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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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권태순은 1922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8사단 작전참모, 10연대장 등을 역임했으며, 단양 전투, 영천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1951년 2월 횡성 전투에서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이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강릉을 중심으로 추모 및 기념 사업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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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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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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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권태순 |
현지어 표기 | 權泰順 |
본관 | 안동 |
배우자 | 박순남 |
생애 | |
출생 | 일제강점기 강원도 강릉군 (1922년 2월 5일) |
사망 | 대한민국 강원도 횡성 (1951년 2월 12일, 29세) |
군 복무 | |
복무 기간 | 1946년 ~ 1951년 |
최종 계급 | 육군 준장 |
근무 | 육군 제8사단 |
지휘 | 육군 제8사단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오대산 공비 토벌 단양 전투 영천 전투 횡성 전투 |
2. 생애
1922년 2월 5일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1946년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 2기생으로 입학하여 3개월간의 단기 과정을 마치고 같은 해 12월 14일에 졸업했다. 군번은 관례에 따라 성적순[1]으로 받았으며, 박정희는 3등, 권태순은 13등이었다. 졸업 후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춘천에 있던 8연대로 발령[2]받았다.
1947년 2월, 미군이 38선 경비업무를 일부 이관하면서 8연대는 다섯 곳에 경비초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1949년 6월 20일 육군본부 일반명령 제26호에 따라 강릉시에서 10보병연대를 기반으로 8사단이 창설되었다.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권태순은 8사단 10연대 2대대장으로 오대산, 태백산지구에서 게릴라 활동을 벌이던 북한군 유격대 토벌 작전에서 전공을 세웠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8사단 소속으로 참전했다.[3] 8사단은 적의 무전 교란으로 잘못 전달된 이동 명령 때문에 제천에서 대구로 이동했다가 다시 북진하여 단양에서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군과 대치했다. 이때 사단 작전참모였던 정진 소령이 대구 이동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권태순 중령이 후임으로 교체되었다.[3]
1950년 9월, 영천시 전투에서 조선인민군 15사단이 아군의 방어선을 뚫고 영천 읍내로 침입하자, 8사단의 작전참모인 권태순 중령은 조교동 부근 대전차 공격대대와 통신이 끊긴 것을 알고 직접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지프에 올랐으나 적의 습격을 받았다.[4]
1950년 10월, 권태순 중령이 소속된 8사단은 38선을 넘어 평안북도 희천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에게 밀려 후퇴했고, 국군과 연합군의 평양·38도선 철수작전에 함께했다.[1] 1950년 12월 3일, 평양 동북방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방어선이 무너지자 미 제8군은 공군 지원을 받으며 전면 철수했고, 권태순 중령이 이끄는 10연대는 철원군 군탄리로 철수했다.[3]
1951년 2월, 라운드업 작전이 시작되자 8사단은 권태순 대령의 10연대를 중앙에 배치하고 진격했다. 10연대는 홍천과 용두리 사이의 양덕원리(陽德院里)로 향했다.[5] 2월 11일 중공군의 2월 공세가 시작되자, 중앙에 배치되었던 10연대는 사단 사령부와 통신이 끊긴 채 중공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 권태순 대령은 부대원들에게 횡성으로 탈출하라는 명령을 내린 후, 지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자결했다.[6]
2. 1. 생애 초반 (1922년 ~ 1946년)
1922년 2월 5일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2. 2. 생애 중반 (1946년 ~ 1950년)
1946년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 2기생으로 입학하여 3개월간의 단기 과정을 마치고 같은 해 12월 14일에 졸업했다. 군번은 관례에 따라 성적순[1]으로 받았으며, 박정희는 3등, 권태순은 13등이었다. 졸업 후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춘천에 있던 8연대로 발령[2]받았다. 1947년 2월, 미군이 38선 경비업무를 일부 이관하면서 8연대는 다섯 곳에 경비초소를 설치하게 되었다.2. 2. 1. 조선경비사관학교 졸업 및 임관
1946년 9월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여 3개월간의 단기 과정을 마치고 같은 해 12월 14일에 졸업했다. 교육 기간 중 동기 69명이 탈락하고 최종 194명이 졸업했으며, 군번은 관례에 따라 성적순[1]으로 받았다. 1등은 신재식(군번 10164), 박정희(군번 10166)는 3등, 권태순(군번 10176)은 13등이었다.졸업 후 육군 소위로 임관한 권태순은 춘천에 있던 8연대로 발령[2]받았다. 1947년 2월, 미군은 38선 경비업무를 일부 이관하면서 8연대에 다섯 곳의 경비초소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2. 2. 2. 8연대 복무 및 38선 경비
1949년 6월 20일 육군본부 일반명령 제26호에 따라 강릉시에서 10보병연대를 기반으로 8사단이 창설되었다. 권태순은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8사단 10연대 2대대장으로 오대산, 태백산지구에서 게릴라 활동을 벌이던 북한군 유격대 토벌 작전에서 전공을 세웠다.2. 2. 3. 한국전쟁 이전 (1948년 10월 20일 ~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발발 전까지 8사단 10연대 2대대장으로 오대산, 태백산지구에서 게릴라 활동을 벌이던 북한군 유격대 토벌 작전에서 전공을 세웠다. 8사단은 육본 일반명령 제26호에 따라 10보병연대를 기반으로 1949년 6월 20일 강릉시에서 창설되었다.[1]2. 3. 한국전쟁 참전 (1950년 ~ 1951년)
권태순은 8사단 소속으로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참전했다.[3]2. 3. 1. 한국전쟁 발발 (1950년 6월 25일)
권태순은 8사단 소속으로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2. 3. 2. 충북 단양 전투 (1950년 7월 8일 ~ 7월 12일)
8사단은 적의 무전 교란으로 잘못 전달된 이동 명령 때문에 제천에서 대구로 이동했다가 다시 북진하여 단양에서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군과 대치했다. 사단 작전참모였던 정진 소령이 대구 이동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권태순 중령이 후임으로 교체되었다.[3]작전참모 권태순 중령이 작전계획을 성안하고 있었는데 첩보대로부터 긴급보고가 들어왔다. 매포초등학교에 북한군의 사단 전방 지휘소가 설치되고 그 부근에 소수의 경계 병력만이 있을 뿐이고 주력은 제천에서 남침준비를 서두르고 있다는 것이다.[3]
첩보를 확인한 사단장 이정일 대령은 7월 6일 단양에 진출해 북한군의 사단 전방 지휘소를 기습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하지만 8일 야간부터 강행된 북한군의 도하로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3]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자 8사단은 병력과 화력의 열세로 후퇴해야만 했다. 사단 주력이 풍기 지역까지 철수하기에 이르자 사단장은 작전참모 권태순 중령과 제10연대 부연대장 조원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북한군에 대한 양동(陽動) 작전을 시도했다. 모든 차량을 죽령 동남단에서 영주까지 헤드라이트를 켠 채로 밤새도록 운행하게 하여 사단이 영주로 계속 철수하는 것으로 오인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는 동안 10연대와 21연대는 풍기 시내 초등학교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하고 다가올 일전을 준비했다.[3]
단양 전투는 개전 초기 다른 전선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반격까지 하고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축차적으로 물러서는 지연전을 벌여 5일 동안 국군의 전선을 지탱해준 의미 있는 전투였다. 이로 인해 초조해진 북한군 제2군단장 김무정은 충주 공략에 투입된 북한군 제12사단을 이곳으로 전용하게 된다.[3]
2. 3. 3. 경북 영천 전투 (1950년 9월 5일 ~ 9월 13일)
9월 5일, 조선인민군 15사단의 주력부대가 아군의 방어선을 뚫고 영천시 읍 동쪽 1km까지 침투하자, 이성가 8사단장은 대전차 공격대대와 7사단 8연대 2개 대대를 증원했다. 대전차 대대와 8연대는 5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적을 조교동 쪽으로 후퇴시켰다.[4]다음날, 조교동으로 밀려난 적이 병력을 증원받아 영천 읍내로 침입했다. 8사단의 작전참모인 권태순 중령은 조교동 부근을 지키고 있던 대전차 공격대대와의 통신이 끊긴 것을 알고, 직접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지프에 올랐다. 하지만 조교동으로 가는 도중에 적의 습격을 받아 차를 돌려야 했다.[4]
사령부로 되돌아온 권태순 중령은 사단장에게 사태의 긴박성을 보고했다. 사단장은 즉시 사단 지휘소를 오수동으로 이동시킨 다음, 사단본부중대 병력까지 동원하여 금호강 제방에 배치했다. 그리고 작전참모 권태순 중령에게 “하양에 가서 군단장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증원부대를 요청하라!”고 지시했다.[4]
2. 3. 4. 서울 수복과 평양 철수 (1950년 9월 28일 ~ 12월 4일)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연합군은 1950년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했다.[1] 서울 수복 3일만인 10월 1일에는 국군이 38선을 넘었고, 10월 19일 국군과 연합군은 평양 주변에 남은 북한군의 저항을 격파하고 평양을 점령하였다.[1] 이때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했다.[1]1950년 10월 24일부터 10월 30일까지 평안북도 운산군 온정리에서 첫 전투를 치른 중공군은 11월 26일부터 인해전술로 본격적인 대공세를 시작하여 제2차 청천강 전투에서 크게 이겼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이 승리함으로써 국군과 연합군은 1950년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해야만 했다.[1]
권태순 중령이 소속되어 있던 8사단도 1950년 10월 8일 38선을 넘어 평안북도 희천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에게 밀려 후퇴했고, 국군과 연합군의 평양·38도선 철수작전에 함께했다.[1]
2. 3. 5. 평양·38도선 철수작전 (1950년 12월 1일 ~ 12월 4일)
육군 제8사단은 평안북도 희천에서 후퇴하여 평안남도 강동을 거쳐 삼등 부근으로 철수해 흑령산 일대를 점령하고 북한군 패잔병 격멸을 시도했다. 한편 미 제2사단이 평안남도 평성에서 평양시 북쪽으로 철수하자 삼등에 있던 8사단 10연대장 대리 권태순 중령은 평양시 율리(현 평양시 동대원구역 율동)로 이동했고, 21연대는 황해북도 신계로 철수했다.[3]1950년 12월 3일, 평양 동북방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방어선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미 제8군은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전면적인 지상 병력 철수를 시작했다. 이후 권태순 중령이 이끄는 10연대는 1개 중대 규모의 북한군 유격대를 교전 끝에 격멸하고 철원군 군탄리로 철수했다.[3]
2. 3. 6. 1951년 전황과 라운드업 작전 (1951년 1월 ~ 2월 5일)
1951년 1월 말,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중공군의 보급 상황이 좋지 않다는 정보를 바탕으로 반격 작전을 계획했다. 이에 따라 동부전선의 미 10군단장 알몬드는 라운드업 작전을 준비했다. 이 작전의 주요 목표는 홍천 탈환이었으며, 한국군 3, 5, 8사단이 주력 부대로 참여했다. 이 중 8사단이 횡성과 홍천 축선을 따라 공격하는 주공(主攻)을 맡았다.[5]최영희 8사단장은 3개 연대 중 2개 연대를 전진시키고 1개 연대를 예비로 두는 작전계획을 세웠으나, 알몬드 군단장은 예비대 없는 전면 공격을 지시했다. 결국 8사단은 상부의 의도나 적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작전을 시작하게 되었다.[5]
2월 5일, 라운드업 작전이 시작되자 8사단은 하갑청 대령의 21연대를 오른쪽에, 권태순 대령의 10연대를 중앙에, 이존일 대령의 16연대를 왼쪽에 배치하고 진격을 시작했다. 권태순이 이끄는 10연대는 홍천과 용두리 사이의 양덕원리(陽德院里)로 향했다.[5]
2월 8일, 10연대는 성지산 동남쪽에 도착했지만, 북한군 제7사단의 저항에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2월 10일까지 교착 상태가 지속되었으며, 2월 11일 중공군의 2월 공세가 시작되었다.[5]
2. 3. 7. 강원 횡성전투 (1951년 2월 11일 ~ 2월 12일)
1951년 2월 11일, 중공군은 횡성을 공격 지점으로 선택했다. 국군 8사단 정면에 중공군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지만, 미군 측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당시 권태순 대령이 이끌던 10연대 전방에는 한선초 장군이 지휘하는 중공군 40군 예하 3개 사단(118, 119, 120사단)이 집결해 있었다.[6]2월 12일 새벽 2시, 중공군은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중공군 40군은 갈기산을 넘어 권태순 대령의 10연대를 덮쳤다. 동시에 중공군 66군은 21연대를, 중공군 39군은 16연대를 공격했다. 이로써 국군 8사단 3개 연대는 각각 중공군 1개 사단 병력에게 공격받는 상황에 놓였다. 북한군까지 합세한 중공군과 국군 8사단의 병력 비율은 7.3:1로, 국군은 압도적인 열세에 놓였다.[6]
중앙에 배치되었던 10연대는 사단 사령부와 통신이 끊긴 채 중공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 10연대장 권태순 대령은 부대원들에게 횡성으로 탈출하라는 명령을 내린 후, 지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자결했다. 일부에서는 적의 공격으로 전사했다고 주장하지만, 호위병 이재영 중사의 증언에 따르면 권 대령은 부하들에게 탈출 명령을 내린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6]
10연대가 궤멸되자, 우측의 21연대도 흩어져 후퇴했고, 고립된 16연대 역시 중공군의 공격을 받으며 후퇴했다. 결국 국군 8사단은 횡성 서북쪽에서 와해되었고, 대부분의 병력은 산악 지대에서 포위되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극히 일부만이 살아남았다.[6]
3. 사후
권태순은 전사 후 이재영 중사에 의해 현지에 가매장되었다. 1개월 후, 8사단 재편성 과정에서 당시 10연대장 정강 대령의 지시로 시신을 찾아 대구에서 화장했다. 이후 강릉시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강릉시 운산면에 있는 묘소에 안장되었다.
3. 1. 현충원 안장
1970년 4월 14일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되어 안장되었다. 배우자 박순남과 1999년 9월 18일 합장되었다.[10]장성명 | 계급 | 군번 | 신분 | 사망일자 | 사망장소 | 소속 | 안장일자 | 안장장소 | 묘역/묘판/묘비 |
---|---|---|---|---|---|---|---|---|---|
권태순 | 준장 | 10176 | 육군 장군 | 1951-02-12 | 강원 횡성 | 8사단 | 1970-04-14 | 서울 | 제1장군-40 |
3. 2. 추모 및 기념 사업
강릉시 초대 시장 최돈영은 이승만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1957년 12월 10일 강릉시 노암동 671-1번지에 권태순 장군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충혼비에는 "권 장군이여! ...(중략)... 길이 빛나리라"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1974년 10월 26일, 강원도지사 박종성과 강릉시장 이창석은 장군의 전공을 후세에 알리고자 강릉시 남산공원에 권태순 장군 전공비를 건립하였다.
2012년 10월,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에 위치한 강릉통일공원에 높이 5.8m의 권태순 장군 동상이 건립되어 장군의 빛나는 전공을 후세에 널리 알리고 있다.[11]
2015년 3월 19일, 강릉보훈지청은 청사 3층 대회의장을 '''권태순 장군 홀'''로 명명하고 호국영웅 관련 전시물을 게시하여 개방하는 현판식을 거행했다.[12]
이외에도 권태순 장군은 영천대첩과 다부동 전투 전적지 비문에 등재되어 있다.
참조
[1]
문서
장교의 군번은 성적순으로 결정된다.
[2]
문서
육사 2기 졸업앨범
[3]
서적
한국전쟁사
국방부, 전쟁기념사업회
[4]
간행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5]
서적
콜디스트 윈터
[6]
서적
북진개시
[7]
서적
밀물과 썰물
[8]
서적
군과 나
[9]
서적
한국전쟁비사
[10]
웹인용
국립서울현충원 안장관리
http://www.snmb.mil.[...]
2016-10-10
[11]
웹인용
강원신문
http://www.gwnews.or[...]
2016-10-14
[12]
웹사이트
강릉보훈지청
http://cafe.naver.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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