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식 돌방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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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굴식 돌방무덤은 한반도와 일본에서 발견되는 묘제 형식으로, 특히 한반도 낙랑군 지역과 일본 큐슈 지역에서 그 기원과 전개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한반도에서는 낙랑군 지역에서 횡혈식 석실이 발견되었으며, 이는 요동 등지에서 유입된 신흥 호족층의 묘제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한편 일본에서는 4세기 후반 큐슈에서 시작되어 6세기에는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굴식 돌방무덤은 다양한 지역적 특징과 변형된 형태를 보인다. 횡혈식 석실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구조와 특징을 가지며,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당시 사회의 문화적 교류와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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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식 돌방무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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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의 횡혈식 석실
한국의 횡혈식 석실은 한나라가 한반도에 설치한 낙랑군의 중심지였던 평양 지역과 낙랑군에서 분리된 대방군이 위치했던 황해도 지역의 "낙랑 고분군"에 다수 분포한다.[2] 낙랑구역 낙랑동, 두단동 조왕리, 남사리, 정백동, 순천시 남옥리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횡혈식 석실의 발견은 낙랑군이 평양 부근을 지배했고, 한나라가 한국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북한 학자들은 한나라 묘를 고구려의 묘제로 재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2] 이들은 중국 한나라 묘와 유사한 유물이 발견됨에도 불구하고, 피장자가 고구려인이거나 유물이 위조되었다고 주장하며, "분묘의 조선적 특성을 부정하는 근거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3] 또한, 북한 학자들은 분묘를 한나라 묘로 보는 견해가 조선의 중국 사대주의자와 일본 제국주의자에 의해 날조되었다고 비판한다.[4]
그러나 횡혈식 석실은 낙랑군의 토착 묘제가 아니라, 요동 등 외부 지역에서 유입된 새로운 묘제일 가능성이 높다.[5] 이는 석재 천정 전실의 피장자와 마찬가지로, 횡혈식 석실 역시 외부에서 유입된 신흥 호족층의 묘제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중국 동북부의 한나라 묘와 비교했을 때, 낙랑 전실묘의 주류인 궁륭식 전천정 단실 전실은 요동과의 관련성이 강하게 나타난다. 석재 천정 전실과 횡혈식 석실은 모두 궁륭식 전천정 전실과 함께 만들어졌기 때문에, 북한 학자들이 주장하는 전천정 전실에서 석재 천정 전실, 횡혈식 석실로의 변화는 성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석재 천정 전실은 횡혈식 석실의 천정 형태가 전천정 전실에 도입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3세기 중엽부터 4세기의 평양 지역에서는 궁륭식 전천정 단실 전실, 석재 천정 전실, 횡혈식 석실이 공존했다.
2세기 후엽부터 3세기 전엽에 걸쳐 나타난 횡혈식 석실은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묘제이며, 3세기 중엽 이후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다.[6] 이러한 횡혈식 석실의 등장은 공손씨와 관련이 있다. 189년 요동 태수가 된 공손도는 190년 요동후·평주목을 자칭하며 요동을 지배했다. 중국 본토에서 난을 피해 산둥반도에서 해로를 통해 요동을 거쳐 공손씨 지배하의 낙랑군·대방군으로 많은 사람들이 유입되었고, 이는 새로운 묘제 채택의 계기가 되었다.[7]
결론적으로, 횡혈식 석실은 낙랑군의 토착 묘제가 아닌 외부에서 유입된 묘제이며, 공손씨에 의한 낙랑군·대방군 지배, 위나라와 서진으로 이어지는 지배 세력 교체 등 격변하는 정세 속에서 주변 지역으로부터 유입되었다. 특히, 인접한 요동에서 후한 후기부터 판석 적석 석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8]
이순진은 낙랑군 횡혈식 석실이 고구려 계통일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고구려 초기 횡혈식 석실은 4세기 이후에 나타나므로 낙랑군 횡혈식 석실이 시기적으로 앞선다. 또한 낙랑군 횡혈식 석실은 적석총을 동반하지 않는다. 동조는 낙랑군 횡혈식 석실과 집안 지역 석실의 계통 관계가 희박하며, 평양 지역에서 5세기대 횡혈식 석실로 계승되지 않고 4세기대에 소멸했다고 지적한다. 즉, 낙랑군 횡혈식 석실은 낙랑군·대방군 말기에 나타나 낙랑 묘제의 종말과 함께 사라진 묘제라고 할 수 있다.[8]
오영찬은 평양 지역 횡혈식 석실을 고구려 묘제라고 주장하며 낙랑군 멸망 이후에 나타났다고 보았지만, 평양 지역 횡혈식 석실은 낙랑군 존속 시기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고, 멸망 이후에도 계속 만들어졌다.[7] 고구 켄지는 평양 지역 초기 횡혈식 석실묘가 고구려 묘제라면 왜 5세기대 횡혈식 석실로 계승되지 않는지 설명해야 하며, 요동·산동 등 고구려 이외 지역을 포함해 비교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6]
2. 1. 기원과 전개
굴식 돌방무덤은 영국의 고분(선도분, Passage grave) 등 유럽이나 인도 등에서도 보편적으로 보이는 묘역 내부 시설이지만, 특히 일본의 경우에는 고분 시대 전기의 점토곽에 의한 수혈식 묘실이나 수혈식 석실에 대한 개념으로, 중국의 전곽묘(塼槨墓)의 영향을 받으면서 신라 등 한반도 제국 및 일본에서 발전·성행한 횡혈식 고분 내부 시설로서의 묘실을 가리키는 개념이다.횡혈식 석실은 중국 한대에 전(塼)으로 축조된 것이 발달한 중국 대륙 계통의 묘제이며, 조선을 거쳐 일본에 전해진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고구려의 영향이 5세기경에 백제나 가야 제국을 경유하여 일본에도 전파된 것으로 보이며, 주로 6세기부터 7세기의 고분에서 활발하게 만들어졌다. 나라현의 이시부타이 고분과 같이 거석을 사용하는 것이 전형적이지만 (이시부타이의 경우 묘역이 소실됨), 중국의 전곽묘를 의식한 듯한 절석이나 평석을 서로 맞물려 쌓는 전곽식 석실이라고 불리는 것도 있다.
횡혈식 석실은 한나라가 한반도에 설치한 식민지인 낙랑군의 중심지였던 평양 지역, 그리고 후에 낙랑군에서 분리된 대방군이 위치했던 황해도 지역의 이른바 "낙랑 고분군"에 다수 분포한다. 즉, 낙랑구역 낙랑동, 두단동 조왕리, 남사리, 정백동, 순천시 남옥리 등이다. 이 발견으로 낙랑군이 평양 부근을 지배했고, 한나라가 조선의 발전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 강조된다[2].
북한 학자는 한나라 묘를 다루면서 그것들을 고구려의 묘제로 재해석하고 있다[2]. 중국 한나라 묘와 부인할 수 없는 유사성을 가진 유물 때문에, 북한 학자는 분묘의 피장자는 고구려인이거나, 또는 위조라고 주장하며, "결코 분묘의 조선적 특성을 부정하는 근거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3]. 북한 학자에 따르면, 분묘를 한나라 묘로 보는 견해는 조선의 중국 사대주의자와 일본 제국주의자에 의해 날조되었다고 한다[4].
그러나 횡혈식 석실은 낙랑군의 재지 묘제에 계통을 둔 것이 아니라, 외래적 묘제이기 때문에, 석재 천정 전실의 피장자와 마찬가지로 요동 등의 주변 지역에서 낙랑군으로 유입된 신흥 호족층의 묘제일 가능성이 높다[5]. 중국 동북부의 한나라 묘 자료와의 비교에서, 낙랑 전실묘의 주류를 이루는 전형적인 궁륭식 전천정 단실 전실은 특히 요동과의 관련성이 강하다. 석재 천정 전실과 횡혈식 석실은 모두 궁륭식 전천정 전실과 병행하여 조영된 묘제이기 때문에, 북한 학자가 주장하는 전천정 전실→석재 천정 전실→횡혈식 석실이라는 변화는 성립하지 않으며, 오히려 석재 천정 전실은 횡혈식 석실의 천정 형태가 전천정 전실에 도입된 것이고, 3세기 중엽부터 4세기의 평양 지역에서는 궁륭식 전천정 단실 전실, 석재 천정 전실, 횡혈식 석실이라는 삼묘제가 공존했다.
주목할 것은 횡혈식 석실이라는,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새로운 묘제의 출현이며, 그 출현 시기는 2세기 후엽부터 3세기 전엽에 거슬러 올라가며, 3세기 중엽 이후에 본격적으로 성행한다[6]. 따라서 낙랑군에서의 외래적인 묘제의 출현은 공손씨와의 관계에서 해석된다. 공손도는 중평 6년(189년)에 요동 태수가 되자, 초평 원년(190년)에 요동후·평주목을 자칭하고 요동을 지배하에 두었다. 중국 본토에서 난을 피하기 위해 많은 인사들이 산둥반도에서 해로를 통해 요동을 거쳐 공손씨 지배하의 낙랑군·대방군으로 유입되었으며, 이는 새로운 묘제를 채용하는 계기가 된다[7].
이로 볼 때, 낙랑군의 재지 묘제에 계통을 둔 것이 아닌, 외래적 묘제인 횡혈식 석실의 출현·성행의 배경에는, 공손씨에 의한 낙랑군·대방군 지배, 그 후 위에 의한 낙랑군·대방군 접수, 이어지는 서진에 의한 낙랑군·대방군 지배라는 약 80년 동안 3번이나 낙랑군·대방군의 지배자가 교체되는 등 낙랑군·대방군의 정세가 격변하는 가운데, 주변 지역에서 횡혈식 석실 묘제가 유입되었으며, 인접한 요동에서 후한 후기부터 판석 적석 석실이 조영되고 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8].
다만, 이순진이 주장하는, 낙랑군의 횡혈식 석실이 고구려 계통일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는 고구려 초기의 횡혈식 석실을 동반하는 방단 계단식 석실 적석총에서 유례가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4세기 이후로 편년되었기 때문에, 낙랑군의 횡혈식 석실이 선행하며, 또한 당연하지만 낙랑군의 횡혈식 석실은 적석총을 동반하지 않는다. 동조는 낙랑군의 횡혈식 석실과 집안 지역의 석실과의 계통 관계는 희박하며, 남정리 119호분 등 최종 형태의 횡혈식 석실은 평양 지역에서의 5세기 대의 횡혈식 석실로 계승되지 않고, 전실묘와 함께 4세기 대에 소멸되었다고 지적하고 있으며, 낙랑군의 횡혈식 석실은 낙랑군·대방군 말기에 나타나 낙랑적 묘제의 종말과 함께 소멸한 묘제라고 할 수 있다[8].
오영찬은 평양 지역의 횡혈식 석실을 고구려의 묘제라고 하면서, 그 출현을 낙랑군 멸망 이후로 보고, 종래의 전실묘가 계속 조영되는 대방군 지역과의 차이를 지적하지만, 이 시기의 낙랑군과 대방군의 묘제에 차이가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평양 지역의 횡혈식 석실은 낙랑군 존속 시기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고, 낙랑군 멸망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조영된 묘제로 보인다. 따라서 낙랑군 지역도 대방군 지역과 마찬가지로, 멸망 이후 곧바로 고구려의 묘제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멸망 전에 유입된 신흥 집단이 어느 정도 존속하여, 기존의 묘제가 지속되었다[7]. 고구 켄지는 "조선 연구자는 평양 지역의 초기 횡혈식 석실묘를 고구려의 묘제로 보지만, 만약 고구려의 묘제였다면, 왜 평양 지역에서의 5세기 대의 횡혈식 석실로 계승되지 않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요동·산동 등 고구려 이외의 지역을 포함하여 비교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하고 있다[6].
2. 2. 특징
굴식 돌방무덤은 영국의 고분(Passage grave영어) 등 유럽이나 인도 등에서도 보편적으로 보이는 묘역 내부 시설이지만, 특히 일본의 경우에는 고분 시대 전기의 점토곽에 의한 수혈식 묘실이나 수혈식 석실에 대한 개념으로, 중국의 전곽묘(塼槨墓)의 영향을 받으면서 신라 등 한반도 제국 및 일본에서 발전·성행한 횡혈식 고분 내부 시설로서의 묘실을 가리키는 개념이다.횡혈식 석실은 중국 한대에 전(塼)으로 축조된 것이 발달한 중국 대륙 계통의 묘제이며, 조선을 거쳐 일본에 전해진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고구려의 영향이 5세기경에 백제나 가야 제국을 경유하여 일본에도 전파된 것으로 보이며, 주로 6세기부터 7세기의 고분에서 활발하게 만들어졌다. 나라현의 이시부타이 고분과 같이 거석을 사용하는 것이 전형적이지만 (이시부타이의 경우 묘역이 소실됨), 중국의 전곽묘를 의식한 듯한 절석이나 평석을 서로 맞물려 쌓는 전곽식 석실이라고 불리는 것도 있다.
횡혈식 석실은 한나라가 한반도에 설치한 식민지인 낙랑군의 중심지였던 평양 지역, 그리고 후에 낙랑군에서 분리된 대방군이 위치했던 황해도 지역의 이른바 "낙랑 고분군"에 다수 분포한다. 낙랑구역 낙랑동, 두단동 조왕리, 남사리, 정백동, 순천시 남옥리 등이 그 예이다. 이 발견으로 낙랑군이 평양 부근을 지배했고, 한나라가 조선의 발전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 강조된다[2].
북한 학자는 한나라 묘를 다루면서 그것들을 고구려의 묘제로서 재해석하고 있다[2]. 중국 한나라 묘와 부인할 수 없는 유사성을 가진 유물 때문에, 북한 학자는 분묘의 피장자는 고구려인이거나, 또는 위조라고 주장하며, "결코 분묘의 조선적 특성을 부정하는 근거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3]. 북한 학자에 따르면, 분묘를 한나라 묘로 보는 견해는 조선의 중국 사대주의자와 일본 제국주의자에 의해 날조되었다고 한다[4]. 그러나 횡혈식 석실은 낙랑군의 재지 묘제에 계통을 둔 것이 아니라, 외래적 묘제이기 때문에, 석재 천정 전실의 피장자와 마찬가지로 요동 등의 주변 지역에서 낙랑군으로 유입된 신흥 호족층의 묘제일 가능성이 높다[5].
중국 동북부의 한나라 묘 자료와의 비교에서, 낙랑 전실묘의 주류를 이루는 전형적인 궁륭식 전천정 단실 전실은 특히 요동과의 관련성이 강하다. 석재 천정 전실과 횡혈식 석실은 모두 궁륭식 전천정 전실과 병행하여 조영된 묘제이기 때문에, 북한 학자가 주장하는 전천정 전실→석재 천정 전실→횡혈식 석실이라는 변화는 성립하지 않으며, 오히려 석재 천정 전실은 횡혈식 석실의 천정 형태가 전천정 전실에 도입된 것이고, 3세기 중엽부터 4세기의 평양 지역에서는 궁륭식 전천정 단실 전실, 석재 천정 전실, 횡혈식 석실이라는 삼묘제가 공존했다. 주목할 것은 횡혈식 석실이라는,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새로운 묘제의 출현이며, 그 출현 시기는 2세기 후엽부터 3세기 전엽에 거슬러 올라가며, 3세기 중엽 이후에 본격적으로 성행한다[6].
따라서 낙랑군에서의 외래적인 묘제의 출현은 공손씨와의 관계에서 해석된다. 공손도는 중평 6년(189년)에 요동 태수가 되자, 초평 원년(190년)에 요동후·평주목을 자칭하고 요동을 지배하에 두었다. 중국 본토에서 난을 피하기 위해 많은 인사들이 산둥반도에서 해로를 통해 요동을 거쳐 공손씨 지배하의 낙랑군·대방군으로 유입되었으며, 이는 새로운 묘제를 채용하는 계기가 된다[7]. 이로 볼 때, 낙랑군의 재지 묘제에 계통을 둔 것이 아닌, 외래적 묘제인 횡혈식 석실의 출현·성행의 배경에는, 공손씨에 의한 낙랑군·대방군 지배, 그 후 위에 의한 낙랑군·대방군 접수, 이어지는 서진에 의한 낙랑군·대방군 지배라는 약 80년 동안 3번이나 낙랑군·대방군의 지배자가 교체되는 등 낙랑군·대방군의 정세가 격변하는 가운데, 주변 지역에서 횡혈식 석실 묘제가 유입되었으며, 인접한 요동에서 후한 후기부터 판석 적석 석실이 조영되고 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8].
다만, 이순진이 주장하는, 낙랑군의 횡혈식 석실이 고구려 계통일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는 고구려 초기의 횡혈식 석실을 동반하는 방단 계단식 석실 적석총에서 유례가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4세기 이후로 편년되었기 때문에, 낙랑군의 횡혈식 석실이 선행하며, 또한 당연하지만 낙랑군의 횡혈식 석실은 적석총을 동반하지 않는다. 동조는 낙랑군의 횡혈식 석실과 집안 지역의 석실과의 계통 관계는 희박하며, 남정리 119호분 등 최종 형태의 횡혈식 석실은 평양 지역에서의 5세기 대의 횡혈식 석실로 계승되지 않고, 전실묘와 함께 4세기 대에 소멸되었다고 지적하고 있으며, 낙랑군의 횡혈식 석실은 낙랑군·대방군 말기에 나타나 낙랑적 묘제의 종말과 함께 소멸한 묘제라고 할 수 있다[8].
오영찬은 평양 지역의 횡혈식 석실을 고구려의 묘제라고 하면서, 그 출현을 낙랑군 멸망 이후로 보고, 종래의 전실묘가 계속 조영되는 대방군 지역과의 차이를 지적하지만, 이 시기의 낙랑군과 대방군의 묘제에 차이가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평양 지역의 횡혈식 석실은 낙랑군 존속 시기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고, 낙랑군 멸망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조영된 묘제로 보인다. 따라서 낙랑군 지역도 대방군 지역과 마찬가지로, 멸망 이후 곧바로 고구려의 묘제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멸망 전에 유입된 신흥 집단이 어느 정도 존속하여, 기존의 묘제가 지속되었다[7]. 고구 켄지는 "조선 연구자는 평양 지역의 초기 횡혈식 석실묘를 고구려의 묘제로 보지만, 만약 고구려의 묘제였다면, 왜 평양 지역에서의 5세기 대의 횡혈식 석실로 계승되지 않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요동·산동 등 고구려 이외의 지역을 포함하여 비교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하고 있다[6].
3. 일본의 횡혈식 석실
- 이시부타이 고분(나라현 다카이치군 아스카): 거대한 화강암을 쌓아 올린 양 소매식 석실이다. 석관은 응회암으로 만든 가옥형 석관으로 추정된다.
- 미세마루야마 고분(나라현 가시하라시): 전체 길이 28.4m로, 전국 제1위 규모이다. 가장 큰 석재는 100ton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 하나야마즈카 고분(나라현 사쿠라이시): 한반도의 전곽분과 매우 흡사한 벽돌 쌓기 석실로, 피장자는 도래계로 추정된다.
- 몬슈인니시 고분(나라현 사쿠라이시): 할석 쌓기의 정교한 석실로, 횡혈식 석실의 최종 형태로 보인다.
- 나라 고분군 10호분(군마현 누마타시): 석실이 'ト'자형이라는 드문 구조를 가진다.
- 곤겐야마 2호분(군마현 이세사키시): 동쪽으로 머리를 두는 것을 의식했는지, 연도에 대해 현실이 90° 꺾여 있다.
- 단의즈카혈 (도쿠시마현 미마군 미마정): 타이코즈카, 타나즈카 2고분의 석실 천장 안쪽 면이 약간 활 모양으로 솟아 있고, 평면 형태가 허리가 잘록하고 부풀어 있는 형상으로 고안되었다. 주변 26기의 고분도 이와 비슷한 고안이 이루어져 있다.
3. 1. 기원과 전개
굴식 돌방무덤은 영국의 고분(선도분, Passage grave) 등 유럽이나 인도 등에서도 보편적으로 보이는 묘역 내부 시설이지만, 특히 일본의 경우에는 고분 시대 전기의 점토곽에 의한 수혈식 묘실이나 수혈식 석실에 대한 개념으로, 중국의 전곽묘(塼槨墓)의 영향을 받으면서 신라 등 한반도 제국 및 일본에서 발전·성행한 횡혈식 고분 내부 시설로서의 묘실을 가리키는 개념이다.횡혈식 석실은 중국 한대에 전(塼)으로 축조된 것이 발달한 중국 대륙 계통의 묘제이며, 조선을 거쳐 일본에 전해진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고구려의 영향이 5세기경에 백제나 가야 제국을 경유하여 일본에도 전파된 것으로 보이며, 주로 6세기부터 7세기의 고분에서 활발하게 만들어졌다. 나라현의 이시부타이 고분과 같이 거석을 사용하는 것이 전형적이지만(이시부타이의 경우 묘역이 소실됨), 중국의 전곽묘를 의식한 듯한 절석이나 평석을 서로 맞물려 쌓는 전곽식 석실이라고 불리는 것도 있다.
일본 열도에서도 굴식 돌방무덤 및 굴식 계열 묘실은 4세기 후반부터 북부 큐슈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큐슈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동쪽으로 전파되었다.
- 4세기 후반에는 북부 큐슈의 후쿠오카시에 로시 고분과 쿠와사키 고분이 조성되었다. 각 고분의 봉분 길이는 약 90m와 62m의 전방후원분이다. 로시는 후원부에 3기, 전방부에 1기를, 스기사키는 후원부에 매장 시설이 확인되었다.
- 5세기 초부터 전반기에는 후쿠오카시 니시구에 마루쿠마야마 고분이나 사가현 가라쓰시 하마타마정에 요코타시타 고분[1] 등이 축조되어, 더욱 정형화된 할석(割石) 쌓기 굴식 돌방무덤을 갖게 되었다.
- 5세기 중엽부터 후반기에는 큐슈 북부에서 중부까지 넓어져, 후쿠오카현 야메군 히로카와마치 세키닌야마 고분이나 구마모토현 타마나군 키쿠스이마치 에다후네야마 고분 등과 같이 지역적인 특징을 가진 굴식 돌방무덤이 성행한다. 또한, 북부 큐슈의 각지에서는 석관식 석실 등이 고안되었고, 후쿠오카현 유키하시시에서는 타케나미 굴식 묘군이 알려져 있다. 더 나아가 미야자키현 남부에서 가고시마현 동부에 지하식 굴식 묘가 봉분 아래에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미야자키현 히가시모로카타군 쿠니토미정의 츠카하라 지하식 굴식 묘 A호 등이 있다.
- 큐슈에서 동쪽 지역에서는 5세기대의 고분 매장 시설은 수직갱 계열이 일반적이지만, 획일적인 것은 아니었고 다양한 매장법이 각지에서 행해졌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극히 제한된 지역에서는 굴식 돌방무덤이 채택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오카야마시 센조쿠 고분, 오사카부 사카이시 토즈카 고분 (방분), 후지이데라시 후지노모리 고분, 나라현 카츠라기시 히라오카 서방 고분군 소재 고분, 와카야마현 하시모토시 료잔 고분, 같은 현 와카야마시 이와하시센즈카 고분군의 오타니 22호분, 같은 하나야마 6호분, 나라현 츠바키이 토미야마 고분 (원분), 후쿠이현 미카타카미나카군 와카사정 무카이야마 1호분, 미에현 시마시 오조카 고분, 아이치현 니시오시 아나칸논 고분 등에 극히 제한되어 있다.
- 6세기가 되면서 굴식 돌방무덤이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 한반도에서 일반화되던 굴식 돌방이 일본의 각지로 확산되는 데에는 약 1세기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 646년(다이카 2) 박장령이 공포되었다.
3. 2. 특징
굴식 돌방무덤은 영국의 고분(羨道墳, Passage grave) 등 유럽이나 인도 등에서도 보편적으로 보이는 묘역 내부 시설이지만, 특히 일본의 경우에는 고분 시대 전기의 점토곽에 의한 수혈식 묘실이나 수혈식 석실에 대한 개념으로, 중국의 전곽묘(塼槨墓)의 영향을 받으면서 신라 등 한반도 제국 및 일본에서 발전·성행한 횡혈식 고분 내부 시설로서의 묘실을 가리키는 개념이다.횡혈식 석실은 중국 한대에 전(塼)으로 축조된 것이 발달한 중국 대륙 계통의 묘제이며, 조선을 거쳐 일본에 전해진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고구려의 영향이 5세기경에 백제나 가야 제국을 경유하여 일본에도 전파된 것으로 보이며, 주로 6세기부터 7세기의 고분에서 활발하게 만들어졌다. 나라현의 이시부타이 고분과 같이 거석을 사용하는 것이 전형적이지만 (이시부타이의 경우 묘역이 소실됨), 중국의 전곽묘를 의식한 듯한 절석이나 평석을 서로 맞물려 쌓는 전곽식 석실이라고 불리는 것도 있다.
일본 열도에서도 굴식 돌방무덤 및 굴식 계열 묘실은 4세기 후반부터 북부 큐슈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큐슈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동쪽으로 전파되었다.
시기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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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후반 | 북부 큐슈의 후쿠오카시에 로시 고분과 쿠와사키 고분이 조성되었다. 각 고분의 봉분 길이는 약 90m와 62m의 전방후원분이다. 로시는 후원부에 3기, 전방부에 1기를, 스기사키는 후원부에 매장 시설이 확인되었다. |
5세기 초 ~ 전반기 | 후쿠오카시 니시구에 마루쿠마야마 고분이나 사가현 가라쓰시 하마타마정에 요코타시타 고분[1] 등이 축조되어, 더욱 정형화된 할석(割石) 쌓기 굴식 돌방무덤을 갖게 되었다. |
5세기 중엽 ~ 후반기 | 큐슈 북부에서 중부까지 넓어져, 후쿠오카현 야메군 히로카와마치 세키닌야마 고분이나 구마모토현 타마나군 키쿠스이마치 에다후네야마 고분 등과 같이 지역적인 특징을 가진 굴식 돌방무덤이 성행한다. 북부 큐슈의 각지에서는 석관식 석실 등이 고안되었고, 후쿠오카현 유키하시시에서는 타케나미 굴식 묘군이 알려져 있다. 미야자키현 남부에서 가고시마현 동부에 지하식 굴식 묘가 봉분 아래에 만들어졌다. (예: 미야자키현 히가시모로카타군 쿠니토미정의 츠카하라 지하식 굴식 묘 A호) |
5세기 | 큐슈 동쪽 지역에서는 고분 매장 시설은 수직갱 계열이 일반적이었으나, 다양한 매장법이 각지에서 행해졌다. 극히 제한된 지역에서는 굴식 돌방무덤이 채택되기 시작했다. (예: 오카야마시 센조쿠 고분, 오사카부 사카이시 토즈카 고분 (방분), 후지이데라시 후지노모리 고분, 나라현 카츠라기시 히라오카 서방 고분군 소재 고분, 와카야마현 하시모토시 료잔 고분, 와카야마시 이와하시센즈카 고분군의 오타니 22호분/하나야마 6호분, 나라현 츠바키이 토미야마 고분 (원분), 후쿠이현 미카타카미나카군 와카사정 무카이야마 1호분, 미에현 시마시 오조카 고분, 아이치현 니시오시 아나칸논 고분) |
6세기 | 굴식 돌방무덤이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 한반도에서 일반화되던 굴식 돌방이 일본의 각지로 확산되는 데에는 약 1세기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
646년 (다이카 2) | 박장령이 공포되었다. |
- 이시부타이 고분(나라현[다카이치군 아스카]마을): 거대한 화강암을 쌓아 올린 양 소매식 석실. 석관은 응회암으로 만든 가옥형 석관으로 추정된다.
- 미세마루야마 고분(나라현 [가시하라]시): 전체 길이 28.4m로, 전국 제1위 규모이다. 가장 큰 석재는 100톤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 하나야마즈카 고분(나라현 사쿠라이시): 한반도의 전곽분과 매우 흡사한, 벽돌 쌓기 석실. 피장자는 도래계로 추정된다.
- 몬슈인니시 고분(나라현 사쿠라이시): 할석 쌓기의 정교한 석실. 횡혈식 석실의 최종 형태로 보인다.
- 나라 고분군 10호분(군마현 누마타시): 석실이 'ト'자형이라는 드문 구조를 가진다.
- 곤겐야마 2호분(군마현 이세사키시): 동쪽으로 머리를 두는 것을 의식했는지, 연도에 대해 현실이 90° 꺾여 있다.
- 단의즈카혈(도쿠시마현 미마군 미마마치)의 타이코즈카, 타나즈카 2고분: 석실 천장 안쪽 면이 약간 활 모양으로 솟아 있고, 평면 형태가 허리가 잘록하고 부풀어 있는 형상으로 고안되었다. 주변 26기의 고분도 이와 비슷한 고안이 이루어져 있다.
4. 횡혈식 석실의 의의
굴식 돌방무덤은 영국의 고분(선도분, Passage grave) 등 유럽이나 인도 등에서도 보편적으로 보이는 묘역 내부 시설이지만, 특히 일본의 경우에는 고분 시대 전기의 점토곽에 의한 수혈식 묘실이나 수혈식 석실에 대한 개념으로, 중국의 전곽묘(塼槨墓)의 영향을 받으면서 신라 등 한반도 제국 및 일본에서 발전·성행한 횡혈식 고분 내부 시설로서의 묘실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횡혈식 석실은 중국 한대에 전(塼)으로 축조된 것이 발달한[2] 중국 대륙 계통의 묘제이며[3], 조선을 거쳐 일본에 전해진 것이다[4]. 구체적으로는 고구려의 영향이 5세기경에 백제나 가야 제국을 경유하여 일본에도 전파된 것으로 보이며, 주로 6세기부터 7세기의 고분에서 활발하게 만들어졌다. 나라현의 이시부타이 고분과 같이 거석을 사용하는 것이 전형적이지만 (이시부타이의 경우 묘역이 소실됨), 중국의 전곽묘를 의식한 듯한 절석이나 평석을 서로 맞물려 쌓는 전곽식 석실이라고 불리는 것도 있다.
5. 갤러리
5. 1. 畿内型石室の変遷
5. 2. 地方石室
- 이시부타이 고분(나라현 다카이치군 아스카) : 거대한 화강암을 쌓아 올린 양 소매식 석실이다. 석관은 응회암으로 만든 가옥형 석관으로 추정된다.
- 미세마루야마 고분(나라현 가시하라시) : 전체 길이 28.4m로, 전국 제1위 규모이다. 가장 큰 석재는 100톤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 하나야마즈카 고분(나라현 사쿠라이시) : 한반도의 전곽분과 매우 흡사한, 벽돌 쌓기 석실이 있다. 피장자는 도래계로 추정된다.
- 몬슈인니시 고분(나라현 사쿠라이시) : 할석 쌓기의 정교한 석실이 있으며, 횡혈식 석실의 최종 형태로 보인다.
- 나라 고분군 10호분(군마현 누마타시) : 석실이 'ト'자형이라는 드문 구조를 가진다.
- 곤겐야마 2호분(군마현 이세사키시) : 동쪽으로 머리를 두는 것을 의식했는지, 연도에 대해 현실이 90° 꺾여 있다.
- 단의즈카혈(도쿠시마현 미마군 미마정)의 타이코즈카, 타나즈카 2고분의 석실은 천장 안쪽 면이 약간 활 모양으로 솟아 있고, 평면 형태가 허리가 잘록하고 부풀어 있는 형상으로 고안되었다. 주변 26기의 고분도 이와 비슷한 고안이 이루어져 있다.
5. 3. 平面形特異石室
- 이시부타이 고분(나라현다카이치군 아스카마을) : 거대한 화강암을 쌓아 올린 양 소매식 석실. 석관은 응회암으로 만든 가옥형 석관으로 추정된다.
- 미세마루야마 고분(나라현 가시하라시) : 전체 길이 28.4m로, 전국 제1위 규모이다. 가장 큰 석재는 100톤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 하나야마즈카 고분(나라현 사쿠라이시) : 한반도의 전곽분과 매우 흡사한, 벽돌 쌓기 석실. 피장자는 도래계로 추정된다.
- 몬슈인니시 고분(나라현 사쿠라이시) : 할석 쌓기의 정교한 석실. 횡혈식 석실의 최종 형태로 보인다.
- 나라 고분군 10호분(군마현 누마타시) : 석실이 'ト'자형이라는 드문 구조를 가진다.
- 곤겐야마 2호분(군마현 이세사키시) : 동쪽으로 머리를 두는 것을 의식했는지, 연도에 대해 현실이 90° 꺾여 있다.
- 단의즈카혈(도쿠시마현 미마군 미마마치)의 타이코즈카, 타나즈카 2고분 : 석실은 천장 안쪽 면이 약간 활 모양으로 솟아 있고, 평면 형태가 허리가 잘록하고 부풀어 있는 형상으로 고안되었다. 주변 26기의 고분도 이와 비슷한 고안이 이루어져 있다.
참조
[1]
문서
[2]
서적
Constructing "Korean" Origins: A Critical Review of Archaeology, Historiography, and Racial Myth in Korean State Formation Theories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3]
서적
An Outline History of Korean Historiography
[4]
서적
An Outline History of Korean Historiography
[5]
서적
楽浪・帯方郡塼室墓の再検討 : 塼室墓の分類・編年・および諸問題の考察
国立歴史民俗博物館
2009-03-31
[6]
서적
楽浪・帯方郡塼室墓の再検討 : 塼室墓の分類・編年・および諸問題の考察
国立歴史民俗博物館
2009-03-31
[7]
서적
楽浪・帯方郡塼室墓の再検討 : 塼室墓の分類・編年・および諸問題の考察
国立歴史民俗博物館
2009-03-31
[8]
서적
楽浪・帯方郡塼室墓の再検討 : 塼室墓の分類・編年・および諸問題の考察
国立歴史民俗博物館
2009-03-31
[9]
서적
고등학교 국사
(주)두산
2004-03-01
[10]
서적
楽浪・帯方郡塼室墓の再検討 : 塼室墓の分類・編年・および諸問題の考察
国立歴史民俗博物館
2009-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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