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문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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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개성-문산 전투는 1950년 6월 25일부터 26일까지 한국 전쟁 초기, 조선인민군 제1, 6보병사단이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을 기습하여 개성과 문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전투 이전 국군 제1사단은 훈련 부족과 병력 분산으로 전투 준비가 미흡한 상태였다.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개성-문산 지역의 국군 방어선이 붕괴되었고, 국군은 임진강 방어선에서 철수했다. 이 전투의 패배는 서울 조기 함락에 영향을 미쳤으며, 국군은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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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문산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분쟁 | 개성-문산 전투 |
전체 | 폭풍 작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서부 지역 작전(대한민국) |
날짜 | 1950년 6월 25일 ~ 6월 28일 |
장소 | 연안군(연안), 개성, 문산, 봉일천 |
결과 | 조선인민군 승리, 대한민국 성공적인 철수 |
교전 세력 | |
지휘관 | |
지휘관 1 | 최광 방호산 최율석 최현 |
지휘관 2 | 백선엽 최영희 유해준 |
병력 규모 | |
병력 1 | 제1보병사단 제6보병사단 (-1개 연대) 제203기갑연대 제3 38경비여단 (-5개 대대) |
병력 2 | 제1보병사단 제15보병연대 서울 특별 연대 |
사상자 |
2. 전투 이전 상황
한국 전쟁 발발 직전, 38선을 경계로 한 개성과 문산 지역에서는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과 조선인민군 제1군단 예하 부대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양측의 군사적 대비 상황은 전쟁의 초기 양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한민국 국군 제1보병사단은 당시 방어 계획 수정에 따른 진지 재편성 과정에 있어 전반적인 준비 태세가 미흡했다.[1] 훈련이 부족했고, 북한의 남침 징후가 뚜렷하지 않다는 판단 하에 장병들의 경계심이 다소 이완된 상태였다. 특히 전쟁 발발 전날인 6월 24일에는 상당수 병력이 휴가나 외출 중이어서 실제 방어 병력에 큰 공백이 발생했다.[1] 또한, 사단장 백선엽 대령이 교육으로 자리를 비워 연대장 최경록 대령이 사단을 지휘하고 있었다.[9][10][1]
반면, 조선인민군은 38선 북방의 주요 고지들을 점령하고 개성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송악산 등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며 남침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11] 제1보병사단과 제6보병사단을 주력으로 배치하고, 전차 부대의 지원까지 준비하는 등 공격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11][2][12]
2. 1. 대한민국 국군 제1보병사단
당시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은 방어 계획의 전면 수정에 따른 방어 진지 재편성 과정에 있었다. 이로 인해 사단의 교육 훈련 진도는 다른 사단에 비해 뒤떨어진 상태였다. 제11보병연대와 제12보병연대는 대대급 전술 훈련을 막 시작한 단계였고, 제13보병연대는 2개 대대만이 대대 전술 훈련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었으며, 나머지 1개 대대는 야외 훈련을 위해 파견 중이었다.[1]또한, 북한 측이 제기했다가 무산된 요인 교환 문제와 북한군의 뚜렷한 공격 징후가 포착되지 않아 장병들의 경계심이 다소 해이해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단은 1950년 6월 24일, 전체 병력의 약 57%에 달하는 인원에게 휴가 및 외출/외박을 허가했다. 이로 인해 실제 방어 임무 수행에 큰 공백이 발생했다. 특히 제12보병연대의 경우, 약 80km에 이르는 넓은 방어 정면에 실제 배치된 병력은 800여 명에 불과했다.[1]
구체적인 부대 배치는 다음과 같았다.
- 제12보병연대 제3대대 (대대장 소령 이무중): 서쪽 청단군 금학리 부근 읍천(邑川)에서부터 연안군과 배천군을 가로질러 동쪽 예성강 동쪽의 개풍군 전포리(錢浦里)[7]까지 직선 거리 54km에 달하는 정면에 3개 중대를 일선으로 배치했다. 산간 소로 5개소에는 경찰 초소를 설치하여 경계 임무를 수행했으나, 초소 간 간격이 너무 넓어 상호 연락과 지원이 어려운 실정이었다.
- 제12보병연대 제2대대 (대대장 소령 한순화): 서쪽 예성강에서 개성 시가지 북쪽을 지나 청학동(靑鶴洞)을 거쳐 덕암리와 룡흥리 사이 소반고개까지 약 20km의 방어 정면에 3개 중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 제13보병연대: 장풍군 영남면 대원리(大院里)[8]에서 소반고개, 판문점 북측 지역, 두매리, 조금리, 고랑포리, 원당리(元堂里)에 이르는 구간을 경비하고 있었다.
장비 면에서도 어려움이 많았다. 육군본부의 재편성 계획에 따라 사단 보유 차량의 대부분이 후방 기지창으로 이동된 상태였다. 제11보병연대의 경우, 60mm 및 81mm 박격포를 포함한 대부분의 공용화기마저 부평의 병기대대로 후송되어 화력 지원 능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더욱이 1950년 4월 22일에 부임한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부대 사정을 충분히 파악하기도 전인 6월 14일부터 시흥(始興) 소재 보병학교에서 고급 간부 재훈련 교육을 받고 있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9][10] 이에 따라 제11보병연대장 최경록 대령이 사단장 직무를 대리하고 있었다.[1]
직책 | 계급 | 이름 |
---|---|---|
사단장 | 대령 | 백선엽 |
제11보병연대장 | 대령 | 최경록 (사단장 직무대리) |
제12보병연대장 | 중령 | 김점곤 |
제13보병연대장 | 대령 | 김익렬 |
2. 2. 조선인민군 배치 현황
조선인민군은 38선 북방 적성 북쪽의 △137고지에서 서쪽으로 △282고지(대원리), 송악산, △325고지(백천), △120고지(연안 북쪽), △98고지(청단 북쪽) 등을 잇는 감제고지를 따라 진지를 구축하였다. 특히 개성 시내를 완전히 조망할 수 있는 송악산과 그 주변 고지에는 강력한 방어진지(방카)를 만들어 남침의 발판을 마련했다.[11]주요 공격 부대로는 제1군단 예하의 제1보병사단과 제6보병사단이 배치되었다. 제1보병사단은 남천에 주둔하며 제1, 2, 3경비여단을 엄호하는 형태로 배치되었다.[11] 각 사단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2]
부대 | 사단장 | 예하 연대 | 연대장 | 포병연대장 |
---|---|---|---|---|
제1보병사단 | 최광 소장 | 제2보병연대 | 김양춘 대령 | 현학봉 대령 |
제3보병연대 | 이창권 대령 | |||
제14보병연대 | 황석 대령 | |||
사단 포병연대 | - | |||
제6보병사단 | 방호산 소장 | 제1보병연대 | 김후진 대령 | 이민 중령 |
제13보병연대 | 한일래 대령 | |||
제15보병연대 | 조관 대령 | |||
사단 포병연대 | - |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경, 당시 육군 제1사단장이었던 백선엽 대령은 서울에서 사단 작전참모로부터 개성 지역이 북한군의 전면적인 침공을 받아 혼란에 빠졌으며, 이미 점령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긴급 보고를 받았다. 이는 백선엽 사단장이 한국 전쟁 발발에 대해 처음으로 인지한 순간이었다.[13]
제1사단과 제6사단의 총 병력은 약 21,000명으로 추산되었으며, 122mm 유탄포 24문, 76mm 유탄포 72문, 45mm 대전차포 168문 등의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인민군 총사령부 직할 제105기갑여단 소속 제203전차연대의 전차 40대와 자주포 32문이 이들 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집결한 것으로 추정되었다.[12]
3. 전투 경과
같은 날, 북한군 제1군단 소속 제1사단과 제6사단은 제203전차연대와 제3 38경비여단의 지원을 받으며 대한민국 육군 제1사단 방어지역을 기습 공격하여 서울을 서쪽에서 포위하고자 했다. 이와 동시에 북한군 제1군단의 주력 부대는 제7사단이 방어하던 38선 서부 중앙 지역에서도 공격을 개시했다.
3. 1. 청단-배천 철수
북한군은 대한민국 육군 제12연대 제3대대가 방어하던 청단-개풍 간 54km 구역에 대해 공격준비사격 없이 은밀하게 접근하여 기습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대남방송을 통해 투항을 권유했다.
이러한 기습 공격 속에서 제3대대는 일부 지역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려 했으나, 결국 용매도 → 청룡 반도 → 백석포 → 강화도 → 김포반도를 거쳐 문산리로 철수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병력은 분산되기도 했다.
3. 2. 개성 철수
조선인민군 제6사단(사단장 방호산 소장) 제15연대(연대장 김현기 대좌)는 전차 5~6대를 앞세워 국도 제1호선을 따라 개성 시내로 진격했다. 당시 개성은 국군 제12연대 제2대대(대대장 소령 한순화)가 방어하고 있었다.
송악산 남쪽 무명고지에 배치되었던 제2대대 제6중대는 북한군의 공격준비사격이 시작된 직후 중대장 백원담 중위가 전사하고 병력이 분산되는 피해를 입었다. 또한, 개성 시내 만월국민학교에는 이미 전날 밤 국군 복장으로 위장한 북한군 1개 대대 병력이 침투하여 공격 개시를 기다리고 있었다.[14]
개풍군 여현리 일대를 경비하던 제2대대 제5중대 역시 개성 함락 상황을 인지하고 소대 단위로 분산 철수했다. 송악산 비둘기고지에서 교전 중이던 제7중대도 방어선을 유지하지 못하고 9시경 제2대대 전술지휘소가 있던 개성시 선죽동 자남산(子男山)으로 철수했다.[15]
제12연대장 전성호 대령은 9시경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임진강 철교를 통해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마침 개성 북쪽에서 철수 병력을 수습하며 개풍군 고남리로 이동 중이던 제2대대장 한순화 소령에게, 연대본부와 제1대대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적에게 일격을 가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연대 예비대로 손실 없이 보존되어 있던 제1대대가 아닌, 이미 기습을 당해 큰 피해를 입고 철수 중이던 제2대대에 이러한 중요 임무를 부여한 배경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전성호 연대장은 연대본부와 직할대, 제1대대를 이끌고 고남리를 출발했으나 이동 중 차량 사고로 후송되었고, 후임으로 김점곤 중령이 연대장에 부임했다.
한편, 명령을 받은 제2대대장 한순화 소령은 특공대를 편성하여 개성 시내 남대문으로 접근, 행군 대형으로 대기 중이던 조선인민군을 기습 공격했다. 이후 영정포를 거쳐 김포반도의 강녕포(康寧浦)[16]로 도하에 성공했다. 통진에서 부대를 재편성하던 중, 6월 26일 오전에 급히 편성된 김포지구 전투사령부에 배속되어 김포반도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다.
3. 3. 문산 전투
수색에 주둔하던 제11연대(연대장 대령 최경록)는 6월 25일 08:30에 출동 명령을 받았다. 연대는 11:00부터 15:00 사이에 열차를 이용하여 문산으로 이동했으며, 이때 행군한 초기 병력은 980명이었다.
문산에 도착한 제11연대는 적전리(赤田里)에 전술지휘소를 설치하고 방어 준비에 들어갔다. 제1대대는 임진강철교 부근 마정리(馬井里)의 국도 제1호선 좌우측에, 제2대대는 임진강 나루터 남쪽에 각각 배치되었다. 제3대대는 예비대로서 적전리에 집결했다. 연대가 방어 배치를 하는 동안 휴가나 외출 중이던 장병들이 속속 귀대하여 연대 병력은 1,500명까지 늘어났다.
한편, 제11연대장은 개성 방면에서 제12연대의 일부 병력이 임진강철교를 통해 철수하는 것을 확인한 후, 백선엽 당시 제1사단장에게 철교 폭파를 건의했다. 사단 공병이 폭약을 설치하고 점화했으나 불발하여 폭파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 실패로 인해 북한군은 평양-개성-서울을 잇는 가장 중요한 보급로인 경의도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때까지 북한군 전차는 임진강 돌출부 지역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는 북한군이 남침 계획 초기부터 한국군이 임진강철교를 폭파할 것으로 예상하고, 해당 경로로는 전차를 투입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군이 방어선을 거의 구축했을 무렵인 17:00경, 임진강철교 북쪽에서 대규모의 북한군 부대가 전술 행군 대형으로 국도 제1호선을 따라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들과 한국군 사이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고, 북한군은 임진강철교 부근에서 일단 격퇴되었다.
이후 북한군 제6사단 제15연대는 임진강철교를 확보하기 위해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결국 공격을 중단하고, 대신 한국군이 철교를 폭파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데 주력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3. 4. 파평산 전투
대한민국 육군 제1사단 예하 제13연대(연대장 대령 김익렬)는 개성부터 장단군 장남면 원당리까지의 38선 경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연대는 북한군의 예상 남하 경로인 백학면 노곡리[17] 가여울 - 적성면 - 문산 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제1, 2대대를 파평면 파평산에 투입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6월 26일 새벽, 비가 그친 뒤 파평산 북쪽 320번 도로(청송로)에 북한군 전차부대가 나타났다. 선두 전차 5대가 파평산 북단으로 접근하자 국군은 2.36인치 로켓포로 대응 사격을 했으나, 당시 국군은 전차의 약점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고 사격술도 미숙하여 전차를 파괴하지 못했다.
이에 제1대대장 김진위 소령은 병사 18명을 선발하여 2개의 대전차 특공조를 급히 편성했다. 특공대원들은 81mm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전깃줄로 묶어 만든 급조 폭탄을 안고 북한군 전차의 무한궤도를 향해 뛰어드는 육탄 공격을 감행했다. 국군의 필사적인 공격에 당황한 북한군 전차 5대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도로변의 초가집 옆에 멈춰 섰다.
이때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전투 중 발사된 예광탄이 초가집에 옮겨붙어 화재가 발생했고, 불길이 옆에 서 있던 북한군 전차로 번졌다. 이 광경을 본 후속 전차 부대는 공격을 포기하고 적성 방향으로 후퇴했다. 잠시 후 북한군 보병 1개 연대 규모가 다시 공격을 시작했지만, 국군은 치열한 근접전을 벌이며 방어 진지를 끝까지 지켜냈다. 이후 전장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3. 5. 임진강 방어선 붕괴
국군 제1사단은 후방에서 증원된 부대로 전투력이 강화되자, 6월 26일 주저항선의 약점을 보완하고 상황을 보며 반격으로 전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우측 인접 부대인 제7사단이 덕정-축석령 선으로 철수하면서 제1사단의 우측방이 완전히 노출되었다. 이로 인해 가여울-적성으로 진출한 북한군 제1사단은 별다른 저항 없이 국군 제1사단의 주저항선 우측방을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국군의 임진강 철교 폭파 시도가 실패한 것을 확인한 북한군 제6사단은 6월 26일 새벽, 전차 5대를 앞세운 보병·전차·포병 협동부대로 임진강 철교를 통해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맞선 제11연대는 임진강 철교 남쪽으로 깊게 편성된 방어 진지에서 완강히 저항했으나, 전차에 대항할 효과적인 수단이 부족하여 문산 남쪽 구릉지대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북한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갔지만, 문산 북쪽까지 진출한 북한군은 일단 진격을 멈추고 후속 부대를 기다렸다. 제11연대장은 이 기회를 포착하여 배속된 보병학교 교도대대를 포함한 3개 대대로 역습을 감행했다. 이 역습으로 지역 내 북한군을 임진강 철교 북쪽으로 격퇴하고 주저항선을 회복했다.
하지만 같은 시각, 우측방의 제13연대는 파평산 방어진지의 노출된 우측방으로 밀려드는 북한군의 공격을 막지 못해 주저항선이 무너졌다.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제1사단의 주력이 320번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진격하면서 문산리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추이를 지켜보던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최후 저지선으로 철수하여 마지막 결전을 펼치면서 반격의 기회를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따라 제1사단은 야간 철수를 계획했으나 북한군의 압박이 가중되어 전방 곳곳에서 위급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게 된 사단은 철수 명령을 하달하고, 사단 전술지휘소를 봉일천국민학교로 이동시켰다.
4. 전투 결과 및 영향
북한군 제6사단 예하 부대는 6월 25일 개성 남단 영정포로 철수한 대한민국 육군 제12연대 2대대를 추격하여 남하했다. 이들은 한순화 소령이 이끄는 대대가 강화를 거쳐 김포반도 서단의 통진으로 철수하고, 6월 27일 김포-오류동 지역으로 이동하자 그 뒤를 이어 김포 지역으로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6월 28일 이전에 북한군은 행주와 개화동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개화산 및 김포시 하성면 봉성리의 봉성산 (129m) 등을 점령하여 한강 하류 지역을 통제했다. 또한 서울특별시 강서구 신월동의 지양산 (138m)을 장악하여 김포 가도 주변 지역을 선점했다.
이러한 북한군의 선점과 불시 사격으로 인해 행주나루를 통해 한강을 건너던 국군 부대 중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혼란에 빠진 부대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많은 병력이 강변 갈대밭으로 흩어져 각개행동으로 분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참조
[1]
웹사이트
개성-문산지구 전투
http://ki.warmemo.co[...]
Korean History Information Center
[2]
웹사이트
6.25 전쟁사 2 (The History of the Korean War Book 2)
https://www.imhc.mil[...]
Institute for Military History, Ministry of National Defense, Republic of Korea
[3]
서적
The Korean War
https://books.google[...]
U of Nebraska Press
2011-08-25
[4]
간행물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http://www.imhc.mil.[...]
[5]
문서
당시에는 [[장단군]] 장남면이었으며, 현재는 [[연천군]] [[장남면]]에 속한 고랑포리이다.
[6]
간행물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http://www.imhc.mil.[...]
[7]
문서
현재는 [[개풍군]] 연강리이다.
[8]
문서
현재의 개성특별시 룡흥동의 일부이다.
[9]
뉴스
參謀副長에 金大領就任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50-04-23
[10]
뉴스
백선엽 회고록 : 군과 나 <1>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88-06-24
[11]
간행물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http://www.imhc.mil.[...]
[12]
간행물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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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뉴스
백선엽 회고록 : 군과 나 <1>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88-06-24
[14]
뉴스
6.25스물세돌특집 1950년6월25일 새벽4시…당시 일선지휘관들의 증언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73-06-22
[15]
뉴스
6․25를 회고하는 戰地의 敵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73-06-25
[16]
문서
현재의 [[김포시]] [[월곶면]] 용강리.
[17]
문서
당시의 노곡리는 38선 경계 바로 밑, 즉 최북단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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