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 마리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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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정 마리아의 집은 터키 에페소 근처에 위치한 석조 건물로, 성모 마리아가 생애의 마지막을 보낸 곳으로 추정되어 순례지로 여겨진다. 1881년 아베 줄리앙 꾸예 신부가 처음 발견했으며, 이후 마리 드 망다 그랑시 수녀의 노력으로 복원 및 보존되었다. 가톨릭 교회는 예루살렘의 성모 마리아 무덤에 대한 전대사 부여를 철회하고 동정 마리아의 집에 순례 성지로서의 권리를 부여했다. 현재는 기독교인뿐 아니라 이슬람교 신자들도 방문하며, 교황 바오로 6세,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토 16세가 이곳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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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 마리아의 집 | |
---|---|
개요 | |
![]() | |
위치 | 셀축, 이즈미르 주, 터키 |
종류 | 고대 유적 |
부분 | 해당 없음 |
길이 | 해당 없음 |
너비 | 해당 없음 |
면적 | 해당 없음 |
높이 | 해당 없음 |
건설자 | 해당 없음 |
재료 | 해당 없음 |
건설 시기 | 해당 없음 |
폐기 시기 | 해당 없음 |
시대 | 해당 없음 |
문화 | 해당 없음 |
의존 대상 | 해당 없음 |
거주자 | 해당 없음 |
사건 | 해당 없음 |
발굴 | 해당 없음 |
고고학자 | 해당 없음 |
상태 | 해당 없음 |
소유 | 해당 없음 |
관리 | 해당 없음 |
일반 공개 | 해당 없음 |
웹사이트 | 에페소스 고고학 유적지 |
명칭 |
2. 발견
동정 마리아의 집 발견은 19세기 독일 수녀 안나 카타리나 엠머리히의 환시 기록에서 비롯되었다. 그녀의 환시를 바탕으로 작가 클레멘스 브렌타노가 출판한 책은 성모 마리아가 마지막 생애를 보낸 장소를 찾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23][24][25][4][5][6][7]
1881년 10월 18일, 프랑스 사제 쥘리앵 구예 신부가 브렌타노의 기록을 토대로 튀르키예 에게해 인근 산에서 작은 석조 건물 유적을 처음 발견했다. 그는 이곳이 엠머리히가 묘사한 성모 마리아의 집이라고 믿었으나, 당시 그의 발견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8][9][10][23][24][25]
10년 후인 1891년 7월 29일, 프랑스 수녀 마리 드 망다 그랑시의 노력으로[11][26] 라자르회 소속 선교사 폴린 신부와 융 신부가 관련 자료를 참고하여[27][12][13] 해당 건물을 재발견했다. 이들은 폐허 상태의 집터가 오래전부터 인근 지역 주민들, 특히 고대 에페소 기독교인들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이들에게 '파나야 카풀루'(Panaya Kapulu|파나야 카풀루tr, 성모의 문)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신성한 장소였음을 확인했다.[12][14][28] 지역 주민들은 매년 성모 승천 대축일인 8월 15일에 이곳을 찾아 순례해왔다.[15][29]
마리 드 망다 그랑시 수녀는 이후 가톨릭 교회로부터 동정 마리아의 집 설립자로 인정받았으며, 1891년부터 1915년 선종할 때까지 집터와 주변 부지를 매입하고 복원 및 보존하는 데 헌신했다.[16] 이 발견과 복원은 12세기부터 전해 내려오던 성모 마리아의 에페소 선종 전승의 신빙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예루살렘에서의 선종 전승(마리아의 무덤 참조)과 함께 주요 전승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 교황청은 교황 레오 13세(1896년)와 교황 요한 23세(1961년)의 결정을 통해 예루살렘 관련 성지에 부여했던 전대사를 철회하고, 대신 에페소의 동정 마리아의 집을 공식 순례지로 인정하며 이곳 순례자들에게 영구적인 전대사를 부여하였다.[17][30]
2. 1. 안나 카타리나 엠머리히의 환시

19세기 초, 독일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녀였던 안나 카타리나 엠머리히(1774-1824)는 병상에 누워 예수의 마지막 날들과 성모 마리아의 생애에 대한 여러 환시를 보았다고 전해진다.[4] 엠머리히는 뒬멘의 작은 마을에서 오랫동안 병을 앓았지만, 그녀의 신비로운 경험은 독일 내에 알려져 많은 유명 인사들이 그녀를 찾아왔다.[5]
엠머리히가 본 환시 중에는 사도 요한이 성모 마리아를 위해 에페소에 지어주었으며, 마리아가 생애 마지막을 보냈다고 하는 집에 대한 묘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 집의 위치와 주변 지형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6]
마리아는 에페소 자체에 살지 않고 그 근처 시골에 살았습니다. ... 마리아의 집은 예루살렘에서 오는 길 왼쪽에 있는 언덕에 있었고, 에페소에서 약 세 시간 반 거리에 있었습니다. 이 언덕은 에페소 쪽으로 가파르게 기울어져 있으며, 남동쪽에서 다가오는 도시는 솟아오르는 땅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좁은 길은 남쪽으로 이어져 불규칙한 고원이 있는 언덕 꼭대기 근처까지 이어지며, 이동하는 데 약 30분이 걸립니다.

엠머리히를 방문했던 사람 중에는 작가 클레멘스 브렌타노가 있었다. 그는 엠머리히를 처음 만난 후 뒬멘에 5년간 머물며 매일 그녀를 만나 환시 내용을 기록했다.[5][7] 엠머리히가 세상을 떠난 후, 브렌타노는 이 기록을 바탕으로 1852년 독일 뮌헨에서 책을 출판했다. 그가 죽은 뒤에는 그의 노트를 기반으로 한 두 번째 책이 출간되었다. 1892년 엠머리히의 복자 지정을 위한 심사가 바티칸에 제출되자, 독일의 여러 전문가들은 브렌타노의 원본 노트와 출판된 책을 비교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브렌타노의 기록에는 엠머리히의 이야기 외에도 다양한 외경 성서 자료, 지도, 여행 안내서 등이 참고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19]

1881년 10월 18일, 프랑스 사제 쥘리앵 구예 신부는 브렌타노가 엠머리히와의 대화를 바탕으로 쓴 책에 묘사된 내용을 따라 터키 에게해가 내려다보이는 산에서 작은 석조 건물을 발견했다. 그는 이 건물이 엠머리히가 묘사한, 성모 마리아가 마지막 생애를 보낸 집이라고 믿었다.[8][9][10] 하지만 당시 그의 발견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23][24][25]
10년 뒤인 1891년 7월 29일, 마리 드 망다-그랑시 수녀의 권유로[11][26] 두 명의 라자르회 선교사 폴린 신부와 융 신부가 같은 자료(꾸예 신부의 안내서 또는 브렌타노의 책)를 참고하여[27][12][13] 그 건물을 다시 발견했다. 그들은 지붕도 없이 사면의 벽만 남은 이 폐허가 오랫동안 인근 쉬린제 마을 주민들에게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 왔음을 알게 되었다. 이 주민들은 에페소에 살았던 초기 기독교인들의 후손으로 여겨진다.[12] 그들은 이 집을 터키어로 Panaya Kapulu|파나야 카풀루tur(성모의 문)라고 불렀다.[14][28] 매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는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아왔다.[15][29]
마리 드 망다-그랑시 수녀는 가톨릭교회로부터 성모 마리아의 집 설립자로 인정받았으며, 1891년부터 191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과 주변 지역을 매입하고 복원하며 보존하는 데 헌신했다.[16] 이 발견은 12세기부터 전해 내려오던 성모 마리아의 에페소 선종 전승을 다시 주목받게 하고 그 신빙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예루살렘에서 마리아가 선종했다는 더 오래된 전승(마리아의 무덤 참조)과 경쟁하는 관계에 있다. 1896년 교황 레오 13세와 1961년 교황 요한 23세는 예루살렘의 성모 안식 교회에 부여되었던 전대사를 철회하고, 대신 에페소의 동정 마리아의 집에 순례하는 모든 이에게 영구적인 전대사를 부여함으로써 에페소 성지의 중요성을 인정했다.[17][30]
2. 2. 줄리앙 구예의 발견
1881년 10월 18일, 프랑스의 사제 쥘리앵 구예 신부는 터키에서 에게해가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의 작은 석조 건물과 고대 에페소 유적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 건물이 클레멘스 브렌타노의 저서에 기록된 독일 수녀 안나 가타리나 엠머릭(1774-1824)이 환시를 통해 묘사한 성모 마리아가 마지막 생애를 보낸 집과 일치한다고 보았다.[23][24][25] 그러나 이 발견은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2. 3. 마리 드 망다 그랑시의 재발견과 복원
1881년 10월 18일, 프랑스 사제 쥘리앵 구예 신부는 안나 가타리나 엠머릭(1774-1824)의 환시에 대한 클레멘스 브렌타노의 기록을 바탕으로 튀르키예 에게해 연안, 고대 에페소스 유적이 내려다보이는 산에서 작은 석조 건물을 발견했다. 그는 이 건물이 엠머릭이 묘사한, 성모 마리아가 말년을 보낸 집이라고 믿었으나[8][23][9][24][10][25],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10년 뒤인 1891년 7월 29일, 프랑스 수녀 마리 드 망다그랑시(DC)[11]의 제안으로[26] 라자로회 소속 선교사인 폴린 신부와 융 신부가 같은 자료를 참고하여 이 건물을 다시 찾아냈다.[12][27][13] 이들은 지붕도 없이 네 벽만 남은 폐허 상태의 이 돌집이, 에페소스 초기 기독교인들의 후손인 인근 쉬린제 마을 주민들에게 오랫동안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 왔음을 알게 되었다.[12] 주민들은 이곳을 튀르키예어로 '파나야 카풀루'(Panaya Kapulutr, "성모의 문")라고 불렀으며,[14][28] 매년 성모 승천 대축일인 8월 15일에 이곳으로 순례를 왔다.[15][29]
가톨릭 교회는 마리 드 망다그랑시 수녀를 성모 마리아의 집 설립자로 인정했으며, 그녀는 1891년부터 1915년 선종할 때까지 성모 마리아의 집 부지와 주변 지역을 확보하고 복원하며 보존하는 데 헌신했다.[16] 이 재발견은 12세기부터 내려오던 성모 마리아의 '에페소스 전승'을 다시 활성화하고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의 마리아의 무덤(성모 안식 교회)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예루살렘 전승'과 경쟁하게 되었다. 이후 교황 레오 13세(1896년)와 교황 요한 23세(1961년)는 예루살렘의 성모 안식 교회에 부여되었던 전대사를 철회하고, 대신 에페소스의 동정 마리아의 집 순례자들에게 영구적인 전대사를 부여했다.[17][30]
3. 성지의 특징
성모 마리아가 선종한 장소에 대해서는 예루살렘이라는 견해가 교부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으나, 에페소스에서 선종했다는 주장은 12세기에 들어서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에페소스 선종 전승과 이곳의 유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에페소스에는 5세기에 이미 세계 최초로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마리아 교회가 세워졌다는 점이 에페소 선종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된다.
가톨릭교회는 증거 부족을 이유로 이 집이 실제로 성모 마리아의 집이라고 공식 선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1896년 교황 레오 13세가 이곳을 성지로 인정하고 강복하면서 가톨릭교회의 태도는 긍정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후 1951년 교황 비오 12세는 성모 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면서 에페소의 동정 마리아의 집을 성지로 격상시켰고, 이러한 지위는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더욱 공고해졌다. 오늘날 이곳은 그리스도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이슬람교 신자들에게도 중요한 성지로 여겨지고 있다.
3. 1. 성지의 구조

성지로 가는 길에는 에페소스의 바실리카에 있는 것보다 더 큰 열쇠 구멍 모양의 세례 풀을 지나게 된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인근 로마인들을 피해 은둔하며 이곳에서 살았거나 세례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지 자체는 크지 않고 소박한 예배당 형태로 되어 있다. 보존된 돌과 구조는 사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당시의 다른 보존된 건물들과 건축 양식이 일치한다. 다만 정원 조경이나 성지 외부의 일부 요소는 후대에 추가된 것이다. 마리아의 집에서 복원된 부분은 원래 남아있던 부분과 구분하기 위해 붉은색 줄로 표시해 놓았다.

예배당 입구로 들어서면 하나의 큰 방이 나오며, 중앙 제단에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큰 조각상이 놓여 있다. 오른쪽에는 더 작은 방이 있는데, 이곳이 성모 마리아가 잠들었다고 전해지는 방이다. 전승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가 잠들고 휴식을 취했던 이 작은 방에는 샘물이 흘렀으며, 이 물줄기가 건물 외부의 현재 식수대를 이루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에페소스에서 선종했다는 전승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주장이 12세기에 들어서야 나타났기 때문이다.[18] 그러나 에페소스에 5세기에 세워진 마리아 교회(세계 최초로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당)가 있다는 점은 이 집이 성모 마리아와 관련 있다는 믿음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된다.
3. 2. 세례 풀
성지로 가는 길에는 에페소스의 바실리카에 있는 것보다 더 큰 열쇠 구멍 모양의 세례 풀을 지나게 된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인근 로마인들을 피해 은둔하며 이곳에서 살았거나 세례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3. 3. 소원 벽
성당 밖에는 순례자들이 개인적인 소망을 종이나 천에 적어 묶는 특별한 "소원 벽"이 있다. 이 벽은 방문객들이 자신의 소원을 남기는 장소로 활용된다. 소원 벽 근처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꽃과 과일이 재배되고 있으며, 성당 주변에는 추가적인 조명이 설치되어 부지가 관리되고 있다. 또한, 가까운 곳에는 물 분수 또는 우물이 있는데, 일부 순례자들은 이 물이 치유나 다산과 관련된 기적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3. 4. 기적의 샘
동정 마리아의 집 근처에는 물을 마실 수 있는 샘 또는 우물이 있다. 일부 순례자들은 이 물이 치유나 다산에 기적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4. 고고학적 검토
마리아의 집에서 복원된 부분은 원래 남아있던 부분과 구분하기 위해 붉은색 줄로 표시되어 있다.
성모 마리아가 에페소에서 선종했다는 전승은 12세기에 들어서야 비교적 늦게 나타났다.[18] 그 이전까지 교부들 사이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선종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보편적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일각에서는 에페소 전승 자체와 이곳 유적의 진위에 대해 고고학적, 역사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전승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5세기에 에페소에 세워진 세계 최초의 마리아 교회의 존재를 중요한 근거로 제시한다.
가톨릭교회는 현재까지 에페소의 돌집이 실제로 성모 마리아가 거주했던 집이라는 명확한 고고학적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이에 대한 공식적인 선언은 내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1896년 교황 레오 13세가 이곳을 방문하고 성지로 인정하며 강복한 이후, 가톨릭교회의 태도는 긍정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1951년 교황 비오 12세는 1950년 성모 승천 교리를 선포하면서 에페소 동정 마리아의 집을 공식적인 성지로 격상시켰으며, 이러한 지위와 특권은 이후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다시 한번 공고히 확인되었다.
현재 이곳은 그리스도교인들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도들에게도 중요한 성지로 여겨지며 많은 순례자들이 찾고 있다.
5. 논란과 의문점
동정 마리아의 집 유적은 복원된 부분과 원래 남아있던 부분을 구분하기 위해 붉은색 줄로 표시되어 있다.
성모 마리아가 에페소에서 선종했다는 전승은 12세기에 들어서야 나타났다는 점 때문에 이 집의 진위 여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전까지는 예루살렘에서 선종했다는 견해가 교부들 사이에서 더 보편적이었기 때문이다.[18] 반면, 에페소 전승을 지지하는 이들은 5세기에 세워진 마리아 교회의 존재를 근거로 들기도 한다.
가톨릭교회는 초기에는 증거 부족을 이유로 에페소의 돌집을 성모 마리아의 집으로 공식 선언하지 않았다. 그러나 1896년 교황 레오 13세가 이곳을 성지로 인정하고 강복하면서 가톨릭교회의 태도는 긍정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후 1951년 교황 비오 12세는 성모 승천 교리를 선포(1950년)하면서 에페소의 동정 마리아의 집을 성지로 격상시켰으며, 이러한 지위는 후임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더욱 공고해졌다. 현재 이곳은 그리스도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이슬람교 신자들에게도 중요한 성지로 여겨지고 있다.
5. 1. 에페소 선종 전승과 예루살렘 선종 전승
성모 마리아가 선종한 장소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예루살렘이었다는 견해가 교부들 사이에서 보편적이었다. 반면, 성모 마리아가 에페소에서 선종했다는 주장은 12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나타났다. 이러한 이유로 일각에서는 에페소 선종 전승 자체와 에페소에 있는 동정 마리아의 집 유적의 신빙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18]에페소 선종설을 지지하는 이들은 몇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우선 에페소에 마리아 교회가 있다는 점인데, 이는 세계 최초로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당으로 여겨진다. 또한 4세기의 성 살라미스의 에피파니우스는 성모 마리아가 몸과 영혼이 하늘로 들어 올려졌다는 전통적인 믿음을 언급한 최초의 저술가였으며, 이 전승이 에페소에서 유래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다른 많은 교부 저술가들처럼, 에피파니우스 역시 이러한 추정의 근거를 요한복음 19장 18-30절에서 찾았다. 해당 구절에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사도 요한에게 성모 마리아를 자신의 집으로 모시라고 당부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가 실제로 에페소에 머물렀다는 명확한 증거는 부족하며, 오히려 그녀의 영구적인 거주지는 예루살렘이었다는 더 설득력 있는 정황들이 존재한다는 비판도 있다.[19]
5. 2. 살라미스의 에피파니우스
4세기의 성 살라미스의 에피파니우스는 동정 마리아가 에페소에서 몸과 영혼으로 하늘로 승천했다는 전통적인 믿음을 언급한 최초의 저자였다.에피파니우스를 비롯한 많은 교부 저술가들은 이러한 주장의 근거를 요한복음 19장 18-30절에서 찾았다. 이 구절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사도이자 복음사가 요한에게 성모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시라고 부탁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러나 성 마리아가 실제로 에페소에 머물렀다는 증거는 매우 약하며, 오히려 그녀의 영구적인 집은 예루살렘에 있었다는 더 확실한 증거들이 제시되고 있다.[19]
6. 가톨릭 교회의 입장
성모 마리아가 예루살렘에서 선종했다는 것이 교부들 사이의 전통적인 견해였으나, 12세기경부터 에페소에서 선종했다는 전승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에페소 전승과 동정 마리아의 집 유적의 진위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반면, 에페소에 세계 최초로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마리아 성당이 세워졌다는 점을 근거로 에페소 선종설을 지지하는 입장도 있다.
가톨릭 교회는 과학적으로 인정할 만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에페소의 돌집이 실제로 동정 마리아의 집인지에 대해 공식적인 선언을 한 적은 없다. 그러나 1896년 교황 레오 13세가 이곳 순례를 처음으로 축복한 이후, 동정 마리아의 집에 대해 점차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왔다.[20] 교황 비오 12세는 1950년 성모 승천 교리를 선포한 이듬해인 1951년, 이곳을 성지의 지위로 격상시켰다. 이후 교황 요한 23세는 이 성지의 지위와 특권을 영구적인 것으로 확립하였다.[20]
오늘날 동정 마리아의 집은 그리스도교인뿐만 아니라 무슬림에게도 중요한 순례지로 여겨지며 많은 이들이 방문하고 있다.[20] 순례자들은 집 아래에 있는 샘물을 마시기도 하는데, 이 물에 치유의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매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는 이곳에서 기념 전례가 거행된다.
6. 1. 교황들의 방문
로마 가톨릭 교회는 과학적으로 인정할 만한 증거 부족을 이유로 동정 마리아의 집에 대한 진위 여부를 공식적으로 확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896년 교황 레오 13세가 첫 순례를 축복한 이후, 이곳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왔다.[20]역대 교황들은 동정 마리아의 집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며 이곳을 방문하거나 관련 조치를 취했다.
- 교황 레오 13세: 1896년 동정 마리아의 집 순례를 처음으로 축복했다.[20] 또한, 예루살렘에 있는 성모 안식 교회(마리아의 무덤)에 부여되었던 전대사를 철폐하고, 대신 에페소의 동정 마리아의 집 순례자들에게 전대사를 부여했다.[17][30] 이는 동정 마리아의 에페소 선종 전승에 힘을 실어주는 조치로 평가된다.
- 교황 비오 12세: 1950년 성모 승천을 가톨릭 교회의 믿을 교리로 선포한 후, 1951년에 동정 마리아의 집을 성지의 지위로 격상시켰다.[20]
- 교황 요한 23세: 1961년, 레오 13세의 조치를 재확인하며 예루살렘 성모 안식 교회의 전대사를 철폐하고, 에페소 동정 마리아의 집에 부여된 전대사를 영구적인 특권으로 만들었다.[17][30]
- 교황 바오로 6세: 1967년 7월 26일 이곳을 방문하여 성지로서의 중요성을 비공식적으로 확인시켜 주었다.[21][30]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979년 11월 30일에 이곳을 방문했다.[21][30]
- 교황 베네딕토 16세: 2006년 11월 29일, 터키 사목 방문 일정 중 에페소를 찾아 동정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고 미사를 집전했다.[21]

이러한 교황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방문은 동정 마리아의 집이 가톨릭 교회 내에서 중요한 순례지로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다. 이곳은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무슬림에게도 존경받는 장소가 되었으며,[20] 매년 8월 15일에는 성모 승천 대축일을 기념하는 전례가 열린다.
6. 2. 전대사 부여와 철회
현재 동정 마리아가 선종한 장소에 대해 에페소 선종 전승과 예루살렘 선종 전승(마리아의 무덤 참조)이 우위를 다투고 있다. 1896년 교황 레오 13세와 1961년 교황 요한 23세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모 마리아 선종 장소로 전해지는 성당(마리아의 무덤)에 대한 전대사 부여를 철회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대신 에페소에 있는 동정 마리아의 집에 순례 성지로서의 권리를 부여하였다.[30] 교황 비오 12세는 1950년 성모 승천 교리를 정의한 후 1951년에 이 집을 성지의 지위로 격상시켰고, 이는 이후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영구적인 특권으로 만들어졌다.7. 한국의 관점
한국 가톨릭 교회는 교황청이 동정 마리아의 집을 공식적인 성지로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이곳을 찾는 신자들의 신심을 존중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공식적인 순례지로 지정하거나 방문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지는 않으나, 개인적인 차원이나 성지 순례 단체를 통한 방문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튀르키예 지역을 포함하는 성지 순례 프로그램에 동정 마리아의 집이 포함되는 경우가 많아, 이곳을 찾는 한국인 순례자들의 발길은 계속 이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이는 한국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깊은 신심과 성지 순례 문화가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정 마리아의 집은 종교적인 의미를 넘어, 한국 사회가 다양한 문화와 종교 유적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에도 간접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또한, 이곳을 방문하는 경험은 한국 신자들에게 영적인 위안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중요한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참조
[1]
서적
Frommer's Turkey
2010
[2]
간행물
The Catholic Encyclopedia
http://www.newadvent[...]
Robert Appleton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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