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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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심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승려로, 킨메이 천황 15년(554년) 이전에 일본에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일본서기》의 기록은 신뢰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제기되는데, 특히 불교 공인 기사에 승려가 동반되지 않았다는 점, 킨메이 천황 시대에 백제 승려가 이미 도래했다는 기록과 비다쓰 천황 시대에 승려가 없었다는 기록 간의 모순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이러한 모순은 백제가 일본과의 군사적 협력을 위해 불교를 전략적으로 이용했을 가능성, 그리고 망명 백제인들이 성왕의 사적을 빛내기 위해 승려 파견을 먼저 행했다고 기록하고 싶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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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승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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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도심 |
인물 정보 | |
존칭 | 존칭 없음 |
법명 | 도심 |
국적 | 중국 |
종파 | 종파 정보 없음 |
사찰 | 사찰 정보 없음 |
스승 | 스승 정보 없음 |
제자 | 제자 정보 없음 |
저서 | 저서 정보 없음 |
2. 인물
『일본서기』에 따르면, 도심은 킨메이 천황 15년(554년) 이전에 이미 일본에 건너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후 킨메이 천황 15년(554년)에 백제에서 승려 담혜를 비롯하여 역박사 왕도량과 왕보손, 오경박사 왕류귀, 의박사 왕유타, 채약사 반량풍, 고덕 정유타 등이 일본에 도착하면서, 도심은 이들과 교대하여 귀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2][1]
일본서기에 따르면, 도심은 킨메이 천황 15년(554년)에 승려 담혜, 역박사 왕도량, 오경박사 왕류귀, 역박사 왕보손, 의박사 왕유타, 채약사 반량풍, 고덕 정유타 등이 일본에 와서 교대하여 귀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1]
일본서기 〈긴메이키〉 15년(554년) 조에는 백제가 승려 담혜(曇慧) 등 9명을 보내 기존에 파견했던 승려 도심(道深) 등 7명과 교체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대로라면 554년 이전에 이미 담혜를 포함한 9명의 백제 승려가 일본에 건너와 활동했다는 의미가 된다.
3. 기록 및 사료
도심의 일본 방문(내조, 来朝)을 전하는 주요 사료는 《일본서기》 제19권 킨메이 천황 조이며, 해당 기록은 다음과 같다.
: 二月。百濟遣下部杆率將軍三貴。上部奈率物部烏等乞救兵。仍貢徳率東城子莫古。代前番奈率東城子言。五經博士王柳貴代固徳馬丁安。僧曇慧等九人代僧道深等七人。zho
: (2월, 백제가 하부 간솔 장군 삼귀, 상부 나솔 물부오 등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했다. 이어서 덕솔 동성자막고를 보내 이전의 나솔 동성자언을 대신하게 하고, 오경박사 왕유귀를 보내 고덕 마정안을 대신하게 하며, 승려 담혜 등 9인을 보내 승려 도심 등 7인을 대신하게 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승려 담혜 등 9인을 승려 도심 등 7인으로 대신하다"라고 되어 있어, 킨메이 천황 15년(554년) 이전에 이미 도심을 포함한 7명의 승려가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 기록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우선, 불교 전래에서 중요한 사건인 승려의 첫 일본 방문에 대한 기록이 《일본서기》에 명확히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기록 누락의 가능성도 있지만, 불상과 경전 전래를 상세히 기록한 편찬자가 승려 파견 기록을 빠뜨렸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또한, 이후 비다쓰 천황 시대의 기록은 당시 일본에 백제 승려가 없었음을 추측하게 한다.[3]
《일본서기》 제20권 비다쓰 천황 13년(584년) 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是歳。蘇我馬子宿禰請其佛像二躯。乃遣鞍部村主司馬達等。池邊直氷田。使於四方,訪覓修行者。於是唯於播磨國得僧還俗者。名高麗惠便。大臣乃以爲師。令度司馬達等女嶋。曰善信尼。〈年十一歳。〉又度善信尼弟子二人。…馬子獨依佛法。崇敬三尼。…由是馬子宿禰。池邊氷田。司馬達等。深信佛法修行不懈。馬子宿禰亦於石川宅脩治佛殿。佛法之初自而作。zho
: (이 해에 소가의 마자 숙녜가 불상 두 구를 얻어, 안부촌주(鞍部村主) 시마노 다쓰와 이케베노 아타이 히타(池邊直氷田)를 사방에 보내 수행자를 찾게 하였다. 이에 오직 하리마국에서 환속한 승려를 얻었는데, 이름은 고구려의 혜변이었다. 대신(大臣, 소가의 마자)이 그를 스승으로 삼고, 시마노 다쓰의 딸 시마(嶋, 11세)를 출가시켜 선신니(善信尼)라 하였다. 또한 선신니의 제자 두 사람을 출가시켰다. …(소가의) 마자는 홀로 불법에 의지하여 세 명의 비구니를 숭경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마자 숙녜, 이케베노 히타, 시마노 다쓰는 불법을 깊이 믿고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마자 숙녜는 또한 이시카와(石川)의 집에 불전을 수리하니, 불법의 시작이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소가의 마자는 불법의 스승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사람을 보냈고, 결국 하리마국에서 환속했던 고구려 출신 승려 혜변을 찾아 스승으로 삼았다. 킨메이 천황 시대부터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소씨 가문이었는데, 왜 그들이 환속한 고구려 승려를 스승으로 삼아야 했는지 의문이 제기된다.[3] 만약 킨메이 천황 15년의 백제 승려 교체 기록이 사실이라면, 소가의 마자는 일본에 있던 백제 승려들 중에서 스승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는 점은 당시 일본 내에 백제에서 온 승려가 없었을 가능성을 높이며, 이는 킨메이 천황 15년의 승려 교체 기록이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즉, 비다쓰 천황 13년(584년)까지 일본에는 공식적으로 초빙된 승려가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이다. 이러한 기록의 차이는 백제가 멸망하고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 지식인들이 성명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불상과 경전뿐만 아니라 승려 파견 역시 다른 국가들보다 백제가 먼저 행했다고 기록하고자 했을 가능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3]
《일본서기》 편찬에는 백제계 사료인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이른바 백제삼서)가 인용되었다. 이는 신라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고 백강 전투에서 패배한 후, 많은 백제 지식인들이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백제의 기록들이 일본에 전해졌고, 이것이 《일본서기》 편찬에 활용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3]
《일본서기》의 불교 공인 관련 기록을 보면, 백제로부터 전해진 것은 불상과 경전뿐이었고, 승려는 동반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4] 당시 백제는 신라와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의 군사적 협력이 절실했던 상황이었으므로, 불교 전래는 순수한 문화적 교류라기보다는 군사적, 외교적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었을 수 있다. 따라서 물품(불상, 경전)만으로도 목적 달성에 충분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3] 설령 백제로부터 불상과 경전이 전해진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것만으로 역사적인 의미의 '불교 공인'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있다. 불교는 '불(佛, 불상)·법(法, 경전)·승(僧, 승려)'의 삼보(三寶)가 갖추어져야 비로소 성립한다고 보는데, 특히 가르침을 전하고 해석하는 승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전국 시대 일본의 기독교 전파 과정에서 선교사의 역할이 중요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십자가나 성경이 있더라도 그것을 설명하고 이끌어 줄 사람이 없다면 종교로서 제대로 수용되기 어렵기 때문이다.[3]
4. 《일본서기》 기록에 대한 비판적 고찰
그러나 이 기록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여러 의문이 제기된다. 첫째, 불교 전래 과정에서 불상과 경전의 전래는 비교적 상세히 기록된 반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승려의 최초 도래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지적된다.[3] 물론 기록 누락의 가능성도 있지만, 불교 관련 기사를 중시한 《일본서기》 편찬자가 의도적으로 승려 관련 기사만 빠뜨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둘째, 이후 시대인 비다쓰 천황 13년(584년)의 기록이 킨메이 천황 시대의 승려 파견 기록과 모순된다는 점이다. 〈비다쓰키〉에 따르면, 당시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했던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는 불법(佛法)의 스승을 구하기 위해 사방으로 사람을 보냈고, 그 결과 하리마국(播磨國)에서 환속(還俗)해 있던 고구려 출신 승려 혜편(惠便)을 찾아내어 스승으로 삼았다고 한다. 만약 킨메이 천황 시대에 이미 백제에서 온 승려들이 일본 내에 활동하고 있었다면, 가장 열성적인 불교 신자였던 소가노 우마코가 굳이 환속한 고구려 승려를 어렵게 찾아 스승으로 삼기보다는, 기존의 백제 승려들에게 의지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3]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볼 때, 비다쓰 천황 13년(584년)까지는 일본 내에 백제에서 공식적으로 파견된 승려가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킨메이 천황 15년의 승려 교체 기록은 사실과 다르거나, 후대에 특정 의도를 가지고 첨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비판적 해석이 제기된다.[3]
4. 1. 백제삼서와 《일본서기》의 관계
《일본서기》에는 백제삼서(百濟三書)라고 불리는 《백제기》(百濟記), 《백제신찬》(百濟新撰), 《백제본기》(百濟本記)와 같은 백제의 사료가 인용되어 있다. 이 사료들은 신라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고, 백제 부흥운동마저 백강 전투에서 패배로 끝난 후,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 지식인들에 의해 일본에 전해졌으며, 《일본서기》 편찬 과정에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3]
《일본서기》에 기록된 유명한 불교 공인 관련 기사를 보면, 백제로부터 불상과 경전만이 전해졌을 뿐, 승려는 동반되지 않았다는 점이 주목된다.[4] 이는 당시 백제가 처한 상황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백제는 신라와 고구려에 맞서 일본의 군사적 협력을 얻고자 하는 구체적인 목적이 있었기에, 문화 교류보다는 군사적 지원 확보를 위한 전략적 수단으로 불교를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즉, 불교 전파 자체보다는 상징물인 불상과 경전을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외교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3]
하지만 불교는 본래 '불(佛, 불상)·법(法, 경전)·승(僧, 승려)'의 삼보(三寶)가 갖추어져야 성립하는 종교로 여겨진다. 특히 승려는 불법을 해설하고 신앙을 이끄는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따라서 불상과 경전만 전해지고 승려가 동반되지 않았다면, 이를 완전한 의미의 불교 전래나 공인으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마치 십자가나 성경이 있어도 이를 설명하고 이끌어 줄 선교사가 없다면 종교가 제대로 수용되기 어려운 것과 같다.[3]
《일본서기》 〈긴메이키〉 15년(554년) 조에는 "승려 담혜 등 9인을 승려 도심 등 7인으로 교체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 기록대로라면 554년 이전에 이미 담혜를 포함한 9명의 백제 승려가 일본에 건너와 활동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 기록의 신뢰성에는 의문이 제기된다. 우선, 불교 전래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승려의 최초 도래에 대한 기록이 《일본서기》에는 누락되어 있다. 불상과 경전의 전래를 상세히 기록한 편찬자가 승려의 도래 기사만 빠뜨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이후 〈비다쓰키〉 13년(584년) 조의 기록은 당시 일본에 백제 승려가 없었음을 시사한다.[3]
〈비다쓰키〉에 따르면, 불교를 신봉했던 소가노 우마코는 불법의 스승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사람을 보냈고, 하리마국에서 환속(還俗)한 고구려 출신 승려 혜편을 찾아내어 스승으로 삼았다. 만약 긴메이 천황 시대에 백제에서 승려들이 건너와 활동하고 있었다면, 가장 적극적으로 불교를 후원했던 소가씨 가문이 굳이 환속한 고구려 승려를 찾아 스승으로 삼을 필요 없이 백제 승려에게 의지했을 것이다. 이는 비다쓰 천황 13년(584년)까지 일본에는 백제에서 온 승려가 사실상 없었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긴메이 천황 15년의 승려 교체 기록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3]
이러한 기록의 불일치는 《일본서기》 편찬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는 망명 백제인들의 의도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망명 백제인들에게 성명왕은 고국의 위대한 군주였으며, 그의 업적을 최대한 빛나게 기록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불상과 경전뿐만 아니라 승려의 파견 역시 다른 나라보다 백제가 먼저 행한 것처럼 기록하여 성왕의 치적을 드높이려 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3]
참조
[1]
서적
日本文化通史
北京大学出版社
2009-07
[2]
서적
日本医学史研究余話
https://books.google[...]
科学書院
1981-10-01
[3]
간행물
『日本書紀』編纂と亡命百済知識人
新人物往来社
2006-02
[4]
문서
日本書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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