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대금취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대금취는 고려 시대 무신으로, 몽골의 고려 침략 시기에 활약했다. 그는 대중상의 후손으로 추정되며, 1253년 교위로서 우봉별초를 이끌고 몽골군과 전투를 벌여 공을 세웠다. 1259년에는 개경을 침공한 몽골군을 격퇴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공로로 영순현이 승격되었으며, 후손으로는 태자기, 태윤취, 태문영 등이 있다. 영순 태씨는 상주 주씨와 혼인 관계를 맺으며 경상도 지역에서 위상을 높였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영순 태씨 - 태완선
    태완선은 경상남도 하동군 출신의 관료, 정치인, 기업인으로, 국회의원, 부흥부 장관, 상공부 장관, 경제기획원 장관, 건설부 장관 등을 역임하며 경제 개발에 참여했고, 대한석탄공사 사장, 한국종합제철 사장, 대한중석 회장,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 영순 태씨 - 태현실
    1961년 KBS 1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태현실은 드라마 《여로》를 통해 큰 인기를 얻고 영화 《아내》로 대종상 영화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는 등 영화와 드라마에서 활약한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 고려의 상장군 - 태조 (조선)
    고려 말 무신으로서 위화도 회군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뛰어난 리더십으로 국가의 기틀을 다졌으나, 왕위 계승 갈등으로 인해 상왕으로 물러났다.
  • 고려의 상장군 - 지채문
    지채문은 고려 전기의 무신으로, 거란의 2차 침입 때 서경 방어에 참여했다가 현종의 몽진을 호종하며 왕을 보호한 공으로 공신에 녹훈되고 상장군 우복야에 올랐으며 사후 1등공신에 추록되었다.
  • 13세기 한국 사람 - 충선왕
    충선왕은 고려 제26대 왕으로 즉위 후 원나라 간섭 속에서 심양왕에 봉해졌으며, 고려와 심양을 동시에 통치하는 동군연합을 이루었으나 개혁 정치는 실패하고 티베트로 유배되었다.
  • 13세기 한국 사람 - 원종 (고려)
    원종은 고려 고종의 장남으로 몽골과의 강화 조약을 위해 원나라에 갔다가 즉위하여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으며, 임연의 쿠데타와 삼별초의 항쟁을 겪고 개경으로 환도한 후 1274년에 사망했다.
대금취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한글대금취
한자大金就
로마자 표기Dae Geumchwi
다른 이름 (한글)태금취
다른 이름 (한자)太金就
다른 이름 (로마자 표기)Tae Geumchwi
기본 정보
작위고려의 상장군
군주고려 고종
국적고려
성별남성
금취(金就)
군호영순군(永順君)
별호태금룡
경력
복무고려군
소속우봉별초
참전고려-몽골 전쟁

2. 가계

대금취는 발해의 국성이었던 대씨(大氏)의 후손으로, 고려 고종 40년(1253년) 교위(校尉)로서 우봉 별초(別抄) 30여 명(《영순태씨보》에는 1천여 명)을 이끌고 몽골군과 금교역(金郊驛)과 흥의역(興義驛) 사이에서 전투를 치러 몽골군 여러 명을 죽이고 말, 활, 화살, 털가죽옷 등을 노획하는 공을 세웠다.[9]

고종 46년(1259년)에는 몽골군이 개경에 쳐들어와 옛 대궐의 강안전(康安殿)을 약탈하고 강안전을 지키던 군사를 잡아가자, 별장(別將)으로써 수비를 맡고 있다가 몽골군을 추격하여 포로를 탈환하여 돌아왔다.[10]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영순태씨족보》는 이 군공으로 대금취가 대장군(大將軍)이 되었고 영순군(永順君)으로 봉해졌다고 전하고 있다. 대중상(태중상)의 18대손이며,[6] 무신정권 말기 몽골의 고려 침략 때 교위의 관직으로 우봉별초를 이끌고 1253년1259년에 몽골 군사 전술 및 조직|몽골 제국군영어을 격퇴했다.[7] 대금취는 문신보다 낮은 무신의 지위에 있었으며, 무신 중에서도 비교적 낮은 지위에 있었다.[7]

대금취가 이끈 우봉별초는 우봉현에서 조직된 편제군으로, 우봉현 소재의 대씨 일원으로서 대금취가 지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7]

2. 1. 영순태씨족보 및 발해고

그의 가계는 대중상의 후손으로 가계는 다소 불확실하다. 《영순태씨족보》 '발해왕세계보'에는 태금취(대금취)의 계보에 대해 대인선 - 대광현 - 대도수 - 대인정 - 대금취로 이어지는 일원적인 세계를 정리하였고, 조선의 실학자 류득공이 《발해고》를 저술하면서는 《영순태씨족보》를 따라 대도수를 대광현의 아들로, 대금취를 대도수의 후손으로 정리하였다. 한편 《협계태씨족보》 '열조계통도'에는 대금취가 대집성과 동일한 항렬로 나타나는 병마원수 영천군 대웅성의 아들로 전하고 있다.

2. 2. 협계태씨족보

《협계태씨족보》의 '열조계통도'에서는 대금취를 대집성과 같은 항렬인 병마원수(兵馬元帥) 영천군(永川君) 대웅성(大雄成)의 아들로 전하고 있다.

3. 생애

대금취는 대중상의 18대손이다.[6] 그는 문신보다 낮은 무신 지위에 있었으며, 무신 중에서도 비교적 낮은 지위에 있었다.[7]

3. 1. 몽골군과의 전투

1253년 무신정권 말기 몽골군이 침입했을 때, 대금취는 교위(校尉)라는 벼슬로 우봉(牛峯) 별초 30여 명(《영순태씨보》에는 1천여 명)을 이끌고 금교역(金郊驛)과 흥의역(興義驛) 사이에서 몽골군과 싸워 여러 명을 죽이고 말, 활, 화살, 털가죽옷 등을 노획하는 공을 세웠다.[9] 1259년에도 몽골군이 개경에 쳐들어와 옛 대궐의 강안전(康安殿)을 약탈하고 강안전을 지키던 군사를 잡아가자, 별장(別將)으로써 수비를 맡고 있다가 몽골군을 추격하여 포로를 탈환하여 돌아왔다.[10] 대금취가 이끈 우봉별초는 우봉현에서 조직된 편제군으로, 우봉현 대씨(大氏) 일원으로서 대금취가 지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7]

3. 2. 이후의 행적

1253년 9월 1일(음력 8월 7일), 교위(校尉)였던 대금취는 우봉(牛峰) 삼별초 특수부대 병사 30명을 이끌고 금교(金郊)와 흥의(興義) 사이에서 몽골군을 격파했다.[2][3][4] 1260년까지 별장(別將)의 지위에 올랐다. 1260년 1월 25일(음력 1259년 12월 12일), 대금취는 개성 근처에서 몽골군을 격파하고 몽골군에게 포로로 잡힌 사람들을 구출했다.[5]

그의 공로로 대금취는 영순(永順)을 봉읍으로 받았다. 영순은 원래 임하(臨河)라는 마을이었으나, 대금취의 공로를 기려 현(縣)으로 승격되고 영순으로 개명되었다.[1]

4. 영순현과 영순 태씨

영순 태씨는 고려 경상도 상주목 관할 영순현(경상북도 문경시 영순면)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대금취는 대중상(태중상)의 18대손이다.[6]

1253년 무신정권 말기 몽골의 고려 침략 때 대금취는 교위 관직으로 우봉별초 30여 명을 이끌고 금교·흥의 양 역 사이에서 군과 교전했다. 1259년에는 개성을 침공한 군을 격퇴했다.[7]

4. 1. 영순현 승격

영순 태씨는 경상도 상주목 관할이었던 영순현(경상북도 문경시 영순면)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영순태씨족보》에 따르면, 원래 상주 북면의 임하촌이라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이 마을 출신인 태금취가 전공을 세워 대장군 자리에 오르고 영순군에 봉해지면서[11] 그의 고향인 임하촌 역시 영순현으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상주목 북면의 임하촌 사람으로 '태씨 성을 가진 사람'이 적을 잡은 공로가 있어 영순현으로 승격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12]세종실록》 지리지[13],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운부군옥》도 이와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영순현의 속성으로 태씨가 기록되어 있는데, 고려 시대 임하촌이 영순현으로 승격되면서 태씨가 속성이 되었다고 본다.[14]

1260년 1월 25일 (1259년 음력 12월 12일), 태금취는 개성 근처에서 몽골군을 격파하고 포로로 잡힌 사람들을 구출했다.[5] 그의 공로로 태금취는 영순을 봉읍으로 받았다. 영순은 원래 임하라는 마을이었으나, 태금취의 공로를 기려 현으로 승격되고 영순으로 개명되었다.[1]

《고려사》나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모두 '태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고만 언급하고 대금취의 이름을 명기하지는 않았다. 일본의 기타무라 히데토나 한국의 박홍갑은 대금취가 영순군에 봉해진 인물인지, 《고려사》 고종세가의 대금취와 지리지의 태씨 성을 가진 사람이 동일인물인지 확증할 만한 증거가 없음을 들어 《영순태씨족보》의 관련 기록을 부정하기도 한다.[15]

4. 2. 영순군 봉작에 대한 이견

영순 태씨는 고려 시대 경상도 상주목 관할이었던 영순현(경상북도 문경시 영순면)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영순태씨족보》는 태금취가 전공을 세워 대장군 자리에 오르며 영순군에 봉해졌고[11] 그의 고향인 임하촌 역시 영순현으로 격상되었다는 전승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사》 지리지나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모두 '태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고만 언급하고 대금취의 이름을 명기하지 않았다. 일본의 기타무라 히데토(北村秀人)나 한국의 박홍갑은 대금취가 영순군에 봉해진 인물인지, 《고려사》 고종세가의 대금취와 지리지의 태씨 성을 가진 사람이 동일인물인지 확증할 만한 증거가 없음을 들어 《영순태씨족보》의 관련 기록을 부정하기도 한다.[15]

5. 후손

《영순태씨족보》에 따르면, 대금취의 후손 계보는 효미(2세), 광보(3세), 자기(4세), 윤취(5세)로 이어진다. 대금취의 고손 태자기는 충렬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충혜왕, 충목왕 대에 집현전대제학을 역임했다. 증손 태윤취는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중현대부 전객령을 역임했다.

대금취의 후손들은 상주 주씨 가문과 겹사돈 관계를 맺으며, 경상도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했을 것으로 보인다.

5. 1. 태자기

대금취의 고손 태자기는 충렬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충혜-충목 대에 집현전대제학을 지냈고, 정랑 박인수(朴仁守)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태윤취(1313~1376)를 두었다. 태윤취는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중현대부 전객령을 역임하고 연안 이씨 가문의 강원도관찰사 이귀인(李貴仁)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넷(문우, 문영(文瑩), 문선(文璿), 문기(文璣))과 딸 하나를 두었다. 이 중 차남 태문영(1333~1388)은 보문각직제학을 지냈고, 강릉 유씨 가문의 상서복야 유승비(劉承備)의 딸과 혼인하였다. 태윤취의 딸은 영주판관 황중용(黃仲龍)과 혼인하였다.

5. 2. 태윤취

태윤취(太允就, 1313년 ~ 1376년)는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중현대부 전객령을 역임하였다. 연안 이씨 가문의 강원도관찰사 이귀인(李貴仁)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넷(문우, 문영(文瑩), 문선(文璿), 문기(文璣))과 딸 하나를 두었다. 태윤취의 차남 태문영(1333년 ~ 1388년)은 보문각직제학을, 장녀는 영주판관 황중용(黃仲龍)과 혼인하였다. 태문영은 강릉 유씨 가문의 상서복야 유승비의 딸과 혼인하였다.

태윤취의 장남 태문우의 아들 용부(用富)와 차남 태문영의 아들 영길(永吉, 1356년 ~ 1416년)은 모두 상주 주씨 가문의 정랑(正郞) 주원계(周元桂)의 딸과 혼인하였다. 태영길의 고손 태두남(太斗南)은 1513년(중종 8년) 문과에 급제하여 진원현감을 역임하였으며, 예천읍 우계리 우리촌(愚里村)에 정착하여 예천 입향조가 되었다. 박순우는 영순현과 지역적으로 가까운 상주 주씨 가문과의 겹사돈 관계를 통해 영순 태씨 가문이 경상도 지역에서 위상을 구축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영순 태씨가 《영순태씨족보》 편찬 이전부터 지역의 '향리'였다는 점을 그 근거로 제시하였다.[16][17]

5. 3. 태문영

태문영(太文瑩, 1333년 ~ 1388년)은 태윤취의 차남으로, 보문각 직제학을 역임하고 강릉 유씨 집안의 상서복야 유승비의 딸과 혼인하였다. 태문영의 아들 태영길(太永吉, 1356년 ~ 1416년)은 상주 주씨 집안의 정랑 주원계(周元桂)의 딸과 혼인하였다.

5. 4. 태두남

태두남(太斗南)은 1513년 문과에 급제하고 진원현감을 역임하였으며, 예천읍 우계리 우리촌(愚里村)에 들어와 정착하여 입향조가 되었다. 그는 태영길(太永吉, 1356~1416)의 고손으로, 태영길은 상주 주씨 집안의 정랑(正郞) 주원계(周元桂)의 딸과 혼인하였다.

5. 5. 상주 주씨와의 관계

《영순태씨족보》에 따르면 대금취의 고손자 태자기(太自奇)는 충렬왕 때 급제하여 충혜왕-충목왕 대에 집현전대제학을 역임하고 정랑 박인수(朴仁守)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태윤취(太允就, 1313~1376)를 두었다. 태윤취는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중현대부 전객령을 역임하고 연안 이씨 집안의 강원도관찰사 이귀인(李貴仁)의 딸과 혼인하여 4남 1녀를 두었다. 이 중 차남 태문영(太文瑩, 1333~1388)은 보문각직제학을 역임하고 강릉 유씨 집안의 상서복야 유승비(劉承備)의 딸과 혼인하였다. 태윤취의 딸은 영주판관 황중용(黃仲龍)과 혼인하였다.

태윤취의 장남 태문우의 아들 태용부(太用富)나 차남 태문영의 아들 태영길(太永吉, 1356~1416)은 모두 상주 주씨 집안의 정랑(正郞) 주원계(周元桂)의 딸과 혼인하였다. 태영길의 고손자 태두남(太斗南)은 1513년 문과에 급제하고 진원현감을 역임하였으며 예천읍 우계리 우리촌(愚里村)에 정착하여 입향조가 되었다. 박순우는 영순현과 지역적으로 가까운 상주 주씨 집안과의 겹사돈 관계를 두고 영순 태씨 집안이 경상도 지역에서 하나의 위상을 구축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으며, 영순 태씨가 이미 《영순태씨족보》 편찬 단계 이전에 지역의 '향리'가 된[16] 것으로 표현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고 해석하였다.[17]

참조

[1] 웹사이트 영순 태씨 http://gyeongsan.gra[...] 2024-03-05
[2] 서적 Korea: the Mongol invasions https://archive.org/[...] Leiden : E.J. Brill 1963
[3] 간행물 The Settlement of Balhae Dae-ssi Refugees in the Korean Peninsula https://www.dbpia.co[...] 2024-03-05
[4] 웹사이트 대금취 휘하의 우봉별초가 적군을 격파하다 https://db.history.g[...] 2024-03-05
[5] 문서 Goryeosa
[6] 웹사이트 발해 대조영(大祚榮)의 후손(後孫) 태씨(太氏) 연원과 현황 https://www.yeongnam[...] 2022-09-08
[7] 서적 高麗時代の渤海系民管見 大修館書店 1998-09
[8] 서적 영순태씨족보
[9] 서적 고려사 1253-08
[10] 서적 고려사 1259-12-12
[11] 문서
[12] 서적 고려사
[13] 서적 세종실록
[14] 서적 고려시대향촌사회사연구 일조각 1996
[15] 문서
[16] 서적 세종실록
[17] 논문 10~14세기 발해인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202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