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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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천해는 일제강점기 및 해방 이후 일본과 북한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울산 출신으로 통도사에서 불교를 배우고 경성중앙학림에서 수학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대학에서 수학했다. 일본에서 재일 한국인 노동 운동을 조직하고, 일본 공산당에서 활동하다가 북한으로 이주하여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 등을 역임했다. 1970년 이후 행적이 묘연하며, 강제 수용소 수용자 명단에 이름이 언급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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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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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김천해 (金天海) |
| 일본식 이름 | 긴 덴카이 (金天海) |
| 다른 이름 | 김학의 (金鶴儀) |
| 출생일 | 1898년 5월 10일 |
| 출생지 | 대한제국 경상남도 울산군 |
| 사망일 | 몰년 미상 (1970년 경?) |
| 거주지 | 일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 국적 | 알 수 없음 |
| 직업 | 정치인 |
| 종교 | 알 수 없음 |
| 배우자 | 알 수 없음 |
| 자녀 | 알 수 없음 |
| 부모 | 알 수 없음 |
| 친척 | 알 수 없음 |
| 정치 활동 | |
| 주요 활동 | 재일조선인 운동,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치 참여 |
| 관련 정보 | 1971년 사망설이 있으나 확실한 정보는 없음 |
2. 생애
경상남도 울산군(현재의 울산광역시 방어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양산 통도사에 맡겨져 불도를 수행했다.[8] 1916년 경성의 불교계 학교인 경성중앙학림에 입학했고, 졸업 후 울산에 돌아가 야학 교사로 일했다.[1][8]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니혼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했다.[1] 그곳에서 재일 한국인 노동자 운동을 조직하고 재일 한국인 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1] 정치범으로 구금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후 1945년 10월 10일에 석방되었고, 일본 공산당의 집행 위원이 되었다.[2]
1945년 일본 패망 이후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이 결성되자 최고 고문에 취임했다.[1] 조련은 비정치 단체였으나, 그의 최고 고문 임명은 단체의 좌경화를 가져왔다.[2] 김천해의 영향으로 연맹은 반공주의자들을 숙청했고, 1946년 2월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에 합류했다.[3]
이후 195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이주하여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위원이 되었으며,[4] 1956년 4월부터는 조국전선 의장을 역임했다.[5] 1960년대 전반까지 전선의 주석단에 있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식 자료에 따르면 김천해는 1969년에 사망했다고 하나,[6] 그의 실제 사망 날짜와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다.[4]
2. 1. 유년 시절과 교육
1899년 5월 10일, 대한제국 경상남도 울산군(현재의 울산광역시 방어동)에서 유통·무역업 집안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8] 어린 시절 양산 통도사에 맡겨져 불도 수행을 했다.[8]1916년 일제강점기 경성부의 불교계 학교인 경성중앙학림에 입학했다.[8] 졸업 후 경상남도 울산군으로 돌아가 야학 교사로 일했다.[1][8]
2. 2. 일본 유학과 재일 조선인 노동운동
1920년대 초 겨울, 김천해는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 대학 사회과에 입학했다.[1] 1922년 도쿄 조선 노동 동맹회가 결성되자 실행위원을 맡았고,[1] 같은 해 시나노강 조선인 학살 사건을 계기로 재일본조선노동자상황조사회가 결성되자, 박광해는 이 회에 참가하여 각 지역의 노동자 숙소를 실제로 일하면서 조사했다.[9] 1922년 11월, 이 조사회 참가자를 중심으로 도쿄 조선 노동 동맹회가 결성되었고, 김천해는 이 회의 실행 위원에 취임하여 계급 투쟁을 시작했다.[9]1923년 조선공산당 일본 총국 도쿄 서남부 야체이카(러시아어로 세포를 의미)의 세포원이 되었다.[9] 1924년 3월 16일, 도쿄 조선 노동 동맹과 일본 노동 총동맹은 "관동 대지진 피학살 일지 노동자 합동 추도회"를 개최했고, 김천해는 조선인 대표로 일본 노동 총동맹에 "일본 정부에 조선인 학살을 항의하자"고 제안했지만, 일본 노동 총동맹 간부는 김천해의 제안에 찬성하지 않았다.[9]
1925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재일조선노총)이 결성되었고,[1] 같은 해 7월 김천해는 재일조선노총 가나가와현 지방조직(가나가와 조선 합동 노동회)을 결성하고 상무집행위원이 되었다.[1] 같은 해, 요코하마시의 메이데이 준비회에 조선 노동 조합 대표로 참가하여 "도급 제도 철폐" 등 조선인 노동자의 요구를 메이데이 슬로건에 추가했다.[9]
1928년 5월, 재일본조선노총 중앙집행위원장 겸 쟁의부장에 취임하여 일본 전체 재일조선인 노동운동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1] 같은 달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1] 1928년 10월에 체포돼 1935년에 출소했다.[1]
2. 3. 조선공산당 활동과 항일 투쟁
1922년 도쿄조선노동동맹회에서 실행위원을 맡았고, 1925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재일조선노총) 가나가와현 지방조직(가나가와조선합동노동회)을 결성하여 상무집행위원이 되었다.[1] 1928년 5월 재일본조선노총 중앙집행위원장 겸 쟁의부장에 취임하여 일본 전체 재일조선인 노동운동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1] 같은 달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도쿄 서남부 야체이카의 세포원이 되었다.1928년 6월,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책임 비서 한림 등 다수의 간부가 체포되자, 김천해는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책임 비서가 되었다. 같은 해 8월 29일, 국치기념일과 관동대지진 학살 동포 추도 기념일을 맞아 신주쿠에서 150명의 조선인 노동자들과 집회를 열고 삐라를 뿌리며 행진했다. 이 과정에서 경관대와 난투극이 벌어져 23명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었고, 김천해를 포함한 주요 인물들이 검거되었다.
1928년 10월 25일, 김천해는 가나가와 조선노동조합 요코하마 지부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관계자 36명이 검거되었고, 김천해 등 31명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930년 11월 25일 도쿄 지방 재판소에서 열린 공판에서 김천해는 "조선어 금지는 일본 제국의 폭압이다"라고 주장하며, 일본, 중국, 조선의 피고를 전부 통일하여 재판하라고 요구했다.
1931년 3월 21일, 징역 5년의 실형 판결을 받고 항소했다. 1932년 8월 30일, 항소심 판결에서 징역 5년형이 확정되어 이치가야 형무소에 복역했다.[11] 1935년 출소 후에는 합법적인 조선어 신문인 조선신문사를 설립하여 재일 조선인 노동자들의 의식화에 힘썼다. 그러나 1936년 다시 체포되어 1945년 10월에 석방될 때까지 오랜 기간 투옥 생활을 했다.[2]
2. 4. 해방 후 활동: 재일본조선인연맹과 일본공산당
1945년 8월 15일 일본 항복 후, 김천해는 석방되었다.[2] 1945년 9월 10일, 재일본조선인연맹(약칭 조련) 중앙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조련은 일본 공산당 재건을 지원했다.1945년 10월 10일, 김천해는 후추 형무소에서 출소했다.[2] 같은 날, 히비야 공회당에서 재일본조선인연맹이 결성되었고, 김천해는 최고 고문에 취임했다.[1] 조련은 비정치 단체였으나, 김천해의 최고 고문 임명으로 좌경화되었다.[2] 김천해의 영향으로 연맹은 반공주의자들을 숙청했고, 1946년 2월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에 합류했다.[3]
1945년 12월, 일본 공산당 제4회 대회가 개최되었고, 김천해는 중앙위원 및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었다. 당 중앙에는 조선인부가 설립되었고, 김천해가 부장을 맡았다.
1946년 2월, 재일본조선인연맹 제2회 임시 전국대회가 개최되었다. 대회는 "조선인민공화국 지지 문제"로 분규했다. 같은 해 3월, 재일 조선인 연맹 산하 청년 조직 재일조선민주청년동맹(약칭 민청)이 결성되었다.
1949년 9월, 단체 등 규제령에 의해 재일본조선인연맹에 해산 명령이 내려졌고, 김천해 등 조련 간부들은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김천해는 GHQ와 법무성에 항의했으나, 거부당했다.
2. 5. 북한으로의 이주와 정치 활동
1950년 6월 10일 김계담(민중신문 발행인)과 함께 카스미마루를 타고 돗토리현 사카이미나토에서 대한민국부산으로 밀항했고, 6월 15일 북한으로 향했다. 일본공산당 중앙위원 후계자로는 한덕수를 지명했다.[1] 1951년 11월 조선노동당 제2회 대회에서 당 중앙위원 겸 사회부장에 취임했다.[4] 1956년 4월부터는 조국전선 의장을 역임했다.[5] 1970년 조선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중앙위원 명단에서 사라졌으며, 이후 소식은 두절되었다.[4]그의 행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연도 | 사건 |
|---|---|
| 1950년 6월 10일 | 김계담(민중신문 발행인)과 함께 카스미마루를 타고 돗토리현 사카이미나토에서 대한민국부산으로 밀항[1] |
| 1950년 6월 15일 | 북한으로 밀항[1] |
| 1951년 11월 | 조선노동당 제2차 대회에서 노동당 중앙위원 겸 사회부장에 취임[4] |
| 1951년 12월 10일 | 일본을 향한 라디오 연설 시작 |
| 1952년 5월 2일 | 일본향 라디오에서 "재일 동포에게 호소한다" 연설 |
| 1955년 7월 8일 | 평양방송에서 재일 조선인을 향해 "8·15 해방 10주년을 축하하자"고 호소 |
| 1956년 1월 27일 | 조국전선 의장으로서 "재일 조선 시민의 귀국과 오무라 수용소 석방 문제는 정당하게 해결되어야 한다"는 성명 발표[5] |
| 1957년 1월 1일 | 조선총련에 격려사 |
| 1957년 11월 18일 | 조국전선 제2차 대회에서 의장단으로 선출 |
| 1958년 | 김일성으로부터 로력 훈장을 받음 |
| 1960년 8월 13일 | "8.15 조선 해방 15주년 경축 방북 일조협회 사절단"을 평양 비행장에서 맞이함[12] |
| 1961년 | 김은순 장례식 참석 |
| 1970년 | 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중앙위원 명단에서 사라짐[4] |
1970년 이후 김천해의 소식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국제 앰네스티가 발표한 강제 수용소인 승호리(평양시 승호구역에 있는) 수용소 수감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13]
2. 6. 의문의 실종
1950년 6월 10일 부산으로 밀항했고, 6월 15일 다시 북한으로 향했다.[1] 일본공산당 중앙위원 후계자로는 한덕수를 지명했다.[1] 1951년 11월 조선노동당 제2회 대회에서 당 중앙위원 겸 사회부장에 취임했다.[1] 1970년 조선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중앙위원 명단에서 사라졌고, 이후 소식이 두절되었다.[1] 국제 앰네스티가 발표한 승호리 강제 수용소 수용자 명단에 올랐다고 전해진다.[13]3. 평가 및 논란
김천해는 연설에는 약했지만, 조직을 잘 다루는 능력을 보였다.
3. 1. 부정적 평가 및 논란
김천해는 1950년 6월 10일 민중신문 발행인 김계담과 함께 카스미마루를 타고 돗토리현 사카이미나토에서 부산으로 밀항했고, 같은 해 6월 15일 북한으로 밀항했다.[12] 1970년 조선로동당 제5차 대회에서 중앙위원 명단에서 제외된 이후, 국제 앰네스티가 발표한 승호리 강제 수용소 수용자 명단에 올랐다고 전해진다.[13]참조
[1]
서적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
서적
Zainichi Korean Identity and Ethnicity
Routledge
[3]
서적
The Korean Minority in Japan, 1904-1950
https://books.google[...]
International Secretariat, 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
[4]
문서
Kim, p. 79.
[5]
서적
Communism in Korea: Part I: The Movement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6]
서적
White paper on human rights in North Korea, 1999
Research Institute for National Unification
[7]
간행물
Harvnb|樋口雄一|2014|p=133
[8]
간행물
Harvnb|樋口雄一|2014|p=11
[9]
문서
朝鮮人学生として信用してもらう狙いがあった。
[10]
문서
1921年、東京で、在日朝鮮人留学生が、日本人社会主義者や無政府主義者の協力を得て、思想団体・黒濤会を組織した。その後、黒濤会は、共産主義系の金若水(本名は'''金科全''')のグループと無政府主義系の朴烈(本名は'''朴準植''')のグループに分裂した。
[11]
문서
1930年、五月女組は、愛知県北設楽郡三輪村川合から長岡までの約7kmの三信鉄道工事を落札した。
朝鮮人労働者には賃金が滞りがちとなった。
同年7月26日、朝鮮人労働者は、山中の桑畑に、砦を築いた。砦の前には川が流れていた。砦には、投石用の石やダイナマイトが運び込まれた
同年7月29日、約600人の朝鮮人労働者が争議団を結成し、五月女組に「未払い賃金の即時支払い」「工事中での負傷者への治療費と日当の支払い」を求めて、ストライキに入った。
新潟朝鮮労働組合は、朴広海を派遣して、ストライキの指導を任せ、争議団統制部長に据えた。高根光泰は、食料や雑貨を五月女組に納入していたが、朴広海に「ストライキで勝ったら、優先して自分のところに、売掛金8万円を払って欲しい」と申し出た。
朴広海は、高根に、米350表と味噌と醤油を朝鮮人争議団に用意するように提案し、「ストライキに勝てば16万円を支払う」と返答した。高根は、了解し、米と味噌と醤油を運び込んだ。
朴は、五月女組についていた朝鮮人監督らを花札に誘い、争議団の若者に朝鮮人監督と喧嘩をさせた。
高根の若衆が喧嘩を止めている隙に、朴は米と味噌と醤油を高根から奪い、朝鮮人争議団の砦に運んだ。
砦では、半鐘やマキビシ、パンク針が作られていた。朴は、川の橋に、行動隊を配置し、ダイナマイトを持たせた。朴は、国道入り口にあった天然記念物の杉の木に、「三信鉄道争議団」と書かれた赤旗を掲げた。
同年7月30日、浜松市の航空隊が、争議団の砦を偵察した。
同年7月31日午前4時30分、消防団や自警団や警察のトラック12台と警察官200人から300人ほどが、争議団の砦に到着した。
朝鮮人争議団組織部長・金明植は、消防団と自警団に対して、「五月女組の賃金未払いで、地元から納入した野菜代金4万円を支払えない。ストライキに勝てば、4万円を支払えるが、負ければ野菜代は支払えない。争議に干渉しないで欲しい」と訴えた。消防団と自警団は撤退した。が、警官隊は、砦に突っ込み、朝鮮人争議団と乱闘となった。
金奉達が警官にサーベルで斬られた。争議団は警官隊を追い返し、警察官18人を捕虜とした。争議団は、捕虜の警察官18人を裸にして、砦から追い出した。朝鮮人争議団は、地元農民と協力して、国道を封鎖し、砦で自給自足の生活を行なった。
同年8月25日、警官隊1200人が朝鮮人争議団の砦を制圧し、朝鮮人300人を川合小学校に検束した
[12]
서적
楽園の夢破れて―北朝鮮の真相
全貌社
[13]
웹사이트
李洋秀「凍土の北朝鮮に殺到した在日朝鮮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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