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로마 제국 원로원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로마 제국 원로원은 로마 제국의 주요 통치 기구로,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규모가 축소되고 의원 자격 요건이 강화되었다. 원로원은 법안 발의, 재판, 행정, 선거 등 다양한 권한을 행사했으며, 황제의 권력이 강해짐에 따라 그 역할과 영향력이 변화했다. 서로마 제국 멸망 후에도 존속했으나, 동로마 제국 시기에는 쇠퇴하여 7세기 초에 소멸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로마 원로원 - 동로마 원로원
    동로마 원로원은 로마 원로원의 전통을 이어받아 제국 내 고위 관료들로 구성된 자문 기관이자 귀족 계층이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권한이 축소되어 황제와 대립하기도 했지만, 13세기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완전히 소멸되었다.
  • 로마 원로원 - 폼페이우스 극장
    기원전 55년경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마르스 광장에 건설한 폼페이우스 극장은 로마 최초의 석조 극장으로, 신전, 정원, 회랑 등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춘 복합 시설이며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장소로도 알려져 현재는 유적이 캄포 데 피오리와 라르고 디 토레 아르젠티나 사이에 묻혀 있다.
  • 로마 제국 정부 - 로마 민회
    로마 민회는 고대 로마 시민들이 모여 법률 제정, 공직자 선출, 정책 결정을 내리던 민중 집회로, 쿠리아 민회, 백인회, 부족회, 평민회 등 다양한 형태가 있었으며 각기 다른 역할과 권한을 수행했다.
  • 로마 제국 정부 - 프로쿠라토르
    로마 제정 시대의 프로쿠라토르는 황제를 대리하여 속주의 재정과 행정을 담당한 기사 계급 출신의 관료로, 황제 직속으로 임명되어 세금 징수, 황실 영지 관리 등의 업무를 수행하며 총독의 권력 집중을 막는 역할을 했으나, 총독과의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 고대 로마 -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는 1405년에 태어나 1449년 황제가 되었으며, 오스만 제국의 위협 속에서 동서 교회의 통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과 함께 최후를 맞이하며 동로마 제국의 종말을 가져왔다.
  • 고대 로마 - 삼두정치
    삼두정치는 세 사람이 공동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 체제를 의미하며,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적, 정치적 상황에서 나타났다.
로마 제국 원로원
지도
개요
국가고대 로마
종류원로원
위치로마
역사
설립기원전 753년 (전설적인 설립)
해체600년경
기간로마 왕정
로마 공화정
로마 제정
서로마 제국
구성
인원300명 (공화정 초기)
600명 (술라)
900명 (카이사르)
600명 (아우구스투스)
임기종신
자격귀족 (파트리키), 고위 공직 역임자
역할
기능정책 자문
법안 심의
예산 관리
외교 사절 접견
군사 결정 참여
권한법률 제정 권고
행정 감독
재정 관리
외교 주도
관련 인물
주요 인물로물루스 (설립자)
술라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키케로
아우구스투스
기타
영향미국 상원 등 현대 입법 기관에 영향

2. 과정

로마 제국 초기, 황제는 종신직이었기 때문에 원로원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다.[38] 원로원 회의는 보통 매달 초하루인 칼렌데스나 15일경인 이데스에 쿠리아 율리아에서 열렸으며, 9월과 10월에는 더 자주 회의가 열렸다. 그 밖의 회의는 필요에 따라 수시로 개최되었다.[41]

황제는 두 집정관 사이에 앉아 회의를 주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39] 황제 외에도 집정관과 법무관도 원로원 회의를 주재할 수 있었다. 초기 원로원 의원들은 관련 없는 질문을 하거나 원로원에 특정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할 수 있었고, 고위 의원이 하위 의원보다 먼저 발언했지만, 황제는 언제든지 발언할 수 있었다.[40]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정족수는 400명이었으나, 의원들의 잦은 불참으로 인해 정족수를 줄이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정족수 규정을 완전히 없애기도 했다.[42]

원로원에 제출되는 법안의 대부분은 황제나 황제의 지지자들이 발의했다. 초기에는 아우구스투스티베리우스가 원로원에 대한 영향력을 숨기기 위해 직접 법안을 제안하는 대신 사적인 로비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31] 황제의 허가 없이는 어떤 의원도 정무관 직위에 입후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의원들은 황제가 발의한 법안에 반대 투표를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법안에 반대하는 의원은 투표 당일 회의에 불참하는 방식으로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43]

각 황제는 원로원 활동을 기록할 법무관을 선택했는데, 이 문서에는 제안된 법안, 공문, 원로원 연설 요약 등이 포함되었다. 이 문서는 보관되었고, 일부는 '악타 디우르나'라는 문서로 발표되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44]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황제 엘라가발루스는 그의 어머니나 할머니를 원로원 활동에 참여시켰으며, 여성용 원로원인 세나쿨룸(senaculum)을 설치하여 의류, 전차 운전, 장신구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게 했다고 한다. 그 이전에 네로의 어머니인 소 아그리파는 커튼 뒤에서 원로원 활동을 들었다고 타키투스가 전했다.[44]

2. 1. 아우구스투스의 개혁

초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양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900명으로 늘린 원로원을 물려받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의 규모를 줄이고자 하였고, 세 차례의 개정을 통해 원로원 의원 명단을 정리했다.[29] 이 개정이 완료되었을 때, 원로원의 규모는 600명으로 줄었으며, 이후 원로원의 규모가 크게 바뀐 적은 없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 규모를 줄이기 위해 출신이 낮은 원로원 의원들을 추방했고,[30] 원로원 의원이 되는 규칙을 개정했다. 아우구스투스의 개혁에 따르면, 원로원 의원은 자유민 신분의 시민이어야 하고, ''lex Julia de vi private'' 법에 해당하는 범죄 행위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은 적이 없어야 하며, 최소 100만 상당의 재산을 갖춰야 했다.[31]

제정 시기에, 공화정 말기처럼, 재무관으로 선출되면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제정 시기에는 원로원 의원 계급이어야 재무관직이 될 수 있었고, 원로원 의원 계급이 되려면 원로원 의원의 아들이어야만 했다.[32] 원로원 계급이 아닌 사람이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황제가 재무관직으로 선출되는 것을 허가하는 것이었고,[33] 두 번째는 황제가 칙령(adlectio)을 내려 원로원에 임명하는 것이었다.[34]

아우구스투스의 ''lex Julia de senatu habendo'' 법이 통과된 기원전 9년부터,[31] 원로원 의원들의 공식 명단 (''album senatorium'')이 유지되어 매년 개정되었다. 원로원 자격 요건을 만족시키는 사람은 명단에 추가되었고, 자격 요건을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명단에서 제거되었다.[35] 명단은 지위 순으로 의원들을 나열하였다.[36] 황제는 항상 동료 의원들보다 우선하였고, 그 뒤를 ‘집정관’과 전직 집정관, "법무관"과 전직 법무관들 순으로 따랐다. 선출직 의원들의 임기는 지위를 결정할 때 고려되며, 선출직 원로원 의원들이 황제가 임명한 동일 직위의 원로원 의원들보다 반드시 높이 쳐주는 것은 아니었다.[37]

원로원 의원 계급 출신들은 모든 로마 시민권자들의 사교복인 토가 가장자리에 붉은색상의 자줏빛 넓은 줄무늬로 구분되었다.

제정 시기에, 원로원에 대해 황제가 지닌 권력은 절대적이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황제가 종신직이었기 때문이었다.[38] 원로원 회의 중에, 황제는 두 집정관 가운데에 앉았고,[39] 보통은 의장 역할을 하였다. 제정 초기의 원로원 의원들은 관련 없는 사항에 대해 묻거나 원로원에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할 수 있었다. 고위 관직의 의원들이 하위 관직의 의원들보다 우선으로 발언을 했으며, 황제는 언제든지 발언을 할 수 있었다.[40] 황제와 집정관 외에, 법무관들도 원로원 회의의 의장을 주관할 수 있었다.

원로원은 보통 칼렌드(매달 첫 번째 일)나 이데스(매달 15일쯤)에 쿠리아 율리아에서 모였으며, 9월과 10월에는 좀 더 계획된 회의가 잦았다. 그 밖의 회의들은 그때그때 열렸다.[41] 아우구스투스 치세에, 정족수는 400명으로 맞춰졌으며, 이따금 과도한 의원 부재가 정족수에 필요한 원로원 의원 수를 줄이기도 했고, 어떤 경우에는, 정족수에 관한 규정들을 완전히 없애기도 하였다.[42]

로마 포럼에 있는 쿠리아 율리아로, 제국 원로원의 자리

2. 2. 원로원 회의 및 운영

로마 제국 초기, 황제는 종신직이었기 때문에 원로원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다.[38] 원로원 회의는 보통 매달 초하루인 칼렌데스나 15일경인 이데스에 쿠리아 율리아에서 열렸으며, 9월과 10월에는 더 자주 회의가 열렸다. 그 밖의 회의는 필요에 따라 수시로 개최되었다.[41]

황제는 두 집정관 사이에 앉아 회의를 주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39] 황제 외에도 집정관과 법무관도 원로원 회의를 주재할 수 있었다. 초기 원로원 의원들은 관련 없는 질문을 하거나 원로원에 특정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할 수 있었고, 고위 의원이 하위 의원보다 먼저 발언했지만, 황제는 언제든지 발언할 수 있었다.[40]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정족수는 400명이었으나, 의원들의 잦은 불참으로 인해 정족수를 줄이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정족수 규정을 완전히 없애기도 했다.[42]

원로원에 제출되는 법안의 대부분은 황제나 황제의 지지자들이 발의했다. 초기에는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가 원로원에 대한 영향력을 숨기기 위해 직접 법안을 제안하는 대신 사적인 로비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31] 황제의 허가 없이는 어떤 의원도 정무관 직위에 입후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의원들은 황제가 발의한 법안에 반대 투표를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법안에 반대하는 의원은 투표 당일 회의에 불참하는 방식으로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43]

각 황제는 원로원 활동을 기록할 법무관을 선택했는데, 이 문서에는 제안된 법안, 공문, 원로원 연설 요약 등이 포함되었다. 이 문서는 보관되었고, 일부는 '악타 디우르나'라는 문서로 발표되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44]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황제 엘라가발루스는 그의 어머니나 할머니를 원로원 활동에 참여시켰으며, 여성용 원로원인 세나쿨룸(senaculum)을 설치하여 의류, 전차 운전, 장신구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게 했다고 한다.[44] 그 이전에 네로의 어머니인 소 아그리파는 커튼 뒤에서 원로원 활동을 들었다고 타키투스가 전했다.[44]

3. 권한

고대 로마 민회가 제정 수립 이후에도 회의를 계속했지만, 민회의 권한은 모두 원로원으로 이전되었고, 따라서 원로원의 칙령(''senatus consulta'')은 완전한 법적 효력을 얻었다.[45] 제정 시기 원로원은 속주에 대한 권한을 유지했지만, 입법권은 주로 재정 및 행정적인 성격을 띠었다.[46] 원로원은 축제 및 종교 행사를 관장하고, 특별 훈장을 수여하며, 황제 등의 법적 책임을 면제해주고, 신전 및 대중 경기 대회를 관리하고, 조세법을 제정했다(황제의 묵인이 필요).[47] 그러나 국가 종교 행사 및 국가 토지에 대한 실질적인 권한은 없었다.

제정 초기에 고대 로마 민회가 가지고 있던 모든 사법권은 원로원으로 이전되었다. 원로원은 형사 재판에 대한 관할권을 가졌으며, 집정관이 재판을 주관하고 원로원 의원들이 배심원단을 구성했다. 판결은 칙령(''senatus consultum'')의 형태로 내려졌고,[48][49] 상고는 불가능했지만, 황제는 거부권을 행사하여 유죄를 선고받은 이를 사면할 수 있었다. 원로원 관할 속주마다 자체 법정이 있었고, 집정관의 권고에 따라 속주 법정의 결정은 원로원에 상고할 수 있었다.[50]

이론적으로 원로원은 새로운 황제를 선출했고, 민회와 함께 새 황제에게 지휘권(임페리움)을 수여했다.[51] 황제가 죽거나 퇴위하면, 원로원은 그를 신격화하거나, 로마에서 황제의 모든 흔적을 없애려는 칙령(기록말살형)을 내리기도 했다.[52] 티베리우스는 민회의 모든 선출 권한을 원로원으로 이전했고,[53] 이론적으로 원로원은 새 정무관을 선출했지만, 황제의 인가가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출 과정은 깊은 논쟁과 활발한 정쟁이 계속되었다.[54]

베스파시아누스(재위: 69-79년) 치세 때, 원로원 의원들은 로마 궁정 내 고위 관료 및 황제를 대표하는 속주 통치자라는 높아진 지위를 받았다. 기사 계급들은 초기 황제들이 자유민에게 부여했던 행정직에 종사했다. 원로원은 늘어난 책무로 조언을 제공하고 권한을 행사할 기회가 더 많아졌다. 플라비우스 왕조가 무너진 시기에, 원로원은 네르바를 새 황제로 선출했는데, 이는 제정 수립 후 원로원의 결정권이 작동했던 최초의 사례였다.[55]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후, 후임 황제들이 원로원 의원들을 적대시하고 원로원과 조언을 덜 받으면서, 원로원은 중요성이 줄어들었다.[31] 세베루스 왕조 시기에, 원로원 계급은 정부의 실질적인 업무에서 점차 배제되었고, 기사 계급 및 황제의 관료 계층에게 업무를 빼앗겼다.[31]

300년경,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일련의 헌법 개혁을 실시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원로원의 이론적 동의 없이도 권력을 가질 수 있는 황제의 권리를 주장하여, 최고 권력 보관자라는 원로원의 지위를 앗아갔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은 원로원이 독립적인 입법, 사법, 선출권을 가졌다는 환상을 끝냈다. 그러나 원로원은 로마의 경기 대회와 원로원 계급에 대한 입법권은 유지하였다. 원로원은 반역 재판을 심리하고, 황제의 허가 하에 일부 정무관을 선출하는 권한도 유지하였다. 로마 제국 말년에, 원로원은 에우게니우스처럼 황제를 임명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는데, 에우게니우스는 테오도시우스 1세를 따르는 군대에 패했다. 원로원은 퍼져가는 기독교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로마 종교의 마지막 보루였으며, 콘스탄티우스 2세가 치워버린 승리의 제단을 원로원 쿠리아에 되돌리도록 여러 차례 시도했다.

3. 1. 입법권

고대 로마 민회가 제정 수립 이후에도 회의를 계속하는 한편, 이들의 권한은 모두 원로원으로 이전되었고, 따라서 원로원의 칙령 (''senatus consulta'')은 완전한 법적 효력을 얻었다.[45] 제정 시기 원로원은 속주들에 대한 권한 정도를 유지했지만, 이들의 입법권은 재정 및 행정 속성이 주된 본질이었다.[46] 원로원은 축제 및 종교 행사를 관장하고, 특별한 훈장을 수여하며, 누군가(보통은 황제)의 법적책임을 면해주고, 신전 및 대중 경기 대회를 관리하기도 하였으며, 조세법을 제정하기도 했다(황제의 묵인이 있을 경우에만).[47] 그렇지만, 국가 종교 행사 및 국가 토지에 대한 실질적 권한은 없었다.

고대 로마 원로원의 청동 문은 로마 포룸에서 가져와 1660년에 라테란 대성당에 복원되어 설치되었다.

3. 2. 사법권

제정 초기, 고대 로마 민회가 가지고 있던 모든 사법권은 원로원으로 이전되었다. 예를 들어, 이때부터 원로원은 형사 재판에 대한 관할권을 지녔다. 이때 집정관이 재판을 주관하고 원로원 의원들이 배심원단을 구성했으며, 판결은 칙령(''senatus consultum'')의 형태로 전달되었다.[48][49] 판결은 상고할 수 없었고, 황제는 거부권을 행사하여 유죄를 선고받은 이를 사면할 수 있었다. 원로원의 관할권에 있던 속주들마다 자체 법정이 있었고, 집정관의 권고에 따라 이 속주 법정들의 결정은 원로원에 상고될 수 있었다.[50]

3. 3. 선거권 및 기타 권한

고대 로마 민회가 제정 수립 이후에도 회의를 계속했지만, 이들의 권한은 모두 원로원으로 이전되었고, 따라서 원로원의 칙령(''senatus consulta'')은 완전한 법적 효력을 얻었다.[45] 제정 시기 원로원은 속주들에 대한 권한 정도를 유지했지만, 입법권은 재정 및 행정의 주된 본질이었다.[46] 원로원은 또한 축제 및 종교 행사를 관장하고, 특별 훈장을 수여하며, 누군가(보통 황제)의 법적책임을 면해주고, 신전 및 대중 경기 대회를 관리했으며, 조세법을 제정하기도 했다(황제의 묵인이 있을 경우에만).[47] 그러나 국가 종교 행사 및 국가 토지에 대한 실질적 권한은 없었다.

제정 초기, 고대 로마 민회가 가지고 있던 모든 사법권이 원로원으로 이전되었다. 예를 들어, 원로원은 형사 재판에 대한 관할권을 가졌다. 이때 집정관이 재판을 주관하고, 원로원 의원들이 배심원단을 구성했으며, 판결은 칙령(''senatus consultum'')의 형태로 내려졌다.[48][49] 판결은 상고할 수 없었고, 황제는 거부권 행사를 통해 유죄를 선고받은 이를 사면할 수 있었다. 원로원의 관할권에 있던 속주들마다 자체 법정이 있었고, 집정관의 권고에 따라 이 속주 법정의 결정은 원로원에 상고할 수도 있었다.[50]

이론적으로 원로원은 새로운 황제를 선출했고, 민회와 함께 새 황제에게 지휘권(임페리움)을 수여했다.[51] 황제가 죽거나 퇴위하면, 원로원은 보통 그를 신격화했지만, 때로는 죽은 황제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로마에서 황제의 모든 흔적을 없애려는 칙령(기록말살형)을 내리기도 했다.[52] 티베리우스 황제는 민회의 모든 선출 권한을 원로원으로 이전했고,[53] 이론적으로 원로원은 새 정무관을 선출했지만, 황제의 인가가 있어야 선출이 완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출 과정은 깊은 논쟁과 활발한 정쟁이 계속되었다.[54]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원로원의 이론적 동의 없이도 권력을 가질 수 있는 황제의 권리를 주장하여, 최고 권력의 보관자라는 원로원의 지위를 앗아갔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은 원로원이 독립적인 입법, 사법, 선출권을 가졌다는 환상을 끝냈다. 그러나 원로원은 로마의 경기 대회에 대한 입법권과 원로원 계급에 대한 입법권은 유지하였다. 원로원은 반역 재판을 심리하고, 황제의 허가 하에 일부 정무관을 선출하는 권한도 유지하였다.

4. 로마 제국 이후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에도 로마 원로원은 명맥을 유지했다. 오도아케르동고트 왕국테오도리쿠스 대왕 치하에서 원로원은 계속 기능했으며, 야만족 지도자들은 원로원을 보호하려 했기에 그 권위가 오히려 높아지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아니키(Anicii) 가문과 같은 저명한 원로원 가문들이 성장했고, 원로원 수석은 야만족 지도자의 오른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로운 공존은 테오다하드가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반기를 들고 원로원 의원들을 인질로 잡으면서 끝나게 되었다. 이후 토틸라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몇몇 원로원 의원들이 처형되기도 했다. 로마가 제국 군대에 의해 탈환된 후 원로원은 복구되었지만, 비잔티움과 동고트 간의 오랜 전쟁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이탈리아의 모든 원로원 업무를 사실상 폐지했고, 로마 원로원의 중요성은 급격히 떨어졌다. 578년과 580년에는 티베리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랑고바르드족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며 금 약 1360.78kg을 선물로 전달하기도 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593년 설교에서 원로원 계급의 거의 완전한 소멸과 이 저명한 기관의 쇠퇴에 대해 슬퍼했다.

서방에서 로마 원로원이 언제 사라졌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603년에 원로원이 포카스 황제와 레온티아 황후의 새 조각상을 칭송했다는 기록이 있다.[56] 원로원은 교황 호노리오 1세가 쿠리아를 교회로 전환한 630년에는 해체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설치한 동로마 제국의 원로원은 최소 14세기 중반까지 존속했다.

4. 1.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서로마 제국 멸망 후, 로마 원로원은 오도아케르와 그 뒤를 이은 동고트 왕국테오도리쿠스 대왕 치하에서도 계속 기능을 유지했다. 원로원을 보호하고자 했던 이들 야만족 지도자들의 통치 기간 동안 원로원의 권위는 상당히 높아졌다. 이 시기에는 아니키(Anicii) 가문과 같은 저명한 원로원 가문들이 성장했으며, 원로원의 지도자는 야만족 지도자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 498년에는 원로원이 라우렌시오를 대립교황으로 선출했는데, 이는 테오도리쿠스 대왕아나스타시우스 1세 디코루스 황제가 모두 교황 심마코를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난 일이었다.[56]

원로원과 야만족 정권의 평화로운 공존은 동고트 왕 테오다하드가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반기를 들고 원로원 의원들을 인질로 삼으면서 끝나게 되었다. 552년에는 동고트 왕 토틸라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몇몇 원로원 의원들이 처형되기도 했다. 로마가 제국 군대에 의해 탈환된 후 원로원은 복구되었지만, 비잔티움과 동고트 간의 오랜 전쟁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많은 의원들이 살해당했고, 동방으로 피신한 의원들 중 다수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통과시킨 유리한 법률 덕분에 그곳에 남기로 결정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이탈리아의 모든 원로원 업무를 사실상 폐지했고, 이로 인해 로마 원로원의 중요성은 급격히 떨어졌다. 578년과 580년에 원로원은 티베리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10년 전 이탈리아를 침입한 랑고바르드족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며 금 약 1360.78kg을 선물로 전달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표단을 보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593년 설교(Senatus deest, or.18)에서 원로원 계급의 거의 완전한 소멸과 이 저명한 기관의 쇠퇴에 대해 슬퍼했다. 서방에서 로마 원로원이 언제 사라졌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레고리오 기록에 따르면 603년에 원로원이 포카스 황제와 레온티아 황후의 새 조각상을 칭송했다고 한다.[28] 원로원은 교황 호노리오 1세가 쿠리아를 교회로 전환한 630년에는 해체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설치한 동로마 제국의 원로원은 최소 14세기 중반까지 존속했다.

4. 2.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의 원로원

서로마 제국 멸망 후, 로마 원로원은 오도아케르동고트 왕국테오도리쿠스 대왕 치하에서 계속 기능하였다. 원로원의 권위는 야만족 지도자들의 보호 아래 상당히 높아졌으며, 이 시기에 아니키우스 가문과 같은 저명한 원로원 가문들이 부상했다. 원로원 수석은 야만족 지도자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 498년, 원로원은 테오도리쿠스 대왕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가 교황 심마코를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라우렌시오를 대립교황으로 임명했다.[56]

원로원과 야만족의 평화로운 공존은 테오다하드가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반기를 들고 원로원 의원들을 인질로 삼으면서 끝났다. 552년, 토틸라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여러 원로원 의원들이 처형되었다. 로마가 제국 군대에 탈환된 후 원로원은 복원되었으나, 비잔티움과 동고트 간의 오랜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많은 의원들이 살해당했고, 동방으로 달아난 의원들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유리한 법률 덕에 그곳에 남았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탈리아의 모든 원로원 업무를 사실상 폐지했고, 로마 원로원의 중요성은 급격히 떨어졌다.[56]

578년과 580년, 로마 원로원은 티베리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에게 랑고바르드족의 침입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며 금 약 1360.78kg을 선물로 보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593년 설교에서 원로원 계급의 소멸과 제도의 쇠퇴를 한탄했다. 로마 원로원은 603년에 포카스 황제와 레온티아 황후의 조각상을 칭송했다는 기록이 있지만,[28] 630년 교황 호노리오 1세가 쿠리아를 교회로 전환하면서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56]

콘스탄티누스 1세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설치한 동로마 제국의 원로원은 최소 14세기 중반까지 존속했다.

4. 3. 소멸

서로마 제국 멸망 후, 로마 원로원은 야만족 군주 오도아케르동고트 왕국을 세운 테오도리쿠스 대왕 치하에서도 계속 기능했다. 원로원의 권위는 원로원을 보호하려 했던 야만족 지도자들 아래에서 상당히 높아졌다. 이 시기에는 아니키(Anicii) 가문과 같은 저명한 원로원 가문들이 부상했으며, 원로원 수석은 종종 야만족 지도자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 테오도리쿠스 대왕아나스타시우스 1세 디코루스 황제가 교황 심마코를 지지했음에도, 원로원은 498년에 라우렌시오를 대립교황으로 세웠다.[56]

원로원과 야만족의 평화로운 공존은 동고트 왕 테오다하드가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반기를 들고 원로원 의원들을 인질로 삼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552년에 동고트 왕 토틸라의 사망에 대한 복수로써 의원 몇 명이 처형당하기도 했다. 로마가 비잔티움 제국 군대에 탈환된 뒤에 원로원은 복구되었으나, (고전 로마 시기처럼) 원로원은 비잔티움와 동고트 간의 오랜 전쟁으로 대단히 피해를 입었다. 많은 의원들이 살해당했고 동방으로 달아난 여러 의원들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통과시킨 유리한 법률 덕에 그곳에 남기로 택했는데, 황제는 이탈리아에 있는 모든 원로원 업무들을 사실상 폐지시켰다. 이에 따라 로마 원로원의 중요성은 급격하게 떨어졌다. 578년 그리고 580년에 다시, 로마 원로원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대표단을 보내 신임 황제 티베리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에게 선물로 약 1360.78kg의 금을 전하고 동시에 10년 전 이탈리아를 침입한 랑고바르드족에 대한 도움을 청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593년의 설교(Senatus deest, or.18) 중에 원로원 계급의 거의 완전한 소멸과 저명한 기관의 쇠퇴에 관하여 슬퍼했다.[56]

언제 서방에서 로마 원로원이 사라졌는지에 대해선 확실하게 알려진 바 없으나, 603년에 원로원이 포카스 황제와 레온티아 황후의 새 조각상을 극찬했다라는 것이 그레고리오 기록에서 전해진다.[56] 원로원은 교황 호노리오 1세가 쿠리아를 교회로 전환한 630년에는 해체된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 치세 때 설치된,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도 원로원이 계속해서 있었다. 비잔티움 원로원은 역사에서 사라져버린 최소 14세기 중엽까지 존재했었다.

참조

[1] 문서 Abbott
[2] 문서 Abbott
[3] 서적 The Senate of Imperial Rome Princeton University Press
[4] 문서 Abbott
[5] 문서 Abbott
[6] 문서 Abbott
[7] 문서 Abbott
[8] 문서 Abbott
[9] 문서 Abbott
[10] 문서 Abbott
[11] 문서 Abbott
[12] 문서 Abbott
[13] 문서 Abbott
[14] 문서 Abbott
[15] 문서 Abbott
[16] 문서 Abbott
[17] 문서 Abbott
[18] 문서 Abbott
[19] 문서 Abbott
[20] 문서 Abbott
[21] 문서 Abbott
[22] 문서 Abbott
[23] 문서 Abbott
[24] 문서 Abbott
[25] 문서 Abbott
[26] 문서 Abbott
[27] 문서 Mose Hadas "Imperial Rome" Time-Life International
[28] 웹사이트 Jeffrey Richards. The Popes and the Papacy in the Early Middle Ages, 476-752, p. 246 https://books.google[...]
[29] 문서 Abbott
[30] 문서 Abbott
[31] 서적 The Senate of Imperial Rome https://archive.org/[...] Princeton University Press
[32] 문서 Abbott
[33] 문서 Abbott
[34] 문서 Abbott
[35] 문서 Abbott
[36] 서적 Abbott
[37] 서적 Abbott
[38] 서적 Abbott
[39] 서적 Abbott
[40] 서적 Abbott
[41] 서적 Abbott
[42] 서적 Abbott
[43] 서적 Abbott
[44] 서적 Abbott
[45] 서적 Abbott
[46] 서적 Abbott
[47] 서적 Abbott
[48] 서적 Abbott
[49] 서적 Abbott
[50] 서적 Abbott
[51] 서적 Abbott
[52] 서적 Abbott
[53] 서적 Abbott
[54] 서적 Abbott
[55] 서적 Imperial Rome Time-Life International 1966
[56] 서적 The Popes and the Papacy in the Early Middle Ages, 476-752 https://books.google[...]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