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아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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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레아 칸은 앙코르 톰 북동쪽에 위치한 사원 유적이다. 1191년 자야바르만 7세가 참파 왕국과의 전투 승리를 기념하여 건립했으며, 부친을 기리는 관세음보살상을 안치했다. 한때 1,000명 이상의 승려와 9만 명 이상의 시중들이 거주하며 불교 사원, 도시, 대학의 역할을 했으나, 힌두교 신자인 자야바르만 8세에 의해 불상이 파괴되었다. 15세기부터 쇠퇴하여 현재는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며, 1991년부터 세계 기념물 기금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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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욘은 자야바르만 7세가 앙코르 톰에 건설한 크메르 제국의 마지막 국찰이자 대승불교 사찰로, 인면상과 부조, 건축 양식, 종교적 변화를 통해 크메르 건축과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앙코르 유적의 중요한 사원이다.
| 프레아 칸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 개요 | |
![]() | |
| 위치 | 캄보디아, 앙코르 |
| 종교 | 힌두교 |
| 건축 양식 | 크메르 양식 |
| 창건자 | 자야바르만 7세 |
| 완공 연도 | 서기 1191년 |
| 상세 정보 | |
| 신 | 비슈누 |
| 웹사이트 | 프레아 칸 사원 |
2. 역사
프레아 칸은 크메르 제국의 자야바르만 7세가 1191년에 건립한 대규모 사원 단지이다. 이곳은 참파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으며, 건립 이전에는 야쇼바르만 2세나 트리부바나디탸바르만의 왕궁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자야바르만 7세는 이곳에 자신의 아버지를 형상화한 관세음보살 상을 봉헌했다.
초기 프레아 칸은 단순한 사원을 넘어 도시, 사원, 불교 대학의 기능을 겸하는 복합적인 공간으로 번성했다. 기록에 따르면 천 명 이상의 승려와 수많은 관리 인원, 교사, 무용수 등이 거주했으며, 막대한 부를 소유했다고 전해진다. 건립 당시에는 불교를 중심으로 힌두교 신들과 토착 신앙 요소들이 공존했으나, 자야바르만 7세 사후 힌두교를 신봉한 자야바르만 8세 시대에 많은 불상이 파괴되는 등 종교적 변화를 겪었다.
15세기경부터 왕실의 지원이 줄어들면서 프레아 칸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3] 이후 수 세기 동안 사원은 정글의 나무들에 뒤덮이고, 건축물이 붕괴되었으며, 많은 조각상이 도난당하는 등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20세기 초 프랑스 식민 시기에 초기 정리 및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고, 1939년에는 부분적인 아나스틸로시스가 이루어졌다. 1991년부터는 세계유산기금(WMF)이 유적 관리를 맡아 신중한 복원 및 유지 관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프레아 칸은 대부분 복원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자연과 유적이 어우러진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앙코르 유적의 주요 관광지 중 하나로 많은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또한 캄보디아의 국교인 불교 승려들이 경내에서 활동하며 종교적 명맥을 잇고 있다. 사원의 이름 유래가 된 '성스러운 검'은 프놈펜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2. 1. 건립 배경
프레아 칸(Preah Khan)은 1191년 크메르 제국의 자야바르만 7세가 참파의 침략군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여 세운 사원이다.[3] 이 장소는 이전에 야쇼바르만 2세와 트리부바나디탸바르만의 왕궁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사원의 원래 이름은 '나가라 자야스리'(Nagara Jayasri)로, '승리의 성스러운 도시'라는 뜻이다. 현대 이름인 '프레아 칸'은 '성스러운 검'을 의미하며, 이는 원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름의 유래가 된 '성스러운 검'은 현재 프놈펜의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전시되고 있다.

1191년, 자야바르만 7세는 자신의 아버지를 형상화한 관세음보살(아발로키테슈바라) 상을 사원의 중심에 봉헌했다. 이는 이전에 타 프롬 사원에서 어머니를 기린 것과 같은 방식이다. 사원의 기초 비석에는 사원의 역사와 운영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주 불상 외에도 430명의 다른 신들을 모신 사당이 있었으며, 각 신에게는 음식, 의복, 향수, 심지어 모기장까지 제공되었다. 또한 사원은 막대한 부를 소유했는데, 금, 은, 보석, 112,300개의 진주, 금박을 입힌 뿔을 가진 소 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프레아 칸은 단순한 사원이 아니라 도시, 사원, 불교 대학의 기능을 결합한 복합적인 공간이었다. 이곳에는 1,000명의 무용수와 1,000명의 교사를 포함하여 총 97,840명의 시중과 하인들이 거주하며 사원 운영을 지원했다고 한다. 초기에는 힌두교 신들과 땅의 수호신들도 경내에 모셔졌지만, 나중에 힌두교를 믿는 자야바르만 8세에 의해 많은 불상이 파괴되었다.
2. 2. 운영 및 쇠퇴
1191년 자야바르만 7세는 침략해 온 참파를 물리친 자리에 프레아 칸을 건설했다. 사원의 현대 이름인 '프레아 칸'은 '성스러운 검'을 의미하며, 이는 원래 이름인 '나가라 자야스리'(នគរជ័យស្រី|나가라 자야스리km, 승리의 성스러운 도시)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장소는 이전에 야소바르만 2세와 트리부바나디탸바르만의 왕궁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사원의 기초 비석에는 사원의 역사와 운영에 대한 중요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1191년에 자야바르만 7세는 자신의 아버지를 형상화한 관세음보살 (아발로키테슈바라) 상을 봉헌했다. 이는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타 프롬을 건설한 것과 유사한 방식이다. 주 불상 외에도 430개의 다른 신상이 각자의 사당에 모셔졌으며, 이들에게는 음식, 의복, 향수, 심지어 모기장까지 정기적으로 공급되었다.
프레아 칸은 단순한 사원이 아니라 도시, 사원, 불교 대학의 기능을 결합한 복합 시설이었다. 당시 사원의 부와 보물에는 금, 은, 보석, 112,300개의 진주, 그리고 금박을 입힌 뿔을 가진 소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음 표는 당시 사원의 규모를 보여준다.
| 항목 | 내용 |
|---|---|
| 건립자 | 자야바르만 7세 |
| 건립 연도 | 1191년 |
| 봉헌 대상 | 아버지 형상화 관세음보살 (아발로키테슈바라)상, 기타 신상 430개 |
| 거주 승려 | 1,000명 이상 |
| 소속 인원 | 교사 1,000명, 무용수 1,000명 |
| 관리 영지 인구 | 97,840명 |
| 주요 기능 | 도시, 사원, 불교 대학 |
| 보유 재산 | 금, 은, 보석, 진주 112,300개, 금박 뿔을 가진 소 등 |
초기에는 힌두교의 신들이나 토지의 성령 등도 경내에 함께 모셔졌다. 그러나 불교 신자였던 자야바르만 7세가 사망한 후, 힌두교를 신봉한 자야바르만 8세에 의해 수많은 불상이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다.
15세기경부터 크메르 왕족의 지원이 끊기면서 프레아 칸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3] 왕실의 지원 감소로 거대한 사원 단지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구역은 종교적 또는 문화적 목적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반얀트리 (벵골보리수)와 같은 거대한 나무들의 뿌리가 건물을 뒤덮고 파괴했으며, 부조상 등의 도난도 심각하여 사원은 큰 손실을 입었다.
사원은 여전히 대부분 복원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 초기 정리 작업은 1927년부터 1932년까지 이루어졌고, 1939년에는 부분적인 아나스티로시스(anastylosis, 해체 복원)가 시행되었다. 이후 자립형 조각상들은 안전을 위해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추가적인 보강 및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다. 복원가들은 사원이 발견되었을 당시의 자연과 어우러진 야생적인 모습을 보존하는 것과 유적을 복원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 노력했다. 당시 복원 작업을 이끈 모리스 글레이즈(Maurice Glaize)는 "사원은 탐욕스러운 식물들에 뒤덮여 심하게 파괴되었고 혼돈 그 자체였다. 정리 작업은 즉각적인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큰 나무들을 존중하며 진행되었고, 동시에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건축적, 장식적으로 중요한 건물들을 부분적으로 복원하여 되살렸다"고 기록했다.
1991년부터는 세계유산기금(World Monuments Fund, WMF)이 유적 관리를 맡고 있다. WMF는 사원의 폐허 상태를 존중하며 신중한 접근 방식을 유지하고 있으며, 과도한 복원은 역사를 왜곡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WMF의 전 직원은 "우리는 기본적으로 과장된 유지 관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역사를 위조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WMF는 주로 동쪽의 네 번째 고푸라, 불의 집(House of Fire), 무용가의 홀(Hall of Dancers) 등의 안정화 작업에 집중해왔다.
현재 프레아 칸은 캄보디아의 내정과 치안이 안정되면서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불교가 캄보디아의 국교로 자리 잡으면서 승려들이 경내에서 기도를 올리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사원의 이름 유래가 된 '성스러운 검'은 현재 프놈펜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전시되고 있다.
2. 3. 힌두교와 불교의 혼합
프레아 칸 사원은 건립자인 자야바르만 7세가 불교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종교적 요소가 혼합된 특징을 보인다. 1191년 봉헌된 아버지 형상의 관세음보살상 외에도, 경내에는 힌두교의 신들이나 토지의 성령 등 430개의 다른 신들을 모신 사당들이 함께 존재했다. 각 신들에게는 음식, 의복, 향수, 심지어 모기장까지 제공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공존은 오래가지 못했다. 불교 신자였던 자야바르만 7세가 세상을 떠난 후, 힌두교를 신봉했던 후계자 자야바르만 8세는 수많은 불상을 파괴하는 등 불교 탄압 정책을 펼쳤다. 이는 프레아 칸에 새겨진 종교적 갈등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시간이 흘러 캄보디아의 국교가 다시 불교로 자리 잡으면서, 현재 프레아 칸 경내에서는 승려들이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처럼 프레아 칸은 건립 초기 불교와 힌두교의 공존, 이후 힌두교 세력에 의한 불교 탄압, 그리고 다시 불교 사원으로 회복되는 과정을 거치며 두 종교의 영향을 복합적으로 간직하게 되었다.
2. 4. 복원 및 관리
크메르 왕족이 15세기경부터 지원을 중단하면서 프레아 칸은 점차 쇠퇴하였다.[3] 왕실의 지원이 줄어들면서 복합 건물을 유지하고 사용하는 것이 어려워졌지만, 일부 구역은 종교적 또는 문화적 활동에 계속 사용되었다.사원은 여전히 대부분 복원되지 않은 상태이다. 초기 정리는 1927년부터 1932년까지 이루어졌고, 1939년에는 부분적인 재결합(anastylosis)이 수행되었다. 그 이후 자립형 조각상들은 안전을 위해 옮겨졌고, 추가적인 보강 및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 복원 과정에서는 사원이 발견된 당시의 야생 상태를 유지하는 것과 복원 작업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이 있었다. 복원가 중 한 명인 모리스 글레이즈(Maurice Glaize)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사원은 이전에 특히 탐욕스러운 식물들로 뒤덮이고 상당히 파괴되어 혼돈만을 보여주었다. 정리 작업은 구성에 즐거운 모습을 주면서 즉각적인 위험을 구성하지 않는 큰 나무들을 꾸준히 존중하여 수행되었다. 동시에 일부 부분적인 재결합은 보존 상태가 충분하고 건축이나 장식에서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다양한 건물들을 되살렸다.
1991년부터 이 유적은 세계 기념물 기금(World Monuments Fund, WMF)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WMF는 사원의 폐허 상태를 존중하며 더 이상의 복원은 과도한 추측을 포함할 수 있다는 신중한 접근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WMF의 전 직원은 "우리는 기본적으로 과장된 유지 관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는 역사를 위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WMF는 주로 동쪽의 네 번째 고푸라, 불의 집, 무용가의 홀 등에 대한 안정화 작업을 수행해왔다.
반얀트리(벵골보리수나무)의 번식과 부조상의 도난으로 인해 사원은 큰 손실을 입었으며, 지금도 복구 작업이 진행 중이다. 캄보디아의 내정과 치안이 안정화됨에 따라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3. 구조
프레아 칸은 앙코르 톰 북동쪽에 위치하며, 주 재료인 라테라이트와 사암으로 지어졌다. 사원 경내는 동서 800m, 남북 700m 크기의 평탄한 대지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전체 면적은 약 56ha에 달한다. 이 넓은 경계는 둥근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4]
해자를 건너는 다리는 사방의 주 출입구로 연결되며, 난간에는 힌두교 신화 '우유의 바다 휘젓기'를 묘사한 조각이 있다. 거대한 나가를 중심으로 데바(신)와 아수라가 양쪽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앙코르 톰의 다리에서도 볼 수 있는 양식이다. 사원의 가장 바깥쪽 외벽(네 번째 담장)은 라테라이트로 만들어졌으며, 일정한 간격으로 나가를 움켜쥔 가루다 조각상이 배치되어 있다.
본전은 삼중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구조를 가진다. 각 담장에는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문(고푸라)과 참배로가 나 있었으나, 현재 일부는 붕괴되어 통행이 불가능하다. 담장과 문은 중앙 본전에 가까워질수록 폭과 높이가 점차 좁아지도록 설계되었는데, 이는 원근법을 이용하여 사원이 실제보다 더 크고 깊이감 있게 보이도록 의도한 건축 기법이다.
내부에는 다양한 기능을 가진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중앙 성소에는 원래 대승 불교의 보살인 로케스바라 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후대에 세워진 스투파(불탑)가 현재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중앙 성소 주변과 갤러리 벽면에는 수많은 구멍이 남아있는데, 이는 과거 벽을 장식했던 청동판을 고정했던 흔적으로 추정된다. 이 외에도 춤추는 사람들의 홀, 도서관, 화재의 집(Dharmasala), 그리고 앙코르 유적에서는 보기 드문 원형 기둥을 가진 2층 건물(장경각 또는 곡창으로 추정) 등이 주요 구조물로 남아있다. 또한 주 사원 외에도 시바, 비슈누, 이전 왕과 왕비에게 봉헌된 작은 위성 사원들이 배치되어 있다.
동쪽 참배로가 주된 진입 경로로 이용되었으며, 참배로를 따라 벽면에 새겨진 불교의 관세음보살이나 힌두교의 링가와 같은 종교적 조각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야바르만 8세 통치 시기에는 힌두교 부흥 정책의 영향으로 사원 곳곳의 불상들이 체계적으로 파괴되거나 힌두교의 은둔자 모습으로 수정되기도 했다.
3. 1. 위치 및 구성
frame의 북동쪽에 위치한다.]]프레아 칸은 앙코르 톰의 북대문에서 북동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길 오른편에 자리 잡고 있다. 사원은 라테라이트와 사암으로 지어졌으며, 경내는 평탄하고 동서 800m, 남북 700m 크기의 둥근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 전체 면적은 약 56ha에 달한다.[4]
해자를 건너는 다리는 사방의 주 출입구로 이어지는 제방 위에 설치되어 있으며, 다른 많은 앙코르 유적처럼 힌두교 신화 '우유의 바다 휘젓기' 장면을 묘사한 난간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난간에는 거대한 뱀인 나가와 이를 양쪽에서 잡아당기는 데바(신)와 아수라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앙코르 톰의 것과 유사하며, 프레아 칸이 단순한 사원을 넘어 도시적인 기능을 가졌음을 시사한다. 동쪽이 주 출입구이지만, 다른 방향에도 출입구가 있다.
가장 바깥쪽 외벽(네 번째 담장)은 라테라이트로 만들어졌으며, 약 50m 간격으로 나가를 움켜쥔 가루다 조각상 72개가 새겨져 있다.

이 네 번째 담장 안쪽은 원래 도시 지역이었으나, 내구성이 약한 재료로 지어진 건물들은 현재 남아있지 않고 숲으로 뒤덮여 있다. 북쪽 측면의 세 번째 담장으로 이어지는 길 중간에는 타 프롬과 유사한 화재의 집(Dharmasala) 유적이 있다. 프레아 칸 동쪽에는 한때 거대한 자야타타카 바라이(인공 저수지, 크기 3.5km x 0.9km) 가장자리에 상륙장이 있었으며, 이를 통해 바라이 중앙의 네악 페안 사원으로 갈 수도 있었다. 한때 말라붙었던 자야타타카 바라이는 현재 다시 물이 차 있다.[4]
본전은 삼중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동서남북으로 참배로가 나 있다. 그러나 남북 방향의 참배로는 붕괴되어 통행할 수 없다. 각 담장 벽에는 원래 탑문(고푸라)이 있었으나 대부분 무너져 흔적을 찾기 어렵다. 담장 문은 본전에 가까워질수록 폭과 높이가 점차 좁아지도록 설계되었는데, 이는 원근법을 이용하여 사원이 실제보다 더 넓고 웅장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한 기법이다.
세 번째 담장은 크기가 200m x 175m이다. 세 번째 동쪽 고푸라 앞에는 십자형 테라스가 있으며, 고푸라 자체는 중앙에 세 개의 탑과 양쪽에 두 개의 부속 건물을 갖춘 큰 규모이다. 남쪽의 두 탑 사이에는 유명한 두 그루의 세이보 나무가 자라 구조물과 얽혀 있었으나, 현재 한 그루는 죽고 뿌리만 남아있다. 구조물 보호를 위해 나무를 제거해야 할 수도 있다. 서쪽의 세 번째 고푸라에는 체스 게임과 라마야나의 랑카 전투 장면 조각상이 있으며, 서쪽에는 두 명의 수호신상(드바라팔라)이 있다.


세 번째 담장 안, 동쪽 고푸라 서쪽의 중앙 축에는 춤추는 사람들의 홀이 있다. 이 건물의 벽은 압사라 무희들의 모습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나, 위쪽 벽감에 있던 불상들은 자야바르만 8세 통치 시기에 체계적으로 파괴되었다. 춤추는 사람들의 홀 북쪽에는 둥근 기둥이 특징인 2층 건물이 있는데, 이는 앙코르 유적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이다. 타 프롬과 반테아이 크데이에도 유사한 건물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장경각 또는 곡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 번째 담장의 나머지 부분에는 각 모서리에 현재는 마른 연못이 있고, 북쪽, 남쪽, 서쪽에는 작은 위성 사원들이 있다. 주 사원은 불교 사원이지만, 이 세 사원은 각각 힌두교의 신인 시바, 이전 왕과 왕비, 비슈누에게 봉헌되었다. 북쪽 사원에는 누워 있는 비슈누와 힌두 삼신(브라흐마, 비슈누, 시바) 조각이 있고, 서쪽 사원에는 크리슈나가 고바르다나 산을 들어 올리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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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사람들의 홀과 두 번째 담장(크기 85m x 76m) 사이의 안뜰에는 두 개의 도서관 건물이 있다. 두 번째 담장의 동쪽 고푸라는 이 안뜰 쪽으로 돌출되어 있으며, 처마 모서리에 가루다 조각이 있는 몇 안 되는 앙코르 고푸라 중 하나이다. 이 고푸라 기둥에 있던 불상들 역시 자야바르만 8세 시기에 힌두교의 은둔자 모습으로 바뀌었다.
가장 안쪽의 첫 번째 담장(크기 62m x 55m)과 두 번째 담장 사이 공간에는 후대에 추가된 여러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원래의 구조를 파악하기 어렵고 장식 일부를 가리고 있다. 첫 번째 담장 내부는 십자형 갤러리로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공간은 후대에 추가된 불규칙한 건물들로 거의 채워져 있다. 이 갤러리 벽과 중앙 성소 내부에는 수많은 작은 구멍들이 남아 있는데, 이는 원래 벽과 성소 외부를 덮었던 청동판을 고정하기 위한 흔적이다. 전체 사원을 장식하는 데 약 1,500톤의 청동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원의 중앙 성소에는 원래 대승 불교의 보살인 로케스바라 상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현재는 사원 건설 후 수 세기가 지나 세워진 스투파(불탑)가 자리하고 있다. 참배는 주로 동쪽 참배로를 따라 이루어지며, 길을 따라 벽면에 새겨진 불교의 관세음보살이나 힌두교의 링가 상징을 볼 수 있다. 참배로를 따라 안뜰로 나가면 나가 난간으로 둘러싸인 테라스가 나온다.
3. 2. 주요 진입로 및 다리

프레아 칸은 앙코르 톰의 북대문에서 북동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사원의 가장 바깥 경계는 라테라이트로 만들어진 외벽과 해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 외벽은 동서로 800m, 남북으로 700m 크기이며, 면적은 약 56ha에 달한다.[4] 외벽에는 50m 간격으로 총 72개의 가루다가 나가를 잡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프레아 칸은 주로 동쪽을 향하고 있어 동쪽이 주 출입구이지만, 사방의 주요 방위에 따라 다른 출입구도 존재한다. 각 출입구 앞에는 해자를 건너는 둑길 형태의 다리가 놓여 있다. 이 다리들의 난간은 앙코르 톰의 다리와 유사하게 우유의 바다 휘젓기 신화에 등장하는 장면으로 장식되어, 거대한 나가의 몸통을 데바(신)와 아수라가 서로 당기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프레아 칸이 타 프롬이나 반테아이 크데이보다 도시적인 성격이 강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동쪽 주 진입로의 경우, 사원 외부의 자야타타카 바라이(저수지) 가장자리에 있는 상륙장과 연결된다. 이 바라이는 크기가 3.5km × 0.9km이며, 한때 말랐었으나 현재는 다시 물이 차 있다.[4] 이 상륙장을 통해 바라이 중앙에 위치한 네악 페안 사원으로 접근할 수도 있었다.
사원으로 들어가는 각 단계의 탑문(입구 건축물)은 본전에 가까워질수록 폭과 높이가 점차 좁아지도록 설계되었다. 이는 원근법을 이용하여 참배자가 사원을 실제보다 더 넓고 웅장하게 느끼도록 의도한 건축 기법이다. 주요 참배는 동쪽 진입로를 통해 이루어졌다.
3. 3. 담장 및 고푸라
프레아 칸의 가장 바깥쪽 담장(네 번째 담장)은 라테라이트로 만들어졌으며, 50m 간격으로 나가를 잡고 있는 가루다 72개가 새겨져 있다. 이 가루다 상은 높이가 5m에 달한다. 해자로 둘러싸인 이 사원은 동서로 800m, 남북으로 700m 크기이며, 전체 면적은 약 56ha이다.[4] 동쪽에는 한때 거대한 자야타타카 바라이(인공 저수지) 가장자리에 있던 상륙장이 있으며, 크기는 3.5km × 0.9km이다. 이 상륙장을 통해 바라이 중앙에 있는 네악 페안 사원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사원은 일반적으로 동쪽을 향하고 있어 동쪽이 주 출입구였지만, 사방의 주요 방위에 다른 출입구도 있다. 각 출입구에는 해자 위에 놓인 제방길(참도, 參道)이 있으며, 이 길의 난간은 앙코르 톰의 남문처럼 우유의 바다 휘젓기 신화에 따라 나가를 든 데바(신)와 아수라의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모리스 글레이즈는 이러한 특징이 프레아 칸의 도시적 성격이 타 프롬이나 반테아이 크데이보다 더 중요했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했다. 외벽의 문(고푸라)은 본전에 가까워질수록 입구의 너비와 높이가 좁아지도록 설계되어, 원근법에 의해 사원이 더 넓게 보이도록 하는 효과를 준다. 특히 동쪽 참도를 따라서는 벽면에 새겨진 불교의 관세음보살이나 힌두교의 링가 조각을 볼 수 있다.
세 번째 담장으로 이어지는 북쪽 길 중간에는 타 프롬과 유사한 화재의 집(Dharmasala, 다르마살라) 유적이 있다. 현재 숲으로 덮인 네 번째 담장(외벽) 안쪽 지역은 원래 도시 구역이었으나, 내구성이 약한 재료로 지어져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세 번째 담장의 크기는 200m × 175m이다. 세 번째 고푸라(탑문) 앞에는 십자형 테라스가 있다. 고푸라 자체는 규모가 크며, 중앙에 세 개의 탑과 양쪽에 두 개의 부속 건물이 있는 형태이다. 남쪽의 두 탑 사이에는 두 그루의 유명한 세이보 나무가 자라 갤러리 지붕 위로 뿌리를 내렸던 모습이 장관이었으나, 한 그루는 죽고 뿌리만 남아 있다. 구조물 보호를 위해 나무를 제거해야 할 수도 있다는 의견이 있다. 서쪽의 세 번째 고푸라에는 체스 게임과 라마야나의 랑카 전투 장면 조각상이 있으며, 서쪽 바깥에는 두 명의 드바라팔라(문지기) 석상이 있다.
세 번째 동쪽 고푸라를 지나 서쪽 중앙 축에는 춤추는 사람들의 홀이 있다. 벽에는 압사라 무희들이 새겨져 있으나, 위쪽 벽감에 있던 불상들은 자야바르만 8세의 힌두교 복귀 정책 시기에 조직적으로 파괴되었다. 춤추는 사람들의 홀 북쪽에는 둥근 기둥이 있는 독특한 2층 건물이 있는데, 앙코르 유적 중 이런 형태가 온전히 남은 유일한 예이다(타 프롬과 반테아이 크데이에도 유사한 건물의 흔적이 있다). 프리먼과 자크는 이것이 곡창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세 번째 담장 안의 나머지 공간에는 각 모서리에 현재는 마른 연못이 있고, 북쪽, 남쪽, 서쪽에는 각각 시바, 이전 왕과 왕비, 비슈누에게 봉헌된 위성 사원들이 있다. 이 사원들은 특히 조각상으로 유명한데, 북쪽 사원에는 누워 있는 비슈누와 힌두 삼신(비슈누, 시바, 브라마)상이 있고, 서쪽 사원에는 고바르다나 산을 들어 올리는 크리슈나 조각이 있다.
춤추는 사람들의 홀과 두 번째 담장 사이의 안뜰에는 두 개의 도서관 건물이 있다. 두 번째 동쪽 고푸라는 이 안뜰 쪽으로 돌출되어 있으며, 처마 모서리에 가루다 장식이 있는 몇 안 되는 앙코르 고푸라 중 하나이다. 이 고푸라 기둥에 새겨진 불상들은 자야바르만 8세 시기에 힌두교 수행자(은둔자) 모습으로 고쳐졌다.
두 번째 담장(85m × 76m)과 첫 번째 담장(62m × 55m) 사이 공간은 후대에 추가된 건물들로 복잡하게 채워져 있어 원래의 동선을 방해하고 장식 일부를 가리고 있다. 글레이즈는 첫 번째 담장 내부가 "대략 파괴된 건물들로 가득 차 있다"고 묘사했다. 가장 안쪽의 첫 번째 담장은 십자형 갤러리에 의해 네 개의 작은 안뜰로 나뉘며, 각 안뜰은 후대에 추가된 불규칙한 건물들로 거의 채워져 있다. 이 갤러리 벽과 중앙 성소 내부 벽면에는 수많은 구멍이 남아 있는데, 이는 원래 벽을 덮었던 청동판을 고정했던 흔적으로, 전체 사원을 장식하는 데 약 1.5kt의 청동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원의 중앙 성소에는 원래 로케스바라(관세음보살)상이 있었으나, 현재는 사원 건설 후 수 세기 뒤에 세워진 스투파(불탑)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3. 4. 중앙 성소 및 주변 건물
프레아 칸은 앙코르 톰의 북대문에서 북동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사원은 라테라이트와 사암으로 지어졌으며, 경내는 동서 800m, 남북 700m 크기의 평지로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 전체 면적은 약 56ha에 달한다. 프레아 칸 동쪽에는 한때 3.5km × 0.9km 크기였던 자야타타카 바라이 가장자리에 상륙장이 있었으며, 이를 통해 바라이 중앙의 네악 페안 사원으로 갈 수도 있었다. 한때 말라 있었던 이 바라이는 현재 다시 물이 차 있는데, 우기가 끝날 무렵 지역의 잉여수가 이곳으로 모이기 때문이다.[4]
사원의 외벽은 라테라이트로 만들어졌고, 50m 간격으로 나가를 잡고 있는 가루다 72개가 새겨져 있다. 일반적으로 동쪽을 향하고 있어 동쪽이 주 출입구이지만, 사방의 주요 방위에 다른 출입구도 있다. 각 출입구에는 앙코르 톰과 유사하게, 나가를 든 데바와 아수라가 조각된 해자 위의 제방길이 연결된다. 이는 프레아 칸의 도시적 요소가 타 프롬이나 반테아이 크데이보다 더 중요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본전은 삼중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동서남북으로 참배로가 있었으나 현재 남북 참배로는 붕괴되어 통행할 수 없다. 담장 문은 본전에 가까워질수록 폭과 높이가 좁아져 원근법을 통해 사원이 더 넓어 보이도록 설계되었다.
북쪽 측면의 세 번째 담장으로 이어지는 길 중간에는 타 프롬과 유사한 화재의 집(Dharmasala) 유적이 있다. 현재 숲으로 덮인 네 번째 담장 안쪽은 원래 도시 지역이었으나, 부식되기 쉬운 재료로 지어져 남아있지 않다. 세 번째 담장의 크기는 200m × 175m이다. 세 번째 고푸라 앞에는 십자형 테라스가 있다. 고푸라 자체는 규모가 크며, 중앙에 세 개의 탑과 양쪽에 두 개의 파빌리온이 있다. 남쪽 고푸라에는 두 그루의 유명한 세이보 나무가 자라 구조물과 얽혀 있었는데, 현재 한 그루는 죽었지만 뿌리는 남아있다. 구조물 보호를 위해 나무를 제거해야 할 수도 있다. 서쪽의 세 번째 고푸라에는 체스 게임과 랑카 전투 장면 조각이 있으며, 두 명의 수호신 드바라팔라가 서 있다.
세 번째 동쪽 고푸라 서쪽의 중앙 축에는 춤추는 사람들의 홀이 있다. 벽은 압사라로 장식되어 있으며, 위쪽 벽감에 있던 불상들은 자야바르만 8세 통치 시기에 체계적으로 파괴되었다. 춤추는 사람들의 홀 북쪽에는 둥근 기둥이 있는 2층 건물이 있다. 이런 형태의 건물은 앙코르 유적 중 이곳에만 남아있지만, 타 프롬과 반테아이 크데이에도 유사한 건물의 흔적이 있다. 곡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 번째 담장의 나머지 부분에는 각 모서리에 현재는 마른 연못이 있고, 북쪽, 남쪽, 서쪽에는 위성 사원들이 있다. 주 사원은 불교 사원이지만, 이 세 사원은 각각 시바, 이전 왕과 왕비, 비슈누에게 봉헌되었다. 이 사원들은 조각상으로 유명한데, 북쪽 사원에는 서쪽에 누워 있는 비슈누와 동쪽에 힌두 삼신(비슈누, 시바, 브라흐마)이 있으며, 서쪽 사원에는 크리슈나가 고바르다나 산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춤추는 사람들의 홀과 두 번째 담장(85m × 76m)을 연결하는 안뜰에는 두 개의 도서관이 있다. 두 번째 동쪽 고푸라는 이 안뜰로 돌출되어 있으며, 처마 모서리에 가루다가 장식된 몇 안 되는 앙코르 고푸라 중 하나이다. 기둥에 있던 불상들은 자야바르만 8세 통치 시기에 은둔자 모습으로 바뀌었다.
동쪽에 있는 두 번째 담장과 첫 번째 담장(62m × 55m) 사이에는 후대에 추가된 건물들이 줄지어 있어 원래의 접근로를 막고 장식 일부를 가리고 있다. 첫 번째 담장은 "대략 파괴된 건물들로 가득 차 있다"고 묘사될 정도이다. 이 담장은 십자형 갤러리로 네 부분으로 나뉘며, 각 부분은 후대의 불규칙한 추가 건물들로 거의 채워져 있다. 이 갤러리의 벽과 중앙 성소 내부에는 원래 벽과 성소 외부를 덮었던 청동판을 고정하기 위한 구멍들이 남아 있는데, 전체 사원을 장식하는 데 약 1.5ton의 청동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원의 중앙에는 원래 로케스바라 상이 있었으나, 사원 건설 후 수 세기 뒤에 세워진 스투파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참배는 주로 동쪽 참배로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 길을 따라 벽면에 새겨진 불교의 관세음보살이나 힌두교의 링가를 볼 수 있다. 참배로를 지나 안뜰(중정)로 나오면, 큰 뱀(나가) 난간으로 둘러싸인 테라스가 있다. 안뜰 남쪽에는 앙코르 유적에서 보기 드문 원형 기둥을 가진 2층 건물이 남아 있는데, 이는 경전 등을 보관하던 장경각으로 추정된다.
3. 5. 도서관 및 기타 시설
프레아 칸 동쪽에는 과거 거대했던 자야타타카 바라이(크기 3.5km × 0.9km) 가장자리에 상륙장이 있다. 이 상륙장을 통해 바라이 중앙의 네악 페안 사원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한때 말라붙었던 자야타타카 바라이는 현재 다시 물이 차 있는데, 매년 우기가 끝날 무렵 지역의 잉여수가 이곳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4]사원 북쪽, 세 번째 담장으로 향하는 길 중간에는 타 프롬의 것과 유사한 화재의 집(Dharmasala) 유적이 있다.
세 번째 고푸라 안쪽 중앙 축 서쪽에는 춤추는 사람들의 홀(Hall of Dancers)이 위치한다. 홀의 벽은 압사라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지만, 위쪽 벽감의 불상들은 자야바르만 8세 통치 시기 힌두교 부흥 정책으로 인해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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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사람들의 홀 북쪽에는 앙코르 유적에서 보기 드문 형태인 둥근 기둥을 가진 2층 건물이 서 있다. 타 프롬과 반테아이 크데이에도 유사한 건물의 흔적이 있지만, 온전한 형태는 이곳에만 남아 있다. 정확한 용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일부 학자들은 곡창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어 자료에서는 이를 경장(経蔵, 경전을 보관하는 곳)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춤추는 사람들의 홀과 두 번째 담장을 잇는 안뜰에는 두 개의 도서관 건물이 대칭으로 위치한다.
세 번째 담장 안쪽 나머지 공간에는 다른 종교 시설들도 있다. 각 모서리에는 현재 마른 연못이 있었고, 북쪽, 남쪽, 서쪽에는 각각 시바, 이전 왕과 왕비, 비슈누에게 봉헌된 위성 사원들이 있다. 이 위성 사원들은 정교한 조각으로 유명하며, 북쪽 사원에는 누워 있는 비슈누와 힌두 삼신(비슈누, 시바, 브라마) 상이, 서쪽 사원에는 크리슈나가 고바르다나 산을 들어 올리는 장면을 묘사한 조각이 있다.
또한 세 번째 남쪽 고푸라 근처에는 거대한 세이보 나무 두 그루가 석조 구조물과 얽혀 자라며 독특한 풍경을 만들었다. 모리스 글레이즈는 이를 "갤러리 아치 자체에 자리 잡아 [나무들이] 입구를 감싸고 기둥 대신 돌을 지탱하는, 자연의 변덕스러우면서도 위험한 광경"이라고 묘사했다. 현재 한 그루는 죽었지만 뿌리는 남아 있으며, 유적 보존을 위해 나무를 제거해야 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다.
4. 미생물에 의한 손상
앙코르와트, 프레아 칸, 앙코르의 바욘과 웨스트 프라삿(West Prasat)에서 사암을 분해하는 미생물 바이오필름이 발견되었다. 건조 및 방사선에 저항성이 있는 실 모양의 남세균은 암석을 분해하는 유기산을 생성할 수 있다. 프레아 칸의 내부 및 외부 샘플에서는 어두운 색의 실 모양 균류가 발견되었고, 조류의 일종인 트렌테포리아는 프레아 칸 외부의 분홍색으로 얼룩진 암석 샘플에서만 발견되었다.[5]
5. 갤러리
5. 1. 동쪽 참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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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뜰
원주의 장경각
프레아 칸은 일반적으로 동쪽을 향하고 있어 동쪽이 주 출입구이다. 각 출입구에는 나가를 든 데바와 아수라가 있는 해자 위의 제방이 있는데, 이는 앙코르 톰의 것과 유사하다.
참배는 주로 동쪽 참배로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 길에서는 벽면에 새겨진 불교의 관세음보살과 힌두교의 링가를 볼 수 있다. 동쪽에서 사원으로 접근하면 먼저 라테라이트로 만들어진 외벽과 마주하게 된다. 외벽에는 50m 간격으로 나가를 잡고 있는 가루다 72개가 새겨져 있다.
세 번째 담장(200m × 175m)의 동쪽 고푸라 앞에는 십자형 테라스가 있다. 고푸라 자체는 규모가 크며, 중앙에 세 개의 탑과 양쪽에 두 개의 파빌리온이 있다. 남쪽의 두 탑 사이에는 한때 유명한 세이보 나무 두 그루가 있었으나, 현재 한 그루는 죽고 뿌리만 남아 있다.
세 번째 동쪽 고푸라 서쪽의 중앙 축에는 춤추는 사람들의 홀이 있다. 벽에는 압사라가 장식되어 있으며, 위쪽 벽감에 있던 불상들은 자야바르만 8세 통치 시기에 체계적으로 파괴되었다. 춤추는 사람들의 홀 북쪽에는 둥근 기둥이 있는 2층 건물이 있는데, 곡창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춤추는 사람들의 홀과 두 번째 담장을 연결하는 안뜰에는 두 개의 도서관이 있다. 또한 중정 남쪽에는 앙코르 유적에서는 드문 원주를 가진 2층의 경장이 남아 있다. 두 번째 동쪽 고푸라는 이 안뜰로 돌출되어 있으며, 가루다가 처마 모서리에 있는 몇 안 되는 앙코르 고푸라 중 하나이다. 기둥에 있는 불상들은 자야바르만 8세 통치 시기에 은둔자로 바뀌었다.
동쪽에 있는 두 번째 담장(85m × 76m)과 첫 번째 담장(62m × 55m) 사이에는 후대에 추가된 건물들이 줄지어 있어 접근을 방해하고 원래 장식의 일부를 가리고 있다. 첫 번째 담장은 십자형 갤러리에 의해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부분은 이러한 후대의 불규칙한 추가 건물들로 거의 채워져 있다. 이 갤러리의 벽과 중앙 성소의 내부는 원래 청동판을 고정하기 위한 구멍으로 덮여 있는데, 전체 사원을 장식하는 데 1500ton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사원 중앙에는 원래 있던 로케스바라상 대신 사원 건설 후 수세기 후에 세워진 스투파가 있다.
5. 2. 벽면 부조
프레아 칸의 외벽은 라테라이트로 만들어졌으며, 50m 간격으로 나가를 잡고 있는 가루다 72개가 새겨져 있다.
네 번째 담장에는 높이 5m의 가루다가 나가를 잡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곳 위쪽 벽감에 있던 불상들은 자야바르만 8세 통치 시기에 체계적으로 파괴되었다.
세 번째 담장의 서쪽 고푸라에는 체스 게임과 랑카 전투 장면, 그리고 두 명의 수호신 드바라팔라가 조각되어 있다. 세 번째 담장 안의 북쪽 사원에는 서쪽에 누워 있는 비슈누와 동쪽에 비슈누, 시바, 브라마의 힌두 삼신이 있으며, 서쪽 사원에는 서쪽에 크리슈나가 고바르다나 산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중앙축에 있는 춤추는 사람들의 홀 벽면은 압사라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이곳 역시 위쪽 벽감에 있던 불상들은 자야바르만 8세 통치 시기에 파괴되었다. 두 번째 동쪽 고푸라 기둥에 있던 불상들도 자야바르만 8세 통치 시기에 은둔자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첫 번째 담장 안쪽의 갤러리 벽과 중앙 성소 내부에는 원래 벽과 성소 외부를 덮었던 청동판을 고정하기 위한 구멍들이 남아 있다. 전체 사원을 장식하는 데 1500ton의 청동이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동쪽 참도(參道) 길의 벽면에서는 불교의 관세음보살과 힌두교의 링가 부조를 볼 수 있다.
5. 3. 안뜰
세 번째 동쪽 고푸라 서쪽의 중앙 축에는 춤추는 사람들의 홀이 자리 잡고 있다. 이 홀의 벽은 압사라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으나, 위쪽 벽감에 있던 불상들은 자야바르만 8세 통치 시기에 체계적으로 파괴되었다.
춤추는 사람들의 홀 북쪽에는 독특한 형태의 2층 건물이 있다. 둥근 기둥을 가진 이 건물은 앙코르 유적 내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형태이며, 타 프롬과 반테아이 크데이에서도 비슷한 건물의 흔적만 발견된다. 정확한 용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학자들은 곡창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춤추는 사람들의 홀과 두 번째 담장 사이의 안뜰 공간에는 두 개의 도서관 건물이 대칭적으로 위치해 있다. 이 안뜰로 돌출된 두 번째 동쪽 고푸라는 처마 모서리에 가루다 조각이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이다. 고푸라 기둥에 새겨져 있던 불상들 역시 자야바르만 8세 시대에 은둔자의 모습으로 수정되었다.
5. 4. 원주 경장
사원 중정 남쪽에는 앙코르 유적에서는 보기 드문 원형 기둥(원주)을 가진 2층짜리 건물이 남아 있는데, 이를 '원주 경장'이라고 부른다. 이 건물의 정확한 용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학자 프리먼과 자크는 이것이 곡창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비슷한 형태의 건물 흔적이 타 프롬이나 반테아이 크데이에서도 발견되지만,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은 이곳이 유일하다.
5. 5. 기타
프레아 칸의 외벽은 라테라이트로 만들어졌으며, 50m 간격으로 나가를 잡고 있는 가루다 72개가 새겨져 있다. 해자로 둘러싸인 이 사원은 동서 800m, 남북 700m 크기이며, 면적은 약 56ha에 달한다. 사원은 라테라이트와 사암으로 지어졌으며, 경내는 평지로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 해자를 건너는 다리는 다른 많은 앙코르 유적과 마찬가지로, 우유 바다 휘젓기 장면을 조각한 난간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큰 뱀과 그것을 끄는 신들과 아수라가 보인다.
프레아 칸의 동쪽에는 자야타타카 바라이 가장자리에 있는 상륙장이 있는데, 크기는 가로 3.5km, 세로 0.9km이다. 이곳을 통해 바라이 중앙에 있는 네악 페안 사원으로 접근할 수도 있었다. 한때 말라붙었던 자야타타카 바라이는 현재 다시 물이 차 있는데, 매 우기가 끝날 무렵 이 지역의 모든 잉여수가 이곳으로 흘러들어오기 때문이다.[4]
프레아 칸은 일반적으로 동쪽을 향하고 있어 동쪽이 주 출입구였지만, 사방의 주요 방위에 다른 출입구도 있다. 각 출입구에는 나가를 든 데바와 아수라가 있는 해자 위의 제방이 있는데, 이는 앙코르 톰의 것과 유사하다. 글레이즈는 이것을 프레아 칸의 도시적 요소가 타 프롬이나 반테아이 크데이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했다. 본전은 삼중의 외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동서남북에서 참도(參道)를 가지고 있지만, 남북의 참도는 붕괴되어 통행할 수 없다. 과거 외벽은 각각 탑문을 갖추고 있었다고 하나, 이것 역시 무너져 내렸다. 외벽의 문은 본전에 가까워질수록 입구의 너비와 높이가 좁아지는데, 이는 원근법을 이용하여 사원을 더 넓게 보이도록 의도한 것이다.
북쪽 측면의 세 번째 담장으로 이어지는 길 중간에는 타 프롬과 유사한 화재의 집(또는 ''다르마살라'')가 있다. 현재는 숲으로 뒤덮인 네 번째 담장의 나머지 부분은 원래 도시 지역이었는데, 이 지역은 부식성 재료로 지어졌기 때문에 남아 있지 않다. 세 번째 담장의 크기는 가로 200m, 세로 175m이다. 세 번째 고푸라 앞에는 십자형 테라스가 있다. 고푸라 자체는 규모가 크며, 중앙에 세 개의 탑과 양쪽에 두 개의 파빌리온이 있다. 남쪽의 두 탑 사이에는 두 그루의 유명한 세이보 나무가 있었는데, 글레이즈는 이에 대해 "갤러리의 볼트 자체에 놓여져 [나무들이] 개구부를 감싸고 기둥을 대신하여 돌을 지탱하는 자연의 변덕스럽고도 위험한 장면"이라고 묘사했다. 한 그루는 죽었지만 뿌리는 그대로 남아 있다. 구조물에 손상을 입히지 않도록 나무를 제거해야 할 수도 있다. 사원의 먼 쪽에 있는 서쪽의 세 번째 고푸라에는 체스 게임과 랑카 전투의 조각상이 있으며, 서쪽에는 두 명의 수호신 드바라팔라가 있다.
세 번째 동쪽 고푸라 서쪽의 중앙축에는 춤추는 사람들의 홀이 있다. 벽에는 압사라가 장식되어 있으며, 위쪽 벽감에 있던 불상들은 자야바르만 8세 통치 시기에 체계적으로 파괴되었다. 춤추는 사람들의 홀 북쪽에는 둥근 기둥이 있는 2층 건물이 있다. 이러한 형태의 다른 예는 앙코르에서는 남아 있지 않지만, 타 프롬과 반테아이 크데이에는 유사한 건물의 흔적이 있다. 프리먼과 자크는 이것이 곡창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세 번째 담장의 나머지 부분에는 각 모서리에 연못(현재는 말라 있음)이 있고, 북쪽, 남쪽, 서쪽에는 위성 사원들이 있다. 주 사원은 불교 사원이었지만, 이 세 개의 사원은 각각 시바, 이전의 왕과 왕비, 비슈누에게 봉헌되었다. 이 사원들은 주로 조각상으로 유명하다. 북쪽 사원에는 서쪽에 누워 있는 비슈누와 동쪽에 비슈누, 시바, 브라마의 힌두 삼신이 있으며, 서쪽 사원에는 서쪽에 크리슈나가 고바르다나 산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 있다.
춤추는 사람들의 홀과 두 번째 담장을 연결하는 안뜰에는 두 개의 도서관이 있다. 두 번째 동쪽 고푸라는 이 안뜰로 돌출되어 있으며, 가루다가 처마 모서리에 있는 몇 안 되는 앙코르 고푸라 중 하나이다. 기둥에 있는 불상들은 자야바르만 8세 통치 시기에 은둔자로 바뀌었다.
동쪽에 있는 두 번째 담장(85m × 76m)과 첫 번째 담장(62m × 55m) 사이에는 후대에 추가된 건물들이 줄지어 있어 접근을 방해하고 원래 장식의 일부를 가리고 있다. 글레이즈의 말처럼 첫 번째 담장은 "대략 파괴된 건물들로 가득 차 있다". 이 담장은 십자형 갤러리에 의해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부분은 이러한 후대의 불규칙한 추가 건물들로 거의 채워져 있다. 이 갤러리의 벽과 중앙 성소의 내부는 원래 이 벽과 성소의 외부를 덮었던 청동판을 고정하기 위한 구멍으로 덮여 있는데, 전체 사원을 장식하는 데 1.5kt의 청동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사원 중앙에는 원래 있던 로케스바라상 대신 사원 건설 후 수세기 후에 세워진 스투파가 있다.
참배는 주로 동쪽 참도를 통해 이루어지며, 그 길에서는 벽면에 새겨진 불교의 관세음보살과 힌두교의 링가가 보인다. 참도를 지나 중정에 나가면, 큰 뱀의 난간으로 둘러싸인 테라스가 있다. 또한 중정 남쪽에는 앙코르 유적에서는 드문 원주를 가진 2층의 경장이 남아 있다.
참조
[1]
서적
Early Mainland Southeast Asia
River Books Co., Ltd.
[2]
서적
The Indianized States of Southeast Asia
University of Hawaii Press
[3]
웹사이트
Preah Khan Conservation Project Report V
https://www.wmf.org/[...]
1994-07-01
[4]
웹사이트
Preah Khan
https://www.siemreap[...]
Siemreap.net
2017-04-29
[5]
논문
Microbial biofilms on the sandstone monuments of the Angkor Wat Complex, Cambodia
2012-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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