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시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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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시마섬은 센다이만 중앙부에 위치한 다도해로, 미야기현의 히가시마쓰시마시, 시치가하마정 등에 걸쳐 있다. 리아스식 해안이 침강하여 형성된 지형으로, 약 26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섬의 수에 대한 다양한 기록이 존재한다. 지층은 침식에 약한 응회암, 사암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풍화 작용으로 인해 지형이 변화해 왔다. 마쓰시마는 "808섬"으로 불리며, 에도 시대부터 문예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었고, 현재는 국가의 특별 명승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교통은 센다이시에서 기차, 버스, 자동차 등을 통해 접근 가능하며, 유람선을 통해 섬 주변을 관광할 수 있다. 마쓰시마 사대관으로 불리는 네 곳의 전망 포인트가 있으며, 주변 지역으로는 히가시마쓰시마시, 마쓰시마정, 리후정, 시오가마시, 시치가하마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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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시마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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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형 및 자연
마쓰시마는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하며, 많은 섬들이 흩어져 있는 다도해의 모습을 하고 있다. 관광객들은 크루즈선을 타고 섬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과 쓰나미가 발생했을 때, 마쓰시마 지역은 섬들 덕분에 비교적 적은 피해를 입었다.[4][5] 쓰나미의 높이는 3.2m에서 3.8m였다. 전기는 3월 18일, 물은 4월 16일까지 완전히 복구되었으며, 센세키선(다카기마치역과 센다이 사이)은 5월 28일까지 복구되었다. 마쓰시마에서는 3명(여진으로 인한 사망자 포함), 시외에서 18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6]
2. 1. 지형 형성 과정
마쓰시마만은 센다이만의 중앙부에 위치한 지만(支灣)으로, 미야기현 히가시마쓰시마시와 시치가하마정 사이에 있는 다도해이다.[10] 마쓰시마의 지형은 미야기현 중앙부의 마쓰시마 구릉 동쪽 끝이 바다에 닿아 침수되어 생긴 리아스식 해안이 더욱 진전된 침강 지형이다. 선신세에 일어난 지반 운동으로 센다이만이 융기하여 육지화되고, 현재의 마쓰시마만에 해당하는 부분에 육지가 돌출되어 반도와 같은 지형이 형성되었다. 이후 하천 침식으로 골짜기가 생기고, 홍적세 초기에 단층 운동으로 반도가 해중에 몰입, 해식면(海蝕面)이 형성되어 높은 곳은 섬이 되었다. 홍적세 중기부터 후기에 걸쳐 가라앉았던 반도가 다시 융기하여 해식대지(海蝕臺地)가 되고, 다시 하식 작용을 받았다. 홍적세 말기에 다시 침수되어 높은 부분만 섬으로 남아 현재의 지형이 형성되었다.[11]2. 2. 지질 및 침식
마쓰시마 지역 대부분의 지층은 제3기층의 응회암, 사암, 역암 등으로 구성되어 침식에 매우 약하다. 특히 파도에 씻기는 부분은 쉽게 침식된다. 따라서 많은 작은 섬들은 상부에 소나무 등이 자라고, 해면에 가까운 기부는 흰색에서 회백색의 암반을 보이고 있다. 또한, 해수면 근처가 파도에 씻겨 날카롭게 파여 버섯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 섬도 있다. 침식에 의한 기암이나 일본 3대 계곡으로 꼽히는 사가계와 같은 해식 절벽도 볼 수 있다.1970년 1월 31일, 쇼와 45년 1월 저기압에 의한 폭풍우가 마쓰시마를 덮쳤을 때, 시오가마시의 아라카자키섬이 하룻밤 사이에 소멸하는[12] 등 지형 변화가 심한 기록도 남아 있다.
2. 3. 섬의 수
마쓰시마의 섬들은 종종 "808섬"으로 형용되지만, 섬의 수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아 옛날부터 문헌에 따라 다양하게 기록되어 왔다. 에도 시대 오요도 산푸가 마쓰시마를 널리 소개하기 위해 편찬한 『마쓰시마 조망집』에서는 92개, 센다이 번이 편찬한 지지 『봉내 풍토기』에서는 87개, 1910년(메이지 43년) 『마쓰시마 공원 경영 개요』에서는 240여 개, 1981년(쇼와 56년) 『현립 자연공원 마쓰시마 학술 조사 보고서』에서는 230개의 섬이 있다고 기록되었다.[13] 마쓰시마만을 관할하는 제2관구 해상보안본부는 섬의 수를 128개로 파악하고 있다고 한다.[13]섬의 수가 불확실했기 때문에 쇼와 40년대(1965년~1974년) 조사가 이루어졌고, 260여 개라는 수가 마쓰시마의 통일 견해로 간주되어 각 기관에 통지되었다. 『마쓰시마 정사(통사 편 2)』(1991년)에서는 국토지리원 지도 등을 참고하여 마쓰시마만 내의 섬 중에서 명칭이 있는 것이 144개, 무명의 섬이 98개 있다고 적고 있다.[13] 다만, 이 수에는 매립되었거나 지진이나 자연 붕괴로 인해 섬이라고 할 수 없게 된 것이 몇 개 포함되어 있다.[13] 암초를 섬의 수로 포함하면 마쓰시마만의 섬의 수는 약 300개가 될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13]
2. 4. 생물
만 안의 주요 어류는 망둑어, 붕장어이며, 조개류는 굴, 바지락이다.[13] 석곡은 야생 난초과 식물로, 미야기현 부근이 야생 북방한계이다. 마쓰시마 주변에서는 "이와타케"라는 별명이 있다. 꽃이 피는 시기는 5월 하순부터 6월 초순으로, 분홍색 꽃이 핀다. 멸종 위기 종이었지만, 즈이간지 경내의 늙은 삼나무 가지에 착생하고 있는 원주에서 늘려, 현재는 화분으로 된 토산품이 되었다.[13]3. 역사
메이지 시대 이전에는 마쓰시마섬이 극락정토로의 왕생과 죽은 자의 명복을 비는 영장으로 여겨져, 유골의 일부를 오지마(雄島)에 납골하는 풍습이 있었다.
3. 1. 근현대
메이지 시대 이전에는 극락정토(極楽浄土)로의 왕생(往生)과 죽은 자의 명복(冥福)을 비는 영장(霊場)으로 여겨져, 유골의 일부를 오지마(雄島)에 납골하는 풍습이 있었다. 2011년 3월 11일에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과 그 직후에 덮친 대쓰나미로 인해 섬의 문화재 일부가 파손되는 등의 피해가 발생했지만, 주변 자치단체와 비교하여 피해는 경미하게 끝났다. 그 이유로, 쓰나미는 얕은 바다에 들어오면 속도가 느려지고 급격히 에너지를 잃는 것과 우라토 제도가 방파제 역할을 하여 쓰나미의 기세를 약화시켰다고 여겨진다.[34][35]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과 쓰나미의 근접성에도 불구하고, 마쓰시마 지역은 섬들에 의해 보호받아 비교적 적은 피해를 입었다.[4][5] 초기 쓰나미는 3.2m였고, 두 번째는 3.8m였다. 전기는 3월 18일까지 복구되었고, 물은 4월 16일까지 완전히 복구되었으며, 다카기마치역과 센다이 사이의 센세키선은 5월 28일까지 복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쓰시마에서는 (여진으로 인한 사망자를 포함하여) 3명이 사망했으며, 시외에서 18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6]
마쓰시마는 국가의 특별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관리 단체인 미야기현에 의해 "특별 명승 마쓰시마 보존 관리 계획"이 수립되어 있다. 문화재 보호법 및 앞서 언급한 보존 관리 계획에 따라, 특별 명승 "마쓰시마" 지정 구역 내의 보호 지구에서 현상 변경(건축물의 신축 등)을 할 경우에는, 미야기현 교육위원회 및 문화청 장관의 허가가 필요하다.[36][37] 고지대에서의 건물 신축도 현상 변경에 해당하지만, 동일본 대지진에 의한 피해로 주민들로부터 고지대로의 이주 요구가 높아짐에 따라, 미야기현이 문화청에 규제 완화를 요청하여 협의한 결과, 그 방향으로 검토하게 되었다.[38] 향후, 미야기현과 지정 범위의 시오가마시, 히가시마쓰시마시, 마쓰시마정, 시치가하마정, 리후정 등에서 협의를 진행할 방침이다.[39]
또한 문화청은, 마쓰시마에서의 "폐기물 처리 시설"의 건설도 특례로 허가하게 되었다(2014년 3월까지의 한정 허가. 주변 경관을 고려하여 시설의 색상, 형태에 배려하는 등의 제약 하에)[40]
4. 마쓰시마 사대관(四大観) 및 기타 전망 시설
마쓰시마섬을 조망할 수 있는 명소로는 마쓰시마 사대관(四大観)이 있다. 사대관은 에도 시대 센다이 번의 유학자 후나야마 만넨이 선정한 "시오마쓰 환해 사산"에서 유래한다.
- 장관(壮観|소칸일본어): 히가시마쓰시마시 미야토섬의 오타카모리에서 보이는 풍경.
- 여관(麗観|레이칸일본어): 마쓰시마정 도미산에 있는 다이교지에서 보이는 풍경.
- 유관(幽観|유칸일본어): 마쓰시마정과 리후정 경계에 있는 오기야에서 보이는 풍경.
- 위관(偉観|이칸일본어): 시치가하마정 다이가사키의 다몬산(多聞山)에서 보이는 풍경.
이 외에도 797년 (연력 16년)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가 극찬한 "장로 언덕"(미야기현도 제144호 아카누마 마쓰시마 선)에서의 조망이 예로부터 유명하다.[18] 사이교 모도시노 마쓰(사이교 되돌림의 소나무) 공원, 신토미야마, 시오가마와 마쓰시마 해안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소칸산, 오기다니[19] 등도 전망대로 알려져 있다. 마쓰오 바쇼가 마쓰시마에 머물렀을 때 숙박했던 아쓰타야(즈이간지 참도 입구 부근) 부지에 있는 상업 시설 옥상은 무료로 개방되어 있으며,[20] 다이칸산은 현재 호텔 부지 내에 있어 호텔 이용객만 들어갈 수 있다. 과거에는 마쓰시마 타워가 있었으나 해체되었다.
관광객들은 크루즈선을 타고 섬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4. 1. 마쓰시마 사대관
마쓰시마섬에는 네 곳의 유명한 장소가 있는데, 각각 장관(壮観|소칸일본어), 여관(麗観|레이칸일본어), 유관(幽観|유칸일본어), 위관(偉観|이칸일본어)으로 불린다.[15] 이들은 에도 시대에 센다이 번의 유학자 후나야마 만넨이 선정한 "시오마쓰 환해 사산"에서 유래한다.[16]




- 장관(壮観|소칸일본어): 히가시마쓰시마시 미야토섬의 오타카모리에서 보이는 풍경. 해발 105.8미터. 다른 세 곳은 시야가 한정되어 있지만, 이곳은 사방이 탁 트여 광대한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17] 마쓰시마 만을 동쪽 끝에서 서쪽 방향으로 바라보며, 오쿠마쓰시마의 섬들과 멀리 후나카타산(오우 산맥)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석양으로 붉게 물든 마쓰시마 풍경 사진에 자주 사용된다.
- 여관(麗観|레이칸일본어): 마쓰시마정 도미산에 있는 다이교지에서 보이는 풍경. 해발 116.8미터. 남쪽으로 마쓰시마 만과 오쿠마쓰시마를 조망한다. 만과 섬들이 정연하게 보이는 이곳은, 에도 시대에 오요도 미치카제가 편찬한 구집 『마쓰시마 조망집』 등 여러 문헌에서 언급되었다. 1876년(메이지 9년) 순행 때 메이지 천황도 이곳에서 풍경을 감상했다. 다만, 테타루 만이 간척되어 현재의 여관과 과거의 여관은 다르다.[17]
- 유관(幽観|유칸일본어): 마쓰시마정과 리후정 경계에 있는 오기야에서 보이는 풍경. 해발 55.8미터. 동남쪽으로 시오가마만(塩竈湾)을 조망한다. 부채꼴 모양으로 열리는 시야는 넓지 않지만, 조용한 분위기를 자아낸다.[17]
- 위관(偉観|이칸일본어): 시치가하마정 다이가사키의 다몬산(多聞山)에서 보이는 풍경. 해발 55.6미터. 북쪽으로 시오가마 만, 오쿠마쓰시마 만, 오쿠마쓰시마를 조망한다. 동, 서, 북의 수경지는 있었으나 남쪽이 빠진 것을 아쉽게 여긴 후나야마 만넨이 조사를 거듭하여 추가한 장소이다.[17]
4. 2. 기타 전망 시설
797년(연력 16년)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가 극찬한 "장로 언덕"(현 미야기현도 제144호 아카누마 마쓰시마 선)에서의 조망이 예로부터 유명하다.[18]그 외 전망대로는 사이교 모도시노 마쓰(사이교 되돌림의 소나무) 공원, 신토미야마, 시오가마와 마쓰시마 해안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소칸산, 오기다니[19] 등이 있다. 마쓰오 바쇼가 마쓰시마에 머물렀을 때 숙박했던 아쓰타야(즈이간지 참도 입구 부근) 부지에 있는 상업 시설 옥상이 무료로 개방되어 있다.[20] 다이칸산은 현재 호텔 부지 내에 있어 호텔 이용객만 들어갈 수 있다.
과거에는 마쓰시마 타워가 있었으나 해체되었다.
5. 문화
마쓰시마는 헤이안 시대부터 와카의 우타마쿠라로 자주 사용되었다. 미나모토노 시게유키가 지은 "마쓰시마여, 오지마의 갯벌에서 조개를 줍는 어부의 소매가 이처럼 젖었네"라는 구절이 마쓰시마를 읊은 최초의 노래로 여겨진다.[26]
가마쿠라 시대에는 코칸 시렌의 『겐코샤쿠쇼』에 "그 땅은 동해의 해변가에 있으며, 작은 섬이 천 백 개나 있고, 굽이진 곶과 만, 기묘한 봉우리와 기이한 바위, 천하의 절경이다."라고 기록되는 등 실제 마쓰시마의 풍경에 대해 기술하는 문헌이 등장한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도코가 『회국잡기』에서 마쓰시마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는 소수의 여행자에 의한 특수한 사례이며, 마쓰시마가 명승지로 알려지게 된 것은 센다이 번 다테 씨에 의해 이곳이 보호, 정비된 에도 시대 이후이다.[26]
에도 시대에 마쓰시마를 세상에 알린 하이쿠 선구자로는 오요도 미센푸가 있다. 미센푸는 1669년(간분 9년)부터 1687년(조쿄 4년) 사이에 오지마의 암실에 오래 머물렀던 이세국 출신의 하이진으로, 센다이와 시오가마, 이시노마키의 노래 명소 정비에 힘쓴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마쓰시마 료긴슈』와 『킨카잔 료긴슈』를 저술했으며, 하이진 500명에게 마쓰시마에 대한 하이쿠를 모집하여 1682년(텐와 2년)에 『마쓰시마 조망집』을 출판했다. 『마쓰시마 조망집』에서는 하이쿠 외에도 섬 92곳, 곶 33곳, 포구 21곳을 포함한 마쓰시마의 약 200곳을 볼거리로 소개하고 있다. 이후, 1689년(겐로쿠 2년)에 마쓰오 바쇼가 마쓰시마를 방문했으며, 니시야마 소인, 카샤 하쿠오, 오시마 료타, 고바야시 잇사 등의 하이진들도 마쓰시마를 방문했다.[26]
- 미나모토노 시게유키 "마쓰시마여 오지마의 갯벌에서 조개를 줍는 아마의 소매가 이처럼 젖었네" (『고슈이슈』)
- : 오지마는 마쓰시마 만 안에 떠 있는 영험한 섬이다.
- 인푸몬인 다이후 "보여주리라 오지마의 어부의 소매마저 젖어버린 그 빛깔, 변함없이" (『센자이 와카슈』연애 4-884)
- :백인일수의 90번째 노래. 위 시게유키의 노래를 혼카도리하여 지은 구절이다.
- 다테 마사무네 "가는 동안에도 바라보리라 미치노쿠의 달을 기다리는 섬의 가을 저녁"
- : 유명한 마쓰시마의 달을 읊은 노래. "달을 '''기다리는'''"과 "'''마쓰'''시마"가 카케코토바가 되고 있다.
- 다테 마사무네 "마음없는 몸에도 달을 마쓰시마여 가을 저녁의 하늘"
- 다테 마사무네 "장소에 따라 종류를 나누어 찾을 수 없네, 명성이 높은 달을 소매에 마쓰시마"
- 다테 마사무네 "마쓰시마여 오지마의 갯벌 가을 하늘, 명성이 높은 달이 더욱 빛나리"
- 마쓰오 바쇼 "섬들이여 천 갈래로 부서져 여름 바다"
- 다하라보 "마쓰시마여, 자, 마쓰시마여, 마쓰시마여"
- : 이 구절은 마쓰오 바쇼가 『오쿠노 호소미치』에서 마쓰시마를 방문했을 때, 너무나 절경이라 구절이 떠오르지 않아 "마쓰시마여, 아아 마쓰시마여, 마쓰시마여"라는 구절을 읊었다는 일화로 소개되기도 하지만, 1821년(분세이 4년)에 출판된 사쿠라다 슈호의 『마쓰시마(시마) 도지』에 다하라보의 구절과 함께 바쇼가 마쓰시마에서 구절을 읊지 못했다는 일화와 함께 게재되었기 때문에, 혼동되었을 가능성이 있다.[27]
- 가와이 소라 "마쓰시마여, 학에게 몸을 맡겨라 뻐꾸기" (『오쿠노 호소미치』)
- 일본 무용・도키와즈부시 『기시렌요 도키와 마쓰시마(마쓰시마)』
메이지 시대 이전에는 극락정토로의 왕생과 죽은 자의 명복을 비는 사람들이 방문하는 영장이었으며, 메이지 초까지 유골의 일부를 오지마에 납골하는 풍습도 있었다.[8]
5. 1. 문예
마쓰시마는 헤이안 시대부터 와카의 우타마쿠라로 자주 사용되었다. 미나모토노 시게유키가 지은 "마쓰시마여, 오지마의 갯벌에서 조개를 줍는 어부의 소매가 이처럼 젖었네"라는 구절이 마쓰시마를 읊은 최초의 노래로 여겨진다.[26] 미나모토노 시게유키는 무쓰노쿠니(마쓰시마를 포함한 현재의 도호쿠 지방 동쪽)로 내려간 인물이므로, 실제로 마쓰시마의 경치를 보고 이 노래를 지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마쓰시마에 국한되지 않고 지명으로서의 우타마쿠라는 관념적인 것이며, 실제 경치를 보았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26]가마쿠라 시대가 되면서, 실제 마쓰시마의 풍경에 대해 기술하는 문헌이 등장한다. 코칸 시렌의 『겐코샤쿠쇼』에는 "그 땅은 동해의 해변가에 있으며, 작은 섬이 천 백 개나 있고, 굽이진 곶과 만, 기묘한 봉우리와 기이한 바위, 천하의 절경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마쓰시마를 실제로 방문한 도코가 『회국잡기』에서 이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도 소수의 여행자에 의한 특수한 사례이며, 마쓰시마가 명승지로 알려지게 된 것은 센다이 번 다테 씨에 의해 이곳이 보호, 정비된 에도 시대 이후이다.[26]
에도 시대에 마쓰시마를 세상에 알린 하이쿠 선구자로는, 오요도 미센푸가 있다. 미센푸는 1669년(간분 9년)부터 1687년(조쿄 4년) 사이에 오지마의 암실에 오래 머물렀던 이세국 출신의 하이진으로, 센다이와 시오가마, 이시노마키의 노래 명소 정비에 힘쓴 인물이기도 하다. 미센푸는 『마쓰시마 료긴슈』와 『킨카잔 료긴슈』를 저술했으며, 더 나아가 하이진 500명에게 마쓰시마에 대한 하이쿠를 모집하여 이를 엮어 1682년(텐와 2년)에 『마쓰시마 조망집』을 출판했다. 『마쓰시마 조망집』에서는 편찬한 하이쿠 외에도 섬 92곳, 곶 33곳, 포구 21곳을 포함한 마쓰시마의 약 200곳을 볼거리로 소개하고 있다. 이후, 1689년(겐로쿠 2년)에 마쓰오 바쇼가 마쓰시마를 방문했으며, 그 외에도 니시야마 소인, 카샤 하쿠오, 오시마 료타, 고바야시 잇사 등의 하이진들이 마쓰시마를 방문했다.[26]
- 미나모토노 시게유키 "마쓰시마여 오지마의 갯벌에서 조개를 줍는 아마의 소매가 이처럼 젖었네" (『고슈이슈』)
- : 오지마는 마쓰시마 만 안에 떠 있는 영험한 섬.
- 인푸몬인 다이후 "보여주리라 오지마의 어부의 소매마저 젖어버린 그 빛깔, 변함없이" (『센자이 와카슈』연애 4-884)
- :백인일수의 90번째 노래. 위 시게유키의 노래를 혼카도리하여 지은 구절이다.
- 다테 마사무네 "가는 동안에도 바라보리라 미치노쿠의 달을 기다리는 섬의 가을 저녁"
- : 유명한 마쓰시마의 달을 읊은 노래. "달을 '''기다리는'''"과 "'''마쓰'''시마"가 카케코토바가 되고 있다.
- 다테 마사무네 "마음없는 몸에도 달을 마쓰시마여 가을 저녁의 하늘"
- 다테 마사무네 "장소에 따라 종류를 나누어 찾을 수 없네, 명성이 높은 달을 소매에 마쓰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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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하라보 "마쓰시마여, 자, 마쓰시마여, 마쓰시마여"
- : 이 구절은 마쓰오 바쇼가 『오쿠노 호소미치』에서 마쓰시마를 방문했을 때, 너무나 절경이라 구절이 떠오르지 않아 "마쓰시마여, 아아 마쓰시마여, 마쓰시마여"라는 구절을 읊었다는 일화로 소개되기도 하지만, 1821년(분세이 4년)에 출판된 사쿠라다 슈호의 『마쓰시마(시마) 도지』에 다하라보의 구절과 함께 바쇼가 마쓰시마에서 구절을 읊지 못했다는 일화와 함께 게재되었기 때문에, 혼동되었을 가능성이 있다.[27] 시바 료타로는, 기행 『가이도를 가다』 "센다이·이시노마키"에서, "마쓰시마여 아아 마쓰시마여 마쓰시마여" 구절이 바쇼의 작품으로 마쓰시마의 간판 등 관광 자료에 기록되어 있는 것에 대해, 마쓰시마의 관광 관계자를 비판하고 있다.
- 가와이 소라 "마쓰시마여, 학에게 몸을 맡겨라 뻐꾸기" (『오쿠노 호소미치』)
- 일본 무용・도키와즈부시 『기시렌요 도키와 마쓰시마(마쓰시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