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당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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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사당놀이는 유랑 예인 집단인 남사당패가 행하던 전통 연희를 의미한다. 조선 시대에 기원하여, 풍물, 버나, 살판, 어름, 덧뵈기, 덜미의 여섯 마당으로 구성된 공연을 펼쳤다. 남사당패는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계층으로 구성되었으며, 민중과 함께 웃고 울며 양반 사회를 풍자하는 공연을 선보였다.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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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당놀이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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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개요 | |
종류 | 한국 전통 공연 예술 |
성격 | 유랑 예인 집단 |
활동 시기 | 조선 후기 |
상세 정보 | |
기원 | 불교 사찰의 승려 집단에서 유래 (추정) |
구성원 | 꼭두쇠 (우두머리), 뜬쇠 (중간 우두머리), 가열 (단원) |
공연 종목 | 풍물 어름 (줄타기) 버나 살판 덧뵈기 덜미 |
특징 | 서민들의 애환과 풍자를 담은 공연 |
전승 현황 | 남사당놀이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 |
관련 문화재 | |
지정 번호 |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 |
지정일 | 1964년 12월 7일 |
소재지 | 안성시 |
문화재청 지정 번호 | 17,00030000,11 |
관련 정보 | |
관련 축제 |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 축제 |
관련 단체 |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 풍물단 |
2. 기원
남사당놀이의 연원이나 형성과정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해동역사》에 따르면 유랑 민중놀이패는 신라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후기에 자연발생한 민중놀이 집단이 처음에는 사당패라고 하여 여자들이 술자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집단에서 출발하였으나, 조선 말기 남자들만의 사당패가 생겨나 남사당패라고 하였다. 구성은 맨 위에 꼭두쇠가 있고 그 밑에 곰벵이쇠·뜬쇠·가열·삐리·저승패·등짐꾼 등 40∼50명으로 이루어졌다. 그 조직은 엄격하였고 모자란 인원은 가난한 농가의 아이나 고아·가출아 등으로 충당하였다. 현재까지 이들의 은거지로 밝혀진 곳은 경기도 안성·진위, 충청남도 당진·회덕, 전라남도 강진·구례, 경상남도 진양·남해, 황해도 송화·은율 등지인데 놀이가 거의 없는 겨울철에는 삐리들의 기예(技藝)를 가르쳤다고 한다. 1920년대 이후 독립적인 존속이 어려워지게 되자 중매구와 걸립패와의 교습을 거치게 되고, 사당패·솟대장이패와의 교류도 갖게 되면서 오늘의 형태로 변모된 것이다.
남사당은 남자들로 구성된 유랑 예인 집단으로, 조선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던 계층 중 하나였다. 이들은 광대, 장인, 상인보다도 낮은 취급을 받았으며,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가족과 함께 거주할 곳도 없이 전국을 떠돌아다녔다.[18] 남사당은 온갖 사회악의 온상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면서도 민중 속에서 그들의 놀이를 통해 양반 사회를 비판하고 상민들과 함께 웃고 울었다.
남사당은 40~50명 정도로 구성되었으며, 꼭두쇠를 비롯하여 곰뱅이쇠, 뜬쇠, 가열, 삐리, 저승패, 등짐꾼 등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로 이루어졌다.[1]
3. 성격
남사당놀이는 권력 주변에 기생했던 다른 지역 단위 연희와는 성격이 달랐으며, 오히려 조선 시대 동안 지역 놀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억압받던 상민의 입장에서 그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저항 의지를 일깨웠다. 남사당의 정신은 민중의 정신으로 살아남아 풍물(농악), 버나(사발과 쳇바퀴 돌리기), 살판(몸재주), 어름(조선줄타기), 덧뵈기(가면극), 덜미(꼭두각시 인형극) 등 여섯 마당 놀이에 깃들어 있다.
남사당은 꼭두(대장)를 중심으로 50여 명의 인원이 형제처럼 생활하며 민중의 애환을 함께 나누었다. 이들은 서구 문명의 유입과 일제의 탄압을 거치며 걸립패로 바뀌는 등 많은 변화를 겪었다.
남사당은 수십 명의 그룹으로 한반도 각지를 여행하며 농악, 탈춤, 꼭두각시놀음, 곡예 등을 선보였다. 이들은 마을의 발전과 사람들의 건강을 기원하고, 시주를 모아 생활했다. 명목상으로는 사찰 건립이나 보수를 위한 권선이었으며, 절을 중심으로 활동했기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조선에서는 천인 중 '팔반사천' 중 하나로 꼽혔으며, 40~50명의 남자만으로 구성된 독자적인 사회를 이루었다.[18] 남사당은 남색을 집단의 유대로 삼았으며, 낮에는 연희를 하고 밤에는 젊은 단원을 빌려주는 매춘으로 수입을 얻었다. 그 때문에 남사당의 흥행은 풍기를 문란하게 한다는 이유로 하루로 제한되기도 했다. 여성 중심의 집단은 '사당' 또는 '여사당'이라 불렸으며, 이들은 거사(남자)와 사당(여자)이 한 쌍을 이룬 부부 집단으로 여자에게 춤을 추게 하거나 매춘을 시켜 수입을 얻었다.
남사당의 구성원은 꼭두쇠(단장), 골뱅이쇠(부단장, 기획), 뜬쇠(각 분야의 장), 가열(연기자), 삐리(견습생, 여장을 한 미동), 저승패(원로), 등짐꾼 등으로 이루어졌다. 꼭두쇠는 합의로 선출되었고 조직에 대한 모든 결정권을 가졌다. 삐리는 여장을 하고 남자를 따르는 역할을 했으며, 그 인원에 제한이 있어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삐리는 빈농에서 인원을 감축하거나 고아, 가출한 아이들을 데려오는 경우가 많았고, 때로는 유괴도 이루어졌다.
후기에는 소수의 여성도 남사당에 참여했는데, 그중 한 명이 바우덕이(본명 김암덕, 1848~1870)이다.[19][20] 바우덕이는 조선 시대 안성에서 태어나 4세 때 남사당에 들어가 14세에 무리를 이끌었으나, 19세에 병에 걸려 22세에 생을 마감했다.
4. 구성
남사당패는 남색을 집단의 유대로 삼고, 낮에는 연기를, 밤에는 젊은 단원을 빌려주는 매춘으로 수입을 얻는 동성애 공동체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있다.[8][9] 이 때문에 남사당의 흥행은 풍기를 문란하게 한다는 이유로 제한되기도 했다. 여성으로 구성된 경우는 '사당' 또는 '여사당'이라 불렸으며, 이들은 거사라 불리는 남자와 짝을 이루어 춤을 추거나 매춘을 통해 수입을 얻었다.
남사당의 활동은 주로 농어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모내기 시기부터 늦가을까지 흥행하고 겨울에는 훈련에 집중했다.
4. 1. 조직
남사당패는 40~5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꼭두쇠를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운영되었다.[1] 각 단원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역할 | 설명 | |||||||||||||||||
---|---|---|---|---|---|---|---|---|---|---|---|---|---|---|---|---|---|---|
꼭두쇠 ({{lang|ko|꼭두쇠|} | })
역할 | 설명 |
---|---|
꼭두쇠 (우두머리, 모갑이) | 패거리를 책임지는 우두머리 |
곰뱅이쇠 | 꼭두쇠를 보좌하며, 마을에 들어가기 전 놀이판 허가를 받는 역할 (곰뱅이) 담당 (한 명 또는 두 명) |
뜬쇠 | 각 분야의 책임자 |
가열 | 뜬쇠 밑에서 수련하고 공연하는 사람 |
삐리 | 가열 밑의 초입자. 가열이 되기 전까지 여장을 하는 것이 일반적 |
저승패 | 연희 기능을 상실한 늙은 단원 |
매호씨 | 어릿광대. 공연자와 재담을 주고받으며 흥을 돋움 |
무동 | 여장을 한 남자아이 |
꼭두쇠는 합의로 선출되었으며, 조직에 대한 모든 결정권을 가졌다. 삐리는 여장을 하고 남자를 따르는 역할을 맡았으며, 인원 제한으로 인해 쟁탈전이 치열했다. 삐리는 빈농의 인원 감축, 고아, 가출한 아이들을 데려오거나 유괴를 통해 보충되었다.
후기에는 바우덕이와 같이 여성도 남사당에 참여했다.[19][20]
5. 공연 내용
남사당패는 풍물,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음), 덜미(꼭두각시놀음)의 여섯 가지 놀이를 공연했다. 이 외에 얼른(요술) 등은 이미 사라졌다.[3] 원래 밤 9시부터 다음날 새벽 3~4시까지 총 6~7시간 동안 공연했지만, 현재는 2~3시간 정도로 축소되었다.
남사당은 마을에서 공연하기 위해 마을 지도자의 허락을 받아야 했으며, 주로 마을에서 가장 넓은 마당에서 공연했다.[3]
남사당놀이는 지배 계급에 대한 풍자와 비판이 많아 오락거리가 부족했던 민중에게는 즐거움을 주었지만, 지배 계급에게는 미움을 받아 공연 개최를 거부당하는 일도 있었다. 또한, 남사당의 세련된 풍물은 지역 풍물 연주자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5. 1. 풍물 (농악)
남사당놀이에서 풍물은 마을 단위의 농악대와는 달리 일년 내내 계속되며, 직업으로 하는 농악놀이이다. 남사당놀이의 대표격으로, 숙련된 남사당들의 체기(體技)를 겸한 춤사위와 가락은 전라도나 경상도의 가락인 아랫다리 가락에 비해 윗다리가락의 대표적인 가락으로 힘차고 절도가 있다. 특히 무동(舞童)춤은 5무동 이상이 아슬아슬한 묘기를 하며, 상무의 극치인 열두발 상모를 끝으로 한다.[3]풍물은 일종의 농악인 인사굿으로 시작하여 돌림벅구·선소리판·당산벌림·양상치기 등 24판 내외의 판굿을 돈 다음, 상쇠놀이·따벅구(벅구놀이)·징놀이·북놀이·새미받기·채상놀이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웃다리 가락(충청·경기·이북지방)을 바탕으로 하며 꽹과리, 북, 징, 장구, 날라리 땡각(令角)의 잽이(악사)와 법고 등을 포함한 최소 24명 정도가 한 조를 이룬다. 짜임새 있는 진풀이와 동니·채상 등의 몸재주와 묘기를 가미하여 연희적 요소가 두드러진다.
''풍물놀이''는 음악, 춤, ''상모놀이''와 다양한 활동이 결합된 ''남사당놀이''의 첫 번째 공연이다. ''풍물'' 악기는 ''징'', ''꽹과리'', ''북'', ''장구''와 몇 개의 ''소고'' (타보르)와 날라리/태평소 (겹리드)를 포함한 4개의 타악기로 구성되어 독특한 멜로디와 리듬을 만들어낸다. 네 개의 ''풍물'' 악기(즉, ''징, 꽹과리, 북, 장구'')가 연주하는 음악을 ''사물놀이''라고 한다.[10]
풍물(품물·노리)은 사물(이라고 불리는 4개의 타악기를 중심으로 행해지는 연주로, 농악이라고도 한다. 삼한 시대부터 농경에 관한 무속 의식의 악곡으로 전해진 것을 연희용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흥행의 처음에 행해지며, 법고(복구)를 울리면서 아크로바틱하게 춤을 추며 행진한다. 마지막으로 삼층 무동이라고 불리는 망루를 선보인다.
5. 2. 버나 (대접돌리기)
담뱃대나 나무 끝, 또는 칼끝으로 사발이나 쳇바퀴를 자유자재로 돌리는 묘기이다. 버나잽이(접시 등을 돌리는 사람)와 매호씨(어릿광대)가 주고받는 재담과 소리가 극적(劇的)인 묘미를 더한다. 풍물 반주에 맞춰 진행된다.[3][11]5. 3. 살판 (땅재주)
살판은 물구나무서기 등 일종의 기계체조와 비슷하지만, 풍물 반주에 맞춰 온갖 재주를 부리는 기예이다. 몸짓의 표현 속에서 "죽느냐(죽을 판) 사느냐(살 판) 하는 절실함"이 담겨있다.[3] 잘하면 살판이고, 못하면 죽을 판이라는 뜻에서 '살판'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앞곤두, 뒷곤두, 번개곤두 등 11가지 종류가 있다.[3] 본래는 대광대패나 솟대쟁이패의 놀이 중 하나였으나 남사당놀이로 흡수되었다. 살판쇠(땅재주꾼)와 매호씨(어릿광대)가 잽이(악사)의 장단에 맞춰 재담을 주고받으며 재주를 부린다.[3]5. 4. 어름 (줄타기)
어름산이(줄타는 사람)는 외줄로 꼰 줄 위에서 어릿광대와 말을 주고 받으며, 풍물 장단에 맞추어 온갖 춤을 다 추고, 갖은 걸음걸이로 어름 위에서처럼 아슬아슬하게 줄을 탄다. 이는 풍자 연희의 멋이 다른 서구적 줄타기 또는 서커스 줄타기와는 다른 점이다.[3] 줄타는 사람을 어름산이, 그 아래서 대사를 주고 받는 사람을 어릿광대라고 한다. 줄타기는 얼음 위를 걷듯이 어렵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앞으로 가기, 장단줄, 거미줄 늘이기 등 15종의 순서가 있다.
5. 5. 덧뵈기 (탈놀음)
덧뵈기는 "탈을 쓰고 본다"는 의미이다. 덧뵈기|labels=no한국어 이는 분장 대신 탈을 쓰는 가면극으로, 춤보다는 재담과 연기가 중심이 되는 풍자극이다.[3]덧뵈기는 마당씻이, 옴탈잡이, 샌님잡이, 먹중잡이의 네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때그때 지역 주민들의 취향과 흥미에 맞춰 공연되었다. 이는 지역 단위의 가면극과는 달리 대사를 중심으로 하는 막간극 형식을 취하고 있다. 덧뵈기는 유머가 풍부하고 대중의 흥미를 끌어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동시에 조선 시대 양반이나 지배 계급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담고 있었다.[3]
조선의 가면극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남사당의 가면극(덧뵈기)은 의식이나 행사의 성격이 옅고, 1막 4장의 세련된 구성을 가진다. 평민의 시선에서 양반과 평민 간의 갈등을 주제로 한 오락적인 사회극이 기본이 되었다.
5. 6. 덜미 (꼭두각시놀음)
덜미는 인형극을 말하는 것으로 인형의 덜미를 잡고 한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남사당놀이의 마지막 순서로 한국에 하나밖에 전하지 않는 전통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이다. 대개 두마당 일곱거리로서, 박첨지마당(박첨지유람거리·피조리거리·꼭두각시거리·이시미거리), 평안감사마당(매사냥거리·상여거리·절짓고 허는 거리) 등이다.[12]
''덜미''는 인형극으로 마지막에 공연된다. 이것은 또한 ''꼭두각시놀음''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꼭두'(인형), '각시'(소녀), '놀음'(''놀이'', 공연) 세 단어로 구성된다. 이 인형극은 ''박첨지놀음''과 ''홍동지놀이''라고도 불리며, 극의 주요 등장인물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한국에서 인형극은 신라 시대 초기(기원전 57년 – 서기 935년)에 처음 등장했다. 다른 모든 인형극은 나중에 사라졌지만, ''덜미''는 살아남아 여러 세대에 걸쳐 전해져 내려왔다. 주요 내용은 지배적인 귀족 계급에 대한 저항, 부패한 승려들을 풍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극은 평민과 가난한 대중에게 호소력이 있었고, 이것이 아마도 그 인기를 설명하며, 결국 수많은 세월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다른 남사당놀이보다 먼저 중요 무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3][13]
일반적으로 공연자들은 약 40개의 인형과 약 10개의 소품을 사용한다.[14]
남사당의 인형극은 한국에서 유일한 민속 인형극이라고 불린다. '꼭두각시 놀음', 또는 난폭한 등장인물 '홍동지'의 이름을 따서 '홍동지 놀음'이라고도 불린다. 2막 7장, 40여 개의 인형이 등장하며, 악사 중 한 명(삿바지)과 인형이 대화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광대 '박첨지'의 시점을 통해, 지배 계급이나 승려, 악처 등 억압적인 존재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내용이다.
6. 바우덕이
바우덕이(본명: 김암덕|金岩德한국어)는 남사당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2] 1853년, 5세의 어린 나이에 남사당패에 합류한 바우덕이는 여섯 가지 놀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대중의 스타로 떠올랐다. 15세에는 남성 중심의 사회적 관습을 깨고 남사당패 우두머리인 꼭두쇠로 선출되었는데, 이는 그녀의 뛰어난 기량과 인기를 증명하는 이례적인 사건이었다.[15]
1865년, 흥선대원군은 바우덕이의 남사당패를 궁으로 불러 경복궁 중건 사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을 위로하게 했다. 이 공연은 성공적이었고, 흥선대원군은 정3품 당상관만이 착용할 수 있었던 비취 옥관자를 하사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바우덕이의 명성은 전국으로 퍼져나갔으며, 한국 연예 사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바우덕이는 한국 최초의 대중 연예인으로 평가받는다.[15]
안성에서는 그녀를 기리기 위해 매년 10월 "바우덕이 축제"를 개최한다.[16]
7. 흥망성쇠
1890년대 후반 남사당패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지만, 일제 강점기와 근대화, 그리고 6.25 전쟁을 거치면서 전국적으로 흩어지고 인기가 급감했다. 전쟁 이후 남은 단원들이 공연을 재개했지만, TV의 등장으로 관객이 줄면서 남사당패는 거의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7]
하지만 남사당패 일원이었던 김덕수가 장단 일부를 모아 변형한 사물놀이(풍물놀이)를 만들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사물놀이의 등장은 남사당패의 인기를 되살렸고, 현재까지 대한민국의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김덕수는 현대 한국의 음악 그룹 사물놀이의 리더로, 3세부터 남사당에서 기예를 연마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남사당놀이는 자발적으로 생겨난 대중 예술로서, 가난한 농민, 서민, 상인 등 중하류층을 위해 공연되었다. 대중의 정서에 호소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7]
옛 남사당의 발상지인 안성에서는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극단이 재건되어 매주 토요일 정기 공연을 하고, 해외 공연도 진행하고 있다.[17] 조선 시대에 다수 존재했던 남사당은 1920년경까지 존속했으며, 현재는 서울 전수회관에 보존회로 남아있다. 1964년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2009년에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일본 나라현에서는 [http://namsadang.jp/ 남사당 일본 지부]가 전통 보존과 보급에 힘쓰고 있다.
2013년에는 계승자 4명 중 유일한 인간문화재를 포함한 3명이 부정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아 계승자 지정이 해제되면서 계승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21]
8. 현대적 의의
남사당놀이는 대중을 위해 자발적으로 생겨났으며, 가난한 농부, 서민, 상인 등 중하류 계층을 위한 공연이었다. 대중을 위로하는 기능을 했으며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얻었다. 도드리나 검무, 승무와 같이 상류층을 위한 정제된 형태는 아니지만, 감정에 가장 강력하게 호소하고 전달하기 위한 공연으로 볼 수 있다.[7]
조선 시대에 다수 존재했던 남사당은 1920년경까지 존속했으며, 현재는 서울에 있는 전수회관에 보존회로 남아 있다. 1964년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에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현재 일본 나라현에서는 [http://namsadang.jp/ 남사당 일본 지부]가 전통 보존과 보급에 힘쓰고 있다.
사물놀이의 리더 김덕수는 남사당의 전 멤버로, 3세부터 여행에 동행하며 기예를 연마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2013년, 계승자 4명 중 유일한 인간문화재를 포함한 3명이 부정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아 계승자 지정이 해제되어 계승 위기에 빠졌다.[21]
참조
[1]
웹사이트
Namsadang:Professional acrobatics, Song and Dance groups
http://eng.baudeogi.[...]
Anseon Namsadang Baudeogi Festival
2008-07-13
[2]
웹사이트
The Origin of Namsadang (남사당 유래)
http://www.namsadang[...]
Anseong Namsadang Baudeogi Pungmuldan
2008-07-13
[3]
웹사이트
Namsadang (남사당 男寺黨)
http://100.empas.com[...]
"[[Empas]]/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08-07-13
[4]
웹사이트
Namsadang (남사당 男寺黨)
http://100.empas.com[...]
"[[Empas]]/ [[Britannica]]"
2008-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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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당이 쉬어갔던 작은 절집 청룡사
http://www.koreatemp[...]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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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예인집단 남사당
http://namsadang.cul[...]
2008-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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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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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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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100.empas.com[...]
[11]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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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100.empas.com[...]
[12]
웹사이트
엔싸이버 백과검색 - 꼭두각시놀음
http://engdic.encybe[...]
[13]
웹사이트
엠파스 백과사전
http://100.empas.com[...]
[14]
웹사이트
인형들이 하는 연극(꼭두각시놀음)
http://www.ocp.go.kr[...]
2008-07-14
[15]
웹사이트
Anseong Baudeogi Festival 2007
http://eng.baudeogi.[...]
2008-07-14
[16]
웹사이트
Anseong Baudeogi Festival 2007
http://eng.baudeogi.[...]
2008-07-14
[17]
웹사이트
Anseong Baudeogi Festival
http://www.visitkore[...]
[18]
웹사이트
男寺党とは
http://namsadang.jp/[...]
[19]
웹사이트
바우덕이(金巖德)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 한국학중앙연구원 韓国歴代人物総合情報システム - 韓国学中央研究院
http://people.aks.ac[...]
[20]
웹사이트
바우덕이(김암덕) 시사상식사전 時事常識辞書
http://terms.naver.c[...]
[21]
웹사이트
無形文化遺産「男寺党ノリ」が消滅の危機
http://kankoku-keiza[...]
[22]
웹사이트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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