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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암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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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옥균 암살 사건은 1894년 3월 28일, 갑신정변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이 중국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당한 사건이다. 갑신정변 실패 이후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인물들을 대역부도 죄인으로 규정한 조선 정부는 일본에 망명 중인 김옥균의 송환을 요구했으나, 일본 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이후 조선 정부는 지운영을 일본에 보내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김옥균은 오가사와라 섬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조선 정부는 자객 이일직과 홍종우를 통해 김옥균을 상하이로 유인, 암살을 계획했다. 홍종우는 김옥균에게 접근하여 신뢰를 얻은 뒤, 1894년 3월 28일 권총으로 김옥균을 암살했다. 암살 후 홍종우는 체포되었고, 김옥균의 시신은 조선으로 보내져 능지처참되었다.

일본에서는 김옥균의 장례식을 거행하고, 청나라와 조선을 비난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이는 청일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2. 배경

갑신정변 실패 이후, 조선 정부는 개화파를 탄압했고,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 등 주요 인물들에 대한 감시와 암살 시도를 이어갔다. [1]

2. 1. 갑신정변과 김옥균의 망명

갑신정변으로 일대 타격을 받은 민씨 척족 정권은 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을 대역부도(大逆不道) 죄인으로 규정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들의 체포 및 송환을 일본 정부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조선과 범죄인 인도 협정이 체결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만국 공법에 의해 망명 정치범을 송환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조선 정부의 요구를 거절하였다.[1]

일본 망명 생활 중의 김옥균


1885년 말 망명 중인 김옥균이 일본의 구자유당계(舊自由黨系) 불평정객 및 낭인들과 결탁해 조선을 침공하려 한다는 소문이 떠돌자, 조선 정부는 그의 송환을 다시 요구하는 한편 1886년 5월 통리군국사무아문의 주사(主事) 지운영을 일본에 보내 김옥균을 암살하려 하였다.[1]

그러나 이 기도는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 일로 조선과 일본 간에 외교 분규가 발생하자 일본 정부는 지운영을 조선으로 돌려보내고, 1886년 8월 김옥균을 태평양의 절해고도(絕海孤島)인 오가사와라 섬으로 강제 추방하였다.[1]

이곳에서 약 2년간의 유배 생활로 건강이 악화된 김옥균은 그 뒤 홋카이도로 옮겨져 억류되었다가, 189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내지 귀환(內地歸還)의 허가를 받아 도쿄에 돌아올 수 있었다.[1]

2. 2. 조선 정부의 암살 시도

갑신정변으로 큰 타격을 받은 민씨 척족 정권은 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을 대역부도 죄인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조선 정부는 그들의 체포 및 송환을 일본 정부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조선과 범죄인 인도 협정이 체결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제법에 의해 망명 정치범을 송환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조선 정부의 요구를 거절하였다.[1]

1885년 말 망명 중인 김옥균이 일본의 구자유당계 불평 정객 및 낭인들과 결탁해 조선을 침공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조선 정부는 그의 송환을 다시 요구하는 한편 1886년 5월 통리군국사무아문의 주사 지운영을 일본에 보내 김옥균을 암살하려 하였다.[1]

그러나 이 기도는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 일로 조선과 일본 간에 외교 분쟁이 발생하자 일본 정부는 지운영을 조선으로 돌려보내고, 1886년 8월 김옥균을 태평양의 절해고도인 오가사와라 섬으로 강제 추방하였다.[1]

이곳에서 약 2년간의 유배 생활로 건강이 악화된 김옥균은 그 뒤 홋카이도로 옮겨져 억류되었다가, 189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내지 귀환의 허가를 받아 도쿄에 돌아올 수 있었다.[1]

3. 암살 경과

1894년 3월 11일, 김옥균은 일본인 수행원 기다하라 엔지와 일본 주재 청나라 공사관 통역 오승을 거느리고 기차로 도쿄를 떠나 오사카에 도착했다. 3월 22일, 김옥균 일행은 오사카를 떠나 상하이로 가는 배가 출발하는 고베에 도착했고, 홍종우는 뒤늦게 합류했다. 3월 27일, 김옥균 일행은 일본우선사이쿄마루 우선편으로 중국 상하이에 도착하여, 미국 조계 안의 동화양행에 투숙하였다. 당시 상하이에 살던 윤치호는 김옥균에게 "홍종우는 (조선에서 보낸) 스파이 같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했지만, 김옥균은 "그가 스파이일 리가 없다"고 답했다.[3]

3월 28일 아침, 김옥균은 홍종우에게 이일직이 준 액면가 5000JPY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 오라고 지시했다. 홍종우는 천풍보호 주인이 없어서 현금 결제를 못했다며 오후 6시에 다시 가겠다고 했다. 오후 1시경, 오승과 기다하라가 용무로 자리를 비웠고, 홍종우와 김옥균 두 사람만이 각각 2층 방에 남아 있었다. 김옥균은 심기가 좋지 않은 듯 침대에서 낮잠을 잤다. 홍종우는 양복한복으로 갈아입고 넓은 소매 안에 6연발 권총을 숨겼다. 오후 3시경, 잠에서 깬 김옥균홍종우에게 세 발의 총탄을 맞고 암살되었다.[4]

3. 1. 암살 계획과 준비

1892년 5월경 조선 정부는 병조판서 민영소의 주선으로 자객 이일직을 일본으로 보내 김옥균 등 개화당 인사 암살을 시도하였다.[2] 1893년 겨울, 프랑스 유학생 출신 홍종우가 암살 계획에 가담하여 김옥균에게 접근하였다. 홍종우는 서양 문물을 직접 경험한 인물로, 개화 사상을 가진 김옥균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었다.[2]

홍종우


당시 이일직 등의 목표는 김옥균뿐만 아니라 박영효 등 일본에 망명해 있는 개화파 동지 이규완, 정란교, 유혁로 등 여섯 명이었다. 일본에서 이들을 동시에 암살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여, 홍종우는 김옥균을 중국 상하이로 유인해 암살하고, 이일직은 일본에 남아 박영효 등을 노리기로 하였다.[2]

당시 김옥균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었고, 일본 여야 인사들의 차가운 태도에 지쳐 있었다. 그는 청나라로 가서 북양대신 이홍장 등과 손을 잡고 재기를 시도하라는 이일직홍종우의 설득에 마음이 움직였다. 이경방(이홍장의 양자)과 왕봉조가 김옥균과 접촉했고, 김옥균의 상하이행도 이경방의 초청에 따른 것이었다.[2]

3. 2. 상하이 유인과 암살

1893년 겨울, 프랑스 유학생으로 일본에 머물던 홍종우는 암살 조직에 가담하여 김옥균에게 접근했다. 홍종우는 서양의 선진 문물을 접한 인물로, 개화 사상을 가진 김옥균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었다.

당시 김옥균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일본의 여야 인사들마저 냉담한 태도를 보여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종우이일직은 김옥균에게 청나라로 가서 북양대신 이홍장과 손을 잡고 재기를 도모하라고 설득했고, 김옥균은 이들의 감언이설에 마음이 움직였다. 일본 주재 청나라 공사였던 이경방(이홍장의 양자)과 왕봉조도 김옥균과 접촉했고, 김옥균의 상하이행은 이경방의 초청에 따른 것이었다.[2]

1894년 3월 11일, 김옥균은 수행원 일본인 기다하라 엔지와 일본 주재 청나라 공사관 통역 오승을 거느리고 도쿄를 떠나 오사카를 거쳐, 3월 22일 고베에 도착했다. 홍종우는 뒤늦게 고베에서 합류했다. 김옥균 일행은 3월 27일 일본우선사이쿄마루 우선편으로 중국 상하이에 도착하여, 미국 조계 안의 동화양행에 투숙하였다. 당시 상하이에서 살던 윤치호는 김옥균에게 홍종우가 스파이 같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했지만, 김옥균은 홍종우를 의심하지 않았다.[3]

3월 28일, 김옥균은 홍종우에게 이일직이 준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 오라고 지시했다. 홍종우는 천풍보호 주인이 없어서 현금 결제를 못했다며 오후에 다시 가겠다고 했다. 오후 1시경 오승과 기다하라가 자리를 비운 사이, 홍종우는 한복으로 갈아입고 넓은 소매 안에 6연발 권총을 숨겼다. 오후 3시경, 잠에서 깬 김옥균홍종우에게 세 발의 총탄을 맞고 암살되었다.[4]

4. 암살 이후

효수되어 한성부 저잣거리에 내걸린 김옥균의 머리


김옥균의 시신은 조선으로 인도되어 서울 양화진(楊花津)에서 능지처참된 후 전국에 효시(梟示)되었다.[1]

이 소식을 접한 일본의 일부 민간인과 언론 기관들은 김씨우인회(金氏友人會)라는 단체를 조직해 도쿄의 혼간사(本願寺)에서 김옥균의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이들은 청나라가 김옥균 암살에 관여했고 조선 정부가 그의 시신에 잔혹한 형벌을 가했다며 한·청 양국을 응징하라는 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일본 정부가 청일 전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1]

4. 1. 홍종우 체포와 송환

암살 현장에서 도주한 자객 홍종우는 그 이튿날인 3월 29일 새벽 3시경 미국 조계 경찰에 의해 오송(吳淞) 부근의 한 민가에서 체포되어 미국 조계로 압송되었다. 당시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인 오코시 나리노리(大越成徳)는 이 사건에 연루된 홍종우 등 모든 인범(人犯)들을 일본 측에 넘겨서 처리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결국 청나라 측에 넘겨져 처리하게 되었다. 조선 정부의 요구에 따라 1894년 4월 12일 청나라는 김옥균의 시신과 홍종우를 군함 위정호(威靖號)로 조선에 인도하였고, 자객 홍종우는 살인죄에 대한 처벌은커녕 포상과 함께 관직에 등용되기까지 하였다.[1]

4. 2. 김옥균 시신 처리와 조선의 대응



1894년 4월 12일 청나라는 조선 정부의 요구에 따라 김옥균의 시신과 홍종우를 군함 위정호(威靖號)로 조선에 인도하였다. 김옥균의 시신은 서울 양화진(楊花津)에서 능지처참되어 전국에 효시되었다.[1] 반면, 암살 현장에서 도주했다가 체포된 홍종우는 조선에서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포상을 받고 관직에 등용되었다.[1]

4. 3. 일본의 반응과 청일 전쟁



일본 내 일부 민간인과 언론 기관들은 김옥균 암살 소식에 갑작스레 김씨우인회(金氏友人會)라는 단체를 조직, 도쿄의 혼간사(本願寺)에서 김옥균의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이들은 청나라가 김옥균 암살 사건에 관여한 사실과 조선 정부가 그의 시체에 가한 잔혹한 형벌을 비난하면서, 한·청 양국을 응징하라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이러한 움직임은 결국 일본 정부가 청일 전쟁을 촉발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1]

참조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옥균암살사건 http://encykorea.aks[...]
[2] 서적 근대일선관계의 연구 조선총독부중추원 1944
[3] 일기 윤치호 일기
[4] 서적 중동전기본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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