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나철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나철은 대한제국 시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대종교를 창시한 인물이다. 그는 관직 생활을 하다가 항일 투쟁에 참여하여 을사늑약 체결 후에는 오적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09년 단군교를 창시하고 이듬해 대종교로 개칭한 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교단을 이동했다. 1916년 구월산에서 자결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대종교에서는 나철이 대종교를 창시한 날을 중광절, 순교한 날을 가경절로 기념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한국의 자살한 정치인 - 민영환
    민영환은 1861년 서울에서 태어나 문과에 급제하고 요직을 거치며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참석한 개화파 인물로,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자결했으며 그의 유서는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 한국의 자살한 정치인 - 김상옥 (1890년)
    김상옥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3·1 운동 후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며 1923년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후 일본 군경과 총격전 중 자결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활동했으며 아나키즘을 수용하기도 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한국의 종교 지도자 - 손병희
    손병희는 조선 말 동학의 지도자이자 대한제국의 종교인, 독립운동가로서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3·1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며 인내천 사상을 강조했다.
  • 한국의 종교 지도자 - 박인호 (1854년)
    박인호는 천도교 제4대 교주이자 독립운동가로, 갑오농민전쟁에 참여, 3·1 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 《조선독립신문》 발간을 주도하는 등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헌신하였다.
  • 대한제국의 대종교인 - 김좌진
    김좌진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한국독립당 회장을 역임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훈받았다.
  • 대한제국의 대종교인 - 박은식
    박은식은 언론인, 역사학자, 정치인으로서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지내며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국외 망명 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국무총리와 제2대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을 저술하여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와 정당성을 알린 독립운동가이다.
나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대략 1916년 9월 5일경으로 당시 별세하기 직전의 홍암 나철 선생
대략 1916년 9월 5일경으로 당시 별세하기 직전의 홍암 나철 선생
이름나철
원어 이름羅喆
출생일1863년 12월 2일
출생지조선 전라도 보성 벌교
거주지대한제국 전라남도 낙안군
사망일1916년 9월 12일
사망지일제강점기 황해도 신천군 구월산
사망 원인음독 자결 순국
별명자(字)는 문향(文鄕)
호(號)는 홍암(弘巖)
본명나두영(羅斗永) → 나인영(羅璌永 → 羅寅永) → 나철(羅喆)
국적대한제국
활동 기간1883년~1916년 9월 1일
수행 성직단군교(창설 1년 후 1910년 1월 15일 개칭하여 대종교)
학력1891년 식년문과 병과 급제
경력조선 시대 말기의 〈성균관〉의 강독관·〈홍문관〉의 강독관·보좌원·비서원·부정자·가주서 등을 거쳐 〈탁지부〉의 가주서·출납국 담당 재무관·참서관 등을 두루 역임
대한제국 시대 말기의 〈탁지부〉의 징세서장 역임
관직 은퇴 이후 대한제국 시대 말기의 〈자신회〉 대표 회장 등을 거쳐, 대한제국 시대 말기의 오적 암살단 대표 단장 역임
대종교 창시(대종교 중광 교조)를 한, 대한제국 시대의 독립운동가 겸 종교인
교파대종교
직업대종교 지도자 겸 독립운동가
부모아버지 나용집(羅龍集)
어머니 청주 한씨 부인(淸州 韓氏 夫人)
칭호대종교 도사교
전임자(초대)
민족한민족(나주 나씨)
칭호 기간1909년 2월 5일~1916년 9월 1일
친척나수천(친조부)
송주원(장인)
한위정(외조부)
나석채(친증조부)
후임자김헌
배우자여산 송씨 부인
자녀장남 나정련(羅正練)
차남 나정문(羅正紋)
상훈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웹사이트두산백과
기타
로마자 표기Nacheol

2. 생애

1863년 12월 2일(고종 즉위년) 전라도 보성군 벌교읍에서 태어나[5][6] 낙안군 토박이들의 직계 후손으로, 일찍이 한학을 공부하였다.

1883년(고종 20) 충청도 충주진영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1886년(고종 23) 경기도 수원유수부를 거쳐, 1888년(고종 25) 한성부로 유학하였다. 1891년(고종 28)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894년(고종 31) 홍문관 부정자(副正字), 1895년(고종 31) 홍문관 가주서를 지냈다. 1896년(건양 원년) 탁지부 징세서장(徵稅署長)에 임명되었으나, 1898년(광무 1)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904년 귀향한 후 오기호, 이기, 최전 등 호남 출신 지식인들과 함께 비밀 결사인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였다. 1905년 6월 오기호, 이기, 홍필주 등과 일본에 건너가 동양 평화를 위하여 , , 3국은 상호 친선 동맹을 체결하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善隣)의 교의(交誼)로써 협조할 것을 일본 정객들에게 제의했으나 별 성과가 없자 황거 앞에서 단식 농성을 하는 등 민족주의적 운동에 관심을 보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에는 이철, 강원상 등을 포섭하여 자신회(훗날 오적 암살단으로 개편)를 결성, 을사오적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1907년 자수하여 지도(智島)에 10년 유형을 선고받았으나, 1년 후인 1908년 순종 2년에 고종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1909년 2월 5일 한성부에서 민족 종교 운동의 일환으로 단군교를 창시했고, 이듬해 음력 1909년 1월 15일에 단군교의 명칭을 대종교로 개칭했다. 1909년 2월 5일, 오기호(吳基鎬) 등 동지 10명과 함께 서울 재동(齋洞)에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셔 놓고 《단군교 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공포한 것이 단군교, 즉 대종교의 시작이다.

1910년 1월 15일, 대종교로 개칭하고(신도수 2만여 명으로 증가), 동간도 지역에 지사를 설치하였다. 경술국치(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일제의 박해를 피해 교단을 만주 쪽으로 이동했는데, 이때 서일을 비롯한 대종교인들이 독립운동에 대거 뛰어들었다. 1914년 3월 13일에는 본사를 그곳으로 옮겨 포교 영역을 만주 일대까지 넓혔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1915년 10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탄압을 노골화하였다.

1916년 9월 12일(음력 8월 15일)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한배검(단군)에게 제천의식을 올리고 순명삼조(殉命三條, 한배님께 제천하고, 대종교를 위하고, 한배님을 위하고, 인류를 위해 목숨을 끊는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1]

2. 1. 어린 시절

전라도 보성 벌교에서 태어났으며[5][6] 낙안 토박이들의 직계 후손으로, 일찍이 한학을 공부하였다.

2. 2. 관직 생활

1883년(고종 20) 충청 충주진영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1886년(고종 23) 경기 수원유수부를 거쳐, 1888년(고종 25) 한성부로 유학하였다. 1891년(고종 28)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894년(고종 31) 홍문관 부정자(副正字), 1895년(고종 31) 홍문관 가주서를 지냈다. 1896년(건양 원년) 탁지부 징세서장(徵稅署長)에 임명되었으나, 1898년(광무 1)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2. 3. 항일 투쟁

1904년 귀향한 후 전남 강진의 오기호, 전북 부안이기, 최전 등 호남 출신 지식인들과 함께 비밀 결사인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였다. 1905년 6월에는 오기호, 이기, 홍필주 등과 일본에 건너가 동양 평화를 위하여 , , 3국은 상호 친선 동맹을 체결하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善隣)의 교의(交誼)로써 협조할 것을 일본 정객들에게 제의했으나 별 성과가 없자 황거 앞에서 단식 농성을 하는 등 민족주의적 운동에 관심을 보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에는 이철, 강원상 등을 포섭하여 자신회(훗날 오적 암살단으로 개편)를 결성, 을사오적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1907년 자수하여 지도(智島)에 10년 유형을 선고받았으나, 1년 후인 1908년 순종 2년에 고종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2. 4. 대종교 창시와 구국 운동

1909년 2월 5일 한성부에서 민족 종교 운동의 일환으로 단군교를 창시했고, 이듬해 음력 1909년 1월 15일에 단군교의 명칭을 대종교로 개칭했다. 1909년 2월 5일, 오기호(吳基鎬) 등 동지 10명과 함께 서울 재동(齋洞)에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셔 놓고 《단군교 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공포한 것이 단군교, 즉 대종교의 시작이다.

1910년 1월 15일, 대종교로 개칭하고(신도수 2만여 명으로 증가), 동간도 지역에 지사를 설치하였다. 경술국치(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일제의 박해를 피해 교단을 만주 쪽으로 이동했는데, 이때 서일을 비롯한 대종교인들이 독립운동에 대거 뛰어들었다. 1914년 3월 13일에는 본사를 그곳으로 옮겨 포교 영역을 만주 일대까지 넓혔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1915년 10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탄압을 노골화하였다.

2. 5. 최후

1916년 9월 12일(음력 8월 15일)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한배검(단군)에게 제천의식을 올리고 순명삼조(殉命三條, 한배님께 제천하고, 대종교를 위하고, 한배님을 위하고, 인류를 위해 목숨을 끊는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1]

3. 사후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3. 1. 대종교의 기념

오늘날 대종교에서는 음력 1월 15일을 중광절(나철이 대종교를 창시한 날), 음력 8월 15일을 가경절(나철이 순교한 날)로 정하고 이를 기념한다.

4. 대종교

1916년 나철이 사망한 이후 대종교김교헌, 윤세복으로 이어지며 그 명맥을 이어나갔다. 김교헌은 총본사를 동만주로 옮기고 북로군정서를 조직, 청산리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7] 윤세복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대종학원을 설립하고 관련 서적을 간행하는 등 대종교를 이끌었다.[7]

4. 1. 2세 교주 김교헌 시대

1916년 9월 1일(음력 8월 4일) 김교헌대종교 2세 교주가 되었다.[7] 김교헌은 총본사를 동만주 화룡(和龍)으로 옮기고 홍범규칙(弘範規則)을 공표 및 배포하였다.[7] 또한 비밀결사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여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발전시켰으며,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7]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다음해에 대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수많은 교도들을 무차별 학살하였으며, 김교헌은 통분 끝에 병으로 죽었다.[7] 김교헌은 대종교를 제도적으로 정립하고 역사적으로 고증하기 위해 『신단실기』(神檀實記), 『신단민사』(神檀民史), 『단조사고』(檀祖事攷) 등을 저술하였다.[7]

4. 2. 3세 교주 윤세복 시대

윤세복이 3세 교주가 되자, 일제의 압력을 받은 길림성장 장쭤상(張作相)은 <대종교 포교금지령>을 내렸다. 이에 윤세복은 총본사를 발해의 옛 도읍터였던 동경성으로 이전하고, 대종학원을 설립하였다. 또, 대종교서적간행회를 발족시켜 『삼일신고』, 『종지강연』 등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천전(天殿) 건립을 서두르던 중 1942년 11월 윤세복 외 20명의 간부가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한 단체구성>이란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옥사하였다.[7]

5. 가경절

1916년 9월 11일(음력 8월 14일) 상교(尙敎) 김두봉을 비롯한 시봉자(侍奉者) 6명을 대동하고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들어가 수행을 시작하였다. 사당 앞 언덕에 올라 북으로는 백두산, 남으로는 선조의 묘소를 향해 참배한 뒤 "오늘 3시부터 3일 동안 단식 수도하니 누구라도 문을 열지 말라"고 문 앞에 써붙인 뒤 수도에 들어갔다. 그러나 16일 새벽 이상스럽게 인기척이 없어 제자들이 문을 뜯고 들어가니, 나철은 자신이 죽음을 택한 이유를 밝힌 유서를 남기고 조식법(調息法)으로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나철의 유언대로 청파호에 유해를 안장하였으며, 그 후 대종교에서는 나철이 운명한 날을 가경절이라 하여 4대절(四大節)의 하나로 기념하고 있다.

6. 가족

항목내용
증조부나석채(羅碩采)
조부나수천(羅壽天)
부친나용집(羅龍集), 유학
모친청주 한씨, 한위정(韓位廷)의 딸
배우자여산 송씨, 송주원(宋柱元)의 딸
장자나정련(羅正練, 1882.9.17~1943.9.17)
독립운동가. 1991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 추서.
차자나정문(羅正紋, 1892.11.28~1944.2.7)
독립운동가. 1991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 추서.


7. 저서

참조

[1] 문서 음력 1916년 8월 15일
[2] 문서 나두영의 문과방목
[3] 문서 음력 8월 15일
[4] 웹사이트 황성신문 - 1900년 5월 3일 (97호) ~ 5월 5일 (99호) / 廣告 : 前注書羅斗永名改以璌永辱知君子僉諒 http://www.mediagaon[...] 1900-05-03
[5] 웹사이트 나철의 출신지 http://db.history.go[...]
[6] 웹사이트 나철의 독립유공자 포상자 공적조서 http://e-gonghun.mpv[...]
[7] 서적 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