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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원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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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원로원은 고대 로마의 주요 정치 기구로, 로마 왕정 시대부터 시작되어 공화정, 제정 시대를 거쳐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에도 명맥을 유지했다. 로마 왕정 시대에는 왕을 선출하고 자문하는 역할을 했으며, 공화정 시대에는 외교, 재정 등 실질적인 통치 기구로 기능했다. 공화정 말기에는 내란으로 인해 원로원의 권위가 흔들렸고, 술라와 카이사르의 개혁을 거쳐 제정 시대에는 황제의 통제 하에 입법, 사법 기능을 수행했다. 서로마 제국 멸망 후에도 존속했지만,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재통일 사업과 잦은 전쟁으로 쇠퇴하여 7세기 초에 소멸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이 설치되었으나, 점차 황제의 자문 기구로 전락하여 9세기 후반에 실질적인 기능을 상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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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원로원
로마 원로원
로마 원로원의 계층 구조
로마 원로원의 계층 구조
기본 정보
로마자 표기Senatus Romanus
유형자문 및 심의
설립 및 해산
설립일기원전 753년
해산일서방: 603년 이후, 동방: 14세기
주요 구성
지도자원로원 수석
관련 정보
어원라틴어: senātus (원로원)
어원 (단어)라틴어: senex (노인)
설명로마 원로원은 입법 기관이 아님

2. 역사

로마 왕정 시대부터 원로원은 로마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초기에는 왕을 자문하는 기구였으나, 로마 공화정 시대에는 외교, 재정 등 국가 주요 사안을 결정하는 핵심 기구로 성장했다. "원로원과 로마 시민(Senatus Populusque Romanus)"을 의미하는 SPQR은 로마를 상징하는 단어이다.

제정 시대에는 황제의 통치에 점차 흡수되면서 지위가 낮아졌지만, 오현제 시대까지는 황제의 정통성과 후계자를 승인하는 기관으로서 중요했다. 그러나 군인 황제 시대에는 황제 승인 기관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로마 시의회 정도의 역할만 수행하게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전제군주제(도미나투스)로 전환하면서 원로원의 권한을 더욱 축소시켰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원로원 의원을 다시 등용했지만, 이전의 권위는 회복하지 못했다.

2. 1. 로마 왕정 시대의 원로원

로마 건국(기원전 753년)[2] 이전부터 이탈리아에 정착한 인도유럽인들은 부족 공동체[3]로 조직되었으며, 각 부족에는 원로회가 있었다.[4] 초기 로마는 '겐스(gens)' 또는 '클랜'이라 불리는 가족 집단으로 구성되었고, 각 클랜의 우두머리인 '파테르'(라틴어로 "아버지"를 의미함)[5]는 가부장적 권위를 가졌다.[5] 주요 겐스의 파테르들이 모여 원로원을 구성했으며, 이들은 왕을 선출하고 최고 권력을 위임했다.[7] 왕이 사망하면 최고 권력은 다시 파테르들에게 돌아갔다.

전승에 따르면, 로마의 초대 왕 로물루스는 100명의 원로원 의원을 임명했으며,[8] 이들의 후손은 파트리키(귀족) 계급이 되었다. 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왕위를 안정시키기 위해 100명의 원로원 의원을 추가로 임명했다.[9] 이들은 기존 귀족보다 낮은 가문 출신으로, '작은 가문의 파트레스(patres minorum gentium)'라 불렸다.[9] 7대 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원로원 주요 인물들을 처형하고 그 자리를 채우지 않아 원로원 규모를 축소시켰다.[10]

로마 왕정 시대 원로원의 주요 책임은 다음과 같다.[11]

2. 2. 로마 공화정 시대의 원로원

로마 공화정 시대의 원로원은 초기에는 집정관의 자문 기관이었지만, 점차 그 실질적인 권한을 강화하여 외교, 재정 등 국가의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는 핵심 기구로 자리 잡았다. "원로원과 로마 시민(Senatus Populusque Romanus)"을 의미하는 SPQR이라는 약어는 로마를 상징하는 단어로 널리 알려져 있다.

원로원 의원은 과거 회계 감사관을 지낸 인물 중에서 재무관의 검토를 거쳐 선발되었으며, 호민관 경력이 있는 플레브스(평민)는 자동적으로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있었다. 원로원 의원을 많이 배출한 가문은 노빌레스라고 불리는 특권 계급을 형성했지만, 노빌레스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의원이 되거나 세습되는 것은 아니었다. 원로원 의원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보여주며, 전쟁터에 나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전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원로원 의원은 종신직이었지만, 스스로 물러나는 경우도 있어 신진대사가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로마에서 요직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은 17세부터 약 10년간 로마군 복무 경험이 필수적이었고, 원로원 의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따라서 로마 원로원은 군사 및 국정에 대한 경험과 식견을 갖춘 엘리트 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민주 공화국 사회였던 로마에서 집정관 선출이나 법률 제정과 같은 중요한 사항은 시민집회에서 결정되었고, 원로원은 자문 기관으로서의 역할만 수행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원로원이 그 권위를 바탕으로 정치를 주도하여, 로마는 귀족 공화제이자 과두제 국가였다고 평가된다.

왕정 폐지(기원전 509년) 이후, 초대 집정관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푸블리콜라는 기사 계급에서 새로운 인물을 원로원에 선출하여 의원 수를 300명으로 늘렸다.[10] 원로원 의원은 넓은 자주색 줄무늬가 있는 토가, 감색 신발, 철(후에는 금) 반지를 착용할 권리가 있었다.

원로원은 '세나투스 콘술툼(senatus consulta)'이라는 법령을 통과시켰는데, 이는 법적 효력은 없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준수되었다. 원로원은 집정관 등 고위 관리의 군사 활동을 지휘하고, 속주 행정을 감독했다.

원로원 회의는 도시 안팎의 종교적으로 신성한 장소에서 열렸으며, 의장은 회의를 주재하고 의제를 제안했다. 원로원 의원은 연장자 순서대로 발언했으며, 투표는 제안에 대한 찬반으로 이루어졌다. 의원들은 회의장 양쪽에 자리를 잡아 물리적으로 분열하는 방식으로 투표했다.

기원전 3세기부터 원로원은 비상사태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원로원 최종 권고(senatus consultum ultimum)'를 통해 집정관에게 위기 해결 권한을 부여했다.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에는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마그나 그라이키아에트루리아에서 고대 그리스의 종교가 유입되었다. 특히 바쿠스 교단이 확산되자, 원로원은 젊은이들이 교단에 가입하는 것을 우려하여 기원전 186년, 이 교단에 대한 세나투스 콘술투움(원로원 결의)을 실시했다. 이 사건을 통해 원로원은 규율과 종교적 의식에 의해 성립하는 국가를 보호하고, 외국에서 들어오는 카르트를 승인하는 역할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2. 2. 1. 내란의 1세기

로마가 지중해 전역을 세력권으로 하는 대국으로 성장하면서, 라티푼디움(대농장) 보급으로 빈부 격차가 심해졌다. 원로원 의원들은 특권에 안주하며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였다.[25] 이러한 상황에서 그라쿠스 형제는 로마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개혁을 시도했으나, 호민관으로서 무력이 없고 원로원 체제 밖에 있었기 때문에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이후 원로원파(벌족파)와 민중파 간의 내란이 시작되었다.[25]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그라쿠스 형제의 실패를 바탕으로 무력을 가진 독재관의 입장에서 개혁에 임했다. 술라는 원로원 체제를 고쳐 표면적으로는 자문 기관이었던 원로원에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고 그 존속을 도모했다. 또한 원로원 정원을 300명에서 600명으로 늘렸다.[25] 기사 계급 등 신흥 유력자를 원로원에 추가했지만, 의원 수가 늘면서 의견이 분분하여 제대로 된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폐단이 심해졌다.[25]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원로원 체제를 타도하고 새로운 체제 수립을 목표로 했으며, 이는 로마 제정으로 이어졌다.[25]

2. 2. 2. 원로원 최종 권고

원로원 최종 권고(元老院最終決議, Senatus consultum ultimumla)는 후세 학자들이 붙인 명칭으로, 외부 요인이 아닌 시민에 의해 국가가 위기에 처했다고 원로원이 판단한 경우, 로마 시에 있는 임페리움(imperium) 소지자 중 최고위자에게 그 대처를 맡기는 형태의 특별 결의이다.[1] 최초 결의 시점에 대해서는 기원전 133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에 대한 것이라는 설과, 기원전 121년 그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에 대한 것이라는 설이 있었으나, 후대 연구에 의해 기원전 121년 설이 유력하다.[2] 기원전 121년부터라고 한다면, 내란의 1세기 동안 총 12회 결의되었다.[3]

원로원 최종 권고는 금지된 특별 조사위원회 대신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다.[4]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제거한 스키피오 나시카의 정당성에 대한 논의에서, 다음은 관직자가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5]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받고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살해한 집정관 루키우스 오피미우스는 후에 기소되었고, 재판 없이 시민을 살해한 것의 위법성과 국가의 안전을 지킨다는 목적 중 어느 것이 우선되는가가 쟁점이 되었지만, 무죄가 되었다.[6]

학자들 사이에서는 국가의 위기를 강조하면서도, 지배자 측이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있으며,[7] 최종 결의에 의해 원로원이 임페리움을 얻었다는 설이나, 관직자에 대한 권고에 불과하다는 설 등 여러 설이 있지만, 오피미우스의 무죄 판결에 의해, 원로원 최종 권고 하에서는 시민의 살해라도 정당화된다는 합의가 형성되어, 모스 마이오룸(mos maiorum, 조상들의 관습)에 통합되었다고 생각된다.[8] 한편, 이 최종 결의는 독재관 대신 도시의 소란을 진압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9]

2. 2. 3. 술라의 개혁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개혁(기원전 81년)으로 원로원 정원이 두 배로 늘어났다. 검열관에 의한 원로원 의원 심사(렉티오 세나투스)는 폐지되었고, 퀘스토르(재무관) 경험자는 자동적으로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고 여겨진다.[25] 다만, 정원을 600명으로 했다는 것은 자료에 명확하게 적혀 있지 않다. 기원전 80년대의 내란과 그 후의 프로스크립티오로 인해 원로원 의원이 150명 정도로 줄어들었고, 술라가 여기에 300명을 추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술라가 독재관에 취임했을 당시, 그를 제외하고 원로원에 출석할 수 있었던 집정관 경험자는 4명뿐이었다.

술라는 퀘스토르의 수를 기존 8명 또는 12명에서 20명으로 늘렸다. 당시 사망률을 고려하더라도, 그 후 원로원 의원이 점차 증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단, 당시 평균 연령을 고려하면 450명의 의원에게 만 30세가 최저 연령인 퀘스토르 경험자를 매년 20명씩 추가해도 600명을 유지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술라는 호민관을 원로원에서 제외했다는 설도 있지만, 기원전 75년 아우렐리우스 법에 의해 복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키케로 시대의 원로원 의원 수는 기록에 따라 450명 또는 600명으로 추정된다. 마티아스 게르처와 로널드 사이엄은 50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퀘스토르 경험자는 곧 원로원에서 의석을 얻었지만, 렉티오가 끝날 때까지 정식 의원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원로원 의원이 되기 위한 조건은 검열관에 의한 렉티오에서 퀘스토르 선거로 바뀌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전까지는 고위 정무관 경험자로 구성되어 있던 원로원은 술라의 지지자들로 채워졌고, 퀘스토르 선거에서 민의의 반영은 이전보다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술라는 다양한 범죄를 재판하는 상설 심문소를 7개로 늘리고, 각각을 8명으로 증원한 프라이토르에게 담당시켰다. 심문소의 심판관은 모두 원로원 의원이 담당하게 했기 때문에, 그 인원을 공급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프로스크립티오로 출세했다고 여겨지는 많은 사람들이 정무관 경험 없이 술라에 의해 원로원 의원이 되었지만, 이들은 심판관을 맡았다고 추정되며, 페다리이(Pedarii)가 그들이라는 설도 있다. 원로원은 정무관을 노리는 자와 심판관으로 단속하는 자의 두 그룹으로 나뉘었지만, 새롭게 등록된 자들은 보충되지 않고 점차 감소하여, 결국 노빌레스에 의해 임페리움이 독점되는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프라이토르와 집정관은 수도 로마 시에 상주하게 되었고, 프린켑스 세나투스(Princeps senatus)의 우선적 발언권도 없어졌다. 어떤 과정을 거쳐 제도가 변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원로원에서 집정관 경험자의 발언 순서는 그 해의 집정관이 연초에 결정하는 등, 이전보다 원로원에 대한 현직 집정관의 영향력은 강해졌다. 술라는 원로원을 강화했다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이지만, 500명 이상에서는 제대로 된 논의를 할 수 없다고도 생각된다. 심판관을 둘러싼 다툼은 해결되었지만, 원로원의 개혁은 술라 체제의 결함이었고, 그는 원로원을 정무관의 자문 기관으로 재편성하고 싶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2. 3. 로마 제정 시대의 원로원

제정 시대에 원로원은 황제의 통치에 점차 흡수되면서 그 지위가 낮아졌다. 군단 복무 의무도 완화되었지만, 오현제 시대까지는 황제의 정통성과 후계자를 승인(호민관 권한 부여)하는 기관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황제의 칙령을 영구적인 법령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원로원의 의결이 필요했다. 군단 출신 인물도 황제의 추천을 통해 원로원 의석을 얻어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트라야누스와 같은 황제들은 원로원의 권위를 존중하며 통치했다. 또한, 제국의 속주 총독 임명권의 절반은 원로원이 가지고 있었다. 원로원이 임명하는 원로원 속주는 황제가 임명하는 황제 속주보다 통치가 쉽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역으로, 원로원은 실질적인 이익을 챙겼다.

그러나 군인 황제 시대에 각지의 군단이 황제를 마음대로 추대하면서 원로원은 황제 승인 기관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로마 시의회 정도의 역할만 수행하게 되었다. 황제 갈리에누스는 원로원을 군무에서 배제하는 법을 통과시켜 군무와 정무에 균형 잡힌 인재 배출 수단마저 끊었다.[54]

한편, 황제가 로마 시를 떠나면서 이탈리아 본토와 북아프리카에서 원로원의 영향력은 오히려 커졌다. 일리리아 출신의 군인 황제들은 원로원과의 이해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원로원 관련 문제에 대해서는 군 복무 경험이 있는 원로원 의원이나 원로원 사절단의 의견이 쉽게 받아들여졌다. 원로원이 군무에서 배제되었지만, 정치적 입장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향상되었고,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타키투스, 프로부스 등이 원로원에 보인 존경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인 황제 시대를 종식시키고 전제군주제(도미나투스)로 전환하면서 황제의 지위와 권위를 높이고 원로원의 지위를 낮췄다. 그는 속주를 다시 나누고 속주 총독의 권한을 축소하여 강력한 관료 지배 체제를 확립했는데, 이는 원로원의 권한 축소를 의미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원로원 의원을 다시 등용했다. 312년부터 326년까지 원로원 의원 수를 600명에서 2,000명으로 늘렸는데, 주로 기사 신분 고관과 도시 참사회원 계층이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사 신분은 고유한 관직과 칭호를 상실하고 신분으로서의 특징을 잃었다.

3.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로마의 새로운 수도(노바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를 건설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도 원로원이 설치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은 처음부터 동로마 황제의 자문 기관으로 설립되었으며, 황제 부재 시 동로마 제국을 대표하고 후계 황제를 지명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제국 동부를 원활하게 통치하기 위해 전통적 세력이었던 도시 참사회 회원층의 지지를 얻고 혜택을 줄 필요가 있었고, 이들을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했다.

"황제는 원로원과 군대와 시민의 추대에 따라 비로소 제위의 정당성을 가진다"는 불문율은 로마 원로원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그러나 5세기 중반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황제권이 총대주교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인식이 생겨났다.[62][63]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절대주의 시대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은 정치에서 물러났지만, 7세기 헤라클레이오스 왕조 시대에 일시적으로 활력을 되찾았다.[64] 그러나 그 역할은 점차 의례적인 것으로만 남게 되었다. 7세기 후반 이후에는 원로원 의원 신분 세습이 인정되지 않았고, 일정 이상의 작위를 가진 고급 관료가 원로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850년대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은 실체가 없는 존재가 되었고,[56][57][65][66] 황제 레온 6세는 "이제 원로원은 이름만 남았다"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의 멸망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65][66]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목상으로나마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원로원이라는 기관은 존속하였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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