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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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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 선거는 1981년 2월 11일 선거인단 선거를 통해 치러졌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간접 선거를 통해 전두환의 장기 집권을 시도했다. 선거는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 선거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선거인 선거는 20세 이상 국민에게 투표권이 주어졌고, 30세 이상 국민에게 피선거권이 주어졌다. 선거 결과, 전두환은 민주정의당 후보로 출마하여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후 제5공화국이 출범하여 6월 민주 항쟁까지 권위주의 통치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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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 선거
선거 정보
선거 이름제12대 대통령 선거
국가대한민국
국기 연도1949
선거 유형대통령 선거
이전 선거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 선거
이전 선거 연도1980년
선거일1981년 2월 25일
차기 선거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
차기 선거 연도1987년
선거인단재적 선거인단 수 5,277명
당선을 위해 필요한 표 수2,639표
대통령 후보
전두환
전두환 후보
후보전두환
정당민주정의당
득표수4,755
득표율90.23%
민주한국당
민주한국당
후보유치송
정당민주한국당
득표수404
득표율7.67%
선거 결과
대통령 당선인전두환
당선 정당민주정의당
선거 전 대통령전두환
선거 전 정당민주정의당
선거 후 대통령전두환
선거 후 정당민주정의당
선거인단 투표 지도
선거인단 투표 지도
선거인단 선거 정보
선거 이름제12대 대통령선거인단 선거
선거일1981년 2월 11일
선출 의석5,278석
과반 의석2,640석
투표율78.1%
선거인단 선거 결과
총재전두환
의석수3,667석
득표수9,250,262
득표율60.71%
총재유치송
의석수411석
득표수1,778,007
득표율11.67%
지도자김종철
의석수49석
득표율1.15%
지도자김의택
의석수19석
득표율0.82%
지도자
의석수1,132석
득표율25.66%

2. 배경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권력을 장악했다. 이들은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주요 야당 정치인들을 감옥에 가두는 등 정치적 반대파를 숙청하면서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강화했다.[1] 신군부는 유신헌법을 폐지하고 제5공화국 헌법을 제정했다. 새 헌법은 대통령 7년 단임제와 간접 선거제를 채택했지만, 이는 전두환의 장기 집권을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는 대통령 직접 선거제에 대한 여론이 높았으나, 전두환은 직접 선거는 국력 낭비가 심하며, 인기영합주의적인 공약 남발, 여야 대립 및 지역주의 격화 등을 초래한다며 간접 선거제를 유지했다.[2] 그러나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아닌 대통령 선거인단을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고, 야당 후보의 출마를 허용하여 외형상 민주적인 제도를 갖추려 했다.[2]

3. 선거 제도

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 선거는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 선거 방식으로 치러졌다.

20세 이상의 국민은 모두 선거인 선거에 투표권이 있었다. 선거인 선거에 출마하려면 30세 이상이어야 했으며, 출마하려는 선거구에 선거인 선거일로부터 6개월 이상 거주해야 했다. 다만 최초의 선거인 선거는 예외로 하여, 대통령선거법이 공포된 1981년 1월 24일 당시 해당 선거구에 거주하고 있었다면 거주 기간이 6개월 미만이어도 출마할 수 있게 하였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면 40세 이상의 국민이어야 했으며, 국내에 대통령 선거일로부터 5년 이상 거주해야 했다.[6]

선거인 선거에는 정당 공천제가 도입되지 않았으므로, 선거인 후보로 등록하려면 당적 여부에 상관 없이 선거권자 100~150명(인구 5천 명 미만의 선거구는 50~70명)의 추천을 받아야 했다. 반면 대통령 선거에는 정당 공천제가 시행되어, 정당의 공천을 받은 후보는 대통령 선거일 공고일로부터 7일 안에 공천장과 승낙서를 제출함으로써 입후보할 수 있었다. 무소속 대통령 후보는 대통령 선거인 선거일로부터 7일 안에 대통령 선거인 300~500명의 추천장을 제출하면 되었다.

선거구는 구·시·읍·면 단위로 정해졌으며, 극히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 한 선거구 당 인구 수가 1,000명에 미달하거나 50,000명을 초과할 수 없게 하였다. 이에 따라 전체 선거구 수는 1,905개였다. 1개 선거구당 선출 선거인 정수는 인구 수가 1,000~20,000명인 경우 2명, 20,001~30,000명인 경우 3명, 30,001~40,000명인 경우 4명, 40,000명을 넘는 경우 5명으로 하여 전체 선거인 정수는 5,278명이 되었다.

대통령 선거법은 1980년 12월 26일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가결되어, 12월 31일에 공포·시행되었다.

;대통령 선거인 선거


  • 피선거권: 30세 이상
  • 선거구 수: 1,905개
  • 선거구 정수: 2~5명
  • 총 정수: 5,278명
  • 후보 등록 요건: 선거권자 100명 이상 150명 이하(인구 5,000명 미만의 선거구에서는 50명 이상 70명 미만)의 추천
  • 후보 등록 기간: 1981년 1월 24일 ~ 1월 29일
  • 입후보자 수: 9,283명 (이 중 288명이 무투표 당선)


정당별 후보자 수
정당후보자 수비율(%)
민주정의당4,92853.1
민주한국당1,16512.5
한국국민당1371.5
민권당1011.1
민주사회당1align="right" |
무소속2,95131.8
합계9,283100


3. 1. 선거 제도에 대한 비판

대통령 선거에서는 정당 공천을 받은 후보는 후보 등록이 가능했지만, 대통령 선거인 선거에서는 정당 공천을 받아도 무소속 후보와 마찬가지로 주민 추천서를 받아야 했다. 입법회의는 군소 후보 난립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지만, 일각에서는 반여 성향 후보들의 출마를 막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1]

4. 대통령 후보

민주사회당, 사회당, 신정당 등은 당선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대통령 후보를 내지 않았으며, 민주정의당,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민권당 등 총 4개 정당에서 대통령 후보를 내었다. 무소속 후보는 출마하지 않았다.[7] 야당들은 선거인 후보도 일부 밖에 내지 못해, 대통령 당선 가능성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8]


  • 민정당은 1981년 1월 15일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창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 대회를 개최하고 전두환 대통령을 초대 당 총재 및 제12대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다. 전국에서 온 3,162명의 대의원들은 투표 없이 현직 대통령 전두환을 지명했다.[1]
  • 민한당은 1981년 1월 1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창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 대회를 개최하고 유치송신민당 최고위원을 초대 당 총재 및 제12대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다. 경기도 출신으로 전 3선 국회의원유치송이 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 국민당은 1981년 1월 23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창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 대회를 개최하고 김종철민주공화당 의원을 초대 당 총재 및 제12대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다. 충청남도 출신으로 전 5선 국회의원인 김종철이 지명되었다.
  • 민권당민주한국당의 온건 야당 노선에 비판적인 야권 인사들이 선명 야당을 기치로 1월 23일 천도교 대강당에서 창당하였으며, 김의택신민당 수석부총재를 총재 및 제12대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다. 전라남도 출신으로 전 4선 국회의원김의택이 당의 후보로 선출되었다.
  • 사회당, 민주사회당, 신정당을 포함한 다른 정당들은 대통령 후보 또는 선거인단을 찾을 수 없어 선거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2][3]

5. 선거인 후보

1980년 12월 31일에 공포·시행된 대통령 선거법에 따라, 30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은 선거권자 100명 이상 150명 이하(인구 5,000명 미만의 선거구에서는 50명 이상 70명 미만)의 추천을 받아 대통령 선거인 후보로 등록할 수 있었다.[9] 후보 등록 기간은 1981년 1월 24일부터 1월 29일까지였으며, 총 9,283명의 후보가 등록되었고 이 중 288명은 무투표 당선되었다.

5. 1. 정당별 선거인 후보 현황

각 정당은 정식 창당 전 지구당 창당 과정에서 지역의 유력 인사를 지구당 대의원으로 영입하는 등 선거인 후보감 확보에 열을 올렸다.[9] 1981년 1월 24일부터 29일까지 엿새 간 진행된 선거인 후보 등록 결과 총 9,479명이 후보 등록을 신청하였는데, 이 중 196명은 이후 사망, 사퇴하거나 등록 무효 처리되었고, 결국 선거인 선거 당일 후보 수는 9,283명이 되었다. 113개 선거구에서는 후보 수와 선출 의석 정수가 같아 288명의 무투표 당선자가 나오게 되었다. 후보들은 전 국민회의 대의원, 관변 단체 간부 등 다양한 출신 성분으로 구성되었다.

후보 등록 마감 직후 민한당은 자체 집계를 통해 민한당 소속 입후보자는 1,313명, 친민한당 무소속 입후보자가 656명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 필요한 2,640명에 크게 미달하는 수치였다.[10] 반면 민정당 소속 후보는 3,800여 명, 친민정당 무소속 후보 2,000여 명 등 무려 5,800여 명이 입후보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민정당 지도부에서 독식 이미지를 면해야 한다며 소속 후보들에게 압력을 가해 후보직을 사퇴시키기까지 했다.[11][12] 신상우 민한당 사무총장은 민정당 측에서 민한당 후보로 나가기로 한 출마 예정자나 후보 추천을 해줄 유권자들에게 접근해 후보 등록을 좌절시키는 공작을 펼쳤다고 주장하였다.[6]

정당별 후보자 수
정당후보자 수비율(%)
민주정의당4,92853.1
민주한국당1,16512.5
한국국민당1371.5
민권당1011.1
민주사회당1align="right" |
무소속2,95131.8
합계9,283100.0



지역별 정당 후보 현황
지역정수민주정의당민주한국당한국국민당민권당민주사회당무소속
서울85675319918290482
부산32427766350153
경기6707132218160252
강원299293821230206
충북256270741851105
충남4654281213490173
전북407387955190220
전남6065161182960386
경북75566488100626
경남58757897990322
제주5349400026
합계5,2784,9281,16513710112,951


6. 선거인 선거

1981년 2월 11일, 헌법 규정에 따라 대통령 선거인단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다.[1] 1,905개 선거구 중 무투표 당선이 결정된 113개 선거구를 제외한 1,792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진행되었다. 민주정의당 추천 선거인이 과반수인 2,639명을 넘어 3,676명이 당선되어, 이 시점에서 전두환의 당선이 확정되었다.[1]

선거인 수 및 투표자 수[1]
선거인 수20,944,034명
투표 대상이 된 선거인 수19,967,287명
투표자 수15,593,877명
투표율78.1%



선거인 선거 결과[1]
정당당선자 수비율(%)
민주정의당3,67669.5
민주한국당4117.8
한국국민당480.9
민권당190.4
무소속1,12321.4
합계5,278100.0


6. 1. 선거 운동

선거 운동은 벽보, 공보, 합동연설회 등 세 가지 방법으로만 할 수 있었으며, 이 세 가지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선거 관련 행사도 허용되지 않았다.[1] 선거 벽보에는 신상 정보와 경력, 소속 정당 등을 게재할 수 있을 뿐 그 어떤 정견 및 공약도 쓸 수 없게 하는 등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다.[1] 다만 선거 공보에는 1,000자 이내에서 다른 내용을 게재할 수 있었으며, 선거구마다 2회씩 개최된 합동연설회에서도 30분 이내의 연설을 통해 정견 발표 및 특정 후보 지지 발언을 할 수 있었다.[1]

1981년 1월 24일부터 2월 10일까지 허용된 선거 운동 과정에서, 국회의원과 선거인의 차이를 알지 못하는 듯 지역 경제를 살리겠다는 등의 공약을 발표해 조롱거리가 되는 후보가 있는가 하면, 선거 운동 기간 내내 지지 대통령 후보나 정견 등을 전혀 밝히지 않는 후보도 많아 후보들의 자질 및 선거 제도의 문제점에 대한 논란이 생기기도 하였다.[2] 또한 합동연설회에 지역 주민들이 거의 오지 않거나, 심지어 후보들도 참석하지 않아 아예 연설회가 개최되지 못하는 곳도 많았다.[2]

민정당 측 후보들은 '새 역사 창조', '정의 사회 구현', '민주 복지 국가 건설' 등의 구호를 주로 사용했으며, 전두환 대통령이 10·26 이후 혼란에 빠진 나라를 수습하였다며 지지를 호소하였다.[3] 민한당 후보들은 '민주 제도 정착', '정권 교체', '건전 야당 발전' 등을 내세우며 유치송 후보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 국민당민권당의 후보들은 김종철 후보와 김의택 후보의 이름은 거명하지 않은 채 '믿어보자 국민당 뽑아주자 국민당', '민권 수호' 같이 당을 내세우는 구호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3] 무소속 후보들 중에는 지지 후보를 밝히지 않는 경우도 많았으나, 대다수는 전두환 후보를 지지한다고 선언하였다.[3] 민주정의당 당적 보유자 6명, 무소속 3명 등 9명의 후보가 출마한 서울 영등포구 제6선거구에서는 9명의 후보 전원이 전두환 후보 지지를 선언하기도 했다.[3]

6. 2. 결과

1981년 2월 11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 결과, 민주정의당이 전체 선거인 수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해 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 선거에서 전두환 후보의 승리가 사실상 확정되었다.[13] 이 날 선거는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으나, 투표용지에 후보자들의 소속 정당이 표시되지 않아 정당을 보고 투표하려던 유권자들은 혼란을 겪기도 하였다.

2월 25일, 선거인단 투표에서 전두환 후보는 총 4,755표, 90.11%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민주정의당의 선거인단 과반수 확보로 인해 이미 당선이 확정된 상황이었다.

6. 2. 1. 정당별 득표 및 의석수

1981년 2월 11일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 결과, 민주정의당은 전체 선거인 수의 과반수를 확보하여 제12대 대통령 선거 승리를 사실상 확정지었다.[13]

선거인 수 및 투표자 수
선거인 수20,944,034명
투표 대상이 된 선거인 수19,967,287명
투표자 수15,593,877명
투표율78.1%



선거인 선거 결과
정당당선자 수비율(%)
민주정의당3,67669.5
민주한국당4117.8
한국국민당480.9
민권당190.4
무소속1,12321.4
합계5,278100.0



정당득표수득표율의석수
민주정의당9,250,26260.73,667
민주한국당1,778,00711.7411
한국국민당174,7081.149
민권당124,2150.819
민주사회당 (대한민국)|민주사회당한국어8250.00
무소속3,909,82125.71,132
합계15,237,8381005,278



민주정의당은 무소속 후보보다 3배, 최대 야당인 민주한국당보다 9배나 많은 의석을 확보하였다. 투표용지에는 후보자들의 소속 정당이 표시되지 않아, 정당을 보고 투표하려던 유권자들은 혼란을 겪기도 하였다.

지역민주정의당민주한국당한국국민당민권당민주사회당 (대한민국)|민주사회당한국어무소속
서울551137470157856
부산2343320055324
경기5454433075670
강원240430052299
충북2071330033256
충남33842100075465
전북2912606084407
전남351512010183606
경북44926000280755
경남42034420127587
제주4110001153
전체3,667411491901,1325,278


6. 2. 2. 지역별 득표율

1981년 2월 11일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의 지역별 득표율은 다음과 같다.[13]

지역민주정의당민주한국당한국국민당민권당민주사회당무소속
서울1,918,21556.5%540,55215.9%29,6470.9%48,8681.4%00.0%857,44225.3%3,394,724
부산799,98163.8%148,40311.8%9,3970.7%4,4910.4%00.0%291,74523.3%1,254,017
경기1,361,72769.0%283,18414.4%12,2970.6%17,9370.9%00.0%297,62215.1%1,972,767
강원523,46764.2%75,4309.3%15,7161.9%1,9320.2%00.0%199,44424.4%815,989
충북423,37565.8%77,11812.0%20,9203.3%3,9930.6%8250.1%117,07118.2%643,302
충남669,38163.0%133,96412.6%35,6043.3%8,1210.8%00.0%216,17320.3%1,063,248
전북607,74762.6%106,70011.0%4,5520.5%24,5202.5%00.0%227,06423.4%970,583
전남763,29352.2%160,66611.0%34,4062.3%6,1200.4%00.0%498,32834.1%1,462,813
경북1,249,10757.5%125,5305.8%8030.0%00.0%00.0%797,70236.7%2,173,142
경남815,47862.1%116,8028.9%11,3660.9%8,2330.6%00.0%361,35827.5%1,313,237
제주118,49168.1%9,6585.5%00.0%00.0%00.0%45,87226.4%174,021
전체9,250,26260.7%1,778,00711.7%174,7081.1%124,2150.8%8250.0%3,909,82125.7%15,237,838



민주정의당은 모든 지역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으며, 특히 경기도에서 69.0%로 가장 높은 득표율을 보였다. 민주한국당은 서울에서 15.9%로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고, 한국국민당은 충청북도에서 3.3%, 민권당은 전라북도에서 2.5%로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민주사회당은 충청북도에서만 825표(0.1%)를 얻는 데 그쳤다. 무소속 후보는 전라남도에서 34.1%로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6. 2. 3. 유명인 당선자

선거인단 선거에선 기업인이나 정치인 출신 후보들이 높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대거 당선됐다.[9] 정주영, 구자경, 최종환 등 지지 후보를 밝히지 않은 선거인도 있는가 하면 조중훈, 배의환, 김일환, 홍성철 등 선거 운동 기간 중 적극적으로 전두환 대통령 지지를 선언한 경우도 있었다.

지역소속성명비고
서울 종로구 제1선거구무소속정주영 현대그룹 회장1위
서울 종로구 제1선거구무소속조중훈 한진그룹 회장2위
서울 종로구 제3선거구무소속구자경 럭키그룹 회장1위
서울 종로구 제3선거구무소속최종환 삼환기업 회장2위
서울 중구 제2선거구민주정의당최원석 동아그룹 회장1위
서울 용산구 제1선거구무소속김일환내무부 장관1위
서울 마포구 제6선거구무소속김원기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무투표 당선
서울 강남구 제2선거구무소속유양수 전 동력자원부 장관1위
서울 강남구 제3선거구무소속홍성철내무부 장관1위
서울 강남구 제6선거구무소속배덕진 전 체신부 장관1위
서울 강동구 제10선거구무소속배의환한국은행 총재2위
서울 영등포구 제2선거구무소속황정연해군참모총장무투표 당선
전북 이리시 제2선거구무소속이춘기통일주체국민회의 운영위원장1위


7. 대통령 선거

1981년 10월 27일에 공포된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실시된 제12대 대통령 선거는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 선거였다. 전두환 후보가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다.

제4공화국 시대의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 선거 방식에서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 선거로 변경되었고, 야당 후보의 입후보도 허용되었으나, 전두환 대통령이 90%에 가까운 득표율을 기록하여 사실상 신임 투표와 다름없었다.[4]

대통령 후보는 선거인단 과반수의 득표를 얻어야 했다. 2월 11일에 선출된 선거인 5,277명(부산에서 1명 해임) 중 과반수는 2,639표였다. 전두환은 2월 25일 4,755표(90.11%)를 얻어 재선되었는데, 민주정의당이 선거인단 대다수를 차지하여 전두환의 당선은 이미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7. 1. 선거 운동

대통령 선거는 공영제로 실시되었으며, 선거 운동은 공보, 신문 광고, 방송 연설 등을 통해서만 할 수 있었다. 공보에는 6,000자 이내에서 정견 및 공약을 게재할 수 있었으며, 정견 및 정책을 담은 신문 광고는 1번에 5,000자 이내로 최대 7개 신문지에 최대 3번까지 낼 수 있었다. 후보 본인의 방송 연설은 라디오 및 텔레비전을 통해 1번에 30분씩 최대 3번, 후보 지명 연설원 2명은 각각 30분씩 1번 할 수 있었다.[1]

민정당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인물' 등 '새롭다'는 이미지를 강조하며 기존 정치인들과 다른 참신한 세력임을 내세웠다. 민한당신익희의 비서 출신인 유치송 후보를 내세워 정통 보수 야당임을 강조하고, 5·18 광주 민간인 학살 사건을 언급하며 여당 견제론을 펼쳤다. 국민당민주공화당 시절 집권 경험과 조국 근대화 성과를 내세웠지만, 군부 정당이라는 한계와 독재 잔당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민정·민한 양당에 크게 뒤졌다. 각 정당들은 무소속 선거인들을 포섭해 득표율을 올리려 노력하였다.[1]

7. 2. 결과

1981년 2월 25일, 국회의원 선거구별로 실시된 선거인단의 대통령 선출 투표 결과, 재적 선거인 5,277명 중 4,755명의 지지를 얻은 민주정의당 전두환 후보가 90.2%의 득표율로 대한민국의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4] 민주한국당 유치송 후보는 7.7%(404표), 한국국민당 김종철 후보는 1.6%(85표), 민권당 김의택 후보는 0.5%(26표)를 득표하였다.

당초 선거인단은 5,278명이었으나, 부산 동래구 제7선거구에서 당선된 민주정의당 김창식 선거인이 2월 19일 당선이 취소되어 5,277명이 되었다.[13] 선거인단 선거에서 민주정의당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여 전두환의 당선은 기정사실이었다.

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별 득표 현황
당락후보자당파득표수득표율
(%)
당선전두환민주정의당4,75590.2
유치송민주한국당4047.7
김종철한국국민당851.6
김의택민권당260.5
합계5,270100
선거인수5,277rowspan="2" |
투표자수5,271


7. 2. 1. 지역별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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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후보가 가장 많은 득표율을 얻은 지역은 제주도로 98%였고, 강원도는 97.7%, 경상북도는 95.9%, 충청북도경상남도는 93%였으며 서울특별시는 82.2%였다.[4]

지역전두환유치송김종철김의택무효기권
서울70313311801856
부산285333002323
경기620434300670
강원29243000299
충북238144000256
충남4064118000465
전북369253712407
전남5215128600606
경북723292001755
경남546309200587
제주521000053
합계4,7554048526165,277


7. 2. 2. 투표 불참 선거인

선거 당일, 당선이 취소된 민정당 김창식 선거인을 제외한 5,277명의 재적 선거인 중 4명은 선거법 위반으로 구속 수감되고 2명은 풍랑으로 인해 섬에 발이 묶여 총 6명이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였다.[14]

기권 선거인 명단
이름정당선거구이유
경규복민주정의당서울특별시 서울 강서구 제6선거구구속
서일도무소속부산광역시 부산 동래구 제8선거구구속
배종환민주정의당부산광역시 부산 남구 제8선거구구속
박삼술민주정의당대구광역시 경북 대구시 서구 제2선거구구속
이수영민주정의당전라북도 부안군 전북 부안군 위도면풍랑
송성섭무소속전라북도 부안군 전북 부안군 위도면풍랑


8. 평가

1980년 전두환은 유신헌법을 대체하는 제5공화국 헌법을 국민투표로 확정했다. 새 헌법은 7년 단임제를 도입했지만, 간접 선거제를 유지하여 확고한 집권을 꾀했다는 한계를 보였다.

직접 선거제에 대한 국민적 여론이 높았음에도, 전두환은 국력 낭비, 인기영합주의 공약 남발, 국론 분열 등을 이유로 간접 선거제를 유지했다. 그러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신 대통령 선거인단을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고, 야당 후보의 출마를 허용하여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적 제도를 갖추려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이후, 전두환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1980년 간선제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개정된 헌법은 대통령 선거 제도를 변경하여 야당 후보 출마를 허용하고, 대통령 임기를 7년 단임으로 제한했지만,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주요 야당 정치인들을 탄압하여 정치 지형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실시된 제12대 대통령 선거는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 선거였으며, 전두환 후보가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사실상 신임 투표가 되었다.

9. 영향

1980년 전두환은 제5공화국 헌법을 국민투표로 확정했다. 새 헌법은 대통령 임기를 7년 단임으로 제한하고 재선을 금지했지만, 선거인단을 통한 간접 선거제를 유지하여 10월 유신과 같은 한계를 보였다.[1] 제12대 대통령 선거는 이러한 헌법에 따라 치러졌으며, 전두환 후보가 대통령 선거인단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었다.[5]

1981년 2월 25일, 선거인단 투표 집계와 함께 전두환의 임기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고, 3월 3일 취임식이 거행되면서 대한민국 제5공화국이 공식 출범했다.[4] 이는 1987년 6월 민주 항쟁까지 이어지는 권위주의 통치의 시작이었다.

참조

[1] 뉴스 1981년 민정당, 전두환 총재 추대 http://news.donga.co[...] Donga 2009-01-15
[2] 뉴스 민한당, 17일에 창당대회 http://isplus.live.j[...] JoongAng Ilbo 1981-01-15
[3] 뉴스 민정당 선거인우보 48.6%로 가장많아 http://news.joins.co[...] JoongAng Ilbo 1981-02-06
[4] 뉴스 전두환 후보 12대 대통령에 당선 동아일보 1981-02-25
[5] 웹인용 선거인단 투표 의원 선거구 단위로 https://newslibrary.[...] 2019-06-06
[6] 간행물 대한민국 선거사 제4집 중앙선거관리위원회 2009
[7] 간행물 대한민국 정당사 제3집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92
[8] 간행물 대한민국 선거사 제4집-제6집 중앙선거관리위원회 2009
[9] 웹인용 내년 대통령 선거 최소 3파전 예상, 민정·민한·민권당서 후보 낼 듯 https://newslibrary.[...] 2019-06-06
[10] 웹인용 대통령후보 몇 명이나 나올까{{!}}민정·민한당 「후보」확정{{!}}신정·민사선 불참 선언… 잘해야 삼파전 https://www.joongang[...] 2019-03-28
[11] 웹인용 민정계 선거인 후보 정수 초과 https://newslibrary.[...] 2019-06-06
[12] 웹인용 포식과 허기와 https://www.joongang[...] 2019-03-28
[13] 간행물 제12대 대통령 선거 총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85
[14] 웹인용 구속4명…백%투표 무산 https://www.joongang[...] 2019-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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