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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미즈드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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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르미즈드 4세는 사산 제국의 샤(Shah)로, 호스로 1세의 아들이었다. 그는 조로아스터교 신자였으며, 동로마 제국 및 동방의 투르크와의 전쟁을 이어받았다. 호르미즈드 4세는 귀족과 성직자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펼쳐 페르시아 사료에서는 부정적으로 묘사되었으나, 현대에는 하위 계층을 위하려는 선량한 군주로 평가받기도 한다. 바흐람 초빈의 반란으로 폐위되어 아들 호스로 2세가 즉위한 후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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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미즈드 4세
기본 정보
호르미즈드 4세의 드라크마, 이스파한에서 주조됨.
칭호이란과 비이란의 샤한샤
통치 기간579년–590년
이전 통치자호스로 1세
다음 통치자바흐람 초빈 (경쟁 왕)
호스로 2세 (후계자)
왕조사산 왕조
아버지호스로 1세
어머니하자르족 공주
출생 추정기원후 540년경
사망일590년 6월 (50세)
사망 장소크테시폰
종교조로아스터교
가족 관계
배우자이름 없는 이스파부단 귀족 여성
이름 없는 기독교 귀족 여성
자녀호스로 2세
이름 없는 딸

2. 어원

''호르미즈드''(Ōhrmazd, Hormozd로도 표기)는 조로아스터교의 최고 의 이름인 아후라 마즈다를 중세 페르시아어로 표기한 것이다. 고대 페르시아어로는 ''Auramazdā''이며, 그리스어 음역으로는 ''Hormisdas''이다. 이 이름은 아르메니아어로 ''Ormizd'', 조지아어로 ''Urmizd''로 나타난다.

3. 혈통 및 가계



호르미즈드 4세는 사산 제국의 샤 호스로 1세의 아들이었다. 동양의 자료와 현대 학자들은 호르미즈드의 외할아버지를 돌궐의 카간인 이스테미와 연관 지었는데, 호스로 1세는 이스테미와 동맹을 맺고 에프탈을 멸망시켰다. 호스로 1세는 이스테미의 딸과 결혼했고, 그녀가 호르미즈드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호르미즈드는 《샤나메》에서 'Torkzad(a)' 또는 '돌궐의 아들'로 불린다.

그러나 이란학자 샤푸르 샤흐바지는 이러한 관계에 대해 "연대기적 어려움"이 있다고 반박했다. 자료에 따르면 호르미즈드가 아버지에 의해 파견되어 사산 왕조와 돌궐 간의 에프탈 영토 분할 이후 이스테미가 제기한 위협을 막았다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호르미즈드가 540년경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며, 그의 아들 호스로 2세는 570년경에 태어났다.

7세기의 아르메니아 역사가 세베오스는 호르미즈드의 어머니를 "돌궐 카간의 딸"이라고 칭하며 카옌이라고 불렀고, 마수디는 그녀를 파콤이라고 불렀으며, 그녀가 하자르 통치자의 딸이라고 말했다. 샤흐바지는 독일 동양학 학자 요제프 마르크바르트의 추론을 지지했는데, 호르미즈드의 외할아버지가 하자르의 카간(다른 자료에서는 흔히 돌궐이라고 불림)이었으며, 세베오스가 호르미즈드의 어머니를 아버지의 이름(또는 칭호)으로 언급했다는 것이다. 중세 이란의 지리학자 이븐 호르다드베 또한 호스로 1세와 하자르 왕이 서로의 딸과 결혼하기 위해 조직했다고 언급했다. 따라서 호르미즈드는 존경받는 이란 통치 가문의 호스로 1세의 자손일 뿐만 아니라 왕족 돌궐 왕조에도 속했는데, 세베오스에 따르면 "호르미즈드를 그의 아버지 조상들보다 훨씬 위대하게 만들었고 그의 어머니 친척들만큼이나 더 위대하고 사나웠다"고 한다.

호르미즈드의 두 아내가 알려져 있는데, 그 중 한 명은 샤푸르의 딸인 이스파부드한 귀족 여성이었고, 다른 한 명은 기독교인이었다. 호르미즈드는 호스로 2세 외에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이 있었는데, 그녀는 미흐란 가문 출신인 샤흐르바라즈와 결혼했다.

4. 즉위 전 상황

5. 통치 정책 및 성격

호르미즈드 4세는 고압적이고 폭력적인 면모를 보였지만,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4] 타바리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군대와 궁정에 엄격한 규율을 확립하고 일반 시민들을 보호하고자 노력했다.[4][5] 또한 마기들이 기독교 박해를 건의하자, 두 종교를 모두 인정해야 왕권이 안정될 것이라며 거절했다.[4]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기득권층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4]

thumb''에 묘사된 왕좌에 앉아 있는 호르미즈드 4세.]]

호스로 1세는 호르미즈드 4세가 훌륭한 지도자 자질을 갖추고 있음을 알고 그를 후계자로 임명했다.[4] 이 결정에는 정치적인 배경도 있었는데, 호르미즈드 4세의 어머니가 귀족 출신이었던 반면, 호스로 1세의 다른 아들들은 신분이 낮았기 때문이다.[4] 579년 왕위에 오른 호르미즈드 4세는 알 타바리 역사 기록에 따르면,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5] 그는 선왕들보다 덜 호전적인 듯 보였지만, 개혁을 이어나갈 의지가 있었다.[6]

호르미즈드 4세는 데흐칸을 지원하고 하위 계층의 권리를 보호하며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의 재확립 시도를 좌절시키는 등 아버지의 정책을 계승하려 노력했다.[7]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처형에 의존했고, 이는 조로아스터교인들의 적대감을 샀다.[7] 그는 "모든 신하들이 자유롭게 종교를 행사해야 한다"고 언급하며 사제들의 기독교 박해 요청을 거절했고,[4] 수석 사제(''모우베드'')를 포함한 많은 사제들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졌다.[4]

호르미즈드 4세는 귀족들과의 관계를 악화시켜 수천 명의 귀족을 살해했다.[4] 숙청된 이들 중에는 보조르그메르, 치르-부르젠, 바흐람-이 마 아다르, 이자드구슈아스프, 샤푸르 등 아버지 호스로 1세 치하의 주요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6][7] 호르미즈드 4세는 이스파부드한 가문 출신의 가까운 친척을 살해한 최초의 사산 왕은 아니었지만,[7] 이 가문은 "사산 왕조의 친척이자 파트너"로 인정될 만큼 높은 지위에 있었고, 비스타함은 호르미즈드 4세에 의해 아버지의 후계자로 임명되었다.[6][7]

귀족과 성직자들에 대한 박해로 인해, 호르미즈드 4세는 페르시아 사료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었다.[4][8] 그러나 현대 사료에서는 그를 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독일의 동양학자 테오도르 뫼르케는 호르미즈드 4세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불합리하다고 보았고, 그를 "귀족과 성직자를 억제하고 하위 계층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선량한 군주"로 평가했다.[4]

5. 1. 개혁과 기득권층과의 갈등

호르미즈드 4세는 고압적이고 폭력적인 면모를 보였지만,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4] 타바리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군대와 궁정에 엄격한 규율을 확립하고 일반 시민들을 보호하고자 노력했다.[4][5] 또한 마기들이 기독교 박해를 건의하자, 두 종교를 모두 인정해야 왕권이 안정될 것이라며 거절했다.[4]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기득권층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4]

thumb''에 묘사된 왕좌에 앉아 있는 호르미즈드 4세.]]

호스로 1세는 호르미즈드 4세가 훌륭한 지도자 자질을 갖추고 있음을 알고 그를 후계자로 임명했다.[4] 이 결정에는 정치적인 배경도 있었는데, 호르미즈드 4세의 어머니가 귀족 출신이었던 반면, 호스로 1세의 다른 아들들은 신분이 낮았기 때문이다.[4] 579년 왕위에 오른 호르미즈드 4세는 알 타바리 역사 기록에 따르면,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5] 그는 선왕들보다 덜 호전적인 듯 보였지만, 개혁을 이어나갈 의지가 있었다.[6]

호르미즈드 4세는 데흐칸을 지원하고 하위 계층의 권리를 보호하며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의 재확립 시도를 좌절시키는 등 아버지의 정책을 계승하려 노력했다.[7]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처형에 의존했고, 이는 조로아스터교인들의 적대감을 샀다.[7] 그는 "모든 신하들이 자유롭게 종교를 행사해야 한다"고 언급하며 사제들의 기독교 박해 요청을 거절했고,[4] 수석 사제(''모우베드'')를 포함한 많은 사제들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졌다.[4]

호르미즈드 4세는 귀족들과의 관계를 악화시켜 수천 명의 귀족을 살해했다.[4] 숙청된 이들 중에는 보조르그메르, 치르-부르젠, 바흐람-이 마 아다르, 이자드구슈아스프, 샤푸르 등 아버지 호스로 1세 치하의 주요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6][7] 호르미즈드 4세는 이스파부드한 가문 출신의 가까운 친척을 살해한 최초의 사산 왕은 아니었지만,[7] 이 가문은 "사산 왕조의 친척이자 파트너"로 인정될 만큼 높은 지위에 있었고, 비스타함은 호르미즈드 4세에 의해 아버지의 후계자로 임명되었다.[6][7]

귀족과 성직자들에 대한 박해로 인해, 호르미즈드 4세는 페르시아 사료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었다.[4][8] 그러나 현대 사료에서는 그를 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독일의 동양학자 테오도르 뫼르케는 호르미즈드 4세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불합리하다고 보았고, 그를 "귀족과 성직자를 억제하고 하위 계층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선량한 군주"로 평가했다.[4]

5. 2. 종교 정책

호르미즈드 4세는 조로아스터교 신자였지만, 5세기 이후 사산 왕조 군주들이 왕국 내 종교적 소수 집단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들을 "제국의 남자/여자 시민"으로 공정하게 대우하려 했던 정책 기조를 따랐다.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제국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국가의 일부로 여겼다.

호르미즈드 4세는 기독교인들의 지지를 인식하고,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들이 기독교를 공격할 것을 요구했을 때 이를 거부하며, 기독교인들의 기여를 인정하도록 촉구했다. 알 타바리의 예언자와 왕들의 역사와 세르트 연대기에 따르면, 호르미즈드 4세는 "우리의 왕좌가 뒤쪽 다리 두 개 없이 앞쪽 다리 두 개로 설 수 없는 것처럼, 기독교인과 우리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우리에게 적대적으로 만든다면 우리의 왕국은 굳건히 서거나 존속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해치는 것을 삼가고 선행에 힘쓸 것을 강조하여, 기독교인들과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이를 보고 조로아스터교를 칭찬하고 따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기독교에 대한 관용적인 정책은 기독교 사제들의 감사를 받았으며, 총대주교 에제키엘과 그의 후임 이쇼야브 1세의 존경을 받았다. 호르미즈드 4세는 기독교 여성과 결혼했으며, 성 세르기우스에게 기도하여 기독교 신념을 품고 있다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호스로 2세 또한 세르기우스에게 여러 번 경의를 표했다. 호르미즈드 4세는 죽음에 대한 부적을 착용하고 점성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미신적인 면모도 보였다.

호스로 1세는 호르미즈드 4세가 유능한 지도자임을 알고 그를 후계자로 정했다.[4] 호르미즈드 4세는 아버지의 명성을 능가하려 하여 서민을 보호하고 군대와 궁정에 엄격한 규율을 도입했으며,[4] 빈민과 농민에 대한 복지에 열심이었다.[6] 그러나 그는 귀족과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들을 탄압하여 13,600명의 귀족과 종교 관계자들을 처형하기도 했다.[8]

5. 3. 성격

호르미즈드 4세는 고압적이고 폭력적인 성격이었지만, 완전히 냉혈한 것은 아니었다. 타바리의 기록에 따르면, 군대와 궁정에 엄격한 규율을 정립하고 일반 시민들을 보호하였다. 마기들이 기독교 박해를 건의하자, 호르미즈드 4세는 두 종교를 인정하는 것이 왕권 안정에 기여할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호스로 1세는 호르미즈드가 훌륭한 지도자임을 알고 후계자로 임명했다. 이 결정에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는데, 호르미즈드의 어머니가 귀족 혈통이었던 반면, 호스로 1세의 다른 아들들의 어머니는 낮은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호르미즈드는 579년에 왕위에 올랐으며, 알 타바리에 따르면 박식하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선임자들보다 덜 호전적이었지만, 개혁을 계속할 만큼 결연했다. 귀족에 맞서기 위해 토지 귀족을 지원하고, 하위 계층의 권리를 보호하며,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의 재확립 노력을 좌절시키는 등 아버지의 정책을 계승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정책 유지를 위해 처형에 의존했고, 그 결과 조로아스터교인들의 적대감을 샀다. 그는 "모든 신하들이 자유롭게 종교를 행사해야 한다"는 소망을 밝히면서, 사제들의 기독교 인구 박해 요청을 거절했다. 그는 수석 사제(''모우베드'')를 포함하여 많은 사제들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수천 명의 귀족들을 살해함으로써 귀족들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보조르그메르, 치르-부르젠, 바흐람-이 마 아다르, 이자드구슈아스프, 샤푸르, 빈두이등 많은 이들이 호르미즈드의 아버지 치하에서 저명한 인물이었다. 호르미즈드는 이스파부드한 가문 출신의 가까운 친척을 살해한 최초의 사산 왕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호스로 1세는 530년대 초에 바위를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귀족과 성직자들에 대한 박해로 인해, 호르미즈드는 페르시아 자료에서 적대감을 받게 되었다. 5세기의 사산 왕 야즈데게르드 1세는 비 조로아스터교 신하들에 대한 관대한 정책과 귀족과 성직자들의 요구를 따르기를 거부한 것으로 인해 페르시아 자료에서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되었고, 그 결과 "죄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중세 자료에서 적대감을 받았지만, 호르미즈드는 현대 자료에서 더 긍정적으로 묘사된다. 독일의 동양학자 테오도르 뫼르케는 호르미즈드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불합리하다고 여겼고, 왕을 "귀족과 성직자를 억제하고 하위 계층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의도를 가진 선량한 군주"로 간주했다. 현대 역사가 마이클 보너는 "페르시아 왕실 전통은 호르무즈드를 비난으로 덮었고, 그의 통치의 주요 특징이 변형되었다"고 말한다.

6. 대외 관계 및 전쟁

호르미즈드 4세는 선대부터 지속된 동로마 제국과 동부의 투르크와의 전쟁을 물려받았다. 티베리우스 2세와의 평화 협상이 있었지만, 호르미즈드 4세는 아버지가 점령했던 영토를 양도할 것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후기 고대 시대의 비잔틴-사산 제국 국경 지도


동로마의 마우리키우스가 국경을 넘어 쿠르디스탄에 침입하였다. 그 다음해에 마우리키우스는 메디아와 메소포타미아의 남부를 가로지를 것을 계획했으나, 가산 조(:en:Ghassanid)의 장로 알문디르(:en:al-Mundhir)는 그 정보를 호르미즈드 4세에 제공하는 것으로 로마를 배신했다. 계획이 탄로난 마우리키우스는 퇴각할 수 밖에 없어서 다급히 동로마의 국경에 다다랐으나, 페르시아의 장군 아다르마한(:en:Adarmahan)과의 교전 뒤 패배하였다.

페르시아의 장군 탐호스로(:en:Tamkhosrau)는 582년에 동로마와 페르시아의 국경을 넘어 콘스탄티나(:en:Constantina (Osrhoene))를 공격하였지만 패배하고 전사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 2세는 로마 제국의 군사적 조건이 악화되어 마우리키우스를 콘스탄티노플로 다급히 불러들였다. 그 후 마우리키우스를 대신한 미스타콘(:en:John Mystacon)은 티그리스와 님피우스(Nymphius)가 교차하는 지점을 공략하지만 패배하고 퇴각하였다. 결국 미스타콘은 해임되고 필리피키우스(:en:Philippicus (general))가 그의 직위를 이어 받았다.

필리피키우스는 584년과 585년 동안 페르시아의 영토를 습격했다.[15] 페르시아는 585년에 모노카티움과(Monocartium) 마르튀로폴리스(:en:Martyropolis)를 공격하는 것으로 응전했다. 필리피키우스는 이듬해에 솔라크론(Solachon)에서 그들을 격퇴하고 클로모론(Chlomoron)을 공략하였다. 하지만 공략은 실패하였으며 아미다(:en:Amida (Roman city))로 퇴각하여 농성하였다. 그러나 587년에 헤라클리우스에게 명령하는 것을 포기했다.

588년에 로마군단 내에 반란이 일어났다. 페르시아는 이 반란을 이용하여 콘스탄티아를 다시 공격하였으나 곧 격퇴되었다. 로마는 이에 대한 반격으로 아르잔느(:en:Arzanene)을 공격했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하지만 마르튀로폴리스에서 다른 페르시아의 부대를 격파하였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589년에 필리피키우스를 두 번에 걸쳐 격퇴한 끝에 마르튀로폴리스를 점령하였다. 결국 필리피키우스는 본국으로 소환되었고 시사우라논(Sisauranon)의 페르시아군을 격퇴했었던 코멘셔루스(:en:Comentiolus)가 그를 대체했다. 그 후 로마는 마르튀로폴리스를 공격하였고, 공략의 막바지에 페르시아에 투르크의 침입에 대한 소식이 퍼졌다.

588년, 돌궐의 카간 바가 카간(페르시아 자료에서는 사베/사바라고 알려짐)은 그의 에프탈 신민들과 함께 옥수스 남쪽의 사산 제국 영토를 침략하여 발흐에 주둔해 있던 사산 병사들을 공격하여 격파했다. 도시를 정복한 후 그들은 탈라칸, 바드기스, 헤라트를 점령했다. 이 침략은 호스로 1세와 카간인 이스테미가 맺은 조약을 위반한 것이었는데, 그 조약은 옥수스를 제국 간의 경계로 설정했다. 군사 회의에서 파르티아의 미란 가문 출신인 바흐람 초빈이 그들을 상대로 군대를 이끌도록 선택되었으며, 호라산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바흐람의 군대는 12,000명의 정예 기병으로 구성되었으며, 588년 4월 히르카니아 바위 전투에서 돌궐과 에프탈 군대의 대규모 군대를 매복 공격했다.

589년까지 그는 돌궐을 격퇴하고 발흐에 승리하여 입성하여 돌궐의 보물과 카간의 황금 옥좌를 점령했다. 그 후 그는 옥수스 강을 건너 돌궐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바가 카간을 화살로 직접 죽였다. 그는 부하라 근처의 바이칸까지 진출했으며, 사망한 카간의 아들 비르무다의 공격도 저지했는데, 바흐람은 비르무다를 사로잡아 크테시폰으로 보냈다.

소그디아나 지도, 페르시아-돌궐 전쟁 이후 잠시 사산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비르무다는 호르미즈드에 의해 그곳에서 환영받았고, 40일 후 그는 바흐람에게 돌궐 왕자를 트란스옥시아나로 돌려보내라는 명령과 함께 다시 보내졌다. 사산 제국은 이제 차치와 사마르칸트의 소그디아 도시를 지배했으며, 호르미즈드는 그곳에서 동전을 주조했다.

바흐람이 돌궐을 상대로 거둔 큰 승리 이후, 그는 유목민, 아마도 하자르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코카서스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승리했다. 그는 다시 비잔틴 제국을 상대로 사산 군대의 지휘관이 되었고, 조지아에서 비잔틴 군대를 성공적으로 격파했다. 그러나 그는 아라스 강둑에서 비잔틴 군대에 의해 약간의 패배를 겪었다. 바흐람을 시기했던 호르미즈드는 이 패배를 핑계 삼아 그를 해임하고 굴욕을 주었다.

호르미즈드의 재상 아젠 구슈나스프는 바흐람을 시기하여 그가 전리품 중 가장 좋은 부분을 혼자 차지하고 호르미즈드에게는 소량만 보냈다고 비난했다. 다른 자료에 따르면, 호르미즈드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비르무다 또는 측근들이었다. 어쨌든 호르미즈드는 바흐람의 높아지는 명성을 참을 수 없었고, 따라서 그가 전리품의 일부를 혼자 차지했다는 이유로 그를 해임하고 굴욕을 주었다. 또한, 호르미즈드는 그에게 쇠사슬과 방추를 보내 그를 "여자만큼이나 은혜를 모르는" 하찮은 노예로 여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격분한 바흐람은 여전히 동쪽에 머물면서 호르미즈드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6. 1. 비잔티움 제국과의 전쟁 (572-591)

572-591년 로마-페르시아 전쟁은 호르미즈드 4세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이 전쟁은 동로마 제국과 동부의 튀르크와의 갈등을 포함했다. 티베리우스 2세와의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호르미즈드 4세는 아버지의 정복 성과를 양보하는 것을 거부했다.[1]

동로마 제국의 장군 마우리키우스는 국경을 넘어 쿠르디스탄을 침공했고, 다음 해에는 메디아와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가산 조의 왕 알문디르(:en:al-Mundhir)가 이 정보를 호르미즈드 4세에게 제공하여 로마 측의 계획이 탄로났다. 마우리키우스는 퇴각해야 했고, 페르시아 장군 아다르마한(:en:Adarmahan)과의 교전에서 패배했다.[1]

582년, 페르시아의 장군 탐호스로(:en:Tamkhosrau)는 페르시아와 로마의 국경을 넘어 콘스탄티나(:en:Constantina (Osrhoene))를 공격했지만 패배하고 전사했다. 티베리우스 2세의 건강 악화로 마우리키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고, 미스타콘(:en:John Mystacon)이 그를 대신하여 티그리스와 님피우스(Nymphius) 교차점을 공략했으나 패배하고 퇴각했다. 미스타콘은 해임되고 필리피키우스(:en:Philippicus (general))가 그의 직위를 이어받았다.[2]

필리피키우스는 584년과 585년에 페르시아 영토를 습격했다.[10] 페르시아는 585년에 모노카티움과(Monocartium) 마르튀로폴리스(:en:Martyropolis)를 공격했고, 필리피키우스는 이듬해에 솔라크론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퇴하고 클로모론(Chlomoron)을 공략했으나 실패하고 아미다(:en:Amida (Roman city))로 퇴각했다. 587년에는 헤라클리우스에게 지휘권을 넘겼다.[2]

588년 로마 군단 내 반란을 틈타 페르시아는 콘스탄티아를 다시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로마는 아르잔느(:en:Arzanene)를 공격했으나 성과가 없었고, 마르튀로폴리스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했다.

589년, 페르시아는 필리피키우스를 두 번 격파하고 마르튀로폴리스를 점령했다. 필리피키우스는 해임되고 코멘셔루스가 그를 대체했다. 로마는 마르튀로폴리스를 공격했고, 공략 막바지에 페르시아에 투르크의 침입 소식이 전해졌다.

6. 1. 1. 주요 전투 및 사건

572-591년 로마-페르시아 전쟁은 호르미즈드 4세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이 전쟁은 동로마 제국과 동부의 튀르크와의 갈등을 포함했다. 티베리우스 2세와의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호르미즈드 4세는 아버지의 정복 성과를 양보하는 것을 거부했다.[1]

동로마 제국의 장군 마우리키우스는 쿠르디스탄을 침공했고, 다음 해에는 메디아와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가산 조(:en:Ghassanid)의 알문디르(:en:al-Mundhir)가 이 정보를 호르미즈드 4세에게 제공하여 로마 측의 계획이 탄로났다. 마우리키우스는 퇴각해야 했고, 페르시아 장군 아다르마한(:en:Adarmahan)과의 교전에서 패배했다.[1]

582년, 페르시아의 장군 탐호스로(:en:Tamkhosrau)는 콘스탄티나(:en:Constantina (Osrhoene))를 공격했지만 패배하고 전사했다. 티베리우스 2세의 건강 악화로 마우리키우스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고, 미스타콘(:en:John Mystacon)이 그를 대신하여 티그리스와 님피우스(Nymphius) 교차점을 공략했으나 패배하고 퇴각했다. 미스타콘은 해임되고 필리피키우스(:en:Philippicus (general))가 그의 직위를 이어받았다.[2]

필리피키우스는 584년과 585년에 페르시아 영토를 습격했다.[10] 페르시아는 585년에 모노카티움과(Monocartium) 마르튀로폴리스(:en:Martyropolis)를 공격했고, 필리피키우스는 이듬해에 솔라크론(Solachon)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퇴하고 클로모론(Chlomoron)을 공략했으나 실패하고 아미다(:en:Amida (Roman city))로 퇴각했다. 587년에는 헤라클리우스에게 지휘권을 넘겼다.[2]

588년 로마 군단 내 반란을 틈타 페르시아는 콘스탄티아를 다시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로마는 아르잔느(:en:Arzanene)를 공격했으나 성과가 없었고, 마르튀로폴리스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했다.

589년, 페르시아는 필리피키우스를 두 번 격파하고 마르튀로폴리스를 점령했다. 필리피키우스는 해임되고 코멘셔루스(:en:Comentiolus)가 그를 대체했다. 로마는 마르튀로폴리스를 공격했고, 공략 막바지에 페르시아에 투르크의 침입 소식이 전해졌다.

6. 2. 동방의 위협: 투르크(돌궐)와의 전쟁

호르미즈드 4세는 선대부터 지속된 동로마 제국과 동부의 투르크와의 전쟁을 물려받았다. 동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2세와의 평화 협상이 있었지만, 호르미즈드 4세는 아버지 호스로 1세가 점령했던 영토를 양도하는 것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페르시아의 장군 탐호스로(:en:Tamkhosrau)는 582년에 동로마와 페르시아의 국경을 넘어 콘스탄티나(:en:Constantina (Osrhoene))를 공격하였지만 패배하고 전사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 2세는 로마 제국의 군사적 조건이 악화되어 마우리키우스를 콘스탄티노플로 다급히 불러들였다. 그 후 마우리키우스를 대신한 미스타콘(:en:John Mystacon)은 티그리스와 님피우스(Nymphius)가 교차하는 지점을 공략하지만 패배하고 퇴각하였다. 결국 미스타콘은 해임되고 필리피키우스(:en:Philippicus (general))가 그의 직위를 이어 받았다.

필리피키우스는 584년과 585년 동안 페르시아의 영토를 습격했다.[15] 페르시아는 585년에 모노카티움과(Monocartium) 마르튀로폴리스(:en:Martyropolis)를 공격하는 것으로 응전했다. 필리피키우스는 이듬해에 솔라크론(Solachon)에서 그들을 격퇴하고 클로모론(Chlomoron)을 공략하였다. 하지만 공략은 실패하였으며 아미다(:en:Amida (Roman city))로 퇴각하여 농성하였다. 그러나 587년에 헤라클리우스에게 명령하는 것을 포기했다.

588년, 돌궐의 카간 바가 카간(페르시아 자료에서는 사베/사바라고 알려짐)은 그의 에프탈 신민들과 함께 옥수스 남쪽의 사산 제국 영토를 침략하여 발흐에 주둔해 있던 사산 병사들을 공격하여 격파했다. 도시를 정복한 후 그들은 탈라칸, 바드기스, 헤라트를 점령했다. 이 침략은 호스로 1세와 카간인 이스테미가 맺은 조약을 위반한 것이었는데, 그 조약은 옥수스를 제국 간의 경계로 설정했다. 군사 회의에서 파르티아의 미란 가문 출신인 바흐람 초빈이 그들을 상대로 군대를 이끌도록 선택되었으며, 호라산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바흐람의 군대는 12,000명의 정예 기병으로 구성되었으며, 588년 4월 히르카니아 바위 전투에서 돌궐과 에프탈 군대의 대규모 군대를 매복 공격했다.

589년까지 그는 돌궐을 격퇴하고 발흐에 승리하여 입성하여 돌궐의 보물과 카간의 황금 옥좌를 점령했다. 그 후 그는 옥수스 강을 건너 돌궐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바가 카간을 화살로 직접 죽였다. 그는 부하라 근처의 바이칸까지 진출했으며, 사망한 카간의 아들 비르무다의 공격도 저지했는데, 바흐람은 비르무다를 사로잡아 크테시폰으로 보냈다.

비르무다는 호르미즈드에 의해 그곳에서 환영받았고, 40일 후 그는 바흐람에게 돌궐 왕자를 트란스옥시아나로 돌려보내라는 명령과 함께 다시 보내졌다. 사산 제국은 이제 차치와 사마르칸트의 소그디아 도시를 지배했으며, 호르미즈드는 그곳에서 동전을 주조했다.

바흐람이 돌궐을 상대로 거둔 큰 승리 이후, 그는 유목민, 아마도 하자르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코카서스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승리했다. 그는 다시 비잔틴 제국을 상대로 사산 군대의 지휘관이 되었고, 조지아에서 비잔틴 군대를 성공적으로 격파했다. 그러나 그는 아라스 강둑에서 비잔틴 군대에 의해 약간의 패배를 겪었다. 바흐람을 시기했던 호르미즈드는 이 패배를 핑계 삼아 그를 해임하고 굴욕을 주었다.

호르미즈드의 재상 아젠 구슈나스프는 바흐람을 시기하여 그가 전리품 중 가장 좋은 부분을 혼자 차지하고 호르미즈드에게는 소량만 보냈다고 비난했다. 다른 자료에 따르면, 호르미즈드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비르무다 또는 측근들이었다. 어쨌든 호르미즈드는 바흐람의 높아지는 명성을 참을 수 없었고, 따라서 그가 전리품의 일부를 혼자 차지했다는 이유로 그를 해임하고 굴욕을 주었다. 또한, 호르미즈드는 그에게 쇠사슬과 방추를 보내 그를 "여자만큼이나 은혜를 모르는" 하찮은 노예로 여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격분한 바흐람은 여전히 동쪽에 머물면서 호르미즈드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7. 바흐람 초빈의 반란과 호르미즈드 4세의 최후

투르크는 페르시아가 로마와 전쟁 중인 틈을 타 발흐헤라트를 점령하였다. 호르미즈드 4세는 바흐람 코빈을 파견하여 투르크를 격퇴하였고, 바흐람 코빈은 발흐에서 투르크 왕을 살해하고 그의 자손을 인질로 잡았다.[16]

북부의 위협이 제거된 후, 바흐람 코빈은 로마와 싸우기 위해 서부 전선으로 이동했다. 아라스강 전투에서 로마의 로마누스 장군에게 패배하기도 했지만, 알바니아를 공격하는 로마를 스바네티(:en:Svaneti)를 공략하여 물리치고 캅카스 이베리아인들의 아제르바이잔 침략을 저지하는 등 승승장구했다.[16]

호르미즈드 4세는 바흐람 코빈의 명성을 질투하여 여성용 옷을 보내 굴욕을 주려 했으나, 바흐람 코빈은 위협적인 글로 응답했다. 격노한 호르미즈드 4세는 바흐람 코빈을 체포하려 했으나, 병사들은 바흐람 코빈의 편으로 돌아섰다. 결국 바흐람 코빈은 왕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페르시아로 진격했다.[16]

후기 사산 왕조 시대의 북메소포타미아와 그 주변 지도


바흐람은 고귀한 신분과 뛰어난 군사적 지식으로 인해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으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589-591년 사산 왕조 내전의 시작이었다. 바흐람은 크테시폰으로 향하면서 사산 왕조의 정통성에 도전했는데, 이는 사산 왕조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조로아스터교 경전인 '분다히신'의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이 구원자 카이 바흐람 바르자반드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선동했다. '샤나메'에 따르면 그는 태양신 미트라의 화신이자 파르티아 제국(아르사케스 왕조)의 종교와 전통을 회복하겠다고 선언했다.

호르미즈드는 사라메스 원로를 보내 바흐람을 체포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바흐람은 사라메스를 코끼리에 밟혀 죽게 했다. 바흐람은 이란 고원 북쪽 가장자리를 통해 진격하며 아두르바다간 공격을 격퇴하고 미디아 남쪽으로 향했다. 호르미즈드는 대 자브 강으로 가서 통신을 차단하려 했으나, 니시비스 외곽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바흐람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바흐람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니시비스에서 파견된 사산 왕조 충성파 군대도 반군 선전에 휩쓸려 반란을 일으키고 지휘관을 살해했다. 호르미즈드는 바흐람을 달래기 위해 사절을 보내고 왕실 보물을 수집하며 알-히라로 피신할 준비를 했다. 파루칸 휘하의 새로운 군대가 파견되었으나, 파루칸은 부관에게 살해당했다.

섬네일 (590년 주조) 호스로 2세]]

결국 호르미즈드 4세는 크테시폰에서 형제이자 매형인 비스타함과 빈두이에 의해 궁정 쿠데타로 폐위되고 눈이 멀게 되었다. 그의 아들 호스로 2세가 왕위에 올랐고, 얼마 후 호르미즈드 4세는 살해당했다.[14] 호스로 2세의 아버지 살해 연루 여부는 논란이 있지만, 바흐람은 호스로 2세를 비난하며 크테시폰으로 진군했다.[16]

8. 유산 및 평가

참조

[1] 기타
[2] 기타
[3] 서적 Rome and Persia in late antiquity: neighbours and rival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4] 웹사이트 HORMOZD IV http://www.iranicaon[...]
[5] 기타
[6] 기타
[7] 간행물 BOZORGMEHR-E BOḴTAGĀN http://www.iranicaon[...]
[8] 기타
[9] 서적 The Making of the Georgian Nation: 2nd editi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94
[10] 서적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1] 기타
[12] 기타
[13] 기타
[14] 기타
[15] 서적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http://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6]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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