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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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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종우는 1850년경 안산에서 태어나 프랑스 유학 후 김옥균 암살 사건에 연루된 인물이다. 그는 프랑스 유학 중 춘향전 등을 프랑스어로 번역했으며, 1894년 상하이에서 김옥균을 암살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석방되었다. 이후 고위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반일 성향으로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1913년에 사망했다. 그는 김옥균 암살 사건을 통해 청일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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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홍종우 파리 시절
홍종우 파리 시절
출생일1851년 11월 17일
출생지안산, 경기도, 조선
사망일1913년 1월 2일
사망지인천 또는 목포, 일본 제국 한국
국적한국
가족남양 홍씨 참조
로마자 표기Hong Jong-u
한자 정보
한글홍종우
로마자 표기Hong Jong-u
매큔-라이샤워 표기Hong Chong-u
직업
직업(정보 없음)
활동
알려진 업적(정보 없음)
관직 정보
직책교리
소속 국가대한제국

2. 생애

홍종우는 1850년경 안산에서 태어나 1886년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이후 프랑스 유학을 결심, 1890년 12월 파리에 도착하여 기메 미술관에서 일하며 ''춘향전'', ''심청전'' 등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다.[1] 1893년 일본으로 건너가 김옥균 암살을 결심, 1894년 상하이로 가는 배 안에서 김옥균을 총으로 쏴 살해했다.[2]

이후 조선으로 돌아와 고위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1913년에 사망했다.[2]

2. 1. 생애 초반

홍종우는 1850년경 안산에서 양반층 출신 의정부 참의 홍재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6년 아버지가 사망했다.[3]

이후 성장하여 프랑스 유학을 결심, 1890년 12월 파리에 도착했다. 당시 조선 정부가 지정한 공비 유학생 국가는 미국과 일본뿐이었기에, 홍종우는 사비로 유학을 떠났다. 이 때문에, 조선인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으로 알려져 있다.[3]

홍종우 초상화

2. 1. 1. 불우한 어린 시절

홍종우는 남양 홍씨 남양군파 32세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치섭(洪致燮)이고, 아버지는 의정부참찬에 추증된 홍재원(洪在源)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이다. 경기도 안산군에서 태어난 홍종우는 전국을 떠돌다 고금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황현매천야록에는 '홍종우는 어린시절에 고금도에서 불우하게 지내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한제국 비서원일기에도 '고금도에서 쑥물을 버리는 것도 아까워했을 만큼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왔다'라는 기록이 있다. 제주도에서 화전민과 함께 살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2. 1. 2. 프랑스 유학

1886년 모친상을 당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아사히 신문사에서 식자공으로 일하면서 프랑스어일본어 등을 익혔다. 국제 신문 등을 접하며 해외에 대한 식견도 넓혀갔다. 2년여 간 일본에서 일해 배삯을 모았다. 1890년에는 사비로 프랑스 파리 유학을 떠나 마르세이유에 도착하였다. 당시 40세의 중년 유학생이었던 홍종우는 프랑스 유학 기간 동안 열강 제국주의 세력들의 본질에 대해 알기 시작하였고, 기메 미술관(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에서 일하면서 《춘향전》, 《심청전》, 《직성행년편람》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 또한 기메 박물관에서 처음 설립된 한국 문화 전시실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5](한불 관계) 김옥균이 일본 망명 시절 단발을 하고 이와타 슈사쿠로 개명한 것과 달리, 홍종우는 파리 체류 시절 늘 한복을 입고 다녔다. 김옥균은 일본을 조선의 나아갈 모델로 보고 일본의 도움을 받아 근대화를 추진하려 했으나, 홍종우는 서구 문명을 익히면서도 그 속에 숨겨진 제국주의의 야심을 경계했다.[6]

2. 2. 청년기: 김옥균 암살 사건

홍종우는 1850년경 안산에서 태어나 1886년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이후 프랑스 유학을 결심, 1890년 12월 파리에 도착하여 기메 미술관에서 일하며 ''춘향전'', ''심청전'' 등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다.[1] 1893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김옥균 암살을 결심, 1894년 상하이로 가는 배 안에서 김옥균을 총으로 쏴 살해했다.[2]

2. 2. 1. 암살 배경

홍종우는 갑신정변으로 자신의 일족을 섬멸하려 한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에 대한 응징 기회를 노리고 있던 민영소의 측근 이일직의 눈에 띄게 되었다. 민영소일본 정한론의 구체적인 이행을 추구하는 겐요사 창설자 도야마 미쓰루의 후견과 영향 하에 있는 김옥균이 조선의 독립 근대화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보고 홍종우에게 김옥균을 암살하도록 교사하였다.[3]

홍종우는 김옥균에게 접근하기 위해 청나라 외교부 협조를 받아 위안 스카이가 김옥균을 청으로 초청한다는 서한을 보내게 하고, 동반자로 자신을 추천했다. 평소 프랑스 요리 솜씨가 뛰어나 김옥균의 호감을 샀고, 개화파 성향에 프랑스 유학 경험까지 더해 김옥균의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결국 홍종우는 김옥균의 중국 여행에 동행하여 1894년 상하이의 뚱허양행(東和洋行) 호텔에서 리볼버 권총으로 김옥균을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3]

명성황후갑신정변으로 자신을 곤경에 빠뜨린 김옥균에게 복수하고자 개화파와 신뢰를 얻어 김옥균에게 접근할 수 있는 자객을 찾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돌아와 일본에서 생활하던 홍종우에게 자객 제의가 들어왔고, 홍종우 또한 명성황후의 추천을 받아 관직을 얻고 싶어 이를 수락했다.[3]

청나라 경찰의 심문에서 홍종우는 "자신은 조선 국왕의 칙명을 받고 행동했으며, 김옥균은 친일파로서 역적이며 청나라의 적이기도 하다"라고 변명했다. 홍종우는 형식적으로 체포되었지만 곧 석방되었다. 김옥균의 시신은 청나라 군함으로 조선에 반환되어 능지형에 처해졌고, 이는 김옥균을 지원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를 격분시켰다.[3]

김옥균 암살 당시 일본 신문에 게재된 기사와 삽화


양화진에 내걸린 김옥균의 수급

2. 2. 2. 암살 실행

홍종우는 갑신정변으로 자신의 일족을 섬멸하려 한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에 대한 응징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민영소의 측근인 이일직의 눈에 띄게 되었다. 민영소는 일본 정한론의 구체적인 이행을 추구하는 겐요사 창설자 도야마 미쓰루의 후견과 영향 하에 있는 김옥균이 조선의 독립 근대화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보고 홍종우로 하여금 김옥균을 암살하도록 교사하였다.

홍종우가 김옥균에게 접근한 방법은 간단했다. 먼저 청의 외교부 협조를 받아, 당시 이홍장 휘하의 조선 주재 청국 공사 원세개(위안 스카이)가 '동양 평화를 함께 논의하고 싶다'며 김옥균을 청으로 초청한다는 서한을 김옥균에게만 띄우게 했다. 그러면서 홍종우를 동반자로 추천했다. 홍종우는 김옥균의 호감을 미리 사두고 있었다. 그의 프랑스 요리 솜씨는 김옥균 본인은 물론 그의 일본 친구들 입맛까지 당길 정도였다. 개화파 성향에 프랑스 유학까지 갔다 왔다는 이력 등으로 홍종우는 김옥균의 의심을 사지 않았다. 그는 김옥균의 중국 여행에 동행, 이듬해 상하이에 있는 호텔 뚱허양행(東和洋行)에서 리볼버 권총으로 김옥균을 저격, 암살하였다.[2]

김옥균은 홍종우를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생각했다. 홍종우는 그만큼 암살 의도를 철저히 숨기고 위장 접근에 완벽하게 성공했다.

경찰의 심문에서 홍종우는 "자신은 조선 국왕의 칙명을 받고 행동했으며, 김옥균은 친일파로서 역적이며 청나라의 적이기도 하다"라고 변명했다. 홍종우는 형식적으로 체포되었지만, 석방되었다. 김옥균의 시신은 청나라 군함으로 조선에 반환되어, 사후 조선 왕조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능지형에 처해져 사지가 찢기고 머리는 시장에 효수되었다.

2. 2. 3. 암살 이후



홍종우는 갑신정변으로 자신의 일족을 섬멸하려 한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에 대한 복수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민영소의 측근인 이일직의 눈에 띄어 김옥균 암살을 교사받았다. 민영소는 일본 정한론을 추구하는 겐요사 창설자 도야마 미쓰루의 후견과 영향 하에 있는 김옥균이 조선의 독립 근대화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보았다.[1]

홍종우는 먼저 청의 외교부 협조를 받아, 당시 이홍장 휘하의 조선 주재 청국 공사 원세개가 '동양 평화를 함께 논의하고 싶다'며 김옥균을 청으로 초청한다는 서한을 보내도록 했다. 이때, 홍종우는 동반자로 추천되었다. 그는 프랑스 요리 솜씨가 뛰어나 김옥균은 물론 그의 일본 친구들 입맛까지 사로잡을 정도였고, 개화파 성향에 프랑스 유학까지 갔다 왔다는 이력 등으로 김옥균의 의심을 사지 않았다.

홍종우는 김옥균의 중국 여행에 동행하여, 1894년 상하이에 있는 호텔 뚱허양행(東和洋行)에서 리볼버 권총으로 김옥균을 저격하여 암살하였다.[2] 김옥균은 홍종우를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생각했고, 홍종우는 그만큼 암살 의도를 철저히 숨기고 위장 접근에 완벽하게 성공했다.

명성황후는 갑신정변으로 자신을 곤경에 빠뜨린 김옥균에게 복수하고자 개화파와 신뢰를 얻어 김옥균 곁에 접근할 수 있는 자객을 찾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돌아와 일본에서 생활하던 홍종우에게 자객 권유가 있었고, 홍종우 또한 명성황후의 추천을 받아 관직을 얻고 싶었기에 이를 받아들였다.[3]

경찰의 심문에서 홍종우는 "자신은 조선 국왕의 칙명을 받고 행동했으며, 김옥균은 친일파로서 역적이며 청나라의 적이기도 하다"라고 변명했다. 홍종우는 형식적으로 체포되었지만 석방되었다. 김옥균의 시신은 청나라 군함으로 조선에 반환되어, 사후 조선 왕조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능지형에 처해져 사지가 찢기고 머리는 시장에 효수되었다.[3]

2. 3. 정치 활동

홍종우는 1893년 일본으로 건너가 개혁 성향의 김옥균박영효를 암살하기로 결심하였다. 1894년, 상하이로 가는 배 안에서 김옥균을 총으로 쏴 살해했다.[2] 이후 그는 조선으로 돌아와 고위 관직에 임명되었다. 일본의 한국 내 영향력이 커지면서, 반일 성향의 홍종우는 관직에서 물러났다.

2. 3. 1. 귀국과 관직 생활

청나라 관원 경찰에 체포, 구금되는 형식적인 모양새를 취한 후, 미리 홍종우의 신상 처리를 청과 조율하고 있던 조선의 '석방 교섭'으로 풀려났다.[2]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수구파 대신들로부터 환희와 환대를 받았지만, 홍종우 자신은 '소생의 본뜻은 여러분들 개인의 적을 토멸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는 국가의 공적이기 때문입니다.'라며 수구파들의 환대와 환희를 단호하게 거절하는 모양새도 취했다. 홍종우가 돌아오자 고종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1894년 홍종우의 '거사'에 당시 조정이 은밀히 개입하고 있었음을 암시해주는 대목이다. 그 후, '특채'차원이라고 해석되는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리(校理)가 되었으며,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신임을 얻어 요직에 올랐다.[2]

귀국한 홍종우는 명성황후의 환영을 받았고, 그 공적으로 지방 재판소의 장관으로 임명되어 사택을 하사받았다. 조선 왕조가 독립 협회 탄압을 위해 설립한 황국 협회의 간부가 되었고, 절대 왕정에서 입헌 군주제로의 개혁을 주장하는 독립 협회의 이승만을 체포하여 재판에서 사형을 구형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종신형으로 감형되었고, 이후 탈옥하여 미국으로 망명했으며, 조선 독립 후인 1945년에 한반도 남부에 귀국하여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2. 3. 2. 황국협회 활동과 독립협회 견제

1898년 독립협회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며 중추원 관제 개편과 귀족 중심의 상원 설립을 주장하자, 홍종우는 평민 중심의 하원 설립을 요구하며 독립협회의 외세 의존적인 논조를 비판하고 외세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기동(李基東), 길영수(吉泳洙) 등과 함께 황국협회를 조직, 보부상을 동원하여 독립협회의 활동을 방해하였다.[3] 특히 서재필, 윤치호 등의 친외세적 기회주의를 비판하며 조선 자체의 산업 발전과 자력자강의 길을 모색했다. 또한 역모죄로 체포된 개화파 인사들을 재판했는데, 그 중에는 이승만도 있었다. 홍종우는 감리사로서 이승만 사건의 재판을 맡아 처음에 사형을 구형하였으나, 형을 감하여 종신형에 태형 100대를 선고하였다.[3]

홍종우는 근왕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황제권 강화를 추진했고, 하원 설립을 통해 제한적 입헌군주제를 모색했으나, 시대착오적이고 외세 의존적인 공화제 계획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또한 만민공동회와 친일적인 독립협회의 활동을 감시하였다. 대한제국의 주요 법규들을 모아 '법규류편 속일'을 편찬, 발간하여 주요 법규에 대한 안내와 법규 해설집으로 활용되었다.

2. 3. 3. 이승만 재판

홍종우는 명성황후의 환영을 받았고, 그 공적으로 지방 재판소의 장관으로 임명되어 사택을 하사받았다. 조선 왕조가 독립 협회 탄압을 위해 설립한 황국 협회의 간부가 되었고, 절대 왕정에서 입헌 군주제로의 개혁을 주장하는 독립 협회의 이승만을 체포하여 재판에서 사형을 구형했다.[3] 그러나 이승만은 종신형으로 감형되었고, 이후 탈옥하여 미국으로 망명했으며, 조선 독립 후인 1945년에 한반도 남부에 귀국하여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3]

2. 4. 최후

1903년 친일 관리세력들이 득세하면서 홍종우는 주요 관직에서 밀려나 제주도 목사로 좌천되었고, 이마저도 얼마 못 가 사임하고 낙향하였다. 상하이에서 김옥균을 암살한 것이 조선 사회에 알려지면서 그는 살인자라는 비난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거사를 정의와 애국심에 의한 것이라고 항변하였다.[7]

일본제국은 김옥균을 암살한 홍종우를 테러리스트로 매도했다.[7] 이후 홍종우의 말년에 관한 기록은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일설에는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어렵게 살아갔다고 하지만 자세한 행적이나 기록은 없다. 일본제국의 대한제국 병합 이후인 1913년에 죽었다고 알려졌으나, 이 또한 확인된 바는 없다. 1905년 이후의 행적은 일본 관헌의 기록에 제한적으로 남아 있으나 신뢰하기 어렵다. 1906년 이용익의 유럽행에 동행하여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서 모종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용익 사후,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를 계획했으나 좌절된 것으로 보인다.

3. 저작

홍종우는 《직성행년편람》, 《법규류편 속일》을 저술했다. 춘향전심청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기도 했다.[1]

3. 1. 저서


  • 《직성행년편람》
  • 《법규류편 속일》

3. 2. 역서


  • 춘향전 프랑스어 번역본[1]
  • 심청전 프랑스어 번역본 (Le Bois sec refleuri), 1895 [http://gallica.bnf.fr/ark:/12148/bpt6k54364928/f65.image.r=cor%C3%A9en%20fran%C3%A7ais.langFR Gallica][1]
  • 직성행녕편람|한국의 점서한국어 프랑스어 번역본[1]

4. 평가와 비판

홍종우는 김옥균 암살 사건으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2] 이 사건은 당시 조선의 개화파와 수구파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4. 1. 긍정적 평가

(현재 주어진 자료에는 긍정적 평가에 대한 내용이 없으므로, 빈 문단으로 유지합니다.)

4. 2. 부정적 평가

홍종우는 1894년 김옥균을 암살한 사건으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2] 그는 개혁 성향의 김옥균을 상하이로 가는 배 안에서 총으로 쏴 살해했다.[2] 이 사건은 당시 조선의 개화파와 수구파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5. 기타

김옥균 암살 사건이 청일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시각도 있다. 김옥균 암살 계획을 미리 감지한 쪽은 일본 정부였으며, 그의 암살을 애써 저지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한때 김옥균을 근대화의 선구자 운운하며 전폭적으로 지원한 일본이었지만, 김옥균이 정변에 실패하고 자객에게 쫓기는 몸이 되자 찬밥 대하듯 했다. 즉 귀찮은 존재였던 셈이다. 조선의 근대화에 일본을 이용하는 데만 뜻이 있었던 김옥균이 조선의 일본 식민지화 야욕에도 태클을 걸 것임이 분명했다.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홍종우의 손으로만 암살당하자 일본 정부와 언론은 일제히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마치 암살 당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것처럼 그를 애도하고, 의연금을 모으고, 시체 수습 문제를 협의하는 등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들의 조선 내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언론 플레이였을 뿐이다.[1]

한편 조선은 김옥균 암살이 국가의 경사라고 큰 의미를 부여했다. 홍종우가 돌아오자 고종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홍종우는 단번에 실력파 황실 관료로 부상한다. 그로서는 프랑스에서 외롭게 공부하며 조선을 근대 국가로 발돋움시키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실행에 옮길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상하이에서 암살 사건이 일어난 것은 김옥균을 '친일'로 간주했던 청이 그의 암살을 도운 결과였다. 그리하여 일본은 김옥균은 일본인이나 다름없고, 일본 여관에서 사건이 일어난 만큼 사건 관할은 일본에 있다고 주장 해가며, 암살을 '방치'한 청국 정부를 맹비난했다. 그러나 사실상 김옥균 암살의 공모자나 다름 없던 청은 홍종우의 신원을 확인한 다음 조선 정부의 요구 대로 홍종우와 김옥균 시신을 조선에 넘겼다.[1]

조선과 청은 일본의 속내를 꿰뚫지 못했다. 만국공법과 같은 허울 좋은 세계 공존론을 맹신하며 그것이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침투를 막아 주리라고,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유지시켜 주리라고 안이하게 예상하고 있었다. 조선 침략, 나아가 대륙 침략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에게 김옥균 암살 사건은 자신들의 조선내 존재의 명분을 강화시켜 준것이라고 일본은 주장하지만 핑계일뿐이다. 결정적 원인은 그 해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에 의해 서로 간에 맺혀 있는 청일 양국으로만의 톈진 조약을 발효 직후에 즉시 파기하였던 청과 일본은 한반도 조선 땅에서만 정면으로 부딪친다. 이것이 바로 청일전쟁이다.[1]

참조

[1] 서적 K-Literature: The Writing World's New Voice https://books.google[...] 길잡이미디어 2013-04-12
[2] 서적 Korea Journal https://books.google[...] Korean National Commission for UNESCO 2011
[3] 서적 朝鮮の攘夷と開化 平凡社選書
[4] 서적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푸른역사
[5] 웹인용 Official website of the French embassy in South Korea http://ambafrance-kr[...] 2011-10-13
[6] 뉴스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암살자 홍종우와 김옥균, 과연 누가 옳았는가 https://news.naver.c[...] 쿠키뉴스 2005-11-25
[7] 문서
[8] 서적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푸른역사 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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