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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카란 2차 핵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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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카란 2차 핵 실험은 1998년 인도에서 진행된 핵실험으로, 1974년의 1차 핵실험 이후 두 번째 핵실험이었다. 이 실험은 5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최대 규모는 수소폭탄으로 TNT 45kt의 핵출력을 기록했다. 인도의 핵 프로그램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시작되어, 1960년대 중국과의 전쟁과 핵 실험을 계기로 핵무기 개발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1974년 1차 핵실험 이후, 1998년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정부 하에 2차 핵실험이 감행되었으며, 이는 국제 사회의 비난과 경제 제재를 초래했다. 파키스탄 또한 이에 대응하여 핵실험을 실시했고, 인도는 핵무기 보유국임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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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카란 2차 핵 실험
포크란-II 핵 실험 (Operation Shakti)
Shakti I 폭탄, 폭발 전
개요
국가인도
실험 장소포크란 사격장, 라자스탄 주
좌표27°04′44″N 71°43′20″E
기간1998년 5월 11일 ~ 1998년 5월 13일
실험 횟수3회 (5개 기폭 장치)
실험 종류지하 핵 실험
장치 종류핵분열핵융합
최대 폭발력45kt
이전 실험포크란-I

2. 역사

1974년 1차 핵 실험은 핵출력 TNT 12 kt의 플루토늄 핵분열탄으로 1회 실시했다. 미국 USGS에서는 리히터 규모 5.0의 지진을 관측했다.[1]

1998년 2차 핵 실험은 5차례에 걸쳐 여러 발의 핵폭탄을 터뜨렸으며, 최대 규모는 핵출력 TNT 45 kt 수소폭탄이었다. 미국 USGS에서는 1998년 5월 11일 10시 13분 41초(UTC)에 진앙 북위 27.105도, 동경 71.802도, 진원 0.0 km에서 리히터 규모 5.2의 지진이 발생한 것을 관측했다.[1]

2. 1. 초기 핵 프로그램 (1944-1965)

인도의 핵 프로그램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호미 바바와 같은 핵물리학자들의 주도로 시작되었다.[1] 1945년 타타 그룹의 지원을 받아 타타 기초 연구소 (TIFR)가 설립되었고, 인도 독립 이후 1948년 4월 15일 원자력법 통과와 함께 인도 원자력 위원회 (IAEC)가 설립되었다.[2] 1954년에는 인도 원자력부 (DAE)가 설립되어 원자력 개발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국방 예산의 상당 부분을 배정받았다.[3] 1956년 바바 원자력 연구 센터 (BARC)에서 아시아 최초의 원자로가 가동되었으며,[3] 1961년에는 무기급 핵물질 생산을 위한 재처리 공장이 가동되었다.

1962년 중국과의 전쟁과 1964년 중국의 핵 실험은 인도 핵무기 개발의 필요성을 증대시켰다.[2][1] 1960년대 초, 두 개의 원자로 가동과 함께 핵무기 제조 기술 습득 및 개발 연구가 진행되었으나,[4][2] 1964년 인도 총리 네루와 1966년 바바의 사망으로 프로그램은 늦춰졌다.[5] 이후 라자 바하두르 샤스트리 총리는 비크람 사라바이를 핵 프로그램 책임자로 임명, 평화적 목적의 핵 에너지 활용으로 방향을 전환했다.[6]

2. 2. 핵폭탄 개발과 첫 번째 실험 (1966-1972)

1966년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 총리가 사망한 후, 인디라 간디가 총리로 취임하면서 핵 프로그램 개발이 재개되었다.[5] 핵탄두 설계는 물리학자 라자 라만나의 지휘 아래 진행되었으며, 1966년 호미 바바의 사망 이후에도 핵무기 기술 연구는 계속되었다.[5] 이 프로젝트는 75명의 과학자가 참여한 가운데 비밀리에 진행되었다.[6]

바바 원자력 연구소(BARC)의 APSARA 원자로와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 1966년 2월 19일 미국 위성이 촬영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 미국이 인도를 압박하기 위해 벵골 만에 항공모함 타격단을 파견하자, 소련은 핵미사일을 탑재한 잠수함을 보내 이에 대응했다.[7] 소련의 이러한 군사적 지원은 인도에게 핵 억지력의 가치와 핵무기의 중요성을 각인시켜 주었다.[7]

전쟁에서 인도군이 파키스탄에 대해 군사적, 정치적 우위를 확보한 후, 핵 장치 건설 작업은 계속되었다. 1972년 초 핵무기 관련 하드웨어가 제작되기 시작했으며, 인디라 간디 총리는 1972년 9월 핵 실험 장치 개발을 승인했다.[8] 1974년 5월 18일, 인도는 인도 육군의 포크란 시험장에서 ''스마일링 부처''라는 암호명으로 폭축형 핵분열 장치를 실험했다.[9] 이 실험은 평화적 핵폭발 (PNE)로 명명되었으며,[9] 핵 출력은 6~10 킬로톤으로 추정되었다.[9][10][11][12]

2. 3. 핵실험 이후 (1973-1988)

인도는 핵 실험이 평화적 목적이라고 계속 주장했지만, 많은 국가의 반대에 직면했다. 핵 공급국 그룹(NSG)은 국제적인 핵 확산을 막기 위해 인도의 핵 실험에 대한 반작용으로 결성되었다.[13] 기술 금수 조치와 제재는 인도의 핵 프로그램 개발에 영향을 미쳤다.[14] 자체 자원의 부족과 특정 분야에서 수입 기술에 의존하면서 프로그램은 위축되었다. 인도는 국제 원자력 기구(IAEA)에 인도의 핵 프로그램이 오직 평화적 목적을 위한 것이라고 선언했지만, 핵융합 폭탄에 대한 예비 작업이 시작되었다.[15] 1975년 인도 비상사태 이후, 핵 프로그램은 M.R. 스리니바산의 지휘하에 계속되었지만, 진전은 더뎠다.[16]

파키스탄과 대량 살상 무기의 은밀한 원자 폭탄 프로그램이 발견되면서 인도는 몇 년 안에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깨달았다. 1980년 인도 총선에서 인디라 간디가 복귀하면서 핵 프로그램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 1982년까지 포크란 시험장에 두 개의 새로운 지하 갱도가 건설되었고, 간디는 1982년에 추가 핵 실험을 승인했다. 그러나 이는 파키스탄과의 핵 위협으로 이어지고 잠재적인 외교 정책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미국의 압력으로 인해 결정이 번복되었다. 그러나 V. S. R. 아루나찰람의 지휘하에 핵폭탄 무기화 작업이 계속되었고, 인도 미사일 프로그램은 A. P. J. 압둘 칼람의 지휘하에 시작되었다.[15] 라만나는 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추진했고, 제재에도 불구하고 인도는 중국, 노르웨이소련과 같은 국가로부터 중수를 중개인을 통해 수입했다. 1984년 총리가 된 라지브 간디는 기술 개발과 연구를 지원했지만, 핵 실험은 선진국과의 기술적 소외를 초래할 것이라고 믿어 핵 실험에 회의적이었다. 더 많은 양의 무기급 물질을 생산할 수 있는 새로운 원자로인 '드루바'는 1985년에 BARC에서 가동되었다. 핵무기를 공중 투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핵융합 폭탄의 다른 구성 요소가 이 기간 동안 개발되었다. 1985년 말, 총리가 위임한 연구 그룹은 70~100개의 핵탄두 생산 계획과 엄격한 핵무기 선제 불사용 정책을 수립했다.[15]

2. 4. 두 번째 핵실험 준비 (1989-1998)

1989년 인도 총선 이후 V.P. 싱 정부가 구성되었으나 2년 만에 붕괴되면서 핵무기 프로그램은 차질을 빚었다.[17] 인도-파키스탄 관계는 인도가 파키스탄을 잠무 카슈미르 반군 지원 혐의로 비난하면서 악화되었다. 이 기간 동안 인도 미사일 프로그램은 프리트비 미사일 개발에 성공했다. 인도는 국제적인 비판을 우려하여 핵 실험을 일시 중단했다.[17] 1992년 NSG는 새로운 핵 수출 계약에 대해 완전한 IAEA 안전 조치를 요구하기로 결정하여 인도는 핵 수출에서 사실상 배제되었다.[18]

인도는 핵분열 폭탄 12개를 건설할 수 있는 재료와 부품을 비축했지만, 전달 체계는 개발 중이었다. 아그니 미사일 시험과 1994년 폭격기에서 핵분열성 물질이 없는 유사 폭탄 투하 시험이 성공하면서 무기화가 진척되었다.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 논의와 인도를 압박하는 국제적인 분위기 속에서, 나라심하 라오 총리는 1995년 추가 핵 실험을 지시했다. DAE 국장 R. 치담바람의 지시로 S. K. 시카는 열핵융합 장치 개발을, DRDO의 K. 산타남은 시험 수행을 책임졌다. 그러나 미국의 정찰 위성이 징후를 포착하고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의 압력으로 시험은 중단되었다.[17][19]

1996년 라오 총리의 임기가 끝난 후,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는 핵무장을 강력히 옹호했으며, 1998년 총선 이후 집권했다. 바지파이는 재선 시 핵무기 도입 및 인도의 위력 선포를 공언했었다.[20] 1998년 3월 집권 직후, 바지파이는 압둘 칼람, 치담바람과 핵 실험 수행 회의를 열었고, 3월 28일 시험 준비를 지시했다.[21]

3. 1998년 핵실험 (포크란-II)

미 해병대 정보 활동부(Marine Corps Intelligence Activity)가 1997년에 제작한 인도 핵실험장 지도


1998년에 들어, 인도의 안전 보장 정책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바지파이 정권이 성립했고, 또한 파키스탄이 탄도 미사일 발사 실험을 하는 등,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에서 긴장이 고조되었다.[57]인도는, 이웃 나라인 중국이 핵무기 보유국이라는 핵확산 금지 조약(NPT) 체제의 불평등성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그 대항 수단으로서의 핵무기 개발을 저해하는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 (CTBT, 1996년 채택)은 인도의 위기감을 높였다.[56][57]。그 때문에, 중국이나 파키스탄에 대한 대항 및 NPT 체제에 대한 반발로, 핵실험을 실시했다.[56][57]。이는 군사 목적의 핵실험이었으며, 인도는 이 이후 핵무기를 장비하고, 핵에 의한 최소 억제를 안전 보장 독트린으로 채용하게 되었다.[56][57]

실험 장치는 (Bhabha Atomic Research Center, BARC)를 중심으로 제조되었으며, 필요한 플루토늄은 인도 국내에서 생산된 것으로 보인다.

실험은 수소 폭탄을 포함하여, 5월 11일에 3회, 5월 13일에 2회 실시했다고 인도 정부는 발표했다.

실험 장소는 1974년과 마찬가지로 라자스탄 주의 타르 사막에 있는 포카란 시험장이었으며, 모든 실험은 지하에서 이루어졌다. 폭발의 최대 규모는 지진계에 의해 최대 12kt로 추정된다.

아브둘 카디르 칸을 책임자로 하는 파키스탄의 과학자·기술자도 이에 대항하여, 같은 해 5월 28일과 30일에 핵실험을 실시했다 (파키스탄 핵실험 (1998년) 참조).

5차례의 실험 중 3차례(샤크티 I~III)는 5월 11일 10시 13분 44초(협정 세계시, UCT)(현지 시각 15시 43분 44초)에 동시에 실시되었으며, 실험으로 발생한 진동이 각국의 지진계에서 감지되었다. 나머지 2차례의 실험은 이틀 뒤인 5월 13일 6시 51분(협정 세계시, UCT)(현지 시각 12시 21분)에 실시되었으나, 폭발 규모가 너무 작았기에 인도 국내는 물론 인도 국외에 설치된 지진계에서도 진동이 감지되지 않았다.

각 실험의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샤크티 I

2단계 열핵폭탄(수폭)으로 핵출력은 45킬로톤이었지만, 실제로는 탄두 부분은 탑재되지 않았다. 이 이유는 실험의 목적이 수폭의 기초 기술 확인과 향후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위한 데이터 수집이었기 때문이다.

;샤크티 II

플루토늄을 연료로 하는 원자탄으로, 핵출력은 15킬로톤이었다. 이 실험의 목적은 폭격기, 전투기, 및 미사일에 탑재할 핵탄두로서의 검증이었으며, 1974년 당시보다 대폭 경량화·소형화되었다. 탄두의 개량에는 1974년 당시 데이터를 기반으로 인도산 슈퍼컴퓨터 '''PARAM'''이 사용되었으며, 이 결과가 샤크티 II에 반영되었다.

;샤크티 III

시험적인 원자탄 실험으로, 연료에는 원자로급 플루토늄이 사용되었으며, 핵출력은 0.3킬로톤이었다. 실험에 사용된 탄두는 단단계 핵분열 폭탄으로, 핵출력 향상을 위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트리튬도 사용되지 않았다. 이 실험의 목적은 원자로급 플루토늄의 핵무기 전용 가능성 검증과 (일반적으로 핵무기에는 무기급 플루토늄이 사용된다), 핵출력 억제를 포함한 제어 기술의 확립이었다.

;샤크티 IV

핵출력 0.5킬로톤의 시험적 폭발 실험으로, 몇몇 장치의 검증과 폭발 시 데이터 수집이 목적이었다.

;샤크티 V

핵출력 0.2킬로톤의 시험적 폭발 실험으로, 연료에는 인도 최초의 고속증식로에서 생성된 우라늄-233이 사용되었다. 이 실험 또한 데이터 수집이 목적이었다.

3. 1. 준비

미국의 첩보 위성을 피하기 위해, 인도 육군 공병대의 제58 공병 연대가 실험 부지 준비를 비밀리에 맡았다.[22] 작업은 주로 야간에 이루어졌으며, 장비는 낮 동안 원래 위치로 되돌려 이동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 폭탄 갱도는 위장망 아래에 파였고, 파낸 모래는 자연적인 사구 모양으로 만들었다. 케이블과 센서는 모래로 덮거나 자생 식물을 사용하여 은폐했다. 모든 요원은 군복을 착용해야 했으며, 소수의 선발된 그룹만이 폭발 과정에 참여했고, 이들은 가명을 사용하고 소규모 그룹으로 이동했다.[22][20]

A. P. J. 압둘 칼람은 핵실험의 공동 조정자 중 한 명이었다.


바바 원자력 연구소(BARC), 원자력 광물 탐사 및 연구 위원회(AMDER) 및 국방연구개발기구(DRDO)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폭탄 개발 및 조립에 참여했다.[23] DRDO의 세 연구소는 뇌관, 내파 및 고전압 트리거 시스템을 포함한 폭탄 부품의 설계, 테스트 및 생산에 참여했다. 이들은 또한 시스템 엔지니어링, 공기역학 및 안전에 대한 책임도 맡았다.[23] 폭탄은 1998년 5월 1일 오전 3시에 BARC에서 뭄바이 공항으로 옮겨졌고, 인도 공군의 AN-32 항공기로 자이살메르 공항으로 수송되었다. 이후 4대의 트럭으로 구성된 육군 호송대를 통해 포크란으로 운송되었으며, 이는 세 번의 왕복 운송이 필요했다. 장치는 '기도실'로 지정된 장치 준비 건물로 배달되었다.[23]

핵실험에 관련된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23]

  • 수석 조정자:
  • * A. P. J. 압둘 칼람, 인도 국방부 장관의 과학 고문이자 DRDO의 수장
  • * R. 치담바람, 인도 원자력 위원회 및 원자력부 의장
  • 국방 연구 개발 기구:
  • * K. 산타남, 핵실험 부지 준비 담당 이사
  • 바바 원자력 연구소:
  • * 아닐 카코드카, 소장
  • * S. K. 시카, 열핵무기 개발 책임자
  • * M. S. 라마쿠마르, 핵연료 및 자동화 제조 그룹 이사; 핵 부품 제조 책임자
  • * D.D. 수드, 방사화학 및 동위원소 그룹 이사; 핵물질 획득 담당
  • * S.K. 굽타, 고체 물리학 및 분광학 그룹; 장치 설계 및 평가 담당
  • * G. 고빈드라지, 전자 및 계측 그룹 부국장; 현장 계측 담당

3. 2. 실험

1998년 5월 11일과 13일, 인도 라자스탄 주 포크란 시험장에서 총 5차례의 핵실험(샤크티 I~V)이 실시되었다.[24][23][25] 실험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는데, 5월 11일에는 3차례(샤크티 I, II, III), 5월 13일에는 2차례(샤크티 IV, V)가 실시되었다.[20][27][28]

타르 사막에 있는 라자스탄 주의 핵 실험장인 포크란 시험장


5월 11일의 실험은 미국 USGS에서 리히터 규모 5.2의 지진으로 관측되었다.[24] 10시 13분 41초(UTC)에 진앙 북위 27.105도, 동경 71.802도, 진원 0.0 km에서 지진이 발생한 것이 관측되었다. 고수율 열핵 장치는 약 230m 깊이의 ''백악관''이라는 코드명의 샤프트에, 분열 폭탄은 150m 깊이의 ''타지마할''이라는 코드명의 샤프트에, 첫 번째 킬로톤 미만 장치는 ''Kumbhkaran'' 샤프트에 배치되었다. 처음 세 장치는 5월 10일에 각 샤프트에 배치되었고, 샤프트는 L자형이었으며, 수평 챔버는 시험 장치에 사용되었다.[23] 실험의 타이밍은 현지 기상 조건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오후 3시 45분 IST에 세 장치가 동시에 폭발했다.[23][20][27]

반면, 5월 13일 오후 12시 21분 IST에 실시된 샤크티 IV와 V는 수율이 매우 낮아 지진 관측소에서 감지되지 않았다.[20][28]

  • 샤크티 I: 2단계 열핵 장치로, 융합이 증폭된 1차 장치로, 시험 설계 수율은 45kt이지만 최대 200kt의 배치 수율을 위해 설계되었다. 실제로는 탄두 부분은 탑재되지 않았는데, 이는 실험 목적이 수폭의 기초 기술 확인과 향후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위한 데이터 수집이었기 때문이다.
  • 샤크티 II: 가벼운 플루토늄 내폭 분열 장치로 12kt의 수율을 내며, 폭격기 또는 미사일로 탑재할 수 있는 탄두로 의도되었다. 1974년 당시보다 대폭 경량화·소형화되었으며, 탄두 개량에는 인도산 슈퍼컴퓨터 '''PARAM'''이 사용되었다.
  • 샤크티 III: 원자로 등급 플루토늄을 사용한 실험적 선형 내폭 분열 장치로, 0.3kt의 수율을 냈다. 핵출력 억제를 포함한 제어 기술 확립이 목적이었다.
  • 샤크티 IV: 0.5kt 실험적 분열 장치로, 몇몇 장치의 검증과 폭발 시 데이터 수집이 목적이었다.
  • 샤크티 V: 0.2kt 토륨/U-233 실험적 분열 장치로, 인도 최초의 고속증식로에서 생성된 우라늄-233이 사용되었으며, 데이터 수집이 목적이었다.


여섯 번째 장치(''Shakti VI'')가 추가로 개발되었지만 폭발하지는 않았다.

3. 3. 발표

바지파이 총리는 핵실험 직후 언론에 나타나 성공적인 실험 결과를 발표하며, 과학자와 기술자들에게 축하를 보냈다.[30][31] 핵실험 직후, 인도는 핵무기 보유국임을 선언했다.[29] 1998년 5월 13일, 인도는 일련의 실험이 종료되었음을 선언했다.[32][33]

4. 핵실험의 영향 및 반응

실험 후, 국제 연합, 국제 원자력 기구가 비난 성명을 발표했지만, 애초에 인도도 파키스탄도 핵 확산 금지 조약,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에 서명하지 않아 국제적인 핵실험 금지 제한이 가해지지 않은 상태였다.[50] 이 때문에, 일본, 미국을 비롯한 각국이 단독으로 인도, 파키스탄 양국에 경제 제재를 가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였지만, 미국에서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자, 아프가니스탄탈레반에 대한 보복의 발판으로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가진 파키스탄이 적극적으로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했기 때문에, 미국은 파키스탄에 대한 경제 제재를 해제했으며, 또한 이에 맞춰 인도에 대한 제재도 해제하게 되었다. 일본은 2000년 모리 요시로 총리의 인도 방문부터 관계 개선을 향해 나아가,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인도 방문, 이듬해 만모한 싱 인도 총리의 일본 방문을 통해 일-인도 파트너십을 확립, 매년 상호 방문을 하는 사이가 되었다.

인도 국민들은 핵 실험 소식에 환호하며 대규모 지지를 보냈다. 봄베이 증권거래소는 상당한 상승을 기록했다.[34] 언론은 정부의 결정을 칭찬하며, 국가 군대의 작전 핵무기 개발을 옹호했다. 인도 국민 회의를 이끄는 야당은 일련의 핵 실험을 감행한 바지파이 행정부를 비판하며, 국가 안보를 강화하기보다는 정치적 목적으로 핵 실험을 이용하려 한다고 비난했다.[34]

인도가 핵 실험을 실시했을 당시, 1998년 기준 총 440억 달러의 IMF 및 세계 은행 대출이 있었다.[35] 인도 경제의 산업 부문은 인도에 막대한 투자를 한 외국 기업들이 곧 시행될 제재의 영향을 받으면서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았다. 인도 정부는 경제적 대응을 고려했으며, 그 결과도 감수할 의지가 있다고 발표했다.[35]

인도의 포카란 2차 핵 실험은 국제 사회의 다양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은 인도를 규탄하며 경제 제재를 가했다.[36][37] 이는 1994년 반확산법에 따른 조치였다.[37] 미국의 제재는 인도적 지원을 제외한 모든 지원 중단, 특정 방위 물자 및 기술의 수출 금지, 인도에 대한 미국의 신용 및 신용 보증 중단, 미국이 인도에 대한 국제 금융 기관의 대출에 반대하도록 요구하는 것을 포함했다.[38] 미국은 인도가 CTBT 및 NPT에 가입할 것을 요구하며 핵 프로그램 축소를 압박했지만, 인도는 국가 안보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부했다.[39][40]

캐나다는 인도의 조치를 비판했고,[41] 일본은 인도적 지원을 제외한 모든 신규 대출 및 보조금 동결을 포함한 경제 제재를 가했다.[42] 다른 몇몇 국가들도 인도에 제재를 가했다.[43] 중국은 핵실험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며, 인도가 핵무기 개발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43] 또한 중국은 중국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핵 능력이 필요하다는 인도의 주장을 근거 없는 것으로 일축했다.[44] 그러나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핵실험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것을 자제했다.[45]

파키스탄은 인도가 핵 군비 경쟁을 촉발했다고 비난하며, 1998년 5월 28일과 30일에 각각 ''차 가이-I''과 ''차 가이-II''라는 암호명으로 6차례의 핵실험을 실시했다.[46][20]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결의안 1172를 채택하여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실험을 비난했다.

4. 1. 인도 국내 반응

인도 국민들은 핵 실험 소식에 환호하며 대규모 지지를 보냈다. 봄베이 증권거래소는 상당한 상승을 기록했다.[34] 언론은 정부의 결정을 칭찬하며, 국가 군대의 작전 핵무기 개발을 옹호했다. 인도 국민 회의를 이끄는 야당은 일련의 핵 실험을 감행한 바지파이 행정부를 비판하며, 국가 안보를 강화하기보다는 정치적 목적으로 핵 실험을 이용하려 한다고 비난했다.[34]

인도가 핵 실험을 실시했을 당시, 1998년 기준 총 440억 달러의 IMF 및 세계 은행 대출이 있었다.[35] 인도 경제의 산업 부문은 인도에 막대한 투자를 한 외국 기업들이 곧 시행될 제재의 영향을 받으면서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았다. 인도 정부는 경제적 대응을 고려했으며, 그 결과도 감수할 의지가 있다고 발표했다.[35]

4. 2. 국제 사회 반응

인도의 포카란 2차 핵 실험은 국제 사회의 다양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은 인도를 규탄하며 경제 제재를 가했다.[36][37] 이는 1994년 반확산법에 따른 조치였다.[37] 미국의 제재는 인도적 지원을 제외한 모든 지원 중단, 특정 방위 물자 및 기술의 수출 금지, 인도에 대한 미국의 신용 및 신용 보증 중단, 미국이 인도에 대한 국제 금융 기관의 대출에 반대하도록 요구하는 것을 포함했다.[38] 미국은 인도가 CTBT 및 NPT에 가입할 것을 요구하며 핵 프로그램 축소를 압박했지만, 인도는 국가 안보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부했다.[39][40]

캐나다는 인도의 조치를 비판했고,[41] 일본은 인도적 지원을 제외한 모든 신규 대출 및 보조금 동결을 포함한 경제 제재를 가했다.[42] 다른 몇몇 국가들도 인도에 제재를 가했다.[43] 중국은 핵실험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며, 인도가 핵무기 개발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43] 또한 중국은 중국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핵 능력이 필요하다는 인도의 주장을 근거 없는 것으로 일축했다.[44] 그러나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핵실험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것을 자제했다.[45]

파키스탄은 인도가 핵 군비 경쟁을 촉발했다고 비난하며, 1998년 5월 28일과 30일에 각각 ''차 가이-I''과 ''차 가이-II''라는 암호명으로 6차례의 핵실험을 실시했다.[46][20]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결의안 1172를 채택하여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실험을 비난했다.[50]

국제 연합, 국제 원자력 기구가 비난 성명을 발표했지만, 인도와 파키스탄은 핵 확산 금지 조약,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에 서명하지 않아 국제적인 핵실험 금지 제한이 가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일본, 미국을 비롯한 각국이 단독으로 인도, 파키스탄 양국에 경제 제재를 가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였지만,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한 파키스탄에 대한 경제 제재를 해제했으며, 인도에 대한 제재도 완화되었다. 일본은 2000년대 이후 인도와의 관계 개선을 추진, 일-인도 파트너십을 확립했다.

4. 3. 더불어민주당 관점 및 평가 (별도 소주제)

5. 유산 및 대중문화

인도 정부는 1998년 5월 11일에 실시된 5차례의 핵무기 실험 중 첫 번째 실험을 기념하기 위해 5월 11일을 인도의 기술의 날로 지정했다.[51] 이 날은 과학 및 기술 분야의 다양한 개인과 산업에 상을 수여하며 기념한다.[52]

2018년 볼리우드 영화인 파르마누: 포크란 이야기(Parmanu: The Story of Pokhran)는 핵실험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53] 아난드 파트와르단의 다큐멘터리인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는 핵실험의 사건들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5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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