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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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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농가는 춘추전국 시대에 등장한 중국의 철학 학파로, 농업을 중시하고 자급자족을 강조했다. 농가는 농업 혁신을 이룬 신농을 이상적인 통치자로 여겼으며, 모든 사람이 자신의 노동으로 생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행은 농가 사상을 대표하며, 맹자 등 다른 학파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진나라의 분서갱유로 쇠퇴했지만, 동아시아 농업 정책과 유럽 중농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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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가
개요
개념초기 농경 중국 철학
농가
다른 이름농가 (農家)
영향 받은 것유교
도교
영향을 준 것중국 철학
특징
목표농본주의적 유토피아 사회
강조점공동 농업
사회 평등
이상적인 지도자농업에 헌신하는 이상적인 지도자
중요성자급자족
경제적 관점농업은 경제의 근본
사회적 관점계급 없는 사회 강조
정치적 관점지도자는 농업 기술에 정통해야 함
역사적 맥락
발전 시기전국시대
영향력 감소한나라 이후
부활 시도태평천국의 난
주요 인물
창시자허행
주목할 만한 인물진상

2. 역사적 배경

농가 사상은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년~기원전 221년)에 등장했다. 이 시기는 중국 역사에서 여러 국가들이 경쟁하며 다양한 사상이 등장했던 시기였다. 특히, 통치자들의 관심을 얻기 위한 학자들의 경쟁은 유가, 묵가, 법가, 도교 등 다양한 사상의 발달을 가져왔다. 농가 역시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등장한 사상 중 하나였다.

중국의 전통에서는 농업주의의 기원을 농업 혁신으로 알려진 인물인 중국의 대신 후직에게 돌린다.[4] 농가들은 또한 농업의 발명가로 중국인들이 칭송하는 신농의 역할을 강조했다. 신농은 농업에 대한 통치와 집중이 이상적인 농가 정부의 모델 역할을 한, 원시 농업주의자로 여겨졌다.[4]

허행과 그의 추종자들은 신농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왕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자신의 노동으로 생활해야 하며, 봉건지주의 착취나 상인의 이윤 추구를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기원전 221년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농가 사상은 탄압받기 시작했다. 진나라는 법가 사상을 중심으로 통치를 강화하면서 다른 사상들을 억압했고, 농가 서적들도 대부분 소실되었다.[6]

2. 1. 제자백가 시대의 등장

춘추전국시대는 여러 국가가 경쟁하며 다양한 사상이 등장한 시기였다. 이 시기 동안 서로 전쟁을 벌여 중국을 통일하려는 경쟁 국가들은 철학자, 학자, 교사들을 후원했다.[3] 통치자들의 관심을 얻기 위한 학자들의 경쟁은 유가, 묵가, 법가, 도교등 다양한 사상의 발달로 이어졌고, 가르침을 책으로 기록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은 그들의 확산을 장려했다.[3] 그 결과, 상당한 지적 및 문화적 발전이 특징인 시대가 도래했다.[3] 농업을 중시하는 농가 사상 또한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발전하였다.

농업주의를 옹호한 철학자 허행은 기원전 315년경 등나라에 추종자들과 함께 정착했다. 그의 제자는 유가 철학자 맹자를 방문했고, 허행의 철학을 논의하는 그들의 대화에 대한 짧은 보고서가 남아 있다.[5] 『맹자』의 등문공장구 상에는 농가의 사상가인 许行|허행중국어의 설이 기록되어 있다.

농가에게 전설적인 통치자 신농이 농업에 중점을 둔 통치는 이상적인 정부의 모델로 여겨졌다.

2. 2. 허행과 농가 사상

허행은 춘추시대(기원전 770~403) 등(藤)나라에서 수십 명의 문인(門人)에게 농업생산에 의한 자급자족 생활을 주장하였다. (宋)나라에서 진상(陳相)을 우두머리로 하는 수십 명이 허행에게 왔다.

허행의 무리는 농업신(農業神)이자 상고(上古)의 전설적인 제왕인 신농(神農)의 가르침을 기치로 삼아, 왕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자신의 노동으로 생활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봉건지주의 착취나 상인(商人)의 농민에 대한 이윤 추구를 배척하고 저항하였다.

허행의 무리는 농업 생산에 필요한 공구를 생산하는 수공업자 역시 노동에 종사하는 자라 하여 그 존재 의의를 인정하였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직접적인 노동으로 생활을 충족해야 하며, 노동의 결과에 의한 잉여(剩餘)는 각자 노동자의 소유에 귀속시켜야 천하가 고루 공평하게 된다고 하였다.

허행의 농가 사상은 공상적(空想的)인 사회사상에 가깝지만, 춘추시대 당시 강화되던 봉건지주들과 봉건 제후국들의 부국강병책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한 사상이다.

『맹자』 등문공장구 상에는 농가 사상가인 许行|허행중국어의 주장이 기록되어 있다. 농업의 시조로서 후직 대신 신농을 존경하며, 신농의 가르침에 따르면 현자·왕후라도 경작과 취사를 모두 자신의 손으로 해야 하고, 이 방식에 따르면 물가는 일정해지고 나라 안에 거짓을 행하는 자가 없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맹자는 분업을 부정하는 농본주의적인 이 사상을 악평등으로 간주하여 "천하를 어지럽힌다"며 배척했다. 맹자가 "허행은 스스로 옷이나 집을 짓는가"라고 허행의 제자에게 묻자, "아니요"라고 대답했고, 이에 대해 "옷이나 집을 짓는 것이 힘들어서 농사일 틈틈이 할 수 없다면, 왜 정치는 농사일 틈틈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맹자가 묻자 그 제자는 대답할 수 없었다고 한다.

2. 3. 진나라의 탄압과 소멸

기원전 221년,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농가 사상은 탄압받았다. 진나라는 법가 사상을 따르지 않는 다른 사상들을 탄압했으며, 농가 서적들도 소실되었다.[6] 이 때문에 농업주의 관련 문헌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현재 농업주의에 대해 알려진 내용 대부분은 다른 철학 학파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한 내용에서 비롯된 것이다.[4]

2. 4. 한나라 시대의 기록

한서 목록(서기 2세기)은 농가를 10개의 철학 학파 중 하나로 제시하고 있다.[5]한서』 예문지에 기록된 "농가" 서적으로는 『신농』 20편과 『범승지』 18편이 있다. 또한 "수술" 서적에는 『신농교전상토경종』 14권과 『소명자조종생어별』 8권 등 농업 기술 관련 책들이 있었다. 이들은 『여씨춘추』, 『관자』, 『회남자』, 『범승지서』 등에 인용된 것으로 보인다. 농가 서적은 당대까지 2권으로 전해졌으며, 주로 농업 기술을 다루었다. 이 전본들은 흩어져 없어졌지만, 마국한의 집본이 있으며 한대 최고의 농서로 불린다. 가사협의 『제민요술』을 비롯하여 『문선』 주석, 『이아』 주석, 『초학기』, 『경전석문』, 『태평어람』 등에 인용되어 있다.[5]

3. 주요 사상

농가 사상은 농업을 중심으로 사회, 경제, 정치 철학을 제시했다.

허행은 춘추시대 등나라에서 수십 명의 문인(門人)에게 농업 생산에 의한 자급자족 생활을 주장하였다.[1] 나라에서 진상을 우두머리로 하는 수십 인이 허행에게 찾아왔다.

허행과 그 무리들은 신농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왕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자신의 노동으로 생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봉건지주의 착취나 상인농민에 대한 이윤 추구를 배척했고, 농업 생산에 필요한 공구를 생산하는 수공업자는 노동에 종사하는 자로 인정했다. 모든 인간이 자신의 직접적인 노동으로 생활을 충족하고, 노동의 잉여는 각자 노동자에게 귀속되어야 천하가 공평해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농가 사상은 다소 공상적인 면이 있지만, 춘추시대 당시 강화되던 봉건지주들과 봉건 제후국들의 부국강병책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한 사상이다.[1] 농업주의는 인간 사회가 농업의 발달에서 기원하며, 사회는 "사람들이 농업에 대한 자연스러운 성향"에 기반을 둔다는 철학이다.[4] 농업주의자들은 "초기 성왕들이 백성을 이끄는 방법은 농업을 다른 모든 일보다 우선하는 것이었다... 후직이 농업을 시작한 이유는 그것이 대중을 가르치는 근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라며 고대 정치 시스템을 이상적으로 여겼다.[4]

''사상가 매장과 분서'', 익명의 18세기 중국 회화 앨범 잎; 프랑스 국립 도서관, 파리

3. 1. 정치 사상

허행을 비롯한 농가는 신농의 시대를 본뜬 공동체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로 여겼다.[1] 이들은 통치자가 백성과 함께 농사를 짓고, 별도의 보수를 받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7]

농가는 봉건지주의 착취나 상인농민에 대한 이윤 추구를 배척하고 저항하였다. 그러나 농업 생산에 필요한 공구를 생산하는 수공업자는 노동에 종사하는 자로 인정하여, 모든 인간이 자신의 직접적인 노동으로 생활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사상을 펼쳤다. 노동의 결과로 발생하는 잉여는 각자 노동자에게 귀속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천하가 공평해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농가 사상은 다소 공상적인 면이 있지만, 춘추시대 당시 강화되던 봉건지주들과 봉건 제후국들의 부국강병책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한 사상이다.[1]

3. 1. 1. 허행의 주장

허행은 춘추시대 등나라에서 수십 명의 문인(門人)에게 농업 생산에 의한 자급자족 생활을 주장하였다.[1] 이들은 농업의 신이자 전설적인 제왕인 신농의 가르침을 기치로 삼아, 왕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자신의 노동으로 생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허행은 통치자는 백성과 함께 밭을 갈고 스스로 요리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7] 그는 등나라에 곡창과 금고가 있다는 것은 통치자가 백성을 고통스럽게 하여 자신을 살찌운다는 의미이므로 훌륭한 통치자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7]

『맹자』 등문공장구 상에는 농가의 사상가인 许行|허행중국어의 주장이 기록되어 있다. 신농의 가르침에 따르면, 현명한 왕이라도 경작과 취사를 직접 해야 하며, 이렇게 하면 물가가 일정해지고 나라 안에 거짓을 행하는 자가 없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맹자는 분업을 부정하는 이러한 농본주의적 사상을 "천하를 어지럽힌다"며 배척했다. 맹자는 허행의 제자에게 "허행은 스스로 옷이나 집을 짓는가"라고 물었고, 제자가 "아니요"라고 대답하자, "옷이나 집을 짓는 것이 힘들어서 농사일 틈틈이 할 수 없다면, 왜 정치는 농사일 틈틈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제자는 대답할 수 없었다고 한다.

3. 2. 경제 사상

허행은 춘추시대(기원전 770~403) 등(藤)에서 수십 명의 문인(門人)에게 농업 생산을 통한 자급자족 생활을 주장했다. 허행의 무리들은 농업신(農業神)이자 상고(上古)의 전설적인 제왕인 신농(神農)의 가르침을 내세워, 왕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자신의 노동으로 생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봉건지주의 착취나 상인(商人)의 농민에 대한 이윤 추구를 배척하고 저항했다.[7]

허행의 무리는 농업 생산에 필요한 공구를 생산하는 수공업자도 노동에 종사하는 자로 인정했다. 이들은 모든 인간이 자신의 직접적인 노동으로 생활을 충족해야 하며, 노동의 결과로 생긴 잉여(剩餘)는 각자 노동자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해야만 천하가 고루 공평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농가들은 분업을 부정하고, 국가 경제 정책이 평등주의적 자급자족에 기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7] 농가들은 가격 고정을 지지했는데, 이는 품질과 수요에 관계없이 모든 유사 상품의 가격을 똑같이 고정하는 것이다. 이들은 동일한 서비스에 대해 동일한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유가들이 낮은 품질의 제품을 장려한다고 비판한 정책이었다.[7]

허행의 농가 사상은 공상적(空想的)인 사회사상에 가까운 면이 있다. 그러나, 춘추시대 당시 강화되던 봉건지주들과 봉건 제후국들의 부국강병책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한 사상이다.

4. 다른 사상과의 관계

농본주의는 묵가묵자, 유교맹자, 양주 등 다른 사상가들에게 비판받았다.[4]

4. 1. 맹자의 비판

맹자는 농본주의의 주요 옹호자인 허행이 통치자가 백성과 함께 밭에서 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비판하며, 농본주의의 평등주의가 사회의 핵심인 분업을 무시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른 초기 중국의 통치자들이 밭에서 일하지 않았음에도 신농만큼 성공적이고 존경받았다고 지적했다.[7] 맹자는 허행을 "재잘거리는 혀를 가진 남방의 야만인"으로 일축했다.[7]

『맹자』의 등문공장구 상에는 농가의 사상가인 许行|허행중국어의 설이 기록되어 있다. 농업의 시조로서 후직 대신 신농을 존경한다. 신농의 가르침에 따르면, 현자·왕후라 할지라도 경작과 취사의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해야 하며, 이 방식에 따르면 물가는 일정해지고 나라 안에 거짓을 행하는 자가 없어질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맹자는 분업을 부정하는 농본주의적인 이 사상을 악평등으로 간주하여 "천하를 어지럽힌다"며 배척했다. 또한 맹자가 "허행은 스스로 옷이나 집을 짓는가"라고 허행의 제자에게 묻자, "아니요"라고 대답했고, 이에 대해 "옷이나 집을 짓는 것이 힘들어서 농사일 틈틈이 할 수 없다면, 왜 정치는 농사일 틈틈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맹자가 묻자 그 제자는 대답할 수 없었다고 한다.

4. 2. 묵자, 양주 등의 비판

묵가묵자, 유교맹자, 양주 등도 농본주의를 비판했다.[4] 맹자는 농본주의의 주요 옹호자인 허행이 통치자가 백성과 함께 밭에서 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비판하며, 농본주의의 평등주의가 사회의 핵심인 분업을 무시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른 초기 중국의 통치자들이 밭에서 일하지 않았음에도 신농만큼 성공적이고 존경받았다고 지적했다.[7] 맹자는 허행을 "재잘거리는 혀를 가진 남방의 야만인"으로 일축했다.[7]

『맹자』의 등문공장구 상에는 농가의 사상가인 许行|허행중국어의 주장이 기록되어 있다. 허행은 농업의 시조로서 후직 대신 신농을 존경하며, 신농의 가르침에 따르면, 현자·왕후라 할지라도 경작과 취사의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해야 하며, 이 방식에 따르면 물가는 일정해지고 나라 안에 거짓을 행하는 자가 없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맹자는 분업을 부정하는 농본주의적인 이 사상을 악평등으로 간주하여 "천하를 어지럽힌다"며 배척했다. 또한 맹자가 "허행은 스스로 옷이나 집을 짓는가"라고 허행의 제자에게 묻자, "아니요"라고 대답했고, 이에 대해 "옷이나 집을 짓는 것이 힘들어서 농사일 틈틈이 할 수 없다면, 왜 정치는 농사일 틈틈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맹자가 묻자 그 제자는 대답할 수 없었다고 한다.

5. 영향

법가를 중시했던 진나라분서갱유를 통해 경쟁 철학 학파들을 탄압했으며, 농가 역시 여기에 포함되었다.[4] 그러나 농가는 농업 정책뿐만 아니라 유교, 법가 등 당대 다른 중국 철학 학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허행은 맹자와 동시대 인물이며, 범승지는 전한 성제 시기 사람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처음에는 농업을 장려했지만, 이후에는 군신, 상하 구별 없이 모두 농경에 종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노동을 통한 천하 평등을 주장했는데, 이는 묵자의 근검과 도가의 평등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농가의 사회 개혁적인 요소는 진나라, 한나라 시대를 거치며 쇠퇴했지만, '농'을 강조하는 사상은 마오쩌둥의 혁명 전략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다만, 이러한 사상이 안도 쇼에키의 "직경"으로 이어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5. 1. 중국 철학에 미친 영향

허행의 농가 사상은 공상적인 사회사상에 가까운 면이 있다. 그러나 춘추시대 당시 점차 강고해져 가던 봉건지주들과 봉건 제후국들의 부국강병책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한 사상이다. 농가와 원래 연관된 많은 개념이 이후 중국 철학에 계속 존재했다.[4]

5. 2. 동아시아 농업 정책에 미친 영향

허행의 농가 사상은 농업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유교, 법가 및 기타 동시대 중국 철학 학파에도 영향을 미쳤다.[4] 농가의 사회 개혁적인 요소는 진·한 시대 이후 쇠퇴한 것으로 보이지만, '농'을 강조하는 사상은 마오쩌둥의 혁명 전략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5. 3. 유럽 중농주의에 미친 영향

18세기 유럽에 중국 철학 텍스트가 번역되어 전파되면서, 농가 사상은 유럽의 농본주의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현대 농본주의의 전신인 프랑스 중농주의는 중국의 농업 정책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8]

예수회 선교사들의 저서를 통해, 중농주의를 주장하는 데 있어 중국에도 유사한 사상이 존재한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는 연구도 있다.[9]

6. 한국 사회에의 시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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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서적 A companion to world philosophies https://archive.org/[...] Wiley Blackwell
[2] 서적 Dislocating China University of Chicago Press
[3] 서적 The Cambridge Illustrated History of China Cambridge University Press
[4] 서적 Timing and rulership in Master Lü's Spring and Autumn annals SUNY Press
[5] 간행물 The "Nung-chia" 農 家 'School of the Tillers' and the Origins of Peasant Utopianism in China
[6] 서적 China condensed: 5000 years of history & culture Marshall Cavendish
[7] 서적 The Dynamics of Masters Literature: Early Chinese Thought from Confucius to Han Feizi Harvard University Press
[8] 간행물 Chinese Influences Upon the Physiocrats
[9] 문서 Wu-Wei in Europe. A Study ofEurasian Economic Thought http://eprints.lse.a[...] London School of Economics 2005-03
[10] 문서 代は趙の亡命政権であり、秦に滅ぼさ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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