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기 지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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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기 지하철은 1980년대 후반 서울의 인구 증가와 교통 체증 심화에 대응하기 위해 추진된 지하철 건설 계획이다. 1기 지하철만으로는 증가하는 교통량을 감당하기 어려워, 서울시는 5, 6, 7, 8, 9호선을 포함한 새로운 노선망 구축을 계획했다. 1989년 국토개발연구원의 용역 결과를 바탕으로 2, 3, 4호선 연장과 5, 6, 7, 8호선 건설이 결정되었으며, 1990년부터 5, 7, 8호선, 1993년 6호선 건설이 시작되었다. 1994년 서울특별시 도시철도공사가 설립되어 5, 6, 7, 8호선의 운영을 맡았으며, 1995년부터 2000년까지 5, 6, 7, 8호선이 순차적으로 완공되었다.
1기 지하철 건설 이후에도 서울은 계속 확장되었고, 교통난은 더욱 심해졌다. 특히 새로운 거대 택지에 많은 인구가 배치되면서 교통 상황이 악화되었다. 이에 서울시는 1988년 1월, 3호선, 4호선 이후 처음으로 5, 6, 7호선 신설과 3, 4호선 연장 계획을 포함하는 새로운 지하철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기본적으로 지선과 연장선을 놓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1]
1989년 서울시가 국토개발연구원에 발주한 용역 결과에 따라, 총 길이 약 204km에 달하는 새로운 노선망이 확정되었다. 이 노선망은 2호선, 3호선, 4호선 연장과 5호선, 6호선, 7호선, 8호선, 9호선을 포함했다. 2호선 연장은 군자기지 용량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해 신정기지 건설과 본선 연결이 주된 이유였고, 3호선과 4호선 연장은 개포 및 노원 일대에 지하철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5호선, 6호선, 7호선은 도심 관통 간선망으로, 8호선은 서울 동남부 연결 및 성남전철 실현을 위해 기획되었으며, 분당선과의 경합을 피하기 위해 성남 구시가를 관통하는 노선이 되었다.[2]
2. 논의의 전개
2. 1. 1기 지하철의 한계
1기 지하철은 1985년 3호선과 4호선의 완공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서울의 확장은 주택 2백만 가구 건설계획에 따라 지속되었고, 부족한 지하철 네트워크로 인하여 1기 지하철만으로는 서울 전체 통행량 가운데 16~20% 가량만을 처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주택 2백만 가구 건설계획에 따라 건설된 목동, 고덕, 노원, 수서지구 등지에 거대한 택지가 조성되어 새롭게 백만 명 이상의 인구가 배치되었지만, 1987~1991년 사이 진행된 6차 경제개발 시기에 도시철도에 투하되었던 정부 예산은 불과 768억원에 불과하였다.[1] 이는 이미 2조 원이 넘는 막대한 부채 위에서 운영되고 있었던 1기 지하철로 인한 재정압박이 재현될 것을 두려워한 정부가 신규 지하철 노선에 대한 자본 투자를 꺼리고 있었다는 점을 정확히 드러내 준다.
2. 2. 서울시의 초기 대응
1기 지하철은 1985년 3호선과 4호선의 완공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서울의 확장은 주택 200만 가구 건설 계획에 따라 계속되었고, 부족한 지하철 네트워크로 인해 1기 지하철만으로는 서울 전체 통행량의 16~20% 정도만 처리할 수 있었다. 목동, 고덕, 노원, 수서지구 등지에 거대한 택지가 조성되어 100만 명 이상의 인구가 새로 배치되었지만, 1987~1991년 사이의 6차 경제개발 시기에 도시철도에 투입된 정부 예산은 768억 원에 불과했다.[1]
교통 상황이 계속 악화되는 상황에서 서울시는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1988년 1월, 서울시는 3, 4호선 이후 최초의 지하철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5호선, 6호선, 7호선의 신설 및 3호선·4호선을 각각 성남시와 군포시 소재의 금정역까지 연장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했다. 1단계 사업에서 5호선 영등포~화곡동~김포공항 및 6호선 왕십리~군자동~천호동을 1990년부터 건설해 1994년에 완공하고, 7호선은 잠실~둔촌동~고덕동을 잇는 노선으로 하여 앞선 두 개의 연장선과 함께 1999년에 완공한다는 계획이었다. 그해 8월, 서울시는 새롭게 지방세로 전환되는 담배소비세를 이용하여 지하철 건설 자금을 마련하고, 1989년부터 공사를 시작할 것이라고 발표를 수정하였다.
3. 노선망의 확정
한편, 2기 지하철은 교외 전철과의 직결 운행을 고려하지 않고 계획되었다. 이는 교직류 양용차량에 대한 투자 비용과 토목 및 건축 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것이었다. 2기 지하철 차량의 높이는 4750mm였던 반면, 서울메트로 차량의 높이는 4900mm에서 5000mm였다.[2]
3. 1. 초기 계획의 문제점
기존 지하철 네트워크에 지선을 추가하는 방식은 지하철 사각지대에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지하철을 건설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는 서울의 통행 특성을 면밀히 분석하지 않고 고속 간선망을 설계한 것이었다. 이미 1기 지하철만으로도 출퇴근 시간대에 매우 높은 혼잡도를 보이고 있었는데, 2기 지하철에서 들어오는 인파까지 더해지면 혼잡도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었다. 더 많은 통행을 지하철로 처리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간선망이 필요했고, 그 간선망은 도심을 관통해야 했다. 서울에서 직장과 주거지가 분리되는 현상은 매우 일반적이었고, 통근 및 업무 통행은 도심과 1980년대 후반부터 강남으로 집중되기 시작하였다. 이들 지역으로 진입하는 1기 지하철의 통행량을 분담하기 위해서라도 간선망은 도심이나 강남을 통과해야 했다. 물론 지하철 사각지대에 대한 고려 역시 2기 지하철 노선 계획에서 빠질 수 없었다. 굴곡 노선이나 짧은 역간 거리가 2기 지하철에서 상대적으로 많이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2]
3. 2. 새로운 노선망의 필요성
기존 네트워크에 지선을 추가하는 방식의 초기 계획은 지하철 사각지대에 적은 비용으로 지하철을 건설할 수 있게 해 주었지만, 서울의 통행 특성을 면밀히 분석하지 않은 고속 간선망 설계였다. 이미 1기 지하철만으로도 출퇴근 시간대에 매우 높은 혼잡도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2기 지하철에서 추가되는 인파까지 더해지면 혼잡도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었다. 더 많은 통행을 지하철로 처리하고, 총 여객 수송량의 50%를 목표로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간선망이 필요했으며, 이 간선망은 도심을 관통해야만 했다.[2]
서울에서 직주분리는 일반적인 현상이었고, 통근 및 업무 통행은 도심과 1980년대 후반부터 강남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이들 지역으로 진입하는 1기 지하철의 통행량을 분담하기 위해서라도 간선망은 도심이나 강남을 통과해야 했다. 물론, 이미 간선망이 어느 정도 이뤄진 시점에서 2기 지하철 노선 계획에는 지하철 사각지대에 대한 고려도 포함되어야 했다. 굴곡 노선이나 짧은 역간 거리가 2기 지하철에서 상대적으로 많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2]
1989년 서울시가 국토개발연구원에 발주한 용역에서는 2, 3, 4호선 연장과 5, 6, 7, 8, 9호선의 총 길이 약 204km의 노선을 개설해야 한다고 논의되었다. 2호선 연장은 군자기지의 용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신정기지 건설과 본선 연결이 주된 이유였고, 3, 4호선 연장은 입주가 진행되었으나 지하철이 없어 교통난을 겪고 있던 개포 및 노원 일대에 지하철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도심 관통 간선망으로 기획된 것은 5, 6, 7호선이었으며, 8호선은 서울 동남부 연결 및 광주대단지 계획 당시부터 구상되어 1971년 8월에 있었던 수도권 전철망 구성 계획에도 포함되어 있던 성남전철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만 이 노선은 분당선과의 경합을 피하기 위해 성남 구시가를 두루 관통하는 노선이 되었다.[2]
3. 3. 국토개발연구원의 용역 결과
1989년 서울시는 국토개발연구원에 용역을 발주하여 새로운 지하철 노선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은 2, 3, 4호선 연장과 5, 6, 7, 8, 9호선 신설을 포함하여 총 길이 약 204Km에 달하는 대규모 노선망이었다.
2호선 연장은 군자기지의 용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정기지 건설과 본선 연결을 목적으로 하였다. 3·4호선 연장은 지하철이 없어 교통난을 겪던 개포 및 노원 지역에 지하철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5, 6, 7호선은 도심을 관통하는 간선망으로 기획되었으며, 8호선은 서울 동남부 연결 및 광주대단지 계획 당시부터 구상되어 1971년 8월 수도권 전철망 구성 계획에도 포함되었던 성남전철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만, 8호선은 분당선과의 경합을 피하기 위해 성남 구시가지를 두루 관통하는 노선으로 변경되었다.
한편, 2기 지하철은 교외 전철과의 직결 운행을 고려하지 않고 계획되었다. 이는 교직류 양용차량에 대한 투자 비용과 토목 및 건축 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2기 지하철 차량의 높이는 4750mm인 반면, 서울메트로 차량의 높이는 4900mm에서 5000mm인 경우가 있었다.[2]
4. 2, 3, 4호선 연장
1기 지하철 노선의 연장선 및 지선은 이미 이전의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사업 진행이 빠른 편이었다. 1989년부터 이들 사업이 진행되었다.
1989년 12월 2, 3, 4호선 연장구간 공사가 착공되었다. 과천선 또한 같은 시기에 착공되었으나 철도청이 전담하였고 시외 구간이므로 2기 지하철에 포함하지 않는다.
4. 1. 3호선 연장선 (양재 - 수서)

3호선 연장선은 1986년 건설고시가 되었으나 보류되었다. 그러나 개포, 대치, 수서지구의 입주로 인한 교통량 처리, 본선의 운행 밀도 증가, 노선 연장 및 일산선으로 인한 지축기지 용량 부족으로 수서기지에 대한 연락선 확보를 위해 사업이 추진되었다.
당초 노선은 양재~개포~수서였다. 그러나 대치동 주민의 집단 민원으로 양재~대치~탄천변~수서로 노선이 1차 변경되었다. 이후 개포동 주민의 집단 민원으로 1989년 9월 대치동에서 남하, 개포동을 통과(대청역)하고 수서지구를 지나(일원역) 수서로 가는 노선이 최종 확정되었다.
1993년 10월에 개통되었고, 동시에 수서기지도 가동을 시작하였다. 이미 개발이 근린주구 형태로 진행되었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후 인구 분포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으며, 주거지역이 대부분의 토지 이용 형태이므로 승객 밀도는 3호선 전체 평균 이하다. 분당선 개통부터 연장선 개통 시기까지는 분당선 승객이 갈아탈 수 있는 8호선 외의 유일한 노선이었기 때문에, 말단의 굴곡이 부각되기도 하였다.
4. 2. 4호선 연장선 (상계 - 당고개)
이 노선은 4호선을 상계동 동부로 연장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이 지역은 상계역, 노원역 등지의 고층 고밀도 근린주구 개발 형태와는 달리 저층 고밀도 개발이 전개된 지역으로, 지역 주민의 경제력 차이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형 여건상 도로의 기능 발휘에 한계가 있었으므로, 대용량 대중교통 공급이 이루어져야만 했다. 부지는 하천부지를 점용하였고, 그 위에 고가철도를 건설하였다.1993년 4월에 개통되었고, 회차를 위하여 인입선이 개설되었다. 부지 여건상 회차선 개설을 위해 수락산에 터널을 시공하였다.

5. 5, 6, 7, 8호선 건설
1990년대 초, 2기 지하철 5호선, 6호선, 7호선, 8호선 건설이 시작되었다. 1990년 6월 27일 5호선 착공을 시작으로, 같은 해 12월 28일 7호선, 12월 29일 8호선이 착공되었고, 1993년 11월 6호선이 착공되었다.[1]
5호선 개통을 앞두고, 서울특별시는 운영 주체에 대한 논의 끝에 기존 서울 지하철 공사와는 별개로 서울특별시 도시철도공사를 1994년 3월에 설립했다. 이는 서울 지하철 공사의 방만 경영에 대한 지적과 시민 여론 등을 반영한 결과였다.[3]
1997년 외환 위기로 인해 2기 지하철 공사가 지연되기도 했으나, 김대중 정부와 국민들의 노력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1999년 7월 2일 8호선, 2000년 8월 1일 7호선, 2000년 12월 15일 6호선이 차례로 완전 개통되며 2기 지하철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5. 1. 착공
1990년 6월 27일 5호선 착공을 시작으로, 같은 해 12월 28일 7호선, 12월 29일 8호선이 착공되었고, 1993년 11월 6호선이 착공되었다.[1]5. 2. 서울특별시 도시철도공사의 설립
5호선 개통이 임박했을 때, 당시 서울특별시에서는 5호선 운영을 누가 맡을 것인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당시 서울 지하철 공사는 방만 경영을 했다는 지적이 나오곤 하였다. 따라서 시민 여론 조사, 공청회, 서울대학교 경영연구소의 용역 결과 등을 토대로 1993년 11월 기존 지하철 공사와는 별도의 독립된 공사를 설립하기로 하였다.[3]이에 따라 1994년 3월 서울특별시 도시철도공사가 설립되었다. 서울특별시 도시철도공사의 설립 목적은 “도시교통의 발전과 안전하고 신속한 대중교통 수단”이라고 명시되어 있다.[3]
5. 3. 완공
1997년 여름 태국,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된 외환 위기는 대한민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대한민국 정부는 국제 통화 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지원받아야 했다. 이로 인해 3기 지하철 계획 중 9호선과 3호선 오금 연장 사업만 남고, 10, 11, 12호선은 취소되어 경전철, 신안산선, 신분당선 등으로 대체되었다. 2기 지하철 공사 역시 지연되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와 국민들의 노력으로 외환 위기를 극복하면서 1999년 7월 2일 8호선이, 2000년 8월 1일 7호선이, 2000년 12월 15일 6호선이 차례로 완전 개통되면서 2기 지하철 공사가 마무리되었다.참조
[1]
서적
한국의 교통정책
한국교통개발연구원(KOTI)
2003
[2]
웹사이트
서울특별시 도시철도공사의 차량 제원
http://smrt.co.kr/sm[...]
2007-09-30
[3]
웹사이트
설립목적 및 배경
http://www.smrt.co.k[...]
2010-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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