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디르크 볼렌호븐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디르크 볼렌호벤은 네덜란드 개혁 철학자이자 철학사 연구가로, 특히 '문제사적 방법'을 제시하며 철학사 연구에 독창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그는 암스테르담 자유 대학교에서 신학, 문학, 철학을 공부하고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칼뱅주의 개혁 교회 목사로 활동하면서 개혁 철학을 발전시켰다. 볼렌호벤은 헤르만 도예베르트와 함께 개혁 철학을 발전시켰으며, 그의 철학은 북아메리카, 남아프리카, 그리고 한국 기독교 철학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영혼 불멸설에 대한 비판과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논쟁으로 신학적 논란을 겪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네덜란드의 저술가 - 아브라함 카이퍼
    아브라함 카이퍼는 신칼뱅주의를 주창하고 영역 주권 사상을 발전시킨 네덜란드의 신학자이자 정치인, 언론인으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를 설립하고 네덜란드 총리를 역임했으며, 기독교적 가치관에 기초한 사회 보수주의를 주창하며 네덜란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네덜란드의 저술가 - 빌럼 드레이스
    빌럼 드레이스는 네덜란드의 정치인으로, 사회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하며 하원 의원, 총리를 역임했고 탈식민지화, 경제 재건, 복지 국가 설립에 기여했다.
  • 네덜란드의 철학자 - 바뤼흐 스피노자
    바뤼흐 스피노자는 네덜란드의 철학자로, 일원론적 범신론, 코나투스 개념, 심신평행론을 특징으로 하는 철학을 펼쳤으며 《에티카》, 《신학정치론》 등의 저서를 통해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네덜란드의 철학자 - 후고 그로티우스
    후고 그로티우스는 국제법의 아버지로 불리며, 자연법에 기초한 국제법을 주창하고 《전쟁과 평화의 법》 등의 저서를 통해 전쟁의 정당한 이유와 바다의 자유로운 이용을 주장했다.
  • 암스테르담 자유 대학교 동문 - 크리스 판 베인
    크리스 판 베인은 네덜란드의 정치인, 공무원, 기업인으로서, 데 용 내각에서 내무부 차관, 비스호이벨 내각에서 교육과학부 및 고등 교육 과학 정책 장관을 역임하며 교육 시스템 현대화에 기여했고, 정계 은퇴 후에는 산업 고용주 협회 회장과 국무원 비상 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경제계 및 국가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했다.
  • 암스테르담 자유 대학교 동문 - 신국원
    신국원은 총신대학교 신학과 철학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삼일교회 협동목사,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이사장으로 활동하는 대한민국의 철학자이자 신학자, 목사이다.
디르크 볼렌호븐
기본 정보
디르크 헨드릭 테오도어 볼렌호번
디르크 헨드릭 테오도어 볼렌호번
이름디르크 헨드릭 테오도어 볼렌호번
원어 이름Dirk Hendrik Theodoor Vollenhoven
출생1892년 11월 1일
출생지암스테르담
사망1978년 6월 20일 (85세)
사망지암스테르담
국적네덜란드
학문 분야
분야철학, 신학
사상개혁주의 철학
영향헤르만 바빙크
헤르만 도예베르트
경력
직업교수
고용 기관자유 대학교

2. 생애와 초기 작품

볼렌호븐은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나 암스테르담 자유 대학교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칼뱅주의 개혁 교회 목사로 활동하면서 철학 연구도 병행했다. 1926년 자유 대학교 철학 교수로 임명되어 1963년 은퇴할 때까지 철학사, 일반 체계적 철학, 논리학, 이론 심리학 등 다양한 철학 강좌를 가르쳤다.[1] 그는 명확하고 통찰력 있는 분석적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는다. 1923년 과로로 정신적 붕괴를 겪었으나, 회복 후 활동을 재개했다.[2]

2. 1. 출생과 가족

디르크 볼렌호븐은 암스테르담에서 디르크 헨드릭 볼렌호븐과 카다리나 푸이지스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는 암스테르담 통신사에서 일했다.[1]

1918년 10월 10일, 헤르미나 마리아 도위에워드(1892-1973)와 결혼하여 두 딸과 세 아들을 두었다.[1]

2. 2. 학문적 여정

암스테르담 자유 대학교에서 헤르만 바빙크, 빌헬름 헤이싱크(W. Geesink), 얀 볼터 교수를 만나 이들을 통해 고전 언어부터 유신론적 실재론까지 학문적 수양을 쌓았고, 이는 탄탄한 기반이 되었다.[21] 1911년, 암스테르담 자유 대학교 신학부와 문학철학부에 등록했으며, 1918년 철학 박사 학위를 (우등으로) 취득했다.[1]

박사 학위 취득 1년 전, 아버지와 지도 교수인 얀 볼터르가 사망했다. 이후 G.H.J.W.J. Geesink가 "유신론적 관점에서 본 수학 철학"이라는 제목으로 논문 완성을 감독했다.[2] 볼렌호벤이 "가장 영향력 있는 형식주의자이자 공산주의적 실용주의자"라고 비판적으로 묘사한 암스테르담의 수학자 게리트 마노리는 볼렌호벤의 논문에 대해 "어느 누구도 전에 개척하지 않은" 길을 갔고, "신학자로서도, 수학자로서도 아닌, 자신의 믿음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생각을 경멸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호평했다.[3]

1920년, 펠릭스 크루거 아래에서 심리학을 5개월 동안 라이프치히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장학금과 휴가를 받았다. 1920년대 초, 신칸트주의는 네덜란드에서 지배적인 학파였다. 철학에서 볼렌호벤은 생각과 존재의 화해를 추구했으며, 이를 유신론적으로 중재하고 존재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1922년 중반경, 앎(그리고 생각)은 존재의 일부라는 급진적인 변화를 겪었다. 반대로 신칸트주의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인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이를 정당화했다. 다시 말해, 볼렌호벤은 그 시대의 주류에 거슬러 나아갔다.[1]

2. 3. 목회 활동

암스테르담 자유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칼뱅주의 개혁 교회 목사가 되어 1918년부터 1921년까지 오스트카펠레에서, 1921년부터 1926년까지 헤이그에서 목회 활동을 했다.[1] 목사로서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면서도 철학 연구를 병행했으며,[2] 1920년에는 펠릭스 크루거에게 심리학을 배우기 위해 5개월 동안 라이프치히에서 연구하기도 했다. 1923년 1월에는 과로로 인해 정신적 붕괴를 겪기도 했지만,[3] 회복 후 다시 목회 활동과 철학 연구를 이어갔다.

2. 4. 결혼과 자녀

1918년 10월 10일, 볼렌호븐은 헤르미나 마리아 도위에베르트(1892-1973)와 결혼했다.[1] 슬하에 두 딸과 세 아들을 두었다.[18][19]

3. 개혁 철학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향을 받은 볼렌호븐은 헤르만 바빙크암스테르담 자유 대학교 교수들과의 만남을 통해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이들의 전통을 발전시켜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함을 강조했으며, 특히 철학에서는 성경 중심적 철학을 추구했다.[21]

볼렌호븐은 명확함과 깊은 통찰력을 겸비한 분석적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독실하고 겸손하며 상냥하고 맡은 일에 헌신적인 인물이었다. 1926년부터 1954년까지 자유 대학교 문학철학부에서 철학사, 일반 체계적 철학, 논리학, 이론 심리학 등 모든 철학 강좌와 철학 입문을 가르쳤다.

펠릭스 크루거에게 심리학을 배우고, 신칸트주의에 맞서 생각과 존재의 화해를 추구했다. 1923년 정신적 붕괴를 겪기도 했지만, 회복 후 헤르만 도위에베르트와 함께 개혁철학을 발전시키는 데 힘썼다.

교수로서 볼렌호븐은 엄격하면서도 탐구적이었고, 학생들에게는 온화하고 공감적인 태도로 인기를 얻었다. 1929년 대학교 동문회 회장, 1930년 학생 단체 명예 회원이 되었으며, 칼뱅주의 학생 운동(CSB)에 조언과 강연을 제공했다. 클라스 스킬더와 긴밀히 교류했으나, 1944년 네덜란드 개혁 교회 분열을 안타깝게 여겼다.

1930년 ''Isagôgè Philosophiae''를 통해 개혁 철학을 요약했고,[6] 1932-1933년 대학교 부총장 임기 동안 "기독교적 논리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논리의 "중립성"을 비판했다.[7] 1933년 ''칼뱅주의와 철학의 개혁''을 출판하여 자신의 프로그램을 명확히 했으나, H. H. 카이퍼 등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8]

1935년 "칼뱅주의 철학 협회"를 설립하고 학술지 ''Philosophia Reformata'' 등을 발간했다. 그는 창립 회의에서 철학보다 하나님의 말씀과의 유대가 중요하며, 그리스도를 통해 살기를 갈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4]

1938년 영혼 불멸설과 기독론 관련 논쟁으로 개혁 신앙 고백에서 벗어났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중단되었다. 볼렌호븐은 자신의 표현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수정하겠다고 약속했으며, "비인격적 인간 본성"이라는 표현이 이단으로 간주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15]

3. 1.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향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향으로 칼뱅주의적 개혁주의자가 된 볼렌호븐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이 개인적인 삶, 사회생활, 학문 영역 모두에 영향을 준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먼저 카이퍼가 제시한 기독교 세계관이 차지하는 역사적 위치와 학문적 가치를 검토하고 재발견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개혁주의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는 생활체계와 문화의 영역까지도 인간과의 관계에 기초하여 성경적 비전을 제시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20]

3. 2. 법이념 철학사상 (Philosophy of the cosmonomic Idea)

볼렌호벤은 자신의 주저 『칼빈주의와 철학의 개혁』(Het calvinisme en de reformatie van de wijsbegeerte)에서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기반한 중세 철학을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인간이 주체가 되어 세계를 객체로 파악하려 한 데카르트의 철학적 입장도 거부한다. 볼렌호벤은 서양 철학의 전통적인 흐름과도, 현대 철학의 주류를 만들어낸 뿌리와도 다른 차원의 철학을 제시한다. 그는 우주를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의 법이 실제로 존재하며 우주 전체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인간과 우주가 그의 법에 종속된다고 보았다.[22]

볼렌호벤은 존재론에서 하나님, 코스모스, 인간을 모두 포괄하는 존재 개념에 반대했다. 그는 삼위일체는 ''존재''하며, 코스모스를 위한 법칙은 ''유지''되고, 창조된 코스모스는 하나님에 의해 전적으로 ''지속''된다는 구분을 제시했다. 코스모스와 관련하여, 생물이 기능하는 서로 다른 기본 측면("법칙 영역")이 구분되며, 이 중 15개가 명시되었다. 인간에 관해서는, 외부적으로는 그 기능이 "전반적으로 구조화"되어 있고, 내부적으로는 삶의 근원이 되는 방향 결정적 영혼 또는 마음이 있다고 보았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창조된 현실의 경계, 한계를 형성하는 법은 세 가지 구체적인 내용을 포함한다. (i) "각 왕국의 기원, 구조(그 법 영역의 양태적 다양성을 내포), 내부 개발"과 관련된 ''창조 명령''("빛이 있으라…"는 창세기 1장의 구절); (ii) "하나님과 동료 인간과의 관계에서 인간 삶의 [도덕적] 방향"에 관한 ''사랑 명령''; (iii) 사회의 목적, 역사적 단계, 지리적 위치에 비추어 규제가 필요한 "사랑 명령과 구체적인 상황을 연결"하는 ''실정법''이다.[9]

볼렌호벤은 "앎은 존재의 일부"이기 때문에, 지식 이론은 존재론을 전제로 하며, 따라서 분석은 창조된 현실에서 시작하여 그 존재가 법에 묶여 있음을 존중해야 한다고 보았다. 반면에 신학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리적 결론이 아닌, 계시에 의존한다. 그는 후자의 절차(논리적 결론)는 우리의 인간적 한계를 정의하는 경계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3. 3. 헤르만 도위에베르트와의 협력

볼렌호벤의 매형이자 체스 파트너이며, 과거 학우였던 헤르만 도위에베르트는 철학 분야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볼렌호벤을 방문하여 철학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법을 논의했다. 둘 다 헤이그에 살게 되면서, 그들의 논의는 더욱 심화되었고, 평생 지속되는 철학적 동반자 관계가 발전했다.[4]

볼렌호벤은 분석적 성향을 가진 조직가이자 체계적인 사상가였으며, 상세한 역사적 개관에 능했다. 반면, 음악적 재능을 가진 도위에베르트는 법학을 전공했으며, 거대한 설계를 추구했다. 볼렌호벤은 수학, 자연과학, 생물학, 심리학, 인식론, 신학 문제에 접근한 반면, 도위에베르트는 사회학, 경제학, 법학 지식이 뛰어났다.[4]

1923년 말부터 둘은 "개혁 철학"(그들은 "칼뱅주의 철학"이라고 불렀으며, 현재는 일반적으로 개혁철학이라고 불린다)을 발전시켰다. 1926년 암스테르담의 자유 대학교에 동시에 교수로 임명되었는데, 도위에베르트는 법학부에, 볼렌호벤은 게싱크의 후임으로 문학 및 철학부에 임명되었다.[4]

4. 철학사 연구: 문제사적 방법

볼렌호벤은 철학사를 연구하면서 '문제사적 방법'이라는 독창적인 방법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철학자들이 동시대와 이전 시대의 철학자들과 맺는 관계망 속에서 당대의 문제들을 다루며, 특정 사상 전통이 반복되는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한 선호도를 드러낸다고 보았다.[10]

볼렌호벤은 두 제자 S. U. 주이데마, K. J. 팝마와 함께 철학사 책을 여러 권 출판하려 했다. 1950년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고대 철학 시기를 다룬 ''철학사'' 첫 권이 출간되었으나,[11] 600쪽에 달하는 이 책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여러 철학자들이 이 책의 존재론적 출발점과 문제사적 방법론을 비판했고, 두 번째 권에 대한 연방 기금 지원도 무산되었다.[12] 볼렌호벤은 Oosthoek 백과사전 제4판과 제5판에 철학 논문을 기고하여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13]

4. 1. 문제사적 방법의 특징

볼렌호븐은 철학사에 대해 문제사적 방법론을 발전시키는 데 집중했다. 이 방법론에서 철학자는 동시대인 및 선배들과의 관계망 안에 놓이며, 이는 그의 철학적 입장에 반영된다. 한편으로는 당대의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고 극복하려 하는지에,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사상에서 반복되는 문제를 특정 사상 전통이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한 선호도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나타난다.[10]

당대 문제에 대한 논의는 대개 일관된 스타일로 진행되며, 규범적이거나 당대 논의에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진리 또는 법에 대한 관점에 초점을 맞춘다. 더 넓은 시간적 범주에서 보면, 당대 접근 방식의 뚜렷한 스타일은 역사적으로 뚜렷한 시대를 낳으며, 볼렌호븐은 이를 철학의 "시간 조류"라고 불렀다. (예: 헬레니즘, 신플라톤주의, 쇠퇴하는 중세 시대, 계몽주의 시대, 실증주의, 실존주의, 포스트모더니즘)[10]

반면에, 반복되는 문제에 대한 처리는 존재론에 집중하며, 이는 세계(또는 신들의 세계를 포함할 수 있는 코스모스, 예를 들어 영지주의)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종종 세계의 구조를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인간학에 영향을 미친다. 볼렌호븐은 우주론과 인간학에서 지배적인 존재론이 일원론적 또는 이원론적이며, 각 유형이 다양한 전통적인 "존재론 유형"을 낳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 우선성 이론, 상호작용론, 평행론, 플라톤주의적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상론)[10]

요약하면, 어떤 철학자의 입장이라도 시간 조류와 존재론 유형의 교차점에 위치시킬 수 있으며, 이는 동시에 해당 입장에 관련된 문제에 대한 철학적 개념을 결합하고 특징짓는다. 문제 역사적 방법론의 전반적인 목표는 조류와 유형의 배치를 가시화하여, 헤시오도스부터 마르틴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철학 전체 역사에 걸쳐 사상의 기본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다.[10]

4. 2. 시간 조류와 존재론 유형

볼렌호벤은 철학사에서 반복되는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존재론에 집중하여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세계(또는 영지주의처럼 신들의 세계를 포함하는 코스모스)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종종 세계의 구조를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인간학은 존재론의 영향을 받는다. 볼렌호벤은 우주론과 인간학에서 지배적인 존재론이 일원론적이거나 이원론적이며, 각 유형이 다양한 전통적인 "존재론 유형"을 낳는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우선성 이론, 상호작용론, 평행론, 플라톤주의적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상론 등이 있다.[10]

볼렌호벤은 철학자의 입장을 "시간 조류"와 "존재론 유형"의 교차점에 위치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해당 입장에 관련된 문제에 대한 철학적 개념을 결합하고 특징짓는다. 문제 역사적 방법론의 전반적인 목표는 이러한 조류와 유형의 배치를 가시화하여, 헤시오도스부터 마르틴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철학 전체 역사에 걸쳐 사상의 기본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었다.[10]

4. 3. 『철학사』 출판과 논쟁

볼렌호벤은 문제사적 방법론을 통해 철학사를 연구했다. 그는 철학자가 동시대와 이전 시대의 철학자들과 맺는 관계가 철학적 입장에 영향을 준다고 보았다. 이러한 영향은 당대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과 특정 사상 전통이 반복되는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한 선호도로 나타난다. 당대 문제 논의는 일관된 스타일로 진행되며, 규범적인 특징이나 당대 논의에 적합한 진리 또는 법에 대한 관점에 초점을 맞춘다. 넓은 시간 범주에서 보면, 당대 접근 방식의 뚜렷한 스타일은 역사적으로 뚜렷한 시대를 낳으며, 볼렌호벤은 이를 철학의 "시간 조류"라고 불렀다. (예: 헬레니즘, 신플라톤주의, 쇠퇴하는 중세 시대, 계몽주의 시대, 실증주의, 실존주의, 포스트모더니즘)[10]

반면, 반복되는 문제에 대한 처리는 존재론에 집중한다. 이는 세계(또는 영지주의처럼 신들의 세계를 포함하는 코스모스)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종종 세계의 구조를 반영하는 인간학에 영향을 준다. 볼렌호벤은 우주론과 인간학에서 지배적인 존재론이 일원론적이거나 이원론적이며, 각 유형이 다양한 전통적인 "존재론 유형"을 낳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 우선성 이론, 상호작용론, 평행론, 플라톤주의적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상론)[10]

요약하면, 어떤 철학자의 입장이라도 시간 조류와 존재론 유형의 교차점에 위치시킬 수 있으며, 이는 동시에 해당 입장에 관련된 문제에 대한 철학적 개념을 결합하고 특징짓는다. 문제사적 방법론의 전반적인 목표는 조류와 유형의 배치를 가시화하여, 헤시오도스부터 마르틴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철학 전체 역사에 걸쳐 사상의 기본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다.[10]

볼렌호벤은 그의 두 제자였던 S. U. 주이데마와 K. J. 팝마와 협력하여 다권의 철학사 책을 출판하고자 했다. 1926년에서 1948년 사이에 많은 강의 노트들이 강의 계획서가 되었다. 1950년, ''철학사''의 첫 번째 권이 출간되었으며,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고대 철학 시기를 다루었다.[11] 처음에는 이 책에 대한 반응이 좋았으나, 600페이지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완성 작품으로 남았다. H.J. 포스, 빌렘 야콥 베르데니우스, D. 로에넨, C.J. 드 포겔 등 여러 철학자들이 이 책에 대응했고, 특히 그 존재론적 출발점과 문제 역사적 방법론을 문제 삼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들은 또한 이 프로젝트의 두 번째 권에 대한 연방 기금 지원을 반대하는 데 성공했다.[12] 볼렌호벤은 다른 수단을 모색해야 했는데, Oosthoek 백과사전의 제4판과 제5판에 기고한 철학 논문에서 자신의 문제 역사적 연구 결과를 발표할 수 있었다.[13]

5. 신학적 논쟁

볼렌호벤은 1929년 "심리학의 첫 번째 질문"이라는 강연에서 영혼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면서, 얀 바테링크를 비롯한 심리학자들 사이에서 반대 의견에 부딪혔다.[5] 1930년 ''Isagôgè Philosophiae''를 통해 새로운 "개혁 철학"(볼렌호벤은 "칼뱅주의 철학"이라고 칭함)을 요약하여 많은 관심을 끌었고, 철학에서 뚜렷한 학파를 형성하게 했다.[6] 그는 "기독교적 논리의 필요성"에 대한 부총장 연설을 통해 논리의 "중립성"을 비판했다.[7]

1933년 ''칼뱅주의와 철학의 개혁'' 출판 이후, H. H. 카이퍼, V. 헵 등으로부터 스콜라 철학에 대한 볼렌호벤의 반대 입장에 대한 비판을 받았다.[8] 볼렌호벤은 "우리는 갈등을 추구해서는 안 되며 건설적으로 일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1935년 볼렌호벤은 학술지 ''Philosophia Reformata'' 등을 갖춘 "칼뱅주의 철학 협회"를 설립하고, 창립 회의에서 철학보다 하나님의 말씀과의 유대를 강조하며, 그리스도를 통해 살기를 갈망하는 종교가 중심이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14]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인해 조사가 중단되었지만, 신학부는 스콜라 철학이 위협받는 것을 보고 볼렌호벤의 인기와 영향력 증가를 약화시키려 했고, 신앙 고백에 대한 우려를 그 목적으로 사용했다. 그는 자신의 "오류"를 공개적으로 철회하고 출판된 논문에서 완벽한 설명을 해야 했다. 현재까지 대학교는 볼렌호벤의 잘못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그의 기억을) 면죄하지 않았고 그를 그렇게 대했다.[15]

5. 1. 영혼 불멸설에 대한 비판

볼렌호벤은 1923년 질병 이후 영혼의 불멸에 대한 교리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는 영혼을 불멸의 실체가 아니라 현실의 한 측면(또는 "법칙 영역") 내에서 작용하는 인간의 기능으로서의 심리라고 설명했다. 그는 영혼 자체를 인간의 중심적인 통일성으로 여겼다.[5]

5. 2.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논쟁

1938년 11월 18일, 자유대학교의 큐레이터들은 신학부로부터 볼렌호벤이 개혁 신앙 고백에서 벗어났다는 두 가지 이유로 공식적인 불만을 접수했다.[15]

  • "물질적이고 죽을 수 있는 몸과 비물질적이고 불멸의 영혼이라는 인간 존재의 이원성"을 부인
  • 하나님의 아들이 "비인격적인 인간 본성"을 가졌다는 것을 부인


하나님의 아들이 "인격적인" 인간 본성을 가졌다는 볼렌호벤의 견해는 "네스토리우스를 연상시키는 오류"로 간주되었다.[15] 볼렌호벤은 자신의 표현을 공개적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책의 두 번째 판이 나온다면 수정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스스로 네스토리안적인 성향이 없었다.[15] 또한 "비인격적 인간 본성"이라는 표현이 기독론과 관련하여 교회의 주요 신앙 고백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이것을 부인하는 것을 이단으로 간주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15]

6. 국제적 영향과 유산

디르크 볼렌호벤은 북아메리카와 남아프리카에 추종자를 두었다. 1963년 은퇴 후 헨드릭 판 리센, J. 판 데르 후벤, A.W. 베게만, C.A. 판 페르센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판 리센은 "칼뱅주의 철학 협회"(후에 "개혁주의", "기독교"로 변경)의 회장직도 계승했다. 볼렌호벤은 "플라톤의 현실주의"에 대한 고별사를 한 후, 자신의 문제-역사적 연구 분야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매달 개인 강연을 계속했다.[17] 볼렌호벤은 8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생애 마지막 5년 반 동안은 홀로 지냈다.

6. 1. 북아메리카

디르크 볼렌호벤은 북아메리카와 남아프리카에 추종자를 두었다. 북아메리카에서는 볼렌호벤 밑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은 H.E. 러너가 1967년 토론토에 기독교 연구소를 설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61년 볼렌호벤은 북아메리카에서 수많은 강연을 했다.[16]

6. 2. 남아프리카

헨드릭 G. 스토커와 J.A.L. 탈야르트는 남아프리카에서 디르크 볼렌호벤, 헤르만 도예베르트와 협력하여 학생들이 암스테르담 자유 대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도록 장려했다. 1961년 볼렌호벤은 북아메리카에서 수많은 강연을 했고, 2년 후에는 남아프리카에서 광범위하게 강연했다.[16]

6. 3. 한국의 수용과 영향

시어벨트는 자신의 박사논문 지도교수였던 볼렌호벤의 성경적 열정을 이어갔다. 시어벨트는 전통적인 플라톤주의 미학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을 시도하며, 서구 미학의 주류를 형성한 그리스 고전주의 미학의 한계를 제시했다. 즉, 플라톤주의 미학이 과거에는 예술에 관한 포괄적인 해석의 척도로 필연적이었으나 현재와 미래에는 필연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 것이다.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여러 민족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미학적 견해를 소유할 수밖에 없으므로, 고전주의 미학이 제시하는 아름다움의 개념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남아있다는 것이다.[23]

결국 시어벨트는 플라톤주의 미학에 대한 성찰을 통해 그것이 기독교 세계관을 온전히 반영하기보다는 단순한 철학적 논의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구체적으로 그는 플라톤주의 미학이 예술의 수용자이자 창작 주체인 인간의 ‘죄의 현실성’을 간과했다는 사실을, 예술 영역에서 활동하는 인간의 모습과 본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규명하였다. 시어벨트는 볼렌호벤의 견해에 따라 기독교 전통 안에 있는 것들뿐만 아니라 세계 안에서 사람들이 이제까지 믿어온 것 모두를 진지하게 분석하고 세심하게 조사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진지한 제자였다.[23]

7. 볼렌호벤의 제자 시어벨트

시어벨트는 자신의 박사논문 지도교수였던 볼렌호벤의 성경적 열정을 이어받았다. 시어벨트는 전통적인 플라톤주의 미학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을 시도하며, 서구 미학의 주류를 형성한 그리스 고전주의 미학의 한계를 제시하였다. 즉, 플라톤주의 미학이 과거에는 예술에 관한 포괄적인 해석의 척도로 필연적이었으나, 현재와 미래에는 필연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 것이다.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여러 민족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미학적 견해를 소유할 수밖에 없으므로, 고전주의 미학이 제시하는 아름다움의 개념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남아있다는 것이다.[23]

시어벨트는 플라톤주의 미학에 대한 성찰을 통해, 그것이 기독교 세계관을 온전히 반영하기보다는 단순한 철학적 논의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는 플라톤주의 미학이 예술의 수용자이자 창작 주체인 인간의 ‘죄의 현실성’을 간과했다는 사실을, 예술 영역에서 활동하는 인간의 모습과 본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규명하였다. 시어벨트는 볼렌호벤의 견해에 따라 기독교 전통 안에 있는 것들뿐만 아니라, 세계 안에서 사람들이 이제까지 믿어온 것 모두를 진지하게 분석하고 세심하게 조사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진지한 제자였다.[23]

참조

[1] 서적 D.H.Th. Vollenhoven (1892-1978) Reformator der Wijsbegeerte Ten Have 1992
[2] 서적 De Wijsbegeerte der Wiskunde van Theïstisch Standpunt G. van Soest 1918
[3] 간행물 Review of “De Wijsbegeerte der Wiskunde van Theïstisch Standpunt” De Beweging. Algemeen Maandschrift voor Letteren, Kunst, Wetenschap en Staatkunde 1919-06-15
[4] 서적 De Beteekenis der Wetsidee voor Rechtswetenschap en Rechtsphilosophie Kok 1926-10-15
[4] 서적 Logos en Ratio, beider verhouding in de geschiedenis der Westersche kentheorie Kok 1926-10-26
[5] 서적 Eender en Anders. Correspondentie tussen K. Schilder en D.H.Th. Vollenhoven Kok 1992
[6] 서적 Introduction to Philosophy Dordt College Press 2005
[7] 서적 De Noodzakelijkheid eener Christelijke Logica H.J. Paris 1932
[8] 서적 Het Calvinisme en de Reformatie van de Wijsbegeerte H.J. Paris 1933
[9] 간행물 Plato’s realisme
[9] 서적 Vollenhoven als Wijsgeer. Inleidingen en Teksten Buijten en Schipperheijn 1992
[10] 서적 Schematische Kaarten. Filosofische concepties in probleemhistorisch verband De Zaak Haes 2000
[10] 서적 Wijsgerig Woordenboek De Zaak Haes 2005
[11] 서적 Geschiedenis der Wijsbegeerte I T. Wever 1950
[12] 서적 D.H.Th. Vollenhoven (1892-1978) Reformator der Wijsbegeerte
[13] 서적 Wijsgerig Woordenboek De Zaak Haes 2005
[14] 간행물 Dr. D.H.Th. Vollenhoven Kok 1961
[15] 간행물 Anhypostatos? 1940
[15] 웹사이트 Curators.html http://www.members.s[...]
[16] 서적 Gastcolleges Wijsbegeerte. Erfenis voor het heden De Zaak Haes 2011
[17] 서적 Vollenhoven’s laatste werk, 1970-1975 VU Boekhandel 1982
[18] 서적 D.H.Th. Vollenhoven (1892-1978) Reformator der Wijsbegeerte Ten Have 1992
[19] 간행물 Review of “De Wijsbegeerte der Wiskunde van Theïstisch Standpunt” De Beweging. Algemeen Maandschrift voor Letteren, Kunst, Wetenschap en Staatkunde 1919-06-15
[20] 뉴스 안용준, 카이퍼의 후예, 볼렌호벤을 스승으로 http://www.igoodnews[...]
[21] 뉴스 안용준, 카이퍼의 후예, 볼렌호벤을 스승으로 http://www.igoodnews[...]
[22] 뉴스 안용준, 카이퍼의 후예, 볼렌호벤을 스승으로 http://www.igoodnews[...]
[23] 뉴스 안용준, 카이퍼의 후예, 볼렌호벤을 스승으로 http://www.igoodnews[...]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