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동독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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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3년 동독 봉기는 1953년 6월 17일, 동독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이다. 1952년 소련의 독일 재통일 제안 거부와 동독의 사회주의 가속화 정책으로 인한 경제난이 봉기의 배경이 되었다. 노동 할당량 증가에 반대하는 건설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시작되었으며, 자유 선거 실시 등을 요구하는 시위로 확산되었다. 동독 정부는 소련군의 지원을 받아 시위를 진압했고, 수많은 사상자와 체포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동독 정권의 취약성을 드러냈으며, 이후 동독 정부는 감시 강화 및 경제 정책 변화를 겪었다. 서독은 6월 17일을 독일 통일의 날로 지정하여 기념했으며, 현재는 10월 3일이 공식적인 통일 기념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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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동독 봉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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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분쟁 | 1953년 동독 봉기 |
일부 | 냉전 |
날짜 | 1953년 6월 16일 - 1953년 6월 17일 (산발적으로 1953년 6월 24일까지) |
장소 | 동독 |
결과 | 정부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동독 소련 |
교전국 2 | 반스탈린주의 시위자 |
지휘관 및 지도자 | |
교전국 1 지휘관 | 발터 울브리히트 안드레이 그레치코 블라디미르 세묘노프 |
교전국 2 지휘관 | 중앙 집중화된 지도력 없음 |
병력 규모 | |
교전국 1 병력 | 동독: 16개 사단 베를린: 20,000명의 군인, 15,000명의 인민경찰 |
교전국 2 병력 | 1,000,000–1,500,000명의 시위자 |
부대 | |
교전국 1 부대 | KVP GSOFG |
교전국 2 부대 | 조직되지 않은 시위대 |
사상자 | |
사망자 | 55–125+명 사망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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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952년 5월, 서독(서독 또는 FRG)은 소련 지도자 요셉 스탈린이 제안한 스탈린 노트를 거부했다. 이는 소련의 지원을 받는 동독(동독 또는 GDR)과의 재통일을 독립적이고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독일로서 제안한 것이었다. 냉전의 고조된 불안 속에서 스탈린의 제안은 서독에서 강한 의심을 불러일으켰고, 그 대신 같은 달 유럽 방위 공동체 조약에 서명했다. 이러한 발전 이후 소련과 동독 모두 독일이 무기한으로 분단될 것이라는 점이 명확해졌다. 동베를린에서 동독의 집권당인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SED)의 사무총장 발터 울브리히트는 스탈린의 독일 재통일 시도 실패를 "녹색 신호"로 해석하여 1952년 7월 제2차 당 대회에서 "동독 내 사회주의의 가속화된 건설"을 진행했다. 동독을 소비에트화하려는 이러한 조치는 중공업에 대한 투자 증가, 사기업에 대한 차별적 과세, 농업의 강제 집단화, 동독 내 종교 활동에 대한 캠페인으로 구성되었다.[6]
1953년 동독 봉기는 그해 9월 서독 총선거를 앞두고 전 세계에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봉기 6일 전인 6월 11일, 동독 정부는 독일 통일을 위한 새로운 조치를 발표했지만, 소련군 점령과 사회주의통일당 지배에 불만을 품은 동베를린 시민들은 6월 17일 봉기하여 사회주의통일당 본부 등을 습격했다. 이 봉기는 동독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나 소련군 전차부대의 출동으로 진압되었다.
이러한 동독의 경제 변화는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을 급격히 악화시켰으며, 이는 1953년 상반기까지 계속되었다.[7] 국가 보조금이 삭감되면서 여행 비용이 상승했고, 많은 소비재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공장에서는 초과 근무를 억제해야 했다.[8] 한편, 국가의 집단화 정책으로 인해 동독의 부유한 농민의 40%가 서쪽으로 도망쳐 많은 농지가 휴경 상태로 남게 되었고, 1952년의 흉작으로 인해 식량 가격이 상승했다.[9] 따라서 노동자들의 생활비는 상승했지만, 실수령액은 감소했다. 1952년에서 1953년 겨울에는 동독 도시에 대한 난방과 전력 공급에도 심각한 차질이 발생했다. 1952년 11월까지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할레, 줄 등 여러 주요 동독 공업 중심지에서 산발적인 식량 폭동과 산업 불안이 발생했다. 산업 불안은 다음 봄까지 계속되었다.[8]
"사회주의 건설"로 인한 경제적 압박을 완화하기 위해 정치국은 모든 국영 공장에서 작업 할당량을 10% 증가시키기로 결정했다. 즉, 노동자들은 동일한 임금으로 10% 더 많은 생산량을 만들어야 했다.[10][11] 또한 식량, 의료, 대중교통 가격이 인상되었다. 작업 할당량과 가격 인상은 합쳐서 월급의 33% 삭감에 해당했다.[12]
많은 동독인들은 ''레푸블리크플루흐트'' 현상처럼 동독을 떠나는 것으로 대응했다. 1951년에는 16만 명이, 1952년에는 18만 2천 명이, 1953년 첫 4개월 동안에는 12만 2천 명이 서독으로 떠났다.[13]
1953년 3월 스탈린 사망 이후 설립된 소련의 새로운 집단 지도부는 동독의 경제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받고 충격을 받았다.[14] 6월 2일, 소련 지도부는 "동독의 정치 상황 개선을 위한 조치"를 발표하며, 강제 집단화와 사기업에 대한 공격을 종식시키고, 소비재 생산을 늘리며, 정치적 통제를 완화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대한 강압을 중단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울브리히트의 "냉혹한 권력 행사"를 비난했지만, 작업 할당량 증가 철회 요구는 없었다. 소련 총리 게오르기 말렌코프는 동독에서 재앙을 피하려면 변화가 필수적이라고 경고했다.[15]
6월 9일, SED 정치국은 대응을 결정했으나, 블라디미르 세묘노프는 즉시 시행을 주장했다.[16] 6월 11일, SED는 ''노이에스 도이칠란트''에 새로운 노선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이 공보는 실수를 비판하고 소비에트화 정책의 대부분을 역전시킬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작업 할당량 증가는 철회되지 않았다. 이는 노동자들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의 정당성에 대한 위협이었다. 공보와 과거 실수에 대한 인정은 많은 동독인들에게 충격과 혼란을 안겨주었다. 일반 대중은 새로운 노선을 동독 정권의 약점으로 여겼다.[16]
6월 12일, 브란덴부르크 안 데어 하펠의 브란덴부르크-괴르덴 교도소 앞에서 5,000명이 시위에 참여했다.[17]
6월 15일, 동베를린 스탈린 거리 "블록 40" 현장의 노동자들은 작업 할당량 증가 취소를 요구하며 동독 총리 오토 그로테볼에게 청원서를 전달했지만, 그로테볼은 이를 무시했다.[17]
사건의 발단은 생산량 할당량 미달자의 임금 삭감이라는 (동)독일 민주 공화국 정부의 새로운 정책(할당량 강화법[39])에 반대하는 스탈린 알레의 건설 노동자들의 파업이었다.[40]
3. 경과
1952년 5월, 서독은 소련 지도자 요셉 스탈린이 제안한 독일 재통일 제안을 거부했다. 냉전의 불안 속에서 스탈린의 제안은 서독에서 강한 의심을 불러일으켰고, 서독은 유럽 방위 공동체 설립 조약에 서명했다. 이후 소련과 동독 모두 독일이 분단될 것이라는 점이 명확해졌다.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SED) 사무총장 발터 울브리히트는 스탈린의 독일 재통일 시도 실패를 "녹색 신호"로 해석하여 1952년 7월 제2차 당 대회에서 "동독 내 사회주의의 가속화된 건설"을 진행했다. 동독을 소비에트화하려는 조치는 중공업 투자 증가, 사기업에 대한 차별적 과세, 농업 집단화, 종교 활동에 대한 조직적인 캠페인으로 구성되었다.[6]
이러한 경제 방향 변화는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을 급격히 악화시켰고, 1953년 상반기까지 계속되었다.[7] 여행 비용이 상승하고, 많은 소비재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공장에서는 초과 근무를 억제해야 했다.[8] 국가의 집단화 정책과 1952년 흉작으로 식량 가격이 상승했다.[9] 노동자들의 생활비는 상승했지만, 실수령액은 감소했다. 1952년 겨울에는 난방과 전력 공급에도 차질이 발생했다. 1952년 11월,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등 주요 공업 중심지에서 산발적인 식량 폭동과 산업 불안이 발생했다. 산업 불안은 다음 봄까지 계속되었다.[8] 국가의 경제적 압박을 완화하기 위해 정치국은 모든 국영 공장에서 작업 할당량을 10% 증가시키기로 결정했다. 즉, 노동자들은 동일한 임금으로 10% 더 많은 생산량을 만들어야 했다.[10][11] 또한 식량, 의료, 대중교통 가격이 인상되었다. 이는 월급의 33% 삭감에 해당했다.[12]
울브리히트의 정책에 많은 동독인들은 ''레푸블리크플루흐트'' 현상처럼 동독을 떠나는 것으로 대응했다. 1951년에는 16만 명, 1952년에는 18만 2천 명, 1953년 첫 4개월 동안 12만 2천 명이 서독으로 떠났다.[13]
1953년 3월 스탈린 사망 이후 소련의 새로운 집단 지도부는 동독의 경제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받고 충격을 받았다.[14] 6월 2일, 소련 지도부는 "동독의 정치 상황 개선을 위한 조치"를 발표하여 SED의 사회주의 가속 건설 정책을 비판했다. 강제 집단화와 사기업에 대한 공격을 종식시키고, 소비재 중심으로 5개년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정치 사법적 통제와 규제를 완화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대한 강압 조치를 중단해야 했다. 울브리히트의 "냉혹한 권력 행사"도 비난받았다. 그러나 작업 할당량 증가 철회 요구는 없었다. 소련 총리 게오르기 말렌코프는 동독에서 재앙을 피하려면 변화가 필수적이라고 경고했다.[15]
6월 9일, SED 정치국은 대응을 결정했다. 블라디미르 세묘노프는 즉시 시행을 주장했다.[16] 6월 11일, SED는 ''노이에스 도이칠란트''에 새로운 노선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이 공보는 SED의 실수를 비판하고 소비재 투자 전환, 소규모 사기업 압력 중단, 강제 집단화 중단, 종교 활동 정책 중단을 발표했다. 그러나 작업 할당량 증가는 철회되지 않아 노동자들의 불만을 샀다. 공보와 과거 실수 인정은 많은 동독인들에게 충격과 혼란을 안겨주었다. 실망, 불신, 혼란이 지역 당 조직에 만연했고, 당원들은 배신감을 느꼈다. 일반 대중은 새로운 노선을 동독 정권의 약점으로 여겼다.[16]
6월 12일, 브란덴부르크 안 데어 하펠의 브란덴부르크-괴르덴 교도소 앞에서 5,000명이 시위에 참여했다.[17] 6월 15일, 동베를린 스탈린 알레 건설 노동자들은 작업 할당량 증가 취소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전달했지만, 그로테볼은 이를 무시했다.[17]
사건의 발단은 생산량 할당량 미달자의 임금 삭감이라는 동독 정부의 새로운 정책(할당량 강화법[39])에 반대하는 칼 마르크스 알레 건설 노동자들의 파업이었다.[40] 노동자들은 "턱수염, 뱃살, 안경은 인민의 의지가 아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발터 울브리히트, 빌헬름 피크, 오토 그로테볼을 풍자했다.[41]
6월 17일에는 4만 명 이상이 항의 행동에 참가했다. 참가자 대표와 동독 정부 관계자 간의 회담이 열렸고, 참가자 측은 정부 수뇌부의 사퇴를 요구했다. 주독 소련군 병사 약 2만 명과 동독 경찰 인민군 8천 명이 동원되었다. 운터 덴 린덴 부근에서 노동자와 병사의 충돌로 병사의 발포가 이루어지면서 폭동으로 발전하여 노동자 사망자가 발생했고, 항의 행동은 그날 안에 진압되었다. 동독의 600개 시정촌에서 산발적인 항의 행동이 전개되었다.
희생자의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으며, 55명이나 125명이라는 수치가 나오고 있다. 서독 내무부의 1966년 추계에 따르면, 총 383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106명이 즉결 재판 또는 정식 재판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추계하고 있다. 1838명이 부상하고, 약 5100명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진압에 소련군이 출동한 것은 1956년 헝가리 혁명, 1968년 프라하의 봄 등에서 민중의 요구를 소련군이 무력으로 억압하는 선례가 되었다.[42] 서방 국가들이 방관한 것도 마찬가지로 선례가 되었다. 서독에서 동독으로의 지원도 없었다.
서독에서는 1990년까지 동베를린 폭동이 진압된 6월 17일을 "독일 통일의 날"로 해왔다. 독일 재통일 후, 그 날은 10월 3일로 변경되었다.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티어가르텐을 종관하여 에른스트 로이터 플라츠까지의 길을 "샬로텐부르거 샤우세(Charlottenburger Chausseede)"에서 "6월 17일 거리(Straße des 17. Junide)"로 개명했다.
3. 1. 6월 16일
1953년 6월 16일 오전 9시, 동베를린의 "프리드리히샤인 병원"과 "슈탈리날레 40블록" 건설 현장의 노동자 300명이 파업에 돌입했다. 이들은 발트슈트라세에 있는 자유독일노동조합연맹(FDGB) 본부로 행진한 후 시내 중심부로 이동하며 플래카드를 들고 기존의 노동 할당량을 회복할 것을 요구했다. 파업 노동자들의 요구는 할당량을 넘어 정치적인 문제로 확대되었다. 알렉산더광장과 운터덴린덴을 거쳐 대부분의 시위대는 라이프치히슈트라세에 있는 정부 청사로 이동했고, 일부는 빌헬름-피크슈트라세에 있는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 본부로 향했다. 이동 중 두 대의 확성기 차량을 점거하여 다음날 오전 7시 슈트라우스베르거 플라츠에서의 총파업과 시위를 촉구했다.[18]
동독의 장관청(Detlev-Rohwedder-Haus) 앞에서 빠르게 불어난 인파는 발터 울브리히트와 오토 그로테볼과 대화할 것을 요구했다. 중공업 장관 프리츠 젤브만과 동독 평화위원회 회장 로베르트 하페만 교수만 건물에서 나왔으나, 그들의 진정 시도는 인파의 고함 소리에 묻혔다.[18]
한편, 정치국은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숙고했다. 상황의 긴급성에도 불구하고, 시위대의 압력과 세묘노프의 압력 하에 수 시간의 논의 끝에야 지도부는 노동 할당량 증가를 철회하기로 결정했다. 정치국 위원들은 생산성 향상이 이제 자발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선포하고, 할당량 증가의 시행 방식뿐 아니라 외국 선동자들의 책임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SED 간부가 노동자들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장관청에 도착했을 때, 시위대의 의제는 이미 노동량 증가 문제를 훨씬 넘어섰다.[19]
그날 오후, 군중은 해산했고 노동자들은 현장으로 돌아갔다. 인민경찰과 시위대 사이의 산발적인 충돌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평온했다. SED 지도부는 그러한 반감의 깊이와 반체제 행동의 규모에 놀랐다. SED 지도부는 대대적인 선전 공세만으로도 새롭게 등장하는 위기에 대처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이는 충분하지 않았다.[20]
소련 당국도 동베를린 시위 이후 광범위하게 벌어진 항의에 완전히 놀랐다. 그들의 대응은 즉흥적이고 조율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늦게 세묘노프는 SED 지도부와 만나 베를린에 소련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고 알렸다.[21]
6월 16일 밤과 17일 새벽 내내, 동베를린 사건에 대한 소식은 구전과 특히 서방 라디오 방송, 특히 미군 지역 라디오(RIAS)를 통해 동독 전역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오후에는 시위대의 요구가 더 높은 노동 할당량과 가격 인하의 철회에서 "자유 선거"를 외치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방송이 나왔다.[17]
3. 2. 6월 17일
1953년 6월 17일 이른 아침, 소련군은 동베를린 주변에 진입했다. 한편, 노동자들은 슈트라우스베르거 광장과 다른 공공장소에 모여 시내 중심부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는 길에 동독 보안군(정규군과 '숙영 인민경찰'을 뜻하는 카세르니에르테 폴크스폴리차이(Kasernierte Volkspolizei, KVP) 부대)을 만났는데, 이들은 지시가 없었던 듯 처음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과 자유독일청년단(FDJ) 간부들과 함께 경찰 간부들은 시위대에게 집과 직장으로 돌아갈 것을 설득하려 했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경찰이 군중을 저지하거나 해산하려 할 때마다 빠르게 수세에 몰렸다. 시위대의 규모가 커지면서 연대감이 퍼져나갔다. 확성기가 장착된 차량과 자전거는 아침 내내 외곽 지역에서 시내 중심부로 집결하는 시위대의 여러 열(column) 사이의 통신을 제공했다. 시위대는 임시로 만든 현수막과 포스터에 노동 할당량 회복, 물가 인하, 전날 체포된 동료 시위대의 석방, 그리고 자유롭고 공정한 전독일 선거를 요구했다. "정부 타도!"와 "버터를 달라, 무기를 원치 않는다"와 같은 구호도 보였다. 특히 사회주의통일당(SED)과 소련 지도자들을 묘사한 당 포스터와 동상은 불태워지거나 훼손되었다.
오전 9시까지 2만 5천 명이 장관청(House of Ministries) 앞에 모였고, 수만 명이 더 라이프치히 거리로 가는 길에 있거나 포츠담 광장에 있었다. 오전 10시에서 11시 사이에 80~100명의 시위대가 정부 청사를 습격하여, 500명의 인민경찰과 국가보안부 요원들이 제압당했다.[22] 그러자 갑자기 소련 군용 차량이 나타나 전차를 따라가면서 임박한 장악을 막았다. 1시간 만에 소련군은 정부 청사 주변 지역을 정리하고 봉쇄했다. 정오에 소련 당국은 동베를린으로 가는 모든 트램과 지하철 운행을 중단했고, 더 많은 시위대가 시내 중심부에 도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간의 경계를 거의 봉쇄했다. 1시간 후, 동베를린에 계엄령을 선포했다.[22] 동베를린 경찰 본부 밖에서 소련 전차는 "반란군"을 향해 발포했다. 소련군(그리고 나중에 동독 경찰)과 시위대 간의 교전은 오후와 밤까지 계속되었고, 어떤 경우에는 전차와 군대가 군중을 향해 직접 발포했다. 서베를린 노동자 빌리 고틀링의 처형을 비롯한 처형과 대규모 체포가 뒤따랐다.
밤새 소련군과 슈타지는 수백 명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결국 최대 1만 명이 구금되었고, 적어도 32명(명령을 거부한 소련군 병사 포함)이 처형되었다.[23] 카를스호르스트에 있는 소련 본부에서 사회주의통일당(SED) 지도부가 사실상 마비되면서 동베를린의 통제권은 소련으로 넘어갔다.[21]
4. 진압과 피해
1953년 동독 봉기 진압에는 주독 소련군 병력 약 2만 명과 국가인민군의 전신인 경찰 인민군 8천 명이 동원되었다.[41] 운터 덴 린덴 부근에서 노동자들과 병사들이 충돌하면서 발포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노동자 사망자가 발생했다.[41] 봉기는 그날 안에 진압되었지만, 동독 내 600여 개 시정촌에서 산발적인 항의 행동이 계속되었다.
정확한 희생자 수는 동독 측의 정보 조작으로 인해 불분명하며, 55명[41] 또는 125명[41]이라는 수치가 제시되고 있다. 서독 내무부의 1966년 추계에 따르면, 동베를린 폭동으로 총 383명이 사망했으며, 이 중 116명은 동독 체제 측 사망자였다.[41] 또한 106명이 즉결 재판 또는 정식 재판을 통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41] 같은 추계에서는 1,838명이 부상당하고 약 5,100명이 체포되었다고 보고 있다.[41]
소련군의 진압은 1956년 헝가리 혁명, 1968년 프라하의 봄 등에서 민중의 요구를 무력으로 억압하는 선례가 되었다.[42]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이 이 사태를 방관한 것 역시 마찬가지로 이후 사건들의 선례가 되었다.[42]
5. 영향
1953년 동독 봉기는 동독, 서독, 그리고 국제 사회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동독에서는 봉기 이후 노동자들의 작업 환경과 처우 개선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지만, 동시에 감시와 통제가 강화되었다. 역사학자 코리 로스(Corey Ross)에 따르면, 사회주의통일당(SED) 지도부는 이 사건을 통해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첫째, 작업장 불만이 더 큰 갈등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동자 감시를 강화하고, 노동계급 전투단(Kampfgruppen der Arbeiterklasse)을 설립하여 소요 사태를 예방 및 진압했다. 또한, 국가보안부(Stasi)를 확장하여 조직적인 항의 징후를 신속하게 처리했다. 둘째, "새로운 과정" 정책을 통해 소비재, 주택, 가격 및 여행 보조금 투자를 늘려 전반적인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려 했지만, "사회주의의 가속화된 건설"과 같은 강압적인 정책은 다시 시도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인식했다.[36]
봉기 진압 이후 많은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인민경찰이 노동자들에게 총을 쏘았다는 사실은 많은 사회주의통일당(SED) 당원들의 탈당을 야기했다. 라이프치히와 칼-마르크스-슈타트 지역에서 수백 명의 당원들이 탈당했고, 알텐베르크의 텍시마 공장에서는 7월 7일까지 450명의 당원들이 탈당했다. 또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비 납부를 거부하며 당의 정통성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32]
7월 8일 정치국 회의에서 빌헬름 자이서 국가보안부 장관은 발터 울브리히트를 지도자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울브리히트는 에리히 호네커 등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유지했고, 이후 자신의 입지를 더욱 강화했다.[33]
서독에서는 1953년 동독 봉기를 기념하여 6월 17일을 '독일 통일의 날'로 지정했다. 1990년 독일 재통일 이후에는 통일 기념일이 10월 3일로 변경되었다. 브란덴부르크 문 서쪽의 운터덴린덴 대로 연장선인 샬로텐부르크 차우세는 "6월 17일 거리(Straße des 17. Juni)"로 개명되었다.
국제 사회: 1953년 동독 봉기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해결책(Die Lösung)"을 비롯하여, 슈테판 하임의 소설 ''6월의 5일'', 하이너 뮐러의 희곡 ''볼로콜람스크 가도 III: 결투'' 등 여러 문학 작품에서 다뤄졌다. 서독 밴드 알파빌은 1984년 앨범 ''포에버 영''의 수록곡 "베를린의 여름"에서 "6월 17일"을 언급했다. 귄터 그라스의 희곡 ''플레베이들이 봉기를 연습하다(The Plebeians Rehearse the Uprising)''(1966)는 1953년 동독 봉기를 배경으로 한다.[38]
소련군의 무력 진압은 1956년의 헝가리 혁명, 1968년의 프라하의 봄 등에서 민중의 요구를 소련군이 무력으로 억압하는 선례가 되었다.[42]
5. 1. 동독
1952년 5월, 서독은 소련 지도자 요셉 스탈린이 제안한 스탈린 노트를 거부했다. 이 제안은 소련의 지원을 받는 동독과의 재통일을 독립적이고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독일로서 제안한 것이었다. 냉전의 고조된 불안 속에서 스탈린의 제안은 서독에서 강한 의심을 불러일으켰고, 그 대신 같은 달 유럽 방위 공동체 조약에 서명했다. 이러한 발전 이후 소련과 동독 모두 독일이 무기한으로 분단될 것이라는 점이 명확해졌다.[6] 동베를린에서 동독의 집권당인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SED)의 사무총장 발터 울브리히트는 스탈린의 독일 재통일 시도 실패를 "녹색 신호"로 해석하여 1952년 7월 제2차 당 대회에서 당이 발표한 "동독 내 사회주의의 가속화된 건설"을 진행했다. 동독을 소비에트화하려는 이러한 조치는 중공업에 할당된 투자의 급격한 증가, 마지막 남은 사기업에 대한 차별적인 과세, 농업의 강제 집단화, 그리고 동독 내 종교 활동에 대한 조직적인 캠페인으로 구성되었다.[6]동독의 경제 방향 변화의 결과는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의 급격한 악화였으며, 이는 1953년 상반기까지 계속되었고 1947년 기근 이후 동독인들의 생활 수준이 처음으로 분명하게 하락하는 추세를 보였다.[7] 관대한 국가 보조금이 삭감됨에 따라 여행 비용이 상승했고, 많은 소비재가 매장 선반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예산 제약으로 인해 임금 지출이 과도하게 높다고 판단되어 공장에서는 초과 근무를 억제해야 했다.[8] 한편, 국가의 집단화 정책 – 동독의 부유한 농민의 40%가 서쪽으로 도망쳐 750000ha 이상의 생산적인 토지가 휴경 상태로 남게 되었고 – 과 1952년의 흉작으로 인해 식량 가격이 상승했다.[9] 따라서 노동자들의 생활비는 상승했지만, 많은 노동자들 – 그중 많은 수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초과 근무 수당에 의존했던 사람들 – 의 실수령액은 감소했다. 1952년에서 1953년 겨울에는 동독 도시에 대한 난방과 전력 공급에도 심각한 차질이 발생했다. 1952년 11월까지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할레, 줄 등 여러 주요 동독 공업 중심지에서 산발적인 식량 폭동과 산업 불안이 발생했다. 산업 불안은 다음 봄까지 계속되었으며, 선동적인 연설과 반 SED 낙서에서부터 추정되는 사보타주까지 다양했다.[8] "사회주의 건설"로 인한 국가의 경제적 압박을 완화하기 위해 정치국은 모든 국영 공장에서 강제적으로 작업 할당량을 10% 증가시키기로 결정했다. 즉, 노동자들은 동일한 임금으로 10% 더 많은 생산량을 만들어야 했다.[10][11] 또한 식량, 의료, 대중교통 가격이 인상되었다. 작업 할당량과 가격 인상은 합쳐서 월급의 33% 삭감에 해당했다.[12]
울브리히트가 급격한 소비에트화의 결과에 대한 대응으로 동독인들의 허리띠를 졸라매게 했지만, 많은 동독인들은 ''레푸블리크플루흐트''로 알려진 현상처럼 동독을 떠나는 것으로 대응했다. 1951년에는 16만 명이 떠났고, 1952년에는 18만 2천 명이 떠났으며, 1953년 첫 4개월 동안 추가로 12만 2천 명의 동독인들이 이제 대부분 봉쇄된 국경에도 불구하고 서독으로 떠났다.[13]
1953년 3월 스탈린 사망 이후 설립된 소련의 새로운 집단 지도부는 4월 초 독일 내 소련 통제 위원회의 보고서를 받았을 때 이러한 당황스러운 통계에 충격을 받았다. 이 보고서는 동독의 경제 상황에 대한 자세하고 혹독한 설명을 제공했다.[14] 6월 2일까지 소련 지도부는 "동독의 정치 상황 개선을 위한 조치"에 관한 명령을 발표했는데, 이 명령에서 SED의 사회주의 가속 건설 정책을 전면적으로 비판했다. 모든 직업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동독에서 서독으로 대거 이탈하는 것은 "동독의 정치적 안정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했다.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이제 강제 집단화와 사기업에 대한 공격을 종식시킬 필요가 있었다. 5개년 계획은 이제 중공업을 희생하고 소비재를 위해 변경될 필요가 있었다. 정치 사법적 통제와 규제는 완화되어야 했고,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대한 강압적인 조치는 중단되어야 했다. 또한 울브리히트의 "냉혹한 권력 행사"도 비난받았다. 그러나 매우 인기가 없는 작업 할당량 증가를 철회하라는 명시적인 요구는 없었다. 소련의 법령은 6월 2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SED 지도자 발터 울브리히트와 오토 그로테볼에게 전달되었다. 소련 총리 게오르기 말렌코프는 동독에서 재앙을 피하려면 변화가 필수적이라고 경고했다.[15]
6월 9일, SED 정치국은 소련 지도부의 지시에 어떻게 대응할지 결정했다. 대부분의 정치국원들은 "새로운 노선"의 발표가 당과 일반 대중 내에서 신중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독일 소련 고등판무관 블라디미르 세묘노프는 즉시 시행할 것을 주장했다.[16] 따라서 SED는 6월 11일 SED의 공식 당 기관지인 ''노이에스 도이칠란트''에 새로운 노선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이 공보는 SED가 저지른 실수를 성실하게 비판했고 모스크바의 지시에 따라 울브리히트의 소비에트화 캠페인의 대부분이 이제 역전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제 소비재 투자로 전환될 것이고; 소규모 사기업에 대한 압력은 끝날 것이며; 강제 집단화는 중단될 것이며; 종교 활동에 대한 정책은 중단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작업 할당량 증가가 철회되지 않았다는 점으로, 노동자들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의 정당성에 대한 위협이 되었다. 부르주아와 농민이 프롤레타리아보다 새로운 노선에서 훨씬 더 많은 이익을 얻을 것이다. 공보와 과거 실수에 대한 솔직한 인정은 SED 회원과 일반 대중 모두를 포함한 많은 동독인들에게 충격과 혼란을 안겨주었습니다. 실망, 불신, 혼란이 지역 당 조직에 만연했고, 당원들은 공황 상태에 빠지고 배신감을 느꼈다. 일반 대중은 새로운 노선을 동독 정권의 약점으로 여겼다.[16]
다음 날인 6월 12일, 브란덴부르크 안 데어 하펠의 브란덴부르크-괴르덴 교도소 앞에서 5,000명이 시위에 참여했다.[17]
6월 15일, 동베를린의 스탈린 거리 "블록 40" 현장의 노동자들은 이제 작업 할당량 증가 취소에 대한 더 높은 기대를 가지고 동독 총리 오토 그로테볼에게 위임단을 파견하여 이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전달했다. 그로테볼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무시했다.[17]
동독의 인구 5만 명 이상 도시 24곳 모두에서 격변이 일어났으며, 인구 1만 명에서 5만 명 사이의 도시의 약 80%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베를린 외곽에서 열린 129건의 시위에는 약 33만 9천 명이 참여했고, 332개 공장에서는 22만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주요 시위 중심지는 할레(Halle) 주변의 공업 지대, 머제부르크(Merseburg), 비터펠트(Bitterfeld)뿐 아니라 예나(Jena), 괴를리츠(Görlitz),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와 같은 중소 도시들도 포함되었다. 라이프치히(Leipzig)에서는 2만 5천 명 이하가 파업과 시위에 참여했지만, 마그데부르크(Magdeburg)에서는 3만 2천 명, 드레스덴(Dresden)에서는 4만 3천 명, 포츠담(Potsdam)에서는 5만 3천 명, 그리고 할레에서는 거의 10만 명에 달했다.
초기에는 이러한 시위가 비교적 평화로웠지만, 참여자가 늘어나면서 점점 더 폭력적으로 변했다. 특히 사회주의통일당(SED) 소유 상점을 대상으로 한 약탈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방화 사건도 일부 있었으며, 많은 SED 간부들이 그날 늦게 구타를 당했다. 일부 도시에서는 시위대가 교도소를 점거하고 특정 정치범들의 석방을 요구했다.[24] 괴를리츠에서는 3만 명의 시위대가 공산당 본부, 비밀경찰 사무실, 교도소를 파괴했고, 마그데부르크에서는 당 본부와 교도소에 불이 붙었다.[25] 소련군이 베를린 외곽 지역에 개입했을 때, 그들은 더욱 신중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일부 소련 군인들은 시위대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21]
한편 시골 지역에서는 200개가 넘는 마을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많은 동독 농민들은 정권에 대해 집단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농촌 지역에서 가장 흔한 저항 방식은 농민들이 떠나거나 최근에 결성된 집단 농장을 해산하고 개인적으로 농사를 짓는 것이었다.[26]
시위대의 요구는 동독 정부 해산 및 자유 선거 실시와 같은 정치적인 것일 수도 있었지만, 종종 지역적이고 경제적인 성격을 띠기도 했다. 빵 부족, 인기 없는 야간 근무, 심지어 직장 내 화장실 개수, 녹슨 주전자에 차가 제공되는 것과 같은 문제들이었다.[27] 또한 기본 식품 및 기타 상품의 특별 배달과 같은 '불공정한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여겨지는 지식인들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이 표출되었다.[28]
다른 시위자들, 특히 노동자들은 사회민주당(SPD)의 동독 내 복원을 요구했다. 전 사회민주당원들 사이에서는 동독 SPD의 전 지도자였던 오토 그로테볼 총리에 대한 엄청난 적개심이 존재했다. 그들은 그가 1946년 경쟁 정당인 독일공산당과의 합병을 통해 집권당인 SED를 결성함으로써 "SPD를 배신했다"고 믿었다. 소련군사령부(SVAG)는 1945년 11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에서의 선거에서 공산당의 예상외로 저조한 성적을 보인 후 동독에서 공산주의 통치를 보호하기 위해 그로테볼에게 합병을 압력을 행사했다. 그로테볼은 총리직으로 "보상"받았지만, 몇 년 안에 SED는 그의 권력을 상당히 축소시켰고, 그 직책을 대부분 의례적인 역할로 만들었다. 많은 동독 사회민주당원들은 그로테볼을 배신자로 여기고 "목을 비틀어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29]
시위에는 나치 세력이 개입했지만, 주동자로 나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벽, 다리, 학교 칠판에는 나치 슬로건과 스와스티카가 낙서되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시위에서 나치 노래가 불리기도 했다. 상당수의 독일인들이 나치즘 사상을 여전히 고수했다.[30]
6월 17일 이후로 광범위한 시위와 데모가 수일간 계속되었고, 동독 보안기관에 따르면 상황은 6월 24일에야 진정되었다.[31] 도이체 벨레는 민간인 사망자 수가 55명이라고 주장한다. 소련군 동독 주둔군 사령관인 안드레이 그레치코가 작성한 기밀 해제 보고서에는 6월 18일까지 총 사상자 수가 209명이라고 주장한다. 최근 추산에 따르면 봉기가 끝날 무렵 사망자 수는 최소 125명이라고 한다.
많은 노동자들은 봉기 이후 파업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것에 혐오감을 느껴 동독의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인민경찰이 노동자들을 향해 총을 쏘았고, 노동자들이 동료를 향해 총을 쏘았다는 사실은 많은 수의 사회주의통일당(SED) 당원들이 탈당하게 만들었다. 지구인 라이프치히와 칼-마르크스-슈타트 전역에서 수백 명의 사회주의통일당 당원들, 그중 상당수가 수십 년간 노동 운동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탈당했다. 알텐베르크의 텍시마 공장에서는 7월 7일까지 450명의 사회주의통일당 당원들이 탈당했는데, 대부분이 노동자들이었고, 그중 많은 사람들이 노동 운동에 많은 경험이 있었다. 또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비를 납부하지 않으려는 광범위한 거부 현상이 나타났다. 그들은 더 이상 재정적으로 당을 지원하지 않았고, 당의 정통성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32]
7월 8일 정치국 회의가 열릴 무렵, 울브리히트의 당 지도자직이 끝을 향해 가는 것처럼 보였다. 국가보안부 장관 빌헬름 자이서(Wilhelm Zaisser)는 "사회주의의 가속화된 건설"과 그 참혹한 결과에 대해 전 정치국이 책임이 있다고 인정했지만, 울브리히트를 지도자로 남겨두는 것은 "새로운 과정에 있어 재앙적일 것으로 반대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회의가 끝날 무렵, 울브리히트의 계속되는 지도력을 지지한 정치국 위원은 자유독일청년단(Free German Youth) 연맹 책임자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와 당 통제 위원회 위원장 헤르만 마테른(Hermann Matern) 두 명뿐이었다. 울브리히트는 그달 말에 예정된 제15차 SED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성명을 발표하겠다는 약속으로 결정을 연기하는 데 성공했다.[33]
동베를린의 주요 소련 관리들 – 세묘노프, 파벨 유딘(Pavel Yudin), 바실리 소콜로프스키(Vasily Sokolovsky) –는 6월 17일부터 19일까지의 사건을 설명하고 분석한 보고서에서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데, 이 보고서는 2주 전인 6월 24일에 모스크바에 제출되었다. 동베를린 소련 위원회의 책임을 축소하고 봉기의 책임을 울브리히트에게 강조하려는 자기합리화적인 보고서에서 그들은 – ''기타''(inter alia) – SED 서기장으로서의 울브리히트의 지위를 종식시켜야 하며, 당은 집단 지도 체제로 나아가야 하고, 동베를린에서 다른 광범위한 구조적 정치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34] 그러나 모스크바의 상황은 이틀 후인 6월 26일 소련 보안국장 라브렌티 베리아(Lavrentiy Beria)가 체포되면서 극적으로 바뀌었다. 7월 2일, 동독 개혁안을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위원회가 회의를 열었을 때, 광범위하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변화는 보류하기로 결정되었다. 베리아 사건과 그 내부적 의미에 몰두한 소련 지도부는 동독의 상황을 뒤흔들 의향이 없어지고 현상 유지에 더욱 기울었다. 즉, 경험 많고 신뢰할 수 있지만 스탈린주의적이고 인기 없는 통치자를 지지함으로써 동독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7월 말, 모스크바의 계속된 지원에 대해 더욱 확신을 갖게 된 울브리히트는 주요 반대자들인 자이서, 헤른슈타트, 아커만을 정치국에서 축출하여 자신의 입지를 더욱 강화했다.[35]
8월 말까지 모스크바는 울브리히트가 지휘하는 기존 동독 정권을 지지하기로 약속했다. 그때쯤 동독의 상황은 모스크바와 동베를린이 시행한 새로운 경제 조치와 동독의 주요 정치 변화가 의제에서 제외됨으로써 안정되었다. 상당한 경제적, 재정적 지원이 동독으로 유입될 예정이었고, 배상금 지급은 연말까지 중단될 예정이었다. 추가적인 전쟁 포로가 석방될 것이며, 모스크바의 외교 사절단(Diplomatic mission)은 대사관의 지위로 격상될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울브리히트의 지위는 다시 확고하게 굳어졌다.[36]
5. 2. 서독
서독은 1952년 5월 소련의 요셉 스탈린이 제안한 스탈린 노트를 거부했다. 이 제안은 동독과의 재통일을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독일로 제안한 것이었다. 냉전의 긴장 속에서 스탈린의 제안은 서독에서 강한 의심을 샀고, 대신 유럽 방위 공동체 설립 조약에 서명했다. 이러한 상황은 독일 분단이 장기화될 것임을 보여주었다.[6]5. 3. 국제 사회
1953년 동독 봉기는 서독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었다. 1952년 5월, 소련의 지도자 요셉 스탈린은 스탈린 노트를 통해 동독과의 재통일을 제안했지만, 냉전 상황에서 서독은 이를 의심하며 거부하고 유럽 방위 공동체 조약에 서명했다. 이로써 독일 분단은 장기화될 것이 명확해졌다.[6]서독은 1953년 동독 봉기를 기념하여 6월 17일을 '독일 통일의 날'로 지정했고, 1990년 독일 통일 이후에는 10월 3일로 변경되었다. 브란덴부르크 문 서쪽의 운터덴린덴 대로 연장선인 샬로텐부르크 차우세는 "6월 17일 거리(Straße des 17. Juni)"로 개명되었다.
이 사건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해결책(Die Lösung)"을 비롯하여, 슈테판 하임의 소설 ''6월의 5일'', 하이너 뮐러의 희곡 ''볼로콜람스크 가도 III: 결투'' 등 여러 문학 작품에서 다뤄졌다.
서독 밴드 알파빌은 1984년 앨범 ''포에버 영''의 수록곡 "베를린의 여름"에서 "6월 17일"을 언급했다. 이 곡은 1988년 동독 발매 앨범 ''알파빌 아미가 편집 앨범(Alphaville Amiga Compilation)''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수록되지 못했다.
귄터 그라스의 희곡 ''플레베이들이 봉기를 연습하다(The Plebeians Rehearse the Uprising)''(1966)는 1953년 동독 봉기를 배경으로 셰익스피어의 ''코리올라누스(Coriolanus)'' 공연을 준비하는 브레히트의 모습을 그린다.[38]
6. 한국과의 관계
1953년 동독 봉기는 한국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이 사건은 냉전 시기 동독에서 발생한 반소, 반공 봉기로, 당시 한국 전쟁이 정전 협정으로 마무리되던 시점과 겹치지만, 두 사건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은 발견되지 않는다.
7. 평가
1953년 동독 봉기는 냉전 초기 동구권에서 발생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여러 가지 복합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봉기는 스탈린 사후 소련의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 발생했으며, 동독 주민들의 불만이 광범위하게 표출된 사건이었다.
이 봉기는 단순히 동독만의 문제가 아니라, 냉전 시기 동구권 전체의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이 사건은 훗날 1956년 헝가리 혁명 등 다른 동구권 국가들의 반소 봉기에 영향을 미치는 등 동구권 전체의 반소, 반공 정서에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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