공적 생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09년에는 귀족 중심의 농촌 조직인 OMGE(전국 농업 협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초기에는 헝가리의 기존 정치 및 사회 시스템을 지지했지만, 점차 진보적인 성향을 띠며 정치 경력 동안 좌익으로 기울었다.그는 1901년, 1905년, 1906년 하원 의원 선거에 도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백작 신분으로 상원(귀족원)에는 참여할 수 있었다. 1910년, 카로이는 마침내 야당인 독립당 소속으로 의회에 선출되어 하원 의원으로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카로이의 정치적 성장에 있어 이슈트반 티서와의 관계는 중요한 변수였다. 두 사람은 1905년 선거 이후 정치적 앙숙이 되었으며, 의회에서의 잦은 논쟁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에 대한 개인적인 적대감을 키웠다.
카로이가 기존의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와 명확히 대립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12년 6월에 발생했다. 국방법 투표 이후 의회 의장이었던 티서가 경찰력을 동원해 야당 의원들의 항의를 폭력적으로 진압한 사건이었다. 이 과정에서 회의장에서 쫓겨난 야당 의원들은 의회 밖에서 민주주의 및 사회주의 야당 세력과 연대하여 공동 시민 집회를 조직했다. 카로이는 1912년 6월 16일 미슈콜츠에서 열린 첫 집회에서 시민 급진 민주주의자인 오스카르 야시와 사회 민주주의자인 예뇌 란들러와 함께 연사로 나서며, 기존 정치 세력과의 결별 및 새로운 정치 노선을 분명히 했다.
티서와의 갈등은 1913년 1월 극에 달했다. 카로이가 정치적 의견 불일치를 이유로 티서 총리의 악수를 거부하자, 티서는 그에게 결투를 신청했다.[4] 기병도를 사용한 결투는 34합 동안 약 한 시간가량 이어졌고, 티서가 카로이의 팔을 베자 양측 대리인들의 중재로 중단되었다.[4] 이 사건은 티서의 권위적인 면모와 카로이의 대립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3. 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과 입장 변화
1914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 당시 카로이는 친구 지그몬드 쿤피와 함께 미국을 순방하며 여러 대학에서 강연 중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부다페스트의 '마자르오르사그' 잡지에 전보를 보내 유럽의 심화되는 위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는 헝가리가 독일에 완전히 의존하는 상황을 체스에서 '교착 상태'에 비유하며, 어떤 움직임도 체크메이트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5]''"독일에 완전히 의존함으로써 우리는 체스에서 교착 상태라고 불리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우리는 체크메이트 상태는 아니지만, 우리의 어떤 움직임도 체크메이트를 의미할 것입니다."''
-- 마자르오르사그 잡지, 1914년 7월 4일[5]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보낸 최후통첩이 사실상 전쟁을 의미하며,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그 대가는 젊은이들의 생명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전쟁에 대한 열광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
''"단호함과 무례함, 그리고 포함된 엄청난 엄격함으로 가득 찬 이 모든 각서[세르비아에 대한 최후 통첩]는 군주국이 세르비아와 결산을 하려는 인상을 주며, 다른 인상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군주국이 전쟁을 원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우리는 한 국가의 가장 큰 보물인 인간의 생명, 젊은이의 생명으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전쟁에 열광할 수 없고, 열광해서도 안 됩니다."''
-- 마자르오르사그 잡지, 1914년 7월 11일[6]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직후인 8월 5일, 카로이는 미국에서의 긴 여행을 마치고 프랑스 르아브르에 도착했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아직 프랑스와 전쟁 상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교전국의 시민이라는 이유로 즉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이후 보르도에서도 몇 주간 다시 억류되었으나, 전쟁 중 프랑스에 대항하여 싸우지 않겠다고 서약한 후 여권을 받아 스페인과 이탈리아(당시 중립국)를 거쳐 헝가리로 귀국했다.[7]
처음에 카로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에 반대했지만, 이러한 입장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심지어 당내 압력으로 인해 자신의 정당에서 친전쟁 선언문을 읽기도 했으며, 전쟁 채권 지원을 거부했다가 비난에 직면하기도 했다. 1915년에는 부다페스트의 제1 헝가리 후사르 연대에 자원 입대했는데, 훗날 회고록에서 정치적 압력 때문에 마지못해 전쟁을 지지했던 것을 후회한다고 밝혔다.
전쟁의 참혹함을 목격하면서 카로이의 입장은 점차 확고한 반전 평화주의로 기울었다. 그는 전쟁의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공개적으로 전쟁 반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한 정치적 고립을 감수했다. 1916년부터는 독일과의 동맹을 파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즉각적인 종전과 평화 협상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는 헝가리 의회 내에서 작지만 매우 활동적인 평화주의적 반전 분파의 일원이 되었다. 처음에는 20명 미만의 소수였지만, 티보르 하이두에 따르면 카로이의 평화 운동은 점차 대중적인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8]
전쟁 초기 카로이는 정치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헝가리 여론이 전쟁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그의 존재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전쟁 마지막 해에 이르러서는 그의 일관되고 확고한 평화 지지 연설이 그를 매우 유명하게 만들었으며[9], 집권 세력에 대한 실질적인 대안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지지와 애정을 받으며 '평화의 사도'로 불리기도 했고, 이는 그가 속한 귀족 계급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발걸음으로 카로이는 자신의 계급과의 결별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고위 정치에서 고립되었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신뢰와 애정을 얻었습니다. 그는 회고록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매일매일 수백 명의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말했고 인내를 요구한다고 확신하는 전보와 편지를 받았습니다. 1917년 7월 중순에 파라드에서 부다페스트로 여행할 때, 평범한 병사들이 기차역에서 나를 에워쌌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이 나에게 연설을 했습니다. 그는 나를 평화의 사도라고 불렀습니다."''
민주적인 외교 정책을 원하는 사람은 내정에서도 마음과 영혼으로 민주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독립당을 분열시키면서 카로이는 전쟁을 선포했지만 아들들을 징집 면제시킨 사람들에게 맞섰습니다.
카로이는 의회 연설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 제국의 동맹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대신 그는 민족 간의 우호를 증진하고 전쟁에 반대하며, 연합국과의 우호적인 외교 정책을 지지했다.[10] 전쟁 중에는 스위스에서 영국 및 프랑스 등 연합국 외교관들과 비밀리에 접촉하기도 했다.[11] 그는 연합국과의 평화 협상,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간의 관계 단절, 그리고 당시 인구의 5.8%에게만 주어졌던 재산 기반 선거권 제한 철폐, 여성 참정권 부여 등을 주장했다. 특히 1915년에는 참전 용사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요구하여 당시 총리였던 이슈트반 티서 백작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카로이의 공개적인 친연합국 태도와 평화주의 노선은 기존 독립당 내에서도 너무 급진적이고 위험하다고 여겨졌다. 결국 1916년, 그는 기존 정당과 결별하고 '1848년 독립 연합당'(통칭 '''카로이 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창당했다.
1918년 1월, 카로이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창한 14개조 평화 원칙의 지지자임을 선언하며 전후 평화 구상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4. 헝가리 민주 공화국
1918년 10월 31일 별똥별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카로이 미하이는 오스트리아의 카를 1세에 의해 헝가리 총리로 임명되었다. 카로이는 즉시 타협 협정을 파기하여 오스트리아와의 동군연합 관계를 끝내고, 사실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를 공식화했다.[12][13]
카를 1세가 1918년 11월 16일 국정에서 물러나자, 카로이는 헝가리 민주 공화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임시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1919년 1월 11일, 국가 협의회는 그를 공식 대통령으로 인정했다.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혼란 속에서 출범한 헝가리 민주 공화국은 여러 난제에 직면했다. 1919년 1월, 카로이는 대통령직에 전념하기 위해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4. 1. 별똥별 혁명과 정권 장악

1918년 10월 25일, 카로이는 오스트리아와의 지속적인 연합에 강력히 반대하며 헝가리 국가 협의회를 구성했다. 10월 31일 발발한 별똥별 혁명을 통해 카로이는 권력을 장악했다. 혁명으로 미하이 카로이가 정부 수반이 될 것이 확실해지자, 그의 이복 형제인 요제프 카로이 백작(1884-1934)은 자신의 직책에서 사임하고 미하이 카로이 정부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반대자가 되었다.[12] 오스트리아의 카를 1세는 결국 카로이를 헝가리 총리로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 카로이는 총리가 되자마자 10월 31일에 타협 협정을 거부하며 오스트리아와의 개인적인 연합을 사실상 끝냈고,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공식적인 해체를 의미했다. 11월 1일, 카로이의 새 정부는 헝가리 왕국 영토에서 징집된 모든 군대를 소환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전선의 합스부르크 군대에 큰 타격을 주었다.[13]
카로이는 가능하면 군주제와 오스트리아와의 연결을 유지하려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카를 1세가 1918년 11월 16일 정부에서 물러나자, 카로이는 스스로를 임시 대통령으로 하는 헝가리 민주 공화국을 선포했다. 1919년 1월 11일, 국가 협의회는 그를 공식적으로 대통령으로 인정했다.
카로이의 리더십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슈트반 티서 암살과 카로이의 총리 임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고대 체제를 지지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많은 백작들 중 가장 똑똑한 사람 [이슈트반 티서 백작]을 때려죽이고 가장 멍청한 사람 [미하이 카로이 백작]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이 정치적 수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14]
같은 맥락에서, 영국 작가 해롤드 니콜슨은 영국 망명 시절 카로이를 알고 지냈는데, 1957년 카로이의 회고록을 검토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는 많은 자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진지한 사람들이 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자질이 부족했다"''.[15]
라요스 하트바니 남작은 카로이의 리더십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토론에서 어떤 결정도 나오지 않았고, 결정에서 어떤 행동도 나오지 않았다. 내각이라기보다는 토론 클럽에 가까웠다"''.[16]
직책 | 이름 | 임기 |
---|---|---|
국무총리 | 카로이 미하이 | 1918년 10월 31일 ~ 1919년 1월 19일 |
국방부 장관 | 린더 벨러 | 1918년 10월 31일 ~ 1918년 11월 9일 |
국방부 장관 | 바르타 알버트 | 1918년 11월 9일 ~ 1918년 12월 12일 |
국방부 장관 | 카로이 미하이 | 1918년 12월 12일 ~ 1918년 12월 29일 |
국방부 장관 | 페스테티치 샨도르 | 1918년 12월 29일 ~ 1919년 1월 19일 |
내무부 장관 | 바티아니 티바다르 | 1918년 10월 31일 ~ 1918년 12월 12일 |
내무부 장관 | 너지 빈체 | 1918년 12월 12일 ~ 1919년 1월 19일 |
법무부 장관 | 부자 바르나 | 1918년 10월 31일 ~ 1918년 11월 3일 |
법무부 장관 | 베린케이 데네시 | 1918년 11월 3일 ~ 1919년 1월 19일 |
국왕 개인 담당 장관 | 바티아니 티바다르 | 1918년 10월 31일 ~ 1918년 11월 1일 |
농업부 장관 | 부자 바르나 | |
상무부 장관 | 가라미 외르뇌 | |
재무부 장관 | 카로이 미하이 | 1918년 10월 31일 ~ 1918년 11월 25일 |
재무부 장관 | 센데 팔 | 1918년 11월 25일 ~ 1919년 1월 19일 |
식량부 장관 | 페렌츠 너지 | |
종교 및 교육부 장관 | 로바시 마르톤 | 1918년 10월 31일 ~ 1918년 12월 22일 |
종교 및 교육부 장관 | 샨도르 유하스 너지 | 1918년 12월 22일 ~ 1919년 1월 19일 |
복지 및 노동부 장관 | 쿤피 지그몬드 | 1918년 12월 12일 ~ 1919년 1월 19일 |
무임소 장관 | 야시 오스카르 | 1918년 10월 31일 ~ 1918년 11월 1일 |
무임소 장관 | 쿤피 지그몬드 | 1918년 10월 31일 ~ 1918년 11월 12일 |
무임소 장관 | 린더 벨러 | 1918년 11월 9일 ~ 1918년 12월 12일 |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및 달마티아 담당 무임소 장관 | 쿤피 지그몬드 | 1918년 11월 6일 ~ 1919년 1월 19일 |
민족 담당 무임소 장관 | 야시 오스카르 | 1918년 11월 1일 ~ 1919년 1월 19일 |
11월 1일, 헝가리 군대의 소환 결정은 이탈리아 전선의 합스부르크 군대에 큰 타격을 주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붕괴를 가속화했다.[17] 당시 헝가리 왕립 혼베드 군대는 14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18][19] 그러나 카로이는 우드로 윌슨의 14개조에 따라 평화주의 노선을 택했고, 국방부 장관 벨라 린더는 1918년 11월 2일 헝가리군의 일방적인 무장 해제를 명령했다.[20][21] 이 조치는 국가를 매우 취약한 상태로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으며,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세르비아(프랑스군 지원) 등 주변국의 비교적 소규모 군대가 헝가리를 쉽게 점령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22][23][24]
카로이는 오스카르 야시를 소수 민족부 장관으로 임명하여 비(非)마자르 민족을 설득해 새로운 헝가리 공화국에 남도록 하는 "동부 스위스" 구상을 추진했다. 야시는 분쟁 지역에 대한 민주적인 국민 투표를 제안했지만, 소수 민족 지도자들은 파리 평화 회의에서 이를 거부했다.[25] 대신 체코, 세르비아, 루마니아 지도자들은 영토 점령을 위해 헝가리를 공격했다.[26] 헝가리의 일방적인 무장 해제 이후, 카로이의 평화주의 내각 아래 헝가리는 이전 영토의 약 75%(325411km2)를 무력 저항 없이 상실하고 외세의 점령을 받게 되었다.[27]
- 1918년 11월 5일: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군이 남부 국경 침공.
- 11월 8일: 체코슬로바키아군이 북부 국경 침공.
- 11월 10일: 루이 프란셰 데스페레이의 프랑스-세르비아 군대가 다뉴브강 도하 준비.
- 11월 11일: 독일, 연합국과 휴전 협정 체결. 독일군은 점령지에서 철수하고 연합국의 접근 허용.[28]
- 11월 13일: 루마니아군이 동부 국경 침공.
- 11월 13일: 카로이, 연합국과 벨그라드 휴전 체결. 헝가리군 규모 제한(보병 6개 사단, 기병 2개 사단), 분계선 설정.[29] 인접국들은 카로이 정부에 맞서 "공산주의와의 투쟁"을 명분으로 이용했다.[30]
- 11월 14일: 세르비아, 페치 점령.[31][32]
많은 시민들은 카로이가 연합국과 온건한 평화 조건을 협상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카로이는 1918년 11월 1일부터 11월 16일까지 임시 정부를 이끌었으며, 이후 헝가리 민주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그는 자신의 당, 대규모 헝가리 사회민주당, 그리고 오스카르 야시가 이끄는 소규모 시민 급진당으로 구성된 국민 평의회를 통해 헝가리를 통치했다.[33]
휴전 문제에서도 어려움이 따랐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918년 11월 3일 빌라 주스티 휴전을 체결했지만, 헝가리가 독립하면서 새로운 휴전 협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카로이는 자신의 판단과 달리 이에 동의하여 11월 베오그라드에서 발칸 지역 연합군 사령관인 프랑스 장군 루이 프란셰 데스페레이와 새로운 휴전(벨그라드 휴전)을 체결했다. 프란셰 데스페레이는 헝가리인들에게 노골적인 경멸을 보이며 기존 파두아 휴전보다 더 가혹한 조건을 부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휴전은 연합국이 카로이 정부를 어느 정도 인정한 것으로 간주되어 부다페스트에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34] 그러나 프랑스 외무부는 이 조약을 "사문화된 문서"로 취급했고, 프랑스의 공식적인 인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35] 카로이의 반대자들은 불필요하게 두 번째 휴전을 추구하여 헝가리의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비판했다.
국민 평의회가 권력을 잡은 직후 국방부 장관 벨라 린더는 모든 군대에 무장 해제를 지시했다. 이는 무장한 병사들이 귀환하여 혼란을 야기하거나 연합국의 개입을 촉발할 수 있다는 카로이 내각의 우려 때문이었다고 카로이 자신도 인정했다. 그러나 린더의 정책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대가 11월 9일 헝가리 서부 지역을 점령하면서 빠르게 비판에 직면했다. 결국 린더는 11월 9일 사임했고, 후임 바르타 알버트는 헝가리 군대를 재편성하고 재무장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36] 11월 11일 연설에서 카로이는 무장 해제를 중단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침략에 맞설 준비가 되었다고 발표했다. 프라하가 슬로바키아 지역 점령을 위해 헌병을 파견하자, 카로이는 귀환 포로 사단을 동원하여 체코군을 격퇴하고 국경 방어 약속을 이행했다. 새로운 분계선 협상 후 헝가리는 점령 지역의 행정권을 넘겨주었지만, 군대 철수는 거부했다.[37] 1918-19년 겨울 동안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는 휴전을 자주 위반하며 더 많은 영토를 점령했다. 1919년 1월 이후, 카로이는 국내 공산주의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과의 동맹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또한 헝가리는 평화 조약이 아닌 휴전을 체결했기 때문에, 연합국의 봉쇄가 지속되었다. 전쟁 기간 내내 식량 부족에 시달렸던 헝가리는 1917년부터 기아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트란실바니아와 갈리시아에서 온 난민 유입으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4. 2. 대통령 취임과 정책 추진
1918년 10월 31일, 별똥별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카로이는 오스트리아의 카를 1세에 의해 헝가리 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즉시 타협 협정을 파기하여 오스트리아와의 동군연합 관계를 끝내고, 사실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를 공식화했다.[12][13] 카를 1세가 1918년 11월 16일 국정에서 물러나자, 카로이는 헝가리 민주 공화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임시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1919년 1월 11일, 국가 협의회는 그를 공식 대통령으로 인정했다.
대통령으로서 카로이는 몇 가지 주요 정책을 추진했다. 외교적으로는 우드로 윌슨의 14개조 원칙에 기반한 평화주의를 내세웠으나, 국방부 장관 벨라 린더가 단행한 군대의 일방적 무장 해제[20][21]는 국가를 무방비 상태로 만들어 주변국의 침공과 상당한 영토 상실을 초래했다.[22][23][24][27] 국내적으로는 중요한 개혁 과제였던 토지 분배를 시도하여 자신의 영지를 농민에게 나누어 주었으나, 연립정부 파트너였던 헝가리 사회민주당의 반대로 인해 전면적인 토지 개혁은 실현되지 못했다. 또한, 소수 민족 문제 해결을 위해 오스카르 야시를 장관으로 임명하고 민족 자결 원칙에 입각한 "동부의 스위스" 구상과 국민 투표를 제안했지만, 주변국과 소수 민족 지도부의 외면으로 실패했다.[25][26]
카로이의 리더십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평가도 따른다.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슈트반 티서 암살과 카로이 집권을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 ''"나는 고대 체제를 지지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많은 백작들 중 가장 똑똑한 사람 [이슈트반 티서 백작]을 때려죽이고 가장 멍청한 사람 [미하이 카로이 백작]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이 정치적 수완의 징표인지는 의문이다."''[14]
영국 작가 해롤드 니콜슨은 카로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그는 많은 자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진지한 사람들이 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자질이 부족했다"''.[15]
라요스 하트바니 남작은 카로이 내각의 비효율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토론에서 어떤 결정도 나오지 않았고, 결정에서 어떤 행동도 나오지 않았다. 내각이라고? 아니, 토론 클럽이었다"''.[16]
이러한 평가들은 카로이가 민주주의 정착과 사회 개혁이라는 진보적 목표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혁명 이후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 정책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고 위기를 관리하는 데에는 한계를 보였음을 시사한다.
4. 2. 1. 외교 정책
카로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에 반대했으며, 1916년부터는 독일과의 동맹 해체를 감수하고서라도 즉각적인 종전과 평화 협상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8]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 제국의 동맹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민족 간 우호 증진, 전쟁 반대, 그리고 친연합국 외교 정책을 지지했다.[10] 전쟁 중에는 스위스에서 영국 및 프랑스 연합국 외교관들과 비밀리에 접촉하기도 했다.[11] 그는 연합국과의 평화를 주장하며 오스트리아와의 관계 단절을 모색했다. 1918년 1월에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시한 14개조 원칙의 지지자를 자처하며 평화에 대한 기대를 나타냈다.별똥별 혁명 이후 총리가 된 카로이는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헝가리 민주 공화국을 선포했다. 그의 외교 정책은 윌슨의 14개조 원칙에 기반한 평화 협상에 대한 기대에 크게 의존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주의적 접근은 현실적인 어려움에 직면했다. 특히 국방부 장관 벨라 린더가 1918년 11월 2일 명령한 헝가리군의 일방적인 무장 해제는[20][21] 국가를 방어 능력 없이 매우 취약한 상태로 만들었다. 이는 주변국인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세르비아(유고슬라비아의 일부)의 군대가 헝가리 영토를 침공하고 점령하는 것을 용이하게 만들었다.[22][23][24] 카로이 정부는 무력 저항 없이 이전 영토의 약 75%(325411km2)를 상실하고 외세의 점령을 받게 되었다.[27]
카로이 정부는 연합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1918년 11월, 발칸 지역 연합군 사령관인 프랑스 장군 루이 프란셰 데스페레이와 베오그라드 휴전을 체결했다. 이 휴전 협정은 헝가리군의 규모를 보병 6개 사단과 기병 2개 사단으로 제한하고 새로운 군사 분계선을 설정했다.[29] 카로이는 이 휴전을 통해 연합국으로부터 정부의 사실상 인정을 얻어냈다고 판단했으나,[34] 프랑스 외무부는 이를 "사문화된 문서"로 간주하며[35] 실질적인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더욱이 프란셰 데스페레이 장군은 헝가리 대표단을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일부에서는 그가 파도바 휴전보다 더 가혹한 조건을 부과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주변국들은 휴전 협정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헝가리 영토를 점령해 들어왔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11월 8일 북부 국경을 넘었고, 루마니아 군대는 11월 13일 동부 국경을 넘었다. 세르비아와 프랑스 군대 역시 남부 지역을 장악했다. 카로이 정부는 소수 민족과의 공존을 위해 오스카르 야시를 소수 민족부 장관으로 임명하고 "동부 스위스" 구상을 추진하며 분쟁 지역에 대한 국민 투표를 제안했지만, 주변국 지도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군사적 점령을 강행했다.[25][26] 군대 해산 명령은 곧 철회되었고, 헝가리군은 체코슬로바키아군의 초기 진격을 일부 저지하기도 했으나[36][37], 전반적인 상황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연합국의 봉쇄는 계속되었고, 식량 부족과 난민 문제로 헝가리 내부 상황은 악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19년 3월 20일, 프랑스는 빅스 노트를 통해 헝가리군에게 헝가리 내륙으로 더 깊숙이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는 사실상 새로운 국경선을 강요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카로이와 베린케이 데네시 총리는 이 요구를 수락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궁지에 몰렸다. 결국 베린케이 내각은 총사퇴했고, 카로이는 사회민주당 중심의 새 정부 구성을 발표했으나,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연합은 카로이를 축출하고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하는 결과로 이어졌다.[38] 카로이의 친연합국 외교 정책과 평화주의적 접근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39] 1919년 1월 이후, 서방 연합국에 대한 실망감이 커지면서 카로이는 내부적으로 공산주의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동맹 가능성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4. 2. 2. 국내 정책
1918년 10월 31일 별똥별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카로이 미하이는 오스트리아의 카를 1세에 의해 헝가리 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즉시 타협 협정을 파기하여 오스트리아와의 동군연합을 끝내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를 공식화했다.[12] 카를 1세가 1918년 11월 16일 국정에서 물러나자, 카로이는 헝가리 민주 공화국을 선포하고 임시 대통령이 되었으며, 1919년 1월 11일 국가 협의회에 의해 공식 대통령으로 인정받았다.
카로이 정부는 민주주의 정착과 사회 개혁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40개 이상의 법률과 약 400개의 법령을 통해 민주적 제도를 도입하고자 했다. 새로운 선거법은 21세 이상의 모든 남성과, 국내 언어를 읽고 쓸 수 있는 24세 이상의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했으며, 이에 따른 총선은 1919년 4월로 예정되었다. 또한, 전쟁 중 억압되었던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집회의 자유를 회복시켰다.
사회적으로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생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실업 수당 지급, 세금 체납 면제, 14세 미만 아동의 고용 금지, 임금 인상, 제대 군인에 대한 상징적인 퇴직금 지급, 8시간 노동제 도입, 사회 보장 제도의 확충 등 다양한 사회 개혁 정책을 도입했다.
카로이는 헝가리 사회의 오랜 문제였던 토지 문제 해결에도 의지를 보였다. 그는 대부분의 농지를 소작농에게 분배하려 했으며, 모범을 보이고자 1919년 2월 23일 카폴나에서 자신의 광대한 가족 영지를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이는 유일한 토지 개혁 사례로 남았다. 연립정부의 파트너였던 헝가리 사회민주당은 토지 분배가 자본주의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관련 조치를 막아섰고, 결국 카로이의 토지 개혁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카로이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심각한 경제난에 직면했다. 전쟁으로 경제는 붕괴 직전이었고, 대규모 빈곤과 인플레이션이 만연했다. 정부가 화폐를 더 발행하면서 인플레이션은 더욱 심화되었고 민중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연합국의 경제 봉쇄는 평화 조약 체결 시까지 계속되어 식량 부족 문제를 심화시켰고, 1917년부터는 기아로 인한 사망자가 발생할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체코슬로바키아 건국으로 독일로부터의 석탄 공급이 끊기면서 에너지 위기까지 겹쳤다. 석탄 부족은 1918-19년 겨울 난방 문제를 야기했고, 철도 운송망을 마비시켜 산업 붕괴와 대규모 실업을 초래했다. 트란실바니아와 갈리시아에서 온 난민들의 유입도 사회적 부담을 가중시켰다.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카로이 정부는 권한 없이 책임만 지는 반면, 소비에트(평의회)를 모방한 사회민주당 주도의 혁명 평의회들은 책임 없이 권한을 행사하는 이중 권력 상태가 나타났다. 사회민주당은 헝가리 최대 정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로이 정부의 정책을 방해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카로이 정부는 내부 질서 확립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극단주의 세력의 도전에도 직면했다. 1919년 2월, 정부는 역사적 헝가리 국경의 무장 방어를 주장하며 독재적 우익 정부를 추구한 귈러 굄뵈스 주도의 헝가리 국방 연맹(MOVE)을 해산시키려 했고, 같은 달 20일에는 실업 시위 중 발생한 무력 충돌을 계기로 밸러 쿤을 포함한 헝가리 공산당 지도부 32명을 투옥했다.
'''카로이 미하이 내각 (1918년 10월 31일 ~ 1919년 1월 19일)'''
직책 | 담당자 | 재임 기간 |
---|---|---|
국무총리 | 카로이 미하이 | 1918년 10월 31일 ~ 1919년 1월 19일 |
국방부 장관 | 린더 벨러 | 1918년 10월 31일 ~ 1918년 11월 9일 |
국방부 장관 | 바르타 알버트 | 1918년 11월 9일 ~ 1918년 12월 12일 |
국방부 장관 | 카로이 미하이 | 1918년 12월 12일 ~ 1918년 12월 29일 |
국방부 장관 | 페스테티치 샨도르 | 1918년 12월 29일 ~ 1919년 1월 19일 |
내무부 장관 | 바티아니 티바다르 | 1918년 10월 31일 ~ 1918년 12월 12일 |
내무부 장관 | 너지 빈체 | 1918년 12월 12일 ~ 1919년 1월 19일 |
법무부 장관 | 부자 바르나 | 1918년 10월 31일 ~ 1918년 11월 3일 |
법무부 장관 | 베린케이 데네시 | 1918년 11월 3일 ~ 1919년 1월 19일 |
국왕 개인 담당 장관 | 바티아니 티바다르 | 1918년 10월 31일 ~ 1918년 11월 1일 |
농업부 장관 | 부자 바르나 | 1918년 10월 31일 ~ 1919년 1월 19일 |
상무부 장관 | 가라미 외르뇌 | 1918년 10월 31일 ~ 1919년 1월 19일 |
재무부 장관 | 카로이 미하이 | 1918년 10월 31일 ~ 1918년 11월 25일 |
재무부 장관 | 센데 팔 | 1918년 11월 25일 ~ 1919년 1월 19일 |
식량부 장관 | 페렌츠 너지 | 1918년 10월 31일 ~ 1919년 1월 19일 |
종교 및 교육부 장관 | 로바시 마르톤 | 1918년 10월 31일 ~ 1918년 12월 22일 |
종교 및 교육부 장관 | 샨도르 유하스 너지 | 1918년 12월 22일 ~ 1919년 1월 19일 |
복지 및 노동부 장관 | 쿤피 지그몬드 | 1918년 12월 12일 ~ 1919년 1월 19일 |
무임소 장관 (민족 담당) | 야시 오스카르 | 1918년 10월 31일 ~ 1919년 1월 19일 (11월 1일부터 민족 담당) |
무임소 장관 | 쿤피 지그몬드 | 1918년 10월 31일 ~ 1918년 11월 12일 |
무임소 장관 | 린더 벨러 | 1918년 11월 9일 ~ 1918년 12월 12일 |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및 달마티아 담당 무임소 장관 | 쿤피 지그몬드 | 1918년 11월 6일 ~ 1919년 1월 19일 |
4. 2. 3. 소수 민족 문제
카로이는 오스카르 야시를 헝가리의 새로운 소수 민족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야시는 짧은 기간 동안 권력을 잡으면서 헝가리의 비마자르 민족을 설득하여 새로운 헝가리 민주 공화국의 일부로 남도록 함으로써 "동부의 스위스"와 같은 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야시는 또한 분쟁 지역에 대한 민주적인 국민 투표를 소수 민족에게 즉시 제안했지만, 해당 소수 민족의 정치 지도자들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민주적인 국민 투표 자체를 거부했다.[25] 대신 체코슬로바키아, 세르비아, 루마니아의 정치 지도자들은 영토를 점령하기 위해 헝가리를 공격하기로 선택했다.[26]한편, 카로이 정부는 우드로 윌슨의 14개조 평화 원칙에 따라 헝가리군의 일방적인 무장 해제를 명령했다.[20][21] 이는 1918년 11월 2일 국방부 장관 벨라 린더에 의해 실행되었으며, 결과적으로 헝가리는 특히 취약한 시기에 국가 방어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헝가리의 군사적 약화는 주변 국가들, 즉 상대적으로 적은 군사력을 가진 프랑코-세르비아 군대, 체코슬로바키아 군대, 루마니아 군대가 헝가리 영토를 직접 점령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22][23][24]
카로이의 평화주의 내각 통치 기간 동안, 헝가리는 군사적 저항 없이 이전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영토의 약 75%(325411km2)에 대한 통제권을 잃고 외세의 점령을 받게 되었다.[27] 야시의 민주적 제안과 소수 민족과의 공존 노력은 주변국의 군사적 개입과 소수 민족 지도부의 비협조 속에서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4. 3. 정부의 몰락과 망명
카로이 미하이는 별똥별 혁명 이후 권력을 잡아 헝가리 민주 공화국의 임시 대통령이 되었고, 1919년 1월 11일 공식 대통령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의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심각한 내우외환에 직면하며 불안정한 기반 위에 서 있었다.
카로이 정부 몰락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그의 평화주의 노선과 군사 정책이었다. 우드로 윌슨의 14개조에 기대를 걸었던 카로이 정부의 국방부 장관 벨라 린더는 1918년 11월 2일, 140만 명 이상[18][19] 규모의 헝가리 왕립 혼베드 군대에 일방적인 무장 해제를 명령했다.[20][21] 이는 무장 귀환 병력으로 인한 혼란이나 연합국 개입을 우려한 조치였으나,[36] 결과적으로 국가를 외세 침략에 취약하게 만들었다.[22][23][24] 이 결정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대가 헝가리 서부 영토를 점령하기 시작한 11월 9일 급하게 철회되었고, 린더는 사임했으며 후임자 알베르트 바르타는 군대 재편성에 착수했다.[36][37]
연합국과의 관계 설정 실패 또한 정부의 몰락을 재촉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체결한 빌라 주스티 휴전과 별개로, 카로이 정부는 1918년 11월 베오그라드에서 연합군 사령관 루이 프란셰 데스페레이와 새로운 벨그라드 휴전을 체결했다. 이는 카로이 정부에 대한 연합국의 사실상 인정으로 해석되어 국내에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34] 프랑스 외무부는 이를 "사문화된 문서"로 취급하며[35] 실질적인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이 휴전은 기존보다 더 가혹한 조건으로 헝가리 군사력을 크게 제한했으며,[29] 평화 조약 체결 시까지 연합국의 봉쇄가 지속되어 식량 부족과 기아 문제가 심화되었다. 트란실바니아와 갈리시아에서 유입된 난민들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헝가리의 군사적 약화와 외교적 고립은 주변국들의 노골적인 영토 침탈로 이어졌다.
- 1918년 11월 5일: 프랑스 지원 하 세르비아군 남부 국경 침범.
- 11월 8일: 체코슬로바키아군 북부 국경 침범.
- 11월 13일: 루마니아군 동부 국경 침범.
- 11월 14일: 세르비아 페치 점령.[31][32]
이들 국가는 휴전 협정을 무시하고[26] 헝가리 영토를 계속 점령했다. 카로이 정부는 오스카르 야시를 소수 민족부 장관으로 임명하여 "동부 스위스" 구상을 통해 연방제 개편을 시도했으나, 소수 민족 지도자들은 파리 평화 회의에서 국민 투표 제안을 거부하고 독립을 택했다.[25] 뒤늦게 군사적 저항을 시도했으나[37] 이미 때는 늦어, 카로이 통치 기간 동안 헝가리는 이전 영토의 약 75%(325411km2)를 상실했다.[27]
국내 상황 역시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카로이 정부는 권한 없이 책임만 지는 반면, 헝가리 사회민주당이 주도하는 혁명 평의회는 책임 없이 권한을 행사하는 이중 권력 구조가 형성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경제 파탄은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실업을 야기했고, 체코슬로바키아 건국으로 독일 석탄 수입이 막히면서 에너지 위기까지 겹쳐 철도 운행 마비와 산업 기반 붕괴를 초래했다. 정부는 언론·집회의 자유 보장, 선거법 개정, 8시간 노동제 도입 등 민주적·사회적 개혁을 추진했으나,[33] 경제난 해결과 사회 질서 확립에는 실패했다. 카로이 본인이 자신의 영지를 농민에게 분배하며 토지 개혁 의지를 보였음에도, 사회민주당은 자본주의 조장이라는 이유로 이를 막아 실질적인 토지 분배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총체적 난국 속에서 카로이의 리더십에 대한 비판도 거셌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슈트반 티서 암살 후 카로이가 총리가 된 것에 대해 "나는 고대 체제를 지지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많은 백작들 중 가장 똑똑한 사람 [이슈트반 티서 백작]을 때려죽이고 가장 멍청한 사람 [미하이 카로이 백작]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이 정치적 수완의 징표인지는 의문이다"라고 평가했고,[14] 영국 작가 해롤드 니콜슨은 "그는 많은 자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진지한 사람들이 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자질이 부족했다"고 회고했다.[15] 라요스 하트바니 남작은 카로이 내각을 "토론에서 어떤 결정도 나오지 않았고, 결정에서 어떤 행동도 나오지 않았다. 내각이라고? 아니, 토론 클럽이었다"라고 묘사하며 결단력 부재를 비판했다.[16]
정치적 불안정은 극단주의 세력의 성장을 부추겼다. 우익 헝가리 국방 연맹(MOVE)과 좌익 헝가리 공산당이 부상하자, 카로이 정부는 1919년 2월 두 단체 모두에 강경하게 대응하여 MOVE를 해산하고 벨러 쿤을 포함한 공산당 지도부 32명을 투옥했다.
1919년 1월 19일, 카로이는 대통령직에 전념하기 위해 총리직에서 사임하고 버린케이 데네시를 총리로 임명했다. 버린케이 내각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직책 | 담당자 | 재임 기간 |
---|---|---|
총리 | 버린케이 데네시 | 1919년 1월 19일 ~ 1919년 3월 21일 |
외무부 장관 | 버린케이 데네시 (임시) 페렌츠 하레르 | 1919년 1월 19일 ~ 1919년 1월 24일 1919년 1월 24일 ~ 1919년 3월 21일 |
국방부 장관 | 빌모스 뵘 | 1919년 1월 19일 ~ 1919년 3월 21일 |
내무부 장관 | 빈체 나기 | 1919년 1월 19일 ~ 1919년 3월 21일 |
재무부 장관 | 센데 팔 | 1919년 1월 19일 ~ 1919년 3월 21일 |
식량부 장관 | 에르뇌 벌러지 | 1919년 1월 19일 ~ 1919년 3월 21일 |
종교부 장관 | 야노시 바시 | 1919년 1월 19일 ~ 1919년 3월 21일 |
교육부 장관 | 지그몬드 쿤피 | 1919년 1월 19일 ~ 1919년 3월 21일 |
법무부 장관 | 버린케이 데네시 (임시) 샨도르 나기 유하스 | 1919년 1월 19일 ~ 1919년 1월 24일 1919년 1월 24일 ~ 1919년 3월 21일 |
상무부 장관 | 에르뇌 가라미 | 1919년 1월 19일 ~ 1919년 3월 21일 |
복지 및 노동부 장관 | 귈러 페이들 | 1919년 1월 19일 ~ 1919년 3월 21일 |
루신 소수 민족부 장관 | 오레스트 스자보 | 1919년 1월 19일 ~ 1919년 3월 21일 |
독일 소수 민족부 장관 | 야노시 융커 | 1919년 1월 19일 ~ 1919년 3월 21일 |
농지 개혁부 장관 | 이슈트반 스자보 데 나기아타드 | 1919년 1월 19일 ~ 1919년 3월 21일 |
결국 카로이 정부는 내외의 압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1919년 3월 붕괴했으며, 카로이는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들어선 호르티 정권 하에서 카로이는 궐석재판을 통해 반역죄 유죄 판결을 받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판결의 주요 근거는 군대 해산 조치가 트리아농 조약에서 헝가리가 분할되는 군사적 배경을 제공했다는 것이었다. 이 재판은 절차적, 실질적 문제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 의회에서도 비판받았다.
5. 망명 생활과 이후 활동
1914년 11월 7일 부다페스트에서 카로이는 헝가리의 유력 가문인 안드라시 가문의 카탈린 백작부인과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아내의 가문 배경은 그의 정치 활동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외아들 아담 카로이는 영국 공군 조종사로 복무 중 1939년 와이트 섬 상공에서 항공기 시험 비행 중 사고로 사망했다.
1919년 7월 4일, 카로이는 오스트리아로 망명길에 올랐으며,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와 유고슬라비아를 거쳐 프랑스에 정착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영국에서 지냈다.[40] 망명 기간 동안 그는 새로 들어선 호르티 정권에 맞서 강한 비판 활동을 전개하고, 소협상 국가들과 연대하여 정권 교체를 시도하는 등 적극적인 반(反)호르티 활동을 펼쳤다. (자세한 내용은 #반(反) 호르티 활동 참조)
1924년, 미국에 있던 아내가 장티푸스에 걸리자 카로이는 병문안을 위해 미국 비자를 신청했으나, 미국 국무부는 그를 공산주의자로 간주하여 정치적 발언을 금지하는 조건을 달았다. 1년 후에는 아내의 미국 방문 비자마저 거부되었는데, 당시 국무장관 켈로그는 거부 사유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47] 변호사 모리스 언스트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섰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46년 헝가리로 돌아와 사회주의자로서 활동을 재개했으며, 1947년부터 1949년까지 프랑스 주재 헝가리 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1949년 러슬로 라이크의 숙청 사건에 항의하며 대사직을 사임하고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망명 생활 중 두 권의 회고록을 남겼으며, 1955년 3월 19일 프랑스 방스에서 사망했다.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활동 참조)
5. 1. 반(反) 호르티 활동
1919년 7월 4일, 카로이는 오스트리아로 망명했으며,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와 유고슬라비아를 거쳐 프랑스에 정착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영국에서 지냈다.[40] 한편, 1919년 4월부터 루마니아 군이 트란실바니아 재점령을 명분으로 헝가리를 침공하자, 이슈트반 베틀렌 백작,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 등은 프랑스 점령 하의 세게드에서 임시 정부를 구성했다.[40] 이는 이후 들어설 호르티 정권의 기반이 되었다.
망명 초기, 카로이는 온건 우익 성향의 신문인 '비에너 마자르 차이퉁'(Wiener Magyar Zeitungde)을 활용하여 호르티 정권에 대한 비판을 시작했다. 1920년 6월 5일, 트리아농 조약 조인 다음 날에는 백색 공포로 고통받는 헝가리에 대한 경제 봉쇄를 지지하는 글을 실었으며, 점차 그 논조는 격렬해졌다. 그는 호르티 정권을 다음과 같이 강하게 비판했다.
: "말로는 호르티를 이길 수 없다, 행동으로 그를 짓밟아야 한다. 잔혹함의 끔찍한 점은 잔혹함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잔혹함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호르티의 행동은 그가 인류의 적임을 보여준다 ... 그러므로 인류는 그의 면전에서 인류의 전통을 포기해야 한다."[43]
카로이는 새롭게 들어선 호르티 정권에 맞서 강력한 선전 활동을 펼치는 한편, 외교적 노력을 통해 정권 교체를 시도했다. 그는 주로 헝가리에 적대적이던 소협상의 창설자인 토마시 마사리크와 에두아르트 베네슈, 그리고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총리 카를 레너와 접촉했다. 이들과 함께 외국 군대의 개입을 통해서라도 호르티를 축출하고 헝가리 국가군을 무장 해제시키려 했으나, 이러한 시도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레너와 베네슈가 서방 연합국에 관련 내용을 전달했지만, 연합국 지도부는 이미 호르티의 집권을 용인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41][42]
이후 에두아르트 베네슈는 카로이를 모스크바 주재 체코슬로바키아 외교관으로 임명했다. 당시 소련 붉은 군대가 폴란드를 점령할 것으로 예상되었기에, 카로이는 외교관으로서 붉은 군대가 자카르파티아와 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존중하도록 설득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1920년 8월, 붉은 군대가 바르샤바 전투에서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원수가 이끄는 폴란드군에게 예상치 못한 패배를 당하면서 이 계획 역시 무산되었다.[43]
1944년 8월, 영국 헝가리 위원회 의장으로서 카로이는 동료들과 함께 헝가리 유대인에 대한 홀로코스트 박해가 계속되는 것에 항의하는 회의를 개최하기도 했다.[48] 호르티 시대 내내 카로이 미하이는 조국 헝가리에서 공식적으로 불명예스러운 인물로 취급받았다.
5. 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46년, 사회주의자가 된 카로이는 헝가리 제2공화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1947년부터 1949년까지 프랑스 주재 헝가리 대사로 활동했다.
그러나 1949년, 러슬로 라이크가 공개 재판을 받고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카로이는 이에 항의하며 대사직에서 사임했다.
이후 망명 생활 중 두 권의 회고록을 남겼는데, 1925년에 Egy egész világ ellen|에게시 에게스 빌라그 엘렌hu("온 세상에 맞서")를, 1954년에는 Memoirs: Faith without Illusion영어("회고록: 환상 없는 믿음")을 집필했다.
카로이는 1955년 3월 19일 프랑스 방스에서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6. 유산과 평가
카로이 미하이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크게 변화했다. 커다르 시대 말기에는 헝가리 최초의 공화국을 세운 인물로 긍정적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공공장소가 생겨나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동상도 세워졌다. 대표적으로 1975년 부다페스트 커셔트 러요스 광장에 조각가 임레 바르가가 제작한 동상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진 이후, 그에 대한 평가는 복잡하고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동상이 훼손되거나 결국 철거되는 일이 발생했으며,[49][50] 많은 헝가리인들은 그를 대헝가리의 해체와 1919년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에 대한 책임자로 지목하며 비판하기도 한다.[51] 이러한 변화된 인식은 그의 이름을 딴 거리의 이름이 변경되는 등 공공 영역에서도 나타났다. 21세기 현재, 카로이 미하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여전히 엇갈리고 있다.
6. 1. 헝가리 내에서의 평가
카로이는 별똥별 혁명 초기에 자신의 주요 정치적 반대자였던 전 총리 티서 이슈트반 암살을 반란군에게 선동했다는 혐의를 받았다.역사학자 페렌츠 푈뢰스케이(Ferenc Pölöskei)에 따르면, 베틀렌 이슈트반 총리는 티서 암살 혐의 재판에서 검찰 주장이 무너지자 "자신도 모르게, 어쩌면 영원히, 티서 암살의 미스터리로 이어지는 흔적을 지웠다"고 한다. 확실한 것은 음모가 미하이 카로이가 이끌던 국민 위원회에서 시작되지 않았고, 살인자들의 신원이 검찰의 기소 내용과 일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44][45] 역사학자 푈뢰스케이와 티보르 하이두(Tibor Hajdu)는 이 재판이 정치적 조작이었다고 본다. 그들은 "[티서의] 살인 혐의자들에 대한 재판은 어쩌면 최초의 현대 헝가리식 공개 재판이었을 것이며, 살인범의 진정한 신원 확인은 그들의 관심사 중 가장 적은 부분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스트반 티서 학회 회장인 가보르 빈체(Gábor Vincze)와 졸탄 마루자(Zoltán Maruzsa) 등 다른 역사학자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재판은 냉전 시대에 공산주의자들이 조작한 공개 재판과는 다르다. 호르티 정권에도 공개 재판을 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증거가 없는 사람은 결국 아무도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았고, 미하이 카로이 자신도 결국 살인 선동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지적한다.

커다르 시대 말기에 카로이는 헝가리 최초의 공화국을 세운 인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많은 거리와 공공장소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동상도 여러 개 세워졌다. 가장 유명한 것은 조각가 임레 바르가가 제작하여 1975년 부다페스트 커셔트 러요스 광장에 설치된 동상이다. 하지만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진 이후, 이 동상은 정체불명의 사람들에 의해 여러 차례 붉은 페인트로 훼손되었다.[49] 목에 철사가 걸리고 "나는 트리아농 조약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표지판이 걸리기도 했다. 결국 2012년 3월 29일 새벽, 커셔트 광장 재개발의 일환으로 동상은 철거되어 쾨바녀의 주조 공장으로 옮겨졌고,[50] 이후 제작자의 거주지인 쇼포크로 이전되었다.
21세기에 들어 카로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많은 헝가리인들은 그가 대헝가리의 해체와 1919년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에 책임이 있다고 비판한다.[51] 이러한 변화 속에서 헝가리 전역의 많은 도시들이 그의 이름을 딴 거리 이름을 변경했다. 예를 들어, 부다페스트에서는 도심의 주요 거리 이름이 '카로이 미하이 거리'에서 단순히 '카로이 거리'로 바뀌어 그와의 연관성을 희석시켰다.
6. 2. 국제적 평가
커다르 시대 말기, 카로이는 헝가리 최초의 공화국을 세운 인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공공장소가 많이 생겨났고, 그를 기리는 동상도 여러 개 세워졌다. 가장 유명한 것은 조각가 임레 바르가가 제작하여 1975년 부다페스트 커셔트 러요스 광장에 설치된 동상이다.
그러나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진 이후, 카로이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의 동상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 여러 차례 붉은 페인트로 훼손되었다.[49] 동상 목에 철사가 걸리고 "나는 트리아농 조약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표지판이 걸리기도 했다. 결국 2012년 3월 29일 새벽, 커셔트 광장 재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동상은 철거되어 쾨바녀의 한 주조 공장으로 옮겨졌고,[50] 이후 제작자의 거주지인 쇼포크로 이전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 카로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많은 헝가리인들은 그가 과거 대헝가리 영토의 해체와 1919년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에 책임이 있다고 비판한다.[51] 이러한 변화 속에서 헝가리 전역의 많은 도시들은 그의 이름을 딴 거리 이름을 변경했다. 예를 들어, 부다페스트 시내의 주요 거리 중 하나였던 '카로이 미하이 거리'는 단순히 '카로이 거리'로 이름이 바뀌어 그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희석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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