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카리야 가이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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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누카리야 가이텐은 일본의 조동종 승려이자 불교학자로, 1867년 사이타마현 가와고에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게이오기주쿠 대학에서 불교학과 실증주의를 배우고 영어에 능통하여 저서를 영어로 출판하기도 했다. 대승불교를 옹호하며 불교 근대화를 추구했으며, 선학, 이슬람교, 양명학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했다. 1921년 고마자와 대학의 학장이 되었으며, 그의 사상은 동아시아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34년 뇌출혈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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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카리야 가이텐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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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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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누카리야 가이텐(忽滑谷快天) |
출생일 | 1867년 12월 26일 |
출생지 | 무사시국(武蔵国) |
입적일 | 1934년 7월 11일 |
입적지 | 도쿄도(東京都) |
종파 | 조동종 |
학문 분야 및 경력 | |
수행 분야 | 불교학(仏教学), 동양사상사(東洋思想史), 양명학(陽明学) |
소속 | 렌코지(連光寺) 제25대 주지(住職) 고마자와 대학(駒澤大学) 초대 학장(学長) |
학력 | 게이오기주쿠 대학(慶應義塾大学) 문학부(文学部) 졸업 |
주요 업적 | 선(禅), 신비주의(神秘主義) |
수상 | 문학박사(文学博士, 다이쇼 4년) |
2. 생애
누카리야 가이텐은 무사시 국 이루마 군 후루야 촌(현 사이타마현 가와고에 시)의 센초지(善長寺)에서 태어났다. 다마 군 히가시무라야마 구메가와(현 도쿄도 히가시무라야마 시)에서 엔도 다로자에몬(遠藤太郎左衛門)의 넷째 아들이었다.
10세 때 코쿠와리야 료도의 제자로 출가하여 가이텐(快天)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887년 조동종 대학림(지금의 고마자와 대학)을 졸업하고 공립학교를 거쳐 1888년 도쿄 제일고등중학교(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891년 24세에 게이오기주쿠 대학 문학부에 진학해 불교학과 실증주의 학문을 배웠다. 영어에 능통하여 첫 저서 《Principles of practice and Enlightenment of the Soto Sect》는 영어로 출판되었다. 1893년 게이오기주쿠 대학 문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폴 케라스(Paul Carus)의 《Buddhism and its Christian Critics》를 번역 출판하고, 도미나가 나카모토(富永仲基)의 《출정후어》(出定後語)를 출판하여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에 대해 논했다. 당시 일본 불교계는 대승불교를 비판하고 대승경전을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지만, 가이텐은 대승의 가치를 인정하고 비판 정신에 기반한 불교 근대화를 추구했다.
1900년 이나가키 만지로(稲垣満次郎) 공사의 주선으로 불사리가 샴 왕실에서 일본 불교도에게 증여되자 난조 분유(南条文雄)와 함께 샴으로 건너갔다. 1901년 조동종고등중학림(曹洞宗高等中学林) 교장에 취임하여 학생들의 교복을 승려의 가사가 아닌 일반 기모노로 바꾸는 개혁을 단행했다.
1905년 중국에 존재했던 《대범천왕문불결의경》을 위경이라고 정의한 논문을 발표했다.[7] 이 경전은 선종의 경증적 근거가 되는 중요한 경전이었기에, 그의 주장은 선종의 뿌리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이 시기 이슬람교 연구와 양명학 연구에도 몰두하여 무함마드에 대한 연구도 시작했다.
1911년 조동종으로부터 유럽 종교 학술 시찰 명을 받고 3년간 유학했다. 유학 도중 하와이에서 종교시찰원으로 열흘을 머물렀고, 하와이 중학교, 폴시티 혼간지 초등학교 등에서 강연했으며,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불교 강연회를 열었다.
1914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이듬해 일본 정부로부터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9년 조동종립대학(曹洞宗立大学) 교두(교수)를 거쳐 1921년 학장에 취임하였다. 1925년 조동종립대학을 고마자와 대학으로 개칭하고 초대 학장이 되었다.
누카리야 가이텐은 국내외에서 다양한 학문적 업적을 쌓았으며, 그의 제자들은 동아시아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철학, 문학, 물리학, 생물학, 천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활용하여 불교를 연구했고, 우주론과 신비주의적인 영역까지 사상을 확장했다.
같은 조동종 승려였던 하라다 소가쿠(原田祖岳)와 '정신논쟁(正信論争)'이라 불리는 올바른 믿음에 대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9] 1934년 도쿄에서 강연 도중 뇌출혈로 쓰러져 사망했다.
2. 1. 출생과 초기 불교 교육
누카리야 가이텐은 무사시 국 이루마 군 후루야 촌(지금의 사이타마현 가와고에 시)에 있는 절 센초지(善長寺)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다마 군(지금의 도쿄도 히가시무라야마 시)의 엔도 다로자에몬(遠藤太郎左衛門)이며, 가이텐은 그의 넷째 아들이었다.10세에 코쿠와리야 료도의 제자가 되어 불교에 입문하였고, 가이텐(快天)이라는 이름을 받았다.[2] 1887년에는 조동종 대학림(曹洞宗大学林, 현재의 고마자와 대학)을 졸업하고 쿄리츠 학교를 거쳐, 1888년 도쿄 제일고등중학교(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다.[2] 1891년에는 게이오기주쿠 대학 문학부에 들어가 불교학과 실증주의 학문을 공부했다. 그는 영어에 능통하여 첫 저서인 《Principles of practice and Enlightenment of the Soto Sect》를 영어로 출판하기도 했다. 1893년 12월, 게이오기주쿠 대학 문학부를 졸업했다.
2. 2. 게이오기주쿠 대학 수학과 서구 학문 수용
1891년(메이지 24년) 게이오기주쿠 대학 문학부에 24세로 입학하여 불교학과 실증주의를 공부했다. 영어에 능통하여 영어로 된 불교 서적을 저술하고 번역했다. 첫 저작은 『Principles of practice and Enlightenment of the Soto Sect』이다.[2]2. 3. 대승불교 옹호와 불교 근대화 노력
누카리야 가이텐은 당시 일본 불교계에 만연했던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에 맞서 대승불교의 가치를 옹호하고 불교 근대화를 추구했다. 그는 폴 케라스(Paul Carus)의 《Buddhism and its Christian Critics》를 번역 출판하고, 도미나가 나카모토(富永仲基)의 《출정후어》(出定後語)를 출판하여 대승비불설을 비판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대승불교 경전을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 대승불교가 붕괴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가이텐은 대승의 가치를 인정하고 비판 정신에 기반한 불교 근대화를 추구했다.[7]2. 4. 해외 유학과 국제 교류
1900년(메이지 33년), 난조 분유와 함께 샴(태국)으로 건너갔다.[7] 1911년(메이지 44년)에는 조동종의 명을 받아 유럽으로 유학하여 종교학을 연구했다.[7] 유럽 유학 도중 하와이에서 열흘 간 머무르며 하와이 중학교, 폴시티 혼간지 초등학교 등에서 강연을 했고,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불교 강연회를 개최했다.[7]2. 5. 고마자와 대학 학장 취임과 교육 개혁
1919년(다이쇼 8년) 조동종립대학(曹洞宗立大学)의 교두(교수)를 거쳐 1921년(다이쇼 10년) 학장에 취임하였다.[7] 1925년(다이쇼 14년) 조동종립대학을 고마자와 대학으로 개칭하고 초대 학장이 되었다.[7] 이때 학생들의 교복을 승려의 가사가 아닌 일반 기모노로 바꾸는 등 교육 개혁을 단행하였다.[7]2. 6. 학문적 업적과 사상적 영향
누카리야 가이텐은 선불교, 이슬람교, 양명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그는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을 전개한 도미나가 나카모토의 《출정후어》를 출판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대승불교를 비판하고 대승경전을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지만, 가이텐은 대승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비판 정신에 의한 불교의 근대화를 추구했다.[7]1905년 중국에 존재했던 《대범천왕문불결의경》을 위경이라고 정의한 논문을 발표했다.[7] 이 경전은 선종의 경증적 근거가 되는 중요한 경전이었기에, 그의 주장은 선종의 뿌리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 이슬람 연구나 양명학 연구에도 몰두해 무함마드에 대한 연구도 시작했다.[7]
그의 사상은 철학, 문학 등의 인문학뿐만 아니라, 물리학, 생물학, 천문학 등 당시의 최신 자연과학 지식을 동원해 불교를 논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오카다 데키스이의 《선과 최면술》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 누카리야의 철학적 원리는 궁극적인 존재를 우주 그 자체로 보는 '우주론'에까지 도달하여 신비주의적인 영역에 이르렀다. 또한 인도, 중국을 대상으로 그 사상사적 전개를 정리한 대저 《선학사상사》를 완성시켰다.[8]
그의 제자는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 대만, 한국 등 동아시아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후스와 스즈키 다이세쓰, 조동종의 오카다 가호, 마스나가 레이호, 야나기다 세이잔[8]에게 계승되어 ‘누카리야 불교학’으로 불리는 학파를 형성했다.
2. 7. 하라다 소가쿠와의 논쟁
누카리야 가이텐은 같은 조동종 승려이자 승당 사가(師家)였던 하라다 소가쿠(原田祖岳)와 잡지 《공정》(公正) 지면상(쇼와 3년 9월호)에서 이른바 '정신논쟁(正信論争)'이라 불리는 올바른 믿음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9] 누카리야는 학문 연구가 조동종의 종지를 밝히는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였지만, 하라다 소가쿠는 실참실수(實參實修) 즉 실답게 참구(參究)하고 실답게 수행하지 않는 학문 연구는 해악이라고 비난하였다. 논쟁은 누카리야가 사망한 이후까지 계속되었다.2. 8. 만년과 죽음
1934년(쇼와 9년) 도쿄에서 강연하던 중 뇌출혈로 쓰러져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9]3. 주요 연구 분야
누카리야 가이텐은 선학(禪學), 이슬람교, 양명학, 우주론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했다. 1905년 대범천왕문불결의경을 위경으로 규정하고,[3] 《선학사상사》를 저술하는 등 선학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같은 해 이슬람교와 양명학 연구를 시작했으며, 마호메트 연구도 진행했다. 또한, 물리학, 생물학, 천문학 등 자연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불교를 연구하고 우주론을 탐구하며 신비주의적인 영역까지 연구를 확장했다.[4]
3. 1. 선학(禪學) 연구
누카리야 가이텐은 禪學중국어 연구에 매진하여 《대범천왕문불결의경》을 위경으로 규정하는 책을 발표하였다.[3] 이는 교외별전, 염화미소 등 선종의 경전적 근거를 부정하는 논쟁적인 주장이었다. 또한 인도와 중국의 선 사상사를 정리한 대저 《선학사상사》를 완성하였다.3. 2. 이슬람교 연구
1905년(메이지 38년)에 중국에 존재했던 『'''대범천왕문불결의경'''』을 위경으로 논한 책[3]을 발표했다. 또한, 이 시기에 이슬람교 연구와 양명학 연구에도 몰두하여,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메트 연구도 시작한다.3. 3. 양명학 연구
1905년(메이지 38년)에 중국에 존재했던 『'''대범천왕문불결의경'''』을 위경으로 논한 책[3]을 발표했다. 이 시기에 양명학 연구에도 몰두했다. 1934년에는 인도, 중국의 사상사적 전개를 정리한 대저 『선학사상사』를 완성했다.3. 4. 우주론 연구
물리학, 생물학, 천문학 등, 당시 최신의 자연과학 지식을 동원하여 불교를 논했으며, 오카다 테키스이의 『선과 최면술』의 서문을 담당했다. 홀활곡의 철학적 원리는 궁극적인 존재를 우주 그 자체로 보았으며, "우주론"에까지 이르러 신비주의적인 영역에 도달했다.[4]4. 누카리야 가이텐과 한국
누카리야 가이텐의 제자들은 한국 불교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제강점기에 그의 학문적 방법론은 조선 불교의 현대화 과정에 영향을 주었다.[1]
5. 주요 저서
- 《조동교회수증의》(曹洞教会修証義)
- 《영문불유교경》(英文仏遺教経)
- 《설리의 매화》(雪裏の梅)
- 《대범천왕문불결의경에 대하여》(大梵天王問仏決疑経に就いて) (1905년)
- 《괴걸 무함마드》(怪傑マホメット)
- 《백호광》(白毫光)
- 《선학강화》(禅学講話)
- 《선지묘미》(禅之妙味)
- 《선학신론》(禅学新論)
- 《참선도화》(参禅道話)
- 《달마와 양명》(達磨と陽明)
- 《청신선화》(清新禅話)
- 《라쿠텐 생활의 묘미》(楽天生活の妙味)
- 《우주미관》(宇宙美観)
- 《부세장자강화》(浮世荘子講話)
- 《선가귀감강화》(禅家亀鑑講話)
- 《양기연심내실험》(養気錬心乃実験)
- 《화한명사참선집》(和漢名士参禅集)
- 《선의 이상과 신인생의 서광》(禅の理想と新人生の曙光)
- 《신앙과 민력》(信仰と民力)
- 《무진장》(無尽蔵)
- 《선학사상사》(禅学思想史) [제1권]상권
- 《선학사상사》(禅学思想史) [제2권]하권
- 《보권좌선의강화》(普勧坐禅儀講話)
- 《정신문답》(正信問答)
- 《연심술》(錬心術)
- 《무사의 종교》(武士の宗教) (1913년)
참조
[1]
웹사이트
「駒澤大学建学の理念成立背景と展望」
http://www.kokugakui[...]
[2]
서적
第一高等中学校一覧 自明治22年至明治23年
第一高等中学校
1890-04-25
[3]
서적
「大梵天王問仏決疑経に就いて」『禅学批判論』203頁以下
https://books.google[...]
[4]
서적
純禅の時代
1984
[5]
서적
施餓鬼
青山社
2013
[6]
웹인용
「駒澤大学建学の理念成立背景と展望」
http://www.kokugakui[...]
2023-02-14
[7]
서적
「大梵天王問仏決疑経に就いて」『禅学批判論』203頁以下
https://books.google[...]
[8]
서적
純禅の時代
1984
[9]
서적
施餓鬼
青山社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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