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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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선명은 통일교 신자들에게 재림 메시아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1920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으며, 1954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설하여 통일교를 이끌었다. 그는 원리강론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했으며, 국제 합동 축복 결혼식을 통해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사람들을 연결하고자 했다. 1970년대 미국으로 건너가 선교 활동을 펼쳤으나 탈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기도 했다. 문선명은 다양한 경제, 문화, 스포츠 활동을 펼쳤으며, 2012년 사망 이후에도 그의 사상과 단체는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메시아 주장과 교리는 기독교 및 유대교 학자들에게 비판받았으며, 반공 활동, 축복 결혼, 동성애에 대한 입장 등 여러 논란에 휩싸였다.
문선명은 1920년 1월 6일[28] 평안북도 정주군(현재 북한 정주시)에서 태어났다.[29] 13남매 중 둘째 아들이었으며,[29] 그중 8명이 생존했다.[16] 문선명의 가족은 그가 10살 무렵까지 유교 신앙을 따랐으나, 이후 기독교로 개종하여 장로교회에 다녔다.[30]
1954년 5월 1일,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칭 통일교)를 설립했다.[238] 같은 해 통일교가 예배를 명목으로 부도덕한 성행위를 한다는 소문이 퍼져 당국에 체포되었으나, 3개월 후 석방되었다. 1955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통일교 신자라는 이유로 교수와 학생들이 퇴출되었고, 문선명은 불법감금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2. 생애
1934년 4월, 문선명은 운룡학원에서 정주사립오산보통학교로 편입했다. 이 학교는 3·1운동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의 항일운동 지도자 중 한 명인 이승훈이 설립한 학교였다. 1935년 4월에는 정주공립보통학교로 전학했다.
1938년 서울로 상경하여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에 다니면서, 조선예수교회 계열의 명수대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부설 고등공업학교 전기과에 유학하면서, 한인 학생회를 통해 항일운동에 가담했다. 1943년 10월, 와세다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문선명은 16세 때였던 1935년 4월 17일에 예수의 종교적 환상을 보고 자신의 평생 사명을 받았다고 주장한다.[31]
1943년 최선길과 결혼하여 아들 문성진을 낳았으나, 1950년대에 이혼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한국은 38선을 따라 남북으로 분단되어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하에 놓였다.[38][39] 1946년 문선명이 평양에서 자신의 운동(통일교의 초기 형태)을 시작했을 때,[44] 소련이 통제하는 북한 정부는 그를 투옥하고 고문했다고 주장한다.[1] 1948년 다시 체포되어 흥남 노동 수용소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46][122] 1950년 한국 전쟁 중 유엔군에 의해 석방되어 걸어서 부산까지 갔다고 한다.[1][48][49]
1954년 문선명은 서울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공식적으로 설립했다. 1950년대 문선명은 통일교 관련 사업 및 문화 단체의 기초를 구축하는 데 도움을 준 젊은 추종자들을 빠르게 모았다.[16][54] 그는 새로운 교회에서 보수적이고 가족 중심적인 가치관과 자신의 성경 해석을 설교했다.[5][55]
1960년 3월 16일, 문선명은 당시 17세였던 한학자와 성혼식을 올리고 재혼했다. 통일교 신도들은 한학자를 "어머니" 또는 "참어머니"로, 문선명과 한학자를 "참부모", 그들의 가족을 "참가정"으로 불렀다. 문선명은 예수가 하나님은 아니었지만, 이상적인 아내와 결합하여 순수한 가족을 이룸으로써 인류를 죄악에서 해방시킬 완벽한 가정을 창조할 두 번째 아담이 될 예정이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예수는 결혼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를 영적으로만 구원하고 육체적으로는 구원하지 못했기에, 그 임무는 "참부모"인 문선명과 한학자에게 남겨졌다고 주장했다. 1960년부터 국제합동축복결혼식이라는 대규모 합동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1971년 문선명은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주 어빙턴에 정착했다.[71] 그는 한국 국적과 거주지를 유지했다.[72]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문선명은 미국 내 교회 신자들에게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지지하도록 요청했다. 신자들은 "용서, 사랑, 그리고 하나됨"이라는 모토 아래 미국 국회의사당 앞에서 3일 동안 닉슨을 위해 기도하고 금식했다.[24] 1974년 2월 1일, 닉슨은 그들의 지지에 공개적으로 감사하며 문선명을 만났다.
1970년대에 문선명은 미국, 일본, 한국에서 공개 연설을 했다. 가장 큰 행사는 1975년 서울에서 열린 북한의 공격에 반대하는 집회와 워싱턴 D.C.에서 통일교가 주최한 행사였다.[18][19]
1982년, 국세청(IRS) 조사 이후 문선명은 미국에서 8000USD 미만의 부정확한 연방 소득세 신고를 한 혐의로 음모 및 탈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78] 그는 미국으로 돌아왔으며, 항소심에서 유죄 판결이 확정되었다. 문선명은 18개월의 징역형과 15000USD의 벌금형을 선고받고, 댄버리 연방 교정 시설에서 13개월 동안 복역한 후 모범수로 반성 수용소로 석방되었다.[79] 이 사건은 전국적인 종교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 논쟁의 중심이었다.
1982년, 문선명과 관련된 국제 미디어 재벌인 뉴스월드커뮤니케이션즈(News World Communications)가 워싱턴 타임스를 창간했다. 2002년까지 문선명은 ''타임스''를 지원하는 데 약 17억달러를 투자했는데,[93] 그는 이를 "하나님에 대한 진실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도구"라고 불렀다.[94]
2000년 문선명은 유엔 내에 "종교 대표자들의 종교 회의 또는 협의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하는 회의를 후원했다.[95] 2003년에는 첫 번째 평화컵 국제 축구 토너먼트를 후원했다.[96][97][98] 2009년 문선명의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가 김영사에서 출판되어 한국과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102][103][104][105]
2010년까지 문선명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종교 및 사업 활동에 대한 책임의 상당 부분을 30대와 40대 자녀들에게 넘겼다.[106] 2012년 한국 언론은 문선명이 5000만달러 상당의 개인 제트기를 이용하여 전 세계를 여행했다고 보도했다.[107][108] 2012년 9월 3일 향년 93세로 사망하였다.
2. 1. 출생 및 초기 활동
문선명은 1920년 1월 6일[28]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현재 북한 평안북도 정주시)에서 남평 문씨 집안의 7남 6녀 중 2남으로 태어났으며, 본래 이름은 문용명이었다. 그의 가족은 그가 10살 무렵까지 유교 신앙을 따랐으나, 이후 기독교(개신교)로 개종하여 장로교회에 다녔다.[30]
문선명의 형 문용수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며, 문선명에게 영향을 주었다.[310] 그의 종조부 문윤국 목사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3.1 독립운동 당시 평안북도 총책임자로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시위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다.[309][310] 문윤국 목사는 이후 피신 생활을 하다 강원도 정선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집안 재산을 모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 가계가 파산하였다.[311]
1934년 4월, 문선명은 운룡학원에서 정주사립오산보통학교로 편입했다. 이 학교는 3·1운동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의 항일운동 지도자 중 한 명인 이승훈이 설립한 학교였다. 1935년 4월에는 정주공립보통학교로 전학했다.
1938년 문선명은 서울로 상경하여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에 다니면서, 조선예수교회[312] 계열의 명수대교회[313]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당시 창경원이나 흑석동, 상도동 일대에서 전도활동을 하기도 했다.[314]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부설 고등공업학교 전기과에 유학하면서, 한인 학생회를 통해 항일운동에 가담했다.[315] 1943년 10월, 와세다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문선명은 16세 때였던 1935년 4월 17일에 예수의 종교적 환상을 보고 자신의 평생 사명을 받았다고 주장한다.[31]
2. 2. 1940년대 활동
1943년 12월 최선길[316]과 약혼하고, 1944년 5월 이호빈 목사의 주례로 결혼하였다. 1944년 3월, 서울 가시마구미 경성지점 전기부에 취직하였다. 1944년 10월부터 1945년 2월까지 경기도경찰부에서 일본 유학 시절 활동에 대한 취조와 고문을 받았다. 1945년 10월, 금전 문제로 1주일가량 구금되었다. 이후 1946년 4월까지 김백문 목사의 '이스라엘수도원'[317][318]에서 약 6개월간 교육을 받았다. 문선명은 김백문이 모든 신자가 보는 앞에서, 전 세계 솔로몬왕의 영광이 자신에게 임할 것을 계시로 축복했다고 주장했다.[319] 그러나 김백문의 교리가 문선명의 교리보다 먼저 정립되었고, 문선명의 '창조, 타락, 복귀'도 김백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320]
2. 3. 1950년대 남한에서의 활동
1951년 부산광역시로 피난하여 자신의 교리인 《원리원본》을 집필, 1952년 완성하면서 부산과 대구광역시를 중심으로 새로운 사상을 바탕으로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지승도, 옥세현, 김원필, 이기완, 강현실 등이 초기의 신자였다.[324] 1953년에는 대구로 개척 전도를 하며 세력 기반을 넓혀 나갔다.
1954년 5월 서울로 기반을 옮기며 공식적으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를 창설하였다. 주로 대학가를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벌이다, 1955년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믿는 이대 연대 학생 및 교수들에게 퇴학 및 퇴직 명령이 내려지면서 기반이 약화되었다. 같은 해 7월에는 한국전쟁 당시 병역기피 혐의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0월에 혐의에 대한 무죄판결이 나고, 문선명 총재는 100일간의 수용소 생활을 마쳤다. 그의 아내 최선길은 수감기간 동안 문선명 총재와 신흥 종교인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에 대한 비난을 공공연히 하였으며, 교도소에 이혼장을 들고 찾아와서 이혼을 종용하였고, 결국 이혼하였다. 같은 시기, 용산구 청파동으로 본부를 옮기고 정착했다.
1957년 교리서 《원리해설》(1966년 《원리강론(原理講論)》으로 증보)을 발간하여 본격적인 종교활동을 시작하면서, 1958년에 일본(최봉춘), 1959년에 미국(김영운, 김상철)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등 초창기부터 해외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59년 청파동에 통일산업 공장을 세우며, 경제사업을 시작했다.
2. 4. 1960년대 활동과 국제합동축복결혼식
1960년 3월 16일, 문선명은 당시 17세였던 한학자와 성혼식을 올리고 재혼했다.[189][56][57][58] 통일교 신도들은 한학자를 "어머니" 또는 "참어머니"로, 문선명과 한학자를 "참부모", 그들의 가족을 "참가정"으로 불렀다.[189][56][57][58]
문선명은 예수가 하나님은 아니었지만, 이상적인 아내와 결합하여 순수한 가족을 이룸으로써 인류를 죄악에서 해방시킬 완벽한 가정을 창조할 두 번째 아담이 될 예정이었다고 보았다.[32] 그러나 예수는 결혼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를 영적으로만 구원하고 육체적으로는 구원하지 못했기에, 그 임무는 "참부모"인 문선명과 한학자에게 남겨졌다고 주장했다.[13][32][66]
1960년부터 국제합동축복결혼식이라는 대규모 합동 결혼식이 시작되었다.[325] 1960년에는 문선명, 한학자의 성혼식과 3쌍의 초대 교인들이 참가한 축복결혼식이 열렸고,[325] 1961년에는 33쌍이 추가로 축복결혼에 참여하여 총 36쌍이 탄생하였다.[326] 같은 해, 장녀 문예진과 장남 문효진이 태어났다.[327] 1963년에는 72쌍의 축복결혼식이 있었다.[328]
1964년에는 차녀 문혜진이 태어났으나 1주일 만에 사망하였다.[328] 1965년에는 세계 40개국을 순방하며 120개의 성지를 지정하였고,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회동하였다. 1966년에는 종교 간 화합을 위한 '초교파운동본부'를 설립하였다.[329] 1968년 1월 1일에는 '하나님의 날'을 선포하고, '국제승공연합'을 창설하여 승공 운동을 본격화했다. 문선명은 '반공'(反共)이나 '멸공'(滅共) 대신 '승공'(勝共)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330] 같은 해 2월 22일에는 430가정 축복식이 있었다.[331]
2. 5. 1970년대 미국 활동과 논란
1971년 문선명은 1965년에 처음 방문했던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주 어빙턴에 정착했다.[71] 그는 한국 국적과 거주지를 유지했다.[72]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문선명은 미국 내 교회 신자들에게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지지하도록 요청했다. 신자들은 "용서, 사랑, 그리고 하나됨"이라는 모토 아래 미국 국회의사당 앞에서 3일 동안 닉슨을 위해 기도하고 금식했다.[24] 1974년 2월 1일, 닉슨은 그들의 지지에 공개적으로 감사하며 문선명을 만났다. 이 일로 교회는 대중과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24] 문선명은 미국의 주요 일간지에 전면광고를 내어, 「용서하라! 사랑하라! 단결하라!(Forgive, Love and Unite)」라는 구호로 닉슨을 옹호하였다.[335]
1974년과 1975년에는 미국 국회에서 초청하여 "One Nation under God"라는 주제의 강연을 하였다.[336] 1976년에는 워싱턴 모뉴먼트와 뉴욕 양키 스타디움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워싱턴 모뉴먼트 집회에는 30만 명이 몰렸으며, 그는 "퇴폐적인 미국 청년들을 위기에서 구해내어 희망의 젊은이로 만들려 미국에 왔다."고 말했다. 그해 연말 뉴스위크는 그를 1976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였다.[337]
1977년 2월 23일, 자신의 생일에 미국 벨베디아 수련소에서 이 세상의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망하지 않을 것이며, 반대하는 자가 망하는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주장한다.[338]
1978년에는 뉴욕의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제1회 세계언론인대회를 개최한다.[339]
1970년대에 문선명은 미국, 일본, 한국에서 공개 연설을 했다. 가장 큰 행사는 1975년 서울에서 열린 북한의 공격에 반대하는 집회와 워싱턴 D.C.에서 통일교가 주최한 행사였다.[18][19]
1982년, 국세청(IRS) 조사 이후 문선명은 미국에서 8000USD 미만의 부정확한 연방 소득세 신고를 한 혐의로 음모 및 탈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78] 그는 한국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유죄 판결은 항소심에서 분열된 결정으로 확정되었다. 문선명은 18개월의 징역형과 15000USD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Federal Correctional Institution, Danbury)에서 13개월 동안 복역한 후, 모범수로 (halfway house)로 석방되었다.[79]
이 사건은 전국적인 종교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 논쟁의 중심이었다.[80] 하버드대학교 로스쿨의 로렌스 H. 트라이브 교수는 배심원 재판이 "종교적 편견을 바탕으로 (문선명을) 유죄 판결로 몰아넣었다"고 주장했다.[81] (American Baptist Churches in the USA),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National Black Catholic Clergy Caucus), (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가 문선명을 지지하는 의견서를 제출했다.[82] 제리 폴웰과 조셉 로워리를 포함한 많은 저명한 성직자들이 정부의 주장에 항의하는 탄원서에 서명하고 문선명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83][84]
2. 6. 1980년대 미국 활동과 탈세 혐의
1982년, 국세청(IRS) 조사 이후 문선명은 미국에서 8000USD 미만의 부정확한 연방 소득세 신고를 한 혐의로 음모 및 탈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78] 그는 한국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미국으로 돌아왔으며, 항소심에서 유죄 판결이 확정되었다. 문선명은 18개월의 징역형과 15000USD의 벌금형을 선고받고, 댄버리 연방 교정 시설에서 13개월 동안 복역한 후 모범수로 반성 수용소로 석방되었다.[79]
이 사건은 전국적인 종교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 논쟁의 중심이었다.[80] 하버드대학교 로스쿨의 로렌스 H. 트라이브(Laurence H. Tribe) 교수는 배심원 재판이 "종교적 편견을 바탕으로 (문선명을) 유죄 판결로 몰아넣었다"고 주장했다.[81] 미국 침례교회, 미국 교회협의회, 전국 흑인 가톨릭 성직자 모임, 남부 기독교 지도자 회의가 문선명을 지지하는 의견서를 제출했다.[82] 제리 폴웰과 조셉 로워리를 포함한 많은 저명한 성직자들이 정부의 주장에 항의하는 탄원서에 서명하고 문선명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83][84] 칼튼 셔우드는 그의 저서 종교재판: 문선명 목사의 박해와 기소에서 문선명 목사의 유죄 판결이 개신교 목사들에 의해 종교적 자유의 굴욕으로 여겨졌다고 밝혔다.[85]
1970년대 미국에서의 선교로 기독교로부터 많은 개종자를 이끌어냈지만, 기독교 세력 등의 반발이 거세어졌고, 유대인들까지 적대시하였다. 결국 그는 관습에 따른 선교헌금에 대한 이자소득의 세금을 신고하지 않아, 1984년 7월 20일 미국의 댄버리 연방 교도소에 수감되었다.[341] 이후 문선명은 감형을 받아 13개월 만에 출감했다.[342]
1982년, 문선명과 관련된 국제 미디어 재벌인 뉴스월드커뮤니케이션즈(News World Communications)가 워싱턴 타임스를 창간했다. 뉴스월드커뮤니케이션즈는 한국, 일본, 남아메리카의 신문사들뿐만 아니라 통신사인 유나이티드프레스인터내셔널(UPI)도 소유하고 있었다.[87] 워싱턴 타임스의 정치적 성향은 종종 보수적으로 묘사된다.[88][89][90] 로널드 레이건을 포함한 많은 워싱턴 D.C. 내부 관계자들이 ''타임스''를 읽었다.[91][92] 2002년까지 문선명은 ''타임스''를 지원하는 데 약 17억달러를 투자했는데,[93] 그는 이를 "하나님에 대한 진실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도구"라고 불렀다.[94]
2. 7. 1990년대 이후 활동과 사망
1995년부터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일대에 천주청평수련원 (현 HJ천주천보수련원)[362], 청심국제병원 (현 HJ매그놀리아국제병원)[363], 천정궁박물관[364]을 건립하였다. 2006년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제화 교육기관인 청심국제중학교·청심국제고등학교[365]를 설립하였다. 2012년 무렵에는 여수세계박람회 유치를 위한 정부의 기업도시 건설 계획에 참여하여,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일대에 대규모 부지 매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366] 현재는 여수엑스포 유치에 큰 도움을 준 여수 화양지구 해양관광 레저단지 개발이 문선명 총재의 계획하에 (주)일상해양산업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
2008년 7월 19일, 문선명과 그의 일가족, 신도들이 탄 미국 시콜스키사의 S-92 기종 헬리콥터가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청심국제병원 (현 HJ매그놀리아국제병원) 방면으로 가던 중 악천후로 장락산 정상 부근에 추락, 불시착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탑승자 전원은 무사히 대피했고, 헬기는 폭발하여 전소되었다. 승무원을 포함한 총 16명의 탑승자 중 3명은 중경상을 입었으나, 문선명을 포함한 나머지 일행들은 경미한 상해만 입고 청심국제병원 (현 HJ매그놀리아국제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367]
2010년 1월 31일 문선명의 구순에는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 북한의 김정일, 대한민국의 한승수 등이 축하하였다. 특히 김정일은 평화자동차 박상권 사장을 통해 산삼 세 뿌리와 축하 글을 자수로 새긴 리본, 장미 90송이와 백합 90송이를 담은 화병과 화환 등을 보내왔다.[368]
2009년 3월에는 김영사를 통해 문선명의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369]가 출간되었다.
2012년 7월 19일 피스컵 개회선언,[370] 8월 2일 모교인 오산고등학교 방문[371]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건강 악화로 8월 13일 감기와 폐렴 합병증으로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에 입원하였고, 병세 호전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아 8월 31일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에 있는 청심국제병원 (현 HJ매그놀리아국제병원)으로 옮겨졌으며, 2012년 9월 3일 향년 93세로 사망하였다.
문선명 사후, 그의 아내 한학자 총재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공동총재로서 문선명의 유업을 이어받아 활동하고 있다.
2000년 문선명은 유엔 내에 "종교 대표자들의 종교 회의 또는 협의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하는 회의를 후원했다.[95]
2003년에는 첫 번째 평화컵 국제 축구 토너먼트를 후원했다.[96][97][98] 메이저 리그 사커의 LA 갤럭시가 평화컵 참가를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99] 이 행사 기간 동안, 펠레 전 브라질 체육부 장관이 문선명을 만났다.[100]
2009년 문선명의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한국어)[101]가 김영사에서 출판되어 한국과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102][103][104][105]
2010년까지 문선명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종교 및 사업 활동에 대한 책임의 상당 부분을 30대와 40대 자녀들에게 넘겼다.[106] 2012년 한국 언론은 문선명이 5000만달러 상당의 개인 제트기를 이용하여 전 세계를 여행했다고 보도했다.[107][108]
3. 주요 활동
1957년 전국에 전도사를 파견했고, 1958년부터 일본 선교를 시작, 1959년 10월 2일 일본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설립했다.[238] 1961년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반공주의 사상을 전개하며 정부의 보호를 받았다.
1960년 한학자와 결혼, 이후 합동결혼식을 시작했다.[241] 1965년 세계 40개국을 돌며 포교 활동을 했고, 일본을 방문하여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사사가와 료이치 등과 회담했다.
1966년 교전 『원리강론』이 완성되었다.[242][243][244] 1968년 국제승공연합을 한국과 일본에서 설립했다. 1971년 미국으로 거점을 옮기고,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만났다.
1975년 세계일보를 일본에서 창간했고, 1982년 미국에서 워싱턴 타임스를 창간했다. 이후 "뉴욕 시티 트리뷴", 우루과이에서 "울티마스 노티시아스", 중동에서 "미들 이스트 타임스"를 발간했다. 같은 해 미국에서 탈세 혐의로 복역했다.
1980년대부터 일본에서 영감 상법 등이 사회 문제가 되었다. 1989년 한국에서 세계일보를 창간했다. 1990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1991년 김일성 북한 주석과 회담을 갖고,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개발 등에 합의했다. 1992년 유관순 열사 정신 선양대회를 개최하고, 안중근 의사 유적 성역화 사업을 지시했다.
2000년 UPI 통신을 인수했다.[268] 2005년 한일터널 구상을 위해 통일교 자금을 투입했다고 밝혔다.[269][270]
2012년 9월 3일 폐렴 등의 증상으로 사망했다.[273][274][275][276]
3. 1. 평화 운동
문선명 총재는 천주평화연합(UPF)이라는 민간기구를 통해 세계적인 평화 운동을 전개했다.[346][347][348] 이는 유엔의 지역주의, 국가주의적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 평화 정착, 분쟁 해결, 빈곤 추방, 환경 보전 등 인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346][347][348]
천주평화연합은 192개 유엔 회원국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문화계 지도자들이 민간인 신분으로 참여하는 범세계적인 민간 기구이다.[346][347][348] 종교계, 문화계, 교육계 국제 지도자들로 구성된 상원을 하원(UN)에 추가하여 양원 간 상호 존중을 통해 국제 문제에 신속하게 대응하고자 했다.[346][347][348]
3. 2. 정치 활동
1964년, 한국과 자유를 증진하고 자유아시아방송을 후원하는 한국문화자유재단을 설립했다. 전 미 대통령인 해리 S. 트루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은 여러 시기에 명예 회장 또는 이사직을 역임했다.[115]
1968년 1월 13일, 하부 조직으로 "국제승공연합"을 한국에서 설립했고, 같은 해 4월에는 일본에서도 같은 단체를 설립했다.[242][243][244]
1972년, 『원리강론』의 가르침에 기반하여 공산주의 쇠퇴에 대한 예측을 제시했다. "7,000년의 성경적 연대 – 6,000년의 회복 역사와 천년 왕국, 완성의 시대 – 이후 공산주의는 70년째에 무너질 것입니다. ... 1978년은 경계선이며 그 이후로 공산주의는 쇠퇴할 것이고, 70년째에 완전히 붕괴될 것입니다."[116]
1973년 11월 23일, 시부야구 마쓰토의 통일교 본부에서 전 총리 기시 노부스케와 오랜 시간 회담을 가졌다.[277]
1975년 1월 1일, 승공연합 기관지 "사상신문"을 개칭 발전시키는 형태로 사실상 통일교와 승공연합의 기관지인 세계일보를 일본에서 발간했다. 이어 1982년 미국에서 직접 "워싱턴 타임스"(워싱턴 포스트와는 별개)를 발간했다.[245]
1980년, 교회 신자들에게 뉴욕에 본부를 둔 반공 교육 단체인 CAUSA International을 설립하도록 요청했다.[117] 1980년대에는 21개국에서 활동했고, 미국에서는 기독교 지도자들을 위한 교육 컨퍼런스[118]뿐만 아니라 상원 직원 및 기타 활동가들을 위한 세미나와 컨퍼런스를 후원했다.[119] 1986년에는 반공 다큐멘터리 영화인 『니카라과는 우리의 고향이었다』를 제작했다.[120] CAUSA는 니카라과 콘트라를 지원했다.[121][122]
1985년 8월, 문선명이 설립한 세계평화학술원은 "공산 제국의 붕괴 이후 세계의 상황"이라는 주제를 토론하기 위해 제네바에서 컨퍼런스를 후원했다.[123]
1989년 7월 4일, 아베 신타로가 당시 회장을 역임했던 파벌 "세이와 세이사쿠 켄큐카이"(아베파)를 중심으로 일본 국회의원과의 관계 강화를 도모하도록 한국에서 신자들에게 말했다. 또한 "국회 안에 교회를 만들고", "거기서 원리를 교육함으로써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국회의원 비서를 교단에서 배출한다"고 말했다.[250][251][252][253]
1990년 4월 11일, 소련의 최고 지도자 고르바초프와 크렘린에서 회담을 가졌다.[254] 1990년 4월, 소련을 방문하여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났고, 소련에서 진행 중인 정치 및 경제 개혁을 지지했다. 동시에 통일교는 이전의 공산 국가로 확장되고 있었다.[25] 소련 해체 이후인 1991년, 일부 미국 보수주의자들은 이전의 반공주의적 입장이 완화된 것에 대해 문선명을 비판했다.[124][125]
1991년 12월 6일,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 외교에 호응하여 자동차 사업으로 중국의 광동성에 진출할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의 접촉을 중개[255]했던 중국 정부의 주선[256]에 따라 같은 해 11월 30일부터 한국 정부의 허락 없이 갑작스럽게 방북하여 고향인 정주를 방문하고 평양에서 북한 최고 지도자인 김일성과 회담을 가졌다.[257][258][259][260][261] 문선명은 이 방북에 대해 경유지인 베이징에서 "나의 승공사상은 공산주의를 죽이는 사상이 아니라 그들을 살리는 사상, 즉 인류 구제의 사상"이라는[262][263] 성명을 발표했다. 회담에서는 이산가족 상봉에 착수하고, 핵 사찰을 받고, 자유 진영 국가로부터 투자를 받아들이고, 군수 산업을 제외한 경제 사업에 통일 그룹이 참여하며, 남북 정상 회담을 열고, 금강산 개발 등에 대해 합의했다.
1991년, 당시 북한 대통령인 김일성을 만나 한국 반도의 평화 달성 방안뿐만 아니라 국제 관계, 관광 등에 대해 논의했다.[26] 1994년, 북한과 한국 사이에 외교 관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의 장례식에 공식 초청받았다.[126] 문선명과 그의 교회는 한국 통일을 증진하려는 노력으로 알려져 있다.[6]
2003년, 한국 통일교 신자들은 한국에서 "하나님, 평화, 통일, 조국당"이라는 정당을 창당했다. 창당 선언에서 새 정당은 하나님과 평화에 대한 대중 교육을 통해 한국 통일을 준비하는 데 중점을 둘 것이라고 밝혔다.[127] 문선명은 대한민국 통일부 명예위원회 위원이었다.[128]
2005년, 문선명 목사와 그의 아내 한학자 박사는 유엔 경제사회이사회(ECOSOC)의 특별 협의 지위를 가진 NGO인 세계평화연합(UPF)을 설립했다. "우리는 유엔의 활동과 지속 가능한 개발 목표 달성을 지지하고 증진합니다."[129]
2012년, 문선명은 사후에 북한의 국가 통일상을 수상했다.[180]
문선명의 프로젝트는 브라질 국회의원들에 의해 브라질 국회에서 로비되었다.[130][131][132] 문선명은 그의 중동 평화 이니셔티브의 일환으로 이스라엘 크네셋과 팔레스타인 의회 의원들 간의 대화를 주최했다.[133]
대한민국에 평화통일가정당(구 천주평화통일가정당)을 설립하여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전 지역구에 국회의원 후보를 내었으나, 의석 확보는 실패하였다. 이후 네팔에서도 같은 이름의 정당을 설립하여, 1명의 당선자를 내었다.[349]
3. 3. 경제 활동
일화, S&T 중공업, 일신석재, 평화자동차 등의 여러 기업을 운영했다.[350][351][352] 특히, 평화자동차는 북한 지역에 자동차 공장을 세워 휘파람이라는 자동차를 판매하여 남북 교류에 기여했으나,[353] 현재는 북한에 운영권이 양도되었다.
1963년 설립된 통일그룹은 대한민국의 재벌 기업으로, 초기에는 비영리 단체로서 교회의 수입 확보를 위해 제조업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제약, 관광, 출판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10] 주요 계열사로는 인삼 및 관련 제품을 생산하는 일화, 건축 자재를 생산하는 일신석재, 기계 부품(대한민국 군수품 포함)을 생산하는 통일중공업 등이 있다.[12]
1976년 설립된 뉴스 월드 커뮤니케이션즈는 국제 뉴스 미디어 기업이다.[7] 유나이티드 프레스 인터내셔널, ''월드 앤 아이'', ''티엠포스 델 문도''(라틴 아메리카), ''세계일보''(대한민국), ''세계일보''(일본), ''잠베지 타임스''(남아프리카 공화국), ''미들 이스트 타임스''(이집트) 등을 소유했다.[8] 2008년까지 워싱턴 D.C.에 본사를 둔 뉴스 매거진 ''인사이트 온 더 뉴스''를 발행했고,[7] 2010년까지 ''워싱턴 타임스''를 소유하다가 문선명과 전 ''타임스'' 편집진 일부가 뉴스 월드로부터 인수했다.[9]
1982년 한국 전쟁 당시의 인천 상륙 작전을 다룬 역사 드라마 영화 인천의 제작을 후원했으나, 비평적, 상업적으로 실패했고, 북한 정부에 대한 불공정한 묘사로 비판받았다.[134]
1989년 설립한 성남 일화 천마는 K리그에서 7회 우승(역대 최다), FA컵 2회 우승, 리그컵 3회 우승, AFC 챔피언스리그 2회 우승을 기록하며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성공적인 축구 클럽으로 성장했다. (2020년 전북 현대 모터스에 의해 최다 우승 기록 경신).[135]
통일교는 미국 내 최대 규모의 스시 레스토랑 체인을 소유하고 있으며, 알래스카 코디액 섬 지역의 최대 고용주이다.[136][137] 또한 북한 최초의 자동차 제조 공장인 평화자동차를 설립했고, 한국 상품 수출 규모 면에서 2위를 차지했다.[138][139][140][141]
2011년에는 1800만달러가 투입된 여수엑스포 호텔 건설이 완료되었으며, 문선명이 소유한 여수 오션리조트(2012 여수세계박람회 개최지)에 위치해 있다.[142] 전라남도지사가 개장식에 참석했다.[142][143] 2012년 2월에는 오션호텔이 완공되었다.[144] 문선명 소유의 영평리조트, 오션리조트, 파인리지리조트는 2012 여수세계박람회[145], 2018 평창 동계올림픽[146][147], 포뮬러 원[148] 개최 후보지로 거론되었다. 문선명은 FIFA 공인 피스컵을 운영했으며,[149] FIFA는 2003년 이후 피스컵에 200만달러 이상을 지원했다.[150]
3. 4. 문화예술 및 교육 활동
대한민국에서 유니버설발레단을 운영하고 있으며, 선화예술중학교, 선화예술고등학교, 선문대학교 등을 운영하고 있다.[354] 선문대학교 체육학부 무도학과(격투기학과)에는 프로레슬러였던 故 이왕표가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1981년에는 오! 인천이라는 영화를 촬영했으나 흥행하지 못했다. 경복초등학교, 선정중학교, 선정고등학교, 선문대학교 외에도 2006년에는 청심국제중학교, 청심국제고등학교 등 특수목적고등학교도 설립하였다. 미국에서는 UTS(Unification Theology School)를 설립하였으며, 브리지포트 대학을 인수받아 경영하고 있다.[355][356]
1962년, 문선명과 교회 회원들은 한국의 전통 민속 무용을 공연하는 어린이 무용단인 대한민국 어린이 민속 무용단(Little Angels Children's Folk Ballet of Korea)을 설립했다. 그는 이것이 세계에 대한 한국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161] 1984년에는 소련 출신의 올레그 비노그라도프를 예술감독으로, 그의 며느리인 줄리아를 프리마 발레리나로 하는 800만달러 규모의 유니버설 발레(Universal Ballet) 프로젝트를 설립했다. 뉴욕 타임스는 이 단체를 아시아 최고의 발레단체로 묘사했다.[162] 1989년에는 유니버설 발레 아카데미(이후 키로프 발레 아카데미(Kirov Academy of Ballet)로 개칭)를 워싱턴 D.C.에 설립했다.[163]
3. 5. 스포츠 활동
문선명은 축구를 매우 좋아하여 생전에 대한민국 축구계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 성남 일화 천마 축구단과 충남 일화 천마 여자 축구단을 운영하였고, 브라질 상파울루의 소로카바라는 프로축구팀을 인수하여 운영하였다.[357]
피스컵이라는 국제 클럽 축구 대회를 개최하여 2003년부터 2년 주기로 열렸으며, 2007년 제3회 대회까지 개최되었다. 1회 대회에는 PSV 에인트호번, 2회에는 토트넘 홋스퍼, 3회에는 올림피크 리옹이 우승하였다. 2009년 제4회 대회는 스페인 마드리드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개최되었으며, 올림피크 리옹, 세비야 FC, 리가 데 키토, 유벤투스 FC, FC 포르투, 성남 일화 천마 등이 참가하였다.[358] 2006년부터는 국제 여자 축구 대회인 피스퀸컵도 2년마다 개최하였다.
그러나 문선명 사후 통일교에서 스포츠계 지원을 중단하면서 충남 일화 천마는 해체되었고, 성남 일화 천마는 성남시에서 인수하였다. 피스컵 또한 2012년 대회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문선명과 달리[359] 부인 한학자와 통일그룹의 실권을 쥔 넷째 아들 문국진은 축구에 큰 관심이 없었고, 문국진은 야구에 관심이 많았다. 이 때문에 통일그룹은 2010년 넥센 히어로즈 구단 인수설이 있었고, 통일그룹 계열 일화가 넥센 히어로즈와 2010년부터 스폰서십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360]
1962년, 문선명과 다른 교회 회원들은 한국 전통 민속 무용을 공연하는 어린이 무용단인 대한민국 어린이 민속 무용단(Little Angels Children's Folk Ballet of Korea)을 설립했다. 문선명은 이것이 세계에 한국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161] 1984년에는 800만달러 규모의 유니버설 발레(Universal Ballet) 프로젝트를 설립하여, 소련 출신의 올레그 비노그라도프를 예술감독으로, 며느리인 줄리아를 프리마 발레리나로 임명했다. 뉴욕 타임스는 이 단체를 아시아 최고의 발레 단체로 묘사했다.[162] 1989년, 유니버설 발레 아카데미를 설립했는데, 이 아카데미는 나중에 키로프 발레 아카데미(Kirov Academy of Ballet)로 이름을 바꾸었고, 워싱턴 D.C.에 위치해 있다.[163]
4. 주요 교리
문선명은 16세 때인 1935년 부활절에 기도 중 예수로부터 '인류 구원 사업'에 대한 당부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에서는 그를 구세주, 메시아, 재림주로 믿으며 "참부모님"이라 칭한다. 그의 사상은 기독교 경전인 《성경》을 기초로 하지만, 여러 세부적인 면에서 기독교와는 다르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교리는 문선명, 한학자 양위분을 인류의 구세주이자 메시아, 참부모로 믿고 모시는 것이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원리원본》, 《원리강의안》, 《원리강론》 등을 기본 교리 체계로 삼고 있다. 이 중 《원리강론》은 제자인 유효원 회장이 집필한 것으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교리의 집약체라고 할 수 있다.
4. 1. 원리강론
유효원이 저술한 원리강론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기본 교리서이다. 전편 7장, 후편 6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편은 창조원리, 타락론, 종말론, 구주론, 부활론, 예정론, 기독론으로, 후편은 제1~5장까지의 복귀원리와 제6장의 재림론으로 되어 있다.[361]
원리강론|원리강론한국어은 통일교의 주요 신학 교재이다. 문선명과 초기 제자 유효원이 공동 집필했으며 1966년에 처음 출판되었다. 1973년에는 "Divine Principle"이라는 제목의 영어 번역본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통일교 신학의 핵심 내용을 제시하며 신자들에게는 성경과 같은 지위를 갖는다. 체계 신학의 형식을 따르는 이 책에는 (1)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 (2) 인간의 타락, (3) 회복(하나님이 역사를 통해 타락의 악영향을 제거하고 인류를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관계와 지위로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67]
하나님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지닌 창조주로서 모든 진리, 아름다움, 선의 근원으로 여겨진다. 인간과 우주는 하나님의 성격, 본성, 목적을 반영한다.[68] "주고받는 행위"(상호 작용)와 "주체와 객체의 위치"(주도자와 응답자)는 핵심 해석 개념이며,[69] 자아는 하나님의 객체가 되도록 설계되었다.[69] 인간 존재의 목적은 하나님께 기쁨을 돌려드리는 것이다. "4위 일체의 기초"(원형, 주체, 객체, 연합)는 또 다른 중요한 해석 개념이며, 가정에 대한 강조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70]
5. 논란
문선명은 1964년 한국문화자유재단을 설립하여 한국과 자유를 증진하고 자유아시아방송을 후원했다. 해리 S. 트루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등 전 미 대통령들이 이 재단의 명예 회장 또는 이사직을 역임했다.[115]
1972년에는 『원리강론』에 기반하여 공산주의 쇠퇴를 예측했다.[116] 1980년에는 뉴욕에 본부를 둔 반공 교육 단체 CAUSA International 설립을 지시했고,[117] 이 단체는 1980년대에 21개국에서 활동하며 미국에서 교육 컨퍼런스와 세미나를 후원했다.[118][119] 1986년에는 반공 다큐멘터리 영화 『니카라과는 우리의 고향이었다』를 제작했고,[120] CAUSA는 니카라과 콘트라를 지원했다.[121][122]
1985년 세계평화학술원을 통해 "공산 제국의 붕괴 이후 세계의 상황"을 주제로 제네바에서 컨퍼런스를 후원했다.[123] 1990년 소련을 방문하여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고 정치 및 경제 개혁을 지지했으며, 통일교는 이전의 공산 국가로 확장되었다.[25] 1991년 김일성을 만나 한반도 평화와 국제 관계, 관광 등에 대해 논의했고,[26] 1994년 김일성 장례식에 공식 초청받았다.[126]
2003년 한국 통일교 신자들은 정당 "하나님, 평화, 통일, 조국당"을 창당했다.[127] 2012년 사후 국가 통일상을 수상했다.[180] 2005년 유엔 경제사회이사회(ECOSOC)의 특별 협의 지위를 가진 NGO인 세계평화연합(UPF)을 설립했다.[129] 그의 프로젝트는 브라질 국회에서 로비되었고,[130][131][132] 중동 평화 이니셔티브의 일환으로 이스라엘 크네셋과 팔레스타인 의회 의원들 간의 대화를 주최했다.[133]
문선명은 인종차별에 대해 강력한 입장을 취했다. 1974년 통일교 신자들에게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통령을 지지할 것을 촉구했고,[151] 1981년 미합중국 대 문선명 사건에서 자신이 인종적 편견의 희생자라고 말했다.[152] 전국흑인가톨릭성직자협의회,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 등 여러 아프리카계 미국인 단체와 개인들이 그를 변호했다.[153] 2000년 이스라엘 민족 지도자 루이스 퍼러칸과 함께 워싱턴 D.C.에서 백만 가족 행진을 후원했다.[158]
하지만 문선명의 메시아 및 그리스도 재림 주장은 유대교와 기독교 학자들에게 거부당했다.[187][188] 『원리강론』은 한국의 개신교회들과 세계교회협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189] 개신교 해설가들은 문의 가르침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교리에 반대된다고 비판했다.[190][191] 『종교 이단의 왕국』의 저자 월터 롤스턴 마틴과 라비 자카리아스는 『원리강론』의 내용에 대해 비판했다.[192]
냉전 기간 동안 문선명의 반공 활동은 제3차 세계 대전과 핵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194] 일본의 억만장자 사사카와 료이치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195][196] 1977년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는 코리아게이트 사건 조사 과정에서 대한민국 국가정보원(KCIA)과 통일교의 협력 관계를 발견했다.[197] 소련 해체 이후 일부 미국 보수주의자들은 문선명이 이전의 반공적 입장을 완화했다고 비판했다.[124][125]
1998년 이집트 신문 알 아흐람은 문선명과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의 관계 가능성을 비판하며, 『워싱턴 타임스』의 편집 방침이 "맹렬한 반아랍, 반이슬람, 친이스라엘"이라고 보도했다.[202][203]
2000년 문선명은 이슬람 국가 지도자 루이스 파라칸의 백만 가족 행진을 지지하여 비판을 받았다.[27] 또한 1960년대 "신의 죽음 신학"을 옹호한 유대인 학자 리처드 루벤스타인과의 관계로도 비판받았다.[204] 루벤스타인은 통일교를 옹호하고 자문위원회[205]와 교회 소유 신문인 『워싱턴 타임스』 이사회[206]에 참여했으며, 1990년대에는 교회와 제휴했던 브리지포트 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207]
문선명은 동성애에 반대하며 동성애자를 "더러운 똥을 먹는 개"에 비유하고, "동성애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숙청에서 제거될 것"이라고 말했다.[209][210]
2009년 문선명의 한일 해저터널 지지는 일본과 한국 양국에서 국가 이익과 국가 정체성에 대한 위협으로 비판받았다.[211]
그 외에도 문선명은 아내 한학자에 대한 무관심, 자녀와 배우자를 교회 및 관련 사업 지도직에 임명한 것, 한국 정부 내 보수주의자 지지, 『워싱턴 타임스』를 포함한 사업 프로젝트와 정치 활동에 교회 회원 및 자원 배정, 특히 9.11 테러 이후 통일교와 이슬람 간의 관계 등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122]
5. 1. 미 의회 대관식
2004년 3월, 미국 워싱턴 D.C. 더크슨 상원 사무실 건물에서 열린 행사에서 문선명은 스스로를 메시아로 칭하며 ‘평화의 왕관’을 쓰는 대관식 행사를 진행했다.[343] 이 자리에서 문선명은 "5대 종교의 창시자와 영적 세계의 많은 지도자들, 예를 들면 공산주의 지도자인 카를 마르크스와 블라디미르 레닌, 아돌프 히틀러나 이오시프 스탈린과 같은 독재자들도 내 가르침에서 힘을 얻고 마음을 바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주장했다.[343]이 행사는 미국에서 정교분리 원칙을 위반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의 비판을 받았다.[177][178] 행사 내용이 보도된 이후 논란이 커지자, 마크 데이턴 당시 상원의원을 비롯한 일부 정치인들은 행사의 성격에 대해 오해를 받았다고 해명했다.[343][177][178]
5. 2. 가정 파괴
AP는 문선명이 사망했을 때 통일교를 논란이 많은 종교라고 설명하면서, 신도들에게 광신적인 헌신을 요구한다는 비판을 소개했다. 같은 시기 영국의 중도좌파 언론 가디언은 문선명을 자칭 메시아로 대규모 합동결혼식을 주관하는 인물이라고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혼인시켰고, 통일교가 운영하는 사업으로 막대한 돈을 벌었으며, 신도들을 세뇌하고 가정을 해체시켰다는 비난을 받아왔다"고 보도했다.[344]5. 3. 옛 며느리의 폭로
문선명의 옛 며느리 홍난숙 씨는 1995년에 책을 펴내, 남편 문효진이 자신을 구타하고 포르노 영화를 즐겨보는 마약 중독자였다고 폭로했다. 홍 씨는 당시 임신 7개월이었다.[345] 홍 씨는 책에서 문선명 일가를 "음모와 위선으로 망쳐지고 분열된 집안"이라고 묘사했다.[345]5. 4. 기타 논란
1991년 문선명은 북한 김일성 주석과 만나 한반도 평화, 국제 관계, 관광 등에 대해 논의했다.[26] 1994년 북한과 한국 사이에 외교 관계가 없었음에도 김일성 사망 당시 그의 장례식에 공식 초청받았다.[126]냉전 기간 동안 문선명은 반공 활동을 펼쳤는데, 이는 제3차 세계 대전과 핵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194] 그의 반공 활동은 일본의 억만장자이자 극우 활동가인 사사카와 료이치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195][196] 1977년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는 코리아게이트 사건 조사 과정에서 한국 중앙정보부(KCIA)가 통일교와 협력하여 미국 내 정치적 영향력을 얻으려 했고, 일부 통일교 신자들이 의회 사무실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197] 또한, 리처드 닉슨을 지지하는 문선명의 캠페인에 KCIA가 개입했을 가능성도 조사했다.[198] 1991년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 일부 미국 보수주의자들은 문선명이 이전의 반공주의적 입장을 완화했다고 비판했다.[124][125]
1998년 이집트 신문 알 아흐람은 문선명과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의 관계 가능성을 비판하며, 『워싱턴 타임스』의 편집 방침이 "맹렬한 반아랍, 반이슬람, 친이스라엘"이라고 보도했다.[202][203]
2000년 문선명은 논란이 많은 이슬람 국가 지도자 루이스 파라칸의 백만 가족 행진을 지지하여 비판을 받았다.[27] 또한 1960년대 "신의 죽음 신학"을 옹호한 유대인 학자 리처드 루벤스타인과의 관계로도 비판받았다.[204] 루벤스타인은 통일교를 옹호하고 자문위원회[205]와 교회 소유 신문인 『워싱턴 타임스』 이사회[206]에 참여했으며, 1990년대에는 교회와 제휴했던 브리지포트 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207]
문선명은 동성애에 반대하며 동성애자를 "더러운 똥을 먹는 개"에 비유하고, "동성애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숙청에서 제거될 것"이라고 말했다.[209][210]
2009년 문선명의 한일 해저터널 지지는 일본과 한국 양국에서 국가 이익과 국가 정체성에 대한 위협으로 비판받았다.[211]
그 외에도 문선명은 아내 한학자에 대한 무관심, 자녀와 배우자를 교회 및 관련 사업 지도직에 임명한 것, 한국 정부 내 보수주의자 지지, 『워싱턴 타임스』를 포함한 사업 프로젝트와 정치 활동에 교회 회원 및 자원 배정, 특히 9.11 테러 이후 통일교와 이슬람 간의 관계 등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122]
6. 가족 관계
세계원리연구회 초대회장 역임(1985~1995)
미국에서 맨하탄 센터 스튜디오(MCS) 설립(1986)
통일교에서 나와 GPF(Global Peace Federation) 등 활동[373]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재단 소속 기업 상속
선문학원 이사장[374]
미국 거주,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에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보도[375]
2015년 문형진 대신 세계회장 임명
생추어리 교회 설립
미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