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뤼흐 스피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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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뤼흐 스피노자는 1632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난 유대계 상인 출신의 철학자이다. 그는 탈무드 학교에서 유대 철학과 신학을 배우며 랍비가 되기를 기대했으나, 데카르트 등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유대교 교리에 비판적인 입장을 갖게 되었다. 유대교 비판과 신성 모독 혐의로 1656년 파문당한 후, 그는 라틴어 이름인 베네딕투스를 사용하며 독자적인 철학 연구에 몰두했다. 스피노자는 기하학적 방법을 철학에 적용하여 일원론적 범신론을 주장했으며, 그의 사상은 독일 관념론과 계몽주의, 사회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주요 저서로는 《지성 개선론》, 《신학 정치론》, 《윤리학》, 《정치론》 등이 있으며, 1677년 4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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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뤼흐 스피노자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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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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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바뤼흐 에스피노사 |
다른 이름 |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
출생 | 1632년 11월 24일 |
출생지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
사망 | 1677년 2월 21일 (44세) |
사망지 | 네덜란드 헤이그 |
서명 | Spinoza's signature (1664).svg |
학문 분야 | |
지역 | 서양 철학 |
시대 | 17세기 철학 계몽 시대 |
학파/전통 | 데카르트주의 개념주의 대응 이론 직접 실재론 기초주의 (헤겔에 따르면) 합리주의 심리적 이기주의 |
주요 관심사 | 인식론 윤리학 히브리어 성경 형이상학 |
교육 | |
교육 기관 | 탈무드 토라 레이던 대학교 (학위 없음) |
사상과 영향 | |
주요 사상 | 만유내재신론 범신론 결정론 중립 일원론 심신 평행설 지성과 신앙의 자유 정교 분리 원칙 히브리어 성경 (특히 모세 오경)에 대한 비판 국가와 권력 사회 계약 정동 (affect) 능산적 자연/소산적 자연 |
영향을 준 인물 | 르네 데카르트 스토아 학파 모세 벤-마이몬 아브라함 이븐 에즈라 이븐 시나 이븐 루시드 아리스토텔레스 데모크리토스 루크레티우스 에피쿠로스 니콜로 마키아벨리 토마스 홉스 조르다노 브루노 프랜시스 베이컨 프란시스쿠스 판 덴 엔덴 |
영향을 받은 인물 |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이마누엘 칸트 장자크 루소 아르네 네스 카를 마르크스 가브리엘 바그너 도널드 데이비슨 질 들뢰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조지 엘리엇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노발리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프리드리히 니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 루이 알튀세르 마이클 하트 안토니오 네그리 조지 산타야나 프리드리히 셸링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레오 스트라우스 레셰크 코와코프스키 |
주요 저서 | |
스피노자의 사상 | |
특징 | 스피노자주의 (Spinozism) 창시자 |
2. 생애
1632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유대계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포르투갈에서 종교 재판과 유대인 탄압을 피해 망명해 온 세파르딤(Sephardim)이었다.[110] 어린 시절부터 학문적 재능을 보였으나, 1654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업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상인으로서의 이익보다 삶의 목적에 헌신하는 것이 더 큰 이익이라고 생각하여 상인 일을 그만두었다.
스피노자는 전통적인 유대교 신앙에 만족하지 않고, 데카르트 등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사상을 갖게 되었다. 그는 신(神)을 자연의 작용·존재 전체와 동일시하는 입장에서 당시 유대교의 신앙 방식과 성전(聖典)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로 인해 1656년 7월 27일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헤렘(herem, 파문·추방)을 당했다.[111] 광신적인 유대인들에게 암살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파문 이후, 스피노자는 유대식 이름인 '바뤼흐'를 '베네딕트'로 바꾸었다.[112]
1660년 라인스부르크에서 <지성 개선론>을 저술, <데카르트 철학의 여러 원리>를 출판하였다. 1663년 포르부르크에서 얀 드 비트와 교류하였다. 1670년 <신학 정치론>을 익명으로 출판하였으나 유대 사회의 심각한 비난을 받았다. 그해 헤이그에 정착, 1677년 <윤리학>를 완성하였으나, 생전에 출판하지 못하였다.
1654년에서 1657년 사이, 프란시스쿠스 반 덴 엔덴 (Franciscus van den Enden)에게서 라틴어를 배웠다. 1658년경 라이덴 대학교(Leiden University)에서 데카르트 철학 수업을 청강했다. 1660년에서 1661년 사이, 라이덴스부르크(Rijnsburg)로 이주했다. 1663년, 보르부르흐(Voorburg)로 이주, 1665년, 『신학정치론(Theological-Political Treatise)』을 쓰기 시작했다. 1670년, 헤이그로 이주했다. 1676년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가 스피노자를 방문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렌즈 연마로 생계를 유지하며 철학 연구를 지속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교수직 제안을 받았으나, 사색의 자유가 위협받을 것을 우려하여 거절했다. 처절한 고독과 빈곤 속에서 폐병(폐결핵이나 규폐증 등의 설이 있다)을 앓다가 1677년 2월 21일 44세의 나이로 헤이그에서 사망했다.[82] 유골은 폐기되었고 무덤은 사라졌다.[82]
2. 1. 유년 시절과 가족 배경
1632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유대계 상인인 아버지 미겔 지 이스피노자와 어머니 아나 데보라 이스피노자 사이에서 태어났다.[110] 부모는 포르투갈에서 가톨릭 교회의 종교 재판과 유대인 탄압을 피해 망명한 세파르딤(Sephardim)이었다. 부모는 유대 전통에 따라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회의 출생 기록부에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라는 이름으로 그를 올렸으나, 이후 스피노자 자신은 라틴어 이름 베네딕투스를 즐겨 썼다. 그의 친할머니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했다.[110]스피노자의 조상들은 은밀 유대교 신봉자들이었으며, 포르투갈 종교재판 당시 박해를 받아 고문과 공개적인 굴욕을 겪었다. 1597년 그의 외할아버지 가족은 비디게이라를 떠나 낭트로 이주하여 외견상 신기독교인으로 살았으며, 알 수 없는 이유로 결국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그의 외가 쪽 조상들은 포르투의 유력한 상업 가문이었으며, 그의 외할아버지는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를 오가던 유명한 상인이었다. 스피노자는 여섯 살부터 아홉 살까지 할머니에게 길러졌으며, 아마도 할머니에게서 가족 역사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다.
스피노자의 아버지 미카엘은 암스테르담에서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사업을 펼친 저명하고 부유한 상인이었다. 1649년 그는 최근 통합된 회중 탈무드 토라의 행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그의 삼촌 아브라함 데스피노사의 딸이자 역시 지역 지도자이자 미카엘의 사업 파트너였던 사촌 라헬 데스피노사와 결혼했다. 당시 포르투갈 유대인 공동체에서는 사촌 간의 결혼이 흔했는데, 이를 통해 미카엘은 장인의 상업 네트워크와 자본을 이용할 수 있었다. 라헬의 아이들은 유아기에 사망했고, 그녀는 1627년에 사망했다.
라헬의 사망 후, 미카엘은 한나 데보라와 재혼하여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의 두 번째 부인은 결혼 지참금을 가져왔지만, 이는 그녀의 자녀를 위해 따로 마련되지 않고 미카엘의 사업 자본에 흡수되었는데, 이는 스피노자와 그의 아버지 사이에 불화를 야기했을 수 있다. 그 가족은 암스텔 강 남쪽의 인공 섬인 플루이엔부르크에 있는 하우트그라흐트 운하를 따라 다섯 번째 집에 살았다. 유대인 거주지는 공식적으로 구분되지 않았다. 그들은 벳 야아코브 회당 근처에 살았고, 근처에는 화가 렘브란트를 포함한 기독교인들도 살았다. 미리암이 첫째 아이였고, 그 뒤를 이어 가족과 상업 기업의 책임자를 맡을 것으로 예상되었던 이삭이 있었으나 그는 1649년에 사망했다. 세 번째 아이인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Espinosa)는 1632년 11월 24일에 태어났으며, 전통에 따라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스피노자의 남동생 가브리엘은 1634년에 태어났고, 그 뒤를 이어 여동생 레베카가 태어났다. 미리암은 사뮤엘 드 카세레스와 결혼했지만 출산 직후 사망했다. 유대인 관습에 따라 사뮤엘은 전처의 여동생 레베카와 결혼해야 했다. 형의 죽음 이후, 스피노자는 가족과 사업의 책임자의 위치를 맡게 되면서 학문적 야망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스피노자의 어머니 한나 데보라는 스피노자가 여섯 살 때 사망했다. 미카엘의 세 번째 부인 에스더는 스피노자가 아홉 살 때부터 그를 키웠는데, 신기독교인으로 자라면서 정식 유대교 교육을 받지 못했고 집에서는 포르투갈어만 사용했다. 그들의 결혼은 자녀가 없었다. 스피노자의 여동생 레베카, 남동생 가브리엘, 그리고 조카는 결국 쿠라카오로 이주했고, 스피노자의 사망 후 나머지 가족도 그곳으로 합류했다.
스피노자는 어머니를 통해 철학자 우리엘 다 코스타(Uriel da Costa)와 친척 관계였는데, 그는 암스테르담 포르투갈계 유대인 공동체에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다 코스타는 전통적인 기독교와 유대교 신앙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 기원이 신의 계시가 아닌 인간의 발명에 근거한다고 주장했다. 종교 지도자들과의 충돌은 랍비 당국으로부터 두 차례의 파문으로 이어졌고, 그는 굴욕과 사회적 배제를 당했다. 1639년, 재입교 합의의 일환으로 다 코스타는 예배자들이 자신을 밟고 지나가도록 엎드려야 했다. 그는 1640년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어린 시절 스피노자는 우리엘 다 코스타와의 가족적 연관성을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십 대 시절에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스티븐 네들러(Steven Nadler)는 다 코스타가 스피노자가 여덟 살 때 죽었지만, 그의 사상이 스피노자의 지적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한다.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공동체는 오랫동안 조직화된 종교에 대한 다 코스타의 회의론, 영혼 불멸성의 부정, 모세가 토라를 쓰지 않았다는 생각을 기억하고 논의했으며, 이는 스피노자의 지적 여정에 영향을 미쳤다.

2. 2. 유대 공동체와의 갈등 및 파문
1656년 7월 27일, 암스테르담 탈무드 토라 공동체 지도자들은 23세의 스피노자에 대해 ''헤렘''을 선포했다.[111][60] 이는 공동체에서 내릴 수 있는 가장 가혹한 처벌이었다.[61] 스피노자를 파문한 정확한 이유는 명시되지 않았고, "가증스러운 이단"과 "괴이한 행위"등만 언급되었다.[62]스피노자는 유대 공동체인 시나고그에서 전통적인 유대식 교육을 받았고, 랍비가 될 것이라고 촉망받았으나, 데카르트 등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1651년경부터 독자적인 사상을 갖게 되면서 유대교를 비판하고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가혹한 탄압을 받고 추방되었다. 파문 선고문은 다음과 같다.
"천사들의 결의와 성인의 판결에 따라 스피노자를 저주하고 제명하여 영원히 추방한다. 잠잘 때나 깨어있을 때나 저주받으라. 나갈 때도 들어올 때에도 저주받을 것이다. 주께서는 그를 용서 마옵시고 분노가 이자를 향해 불타게 하소서! 어느 누구도 그와 교제하지 말 것이며 그와 한 지붕에서 살아서도 안 되며 그의 가까이에 가서도 안 되고 그가 쓴 책을 봐서도 안 된다"[111]
이 사건을 계기로 스피노자는 유대식 이름인 '바뤼흐'를 '베네딕트'로 바꾸게 된다.[112]

암스테르담은 종교적 다양성을 관용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유대인 공동체는 자체 명성을 보호하고자 했다. 스피노자의 논쟁적인 견해가 박해나 추방의 근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62] 스피노자는 1654년 아버지가 사망하기 전까지는 공개적으로 유대교 당국에 반기를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그의 사업과 회당을 둘러싼 종교적, 재정적, 법적 갈등으로 인해 공개적으로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62] 암스테르담 시 당국은 스피노자의 파문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지만, 시 의회는 포르투갈계 유대인 공동체에 그들의 행동을 규제하고 유대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하도록 명령했다.[62]
파문 전, 스피노자는 아무것도 출판하거나 논문을 쓰지 않았다. 스티븐 나들러(Steven Nadler)는 스피노자가 '''윤리학'''의 제1부에 나타나는 유대교에 대한 비판을 표명했다면, 그가 가혹한 처벌을 받은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62] 암스테르담 회중이 내린 대부분의 파문과 달리, 이 파문은 회개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취소되지 않았다. 파문 후, 스피노자는 자신의 견해를 옹호하는 스페인어로 된 변명서(Apologia)를 썼을 수도 있지만, 현재는 사라졌다.
스피노자의 파문은 그를 기독교로 개종시키거나 고백적 종교나 종파에 속하게 하지는 않았다.[62] 1656년부터 1661년까지 스피노자는 암스테르담과 라이덴 등지에서 거처를 마련하고, 렌즈 연마와 현미경 및 망원경 제작을 배우면서 가르침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스피노자는 유대인 정체성을 유지하지 않았다. 그는 유대 율법을 준수하지 않고서는 유대인들이 지속 가능한 차이점과 정체성의 원천을 잃게 되어 세속적 유대인이라는 개념이 모순이 된다고 주장했다.
현대에 이르러 이스라엘 정치인, 랍비, 유대 언론 사이에서 스피노자의 파문에 대한 논쟁이 재점화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헤렘'(חרם)의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60] 그러나 파문을 선고한 회중만이 이를 철회할 수 있으며, 그 공동체의 수석 랍비인 핀카스 톨레다노(Pinchas Toledano)는 스피노자의 "우리 종교의 근본을 찢어놓은 터무니없는 사상"을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60] 2015년 12월, 암스테르담 유대인 공동체는 '헤렘' 철회를 논의하기 위한 심포지엄을 조직했지만, 회중의 랍비는 자신의 지혜가 선임자들보다 뛰어나지 않고, 시간이 지나도 스피노자의 견해가 덜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근거로 헤렘을 유지해야 한다고 판결했다.[60]
2. 3. 철학 연구와 저술 활동
스피노자는 유대 공동체에서 전통적인 유대식 교육을 받았고 랍비가 될 것으로 촉망받았으나, 라틴어를 배우고 그리스 철학 및 아랍 철학을 접하면서 유대교 교리에 만족하지 않게 되었다. 이후 르네상스, 데카르트 등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1651년경부터 독자적인 사상을 갖게 되었고, 유대교 비판과 신을 모독했다는 구실로 가혹한 탄압을 받고 추방되었다. 1656년경에는 다음과 같은 저주의 파문 선고를 받았다.[111]"천사들의 결의와 성인의 판결에 따라 스피노자를 저주하고 제명하여 영원히 추방한다. 잠잘 때나 깨어있을 때나 저주받으라. 나갈 때도 들어올 때에도 저주받을 것이다. 주께서는 그를 용서 마옵시고 분노가 이자를 향해 불타게 하소서! 어느 누구도 그와 교제하지 말 것이며 그와 한 지붕에서 살아서도 안 되며 그의 가까이에 가서도 안 되고 그가 쓴 책을 봐서도 안 된다"
이를 계기로 그는 유대식 이름인 '바뤼흐'를 아예 '베네딕트'로 바꾸게 된다.[112] 이후 스피노자는 운명에 굴하지 않고 더 치열하게 어떤 명예와 부, 권위까지도 물리치면서 오로지 철학적 진리를 구현하는 길로 나섰다.
1660년 라인스부르크에서 <지성 개선론>을 저술, <데카르트 철학의 여러 원리>를 출판하였다. 1663년 포르부르크에서 네덜란드 공화국의 정치적 지도자 얀 드 비트와 사귀었다.
1670년 <신학 정치론>을 익명으로 출판하였다가 유대 사회의 심각한 비난을 받았다. 도처를 돌아다니며 살던 그는 그해 헤이그에 정착하여, 1677년 필생의 저작인 <윤리학>를 완성하였으나, <신학 정치론>에 대한 유대 및 가톨릭 사회의 악평 때문에 생전에 출판하지 못하였다. 이 책은 기하학의 논증법을 응용하여 윤리학을 정리, 공리계(係) 등으로 체계 지은 것이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안경 렌즈를 연마(硏磨)하는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가운데서도, 당시 독일 최고의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부터 초빙을 받았으나 자유로운 철학 활동을 보장하지 않는 곳에서는 재직할 이유가 없다면서 이를 단호히 거부하는 등 철학자로서 교훈이 되는 숱한 일화를 남겼다. 그는 처절한 고독과 빈곤 속에서 44세를 일기로 일찍 숨을 거두었다.
1654년에서 1657년 사이 어느 시점에 스피노자는 정치적 급진주의자이자 전 예수회 신부이자 무신론자인 프란시스쿠스 반 덴 엔덴 (Franciscus van den Enden)에게서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반 덴 엔덴은 스피노자의 철학에 큰 영향을 미친 데카르트를 포함한 스콜라 철학과 근대 철학을 스피노자에게 소개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많은 친구들은 세속화된 자유사상가들이거나 기존 교회의 권위와 전통적인 교리를 거부한 반체제 기독교 집단에 속해 있었다. 스피노자는 콜레지안트(Collegiants) 회원들과 친분이 있었다.
반 덴 엔덴에게서 라틴어를 배우고 나서 스피노자는 1658년경 라이덴 대학교(Leiden University)에서 데카르트 철학 수업을 청강했다. 1656년부터 1661년까지 스피노자의 주요 토론 상대이자 그의 주변을 형성하고 스피노자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은 반 덴 엔덴, 야리히 옐레스, 로데위크 마이어(Lodewijk Meyer), 요하네스 보우메스터(Johannes Bouwmeester), 아드리아안 쿠어바흐(Adriaan Koerbagh)였다.
1660년에서 1661년 사이에 스피노자는 암스테르담에서 라이덴스부르크(Rijnsburg)로 이주하여 조용한 시골 생활을 영위하고, 여전히 많은 친구들이 있는 대학 도시 라이덴(Leiden)과의 접근성을 유지했다. 이 무렵 그는 『신, 인간, 그리고 그의 행복에 관한 단편 논문』(Short Treatise on God, Man, and His Well-Being)을 저술했지만, 신학자들과 종교 의회, 그리고 시 당국을 분노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생전에는 출판하지 않았다.
1663년, 스피노자는 보르부르흐(Voorburg)로 이주했다. 그는 계속해서 『윤리학』을 집필했고 유럽 전역의 과학자들과 철학자들과 서신을 교환했다. 1665년, 그는 성경 해석, 국가의 기원, 정치적·종교적 권위의 한계와 같은 신학적·정치적 문제들을 다루는 『신학정치론(Theological-Political Treatise)』을 쓰기 시작했으며, 세속적이고 민주적인 국가를 옹호했다.

1670년, 스피노자는 도시의 지적 삶에 더 쉽게 접근하고 친구들과 추종자들에게 더 가까이 있기 위해 헤이그로 이주했다.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스피노자는 방문객을 맞이하고 편지를 답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윤리학'' 원고로 돌아가 3부를 4부와 5부로 재작업했고, 성경의 올바른 해석과 성경 연구 시 발생하는 혼란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히브리어 문법을 저술했다. 1부에서는 어원, 알파벳, 명사, 동사 등을 지배하는 원리를 제시했다. 1676년의 또 다른 미완성 작품은 국가가 어떻게 잘 기능할 수 있는지에 관한 ''정치론''(Tractatus Politicus)으로, 민주주의 국가가 가장 좋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스피노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University of Heidelberg) 철학 교수직 제안을 거절했다.
스피노자의 서한은 몇 편 남아 있지 않으며, 1661년 이전의 서한은 없다.
렌즈 연마, 수학, 광학, 철학 분야에서의 활동을 통해 스피노자는 과학자 크리스티안 호이헨스, 수학자 요하네스 후데, 영국 왕립 학회 서기관 헨리 올덴부르크와 같은 저명한 인물들과 교류했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공개적으로 스피노자의 저술을 부정적으로 평가했지만, 비밀리에 그에게 편지를 쓰고 ''윤리학'' 원고를 검토하고 싶어했다. 1676년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를 만나기 위해 헤이그를 방문하여 사흘 동안 그와 함께 머물며 시사와 철학에 대해 이야기했다.
스피노자는 생전에 거의 출판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공식적인 저술은 라틴어로 되어 있어 독자의 수가 적었다. ''데카르트 철학 원리''와 ''신학 정치 논고''를 제외하고 그의 저작들은 사후에 출판되었다. 익명으로 출판된 그의 저작 ''신학 정치 논고''에 대한 반응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스피노자는 지지자들에게 그의 저작을 번역하지 말라고 말했고, 더 이상 출판하지 않았다.

'''에티카'''는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 르네 데카르트의 사상과 함께 합리론 사상의 일부로 여겨져 왔다.[7]

라틴어로 쓰인 이 미완성 논문은 스피노자의 정부 형태에 대한 생각을 설명한다. 《윤리학》과 마찬가지로 이 저술은 사후에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라틴어와 네덜란드어로 출판되었다.
2. 4. 말년과 죽음
1673년 라인 궁정 백작 팔츠 선제후 카를 1세 루트비히로부터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교수직에 초빙되었지만, 사색의 자유가 위협받을 것을 우려한 스피노자는 이를 거절했다.[81] 1674년에는 『신학 정치론』이 금서가 되었다. 1675년에 완성한 『윤리학-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증명된 것』의 출판을 포기했는데, 이 책은 15년 동안 집필한 스피노자 사상의 총결산이다(스피노자 사후 친구들에 의해 1677년에 간행되었다).[81] 1676년에는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의 방문을 받았지만, 두 철학자는 서로의 사상을 이해하지는 못했다.폐병(폐결핵이나 규폐증 등의 설이 있다)을 앓았던 스피노자는 1677년 2월 21일, 헤이그 근처 스헤베닝언에서 44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82] 유골은 그 후 폐기되었고 무덤은 사라졌다. 헤이그 이주 후 스피노자는 렌즈 연마로 생계를 유지했다는 전승이 유명하지만, 귀족 친구들로부터 제공받은 연금으로도 충분했다. 여행기를 참조하면 다른 후원자도 있었고, 당시 라이덴 대학교 교수 게링크스와 같은 액수인 500길더의 수입을 얻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자연과학, 특히 광학에 큰 관심이 있었고, 얀 스와메르담이나 크리스티안 호이겐스 등의 과학자들은 스스로 렌즈를 갈아 개량했으며, 후에 암스테르담 시장이 된 요한 후드도 렌즈를 갈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과학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은 렌즈를 가는 것이 당연했으며, 무지개에 대한 논문이나 자연과학을 논하는 서신을 남긴 스피노자의 경우, 생계보다는 탐구를 위해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82]
생전에 출판된 저서는 1663년의 『데카르트 철학 원리』와 익명으로 출판된 1670년의 『신학 정치론』뿐이다. 『지성 개선론』, 『국가론』, 『에티카』 등은 『히브리어 문법 개요』 등과 함께 사후에 유고집으로 출판되었다. 스피노자 자신이 출판을 보류했기 때문이다. 이 저서들은 모두 라틴어로 쓰여 있다. 유고집 중 『신·인간 및 인간의 행복에 관한 단편 논문』은 네덜란드어로 쓰여 있지만, 이는 친구가 라틴어 원문을 네덜란드어로 번역한 것이다 (스피노자는 일상 회화에는 포르투갈어를 사용했고 네덜란드어에는 능숙하지 않았다).
1676년부터 건강이 악화된 스피노자는[6] 1677년 2월 21일 헤이그에서 사망했다. 친구이자 의사였던 게오르크 헤르만 슐러가 그의 곁에 있었다. 스피노자는 결핵과 유리 렌즈를 갈아서 생긴 규폐증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추정되는 폐 질환으로 고통받았을 것이다.[6] 수 주 동안 점점 더 아파왔지만, 그의 죽음은 갑작스러웠고,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 임종 직전 철학적 입장을 후회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18세기에 사라졌다. 루터교 설교자 요하네스 콜레루스는 그의 최후의 날들을 연구하기 위해 스피노자의 첫 번째 전기를 썼다.
사망 당시 그는 결혼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었다.[6] 스피노자는 사후 4일 만에 다른 6명과 함께 헤이그 신교회에 매장되었다. 당시 스피노자를 위한 기념 명판은 없었다. 18세기에 묘가 비워지고 유해는 교회 묘지의 흙에 흩뿌려졌다. 기념 명판은 교회 밖에 있으며, 그의 유해 일부는 교회 묘지의 토양에 포함되어 있다. 스피노자의 친구들은 그의 개인 소지품, 서류 및 미발표 원고를 구출했다. 지지자들은 그의 저술을 억압하려는 사람들로부터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그것들을 가져갔고, 사망 시 재산 목록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망 후 1년 이내에 지지자들은 그의 라틴어 원고를 네덜란드어와 다른 언어로 번역했다. 세속 당국과 후에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의 작품을 금지했다.
3. 철학 사상
스피노자의 철학 사상은 크게 신과 자연, 코나투스, 인식론, 윤리학, 정치 사상으로 나눌 수 있다.
- 신과 자연: 스피노자는 신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범신론을 주장했다. 신은 유일한 실체이며, 만물은 신의 속성 또는 양태로 존재한다. 그는 신을 추상적이고 비개인적인 존재로 보았으며, 이는 인격신을 믿는 유대교-기독교 전통과는 다른 관점이었다.[106]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정신-육체 이원론을 비판하고, 정신과 육체를 신의 두 가지 속성으로 보는 심신평행론을 제시했다.[114]
- 코나투스: 스피노자는 모든 존재가 자기 보존을 위해 노력하는 힘, 즉 코나투스(Conatus)를 가진다고 보았다. 인간의 경우 코나투스는 생존 욕구로 나타나며, 완전한 코나투스 발현이 곧 행복이라고 주장했다.[19]
- 인식론: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나는 사유하면서 존재한다"로 해석하고, 이를 인식론의 기초로 삼았다. 그는 정신과 육체가 같은 것의 두 측면이라고 보았으며, 인간의 정신은 무한한 지성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했다.[87][88][89][90]
- 윤리학: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기하학적 방법으로 윤리학을 논했다. 그는 자유 의지를 부정하고, 감정은 이성에 의해 통제될 수 있다고 보았다. 최고의 행복은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91][92][93][94]
- 정치 사상: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에서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언론의 자유를 강조했다. 그는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고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여성의 지위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견해를 유지했다.[20][98][99]
스피노자의 철학은 일원론, 범신론, 결정론 등의 특징을 가지며, 후대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헤겔과 질 들뢰즈는 스피노자 철학을 높이 평가했다.[83]
3. 1. 신과 자연
스피노자는 신은 존재하며, 추상적이고 비개인적이라고 주장하였다.[106] 스피노자의 신에 대한 관점은 찰스 하츠혼이 고전적 범신론이라고 설명한 것이다.[113] 스피노자는 특히 그와는 반대 입장인 데카르트의 육체-정신 이원론과 관련되어 "에피쿠로스주의적 유물론자"로 설명되었으나,[114] 에피쿠로스주의는 현대의 양자 역학에 대한 사상의 선상에서 확률적인 경로를 갖는 원자만이 유일한 실체라고 주장하였고, 스피노자는 유물론자인 동시에 의식의 일련의 상승화를 긍정하여 물질성(정열)과 의식성(방법적 회의에 기초한 치밀한 사유)을 구분하였으므로 에피쿠로스주의와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오히려 그의 논증은 스토아 학파와 비슷하며, 현대철학에서 일반적으로 스피노자의 철학은 현대에 부활한 스토아 학파 사상의 연장선으로 취급된다.[115][116]스피노자의 체계는 "인정된 권위"에 저항하기 위한 강력한 무기를 제공하여 급진적 사상에 질서와 통합을 부여하였다. 그는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실체이며 우리를 둘러싸고 또한 우리가 그 일부인 실체를 통솔하는 질서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스피노자는 신과 자연을 같은 실체의 두 가지 이름으로 보았다.[114]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자연, 신, 그리고 단 하나뿐인 실체는 같은 개념이다. 무한자는 '능산적 자연'(산출하는 자연)으로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궁극적인 힘이다. 이에 대비되는 유한자는 '소산적 자연'(산출된 자연)이다. 이 두 자연은 힘을 가진다.
'''에티카'''는 라이프니츠와 데카르트의 사상과 함께 합리론 사상의 일부로 여겨져 왔는데,[7] 이는 수학이 세계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상이 현실과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가정을 포함한다. "매우 난해한 걸작"인 '''에티카'''는 많은 미해결된 애매한 부분을 포함하고 있으며, 유클리드 기하학을 본뜬 금욕적인 수학적 구조로 쓰여졌다. 데카르트의 저술은 "스피노자의 출발점"으로 묘사되어 왔다.[8] 스피노자의 첫 출판물은 1663년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의 정의와 공리들을 사용하여 유클리드 모델로 증명을 기하학적으로 설명한 것이었다. 데카르트를 따라 스피노자는 '명료하고 뚜렷한 사상'으로부터 논리적 추론을 통해 진리를 이해하려고 했는데, 이 과정은 항상 공리의 '자명한 진리'로부터 시작된다.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은 유일한 실체와 그 수정(양태)으로 이루어져 있다. 《윤리학》의 초반부에서 스피노자는 오직 하나의 실체만이 절대적으로 무한, 자기 원인이며 영원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실체를 "신" 또는 "자연"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 두 용어가 동의어임을 말한다(그가 사용하는 라틴어 구절은 ''"Deus sive Natura"''이다). 스피노자에게 있어 전체 자연 우주는 하나의 실체, 즉 신, 또는 자연과 그 수정(양태)으로 이루어져 있다.
스피노자는 유대교-기독교 전통의 일신론과 다른 개념을 나타내는 데 "신"(Deus)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무신론자로 여겨졌다. "스피노자는 명백히 신에게 인격과 의식을 부정한다. 그는 지성, 감정, 의지도 없다. 그는 목적에 따라 행동하지 않지만, 모든 것은 법칙에 따라 그의 본성에서 필연적으로 따른다…."[21] 따라서 스피노자의 냉정하고 무관심한 신은 인간적인, 아버지 같은 신이라는 개념과 다르다.[22]
1785년,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는 레싱이 죽음 직전에 "스피노자주의자"라고 고백한 것으로 여겨진 후 스피노자의 범신론을 비난하는 글을 발표했는데, 당시에는 무신론자라고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야코비는 스피노자의 교리는 순수한 유물론이라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모든 자연과 신이 확장된 실체에 불과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야코비에게는 계몽주의 합리주의의 결과였고, 결국 절대적인 무신론으로 끝날 것이었다. 모세스 멘델스존은 야코비에 반대하여 유신론과 범신론 사이에는 실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이 문제는 당시 유럽 문명의 주요 지적 및 종교적 관심사가 되었다.
18세기 후반 유럽인들이 스피노자 철학에 매료된 이유는 그것이 유물론, 무신론, 그리고 폐신론에 대한 대안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세 가지 사상이 그들에게 강하게 어필했다.
1879년까지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지만, 일부 사람들에게는 놀랍고 위험할 정도로 적대적인 것으로 여겨졌다.[24]
스피노자의 "신 또는 자연"(''Deus sive Natura'')은 아이작 뉴턴의 최초 원인 논증과 쥘리앵 오프레 드 라 메트리(1709~1751)의 저서 ''인간 기계''(''L'homme machine|로므 마신프랑스어)''의 죽은 기계와는 대조적으로 살아있는 자연의 신을 제공했다. 콜리지와 셸리는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자연 종교''를 보았다.[25] 노발리스는 그를 "신에 취한 사람"이라고 불렀다.[8][26] 스피노자는 시인 셸리가 그의 에세이 "무신론의 필요성"을 쓰도록 영감을 주었다.[8]
스피노자가 신을 물질적 우주와 동일시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다. 따라서 그는 "예언자"[27]이자 "왕자"[28]이자 가장 저명한 범신론 해설자라고 불려왔다. 더 구체적으로, 그는 헨리 올덴버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신을 자연(일종의 질량 또는 물질적 물질로 여겨짐)과 동일시한다는 일부 사람들의 견해에 대해서는, 그들은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말했다.[29] 스피노자에게 우주(코스모스)는 사유와 확장이라는 두 가지 속성 아래의 ''모드''이다. 신은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무한히 많은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다.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1883~1969)에 따르면, 스피노자가 ''Deus sive Natura|데우스 시베 나투라la''(라틴어로 '신 또는 자연')을 썼을 때, 스피노자는 신이 ''natura naturata''(이미 창조된 자연; 문자 그대로 '자연이 자연화됨')가 아니라 ''natura naturans''(자연이 자연이 하는 일을 하는 것; 문자 그대로 '자연이 자연화함')을 의미했다. 야스퍼스는 스피노자가 자신의 철학적 체계에서 신과 자연이 서로 바꿔 쓸 수 있는 용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초월성이 그의 무한히 많은 속성에 의해 증명되었고, 인간에게 알려진 두 가지 속성인 사유와 확장이 신의 내재성을 의미한다고 믿었다.[30] 사유와 확장의 속성 아래의 신조차도 우리 세계와 엄격하게 동일시될 수 없다. 그 세계는 물론 "나눌 수 있다". 그것은 부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실체의 속성 중 어떤 것도 진정으로 그것으로부터 실체가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따르는 것으로 생각될 수 없다"고 말했는데, 이는 실체의 분할로 이어지는 방식으로 속성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또한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는 나눌 수 없다"(윤리학, 제1부, 명제 12와 13)고 말했다.[31] 이 논리를 따르면, 우리 세계는 사유와 확장이라는 두 가지 속성 아래의 모드로 간주되어야 한다. 따라서 야스퍼스에 따르면, "하나와 모든 것"이라는 범신론 공식은 "하나"가 초월성을 유지하고 "모든 것"이 유한한 것들의 총체로 해석되지 않는 경우에만 스피노자에게 적용될 것이다.[30]
마르시알 게롤(1891~1976)은 스피노자의 신과 세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범신론이 아닌 범재신론이라는 용어를 제안했다. 세계는 신이 아니지만, 강한 의미에서 신 "안에" 있다. 유한한 것들은 신을 그들의 원인으로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31] 그러나 미국 범신론 철학자 찰스 하츠혼(1897~2000)은 스피노자의 견해를 설명하기 위해 고전적 범신론이라는 용어를 주장했다.[13]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신은 "무한한 지성"(Ethics 2p11c) – 전지전능(2p3)이며,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우리가 그의 완전성의 일부인 한 우리를 사랑할 수 있다(5p35c). 그리고 개인적인 존재의 표식이 우리가 개인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라면, 스피노자가 인간에게 최고의 선으로 ''amor intellectualis dei''(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를 추천한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5p33). 그러나 이 문제는 복잡하다. 스피노자의 신은 자유 의지가 없다(1p32c1), 목적이나 의도가 없다(1 부록), 그리고 스피노자는 "지성이나 의지도 신의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1p17s1)고 주장한다. 게다가 우리가 신을 사랑할 수 있지만, 신이 우리를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스피노자는 "신을 사랑하는 자는 신이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갈망할 수 없다"(5p19)고 말한다.[32]
스티븐 네들러는 스피노자의 무신론 또는 범신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태도 분석에 달려 있다고 제안한다. 범신론이 종교성과 관련이 있다면, 스피노자는 신에 대한 적절한 태도가 존경이나 종교적 경외감이 아니라 객관적인 연구와 이성이라고 믿기 때문에 범신론자가 아니다. 종교적인 태도를 취하면 오류와 미신의 가능성에 열려 있게 될 것이다.[33]
데카르트는 신을 무한한 실체로서 세계의 근본에 설정하고, 그 아래 정신과 육체(물체=연장)라는 두 개의 유한 실체를 세웠다. 그러나 스피노자에 의하면, 그 본질에 존재가 속하는 실체는 오직 신뿐이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모든 완전성을 스스로 안에 포함하는[84] 신은, 자기 완전성의 힘에 의해서만 작용인[85] 것이다(자기 원인). 다시 말해, 신은 초월적인 원인이 아니라, 만물의 내재적인 원인인 것이다.[86] 신이란 곧 자연(이 자연은 식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물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이다. 이것을 일원론·범신론이라고 부른다. 신이 유일한 실체인 이상, 정신과 육체는 유일한 실체인 신에 있어서 두 가지 다른 ''속성''(신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 측면)으로서 사유와 연장일 뿐이다. 또한, 신의 본성은 절대적으로 무한하기 때문에 무한히 많은 속성을 지닌다. 이 경우, 산출적 자연으로서의 여러 가지 것들(유한자, 또는 개물)은 모두, 생산적 자연으로서의 신 없이는 존재하고 사유될 수 없는 것이며, 신의 변상 또는 신의 어떤 속성에 있어서의 양태이다.[84]
스피노자는,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현실에) 존재하는 육체이다」[87]라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연장하는 것과 사유하는 것은 신의 속성의 변상이다[88]」 이상, 두 가지는 같은 것의 두 측면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에 의해 심신의 합일이라는 우리의 현실적인 모습을 설명할 수 있다고 스피노자는 생각했다. 정신의 변화는 육체의 변화에 대응하고 있으며, 정신은 육체로부터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육체도 정신으로부터 독립될 수 없다. 육체에 앞서 정신이 있는 것(유심론)도 아니고 정신에 앞서 육체가 있는 것(유물론)도 아니다. 소위 동일 존재에 있어서의 심신평행론이다. 그 위에, 인간의 육체를 대상으로 하는 관념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것만을 인식할 수 있는[89] 인간의 유한한 정신은, 전 자연을 인식하는 어떤 무한한 지성의 일부분으로서 존재하고 있으며,[90] 이 전 자연을 「사념적 objective」으로 자기 안에 포함하는 사유하는 무한한 힘(potentia infinita cogitandi)에 의해 형성되는 개개의 사상과, 이 힘에 의해 관념된 자연 속의 개개의 사물은, 같은 방식으로 진행한다고 하고 있다. 즉 사유라는 측면에서 보면 자연은 정신이고, 연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자연은 육체이다. 양자의 질서(정신을 구성하는 관념과 그 대상의 질서)는, 같은 실체의 두 측면을 나타내기 때문에, 일치한다고 하고 있다.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하느님의 인격을 철저히 배격하고, '''이성의 검증에 견딜 수 있는 합리적인 자연론'''으로 제시된다. 스피노자는 무신론자가 결코 아니며, 오히려 유신론자로서 하느님을 더욱 이성적으로 논하고, 인격신에 대해서는 이를 민중의 이해력에 맞춘 인간적인 화법의 산물이라고 한다.
기독교에 대해서는, 스피노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자들에게만 그 파악력에 따라 나타난 출현에 불과하다고 하며, 또 그리스도가 자신을 하느님의 전[100]이라고 말한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요한 )는 구절과 함께, 하느님이 가장 많이 그리스도 안에 현현한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101] 또 덕의 보상은 덕 그 자체이다[102]는 입장에서는, 도덕률은 율법으로서의 형식을 하느님 자신으로부터 받았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신성하고 유익하다고 하며, 하느님의 명령에 대한 불본의 예속과 대치되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권장하고 있다. 또 하느님을 그 정의의 행사와 이웃 사랑으로 존경하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진 한, 누구라도 구원받는다고 주장한다.[103]
3. 2. 코나투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Conatus, 힘)를 언급한다. 에피쿠로스의 용어로 보면,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는 살고자 하는 욕구 내지는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의 완전한 표출을 행복으로 보았으며, 따라서 코나투스를 발휘할 수 있는 정치체제가 최고라고 보았다.[19]코나투스는 역량(potentia, puissance)이 윤리학·인간학적 의미로 사용될 때 가질 수 있는 의미로, 자아를 보존·발전·완성하려는 욕구 내지 노력으로 해석될 수 있다.
스피노자의 행복 개념은 그의 윤리 철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스피노자는 행복(혹은 구원 또는 자유)이 "끊임없고 영원한 신에 대한 사랑, 또는 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에 있다"고 썼다. 철학자 조나단 베넷은 이를 스피노자가 "'행복'을 누군가가 있을 수 있는 가장 고귀하고 바람직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고자 했다"고 해석한다. "가장 고귀하고 바람직한 상태"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려면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노력'', 하지만 반드시 어떤 목적론적인 짐을 지닌 것은 아님) 개념과 "완전성"이 (도덕적) 가치가 아닌 완성도를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개인이 무한한 실체의 단순한 수정으로 간주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떤 개인도 완전히 완성되거나, 즉 완벽하거나, 행복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절대적인 완전성은 스피노자의 사상에서는 실체에게만 예약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태는 더 낮은 형태의 행복, 즉 자신이 실제로 어떤 존재인지, 즉 우주에 있는 다른 모든 것과 특정한 관계 속에 있는 실체의 특정한 수정으로서 자신을 순수하게 이해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스피노자가 이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은 ''윤리학''의 끝부분, E5P24와 E5P25에서 볼 수 있는데, 스피노자는 두 가지 최종적인 핵심적인 행동을 취하여 그가 작품 전반에 걸쳐 발전시킨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윤리적 명제들을 통합한다. E5P24에서 그는 특정한 것들의 이해를 신 또는 실체의 이해와 연결시키고, E5P25에서 정신의 ''코나투스''를 세 번째 지식(직관)과 연결시킨다. 여기서 행복과 ''amor dei intellectualis''("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의 연결은 짧은 단계이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 달리, 자유 의지에 의한 감정 통제 사상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피노자의 심신일원론의 직접적인 귀결로서, 독립적인 정신에 깃든 자유 의지가 주체적으로 수동적인 신체를 지배한다는 구도는 기각된다.
욕구의 근원은 신의 존재이자 작용하는 힘에 유래하는 개체의 자기 보존의 '''코나투스'''(충동)임을 스피노자는 인정했다. 그러나, 그 각각이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간주되는 한 사물들은 상호 조화하지 않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될지도 모르는 이 불완전한 코나투스의 혼돈을 완전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전체로서의 자연(신)의 필연성을 이성으로 인식하는 것에 자기의 본질을 인정하고, 또 이 인식을 타인과 나누는 것이 요구된다.
3. 3. 인식론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핵심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제이다. 스피노자는 이를 "나는 사유하면서 존재한다(Ego sum cogitans.)"라고 해석했다.스피노자는 초기 논고에서부터 『에티카』에 이르기까지 '''신즉자연'''(deus sive natura)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여기서 '자연'은 동식물뿐 아니라 사람과 사물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는 비인격적인 신 개념과 전통적인 자유 의지 개념을 부정하는 결정론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 신학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스피노자는 무신론자로 공격받았다.[83]
스피노자는 심신평행론을 주장했다. 그는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현실에) 존재하는 육체이다"[87]라고 선언하며, 정신과 육체가 같은 것의 두 측면이라고 보았다. 정신의 변화는 육체의 변화에 대응하며, 정신과 육체는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 인간의 유한한 정신은 전 자연을 인식하는 무한한 지성의 일부분이며,[90] 사유하는 무한한 힘(potentia infinita cogitandi)에 의해 형성된다. 이 힘에 의해 관념된 자연 속의 개개의 사물은 같은 방식으로 진행한다. 즉, 사유의 측면에서 자연은 정신이고, 연장의 측면에서 자연은 육체이다.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과 그 대상의 질서는 같은 실체의 두 측면을 나타내므로 일치한다.[88][89]
3. 4. 윤리학
'''에티카'''는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와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사상과 함께 합리론 사상의 일부로 여겨진다.[7] 이는 수학이 세계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처럼 사상도 현실과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가정을 포함한다. "매우 난해한 걸작"인 '''에티카'''는 풀리지 않은 애매한 부분이 많으며, 유클리드 기하학을 본뜬 금욕적인 수학적 구조로 쓰여졌다.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저술은 "스피노자의 출발점"으로 묘사되기도 한다.[8] 스피노자의 첫 출판물은 1663년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의 정의와 공리들을 사용하여 유클리드 모델로 증명을 기하학적으로 설명한 것이었다. 데카르트를 따라 스피노자는 '명료하고 뚜렷한 사상'으로부터 논리적 추론을 통해 진리를 이해하려 했으며, 이 과정은 항상 공리의 '자명한 진리'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의 실제 목표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첫 작품부터 마지막 작품까지 "최고선"(최고의 진리이기도 함)에 주목하여 형이상학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평화와 조화의 상태에 도달하려는 일관된 맥락이 존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철학의 원리는 "기하학적 방법과 철학의 연습"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그의 철학을 정의하는 수많은 개념과 결론을 위한 길을 열었다(형이상학적 사고 참조).
스피노자의 행복 개념은 그의 윤리 철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스피노자는 행복(혹은 구원 또는 자유)이 "끊임없고 영원한 신에 대한 사랑, 또는 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에 있다"고 썼다.[19] 철학자 조나단 베넷은 이를 스피노자가 "'행복'을 누군가가 있을 수 있는 가장 고귀하고 바람직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여겼다"고 해석한다. "가장 고귀하고 바람직한 상태"를 이해하려면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노력이지만, 반드시 목적론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님) 개념과 "완전성"이 도덕적 가치가 아닌 완성도를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개인이 무한한 실체의 단순한 수정으로 간주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떤 개인도 완전히 완성되거나 완벽하거나 행복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절대적인 완전성은 스피노자의 사상에서 실체에게만 예약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태는 더 낮은 형태의 행복, 즉 자신이 실제로 어떤 존재인지, 즉 우주에 있는 다른 모든 것과 특정한 관계 속에 있는 실체의 특정한 수정으로서 자신을 순수하게 이해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스피노자가 이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은 ''윤리학''의 끝부분, E5P24와 E5P25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스피노자는 두 가지 최종적인 핵심적인 행동을 통해 그가 작품 전반에 걸쳐 발전시킨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윤리적 명제들을 통합한다. E5P24에서 그는 특정한 것들의 이해를 신 또는 실체의 이해와 연결하고, E5P25에서 정신의 ''코나투스''를 세 번째 지식(직관)과 연결한다. 여기서 행복과 ''amor dei intellectualis''("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의 연결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 달리 자유 의지에 의한 감정 통제 사상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피노자의 심신일원론에 따르면, 독립적인 정신에 깃든 자유 의지가 수동적인 신체를 지배한다는 구도는 성립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각각의 의지는 필연적이며 자유롭지 않다고 주장하며, 의지(이성의 소유)를 각각의 의지 발동의 원인으로 생각하는 것은 인간을 각각의 인간의 원인으로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고 한다.[91] 또한 관념은 관념인 한 긍정 또는 부정을 포함하며, 자유 의지로 해석되는 표상·언어는 사실 단순한 신체의 운동이라고 한다.[92]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표상적인 인식에 의존한 수동적인 감정(동요하는 정념)을 극복하는 것은 필연성을 파악하는 이성적인 인식이다. 우리 외부에 있는 사물의 능력으로 정의되는 불완전한 관념(기억력에만 의존하는 관념[93])을 버리고, 우리 고유의 능력에만 의존하는 명료하고 판명한 완전한 관념을 형성하는 것은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이성적인 인식이다. 나아가 "우리의 정신은 스스로와 신체를 '''영원한 모습 아래'''(sub specie aeternitatis) 인식하는 한, 필연적으로 신의 인식을 가지고, 스스로가 신 안에 있고(in Deo esse), 신을 통해 생각된다는(per Deum concipi) 것을 안다[94]"는 점에서 인간은 '''신에 대한 지적 사랑'''에 도달하고, 신이 자기 자신을 인식하여 만족하는 무한한 사랑에 참여함으로써 최고의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위의 논의는 개체의 자기 보존 충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가 존재에 고집하는 힘은 신의 속성의 영원한 필연성에서 유래한다.[95] 욕구의 근원은 신의 존재이자 작용하는 힘[96]에서 비롯되는 개체의 자기 보존 '''코나투스'''(충동)임을 스피노자는 인정했다. 그러나 각각의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간주되는 한, 사물들은 상호 조화되지 않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불완전한 코나투스의 혼돈을 완전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전체로서의 자연(신)의 필연성을 이성으로 인식하여 자신의 본질을 인정하고, 이 인식을 타인과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하느님의 인격을 철저히 배격하고, '''이성의 검증에 견딜 수 있는 합리적인 자연론'''으로 제시된다. 스피노자는 무신론자가 아니라 오히려 유신론자로서 하느님을 더욱 이성적으로 논하고, 인격신에 대해서는 이를 민중의 이해력에 맞춘 인간적인 표현이라고 보았다.
기독교에 대해서 스피노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자들에게만 그 파악력에 따라 나타난 현상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또한 그리스도가 자신을 하느님의 성전[100]이라고 말한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요한)는 구절과 함께 하느님이 가장 많이 그리스도 안에 현현한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101] 덕의 보상은 덕 그 자체[102]라는 입장에서는 도덕률은 율법으로서의 형식을 하느님 자신으로부터 받았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신성하고 유익하다고 하며, 하느님의 명령에 대한 맹목적인 예속 대신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권장한다. 또한 하느님을 그 정의의 행사와 이웃 사랑으로 존경하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진 한, 누구라도 구원받는다고 주장한다.[103]
3. 5. 정치 사상
1663년, 스피노자는 보르부르흐(Voorburg)로 이주하여 『윤리학』 집필과 더불어 유럽 전역의 학자들과 교류했다. 1665년, 그는 성경 해석과 국가의 기원 등을 다루는 『신학정치론』을 집필하여 세속적이고 민주적인 국가를 옹호했다.[20]스피노자의 친구 아드리아안 코어바흐(Adriaan Koerbagh)는 종교 비판 서적을 출판했다가 투옥되어 사망했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사상에 대한 반응을 예상하여 1670년에 익명으로 『신학정치론』을 출판했지만, 곧 저자임이 밝혀졌다.[20] 사무엘 마레시우스(Samuel Maresius)는 스피노자를 공격했고,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등은 그의 신 개념을 비판했다.[20] 스피노자의 저술은 라틴어로 쓰여 일반 대중에게는 널리 이해되지 않았고, 번역도 금지되었기에 코어바흐의 저술보다는 안전했다.[20]
1670년, 스피노자는 헤이그로 이주하여 학문적 교류를 이어갔다. 그는 ''윤리학''을 수정하고 히브리어 문법을 저술했으며, 국가 운영에 관한 『정치론』(Tractatus Politicus)을 집필했으나 미완성으로 남았다.[20] 스피노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교수직 제안을 거절했는데, 이는 사상의 자유를 제한받을 가능성 때문이었다.[20]
1670년 출판된 『신학정치론』은 유럽 지성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20]
스피노자의 사후 출판된 『정치론』은 군주정과 귀족정이 폭정으로 기울지 않고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통치 방식을 제시한다.[20]
스피노자는 여성의 지위에 대해 전통적인 견해를 가졌다. 『정치론』에서 그는 여성이 "자연적으로" 남성에게 종속된다고 언급했다.[20] 전기 작가 스티븐 나들러는 이에 대해 유감을 표했고, 조나단 I. 이스라엘은 "매우 실망스럽다"고 평가했다.[20]
스피노자는 이성이 감정을 통제할 수 있지만, 현실의 인간은 감정에 휘둘리기 쉽다고 보았다. 그는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야 하며, 이를 위해 보상과 형벌로 복종을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98] 정신의 자유는 개인의 덕목이지만, 국가의 덕목은 안전에 있다는 것이다.[98]
통치권이 국민 전체에 속하면 민주정치, 소수에게 속하면 귀족정치, 한 사람에게 속하면 군주정치라 불린다.[20] 스피노자는 법의 목적이 이성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외부에서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며,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으면 법질서 준수 정신이 약화된다고 보았다.[99]
스피노자의 정치 사상은 현실주의를 특징으로 한다. 그는 정치가와의 교류를 통해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추구했다.
4. 영향
스피노자의 사상은 루소, 괴테, 헤겔, 피히테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117] 몽테스키외는 홉스와 스피노자의 사회물리학(social physics)의 영향을 받아 법의 연구를 가치판단으로부터 "순수화"시키고 체계적인 경험적 관찰에 기초시키려 시도한 점에서 법사회학적 관점에서도 주목받고 있다.[118]
많은 저술가들이 스피노자 철학과 동양 철학 전통 사이의 유사성을 논했다. 철학자 사후 수십 년 후, 피에르 바이유는 그의 저서 『역사 및 비판 사전』(1697)에서 스피노자의 무신론과 "중국 종파"의 신학, 즉 "Foe Kiao"[34]라 불리는 종파와의 연관성을 지적했다. 칸트 또한 스피노자 철학과 노자의 사상 사이의 유사점을 제시하며, 둘 다 범신론자로 분류하고 그들이 지닌 신비주의적 경향을 비판했다.[35] 1863년, 엘리야 베나모제는 스피노자 존재론의 주요 원천이 카발라라고 주장했다.[36] 최근 연구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37]
19세기 독일 산스크리트 학자 테오도어 골드슈튀커는 스피노자의 종교관과 인도의 베단타 전통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했다. 그는 스피노자의 사상이 베단타 사상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언급했다.[38] 맥스 뮬러 또한 베단타의 브라만을 스피노자의 '실체'와 동일시하며 둘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했다.[39]
스피노자의 사상은 17세기부터 현재까지 지적 논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스피노자에 대한 견해는 무신론자라는 시각에서, 최초의 세속적 유대인이라는 문화적 영웅으로 변화해 왔다.[40] 한 저술가는 오늘날 독자들을 스피노자에게로 이끄는 요인으로 "그의 자신감 넘치는 평정심"을 주장한다. 스피노자는 "행복은 다른 것이 아니라, 신에 대한 직관적 지식에서 생겨나는 정신의 만족"이라고 말한다.[41] 조나단 아이작 이스라엘은 1750년 이후 계몽주의나 19세기의 주요 인물 중 스피노자만큼 철학에 깊이 참여한 인물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헤겔은 "당신은 스피노자주의자이거나 철학자가 아니다"라고 단언한다.[42]
1656년 포르투갈 회당에서 추방된 사건은 그가 "최초의 현대 유대인"인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스피노자는 유대인 문제, 유대교와 현대 세속적 유대인의 개념에 대한 논의에 영향을 미쳤다. 멘델스존(Moses Mendelsohn), 레스싱, 하이네, 칸트,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등이 스피노자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추방은 21세기에 와서 다시 논의되었는데, 베르톨트 아우어바흐, 살로몬 루빈, 시온주의자 요세프 클라우스너,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와 같은 유대인 작가들이 그의 이미지를 형성했다.[45]
1886년 조지 산타야나는 『하버드 먼슬리』에 "스피노자의 윤리적 교리"를 발표했다.[46] 1932년 산타야나는 스피노자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는 헤이그 회의에서 "궁극적인 종교"를 발표하도록 초청받았다.[48] 산타야나는 스피노자를 도덕성의 자연주의적 기반을 이해하는 데 있어 "스승이자 모범"으로 묘사했다.[49]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의 영어 번역 제목에서 스피노자의 『신정치론』을 암시하며 스피노자를 언급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스피노자로부터 "영원의 관점에서"라는 표현을 빌렸고, 그의 『논리철학논고』는 스피노자의 『윤리학』과 구조적 유사성을 가진다. 그는 영원에 대한 스피노자적 이해와 영생이라는 종교적 개념에 대한 해석을 언급하며, "현재에 사는 자는 영원히 산다"라고 주장한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전후 프랑스 철학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많은 프랑스 철학자들이 스피노자를 통해 현상학의 비합리적인 경향에 대한 보루를 세웠다. 루이 알튀세르와 에티엔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에게서 마르크스주의를 이끌어낼 철학을 보았다. 안토니오 네그리는 스피노자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알렉상드르 마테롱, 마르티알 게룰, 앙드레 토셀, 피에르 마셰리 등도 주목할 만한 프랑스 스피노자 학자이다. 질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철학자들의 왕자"라고 불렀으며,[52][53] 그의 스피노자 철학 해석은 프랑스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54] 마릴레나 드 수자 샤우이는 들뢰즈의 『철학에서의 표현주의』(1968)를 "스피노자 철학에서 중심 개념으로서의 표현을 발견한 혁명적인 작품"으로 묘사했다.[54]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스피노자를 그의 세계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로 지명했다. 스피노자는 신을 자연과 동일시했는데,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비인격적인 신에 대한 믿음과 일치한다. 아인슈타인은 "나는 존재하는 것들의 질서 정연한 조화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스피노자의 신을 믿습니다."라고 답했다.[55][56]
레오 슈트라우스는 『스피노자의 종교 비판』에서 스피노자를 계몽주의 합리주의 전통의 일부이자 유대 근대성의 시작으로 보았다. 조나단 이스라엘은 스피노자가 계시된 종교, 전통, 도덕, 정치적 권위에 대한 주요 도전자였다고 주장했다.
스피노자는 네덜란드에서 중요한 역사적 인물이다. 유로가 도입될 때까지 네덜란드 1000-길더 지폐에 그의 초상화가 등장했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권위 있는 과학상은 ''Spinozaprijs'' (스피노자 상)으로 명명되었다. 2014년 스피노자의 『신정치론』 사본이 네덜란드 의회 의장에게 증정되었다.[59]
스피노자의 삶과 업적은 여러 작가들의 관심 대상이 되어 왔다. 괴테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윤리학''이 자신의 삶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을 강조했다.[68] 하이네 또한 그의 저서 ''독일의 종교와 철학사''(1834)에서 스피노자를 극찬했다.[69]
보르헤스는 스피노자를 기리는 두 편의 소네트를 썼다.[70] 알베르토 게르춘오프는 소설 ''바루흐 스피노자의 사랑(Los amores de Baruj [sic] Spinoza)''(1932)에서 스피노자의 초기 삶을 다뤘다.[71]
베르톨트 아우어바흐는 소설 ''스피노자: 소설''(1882)을 썼다.[72] 어빈 D. 얄롬은 ''스피노자 문제(The Spinoza Problem)''(2012)를, 조제 로드리게스 두스 산토스는 ''스피노자의 비밀(O Segredo de Espinosa)''(2023)을 썼다. 안드레스 스포코이니의 소설 ''불경한 자(El impío)''(2021)에도 스피노자가 등장한다.[73]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의 단편 소설 ''시장 거리의 스피노자''에서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칼 포퍼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본질주의로 비판하며, 그의 기하학적 방법은 "전적으로 표면적인 것"이라고 언급했다.[104]
5. 주요 저서
출판 연도 | 원제 | 한국어 번역 제목 | 비고 |
---|---|---|---|
1662년 | Tractatus de intellectus emendationela | 지성교정론 | 《에티카》(황태연 옮김, 비룡출판사, 2015)에 《지성개선론》으로 번역됨. 미완성. |
1663년 | Renati Descartes principiorum philosophiae mori geometrico domonstratala | 데카르트 철학 원리 | 스피노자가 생전 유일하게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한 책. 양진호 옮김(책세상출판사, 2010). |
1670년 |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la | 신학-정치 논고 | 암스테르담에서 익명 출판. 1674년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함께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출판 금지됨. |
1677년 | Ethica,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la | 기하학적 순서로 증명된 윤리학 | 강영계 옮김(서광사, 2007), 황태연 옮김(비룡출판사, 2015). |
1675년~1677년 | Tractatus politicusla | 정치 논문 | 사후 미완성 출판. |
19세기 | Korte Verhandeling van God, de mensch en deszelvs welstand | 신에 관한 단편 논문, 인간과 그의 행복 | 미발표 |
1662 | Tractatus de Intellectus Emendatione | 지성 개선에 관하여 | 미완성 |
1663 | Principia philosophiae cartesianae | 데카르트 철학 원리 | |
1670 |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 | 신학 정치 논문 | 생전 익명 출판, 출판 장소 허위 기재 |
1675–76 | Tractatus Politicus | 정치 논문 | 사후 미완성 출판 |
1677 | Ethica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 | 윤리학 | 1674년 완성, 사후 출판, 제목은 사후 추가 |
1677 | Compendium grammatices linguae hebraeae | 히브리어 문법 | 미완성[74] |
1677 | Epistolae | 서간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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