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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e1915 쇼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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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Mle1915 쇼샤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군이 사용한 경기관총이다. 1903년 설계가 시작되어 1915년 채택되었으며, 롱 리코일 작동 방식과 8mm 르벨 탄약을 사용했다. 생산성이 높고 가벼웠지만, 탄창 구조 문제, 과열, 조준기 문제 등으로 인해 신뢰성이 낮았다. 프랑스군은 물론 미국, 벨기에, 폴란드 등 여러 국가에서 사용되었으며, 1920년대 FM mle1924/29 경기관총으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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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e1915 쇼샤
기본 정보
쇼샤
종류자동 소총/경기관총
원산지프랑스
사용 국가사용자 참조
사용 기간1915–1948
참전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그리스-터키 전쟁
리프 전쟁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설계자루이 쇼샤 및 샤를 쉬테르
설계 시기1907년
제작사글래디에이터
SIDARME
생산 기간1915–1922
생산 수량약 262,000정
파생형쇼샤 Mle 1918 (미국)
Wz 15/27 (폴란드)
FM 15/27 (벨기에)
무게9.07kg
길이1143mm
총열 길이470mm
발사 속도분당 240발
탄속630m/s
유효 사거리200m
최대 사거리2000m
급탄 방식20발 반원형 탄창 (보통 16–19발만 장전); 20발 곡선형 상자 탄창 (벨기에 버전)
조준 장치가늠쇠
제원
구경8mm
사용 탄약8×50mmR 르벨
.30-06 스프링필드
7.92×57mm 마우저
7.65×53mm 마우저
6.5×54mm 그리스
작동 방식긴 반동과 가스 보조

2. 역사

쇼샤 Mle1915의 설계는 1903년 퓌토 조병창(APX)에서 시작되었으며, 롱 리코일 작동 방식을 기반으로 한다.[5]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14년, 프랑스군은 운용 중인 경기관총이 없어 보병 부대의 화력 증강이 시급한 과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제프 조프르 장군의 주도로, 이미 시제품 단계에 있었고 제식 탄약인 8mm 르벨을 사용하며 대량 생산이 용이할 것으로 판단된 쇼샤 기관총의 채택이 결정되었다.[17] 이 무기는 평시 산업 공장을 개조하여 대량 생산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정식 명칭은 개발 및 생산에 참여한 쇼샤, 쉬터, 리베이롤, 글래디에이터의 머리글자를 딴 CSRG였다.[6] 주요 생산은 평시 자동차 및 자전거 제조업체였던 글래디에이터사와 이후 포르즈 에 아시에리 드 라 마린 에 도메쿠르(Compagnie des forges et aciéries de la Marine et d'Homécourt)의 자회사인 SIDARME에서 담당했다.

설계자인 루이 쇼샤 대령은 한 명의 병사가 운반, 장전, 사격을 모두 수행할 수 있는 경량 자동 화기를 목표로 했고, 이에 따라 정식 명칭에도 기관총(Mitrailleuse)이 아닌 자동 소총(Fusil-Mitrailleur, FM)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45] 쇼샤는 동급 자동 화기 중 가벼운 편에 속해 돌격 사격에 유리하다는 장점이 있었으나[47], 생산성 향상을 위해 부품 공차를 너무 크게 잡고 저품질의 재료를 사용하는 등의 문제와 설계상의 결함으로 인해 전선에서는 잦은 고장을 일으켰고, 결과적으로 매우 평가가 낮은 기관총으로 남게 되었다.[47][46]

2. 1. 개발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의 프랑스군은 공격 전술에서 보병 개인의 화력보다는 돌격의 규모를 더 중시했다. 이 때문에 고가인 기관총이나 자동 소총과 같은 무기를 배치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개전 초기에 큰 패배를 겪으면서 기존의 전술을 즉시 재검토하게 되었다.[47] 이러한 상황에서 생산성이 높고 가벼운 신형 자동 화기가 시급히 요구되었고, 전시 상황에서 시간적 여유가 제한되어 개발은 매우 빠르게 진행되어야 했다.[48]

쇼샤 기관총의 설계는 19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롱 리코일 작동 방식은 존 브라우닝이 설계한 1906년형 레밍턴 모델 8 반자동 소총에 기반을 둔다.[5] 이 프로젝트는 파리 근처의 프랑스 육군 무기 연구 시설인 퓌토 조병창(APX)에서 1903년에서 1910년 사이에 시작되었다.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졸업한 루이 쇼샤 대령이 처음부터 개발을 이끌었고, 수석 병기 기술자 샤를 쉬터가 보좌했다. 개발 목표는 단 한 사람이 운용할 수 있는 매우 가볍고 휴대 가능한 자동 무기를 만드는 것이었으며,[6] 8mm 르벨 제식 탄약을 사용하도록 설계되었다. 1903년에서 1909년 사이에 8개 이상의 시제품이 시험되었고, 그 결과 1911년 8mm 르벨 CS (쇼샤-쉬터) 기관총 100정이 주문되어 1913년에서 1914년 사이에 생테티엔 조병창(MAS)에서 제조되었다. 이 CS 기관총은 가벼웠기 때문에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 프랑스 군용 항공기의 관측 요원을 무장시키는 데 임시로 사용되기도 했다.[17] 현재 프라하 박물관에 CS 기관총 단 한 정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7]

루이 쇼샤(1900년, 당시 대위)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군은 소모된 장비를 보충하기 위해 각종 장비를 대량으로 조달해야 했다. 자동 화기 역시 부족한 장비 중 하나였는데, 당시 표준적으로 배치되어 있던 호치키스 Mle1914 중기관총은 가격이 비싸 충분히 조달하기 어려웠다. 또한 무게가 무거워 이동하는 부대를 따라다니며 지원하기 어렵다는 운용상의 문제도 있었다.[48]

조제프 조프르 장군의 격려 아래, 프랑스군은 쇼샤 기관총의 채택을 결정했다. 이미 시제품 단계의 CS 기관총이 존재했고, 철저한 테스트를 거쳤으며, 제식 탄약인 8mm 르벨을 사용하도록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17] 또한 예상되는 낮은 제조 비용과 상대적인 단순성 덕분에, 평시 산업 공장을 개조하여 대량 생산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쇼샤 대령이 구상했던 개념은 한 명의 병사가 운반, 장전, 사격을 모두 수행할 수 있는 경량 자동 화기였으며, 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정식 명칭에도 기관총(Mitrailleuse)이 아닌 자동 소총(Fusil-Mitrailleur, FM)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45]

조속한 대량 조달을 위해 프레스 가공을 도입하는 등 설계가 대폭 간소화되었고, 일반적인 공장 설비로도 생산할 수 있도록 부품의 공차에 여유를 두는 등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47] 덕분에 당시 널리 사용되던 루이스 경기관총보다 2kg에서 3kg 정도 가벼워, 동급 자동 화기 중에서는 매우 가벼운 편에 속했으며[46], 돌격 사격에도 적합했다.[47]

1915년에 채택된 이 기관총의 정식 명칭은 CSRG였는데, 이는 설계 및 생산에 관여한 인물과 회사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쇼샤(Chauchat), 쉬터(Sutter), 리베이롤(Ribeyrolles), 글래디에이터(Gladiator).[6] 폴 리베이롤은 파리 북부 교외 프레-생-제르베에 위치한 평시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 제조업체인 글래디에이터(Gladiator) 회사의 사장이었다. 글래디에이터 공장은 1915년 무기 제조업체로 개조되어 쇼샤 기관총의 주요 생산 기지가 되었다. 이후 1918년에는 콤파니 데 포르즈 에 아시에리 드 라 마린 에 도메쿠르(Compagnie des forges et acieries de la marine et d'Homecourt)의 자회사인 SIDARME(생샤몽 소재)도 CSRG의 대량 생산에 참여했다.

그러나 생산성을 지나치게 우선시하고 부품 공차를 너무 크게 잡은 점, 낮은 품질의 금속 사용, 설계상의 결함 등으로 인해 전선에서는 고장이 잦았고, 결과적으로 매우 평가가 낮은 기관총으로 알려지게 되었다.[47][46]

2. 2. 초기 개발 과정

쇼샤 Mle1915의 설계는 1903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파리 근교의 프랑스 육군 무기 연구 시설인 퓌토 조병창(APX)에서 1910년 사이에 시작되었다.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한 사람이 운용할 수 있는 매우 가볍고 휴대 가능한 자동 무기를 개발하는 것이었으며,[6] 프랑스군의 제식 탄약인 8mm 르벨을 사용하도록 설계되었다. 개발은 에콜 폴리테크니크 출신의 루이 쇼샤 대령이 주도했고, 수석 병기 기술자 샤를 쉬터가 보좌했다.[49] 작동 방식은 롱 리코일 방식을 채택했는데, 이는 존 브라우닝이 설계한 1906년형 레밍턴 모델 8 반자동 소총에 기반한 것이다. 헝가리 발명가 루돌프 프롬머의 1910년 설계(프롬머 스톱 권총)를 기반으로 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5] 1903년부터 1909년까지 APX에서 8개 이상의 시제품이 시험되었다.

이러한 개발 과정을 거쳐 1911년, 'CS'(쇼샤-쉬터)라는 명칭의 8mm 르벨 기관총(퓌토제 CS형 자동 소총 C7) 100정이 소량 주문되어 1913년부터 1914년 사이에 생테티엔 조병창(MAS)에서 제조되었다. 이 초기 모델은 군 성능 시험에서 파손이 잦아 정식 채용에는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가벼운 무게 덕분에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프랑스 군용기의 관측수 무장으로 임시 사용되기도 했다.[17] 현재 프라하 박물관에 CS 기관총 한 정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7] 1911년형 모델은 이후 Mle1915의 특징이 되는 반원형 탄창을 이미 채용하고 있었으나, 초기에는 탄창을 위에서부터 장전하는 방식이었다.

1913년에 설계된 개량 모델은 같은 해 1월 시험에서 비교적 양호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여전히 탄창의 변형과 파손 문제가 보고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 무기를 주로 요새 수비대가 사용할 것으로 예상했고 야전 투입은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에, 탄창 결함은 큰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1913년 2월, 부대 시험 운용을 위해 100정이 추가로 계약되었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프랑스군은 아직 제대로 된 경기관총을 운용하지 않고 있었다. 전쟁 초기의 경험을 통해 보병 부대의 화력을 증강시킬 수 있는 경기관총이 현대전에 필수적이라는 점이 명확해졌다. 조제프 조프르 총사령관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쇼샤 기관총의 채택이 결정되었다. 이미 전시 이전에 CS 기관총이 개발되어 테스트를 거쳤고, 제식 탄약인 8mm 르벨을 사용하며, 비교적 제조 비용이 저렴하고 구조가 단순하다는 점이 채택의 주요 이유였다.[17] 1915년 4월, 1913년형 자동 소총의 실전 테스트를 거친 후, 조프르 장군은 보병용 자동 소총 50,000정을 새로 조달하기로 최종 결정했다.[50] 이 신형 보병용 자동 소총은 1913년형을 기반으로 개량되었으며, CSRG라는 제식 명칭을 받았다. CSRG는 개발 및 생산에 참여한 주요 인물과 회사의 머리글자(쇼샤, 쉬터, 리베이롤, 글래디에이터)를 딴 것이다.[6] 폴 리베이롤은 당시 자전거 및 자동차 제조업체였던 글래디에이터사의 사장이었으며, 그의 공장은 쇼샤 기관총의 주요 생산 시설로 전환되었다. 참고로, 1913년형 자동 소총 중 일부는 육군 항공대에서 항공 기관총으로 사용되다가 1916년 후반 루이스 경기관총으로 대체되었다.

3. 설계

쇼샤 기관총의 설계는 퓌토 조병창(Atelier de Puteaux) 소속 기술자인 루이 쇼샤와 샤를 슈터가 주도했다[49]. 이들은 글래디에이터사의 사장 폴 리베이롤스와 함께 1903년부터 1910년까지 헝가리 총기 기술자 루돌프 프로머가 개발한 작동 기구를 기반으로 자동 소총 설계를 진행했다[47].

초기 시제품 개발 과정에서 1911년 설계된 '퓌토제 CS형 자동 소총 C7'은 군 시험에서 파손 문제가 발생하여 채용되지 못했다. 1913년 모델은 성능 시험에서 비교적 양호한 결과를 얻었으나, 탄창 변형 및 파손 문제가 지적되었다. 당시에는 요새 수비대용으로만 고려되어 야전 투입이 상정되지 않았기에 탄창 문제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고, 1914년 2월 부대 시험 운용을 위해 100정이 계약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상황이 급변했고, 프랑스군은 초전의 패배 이후 새로운 전술과 무기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1915년 4월, 실전 테스트를 거친 후 육군 총사령관 조제프 조프르 장군은 보병 분대 지원용으로 자동 소총 50,000정의 신규 조달을 결정했다[50]. (일부 1913년형 모델은 항공 기관총으로 잠시 사용되기도 했다.)

새로운 보병용 자동 소총은 1913년형을 기반으로 대량 생산에 적합하도록 개량되었다.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부품 설계가 대폭 간소화되었고, 본체는 프레스 가공으로 제작되었다. 부품 결합 역시 설비가 부족한 공장에서도 조립이 가능하도록 리벳 고정이나 간단한 용접 방식을 사용했다. 기관부 등 핵심 부품을 제외하고는 저렴하고 품질이 낮은 금속 재료가 사용되었으며, 부품 간 공차도 크게 허용되었다[47]. 이러한 설계 및 생산 방식은 신속하고 저렴한 대량 생산에는 유리했지만, 총기의 전반적인 내구성과 신뢰성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글래디에이터 공장에서 생산된 초기 모델의 경우 조준기 정렬 불량과 같은 문제가 보고되기도 했다.

쇼샤 기관총은 롱 리코일(긴 총열 반동) 방식에 가스 보조 시스템을 결합하여 작동하며, 8mm 르벨 탄약을 사용한다. 선택 발사 기능이 있어 반자동 및 자동 사격이 가능했다. 무게는 9kg으로, 당시 다른 경기관총들(예: 12kg의 호치키스 M1909 베네-메르시에 기관총, 13kg의 루이스 기관총)보다 가벼워 휴대성이 높았다. 자세한 작동 방식과 구조적 특징은 하위 문단에서 설명한다.

1916년부터 1918년 말까지 총 262,300정의 쇼샤 기관총이 생산되었다. 주요 생산처는 글래디에이터 공장(8mm 르벨탄용 225,700정, 미국 .30-06 스프링필드 탄약용 19,000정)과 SIDARME(8mm 르벨탄용 18,600정)였다[6]. 일반적으로 SIDARME에서 제작된 총기가 글래디에이터 생산품보다 마감 상태나 작동성이 더 우수했다는 평가가 있다. 프랑스군은 휴전 직전에 63,000정의 CSRG를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군은 쇼샤의 성능이 신뢰성 높은 중형 호치키스 M1914 기관총에 비해 떨어진다고 평가했지만, 쇼샤는 훨씬 가볍고 휴대가 용이하며 대량 보급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쇼샤는 정적인 방어 임무보다는 돌격하는 보병 분대의 화력을 증강시키는 휴대용 자동화기로 운용되었으며, 특히 총기 멜빵을 이용해 행진 사격이 용이하다는 점이 장점으로 꼽혔다[17].

CSRG 1915 쇼샤는 프랑스군이 개선된 ''Balle N'' 8mm 르벨 탄약으로 전환하기 전인 1932년까지 표준이었던 ''Balle D'' 8mm 탄약으로 작동하도록 설계되었다. 쇼샤는 퇴역하면서 ''Balle N''으로 개조되지 않았으며, 그 결과 ''Balle N'' 탄약으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쇼샤 1915에서는 ''Balle D'' 8mm 탄약만 사용해야 한다. 다른 탄약을 식별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Balle D'' 탄환은 황동색인 반면 ''Balle N''은 반짝이는 은색이라는 것이다.

3. 1. 작동 방식

쇼샤 기관총의 노리쇠


쇼샤 기관총은 존 브라우닝이 설계한 레밍턴 M8 반자동 소총에 채용된 롱 리코일(긴 총열 반동 원리) 방식을 기반으로 하며, 가스 보조 방식을 사용했다. 이 설계는 퓌토 조병창의 기술자인 루이 쇼샤와 샤를 슈터가 주도했으며[49], 1903년부터 1910년 사이에 헝가리 총기 기술자 루돌프 프로머가 개발한 작동 기구를 조합하여 발전시킨 것이다.[47]

사격은 오픈 볼트 상태에서 이루어지며, 선택 발사 기능을 통해 반자동 또는 자동으로 사격할 수 있다. 발사 모드 선택 레버는 권총 손잡이 상부 좌측면에 위치한다. 프랑스군에 납품된 모델(CSRG)은 8mm 르벨 탄약을 사용하여 분당 240발의 비교적 느린 속도로 발사되었다. 총열은 당시 주력 소총이던 르벨 소총의 것을 가공하여 사용했으며, 전용 총열 생산은 1917년에야 시작되었다.[51] 총구에는 나팔 모양의 소염기가 부착되어 있다.

3. 2. 구조적 특징



쇼샤 기관총은 긴 총열 반동 원리에 따라 작동하며 가스 보조 방식을 사용하는 자동화기이다. 프랑스군에 납품된 CSRG 모델은 8mm 르벨 탄약을 분당 240발의 비교적 느린 속도로 발사했다. 사격 방식은 오픈 볼트 상태에서 이루어지며, 반자동 사격과 자동 사격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 발사 기능이 있었다. 선택 레버는 권총 손잡이 상부의 좌측면에 위치했다.

무게는 9kg으로, 당시 다른 휴대용 경기관총이었던 12kg의 호치키스 M1909 베네-메르시에 기관총이나 13kg의 루이스 기관총보다 상당히 가벼웠다.

쇼샤의 구조는 다양한 품질의 부품이 혼합되어 설계되었다. 일부 부품은 새롭고 정밀하게 제작되었지만, 다른 부품은 기존 설계에서 가져오거나 품질이 낮은 재료와 방식으로 만들어져 전체적인 신뢰성에 영향을 미쳤다.

  • 정밀 부품: 반동 총열 슬리브와 모든 노리쇠 이동 부품은 단단한 강철을 정밀하게 밀링 가공하여 제작되었으며, 부품 간 호환성이 우수했다.
  • 총열: 총열은 당시 프랑스군의 주력 소총이었던 르벨 소총의 총열을 총구 쪽에서 짧게 잘라 사용했다. 전용 총신은 1917년까지 생산되지 않았다[51].
  • 방열기: 총열 주위에는 냉각을 위해 골이 파인 주철 알루미늄 방열기가 부착되었다.
  • 리시버 및 총몸: 외부 약실 하우징(상부 리시버)은 단순한 튜브 형태였으며, 뒤쪽으로 튀어나와 있다. 하부 리시버(기관부)는 상자형이며, 상부 리시버와는 전후 2개의 핀으로 결합된다. 총몸의 나머지 부분은 품질이 떨어지는 금속판을 스탬프 가공하여 제작되었다.
  • 측면 판: 측면 판 어셈블리는 나사로 고정되었는데, 이 나사는 장기간 사격 시 진동으로 인해 느슨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 조준기: 글래디에이터 공장에서 생산된 총기의 경우 조준기가 제대로 정렬되지 않은 경우가 많아 사수가 직접 수정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 탄창: 탈착식 탄창은 강한 테이퍼각과 돌출된 림을 가진 8mm 르벨 탄약을 한 줄로 수납하기 위해 독특한 반원형 모양을 가졌다. 장탄수는 20발이었다.
  • 총구: 총구에는 나팔 모양의 소염기가 부착되어 있었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설계 단계에서부터 부품이 대폭 간략화되었다. 본체는 프레스 가공으로 성형되었고, 부품 결합에는 리벳이나 간단한 용접 방식이 사용되었다. 이는 설비가 부족한 공장에서도 조립이 가능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사용된 금속 재료 역시 기관부 등 핵심 부품을 제외하고는 저렴하고 품질이 낮은 것이었으며, 부품의 공차도 크게 허용되었다[47]. 이러한 설계 및 생산 방식은 대량 생산에는 유리했지만, 총기의 내구성과 신뢰성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3. 3. 탄창

탈착식 탄창은 강하게 테이퍼져 있고 림이 튀어나온 8mm 르벨탄 탄약을 한 줄로 수납하기 위해 반원형이며, 장탄수는 20발이다.[51]

쇼샤 경기관총의 반원형 탄창


쇼샤 경기관총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탄창의 구조였다.[45] 스프링의 힘이 약해 탄약 재장전 불량이 자주 발생했으며, 이 때문에 사수들은 20발을 모두 채우지 않고 18~19발 정도만 장전하여 사격하는 경우가 많았다.[45] 또한, 탄창 우측면은 남은 탄약 수를 쉽게 확인하도록 크게 뚫려 있었는데, 이 구멍으로 참호의 흙이나 물이 쉽게 들어가 작동 불량의 원인이 되었다.[45] 탄창 자체의 재질도 얇고 약해서 쉽게 휘거나 부서졌다.[45] 쇼샤 경기관총에서 발생한 문제의 대부분은 이처럼 탄창 구조 결함으로 인한 급탄 불량이나 탄 걸림이었다.[45] 나중에 흙 유입을 막기 위해 캔버스 재질의 탄창 덮개가 지급되기도 했으나, 근본적인 문제 해결책이 되지는 못했고 탄창 설계 자체는 끝까지 개선되지 않았다.[45]

4. 운용

미국 군인들이 1919년 캠프 커스터 훈련소에서 행진 사격을 연습하고 있다.


Mle1915 쇼샤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군의 주력 경기관총으로 개발되어 널리 사용되었으며, 미국 원정군, 벨기에군 등 여러 연합국과 기타 국가에서도 운용되었다. 설계자인 루이 쇼샤 대령(Louis Chauchat)은 한 명의 병사가 운반하고 사격할 수 있는 경량 자동화기를 구상했으며, 이는 정체된 참호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새로운 전술, 즉 돌격 사격(Marching fire) 개념과 맞물려 개발되었다.[45][47] 쇼샤는 병사가 무인지대를 가로질러 이동하면서도 지속적인 화력을 제공하여 적의 방어선을 제압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51]

그러나 실제 전장에서 쇼샤의 성능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렸다. 특히 초기 모델의 개방된 반달형 탄창은 참호의 진흙이나 이물질에 취약하여 잦은 작동 불량을 일으키는 주된 원인이었으며,[47][46] 연속 사격 시 과열 문제도 지적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탄창 개량 시도[18]나 운용 방식 개선 등의 노력이 이루어졌다.

쇼샤의 도입은 당시 보병 전술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프랑스군은 쇼샤를 중심으로 소총 수류탄(VB 소총 수류탄) 발사기 등을 통합하여 보병 분대의 화력을 크게 증강시켰다. 초기 2인조였던 기관총 팀은 탄약수를 보강하여 3~4명으로 확대되었고,[47] 이는 현대적인 분대 지원 화기 운용 개념의 기초가 되었다. 쇼샤 사수는 분대의 화력 핵심으로서 진격 시 선두에서 이동 사격을 가하며 적의 저항 거점을 제압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많은 쇼샤 사수들이 전공을 세워 훈장을 받기도 했다.[15]

쇼샤는 결함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 대전 중 약 25만 정 이상 생산되어 프랑스군뿐 아니라 여러 참전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미국 원정군은 자체적인 자동화기 부족으로 쇼샤를 대량으로 도입했으며, 벨기에, 세르비아, 그리스, 폴란드 등 여러 국가에서도 제식 또는 보조 화기로 사용되었다. 전쟁 이후에도 일부 국가에서는 개량을 거쳐 상당 기간 운용되었다.

4. 1. 프랑스군

프랑스 군인들이 FM 쇼샤와 함께, 솜, 1918년


참호에서 Mle1915를 겨누는 벨기에 병사(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인 1914년, 초기 전투에서의 패배를 겪은 프랑스군은 공격 전술을 전환하기 위해 시제품 단계에 있던 자동 화기를 재설계하여 Mle1915 쇼샤를 개발했다. 설계자인 루이 쇼샤 대령(Louis Chauchat)은 한 명의 병사가 운반, 장전, 사격을 모두 할 수 있는 경량 자동 화기라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개념을 제시했다. 이 때문에 정식 명칭에도 기관총(Mitrailleuse)이 아닌 자동 소총(Fusil-Mitrailleur|FMfra)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45] 또한 전쟁 중 신속한 대량 생산을 위해 프레스 가공을 도입하고 부품 공차에 여유를 두는 등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설계 변경이 이루어졌다.[47] 이 덕분에 쇼샤는 당시 널리 쓰이던 루이스 경기관총보다 2kg에서 3kg 가량 가벼워, 동급 자동 화기 중 매우 가벼운 편에 속했으며[46], 병사가 이동하며 사격하는 돌격 사격(Marching fire)에 적합한 것으로 평가받았다.[47]

1916년, Mle1915는 'FM Mle1915 CSRG'(1915년식 CSRG 자동 소총)라는 제식명으로 프랑스군에 채용되었다. 주로 자동차 및 자전거 제조사였던 글래디에이터(Gladiator)에서 생산을 담당했으며[49], 전선에서는 종종 '쇼샤 자동 소총'(FM CHAUCHATfra)으로 불렸다. 1916년 3월부터 중대당 8정씩 배치가 시작되었다.[48]

쇼샤의 첫 실전 투입은 1916년 4월 베르됭 전투였으나, 본격적인 대량 운용은 같은 해 7월 솜 전투부터였다. 솜 전투에서는 Mle1915를 이용한 돌격 사격이 처음 시도되었고, 그 효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조프르 장군은 당시 약 55,000정이 배치된 쇼샤의 생산량을 두 배로 늘릴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51] 돌격 사격은 교착 상태에 빠진 전선을 타개할 전술로 주목받았으며, 쇼샤 사수는 직접 탄약을 휴대하고 사격하며 무인지대를 건너 전진하는 방식으로 운용되었다.[51]

그러나 전장에서 쇼샤의 성능에 대한 평가는 매우 엇갈렸다. 1916년 말, 페탱 장군의 지시로 연대별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가장 큰 문제점으로 측면이 개방된 반달 모양 탄창이 지적되었다. 이 탄창 구조는 모든 작동 중단의 약 3분의 2를 유발하는 원인이었다. 사수들은 탄약(8mm 르벨탄) 급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탄창 내부에 기름을 바르곤 했는데, 이는 오히려 참호의 진흙이나 모래 같은 이물질이 개방된 탄창을 통해 총기 내부로 쉽게 유입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변형되지 않은 양호한 탄창만을 사용하고, 최대 20발 대신 18~19발만 장전하여 첫 발 급탄 불량을 피하는 것이었다. 쇼샤의 긴 반동 시스템이 사수에게 부담을 준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최근의 사격 시험에서는 반동 자체보다는 인체공학적 설계의 미흡함과 느슨한 양각대가 지속적인 조준을 어렵게 만든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또한 글래디에이터사에서 생산된 총기 대부분은 조준기가 낮고 오른쪽으로 치우쳐 조준되는 문제가 있었으나 수정되지 않았다. 8mm 르벨탄 버전의 경우, 약 120발을 연속으로 자동 사격하면 열팽창으로 인해 총열 부품이 후퇴 고정되어 사격이 중단되는 과열 문제도 발생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군과 미국 육군 교범에서는 짧은 점사나 반자동 사격을 권장했다.

쇼샤 운용을 위한 기관총 팀은 처음 2명으로 구성되었으나, 1916년 솜 전투의 경험을 바탕으로 탄약수를 보강하여 3명으로 늘어났다.[47] 1916년 교범에 따르면, 3명(사수, 제1탄약수, 제2탄약수)으로 구성된 팀은 각각 160발, 480발, 400발, 총 1,040발의 탄약을 휴대했다.[54] 1918년 말에는 분대당 3정의 쇼샤가 배치될 정도로 보편화되었다.[47]

전투 환경 변화에 따라 프랑스 보병의 장비도 개선되었다. 1915년 9월에는 강철 헬멧이 표준 보급되었고[12], 베르됭 전투 이후에는 식수 공급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두 번째 물통과 추가 배낭이 지급되었다. 병사들은 두 개의 방독면, M1909 접이식 야전삽 같은 도구, 추가 탄약과 수류탄, 진지 구축용 모래주머니 등을 휴대했다.[13][14] 쇼샤 사수에게는 예비 탄창과 추가 탄약을 휴대하기 위한 반원형 탄창 파우치와 배낭이 지급되었다.

쇼샤의 주된 역할은 보병 진격 시 이동하면서 화력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사수는 이동 중에도 지속적인 사격을 위해 탄창을 교체해야 했으므로 팀원 간의 숙련된 협동이 필수적이었다. 쇼샤 사수는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동시에 전공을 세워 훈장을 받을 기회도 많았다. 일례로 1918년 8월, 제20연대의 카르팡티에 병사는 돌격 중 사격을 가하며 적진으로 전진하여 동료들과 함께 독일군 기관총 4정과 25명의 병력을 포로로 잡는 공을 세워 무공 십자 훈장(Croix de Guerre)을 받았다.[15]

1916년부터 프랑스군은 집중된 화력과 보병의 유연한 운용을 강조하는 전술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전술은 1917년 10월 라 말메종 전투에서 효과를 발휘했는데, 당시 프랑스군은 소대를 2개의 경기관총/소총수류탄 분대, 1개의 수류탄 분대, 1개의 소총 분대로 재편성했다. 이 전투에서는 전차(당시 char d'assaut|샤르 다소fra로 불림)를 호위하는 특수 보병 분대도 성공적으로 운용되었다. 1918년, 페탱 장군은 보병, 포병, 전차 간의 긴밀한 협력을 강조하는 지침을 내렸고, 이는 1918년 여름 반격 작전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1918년 중반, 서부 전선에 다시 기동전의 양상이 나타나자 프랑스 보병 연대는 18명 규모의 소규모 전투 집단("''데미-섹션 드 콩바''")으로 재편성되었다. 보병 소대는 소대장과 부사관 아래 2개의 반소대로 구성되었고, 각 반소대는 경기관총 분대, 수류탄 분대, 소총 분대 등으로 세분화되었다. 이러한 편제 하에서 쇼샤 자동 사격과 VB 소총 수류탄의 화력을 결합하여 약 약 182.88m 거리 내의 적 기관총 진지를 제압하고 점령하는 전술이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점령한 지역은 후방에서 더 강력한 기관총이 배치될 때까지 쇼샤의 화력으로 방어했다.

쇼샤는 이후 개량을 거쳐 소염기와 대공 조준기(1918년), 탄창 개구부 덮개(1920년) 등이 개발되었으나, 결국 1924년에 개발된 FM mle1924/29 경기관총으로 대체되었다.[48] 제1차 세계 대전 휴전까지 약 250,000정의 쇼샤가 생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당시 독일군의 주력 기관총이었던 MG08/15의 생산량(약 127,000정)을 크게 웃도는 수치이다.

4. 2. 미군

미국은 1917년 4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지만, 미국 원정군(AEF)은 충분한 자동화기나 야전포 없이 프랑스에 도착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로부터 무기를 구매해야 했고, 존 J. 퍼싱 장군은 Hotchkiss M1914 기관총과 함께 쇼샤 경기관총을 미군 보병의 제식 화기로 선정했다. 미군에서의 정식 명칭은 '''자동 소총, 1915년형(쇼샤)'''(Automatic Rifle, Model 1915 (Chauchat))였으며, 병사들 사이에서는 "Sho-Sho"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6][45]

1917년 8월부터 1918년 11월 11일 독일과의 휴전까지, 프랑스의 글라디에이터(Gladiator) 공장은 미군에게 8mm 르벨탄을 사용하는 M1915 쇼샤 16,000정을 공급했다.[6] 이 M1915 모델은 분당 250발의 낮은 발사 속도 덕분에 다루기 쉬웠으며, 전투에서도 효과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는 미국 사단 역사 기록에서 쇼샤 사수들이 훈장을 받은 사례들을 통해 뒷받침된다.

그러나 1918년 말에는 미국의 표준 소총탄인 .30-06 스프링필드탄을 사용하도록 개량된 M1918 쇼샤 19,000정이 추가로 공급되었다.[6] M1918은 프랑스 모델을 개조한 것이 아니라, 글라디에이터 공장에서 미군 납품용으로 새로 제작된 것이었다.[8] 이 모델은 1917년 7월 스프링필드 조병창에서 설계되었고, 8월 테스트에서 브라우닝 자동 소총(BAR)보다 성능이 떨어졌지만 BAR의 대량 생산이 어렵다는 판단 하에 함께 채택되었다.[51]

하지만 M1918은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며 쇼샤의 악평에 주된 원인이 되었다.[51][52] 가장 큰 문제는 몇 발만 사격해도 총이 과열되어 탄피 추출에 실패하는 현상이 잦았다는 점이다.[8] 이는 글라디에이터 공장에서 제조 과정 중 약실 가공 불량 및 기타 치수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며,[8] .30-06탄의 강력한 에너지가 쇼샤의 기존 설계에 과도한 부담을 준 것도 원인이었다.[51] 실제로 미군 검사관들은 M1918 생산량의 약 40%를 불량으로 판정했으며,[6] 나머지 60%마저도 전선에 도착했을 때 문제를 일으켰다.[6] 1994년에 진행된 M1918의 사격 테스트에서도 부정확한 약실 치수와 불량한 제조로 인한 심각한 탄피 추출 문제가 확인되었다.[8]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M1918 모델에 대한 사용 설명서는 미국이나 프랑스 군사 기록 보관소, 개인 소장품 등 어디에서도 발견된 바 없다.[8]

결국 M1918은 극소수만이 최전선에 도달했으며, 이마저도 미군 병사들이 사용을 기피하여 쇼샤를 버리고 M1903 스프링필드 소총을 대신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8] 병사들은 결함투성이인 M1918보다 차라리 M1915를 선호했다.[51]

우수한 성능의 BAR는 1918년 9월 말 뫼즈-아르곤 공세 중에야 소량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존 J. 퍼싱 장군은 독일군이 BAR을 노획하여 복제할 것을 우려하여 승리가 확실해질 때까지 대량 보급을 미루었다.[9][45] 이 때문에 BAR를 지급받기로 한 부대조차 프랑스 도착 후 다시 M1918을 지급받는 상황도 발생했다.[45] (다만, 초기에 보급된 BAR 역시 반동 스프링 강화 문제 등 결함이 있었다는 점도 지적된다.[9]) 결과적으로 휴전 시점인 1918년 11월 11일, 미군 사단의 약 75%는 여전히 쇼샤(대부분 8mm M1915)로 무장하고 있었다.[9] 미군이 귀환할 때 이 쇼샤들은 대부분 프랑스에 남겨졌다.[45]

당시 중위였던 레뮤엘 셰퍼드는 쇼샤의 열악한 성능에 대해 "나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마지막 몇 주를 병원에서 보냈지만, 나중에 병사들이 나에게 말한 한 가지를 말해주겠다. 휴전 ''다음'' 날 그들은 쇼샤를 반납하고 브라우닝 자동 소총을 받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BAR는 그 망할 쇼샤보다 훨씬 좋았다. 만약 우리가 6개월 전에 BAR을 가지고 있었다면,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10]

이러한 악평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 대전 중 쇼샤(M1915)를 사용하여 명예 훈장을 받은 미군 병사도 3명 있었다.[11][45]

이름소속비고
넬스 월드 (Nels Wold)제35사단 제138보병전사 후 추서
프랭크 바트 (Frank J. Bart)제2사단 제9보병
토마스 C. 니바우어 (Thomas C. Neibaur)제42사단 제107보병


4. 3. 벨기에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서부 전선의 넓은 구역을 점령당하고 무기 산업 기반을 독일에 빼앗긴 벨기에군은 프랑스로부터 무기를 지원받아야 했다. 1916년 봄부터 보병 부대를 위해 프랑스제 쇼샤 경기관총을 확보하기 시작하여 1년 만에 1,400정 이상을 확보했으며, 이들은 모두 프랑스군과 동일한 8mm 르벨탄을 사용했다.[18]

1917년 봄, 벨기에군은 분대 수준의 병참을 단순화하기 위해 자국의 표준 소총탄인 7.65×53mm 마우저 탄약을 사용하는 쇼샤 모델을 테스트했다. 이 모델은 기존 쇼샤의 개방된 탄창 슬롯으로 흙이 들어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멍이 없는 새로운 곡선형 탄창을 사용했다.[18] 전쟁 기간 동안 벨기에는 총 약 7,000정의 쇼샤를 획득했으며, 이 중 절반 가량이 7.65mm 마우저탄을 사용하도록 생산되거나 개조된 '1915-17 모델'이었다. 당시 현역으로 배치된 쇼샤는 3,250정이었고, 예비 물량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전투 손실 고려 시).[19] 다만, 이 수치는 전후 벨기에가 M1915/17 모델 4,000정을 유고슬라비아에 판매했다는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20] 1924년 국제 연맹 보고서에 따르면 벨기에가 보유한 자동 소총은 2,902정이었고 예비 물량은 없었다.[21]

전쟁 후 벨기에군은 남은 쇼샤 경기관총의 여러 결함을 개선하기 위해 개량 작업을 진행했다. 가장 눈에 띄는 수정 사항은 총의 여러 구멍에 흙과 먼지를 막기 위한 덮개를 추가한 것이다.[19] 또한, FN제 BAR 경기관총과 유사한 형태의 더 튼튼한 양각대를 장착하고, 상부 리시버와 하부 리시버를 고정하는 래치를 개선하는 등[22] 급탄 기구의 신뢰성을 높이는 개량도 이루어졌다. 이렇게 개량된 총기는 Fusil-Mitrailleur 1915-27|푸질-미트라유 1915-27프랑스어 (1915/27년형 자동소총)으로 명명되었다.[23] 이 개량형 쇼샤는 1930년대까지 벨기에군에서 현역으로 운용되었으며,[19]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시점에도 일부 후방 부대에서는 여전히 사용되고 있었다. 이후 FM mle1924/29 경기관총 등으로 점차 대체되었다.

4. 4. 기타 국가



벨기에서부 전선의 넓은 지역을 점령했으나, 주요 무기 산업 시설이 독일에 점령당한 상태였다. 1916년 봄부터 보병 부대를 위해 쇼샤를 확보하기 시작하여 1년 만에 1,400정 이상을 확보했으며, 모두 8mm 르벨탄을 사용했다.[18] 1917년 봄에는 분대 수준의 병참을 단순화하기 위해 벨기에군의 표준 7.65×53mm 마우저 탄약을 사용하는 버전이 테스트되었다. 이 버전은 흙 유입을 막기 위해 구멍이 없는 새로운 곡선형 탄창을 사용했다.[18] 전쟁 기간 동안 벨기에는 거의 7,000정의 쇼샤를 획득했으며, 그중 약 절반이 7.65mm 탄을 사용하도록 생산되거나 '1915-17 모델' 표준으로 개조되었다. 3,250정이 현역으로 배치되었고 예비 물량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19] 그러나 이 수치는 벨기에 M1915/17 모델 4,000정이 유고슬라비아에 판매되었다는 기록과는 일치하지 않는다.[20] 1924년까지 벨기에는 국제 연맹에 2,902정의 자동 소총만 신고했으며, 예비 물량은 없었다.[21]

전쟁 후 남은 소총들은 설계상의 여러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 수정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수정은 모든 구멍에 흙과 먼지를 막는 덮개를 추가한 것이다.[19] 또한 더 나은 양각대와 상부 리시버를 하부 리시버에 고정하는 래치 등이 개선되었다.[22] 개량된 총기는 Fusil-Mitrailleur 1915-27|퓌지 미트라유르 1915-27fra로 명명되었으며,[23] 1930년대까지 현역으로 유지되었고,[19] 1940년에는 일부 후방 부대에서도 사용되었다.

세르비아 왕립군은 1916년 12월부터 1917년 4월 사이에 최소 1,400정의 쇼샤를 공급받았으며, 현지에서는 puškomitraljez M. 1915|푸슈코미트랄례즈 M. 1915srp로 불렀다.[24] 1920년대 중반, 유고슬라비아는 임시방편으로 벨기에로부터 M1915/17 모델 4,000정을 추가로 구매했다. 1926년부터 1928년까지 이 총기들을 노획한 7.9x57 M1888탄을 사용하도록 개조하여 puškomitraljez 7,9 mm. M. 15/26|푸슈코미트랄례즈 7,9 mm. M. 15/26srp으로 명명했다.[20]

1922년 둠루프나르 전투에서 쇼샤 경기관총(중앙)을 사용하는 그리스군


쇼샤는 1917년부터 그리스군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총기는 반원형 탄창에 6.5×54mm 만리허-쇤아워 탄약을 사용했다. 터키 국민 운동군은 그리스-터키 전쟁 동안 노획한 쇼샤를 사용했다.[25] 쇼샤는 그리스-이탈리아 전쟁 동안에도 최전선에서 사용되었다.[26] 그리스는 프랑스로부터 직접 공급받은 것 외에도 폴란드로부터 3,950정을 추가로 획득했다.[24]

폴란드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로부터 군사 지원을 받았으며, 이 과정에서 2,000정 이상의 쇼샤를 받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1919–1921) 동안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전쟁 후 폴란드는 더 많은 쇼샤를 구매하여 총 11,869정을 보유하게 되었고, 이를 폴란드의 표준 경기관총인 RKM wz 15|에르카엠 브조르 15pol로 지정했다.[27] 1920년대 중반에는 이 중 약 절반을 7.92×57mm 마우저 탄을 사용하도록 성공적으로 개조하여 RKM wz 15/27|에르카엠 브조르 15/27pol이라는 명칭으로 1930년대 초까지 사용했다.[27] 8mm 마우저탄을 사용하는 폴란드 쇼샤 기관총 표본 하나가 영국 리즈의 왕립 무기고 산하 국방부 국립 화기 센터에 보존되어 전시 중이다. 이후 1936년부터 1937년 사이에 약 2,650정의 쇼샤가 폴란드에 의해 해외로 판매되었는데, 일부는 멕시코군에,[24] 다른 일부는 스페인 제2공화국에 판매되었고, 국제 잉여 무기 시장에서도 거래되었다.[28]

소련핀란드 간의 겨울 전쟁 동안, 자동 화기가 부족했던 핀란드에 프랑스가 5,000정 이상의 잉여 Mle1915 쇼샤를 기증했다. 이 무기들은 실전에 투입되기에는 너무 늦게 도착했지만, 계속 전쟁에서는 주로 후방 부대에서 사용되었다. 전쟁 후 1955년까지 창고에 보관되었다가 1959년에서 1960년 사이에 인터암코(Interarmco)에 판매되었다.[29]

독일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많은 수의 쇼샤를 노획하여 최전선 보병, 화염 방사기 부대, 돌격대 등에서 사용했다. 이는 독일이 자체적인 휴대 가능 경기관총인 MG 08/15를 1917년 초에 배치하기 전까지 유사한 무기가 없었기 때문이다.[16] 독일군은 노획한 쇼샤 중 일부를 7.92×57mm 마우저 탄약을 사용하도록 개조하려 시도하기도 했다.[17] 나치 독일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중 폴란드, 벨기에, 프랑스,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등에서 쇼샤를 노획했다.[31] 이 노획 총기들은 출처에 따라 다음과 같은 제식명을 부여받았다:

  • 구 프랑스제: LeMG 156(f)|엘엠게 156(에프)deu
  • 구 유고슬라비아 및 구 폴란드제: LeMG 147(j)|엘엠게 147(요트)deu
  • 구 그리스제: LeMG 156(g)|엘엠게 156(게)deu
  • 구 벨기에제: LeMG 126(b)|엘엠게 126(베)deu[32][33]

독일군에 노획된 소수의 쇼샤는 헝가리에 지급되기도 했다.[37]

중화민국에서는 중일 전쟁 중 진린 무기창에서 약 100정의 쇼샤 복제품을 생산하여 사용했으며, 이 총기들은 일본군에 의해 노획되기도 했다.[30]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는 시리아가 쇼샤를 사용했다.[34]

얕은 참호 안에서 제복을 입은 여러 남자가 왼쪽을 향해 소총과 기관총을 발사하는 사진; 그들은 편안해 보이며 일부는 웃고 있다.
루마니아의 왕세자 카롤이 쇼샤를 사격하고 있다


이 외에도 여러 국가에서 쇼샤를 운용했다. 다음은 쇼샤를 사용한 국가 목록이다.

국가수량 및 비고
벨기에6,935정 (약 절반은 7.65×53mm 마우저 탄으로 개조)[35]
불가리아노획품 사용
중화민국진린 무기창에서 약 100정 생산 및 사용[30]
체코슬로바키아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1920년 러시아에서 130정 반입[36]
핀란드5,000정 이상 (프랑스 기증)[29]
나치 독일노획품 사용[31]
그리스최소 3,950정 (프랑스 공급 + 폴란드로부터 3,950정 구매)[24]
헝가리독일로부터 노획품 일부 지급받음[37]
라트비아라트비아군에서 546정 사용 (1936년 4월 기준)[38]
이탈리아1,729정[17]
멕시코폴란드로부터 구매[24]
루마니아4,495정[17][39][40]
러시아 제국6,100정[17][41]
소비에트 러시아러시아 내전 중 적군 일부 부대에서 사용[42]
세르비아 / 유고슬라비아최소 5,400정 (세르비아 1,400정 공급 + 유고슬라비아 4,000정 구매)
폴란드최소 11,869정 (다수가 7.92×57mm 마우저 탄으로 개조)[27][24]
스페인 공화국폴란드로부터 구매[43]
국민파 스페인공화파로부터 노획하거나 수송 중 압수
시리아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동안 사용[34]
터키터키 국민 운동이 노획품 사용,[25] 이후 터키 육군에서 사용[44]


5. 문제점 및 평가



Mle1915 쇼샤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 프랑스군이 병사 한 명이 운반, 장전, 사격할 수 있는 경량 자동 화기를 목표로 개발한 총기였다.[45] 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개념이었으며, 정식 명칭에도 기관총(Mitrailleuse)이 아닌 자동 소총(Fusil-Mitrailleur, FM)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빠른 대량 생산을 위해 프레스 가공을 도입하고 부품 공차를 넓히는 등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설계 변경이 이루어졌다.[47] 덕분에 동시대에 널리 쓰인 루이스 경기관총보다 2~3kg 가벼워 휴대성이 좋았고[46], 행진 사격(marching fire)에도 비교적 적합했다.[47]

그러나 실제 전선에서는 여러 문제점이 드러나며 혹평을 받았다.[47][46] 가장 심각한 문제는 탄창 구조였다. 스프링이 약해 탄약 급탄 불량이 잦았고, 이 때문에 병사들은 최대 장탄수인 20발을 다 채우지 않고 18~19발만 장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잔탄 확인을 위해 탄창 측면이 개방되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참호의 흙이나 이물질이 쉽게 유입되어 작동 불량을 일으켰다. 탄창 자체도 얇은 금속판으로 만들어져 쉽게 휘거나 손상되었다. 쇼샤의 잦은 고장은 대부분 이 탄창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나중에 이물질 유입을 막기 위해 캔버스 재질의 덮개가 지급되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설계는 개선되지 않았다.[45]

롱 리코일 작동 방식은 구조적으로 과열에 취약했으며, 알루미늄 방열 핀과 강철 부품 간의 열팽창률 차이로 인해 총이 뜨거워지면 작동 불량이 발생하는 문제도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과열 문제 섹션 참조) [45] 또한, 생산성 향상을 위해 부품 공차를 넓게 허용한 것이 오히려 품질 저하로 이어졌고, 사용된 금속 재질 자체의 품질 문제도 잦았다.[47] 반복적인 사격이나 거친 취급으로 인해 상하부 리시버 결합부가 변형되어 유격이 발생하면 방아쇠를 당겨도 격발되지 않는 문제도 보고되었다.

경량화를 우선시한 설계 때문에 사격 시 반동과 총구 앙등이 심했다. 사격 중 후퇴하는 노리쇠 뭉치에 사수가 뺨이나 눈을 다칠 위험도 있었으며, 이를 피하려면 부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해야 했다. 가늘고 약한 양각대와 부정확한 조준기도 명중률을 떨어뜨리는 요인이었다. 이 때문에 100m 이상의 거리에서는 정확한 조준 사격이 어려웠고, 400m 이상 거리에서의 사격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45]

미국이 .30-06 스프링필드 탄약을 사용하도록 개량하여 도입한 Mle 1918 쇼샤는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 더 강력한 탄약은 과열 문제를 악화시켰고, 신규 생산된 총기임에도 제조 과정에서의 결함(불완전한 약실 가공 등)으로 인해 초기부터 작동 불량이 많았다. 결국 미군은 쇼샤를 불신하여 지급받은 쇼샤를 버리고 M1903 스프링필드 소총을 사용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8]

이러한 여러 기술적 결함과 낮은 신뢰성 때문에 쇼샤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사용된 자동화기 중 가장 평판이 좋지 않은 총기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47][46]

5. 1. 과열 문제

롱 리코일 방식은 과열되기 쉬웠다. 이는 가동식 총신을 덮고 있는 알루미늄제 방열 핀과 강철 부품 간의 열팽창률 차이 때문에 발생했다. 사격으로 열이 축적되면 알루미늄 방열 핀이 더 많이 팽창하여 방열통 내면에 간섭했고, 이로 인해 작동 불량이 일어났다. 총기가 잘 손질된 상태에서도 연속 사격은 약 300발 정도가 한계였으며, 오염된 경우에는 100발 정도만 쏴도 작동이 불가능해지는 경우가 있었다. 과열된 총신을 식히는 데는 10분 이상이 소요되었다.[45]

5. 2. 전술적 혁신 및 한계



1916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참호전 양상으로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Mle 1915 쇼샤의 전장 성능에 대한 평가는 사용자들 사이에서 크게 엇갈렸다. 이에 따라 1916년 말 필리프 페탱 장군의 요청으로 연대별 조사가 이루어졌고, 조사 결과 쇼샤의 주요 문제점은 개방된 측면을 가진 반달 모양 탄창에 있으며, 이것이 전체 작동 중단의 약 3분의 2를 유발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당시 사수들은 8mm 르벨 탄약의 급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탄창 내부에 기름을 바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참호의 진흙투성이 환경에서 흙, 모래 등의 이물질이 개방된 탄창을 통해 총기 내부로 쉽게 유입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은 튼튼한 스프링이 장착된 변형되지 않은 양호한 탄창만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또한, 첫 발 급탄 불량을 피하기 위해 최대 20발 대신 18발 또는 19발만 장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쇼샤의 긴 반동 시스템이 사격 시 사수에게 부담을 준다는 지적도 있었으나, 최근의 사격 테스트 결과 반동 자체보다는 인체공학적 설계의 문제와 느슨한 양각대가 짧은 연사 이상으로 조준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드는 주요 원인임이 밝혀졌다. 글래디에이터(Gladiator) 공장에서 생산된 대부분의 쇼샤는 조준기가 낮고 오른쪽으로 치우쳐 발사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 결함은 일찍 인지되었음에도 수정되지 않았다. 8mm 르벨 탄을 사용하는 쇼샤는 약 120발을 연속으로 자동 사격할 경우 과열로 인한 열팽창 때문에 총열 슬리브 어셈블리가 후방 위치에 고정되어 사격이 중단될 수 있었다. 이 문제는 총이 식을 때까지 지속되었으므로, 프랑스군과 미국 육군 교범에서는 짧은 연사 또는 반자동 사격을 권장했다. 1918년, 미국 원정군(A.E.F.)은 사용자 설명서에서 쇼샤를 "자동 소총(Automatic Rifle)"으로 공식 분류했는데, 이는 프랑스어 "Fusil Mitrailleur"(기관총 소총)를 잘못 번역한 결과였다.

1918년 5월과 6월에는 먼지 유입을 막는 완전 밀폐형 쇼샤 탄창 시제품이 성공적으로 테스트되었으나, 실전에 배치되기에는 너무 늦었다. 대신 1917년 말부터 더 튼튼한 개방형 표준 탄창과 운반 중 진흙으로부터 총기를 보호하는 맞춤형 캔버스 덮개, 그리고 소염기가 지급되었다. 초기에는 2인으로 구성된 쇼샤 운용팀이 효과적인 것으로 평가되었으나, 1917년 10월까지는 4인 분대(분대장, 사수, 탄창 담당 제1 탄약수, 추가 탄약수 1명)로 확대되었다. 사수와 부사수(탄약수)는 기본 장비로 .32 ACP 루비 권총과 각각 9발씩 장전된 탄창 3개를 휴대했다. 분대장과 다른 탄약수는 소총이나 베르티에 카빈으로 무장했다. 추가 인원은 장전된 탄창 운반, 고장 처리 지원, 사수 엄호 등의 역할을 수행하며 전투 지속 능력을 높였다. 이러한 분대 구성은 억제 사격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 보병 분대 또는 화력 팀의 기본적인 형태와 유사하다.

프랑스 쇼샤 사수(왼쪽)와 VB 수류탄 발사기(오른쪽), 1918년.


1916년부터 1918년 사이 프랑스 보병 분대와 소대는 현대적인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당시 분대/소대는 6정의 휴대용 경기관총(쇼샤)과 4~6문의 소총 수류탄 발사기(VB 소총 수류탄)를 장비했으며, 일부 ''전위대''는 조준경이 장착된 반자동 소총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역할 분담은 병사들 간의 상호 의존성을 높여 1914년의 정렬된 총검 돌격 방식보다 심리적 저항력을 강화했다. 무엇보다 보병 소대는 자율적인 전투 집단을 형성하여 간격을 두고 유연하게 기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불과 몇 년 만에 이루어진 엄청난 질적 도약이었으며, 현대의 분대와 소대는 휴대용 무전기나 야간 투시경 같은 더 정교한 장비를 사용하지만 기본적인 운용 방식은 이때 확립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1915년 6월에는 특별히 경량화된 공격 명령이 도입되어 불필요한 짐은 후방에 남겨두고, 식량과 예비 탄약은 담요에 말아 밴돌리어 스타일로 착용했다. 강철 헬멧은 1915년 9월 샹파뉴 공세를 앞두고 보병의 표준 장비가 되었고,[12] 10월에는 다른 병과에도 보급되었다. 베르됭 전투의 경험을 통해 최전선 병사들에게 식수를 공급하는 어려움이 드러나면서, 모든 병사에게 두 번째 물통과 이틀 정도 자력으로 전투를 지속할 수 있는 물품을 담는 두 번째 짐주머니가 지급되었다. 또한 방독면 2개(하나는 즉시 사용 가능하게, 다른 하나는 보관용 통에), M1909 접이식 야전삽 같은 도구, 추가 탄약과 수류탄, 점령지 방어용 모래 주머니 등이 지급되었다.[13][14]

소총 수류탄 사수와 수류탄 투척병은 각각의 파우치에 수류탄을 보관하는 특별 짐주머니를 휴대했고, 소총 수류탄 발사기는 허리띠에 부착된 파우치에 넣고 다녔다. 새로운 화력 지원팀 병사들에게는 예비 탄약을 위한 새로운 장비가 지급되었다. 쇼샤 사수는 허리띠 양쪽에 반원형 파우치를 착용했는데, 각 파우치에는 예비 탄창 1개가 들어갔다. 또한 추가 탄창 8개와 64발의 탄약이 든 팩, 그리고 추가 탄창 4개가 든 짐주머니를 휴대했다. 일반 소총수는 진격을 늦출 수 있으므로 사격을 자제하고 엄호 하에 전진하는 임무를 맡았다. 소대와 반소대의 사격은 자체 진격이나 인접 부대의 진격을 엄호하거나, 진격로 상의 적 저항 거점을 제압하는 경우에만 허용되었다.

쇼샤의 주요 역할은 진격하는 동안 이동식 탄막 사격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사격량을 유지하며 이동 중 탄창을 교체해야 했으므로 운용팀의 숙련된 팀워크가 필수적이었다. 전술의 핵심인 쇼샤 사수는 사상 위험이 높았지만, 그만큼 공훈을 세울 기회도 많았다.

''"1918년 8월 31일, 와즈, 노장텔 근처에서 제20연대 병사 카르팡티에… 그는 걷는 동안 사격을 가하며 적에게 진격했고, 베르토 중사가 이끄는 소대의 다른 병사들이 그를 따랐다. 그는 저항 거점의 측면을 우회하여 동료들과 함께 기관총 4정과 독일군 사수 25명을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15]
카르팡티에는 이 공로로 ''무공 십자 훈장''(Croix de Guerre)을 수여받았다.

1916년까지 프랑스군의 전술은 집중된 화력과 보병의 유연한 운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베르됭 전투의 경험은 솜 전투로 이어졌고, 프랑스군은 공세 초기에 비교적 적은 사상자로 목표를 성공적으로 점령했다.

1917년 10월부터 프랑스 소대는 2개의 경기관총/소총 수류탄 분대, 1개의 수류탄 분대, 1개의 소총 분대로 구성되었다. 이 새로운 편제는 10월 23일부터 27일까지 벌어진 라 말메종 전투에서 효과를 입증했다. 프랑스 통합 병과는 밀집 대형으로 공격해오는 독일 보병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같은 전투에서 제6군 사령관 프랑셰 데스페레이 장군은 전차(당시 ''샤르 다소''라 불림)를 호위하도록 특별 훈련된 보병 분대를 성공적으로 운용했다. 1918년, 필리프 페탱 장군은 일련의 지침을 통해 공습, 포병, 전차 간의 협력을 강화하여 공격하는 보병을 지원하도록 했고, 이는 1918년 여름의 반격 작전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18년 중반까지 연합군은 전쟁에 다시 기동성을 부여하며 서부 전선의 교착 상태를 타개할 수 있었다. 참호 환경이 개선되고 개활지 전투가 늘어나면서, 프랑스 보병 연대는 여러 개의 소규모(18명) 전투 집단("''데미-섹션 드 콩바''")으로 재편성되었다. 보병 소대는 소대장과 부사관으로 구성되었고, 부사관이 지휘하는 두 개의 반소대로 나뉘었다. 제1반소대는 수류탄병 분대(하사, 수류탄병 2명, 수류탄 운반병 2명, 소총수 2명)와 경기관총(LMG) 분대(하사, 소총 수류탄병 3명, 탄약 운반병 2명, LMG 사수 1명)로, 제2반소대는 LMG 분대(하사, 소총 수류탄병 3명, 탄약 운반병 2명, LMG 사수 1명)와 소총 분대(하사, 소총수 6명)로 구성되었다.

프랑스 연대 기록과 쇼샤 사수에게 수여된 훈장 통계는 이들이 발전된 보병 전술의 성공에 필수적인 기여를 했음을 보여준다. 이 전술은 이동 중 사격을 가하며 적에게 접근하고, 약 약 182.88m 거리 내에서 측면의 쇼샤 자동 사격과 정면의 VB 소총 수류탄을 결합하여 적 기관총 진지를 제압하는 방식으로 운용되었다. 이는 군사적으로 공격 거리(assault range)에 해당한다. 점령한 지역은 후방에서 더 강력한 기관총이 배치될 때까지 쇼샤의 화력을 이용한 기지 방어를 통해 적의 반격을 억제했다.

무겁고 고정된 진지에서 지속적인 방어 사격을 위해 설계된 공랭식 또는 수랭식 기관총(예: 핫치키스 기관총, 맥심 기관총 계열)과 달리, 쇼샤는 매드슨 기관총이나 루이스 경기관총처럼 가볍고 휴대 가능하게 만들어져 공격 시 진격하는 보병의 화력을 증강시키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러한 전술적 개념은 행진 사격(marching fire)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쇼샤 대령은 이미 1900년대 초부터 이러한 비전을 구상하고 프랑스군 최고 지휘부, 특히 조제프 조프르 장군에게 여러 차례 제안한 바 있다.

6. 대체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 대전 휴전 이후, 프랑스군은 기존 쇼샤 경기관총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자국에서 설계 및 제조할 더 신뢰성 있는 경기관총으로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1920년대 초 샤텔로 병기창에서 새로운 경기관총 개발을 위한 실험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새로운 경기관총(fusil-mitrailleurfra)인 FM Mle 1924가 채택되었다. 이 총은 가스 작동 방식을 사용했으며, 당시 새로 개발된 7.5mm 림리스 탄약(나중에 7.5x54mm French 규격으로 발전)을 사용하도록 설계되었다. FM Mle 1924는 쇼샤 경기관총의 문제점을 해결했으며, 총 232,000정이 생산되어 1950년대 후반까지 프랑스 육군의 주력 경기관총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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