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법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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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법린은 대한민국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인이다. 영천 출생으로, 승려가 되어 법명 범산, 필명 김철아를 사용했다. 3·1 운동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이후 프랑스 유학, 불교청년회 중흥, 조선어사전편찬회 참여 등 불교계와 교육계에서 활동했으며, 만당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투옥되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불교중앙총무위원, 동국학원 이사장, 초대 총선 중앙선거위원회 위원, 문교부 장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정치 활동을 했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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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는 647년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로, 이름 변경과 소실 및 재건을 거쳐 1783년 현재 이름으로 개칭되었으며, 내설악의 대표 사찰이자 만해 한용운의 저술 활동 장소,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은둔 생활 장소로 알려져 있고,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기본선원이자 목조아미타불좌상 등 다수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 대한민국의 종교 지도자 - 문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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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법린 | |
|---|---|
| 기본 정보 | |
| 한자 표기 | 金法麟 |
| 출생 | 1901년 10월 25일 |
| 사망 | 1966년 10월 18일 (64세) |
| 본관 | 김해(金海) |
| 학력 | |
| 최종 학력 |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졸업 |
| 경력 | |
| 주요 경력 | 문교부 장관 제2대 국회의원 제3대 국회의원 |
| 기타 | |
| 종교 | 천주교 |
2. 생애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나 경상남도 동래에서 성장하였다. 불교 승려 출가 이후 법명을 '''범산'''(梵山), 필명을 '''김철아'''(金鐵啞)로 썼다. 14세인 1914년 은해사로 출가하고 이듬해 범어사의 명정학교 1년 과정을 마친 후 강원에서 사교과를 수료하였다. 그 뒤 신학문을 익히기 위해 서울의 휘문고보에 들어갔다가 1918년 불교중앙학림(현 동국대학교)으로 편입하였다.[2]
1919년 3·1 운동 때 경성부에서 한용운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동래 범어사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3·1 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범어사의 대표 자격으로 서울로 올라갔으며, 3월 4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범어사로 내려와 만세운동을 계획해 3월 18일 동래읍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1]
만세운동 후 1919년 4월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는 불교학교인 불교중앙학림 내에 설치된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의 대표 자격으로 파견되었다. 한국민단본부는 승려 백초월을 중심으로 중앙학림 출신 승려 수십 명이 결성한 항일비밀결사로서 기관지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하는 한편 군자금 수합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민단본부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만주 등지에 부원(部員)을 파견하여 국외독립운동과의 연결을 꾀하였다.[1]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1919년 5월경 다시 한국에 들어 왔다. 1919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1884년에서 1910년까지의 일제침략 자료를 수집, 정리하고 이를 복사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한국에서 그는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비롯하여 국외 독립운동의 소식을 국내에 전달하기 위하여 「화신공보(華新公報)」를 발간하여 지방까지 배포하면서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만주로 넘어가 독립운동 기관지인 혁신공보를 발행하여 국내에 반입하였다. 안동현 육도구(六道溝)에 동광상점(東光商店)으로 위장한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하고 상하이의 신상완과 백성욱, 김상헌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승려들의 단결을 위해 노력하였다.[1]
1920년 불교중앙학림을 졸업하고 백성욱, 신상완 등과 함께 상하이로 건너가 의용승군(義勇僧軍)을 계획하고 한국에 들어왔으나 동지가 체포되어 다시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921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파리 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재학하면서 파리에 본부를 둔 피압박민족대회에서 한국 대표로 활약하였고, 서구의 자유사상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다. 1926년 철학과를 졸업하고 1928년 초에 귀국하였다.[1]
1928년 백성욱, 김상호 등과 함께 불교청년회의 중흥을 도모하였고, 1929년 1월 조선불교 선교양종승려대회를 개최하여 불교의 자주화를 위해 헌신하였다. 1929년 봄 조선어학회가 주관하는 조선어사전편찬회의 준비위원으로 참가하였다.[1]
1930년 5월 한용운의 지도 아래 만당(卍黨)을 조직하여 항일비밀결사운동을 전개하였다. 만당은 다솔사(多率寺)를 근거지로 비밀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일본 도쿄에까지 지부를 설치하였다. 김법린은 1930년 도쿄지부의 책임을 맡으면서 고마자와대학에서 불교를 연구하고 1931년 도쿄에서 조선청년동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펼쳤다. 1933년부터는 다솔사를 비롯하여 해인사·범어사 등에서 교학을 강의하는 한편,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데 힘을 쏟았다.[1]
1938년 말 만당의 조직이 일경에 발각되면서 1938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검거 투옥되었다. 출옥 후 얼마 안 있어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체포되었다.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1]
1945년 겨울, 광복을 맞이한 김법린은 불교중앙총무위원으로 선출되어 당시 미군정 장관 존 리드 하지 장군을 만나 일본인 승려들이 거주하던 사찰을 종단에서 인수하도록 요청했다. 김구가 모스크바 삼상 회담에 반발하여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 위원이 되었다[6][3]
이후 동국학원의 이사장이 되었으며[1], 1948년 3월에는 미군정청 군정 장관 딘 러스크 소장으로부터 초대 총선을 관리하기 위한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49년 8월 2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고[4][7], 1952년에는 문교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53년에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으며, 제3대 민의원에서 활동하는 등 정치에도 참여했다. 1959년에는 원자력원장, 1963년에는 동국대학교 총장이 되어 인재 양성과 교육에도 특별한 열의를 보였다. 1964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 외에도 입법 의원, 대한국민감찰위원, 고시위원장, 경성불교전문학교 교수, 범어사 불교전문강원 원감, 동국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2. 1. 생애 초기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나 경상남도 동래에서 성장하였다. 불교 승려 출가 이후 법명을 '''범산'''(梵山), 필명을 '''김철아'''(金鐵啞)로 썼다. 14세인 1914년 은해사로 출가하고 이듬해 범어사의 명정학교 1년 과정을 마친 후 강원에서 사교과를 수료하였다. 그 뒤 신학문을 익히기 위해 서울의 휘문고보에 들어갔다가 1918년 불교중앙학림(현 동국대학교)으로 편입하였다.[2]2. 2. 독립 운동
1919년 3·1 운동 때 경성부에서 한용운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동래 범어사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3·1 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범어사의 대표 자격으로 서울로 올라갔으며, 3월 4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범어사로 내려와 만세운동을 계획해 갔다. 그리하여 3월 18일 동래읍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1]그는 만세운동 후 경찰의 경계망을 피하여 1919년 4월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이때 그는 불교학교인 불교중앙학림 내에 설치된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의 대표 자격으로 파견된 것이었다. 한국민단본부는 승려 백초월을 중심으로 중앙학림 출신 승려 수십 명이 결성한 항일비밀결사로서 기관지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하는 한편 군자금 수합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민단본부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만주 등지에 부원(部員)을 파견하여 국외독립운동과의 연결을 꾀하였다.[1]
이러한 임무를 띠고 상하이에 파견되었던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국내 파견원의 자격으로 1919년 5월경 다시 한국에 들어 왔다. 1919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1884년에서 1910년까지의 일제침략 자료를 수집, 정리하고 이를 복사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한국에서 그는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비롯하여 국외 독립운동의 소식을 국내에 전달하기 위하여 「화신공보(華新公報)」를 발간하여 지방까지 배포하면서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만주로 넘어가 독립운동 기관지인 혁신공보를 발행하여 국내에 반입하였다. 안동현 육도구(六道溝)에 동광상점(東光商店)으로 위장한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하고 상하이의 신상완과 백성욱, 김상헌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승려들의 단결을 위해 노력하였다.[1]
2. 3. 승려 활동
1920년 불교중앙학림을 졸업하고 백성욱, 신상완 등과 함께 상하이로 건너가 의용승군(義勇僧軍)을 계획하고 한국에 들어왔으나 동지가 체포되어 다시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의용승군 계획은 전국의 승려들을 군사체제로 조직하여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사전 발각되어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1]1921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승려로서 외국 유학을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는 폭넓은 세계를 접하고 그 속에서 조국 독립의 길을 모색하고자 했다.[1] 파리 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재학하면서 파리에 본부를 둔 피압박민족대회에서 한국 대표로 활약하였고, 서구의 자유사상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다. 1926년 철학과를 졸업하고 1928년 초에 귀국하였다.[1]
1928년 백성욱, 김상호 등과 함께 불교청년회의 중흥을 도모하였고, 1929년 1월 조선불교 선교양종승려대회를 개최하여 불교의 자주화를 위해 헌신하였다. 1929년 봄 조선어학회가 주관하는 조선어사전편찬회의 준비위원으로 참가하였다.[1]
1930년 5월 한용운의 지도 아래 만당(卍黨)을 조직하여 항일비밀결사운동을 전개하였다. 만당은 다솔사(多率寺)를 근거지로 비밀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일본 도쿄에까지 지부를 설치하였다. 김법린은 1930년 도쿄지부의 책임을 맡으면서 고마자와대학에서 불교를 연구하고 1931년 도쿄에서 조선청년동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펼쳤다. 1933년부터는 다솔사를 비롯하여 해인사·범어사 등에서 교학을 강의하는 한편,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데 힘을 쏟았다.[1]
1938년 말 만당의 조직이 일경에 발각되면서 1938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검거 투옥되었다. 출옥 후 얼마 안 있어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체포되었다.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1]
2. 4. 광복 이후
1945년 겨울, 광복을 맞이한 김법린은 불교중앙총무위원으로 선출되어 당시 미군정 장관 존 리드 하지 장군을 만나 일본인 승려들이 거주하던 사찰을 종단에서 인수하도록 요청했다. 김구가 모스크바 삼상 회담에 반발하여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 위원이 되었다[6][3]이후 동국학원의 이사장이 되었으며[1], 1948년 3월에는 미군정청 군정 장관 딘 러스크 소장으로부터 초대 총선을 관리하기 위한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49년 8월 2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고[4][7], 1952년에는 문교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53년에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으며, 제3대 민의원에서 활동하는 등 정치에도 참여했다. 1959년에는 원자력원장, 1963년에는 동국대학교 총장이 되어 인재 양성과 교육에도 특별한 열의를 보였다. 1964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 외에도 입법 의원, 대한국민감찰위원, 고시위원장, 경성불교전문학교 교수, 범어사 불교전문강원 원감, 동국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3. 사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문화, 종교, 언론 부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8]
4. 역대 선거 결과
| 연도 | 선거명 | 직책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 1948년 |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 | 국회의원 | 경남 동래군 | 조선불교교무원 | 8,879표 | 33.71% | 2위 | 낙선 | |
| 1954년 | 대한민국 제3대 국회의원 선거 | 국회의원 | 경남 동래군 | 자유당 | 13,989표 | 48.39% | 1위 | 당선 | 초선 |
| 1958년 | 대한민국 제4대 국회의원 선거 | 국회의원 | 경남 동래군 | 자유당 | 14,570표 | 47.48% | 2위 | 낙선 |
참조
[1]
웹사이트
김법린(金法麟)
https://encykorea.ak[...]
2023-08-15
[2]
웹사이트
정복규의 한국성씨를 찾아서⓭ - 김녕김씨(金寧金氏)
http://www.shinailbo[...]
2011-09-06
[3]
서적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4]
서적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
역사비평사
2008
[5]
뉴스
혼돈의 해방공간서 자유민주주의 초석을 놓다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08-08-22
[6]
서적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7]
서적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
역사비평사
2008
[8]
뉴스
혼돈의 해방공간서 자유민주주의 초석을 놓다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08-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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