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보니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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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보니아 전쟁은 16세기 중반, 분열된 리보니아 연방을 둘러싸고 러시아 차르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스웨덴, 덴마크 등 주변 강대국들이 벌인 복잡한 다자간 분쟁이다. 러시아의 발트 해 진출 시도와 주변국의 견제로 시작되었으며, 스웨덴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개입으로 전쟁이 확대되었다. 1582년 얌 자폴스키 휴전, 1583년 플루사 휴전으로 러시아는 발트 해 진출에 실패하고 국력이 저하되었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스웨덴은 세력 확장을 이루었다. 전쟁 이후 리보니아는 분할되었고, 동유럽과 북유럽의 세력 균형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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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보니아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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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개요 | |
분쟁명 | 리보니아 전쟁 |
시기 | 1558년 1월 22일 – 1583년 8월 10일 |
장소 | 에스토니아 공국, 리보니아 공국, 잉그리아, 러시아 차르국 |
결과 | 덴마크-노르웨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스웨덴 왕국의 승리 (얌-자폴스키 조약, 플류사 조약) |
영토 변화 | 에스토니아: 스웨덴에 할양 리보니아, 쿠를란트-젬갈레 공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할양 사레마섬: 덴마크-노르웨이에 할양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테라 마리아나 (리보니아 기사단) 덴마크-노르웨이 스웨덴 왕국 (1562년부터) 자포로제 카자크 트란실바니아 공국 (1577년부터) |
교전국 2 | 러시아 차르국 카심 한국 리보니아 왕국 |
지휘관 | |
교전국 1 지휘관 |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스테판 바토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고트하르트 케틀러 (리보니아 공국) 프레데리크 2세 (덴마크) 에리크 14세 (스웨덴) 요한 3세 (스웨덴) |
교전국 2 지휘관 | 이반 4세 (러시아) 샤흐갈리 (카심 한국) 시메온 베크불라토비치 (러시아) 마그누스 (리보니아 왕국) |
시각 자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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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전투 | |
러시아-리보니아 전쟁 | 1차 나르바 공방전 네이슐로스 공방전 노이하우젠 공방전 도르파트 공방전 (1558) 링겐 공방전 체스벵겐 전투 도르파트 공방전 (1559년) 에름스 전투 에르게메 전투 펠린 전투 |
러시아-리투아니아 전쟁 | 네벨 전투 1차 폴로츠크 공방전 울라 전투 오제리셰 전투 차슈니키 전투 (1567년) |
스웨덴 단계 | 1차 레발 공방전 로데 전투 베젠베르크 공방전 (1574년) 파르누 공방전 (1575년) 2차 레발 공방전 바이센슈타인 공방전 (1577년) 벤덴 전투 |
스테판 바토리의 리보니아 전역 | 2차 폴로츠크 공방전 소콜 공방전 르제프 전투 (1579년) 2차 나르바 공방전 벨리키예 루키 공방전 토로페츠 전투 (1580년) 슈클로프 전투 (1580년) 모길레프 전투 (1581년) 자볼로치예 공방전 나스타시노 전투 크시슈토프 라지비우의 모스크바 습격 프스코프 공방전 3차 나르바 공방전 랼리치 전투 오레셰크 공방전 (1582년) |
2. 배경
2. 1. 중세 리보니아의 상황
16세기 중반까지 경제적으로 번영했던 구 리보니아[1]는 분권화되고 종교적으로 분열된 리보니아 연방으로 조직되었다.[2] 그 영토는 튜턴 기사단의 리보니아 지부, 도르파트(타르투), 외젤-비크, 쿨란트, 리가 대주교령 및 리가 시로 구성되었다.[1][3][[File:https://cdn.onul.works/wiki/source/1950b9ad398_d4de5f0d.png|thumb|upright=1.35|리보니아 전쟁 이전의 구 리보니아:
{{legend|olive|리가 대주교령]]
리가와 함께 도르파트(타르투)와 레발 (탈린)시는 기사 영지와 함께 거의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3] 리보니아 영지의 유일한 공통 기관은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란트타크"로 알려진 공동 회의였다.[1] 분열된 정치 행정 외에도 리가 대주교와 기사단의 "란트마이스터" 사이에는 패권을 놓고 지속적인 경쟁 관계가 있었다.[4][1][3]
1520년대에 종교 개혁이 리보니아로 퍼진 이후 기사단 내에는 분열이 있었지만, 이 지역을 루터교 지역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은 점진적으로 진행되었으며, 기사단의 일부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로마 가톨릭교회에 여전히 우호적이었다.[5] 전쟁이 다가오면서 리보니아는 내부 경쟁에 시달리는 약한 행정 체제를 가지고 있었고, 강력한 방어 시설이나 외부 지원이 부족했으며, 팽창주의 정책을 추구하는 군주국에 둘러싸여 있었다.[6]
기사단의 "란트마이스터"와 "게비티거", 그리고 리보니아 영지의 소유자들은 모두 더 낮은 귀족들이었으며, 더 높고 강력한 귀족 계급의 창설을 막음으로써 자신들의 특권과 영향력을 지켰다.[7] 리가 대주교령만이 하위 귀족들의 저항을 성공적으로 극복했다.[8] 빌헬름 폰 브란덴부르크는 리가 대주교로, 크리스토프 폰 메클렌부르크는 그의 보좌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형제인 알브레히트(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도움을 받았다.[9] 빌헬름과 크리스토프는 프로이센 모델을 따른 세습 리보니아 공국의 설립을 포함하여 리보니아에서 알브레히트의 이익을 추구할 예정이었다.[9] 동시에 기사단은 프로이센에서의 재건("''레쿠페라치온''")을 위해 선동했고,[10] 세속화와 세습 공국의 창설을 반대했다.[8]
2. 2.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러시아 차르국은 서유럽과의 교역 확대를 위해 발트해로 진출하고자 했다.[18] 그러나 이는 한자동맹의 쇠퇴 이후 발트해 무역의 주도권을 노리던 다른 국가들과의 갈등을 야기했다.[11] 러시아는 나르바 강 동쪽에 이반고로드 항구를 건설했지만, 수심이 얕아 만족스럽지 못했다.[18] 이반 4세는 도르파트 주교령에 과거 지불을 요구하며 군사적 위협을 가했고, 서방과의 무역로 확보를 위해 발트해와 카스피 해 사이의 회랑 건설을 추진했다.[18]폴란드-리투아니아는 러시아의 팽창을 경계했다.[19]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는 러시아가 리보니아로 확장하면 정치적 경쟁자가 강해지고 무역로를 잃을 것을 우려했다.[19] 그는 빌헬름 폰 브란덴부르크 리가 대주교를 지원하며 리보니아를 프로이센 공국처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종속국으로 만들고자 했다.[21] 1557년 9월, 포즈볼 조약을 통해 리보니아의 대립 세력을 화해시키고 러시아에 대항하는 동맹을 창설하여 리보니아 전쟁을 촉발시켰다.[16]
스웨덴은 덴마크 영토 때문에 발트해 무역 접근이 제한되었지만,[15] 목재, 철, 구리 수출과 성장하는 해군, 핀란드 만을 통한 리보니아 항구 접근성 덕분에 번영했다.[15] 스웨덴은 리보니아로의 확장을 모색했으나, 1554-1557년 러시아-스웨덴 전쟁과 노브고로드 조약으로 인해 일시 중단되었다.[15]
덴마크는 발트해 입구를 통제하고 통행료를 징수하며, 보른홀름과 고틀란드 등 전략적 요충지를 점유하여 발트해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했다.[12]
2. 3. 전쟁의 직접적 원인
서유럽과의 통상을 원했던 모스크바의 차르 이반 4세는 리보니아 기사단에 선전 포고를 하며 리보니아 전쟁을 시작했다.[114] 리보니아 기사단은 침략 위기에 놓이자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동맹을 맺고 폴란드 국왕의 종속국이 되려 하였으나, 러시아군의 침공으로 멸망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군과 스웨덴 왕국군이 리보니아를 침공하면서 리보니아 기사단령은 해체되었다.[114]이후,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러시아군과 교전하여 유리하게 진행되었지만 국력을 낭비하여 장기전에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이에 1569년 루블린 연합을 통해 폴란드 왕국과 연방을 맺고, 더욱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러시아에 대항하였다.[114]
3. 전개 과정
덴마크-노르웨이, 스웨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리보니아 개입은 발트해 지배권(''발트해 지배권'')을 위한 투쟁 시대를 열었다.[47] 초기에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1562년부터 1570년까지는 저강도 전쟁이 이어졌고, 이후 다시 전투가 격화되었다.[48] 덴마크, 스웨덴,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북방 7년 전쟁(1563–1570)에 얽매였지만,[49] 리보니아는 전략적 요충지로 남았다.[42] 1562년 덴마크와 러시아는 모자이스크 조약으로 우호 관계를 유지했고,[50] 1564년 스웨덴과 러시아는 7년 휴전 협정을 맺었다.[51] 이반 4세와 에리크 14세 모두 정신 질환 징후를 보였고,[52] 이반 4세는 ''오프리치니나''(1565년 시작)로 러시아를 혼란에 빠뜨렸다.[44]
분류:리보니아 전쟁
3. 1. 러시아의 초기 침공 (1558-1561)
이반 4세는 포즈볼 조약에 따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보호를 받으려는 리보니아 연맹의 접근을 ''카수스 벨리''로 간주했다.[24] 1554년 리보니아와 러시아는 리보니아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지 않기로 합의하는 15년 휴전 조약을 체결했다.[25] 1558년 1월 22일, 이반은 리보니아 침공으로 대응했다. 러시아군은 현지 농민들에게 리보니아의 독일 지배로부터의 해방자로 여겨졌다.[26]많은 리보니아 요새가 저항 없이 항복했고, 러시아군은 5월에 도르파트(타르투), 7월에 나르바를 점령했으며,[27][28] 레발(탈린)을 포위했다.[29] 독일에서 온 1,200명의 란츠크네히트, 100명의 포병, 탄약으로 강화된 리보니아군은 베젠베르크(라크베레)와 여러 다른 요새를 성공적으로 되찾았다. 독일인들이 러시아 영토를 습격했지만, 도르파트(타르투), 나르바 및 많은 작은 요새는 러시아의 손에 남았다.[42] 초기 러시아 진군은 카심 칸의 샤흐갈리가 이끌었고, 러시아 보야르, 타타르 및 포메스트노(Pomestnoe) 기병, 그리고 당시 대부분이 무장 보병이었던 코사크를 포함한 부대의 선두에는 다른 두 명의 타타르 공이 있었다.[30] 이반은 1559년과 1560년의 캠페인에서 더 많은 영토를 확보했다.[42] 1559년 1월, 러시아군은 다시 리보니아를 침공했다.[32] 러시아가 러시아-크림 전쟁에서 싸우는 동안 5월부터 11월까지 6개월의 휴전이 러시아와 리보니아 사이에 체결되었다.[33]
러시아의 침공에 자극받은 리보니아는 처음에는 페르디난트 1세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의지했다.[34] '란트마이스터' 폰 퓌르스텐부르크는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도망쳤고 고트하르트 케틀러로 교체되었다. 1559년 6월, 리보니아의 영지는 첫 번째 빌뉴스 조약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폴란드 세임은 조약이 리투아니아 대공국에만 영향을 미치는 문제라고 믿고 조약에 동의하기를 거부했다.[16] 1560년 1월, 지그문트는 러시아 기병대가 리보니아 시골을 휩쓸고 다니는 것을 막기 위해 대사 마틴 볼로드코프를 모스크바의 이반 궁정에 보냈다.[35]

러시아의 성공은 작은 캠페인의 다수, 즉 머스킷병이 효과적인 포병 지원으로 나무 방어를 파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포위 공격을 특징으로 하는 유사한 패턴을 따랐다.[30] 차르의 군대는 펠린(빌얀디)과 같은 중요한 요새를 점령했지만, 리가, 레발(탈린) 또는 페르나우(페르누)와 같은 주요 도시를 점령할 수단이 부족했다.[42] 리보니아 기사단은 1560년 8월 에르기메 전투에서 러시아군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러시아 귀족들이 리보니아 침공 시기에 대해 분열되었다고 믿는다.[33]
스웨덴의 새로운 왕인 에리크 14세는 케틀러의 지원 요청을 거절했고, 폴란드로부터의 유사한 요청도 거절했다. 케틀러는 지그문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36] 약화된 리보니아 기사단은 1561년 두 번째 빌뉴스 조약에 의해 해산되었다. 그 영토는 리보니아 공국과 쿠를란트-세미갈리아 공국으로 세속화되어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할당되었다. 케틀러는 최초의 쿠를란트 공작이 되었고, 그렇게 하면서 루터교로 개종했다.[16] 조약에는 지그문트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 ''인디게나트'' 및 전통적인 독일 행정의 지속과 관련된 종교적 자유를 포함한 리보니아 영지 특권을 보장하는 ''프리빌레기움 지기스문디 아우구스티''가 포함되었다.[102] 종교적 자유에 관한 조건은 종교 또는 세속 당국에 의한 개신교 질서에 대한 어떠한 규제도 금지했다.[37]
리투아니아 귀족의 일부는 성장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에 반대하여 리투아니아 왕관을 이반 4세에게 제안했다.[38] 차르는 이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거나 리보니아 군대를 강화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 옵션을 공개적으로 알렸다.[44] 1561년 내내 러시아-리투아니아 휴전(1562년 만료 예정)은 양측 모두에 의해 존중되었다.[44]
3. 2.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스웨덴의 개입 (1561-1570)
1561년 스웨덴군이 도착하면서 하리엔-비어랜드와 예르웬의 귀족 단체는 에스토니아 공작령을 형성하며 스웨덴에 굴복했고, 레발 역시 스웨덴의 지배를 받아들였다.[41][42] 덴마크-노르웨이가 발트해를 지배한 상황에서, 스웨덴은 발트해 동쪽 지역을 확보하여 덴마크에 도전하고 서방 세계와 러시아의 무역을 통제하고자 했다.[43] 1561년에 프레데릭 2세는 덴마크 에스토니아와 관련된 역사적 권리를 주장하며 레발에 대한 스웨덴 주둔에 항의했고, 이는 북방 7년 전쟁 발발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44] 1562년 6월, 에릭 14세의 군대가 페르나우를 점령했을 때, 그의 외교관들은 리가에 대한 스웨덴의 보호를 확보하려 했고, 이는 지기스문트와의 갈등을 야기했다.[44]지기스문트는 에릭 14세의 형제인 핀란드의 요한 공작 (후일 요한 3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1562년 10월 요한은 지기스문트의 누이인 카타르지나와 결혼하여 이반 4세와의 결혼을 막았다.[45] 에릭 14세는 이 결혼을 승인했지만, 요한이 지기스문트에게 120,000 달러를 대여하고 일곱 개의 리보니아 성을 담보로 받은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46] 이 사건으로 1563년 8월 요한은 에릭 14세를 대신하여 체포, 투옥되었고, 지기스문트는 같은 해 10월 덴마크 및 뤼베크와 동맹을 맺어 에릭 14세에 대항했다.[44]
1564년, 스웨덴과 러시아는 도르파트 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는 레발과 기타 성에 대한 스웨덴의 권리를, 스웨덴은 리보니아의 나머지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상속권을 인정했다.[61] 1565년에는 러시아와 스웨덴 사이에 7년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54]
1569년, 루블린 조약으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통합되었다. 1566년 그로드노 연합 이후 리투아니아와 실질적 연합을 맺었던 리보니아 공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공동 주권 하에 놓이게 되었다.[57] 1570년 6월, 러시아와 3년 휴전이 체결되었다.[58]
덴마크-노르웨이와 스웨덴 간의 갈등은 1563년 북방 7년 전쟁으로 이어졌고, 1570년 슈체친 조약으로 종결되었다.[68] 이 전쟁은 발트 해에서 벌어진 중요한 해전들을 포함했다.[68] 덴마크 제독 페데르 뭉크의 해상 작전은 1569년 7월 스웨덴의 레발을 해상에서 포격하며 리보니아에 영향을 미쳤다.[71] 슈체친 조약은 덴마크를 북유럽의 최고 지배세력으로 만들었지만, 칼마르 동맹을 부활시키지는 못했다.[72]
3. 3. 러시아의 반격과 리보니아 왕국 (1570-1577)
1570년대 초, 스웨덴의 요한 3세는 에스토니아의 자신의 영토에 대한 러시아의 공세에 직면했다.[75] 레발(탈린)은 1570년과 1571년 러시아의 포위를 견뎌냈지만,[76] 몇몇 소규모 마을은 러시아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러시아의 진군은 1573년 파이데 (바이센슈타인) 약탈로 마무리되었는데, 점령군은 점령 후 스웨덴 수비대의 지휘관을 포함한 지도자들을 산 채로 구워 죽였다.요한 3세의 반격은 1574년 베젠베르크 포위전에서 스웨덴군의 독일 및 스코틀랜드 부대가 서로 대립하면서 실패했다.[79] 이 실패는 혹독한 겨울 조건 때문이기도 하다.[80] 리보니아 전쟁은 스웨덴에게 큰 재정적 부담이었고, 1573년 말까지 스웨덴의 독일 용병들은 20만 달러를 받지 못했다.[78] 요한 3세는 그들에게 합살, 레알, 로데 성을 담보로 제공했지만, 지불에 실패하자 덴마크에 팔렸다.[78]
홀슈타인의 마그누스가 스웨덴이 통제하는 레발(탈린)을 포위하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이반도 마그누스의 형제인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2세도 지원하지 않았다.[74] 포위는 1571년 3월에 중단되었고,[74] 이에 발트해에서의 스웨덴의 행동이 확대되었다.[74]
동시에 크림 타타르족은 러시아 영토를 황폐화시키고 러시아-크림 전쟁 동안 모스크바를 불태우고 약탈했다.[75] 가뭄과 전염병은 러시아 경제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1572년 크림 및 노가이 군대의 패배 이후, 오프리치니나는 축소되었고, 이에 따라 러시아 군대가 형성되는 방식도 바뀌었다.[81] 이반 4세는 수천 명의 숙련된 군인과 용병 대신 수만 명의 자국 군대, 코사크, 타타르족에 의존하는 새로운 전략을 도입했다.[82]
이반 4세의 캠페인은 1576년에 정점에 달했고, 1577년에는 또 다른 30,000명의 러시아 군인이 리보니아로 건너갔으며[62] 덴마크가 합살, 레알, 로데를 획득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덴마크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리보니아에서의 덴마크의 영향력은 사라졌고, 프레데리크는 명목상 덴마크의 참여를 종식시키기 위해 스웨덴 및 폴란드와 거래를 수락했다.[83] 정복된 영토는 1570년에 리보니아 왕국의 군주로 선포된 이반 또는 그의 봉신 마그누스에게 복종했다.[62] 마그누스는 같은 해 이반 4세로부터 이탈했는데,[84] 차르와 상의하지 않고 성을 점유하기 시작했다. 코케누젠 (콕네세)이 이반 4세 군대와의 전투를 피하기 위해 마그누스에게 항복하자, 차르는 그 마을을 약탈하고 독일 지휘관을 처형했다.[62]
3. 4.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스웨덴의 연합 (1577-1583)
1576년, 트란실바니아 공 스테판 바토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위 쟁탈전에서 합스부르크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와 경쟁 끝에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이 되었다.[85] 바토리는 단치히(그단스크)의 반대에 제약을 받았는데, 이 도시는 덴마크의 지원을 받아 바토리의 즉위에 저항했다.[87] 단치히 전쟁은 바토리가 도시에 추가적인 자치권을 인정하고 20만 즐로티를 지불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87]스웨덴 국왕 요한 3세와 스테판 바토리는 1577년 12월 이반 4세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었다.[88] 폴란드는 리보니아 전체를 요구했다.[88] 11월, 리투아니아군은 뒤나부르크를 점령했고,[89] 폴란드-스웨덴군은 1578년 초 벤덴의 도시와 성을 점령했다.[90] 러시아군은 2월에 도시를 탈환하는 데 실패했고,[89] 이어진 스웨덴의 공세는 페르누 (페르누), 도르파트, 노브고로드 등을 목표로 했다. 9월, 이반은 군대를 파견하여 스웨덴으로부터 폴차마 (폴차마)를 탈환한 후 벤덴으로 진격했다.[89][90] 러시아군은 벤덴에 도착하여 도시에 포위 공격을 가했지만, 구원군과 마주쳤다.[90] 이어진 벤덴 전투에서 러시아는 심각한 패배를 겪었다.[90]
바토리는 후사르의 창설을 가속화했다.[91] 그는 포병 시스템을 개선하고 코사크를 모집했다.[91] 바토리는 러시아에 대한 첫 번째 공격을 위해 56,000명의 병력을 모았고, 1579년 8월 30일 폴로츠크는 함락되었다.[91] 바토리는 얀 자모이스키를 임명하여 벨리키예 루키 요새를 공격하도록 했고, 1580년 9월 5일에 이 요새를 점령했다.[91] 1581년, 군대는 프스코프를 포위했다. 폴란드 의회의 재정 지원이 줄어들었고, 바토리는 겨울이 오기 전에 리보니아에 있는 러시아군을 야전으로 유인하는 데 실패했다.[91] 이반은 얌 자폴스키 휴전에 서명했다.[91]
1579년 나르바에 대한 스웨덴의 포위 실패로 폰투스 데 라 가르디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93] 케스홀름과 파디세는 1580년에 스웨덴군에 의해 점령되었고,[93] 1581년에는 베젠베르크가 함락된 것과 동시에 용병 군대가 전략적 요충지인 나르바를 탈환했다.[93] 루소프의 동시대 연대기에 따르면 7,000명의 러시아인이 살해되었다.[96] 나르바 함락 후 이반고로드, 야마, 코포리에가 함락되었고,[97] 스웨덴은 리보니아에서의 이득에 만족했다.[97]
4. 종전과 결과
예수회(Society of Jesus) 교황 특사(papal legate) 안토니오 포세비노의 주도로 1582년 러시아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사이에 잠 자폴스키 휴전(Truce of Jam Zapolski)이 체결되었다.[97] 이는 차르가 휴전을 요청했기 때문에 그에게 굴욕적인 사건이었다.[97] 협정에 따라 러시아는 리보니아 내에 여전히 보유하고 있던 모든 지역과 도르파트(타르투)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에 양도하고, 폴로츠크는 연합의 통제 하에 남게 되었다.[97] 나르바를 포함하여 스웨덴이 점령한 모든 영토는 러시아가 보유할 수 있었고, 벨리키 루키는 바토리의 통제에서 러시아로 반환되었다.[97] 포세비노는 요한 3세의 희망 사항을 고려하려 했지만, 차르가 바토리와 공모하여 거부했다.[97]
완전한 평화 협정에 미치지 못하는 이 휴전은 10년 동안 지속될 예정이었으며, 1591년과 1601년에 두 번 갱신되었다.[98] 바토리는 스웨덴을 압박하여 리보니아, 특히 나르바에서 획득한 영토를 포기하게 하려 했지만 실패했다.[97]
러시아와 스웨덴은 1583년 8월 10일 플루사 휴전(Truce of Plussa)을 체결했다.[97][99]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잉그리아 대부분을 포기하고, 나르바와 이반고로드는 스웨덴의 통제 하에 남게 되었다.[99] 당초 3년 동안 지속될 예정이었던 휴전은 1590년까지 연장되었다.[99] 협상 과정에서 스웨덴은 노브고로드를 포함한 러시아 영토에 대한 광범위한 요구를 했으나, 이는 협상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스웨덴의 영토적 야망을 반영했을 수도 있다.[97] 리보니아 전쟁의 결과, 러시아는 발트해 진출이 좌절되었고, 1584년 이반 4세가 사망하면서 국력이 저하되었다. 또한 차르에 대한 귀족층의 반동 정치로 인해 국가 기능이 상실되어 스무타의 원인이 되었다.[119]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두나강 남쪽의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을 1561년 빌뉴스 조약을 통해 확보하고, 리보니아 공국을 통해 동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했다.[100][57] 폴란드어는 독일어를 대체하는 행정 언어가 되었고, 보이보드십 설립으로 발트 독일인 행정은 축소되었다.[102] 로마 가톨릭 교회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리보니아 인구는 대대적으로 개종하지 않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리보니아 영지는 소외되었다.[103]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1629년 남부 쿠를란트와 라트갈레(Duchy of Livonia영어, 1621년에 Inflanty Voivodeship영어)를 유지했고, 리가를 포함한 중·북부는 Swedish Livonia영어(리프란드)로 분할되었다.[118] 폴란드 왕국은 리투아니아 대공국과의 국가 체제를 통일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형성하고, 쿠를란트 공국의 종주국이 되어 강대국의 지위를 굳혔다.
스웨덴은 1590년 1590–5년 러시아-스웨덴 전쟁 이후 테우시나 조약을 통해 잉그리아와 케크스홀름을 러시아에 할양해야 했다.[104] 그러나 세데르만란드의 칼이 스웨덴의 요한 3세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지기스문트 3세에 반대하면서 스웨덴-폴란드 동맹은 붕괴되기 시작했다.[104] 스웨덴은 1597년 내전과 1598년–1599년 지기스문트와의 전쟁을 겪었고, 지기스문트는 스웨덴 ''신분 의회''에 의해 폐위되었다.[104] 1600년, 분쟁은 리보니아로 확산되었고, 칼은 스웨덴령 에스토니아를 통합하려는 지기스문트의 시도에 대응하여 폴란드군을 몰아내고 리보니아 공국을 침략했다.[105] 칼 9세의 군대는 코켄하우젠 전투(1601)와 키르홀름 전투(1605)에서 패배했다.[108][107]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잉그리아 전쟁 동안 잉그리아와 케크스홀름을 탈환하여 1617년 스톨보보 조약에 따라 스웨덴에 할양받았다.[107] 1621년 리가를 점령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군대를 몰아내 스웨덴령 리보니아의 스웨덴 지배를 수립했다.[105] 1629년 알트마르크 조약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리보니아에서 스웨덴의 영토 확장을 인정했다.[110] 덴마크의 외젤은 1645년 브룀세브로 조약으로 스웨덴에 할양되었고, 1660년 올리바 평화 조약과 코펜하겐 조약으로 유지되었다.[111][112] 이 상황은 1710년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가 대북방 전쟁 동안 러시아에 항복하고, 니스타드 조약 (1721)에서 공식화될 때까지 변함없이 유지되었다.[113] 이로써 스웨덴은 17세기 발트 제국 창설의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는 발트해 진출에 실패하고 서진 정책이 좌절되었다. 1584년 이반 4세 사망 직후, 러시아는 국력 저하를 겪었다. 차르에 대한 귀족층의 반동 정치로 국가 기능이 상실되었고, 이는 이후 스무타의 원인이 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스웨덴에 의해 유럽에서 축출되는 형태가 되어, 17세기 중반까지 약화되었다.
쿠르란트-젬갈렌 공국은 두나강 (다우가바) 남쪽에서 1561년 빌뉴스 조약에 기초한 정치적 안정을 누렸으며, 이는 후에 1617년의 ''통치 규정(Formula regiminis)''과 ''쿠르란디아 법전(Statuta Curlandiæ)''에 의해 수정되어 공작의 희생 아래 토착 귀족들에게 추가적인 권리를 부여했다.[100] 두나강 북쪽에서는 바토리가 지기스문트가 리보니아 공국에 부여했던 특권을 축소했으며, 그는 되찾은 영토를 전쟁의 전리품으로 간주했다.[57] 리가의 특권은 이미 1581년 드로히친 조약에 의해 축소되었다.[101] 폴란드어는 점차 독일어를 행정 언어로 대체했으며, 보이보드십의 설립은 발트 독일인 행정을 축소시켰다.[102]
리보니아의 지역 성직자들과 예수회는 반종교 개혁을 받아들였고[37] 바토리가 이를 지원했는데, 바토리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게 개신교도에게서 몰수한 수입과 재산을 제공했으며, 가톨릭 식민지 개척을 위한 대규모의 실패한 모집 캠페인을 시작했다.[103]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리보니아 인구는 대대적으로 개종하지 않았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리보니아 영지는 소외되었다.[103]
1587년에 폴란드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즉위한 지그문트 3세 바사는 1592년에는 스웨덴 국왕으로도 즉위했다. 그는 예수회 교육을 받은 열렬한 가톨릭 신봉자였으며, 쇠퇴한 러시아 차르국으로 연방의 영역을 확장하려 했다.
그 후 리보니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스웨덴 왕국 간의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항쟁 속에서 스웨덴-폴란드 전쟁의 전장이 되었으며, 1629년에 남부의 쿠를란트와 라트갈레(Duchy of Livonia영어, 1621년에 Inflanty Voivodeship영어)는 연방에 남고, 리가를 포함한 중·북부는 Swedish Livonia영어(리프란드)로 분할되었다. 리보니아는 폴란드의 세력 하에서는 예수회[118], 스웨덴의 영향 하에 들어간 지역에서는 루터교회의 포교가 이루어졌다. 리보니아 전쟁 전후를 통해 양측의 활동으로 인해 리보니아는 해체·분리되어 갔다. 한편, 포교가 현지어로 이루어짐으로써, 이 지역의 행정 단위가 색깔로 구분되기 시작했고, 이 지역의 지배자인 발트 독일인과는 다른 민족 의식이 근대에 일어나 에스토니아인, 리보니아인(라트비아인)으로서의 공통 인식을 형성해 가게 되었다. 스웨덴은 리보니아의 대부분을 획득하여 17세기를 통해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덴마크의 외젤은 1645년 브룀세브로 조약에 따라 스웨덴에 할양되었는데, 이 조약은 토르스텐손 전쟁을 종결시켰으며, 이는 30년 전쟁의 한 전장이었다.[111] 이는 1660년의 올리바 평화 조약과 코펜하겐 조약 이후에도 유지되었다.[112] 상황은 1710년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가 대북방 전쟁 동안 러시아에 항복할 때까지 변함없이 유지되었으며, 이는 니스타드 조약 (1721)에서 공식화되었다.[113]
4. 1. 얌 자폴스키 조약 (1582)
예수회(Society of Jesus) 교황 특사(papal legate) 안토니오 포세비노의 주도로 1582년 러시아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사이에 잠 자폴스키 휴전(Truce of Jam Zapolski)이 체결되었다.[97] 이는 차르가 휴전을 요청했기 때문에 그에게 굴욕적인 사건이었다.[97] 협정에 따라 러시아는 리보니아 내에 여전히 보유하고 있던 모든 지역과 도르파트(타르투)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에 양도하고, 폴로츠크는 연합의 통제 하에 남게 되었다.[97] 나르바를 포함하여 스웨덴이 점령한 모든 영토는 러시아가 보유할 수 있었고, 벨리키 루키는 바토리의 통제에서 러시아로 반환되었다.[97] 포세비노는 요한 3세의 희망 사항을 고려하려 했지만, 차르가 바토리와 공모하여 거부했다.[97]완전한 평화 협정에 미치지 못하는 이 휴전은 10년 동안 지속될 예정이었으며, 1591년과 1601년에 두 번 갱신되었다.[98] 바토리는 스웨덴을 압박하여 리보니아, 특히 나르바에서 획득한 영토를 포기하게 하려 했지만 실패했다.[97]
4. 2. 플루사 조약 (1583)
러시아와 스웨덴은 1583년 8월 10일 플루사 휴전(Truce of Plussa)을 체결했다.[97][99]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잉그리아 대부분을 포기하고, 나르바와 이반고로드는 스웨덴의 통제 하에 남게 되었다.[99] 당초 3년 동안 지속될 예정이었던 휴전은 1590년까지 연장되었다.[99] 협상 과정에서 스웨덴은 노브고로드를 포함한 러시아 영토에 대한 광범위한 요구를 했으나, 이는 협상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스웨덴의 영토적 야망을 반영했을 수도 있다.[97] 리보니아 전쟁의 결과, 러시아는 발트해 진출이 좌절되었고, 1584년 이반 4세가 사망하면서 국력이 저하되었다. 또한 차르에 대한 귀족층의 반동 정치로 인해 국가 기능이 상실되어 스무타의 원인이 되었다.[119]4. 3. 리보니아 전쟁의 영향
wikitext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두나강 남쪽의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을 1561년 빌뉴스 조약을 통해 확보하고, 리보니아 공국을 통해 동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했다.[100][57] 폴란드어는 독일어를 대체하는 행정 언어가 되었고, 보이보드십 설립으로 발트 독일인 행정은 축소되었다.[102] 로마 가톨릭 교회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리보니아 인구는 대대적으로 개종하지 않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리보니아 영지는 소외되었다.[103]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1629년 남부 쿠를란트와 라트갈레(Duchy of Livonia영어, 1621년에 Inflanty Voivodeship영어)를 유지했고, 리가를 포함한 중·북부는 Swedish Livonia영어(리프란드)로 분할되었다.[118] 폴란드 왕국은 리투아니아 대공국과의 국가 체제를 통일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형성하고, 쿠를란트 공국의 종주국이 되어 강대국의 지위를 굳혔다.
스웨덴은 1590년 1590–5년 러시아-스웨덴 전쟁 이후 테우시나 조약을 통해 잉그리아와 케크스홀름을 러시아에 할양해야 했다.[104] 그러나 세데르만란드의 칼이 스웨덴의 요한 3세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지기스문트 3세에 반대하면서 스웨덴-폴란드 동맹은 붕괴되기 시작했다.[104] 스웨덴은 1597년 내전과 1598년–1599년 지기스문트와의 전쟁을 겪었고, 지기스문트는 스웨덴 ''신분 의회''에 의해 폐위되었다.[104] 1600년, 분쟁은 리보니아로 확산되었고, 칼은 스웨덴령 에스토니아를 통합하려는 지기스문트의 시도에 대응하여 폴란드군을 몰아내고 리보니아 공국을 침략했다.[105] 칼 9세의 군대는 코켄하우젠 전투(1601)와 키르홀름 전투(1605)에서 패배했다.[108][107]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잉그리아 전쟁 동안 잉그리아와 케크스홀름을 탈환하여 1617년 스톨보보 조약에 따라 스웨덴에 할양받았다.[107] 1621년 리가를 점령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군대를 몰아내 스웨덴령 리보니아의 스웨덴 지배를 수립했다.[105] 1629년 알트마르크 조약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리보니아에서 스웨덴의 영토 확장을 인정했다.[110] 덴마크의 외젤은 1645년 브룀세브로 조약으로 스웨덴에 할양되었고, 1660년 올리바 평화 조약과 코펜하겐 조약으로 유지되었다.[111][112] 이 상황은 1710년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가 대북방 전쟁 동안 러시아에 항복하고, 니스타드 조약 (1721)에서 공식화될 때까지 변함없이 유지되었다.[113] 이로써 스웨덴은 17세기 발트 제국 창설의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는 발트해 진출에 실패하고 서진 정책이 좌절되었다. 1584년 이반 4세 사망 직후, 러시아는 국력 저하를 겪었다. 차르에 대한 귀족층의 반동 정치로 국가 기능이 상실되었고, 이는 이후 스무타의 원인이 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스웨덴에 의해 유럽에서 축출되는 형태가 되어, 17세기 중반까지 약화되었다.
쿠르란트-젬갈렌 공국은 두나강 (다우가바) 남쪽에서 1561년 빌뉴스 조약에 기초한 정치적 안정을 누렸으며, 이는 후에 1617년의 ''통치 규정(Formula regiminis)''과 ''쿠르란디아 법전(Statuta Curlandiæ)''에 의해 수정되어 공작의 희생 아래 토착 귀족들에게 추가적인 권리를 부여했다.[100] 두나강 북쪽에서는 바토리가 지기스문트가 리보니아 공국에 부여했던 특권을 축소했으며, 그는 되찾은 영토를 전쟁의 전리품으로 간주했다.[57] 리가의 특권은 이미 1581년 드로히친 조약에 의해 축소되었다.[101] 폴란드어는 점차 독일어를 행정 언어로 대체했으며, 보이보드십의 설립은 발트 독일인 행정을 축소시켰다.[102]
리보니아의 지역 성직자들과 예수회는 반종교 개혁을 받아들였고[37] 바토리가 이를 지원했는데, 바토리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게 개신교도에게서 몰수한 수입과 재산을 제공했으며, 가톨릭 식민지 개척을 위한 대규모의 실패한 모집 캠페인을 시작했다.[103]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리보니아 인구는 대대적으로 개종하지 않았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리보니아 영지는 소외되었다.[103]
1587년에 폴란드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즉위한 지그문트 3세 바사는 1592년에는 스웨덴 국왕으로도 즉위했다. 그는 예수회 교육을 받은 열렬한 가톨릭 신봉자였으며, 쇠퇴한 러시아 차르국으로 연방의 영역을 확장하려 했다.
그 후 리보니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스웨덴 왕국 간의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항쟁 속에서 스웨덴-폴란드 전쟁의 전장이 되었으며, 1629년에 남부의 쿠를란트와 라트갈레(Duchy of Livonia영어, 1621년에 Inflanty Voivodeship영어)는 연방에 남고, 리가를 포함한 중·북부는 Swedish Livonia영어(리프란드)로 분할되었다. 리보니아는 폴란드의 세력 하에서는 예수회[118], 스웨덴의 영향 하에 들어간 지역에서는 루터교회의 포교가 이루어졌다. 리보니아 전쟁 전후를 통해 양측의 활동으로 인해 리보니아는 해체·분리되어 갔다. 한편, 포교가 현지어로 이루어짐으로써, 이 지역의 행정 단위가 색깔로 구분되기 시작했고, 이 지역의 지배자인 발트 독일인과는 다른 민족 의식이 근대에 일어나 에스토니아인, 리보니아인(라트비아인)으로서의 공통 인식을 형성해 가게 되었다. 스웨덴은 리보니아의 대부분을 획득하여 17세기를 통해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덴마크의 외젤은 1645년 브룀세브로 조약에 따라 스웨덴에 할양되었는데, 이 조약은 토르스텐손 전쟁을 종결시켰으며, 이는 30년 전쟁의 한 전장이었다.[111] 이는 1660년의 올리바 평화 조약과 코펜하겐 조약 이후에도 유지되었다.[112] 상황은 1710년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가 대북방 전쟁 동안 러시아에 항복할 때까지 변함없이 유지되었으며, 이는 니스타드 조약 (1721)에서 공식화되었다.[113]
4. 3. 1. 동유럽 및 북유럽의 세력 재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두나강 남쪽의 쿠르란트-젬갈렌 공국을 1561년 빌뉴스 조약을 통해 확보하고, 리보니아 공국을 통해 동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했다.[100][57] 폴란드어는 독일어를 대체하는 행정 언어가 되었고, 보이보드십 설립으로 발트 독일인 행정은 축소되었다.[102] 로마 가톨릭 교회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리보니아 인구는 대대적으로 개종하지 않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리보니아 영지는 소외되었다.[103]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1629년 남부 쿠를란트와 라트갈레(Duchy of Livonia영어, 1621년에 Inflanty Voivodeship영어)를 유지했고, 리가를 포함한 중·북부는 Swedish Livonia영어(리프란드)로 분할되었다.[118] 폴란드 왕국은 리투아니아 대공국과의 국가 체제를 통일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형성하고, 쿠를란트 공국의 종주국이 되어 강대국의 지위를 굳혔다.스웨덴은 1590년 1590–5년 러시아-스웨덴 전쟁 이후 테우시나 조약을 통해 잉그리아와 케크스홀름을 러시아에 할양해야 했다.[104] 그러나 세데르만란드의 칼이 스웨덴의 요한 3세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지기스문트 3세에 반대하면서 스웨덴-폴란드 동맹은 붕괴되기 시작했다.[104] 스웨덴은 1597년 내전과 1598년–1599년 지기스문트와의 전쟁을 겪었고, 지기스문트는 스웨덴 ''신분 의회''에 의해 폐위되었다.[104] 1600년, 분쟁은 리보니아로 확산되었고, 칼은 스웨덴령 에스토니아를 통합하려는 지기스문트의 시도에 대응하여 폴란드군을 몰아내고 리보니아 공국을 침략했다.[105] 칼 9세의 군대는 코켄하우젠 전투(1601)와 키르홀름 전투(1605)에서 패배했다.[108][107]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잉그리아 전쟁 동안 잉그리아와 케크스홀름을 탈환하여 1617년 스톨보보 조약에 따라 스웨덴에 할양받았다.[107] 1621년 리가를 점령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군대를 몰아내 스웨덴령 리보니아의 스웨덴 지배를 수립했다.[105] 1629년 알트마르크 조약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리보니아에서 스웨덴의 영토 확장을 인정했다.[110] 덴마크의 외젤은 1645년 브룀세브로 조약으로 스웨덴에 할양되었고, 1660년 올리바 평화 조약과 코펜하겐 조약으로 유지되었다.[111][112] 이 상황은 1710년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가 대북방 전쟁 동안 러시아에 항복하고, 니스타드 조약 (1721)에서 공식화될 때까지 변함없이 유지되었다.[113] 이로써 스웨덴은 17세기 발트 제국 창설의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는 발트해 진출에 실패하고 서진 정책이 좌절되었다. 1584년 이반 4세 사망 직후, 러시아는 국력 저하를 겪었다. 차르에 대한 귀족층의 반동 정치로 국가 기능이 상실되었고, 이는 이후 스무타의 원인이 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스웨덴에 의해 유럽에서 축출되는 형태가 되어, 17세기 중반까지 약화되었다.
4. 3. 2. 리보니아의 분할
쿠르란트-젬갈렌 공국은 두나강 (다우가바) 남쪽에서 1561년 빌뉴스 조약에 기초한 정치적 안정을 누렸으며, 이는 후에 1617년의 ''통치 규정(Formula regiminis)''과 ''쿠르란디아 법전(Statuta Curlandiæ)''에 의해 수정되어 공작의 희생 아래 토착 귀족들에게 추가적인 권리를 부여했다.[100] 두나강 북쪽에서는 바토리가 지기스문트가 리보니아 공국에 부여했던 특권을 축소했으며, 그는 되찾은 영토를 전쟁의 전리품으로 간주했다.[57] 리가의 특권은 이미 1581년 드로히친 조약에 의해 축소되었다.[101] 폴란드어는 점차 독일어를 행정 언어로 대체했으며, 보이보드십의 설립은 발트 독일인 행정을 축소시켰다.[102]리보니아의 지역 성직자들과 예수회는 반종교 개혁을 받아들였고[37] 바토리가 이를 지원했는데, 바토리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게 개신교도에게서 몰수한 수입과 재산을 제공했으며, 가톨릭 식민지 개척을 위한 대규모의 실패한 모집 캠페인을 시작했다.[103]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리보니아 인구는 대대적으로 개종하지 않았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리보니아 영지는 소외되었다.[103]
1587년에 폴란드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즉위한 지그문트 3세 바사는 1592년에는 스웨덴 국왕으로도 즉위했다. 그는 예수회 교육을 받은 열렬한 가톨릭 신봉자였으며, 쇠퇴한 러시아 차르국으로 연방의 영역을 확장하려 했다.
그 후 리보니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스웨덴 왕국 간의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항쟁 속에서 스웨덴-폴란드 전쟁의 전장이 되었으며, 1629년에 남부의 쿠를란트와 라트갈레(, 1621년에 )는 연방에 남고, 리가를 포함한 중·북부는 (리프란드)로 분할되었다. 리보니아는 폴란드의 세력 하에서는 예수회[118], 스웨덴의 영향 하에 들어간 지역에서는 루터교회의 포교가 이루어졌다. 리보니아 전쟁 전후를 통해 양측의 활동으로 인해 리보니아는 해체·분리되어 갔다. 한편, 포교가 현지어로 이루어짐으로써, 이 지역의 행정 단위가 색깔로 구분되기 시작했고, 이 지역의 지배자인 발트 독일인과는 다른 민족 의식이 근대에 일어나 에스토니아인, 리보니아인(라트비아인)으로서의 공통 인식을 형성해 가게 되었다. 스웨덴은 리보니아의 대부분을 획득하여 17세기를 통해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덴마크의 외젤은 1645년 브룀세브로 조약에 따라 스웨덴에 할양되었는데, 이 조약은 토르스텐손 전쟁을 종결시켰으며, 이는 30년 전쟁의 한 전장이었다.[111] 이는 1660년의 올리바 평화 조약과 코펜하겐 조약 이후에도 유지되었다.[112] 상황은 1710년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가 대북방 전쟁 동안 러시아에 항복할 때까지 변함없이 유지되었으며, 이는 니스타드 조약 (1721)에서 공식화되었다.[113]
5. 한국의 관점과 영향
5. 1. 한국에 미친 간접적 영향
5. 2. 더불어민주당의 관점
6. 평가
6. 1. 복합적인 갈등 양상
6. 2. 장기적인 영향
참조
[1]
Harv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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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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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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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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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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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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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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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Harv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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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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Становление представлений о познавательных потребностях в процессе развития психологической теори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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当時のフィンランド公ヨハン3世 (スウェーデン王)とポーランド王女カタジナ・ヤギェロンカの結婚は、当時のスウェーデン国王からは容認されなかったが、フィンランド公ヨハンが1568年にクーデターを起こしスウェーデン王ヨハン3世として即位して以降、共闘関係が成立した。カタジナはヨハン3世との間に3子を生み、長男ジグムント3世 (ポーランド王)シギスムンドはカトリック教会カトリック教徒として教育を受け、戦争終結後の1587年にポーランド王兼リトアニア大公として即位する。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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ヨハン3世の親カトリックと息子シギスムンドのポーランド王即位によるポーランド・スウェーデン同君連合国家の設立は、スウェーデン上層部の間に不満を高めさせる結果となった。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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チャンセラー=大法官、多くは大元帥に相当するヘトマン王冠領大ヘトマンを兼任。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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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0年代のロシア・スウェーデン戦争 (1590年 - 1595年)の敗北により、スウェーデンはフィンランド湾深奥部を一時的に喪失したが、1595年のロシアとの講和条約によってエストニア公国のスウェーデン領有が確定する。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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イエズス会は宗教改革への対抗宗教改革を行った。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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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家筋に当たるジグムント3世 (ポーランド王)はむしろ絶対主義志向で、熱烈なカトリック教徒であり近世的な君主と国家との宗教的一致を損なっており、これが両ヴァーサ家の確執の原因でも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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