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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 헐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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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머 헐버트는 대한제국 말기에 활동한 미국의 선교사이자 교육자, 언론인, 독립운동가이다. 1886년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에 와서 영어와 지리를 가르쳤으며,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신문 창간을 지원하고 코리아 리뷰를 발행하며 한국을 알렸다.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고종의 특사로 미국에 파견되었고, 헤이그 밀사 사건을 지원하는 등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또한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고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를 저술하는 등 한글 보급에도 기여했다. 1949년 이승만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으나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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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 헐버트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호머 헐버트
원어 이름Homer Bezaleel Hulbert
한자 이름허할보
로마자 표기Heo Halbo
별칭허흘법, 할보
출생일1863년 1월 26일
출생지미국 버몬트주 뉴헤이븐
사망일1949년 8월 5일
사망 장소서울, 대한민국
국적미국
종교개신교 감리회
배우자메이 헐버트
자녀슬하 3남 2녀
아버지캘빈 헐버트
어머니메리 우드워드 헐버트
학력
학력미국 다트머스 대학교 대학원
경력
직업선교사
주요 활동한글 연구 및 한국 독립 운동 활동
전직육영공원 교수
대한제국 학부 자문관
연희대학교 특임초빙교수 (1946년)
훈장
훈장195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2014년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 추서
기타
관련 단체헐버트 박사 기념 사업회

2. 생애

헐버트는 1863년 버몬트주 뉴헤이븐(New Haven, Vermont)에서 캘빈(Calvin)과 메리 헐버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메리 엘리자베스 우드워드 헐버트(Mary Elizabeth Woodward Hulbert)는 다트머스 대학교(Dartmouth College) 설립자 엘리에저 윌록(Eleazar Wheelock)의 딸 메리 윌록의 손녀였다. 세인트 존스베리 아카데미(St. Johnsbury Academy)와 다트머스 대학교를 졸업한 후, 헐버트는 1884년 뉴욕시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the City of New York)에 다녔다.

서울특별시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있는 헐버트의 묘비


아버지 캘빈 헐버트(Calvin Butler Hulbert)는 미들베리 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신학자였으며, 헐버트 또한 1884년 유니온 신학교에 입학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朝米通商条約)을 체결한 조선(李氏朝鮮)은 영어와 근대식 교육을 담당할 교사 파견을 미국에 요청했고, 그에 따라 1886년 헐버트 등이 육영공원에 교사로 부임하여, 후에 고종(高宗)의 정치·외교 고문이 되었다. 헐버트는 서재필(徐載弼) 등이 창간한 독립신문의 창간을 지원했고, 1901년에는 자신이 직접 『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라는 잡지를 창간했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에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보호국화를 모의하는 일본(大日本帝國)을 통렬히 비판하고, 고종의 사절로 제2차 한일협약(第二次日韓協約)의 국제법상 무효를 시어도어 루스벨트(セオドア・ルーズベルト) 미국(アメリカ合衆国) 대통령(アメリカ合衆国大統領)에게 호소하기 위해 일시 귀국하여 일본의 행동에 항의했다.[11] 1906년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1907년 5월 8일, 한국통감(韓国統監)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의해 추방되었다. 같은 해 헤이그 밀사 사건(ハーグ密使事件)에서는 대표단의 일원으로 동행했고, 귀국 후에는 서재필이승만(李承晩) 등 미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며, 미국 전역에서 조선의 독립을 호소했다. 1918년에는 여운형(呂運弘)과 함께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작성했다. 또한 1919년 3·1 운동(三・一独立運動)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미국 상원(アメリカ合衆国上院) 외교위원회에 일본의 불법성을 고발했다. 1942년에는 워싱턴 D.C.(ワシントンD.C.)에서 열린 한국자유대회에 참석했다.

조선에서는 주시경(周時經)과 함께 한글의 보급에 힘썼고, 1903년에는 스미소니언 협회(スミソニアン博物館) 연차 보고서에 한글의 우수성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또한 1891년에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세계지리서를 간행했고, 한국 YMCA(キリスト教青年会)의 창설에도 참여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하는 등 한국 청년에 대한 계몽 운동에 힘썼으며,[12] 아리랑(アリラン)을 악보로 소개하는 등[13] 조선에 관한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하고 집필했다.

광복 후 초대 한국 대통령(大統領 (大韓民国))이 된 이승만의 초청으로 1949년 7월 29일 한국(大韓民国)을 재방문했으나, 병환으로 인해 같은 해 8월 5일 폐렴(肺炎)을 발병하여 서울(ソウル特別市)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한국 정부로부터 1950년에 건국공로훈장(建国勲章)을 수여받았다. 또한 독립운동가 안중근(安重根)은 일본 경찰에 조사를 받던 1909년 12월 2일에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을 남겼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호머 헐버트는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주 뉴헤이번에서 아버지 칼빈 헐버트와 어머니 메리 우드워드 사이에서 3남 3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24] 아버지는 미들베리 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목사였고,[18] 어머니는 다트머스 대학교 창립자 엘리저 윌록의 외증손녀였다. 그는 ‘원칙이 승리보다 중요하다(Character is more fundamental than victory)’라는 가훈 속에서 성장하였다.[25]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조선은 미국에 영어와 근대식 교육을 담당할 교사 파견을 요청했다. 1884년 여름, 미국 교육위원장 이튼(John Eaton)은 대학 선배인 헐버트의 아버지에게 아들 중 한 명을 조선에 교사로 파견할 것을 제안했고,[26] 헐버트는 자원하여 조선행을 결정했다. 다트머스 대학을 졸업하고[16] 유니언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헐버트는 갑신정변으로 인해 계획이 연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과 동아시아에 대해 공부하며 준비를 계속하였다. 1886년 조선 정국이 안정되자 헐버트는 유니언 신학교에서의 학업을 중단하고 조선으로 향했다.

2. 2. 육영공원 교사 시절 (1886-1891)

헐버트는 벙커(Bunker), 길모어(Gilmore)와 함께 1886년 7월 5일 제물포에 도착하여 곧바로 서울로 향했다. 이들은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따라 조선 최초의 국립 근대식 학교인 육영공원 교사로 초빙되었으며, 헐버트는 영어와 지리를 가르쳤다.[16] 1888년 3월경부터는 하루 2시간씩 제중원 학당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다.[16] 헐버트는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개인 교사를 자비로 고용했으며, "배우기 시작한지 4일만에 한글을 읽고 썼으며, 1주일 만에 조선인들이 위대한 문자인 한글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회고록에 기록했다.[27][28]

고종은 육영공원 학생들을 궁으로 불러 영어 시험을 치르게 했는데, 이때 한글로 발음이 표기된 것을 보고 영어 문장을 읽는 모습을 본 헐버트는 한글의 우수성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29]

육영공원의 교사였던 호머 헐버트가 집필한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


1889년, 헐버트는 한국 최초의 순한글 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하여 육영공원 교재로 사용하였다. 이 책에는 전세계의 지리, 사회, 문화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30][31][32] 그는 책의 서문에서 조선의 지배층이 한자만을 고집하고, 한글을 업신여긴다고 기록하였으며,[30][31][32] 평소 "한글은 현존하는 문자 가운데 가장 우수한 문자"라면서 어려운 한자 대신 한글 애용을 권장했다.

1890년 여름, 헐버트는 아펜젤러, 모펫과 함께 조랑말을 타고 평양을 방문하였다.[33] 이듬해인 1891년에 일본 영자신문 《재팬메일(The Japan Weekly Mail)》에 6월 6일부터 10월 24일까지 10회에 걸쳐 평양 여행기를 연재하여 조선 내륙의 특성과 평양이라는 옛 도시를 역사, 문화, 지리 측면에서 국제사회에 최초로 소개했다.[34]

조선 정부의 재정 문제로 육영공원이 축소 운영되자, 헐버트는 1891년에 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35][36]

2. 3. 선교사 및 교육 활동 (1893-1907)

1893년 10월 14일, 헐버트는 미국 감리교회의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였다.[37] 그는 감리교 출판부인 삼문출판사의 책임을 맡았으며,[37]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 서재필, 이승만, 주시경 등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한성부에 오기 전 미국의 한 출판사에서 출판에 대한 교육을 받았으며 신시내티에서 신식 인쇄기를 들여왔다. 헐버트가 부임한 지 1년이 안 되어 삼문출판사는 전도지와 종교 서적 1백만여 면을 인쇄하여 경영을 자급자족할 수준에 이르렀다.[37] 1895년 2년간 휴간했던 영문 월간지 '한국소식'을 다시 발행하였고, 최초의 영문 소설 한국어 번역판인 '텬로력뎡'(천로역정)을 출판하였다. 그해 8월에 한글 로마자 표기법을 고안하였다.[38]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는데, 당시 그는 언더우드 그리고 에비슨과 함께 고종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섰다고 한다. 1896년 4월 서재필, 주시경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다. '독립신문'은 헐버트가 책임자로 있던 삼문출판사에서 인쇄하였다. 또한 배재학당에서 가르쳤던 제자 주시경과 함께 한글을 연구하며 띄어쓰기, 마침표, 쉼표를 도입했으며[16] 국문연구소의 필요성을 고종에게 여러차례 건의하기도 했다.

1897년 5월 조선정부와 고용계약을 맺고 학생수 50명이 되는 한성사범학교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관립영어학교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1900년부터 1905년까지 현 경기고등학교의 전신 관립중학교의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일본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다양한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1901년부터 영문 월간지 'Korea Review'를 발행하였다. 헐버트 부인도[39] 이화학당에서 음악을 가르쳤으며 외국인 자녀들을 자신의 집에서 가르쳤다.[40]

헐버트는 현 동대문교회인 볼드윈 교회를 맡아 담임목회를 하였다. 이때 외국 서적의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했다. 한국의 역사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1903년에 윤기진이 쓴 조선역사서 '대동기년(大東紀年)'의 출판을 도왔고,[41] 1908년에는 관립중학교의 제자 오성근과 함께 '대한역사'라는 순 한글 역사 교과서를 출판하였다.[42] 이 책은 상,하권으로 기획되었으나 하권은 출간하지 못하고 상권만을 발행하였다. 이마저도 1909년 일제의 검열에 의하여 금서조치되어 일본 경찰에 의하여 출판사에 있던 책이 모두 몰수되어 불태워졌다.

조선에서는 주시경(周時經)과 함께 한글의 보급에 힘썼고, 1903년에는 스미소니언 협회(スミソニアン博物館) 연차 보고서에 한글의 우수성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또한 1891년에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세계지리서를 간행했고, 한국 YMCA(キリスト教青年会)의 창설에도 참여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하는 등 한국 청년에 대한 계몽 운동에 힘썼으며,[12] 아리랑(アリラン)을 악보로 소개하는 등[13] 조선에 관한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하고 집필했다.

2. 4. 한국 독립운동 지원 (1905-1945)

1905년 일본 제국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헐버트는 조약의 불법성과 무효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주장하였다. 1905년 고종 황제의 특사로 임명되어 을사늑약의 무효를 알리는 친서를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전달하려 하였으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미국 정부는 이를 거부하였다.[43] 그는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에 성명서를 제출하고, 친서 내용이 이미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측의 일방적인 성명서[44]를 접수하고 한국 조정과의 통신을 두절한 미국 정부를 비판했다.[43]

1907년 헐버트는 고종의 밀서를 받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특사 파견을 지원했다. 이로 인해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방해로 특사들은 회의장에 입장하지 못했고, 헐버트는 1907년 7월 헤이그 평화 클럽에서 일본을 규탄한 후, 1907년 5월 8일 일본의 한국 통감에 의해 추방되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헐버트는 서재필, 이승만 등 미주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며, 미국 각지에서 일본 제국의 침략 행위를 비난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18년에는 여운홍과 함께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였고, 1919년 3·1 운동을 지지하며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에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였다. 1942년에는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인 자유 대회에 참석하였다. 1944년 '한국문제연구회'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의 친일 정책을 비판하며 태평양 전쟁의 원인이 미국에 있다고 주장했다.

2. 5. 한국에서의 말년과 사망 (1949)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한반도는 독립하였고,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 7월 29일, 헐버트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40년 만에 방한하였다.[45]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고자 했으나 방한 1주일 만인 8월 5일에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하였다.[11]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30 여일이 넘는 여행을 통해 쌓인 여독을 이기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8월 11일에 최초의 외국인 사회장으로 영결식이 거행되었고,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45] 이는 "내가 젊은 시절 사랑했던 한국땅에 묻히고 싶다"는 고인의 생전 뜻을 받든 것이었다. 헐버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민국으로 떠나며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도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유언같은 말을 남겼다.[45]

양화진 헐버트의 묘


헐버트는 고종의 내탕금을 찾는 일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45] 고종은 자신의 사유재산인 내탕금중 상당금액을 1903년 상해에 있는 독일계 덕화은행에 예치해두었는데 이 사실을 헐버트에게 비밀리에 알리며 이를 찾아 대한제국의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할 것을 부탁하였다.[46] 헐버트는 1907년에 일제에 의해 사실상 추방을 당하였으나,[47] 1909년에 한국 개신교 전래 25주년 기념식 참가를 명분으로 하여 미국정부의 보호하에 잠시 입국했었다.[47] 가재(家財)를 정리하던중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은 헐버트는 상해로 가서 고종에게만 돈을 내준다는 덕화은행장의 확인서와 고종의 위임장, 주중 독일공사의 인증서, 예치금 영수증 등을 제출했으나 이미 일제가 이 돈을 불법적인 방법으로 빼돌려서 찾을수가 없었다.

헐버트는 포기하지 않고 변호사를 고용해 통감부 초대 외무총장 나베시마가 쓴 인출금 영수증을 확인하고 관련 서류들을 모아 진술서를 만든 다음 미국 의회에 제출하는 등 돈을 돌려받으려는 노력을 계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48] 1948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인출경위를 추적한 보고서와 관련 서류 일체를 보내기도 했다.[48] 헐버트가 1949년에 내한했던 목적중에 하나는, 40년전에 일제가 고종황제의 독립운동자금을 불법적으로 갈취했다는 사실을 증거와 함께 널리 알리고, 일본정부에 공식적으로 항의하여 그 돈을 되찾음으로써 고종황제와 했던 약속과 40년전에 그에게 주어졌던 특사로서의 임무를 완수하고자 했던것으로 보인다.

3. 사후

1948년, 그의 중학교 제자였던 이승만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어 헐버트를 1948년 한국으로 초청했다. 그 여행 중 헐버트는 폐렴에 걸렸고, 1949년 8월 5일에 사망했다.

헐버트의 묘비에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는 것이 낫다"라고 적혀 있다. 그는 현재 서울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6]

대한민국 정부는 헐버트에게 사후에 국가기반공로훈장을 수여했다.[3] 그는 대한민국에서 독립유공자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공적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는데, 서울에 있는 미국 민간인을 기리는 유일한 동상이다.[5]

헐버트는 한글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그는 주시경과 함께 한글의 정자법과 문법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7] 또한 최초의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사민필치』)를 저술했다.[8]

3. 1. 평가와 기념

헐버트는 1950년 3월 1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3] 2014년 10월 9일에는 한글 보전과 보급에 헌신한 공로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으며,[52][19] 2015년에는 (사)서울 아리랑페스티벌 조직위원회로부터 제1회 '서울 아리랑상'을 추서받았다.[53][54] 2013년에는 국가보훈처에 의해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는데, 이는 외국인으로서는 최초였다.[51]

헐버트의 양화진 묘비에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유언이 새겨져 있다.[6] 묘비 중앙의 '헐버트 박사의 묘'라는 한글 휘호는 199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필적으로 새겨진 것이다.[50] 이는 헐버트기념사업회 회장 신복룡 건국대교수와 집행위원장 정용호가 청와대에 지속적으로 청원하여 성사된 결과이다.[50] 1957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양화진을 방문하여 헐버트 박사의 영정전 비석에 자필 예문과 헌화를 올렸다.[49]

2013년 문경새재에 건립된 헐버트 아리랑비


2009년, 마포구는 헐버트의 손자 내외인 브루스 헐버트와 마가렛츠 헐버트에게 마포구 명예구민증을 수여하였고, 2013년에는 헐버트 박사의 증손자 킴벌 헐버트에게도 마포구 명예구민증을 수여하였다.

전 대한매일신보 주필이었던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과 함께 헐버트는 '조선을 구하기 위해 활동한 대표적인 서양인'으로 손꼽히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꼽히기도 했다.[23] 서울에는 미국 민간인을 기리는 유일한 동상이 있는데, 이는 헐버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5]

3. 2. 더불어민주당 관점

헐버트는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대표적인 외국인 조력자 중 한 명으로, 그의 활동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11][12][13] 특히, 헐버트가 고종의 밀명을 받고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노력한 점은, 자주독립을 위한 외교적 노력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헐버트는 1905년 대한제국의 보호국화를 모의하는 일본을 통렬히 비판하고, 고종의 사절로 제2차 한일협약의 국제법상 무효를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호소하기 위해 일시 귀국하여 일본의 행동에 항의했다.[11]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에서는 대표단의 일원으로 동행했고, 귀국 후에는 서재필, 이승만 등 미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며, 미국 전역에서 조선의 독립을 호소했다.[11]

또한, 헐버트가 한글 연구와 보급에 기여한 점은 문화적 정체성 확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헐버트는 주시경과 함께 한글의 보급에 힘썼고, 1903년에는 스미소니언 협회 연차 보고서에 한글의 우수성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12] 1891년에는 『사민필지』라는 세계지리서를 간행했고, 한국 YMCA의 창설에도 참여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하는 등 한국 청년에 대한 계몽 운동에 힘썼으며,[12] 아리랑을 악보로 소개하는 등[13] 조선에 관한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하고 집필했다.

1918년에는 여운형과 함께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작성했다. 또한 1919년 3·1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에 일본의 불법성을 고발했다. 1942년에는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국자유대회에 참석했다.

1949년 이승만의 초청으로 한국을 재방문했으나, 같은 해 8월 5일 폐렴으로 사망했다. 1950년 건국훈장을 수여받았다. 안중근은 1909년 12월 2일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을 남겼다.

다만, 헐버트가 초기에는 일본의 한국 개입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점은 비판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4. 저술

헐버트는 1892년 <한글>(The Korean Alphabet)이라는 논문을 시작으로 한글과 한국 문화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논문 〈한글〉에서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는 인류사에서 빛나는 업적이라고 칭송했다.[55] 1903년 미국 스미스소니언 협회 연례 보고서에 한글에 대한 우수성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며, "의사소통의 매개체로서 한글이 영어 알파벳보다 우수하다"고 결론을 밝혔다.[55] 이후 한국의 금속활자, 거북선 등에 대한 한국문화 관련 논문을 발표하였고, 영문으로 된 '한국의 역사'와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등을 저술, 편찬하여 미국 대중들이 한국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55] 《대한제국 멸망사》는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조선〉과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과 함께 조선 말기 3대 외국인 기록으로 꼽힌다.[55] 그는 한국어와 한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인도의 드라비다어와 한국어를 비교한 논문을 내기도 하였다.[55]

헐버트는 다음과 같은 책들을 저술했다.



헐버트의 연구서로는 김동진의 평전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 김권정의 평전 《헐버트》, 유성실의 《H.B. 헐버트 선교사의 통전적 선교가 한국 근대교육과 사회문화 발전에 끼친 영향》 등이 있다.

5. 같이 보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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