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센다이만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센다이만은 일본 혼슈 북동부에 위치한 만으로, 구 북상천, 나루세가와, 아부쿠마가와 등 여러 하천이 유입된다. 조몬 시대부터 패총이 조성되어 어로 활동이 이루어졌으며, 고대에는 다가국부의 외항으로 시오가마항이 발전했다. 에도 시대에는 센다이 번의 외항 역할을 했으며, 여러 운하가 건설되어 수운이 발달했다. 메이지 시대에는 노빌리 축항 건설이 추진되었으나 실패했고, 이후 시오가마항과 이시노마키항이 근대 항만으로 정비되었다. 1964년에는 센다이만 지역이 신산업도시로 지정되어 센다이항이 건설되었으며, 현재는 어업, 해양 레저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센다이만은 쓰나미 피해가 잦은 지역으로,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8~9m의 쓰나미가 발생하기도 했다. 주요 항구로는 이시노마키항, 센다이시오가마항 등이 있으며, 이시노마키시, 센다이시 등 여러 지자체가 센다이만 연안에 위치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도호쿠 지방의 만 - 무쓰만
    무쓰만은 혼슈 북부에 위치하며 쓰가루 및 시모키타 반도로 둘러싸인 만으로, 가리비 양식 어업과 다양한 생물 서식으로 생태적 가치가 높고 오미나토는 해상자위대 기지로 기능한다.
  • 도호쿠 지방의 만 - 료리만
    료리만은 이와테현 오후나토시에 위치한 리아스식 해안 만으로, 지진 발생 시 일본 최대의 쓰나미를 기록할 정도로 해일이 증폭되어 발생하는 지역이다.
  • 미야기현의 지형 - 오시카반도
    오시카반도는 산리쿠 해안 최남단에 위치한 구릉성 산지로, 리아스식 해안과 연안 양식업이 특징이며, 지진 피해를 입었으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 미야기현의 지형 - 센다이평야
    센다이평야는 일본 미야기현 중부에 위치한 도호쿠 지방 최대의 평야로, 센다이만, 아부쿠마 고지, 오우 산맥, 키타카미 산지로 둘러싸여 있으며 벼농사가 활발하지만 지진과 쓰나미에 취약하다.
  • 센다이만 - 도호쿠 본선
    도호쿠 본선은 간토 지방에서 아오모리현까지 이어지는 주요 철도 간선으로, 도쿄와 도호쿠 지방을 연결하며 현재는 수도권 통근 및 지역 생활 노선으로 기능한다.
  • 센다이만 - 센세키선
    센세키선은 미야기현 센다이시 아오바도리역과 이시노마키시 이시노마키역을 연결하는 총 50.8km 길이의 동일본 여객철도 노선으로, 센다이와 이시노마키의 앞 글자를 따서 명명되었으며, 동일본 대지진 피해 복구 후 현재 205계 3100번대 전동차와 HB-E210계 동차가 운행 중이고 2025년부터 E131계 전동차가 도입될 예정이다.
센다이만
위치 정보
개요
이름센다이만
로마자 표기Sendai-wan
한자 표기仙台湾
위치일본 미야기현 앞바다
지리
정의우노오곶에서 기누우라곶까지의 해역
주요 만마쓰시마만, 이시노마키만
주요 곶우노오곶
기누우라곶
역사
센다이만 지명 유래센다이시 인근에 위치하여 붙여짐
기타
관련 정보마쓰시마
센다이 평야
센다이항
기타카미산지
아부쿠마산지

2. 지리

센다이만 연안은 오가 반도(牡鹿半島)와 마쓰시마만(松島湾) 부분은 주로 리아스식 해안이며, 나머지 약 70km는 사빈 해안이다. 1965년 이후로는 해안 후퇴도 확인되었는데, 하천 상류부의 댐이나 항만 건설이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5]

나토리시(名取市)의 사구(砂浜, 2020년 10월)


시치키타가와(七北田川) 하구의 가모우 간석지(蒲生干潟)나 나토리가와(名取川) 하구의 이토우라(井土浦), 아부쿠마가와(阿武隈川) 하구의 토리노우미(鳥の海)는 하천의 수로가 이동하여 생겨난 석호로, 이 사빈 해안 속에서 특이한 환경을 만들어내고 있다.[3] 만 내부의 연안류는 대체로 이시노마키시(石巻市) 부근에서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센다이시(仙台市) 부근에서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고 있다.[5]

센다이만 앞바다에는 미야기현 앞바다 지진(宮城県沖地震)의 진원(震源)이기도 한 북아메리카판(北アメリカプレート)과 태평양판(太平洋プレート)의 접면이 있으며, 더욱 앞바다에는 일본 해구(日本海溝)가 있다. 키타카미 산지(北上山地)와 아부쿠마 고지(阿武隈高地)는 플레이트에 눌려 생긴 습곡(褶曲) 산지가 침식(侵食)되어 생긴 것이지만, 이들 두 산지에 끼인 센다이만 부분에서는 습곡 부분이 해저에 있다. 따라서 센다이만은 최종 빙기(最終氷期) 최성기에는 만 전체가 육지였을 정도로 얕고, 현재도 수심 50m 이내의 얕은 대륙붕(大陸棚)이 넓게 펼쳐져 있다.

이시노마키만(石巻湾)은 오가 반도(牡鹿半島)에 의해 외양으로부터의 너울(うねり)이 차단되기 때문에 파도가 잔잔하다. 마쓰시마만(松島湾)은 다도해의 내해가 되어 파도가 거의 없다. 따라서 서핑(サーフィン)에는 부적합하지만, 이시노마키만(石巻湾)과 마쓰시마만(松島湾)의 사빈(砂浜)에서는 파도막이 블록(消波ブロック)이 없어도 해수욕(海水浴)을 할 수 있다. 센다이만 남부는 외양에 면한 형상이기 때문에 너울(うねり)이 직접 들어와 파도(波)가 크다. 이 때문에 파도막이 블록(消波ブロック)이 없는 장소에서는 해수욕(海水浴)이 금지되어 있는 반면, 서핑(サーフィン)에는 적합한 지역이 되고 있다.

2. 1. 주요 유입 하천


  • 구 북상천
  • 나루세가와(鳴瀬川)
  • 시치키타가와(七北田川)
  • 나토리가와(名取川)
  • 아부쿠마가와(阿武隈川)


이들 하천에서 공급되는 토사량이 파랑에 의한 침식량을 상회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 센다이만 내부의 해안을 전진시켜 충적평야를 형성했다.

3. 역사

센다이만에는 조몬 시대 조기 후엽 이후로 많은 패총이 조성되었다. 패총에서는 대형 참치의 척추 등이 출토되어 외해에 사는 어류도 어로의 대상이었고, 다수의 이두형 작살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찌르는 낚시」가 행해졌음이 확실하며, 대형의 통나무배나 선체 측면에 측판을 덧댄 「판붙임 배」의 존재가 상정되고 있다.[8] 이시노마키시 남경패총, 히가시마쓰시마시 사토하마패총, 시치가하마정 오오키가코이패총 등의 거대 패총에서는 이타보가키 등 희귀한 남해산 패류로 만들어진 팔찌류가 출토되어 교역의 거점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8]

고대에는 무쓰 국부·다가조의 외항(국부진)으로서 시오가마진(시오가마항)이 발전했다. 시오가마진은 마쓰시마만 내의 남부에 위치하는 현재의 시오가마시에 있으며, 무쓰국의 일궁인 시오가마 신사 등이 있어 이 지역의 중요한 항구였다. 10세기 중반 무렵, 무쓰국부는 현재의 센다이시 미야기노구 이와키리 부근으로 옮겨졌다고 보이며, 다가국부(타가노코우)라고 불리게 된다. 이 무렵의 시치키타가와는 현재의 시치가하마정 남단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으며, 그 하구항으로 미나토하마가 있어 시치키타가와를 이용한 수운이 행해지고 있었다. 한편, 이 무렵의 시오가마진은 류슈시의 문서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항구로서의 기능은 유지되고 있었다고 여겨지고 있다.[9][10]

이시노마키는 헤이안 시대부터 태평양 쪽의 해운과 키타카미가와 수운의 결절지로서 기능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슈 후지와라씨가 번영했던 히라이즈미의 유적에서, 도카이 지방에서 만들어진 아쓰미가마나 도코나베야키가 다량으로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수송로는 육로로는 어렵기 때문에 태평양과 키타카미가와를 이용한 수운에 의한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11]

에도 시대가 되어 다테 마사무네가 센다이에 성을 쌓으면서, 센다이만 내에 있는 여러 항구가 센다이번의 외항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나토리가와 하구의 유리가미는 마사무네가 센다이 개부 이전에도 이용하고 있던 항구이며, 센다이 개부 후에는 센다이의 성하마을이 나토리가와 지류의 히로세가와 근처에 만들어짐에 따라 성하 교외와 직접 연결되는 항구가 되었다.[12] 아부쿠마가와에는 하구 북쪽에 가마사키미나토, 남쪽에 아라하마가 있었다. 양쪽 모두 쌀의 선적 항구이며, 가마사키미나토에는 센다이번의 쌀이, 아라하마에는 다테군이나 시부군, 요네자와번의 쌀이 모였다.[13] 키타카미가와 하구의 이시노마키는 1622년(겐나 8년)에 미곡창고가 설치되어, 이후 주로 에도를 향한 회미(廻米)의 집적지, 선적 항구로서 발전했다. 이시노마키에는 센다이번의 창고뿐만 아니라, 모리오카번의 미곡창고도 세워져 나루세가와와 키타카미가와 유역 각지에서 쌀이 모였다.[14]

에도 시대 전기에 수운을 위한 운하가 센다이만 연안에 여러 개 만들어졌다. 처음 만들어진 것은 나토리가와 하구와 아부쿠마가와 하구를 잇는 키비키보리[15]이다. 쇼호 연간(1645년~1648년)에 완성되었던 것은 확실하며, 아마 겐나 연간(1615년~1624년) 무렵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고 있다.[16] 다음으로 개척된 것이 시오가마와 시치키타가와 하구의 가모우를 잇는 후나이리보리이다. 후나이리보리는 간분 연간(1661년~1673년)에 준공했다고 생각되고 있다.[17] 수량 문제로 후나이리보리는 시치키타가와에 직결되지 않고, 여기서 화물이 환적되게 되어 가모우가 번영했다. 화물은 가모우에서 시치키타가와를 쓰루마키까지 거슬러 올라가 후나히키보리[18]로 옮겨져, 하라마치까지 운반되었다.[19]

운하 정비에 따라 화물이 통과하게 된 시오가마는, 그때까지 화물 수송으로 얻고 있던 삯 수입이 없어져 일시 쇠퇴했다. 그러나 센다이번이 이것을 문제시하여, 1685년(조쿄 2년), 화물 중 상인 화물과 오십집물, 목재의 시오가마로의 하역을 의무화하고, 더욱 과역의 면제나, 연극이나 시장의 개최를 인정하는 등의 특권을 시오가마에 주었다. 이것에 의해 시오가마는 번영을 되찾게 되었다.[21][22]

1876년(메이지 9년) 천황순행 때, 이에 종봉하고 있던 당시의 내무경오쿠보 도시미치가 마쓰시마에서 이시노마키에 걸쳐 시찰했다. 오쿠보는 이 무렵, 도호쿠 지방의 진흥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노비루에 근대항만을 건설하는 것이 좋다는 네덜란드인 기술자 콜네리스·반·돌른에 의한 조사 보고를 받고, 메이지 정부는 노비루 축항 건설을 결정했다. 계획은 나루세가와 하구에 내항을 설치하고, 미야토섬의 센가우라(가쓰기가우라)를 외항으로 하는 것이었다. 우선 내항부의 건설이 진행되어 나루세가와 하구의 동서 2개의 방파제의 건설, 신나루세가와의 개척, 및 신시가지의 조성이 행해졌다. 동시에 나루세가와에서 키타카미가와 하구의 이시노마키에 이르는 키타카미 운하의 개척과, 나루세가와에서 마쓰시마만을 잇는 히가시메이 운하의 개척도 진행되었다. 또 이것과는 별도로 미야기현이 키비키보리나 후나이리보리를 활용하여 마쓰시마만과 아부쿠마가와 하구 사이의 운하 정비를 진행해 나갔다. 이것이 완성되면 노비루 축항과 이와테현의 키타카미가와 수계, 미야기현의 센다이 평야의 주요한 수계, 및 후쿠시마현의 아부쿠마가와 수계가 연결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1882년(메이지 15년)에 내항이 완성되고 키타카미 운하와 히가시메이 운하의 개척도 완성되었지만, 1884년(메이지 17년) 태풍에 의한 파랑에 의해 하룻밤 사이에 하구의 돌제가 파괴되어, 수리나 외항의 건설이 행해지지 않고 노비루 축항은 포기되게 되었다.[23] 그래도 미야기현에 의한 운하 정비는 1889년(메이지 22년)까지 계속되어 조잔 운하로서 준공했다.[24][25]

이 무렵, 일본 국내에서 대형 기선에 의한 항로가 여러 개 개설되고 있었다. 1881년(메이지 14년) 요코하마하코다테 사이에서 정기선이 운항을 시작하면, 오시카반도 서부에 있는 오기하마는 그 기항지가 되었다. 오기하마는 1만 톤급의 배가 들어가기에 충분한 수심이 있으며, 또 파랑의 영향이 적은 천연의 좋은 항구였다. 이시노마키나 시오가마와도 소형선으로 연락하고, 오기하마는 중계지로서 번영했다. 그러나 철도가 보급되면서 이 항로는 부정기 항로가 되어 다이쇼 시대에는 오기하마로의 기항은 없어졌다.[26]

한편, 오나가와 반도의 남단에 있는 아유카와에 1906년(메이지 39년) 도요 어업이 사업소를 두고, 포경의 거점으로 했다. 이때, 아유카와의 어부에는 해체된 고래의 내장 투기로 인한 해양 오염을 걱정하여 도요 어업의 진출에 반대하는 자도 있었지만, 도요 어업이 마을에 매년 300JPY의 기부를 한다는 약속도 있어, 아유카와는 도요 어업을 받아들여 이 기부는 마을의 초등학교의 재원이 되었다. 이후, 아유카와는 일본이 상업 포경을 정지하는 쇼와 말기까지 포경 기지로서 번영했다.[27][28] 또 아유카와는 에도 시대부터 영장인 킨카산을 향하는 여행자의 경유지이기도 하여, 메이지부터 쇼와에 걸쳐 정기선의 발착지 또는 기항지가 되고 있었다.[29] 현재도 아유카와와 킨카산 사이에 정기선이 운항되고 있다.

노비루 축항 건설이 중단된 후, 미야기현은 정부에 근대 항만 정비를 자주 요구하여 입지 조사가 반복해서 행해졌다. 준설 기술의 진보가 있어 시오가마항이 정비 가능하다고 판단되어 1910년(메이지 43년)에 제2종 항만으로 지정되었다. 그때까지 200톤 미만의 선박밖에 입항하고 있지 않았던 시오가마항은 1925년(다이쇼 14년)에는 1000톤급 선박이 입항할 수 있게 되고, 더욱 그 후의 준설에 의해 5000톤급의 선박이 입항할 수 있게 되었다. 1928년(쇼와 3년)에는, 이미 운행되고 있던 기센누마, 가마이시 방면의 항로에 더하여, 구시로, 하코다테와의 사이에 정기 항로가 개설되었다. 전후가 되면서 시오가마항은 그때까지의 상항으로서의 기능에 더하여 공업항과 어항의 기능도 정비되어 갔다.[30]

이시노마키항은 메이지 시대부터의 키타카미가와 하구에 퇴적하는 토사의 문제와 하구항이기 때문에 확장성의 한계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시노마키시는 1940년대 후반부터 이것에 대신하는 신항만의 건설을 모색하고, 또 미야기현도 이시노마키에 공업항을 설치하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입지의 선정이나 예산의 문제도 있었지만, 키타카미가와 하구에서 서쪽의 가마 지구에 파내는 식의 공업항을 건설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1960년(쇼와 35년)에 건설 공사가 시작되어 1964년(쇼와 39년)에 중요항만으로 지정되어 1967년(쇼와 42년)에 개항했다. 항만 배후지에는 이시노마키에 전전부터 있던 제지업에 더하여, 주로 경공업의 공장이 입지했다. 그 후, 부항으로서 히바리노 지구에 히와항이 계획, 설치되었다.[31]

1960년(쇼와 35년) 이케다 하야토 내각이 「소득 배증 계획」을 내놓은 것을 배경으로, 1964년(쇼와 39년) 센다이만 지역이 신산업도시로 지정되었다. 이 안에서 센다이시 동부의 해안에 파내는 식 인조항의 센다이항의 건설이 내걸어지고, 센다이항은 중화학 공업이 집적하는 공업항이 될 것이 상정되고 있었다. 1967년(쇼와 42년)에 건설이 시작되었지만, 건설 중인 1969년(쇼와 44년)에 센다이항으로의 페리 부두 설치가 중앙항만 심의회에서 결정되고, 또 도쿄만에 집중하는 물류의 완화를 목적으로 센다이 등에 종합적인 기능을 가진 국제 무역항을 만든다는 각의 결정이 내려지는 등, 당초의 공업항으로서의 계획은 변경되었다. 이렇게 공업항과 상업항의 기능을 겸비한 항만으로서 센다이항은 1971년(쇼와 46년)에 개항했다. 항만의 배후지에는 화력 발전소나 석유 정제소, 가스 공장 등이 입지하고, 1973년(쇼와 48년)에 도마코마이, 나고야와 사이에 페리가 취항했다.[32] 2001년(헤이세이 13년)에는 특정 중요 항만으로 지정되었다.

3. 1. 센다이만 항구의 역사

센다이만에는 조몬 시대 조기 후엽 이후로 많은 패총이 조성되었다. 패총에서는 대형 참치의 척추 등이 출토되어 외해에 사는 어류도 어로의 대상이었던 것과, 다수의 이두형 작살이 출토된 것으로부터 「찌르는 낚시」가 행해지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며, 대형의 통나무배, 또는 선체 측면에 측판을 덧댄 「판붙임 배」의 존재가 상정되고 있다. 이시노마키시 남경패총이나 히가시마쓰시마시 사토하마패총, 시치가하마정 오오키가코이패총 등의 지속성이 높은 거대 패총에서는 이타보가키 등의 희귀한 남해산 패류로 만들어진 팔찌류가 적지 않게 출토되어 교역의 거점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8] 이러한 이유로 센다이만에 있어서의 조몬 패총의 거점 취락에는 대형의 배를 계류하는 시설이 부속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고대에는 무쓰 국부·다가조의 외항(국부진)으로서 시오가마진(시오가마항)이 발전했다. 시오가마진은 마쓰시마만 내의 남부에 위치하는 현재의 시오가마시에 있으며, 무쓰국의 일궁인 시오가마 신사 등이 있어 이 지역의 중요한 항구였다.

10세기 중반 무렵, 무쓰국부는 현재의 센다이시 미야기노구 이와키리 부근으로 옮겨졌다고 보이며, 다가국부(타가노코우)라고 불리게 된다. 이 장소는 오쿠오오미치와 시치키타가와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이츠카시장이나 카무라야시장이라는 정기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이 무렵의 시치키타가와는 현재의 시치가하마정 남단을 향해 흘러가고 있으며, 그 하구항으로 미나토하마가 있어 시치키타가와를 이용한 수운이 행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나토하마가 외양선을 수용할 수 있는 항구였는지, 자세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이 무렵의 시오가마진은 류슈시의 문서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항구로서의 기능은 유지되고 있었다고 여겨지고 있다.[9][10]

이시노마키는 헤이안 시대부터 태평양 쪽의 해운과 키타카미가와 수운의 결절지로서 기능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슈 후지와라씨가 번영했던 히라이즈미의 유적에서, 도카이 지방에서 만들어진 아쓰미가마나 도코나베야키가 다량으로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수송로는 육로로는 어렵기 때문에 태평양과 키타카미가와를 이용한 수운에 의한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다만, 당시의 키타카미가와 본류가 이시노마키에 흘러들고 있었는지 등의 불확실한 요소도 있다.[11]

에도 시대가 되어 다테 마사무네가 센다이에 성을 쌓으면서, 센다이만 내에 있는 여러 항구가 센다이번의 외항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나토리가와 하구의 유리가미는 마사무네가 센다이 개부 이전에도 이용하고 있던 항구이며, 센다이 개부 후에는 센다이의 성하마을이 나토리가와 지류의 히로세가와 근처에 만들어짐에 따라 성하 교외와 직접 연결되는 항구가 되었다.[12] 아부쿠마가와에는 하구 북쪽에 가마사키미나토, 남쪽에 아라하마가 있었다. 양쪽 모두 쌀의 선적 항구이며, 가마사키미나토에는 센다이번의 쌀이, 아라하마에는 다테군이나 시부군, 요네자와번의 쌀이 모였다.[13] 키타카미가와 하구의 이시노마키는 센다이번의 정책으로 1622년(겐나 8년)에 미곡창고가 설치되어, 이후 주로 에도를 향한 회미(廻米)의 집적지, 선적 항구로서 발전했다. 이 무렵은 시로이시 무네나오나 가와무라 주우키치(손베에)에 의해 키타카미가와의 치수 공사가 행해져 주변의 개간이 진행되고 있던 시대이기도 했다. 이시노마키에는 센다이번의 창고뿐만 아니라, 모리오카번의 미곡창고도 세워져 나루세가와와 키타카미가와 유역 각지에서 쌀이 모였다.[14]

에도 시대 전기에 수운을 위한 운하가 센다이만 연안에 여러 개 만들어졌다. 처음 만들어진 것은 나토리가와 하구와 아부쿠마가와 하구를 잇는 키비키보리[15]이다. 쇼호 연간(1645년부터 1648년)에 완성되었던 것은 확실하며, 아마 겐나 연간(1615년부터 1624년) 무렵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고 있다.[16] 키비키보리의 완성에 따라 아부쿠마가와 수계와 센다이 성하가 연결되게 되었다. 키비키보리의 이름은 여기를 이용하여 목재를 수송한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13] 다음으로 개척된 것이 시오가마와 시치키타가와 하구의 가모우를 잇는 후나이리보리이다. 후나이리보리는 간분 연간(1661년부터 1673년)에 준공했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 무렵까지 시치키타가와는 현재에 상당하는 수로로 바뀌어 하구가 미나토하마에서 가모우로 옮겨지고 있었다.[17] 수량 문제로 후나이리보리는 시치키타가와에 직결되지 않고, 여기서 화물이 환적되게 되어 가모우가 번영했다. 화물은 가모우에서 시치키타가와를 쓰루마키까지 거슬러 올라가 후나히키보리[18]로 옮겨져, 하라마치까지 운반되었다.[19] 이러한 운하 정비 배경에는 당시 수송 물량의 현저한 증가가 있었다고 생각되고 있다.[20]

운하 정비에 따라 화물이 통과하게 된 시오가마는, 그때까지 화물 수송으로 얻고 있던 삯 수입이 없어져 일시 쇠퇴했다. 그러나 센다이번이 이것을 문제시하여, 1685년(조쿄 2년), 화물 중 상인 화물과 오십집물, 목재의 시오가마로의 하역을 의무화하고, 더욱 과역의 면제나, 연극이나 시장의 개최를 인정하는 등의 특권을 시오가마에 주었다. 이것에 의해 시오가마는 번영을 되찾게 되었다.[21][22]

1876년(메이지 9년) 천황순행 때, 이에 종봉하고 있던 당시의 내무경오쿠보 도시미치가 마쓰시마에서 이시노마키에 걸쳐 시찰했다. 오쿠보는 이 무렵, 도호쿠 지방의 진흥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노빌리에 근대항만을 건설하는 것이 좋다는 네덜란드인 기술자 콜네리스·반·돌른에 의한 조사 보고를 받고, 메이지 정부는 노빌리 축항 건설을 결정했다. 계획은 나루세가와 하구에 내항을 설치하고, 미야토섬의 센가우라(가쓰기가우라)를 외항으로 하는 것이었다. 우선 내항부의 건설이 진행되어 나루세가와 하구의 동서 2개의 방파제의 건설, 신나루세가와의 개척, 및 신시가지의 조성이 행해졌다. 동시에 나루세가와에서 키타카미가와 하구의 이시노마키에 이르는 키타카미 운하의 개척과, 나루세가와에서 마쓰시마만을 잇는 히가시메이 운하의 개척도 진행되었다. 또 이것과는 별도로 미야기현이 키비키보리나 후나이리보리를 활용하여 마쓰시마만과 아부쿠마가와 하구 사이의 운하 정비를 진행해 나갔다. 이것이 완성되면 노빌리 축항과 이와테현의 키타카미가와 수계, 미야기현의 센다이 평야의 주요한 수계, 및 후쿠시마현의 아부쿠마가와 수계가 연결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1882년(메이지 15년)에 내항이 완성되고 키타카미 운하와 히가시메이 운하의 개척도 완성되었지만, 1884년(메이지 17년) 태풍에 의한 파랑에 의해 하룻밤 사이에 하구의 돌제가 파괴되어, 수리나 외항의 건설이 행해지지 않고 노빌리 축항은 포기되게 되었다.[23] 그래도 미야기현에 의한 운하 정비는 1889년(메이지 22년)까지 계속되어 조잔 운하로서 준공했다.[24][25]

이 무렵, 일본 국내에서 대형 기선에 의한 항로가 여러 개 개설되고 있었다. 1881년(메이지 14년) 요코하마하코다테 사이에서 정기선이 운항을 시작하면, 오가가키반도 서부에 있는 오기하마는 그 기항지가 되었다. 오기하마는 1만 톤급의 배가 들어가기에 충분한 수심이 있으며, 또 파랑의 영향이 적은 천연의 좋은 항구였다. 이시노마키나 시오가마와도 소형선으로 연락하고, 오기하마는 중계지로서 번영했다. 그러나 철도가 보급되면서 이 항로는 부정기 항로가 되어 다이쇼 시대에는 오기하마로의 기항은 없어졌다.[26]

한편, 오나가와 반도의 남단에 있는 아유카와에 1906년(메이지 39년) 도요 어업이 사업소를 두고, 포경의 거점으로 했다. 이때, 아유카와의 어부에는 해체된 고래의 내장 투기로 인한 해양 오염을 걱정하여 도요 어업의 진출에 반대하는 자도 있었지만, 도요 어업이 마을에 매년 300JPY의 기부를 한다는 약속도 있어, 아유카와는 도요 어업을 받아들여 이 기부는 마을의 초등학교의 재원이 되었다. 이후, 아유카와는 일본이 상업 포경을 정지하는 쇼와 말기까지 포경 기지로서 번영했다.[27][28] 또 아유카와는 에도 시대부터 영장인 킨카산을 향하는 여행자의 경유지이기도 하여, 메이지부터 쇼와에 걸쳐 정기선의 발착지 또는 기항지가 되고 있었다.[29] 현재도 아유카와와 킨카산 사이에 정기선이 운항되고 있다.

노빌리 축항 건설이 중단된 후, 미야기현은 정부에 근대 항만 정비를 자주 요구하여 입지 조사가 반복해서 행해졌다. 준설 기술의 진보가 있어 시오가마항이 정비 가능하다고 판단되어 1910년(메이지 43년)에 제2종 항만으로 지정되었다. 그때까지 200톤 미만의 선박밖에 입항하고 있지 않았던 시오가마항은 1925년(다이쇼 14년)에는 1000톤급 선박이 입항할 수 있게 되고, 더욱 그 후의 준설에 의해 5000톤급의 선박이 입항할 수 있게 되었다. 1928년(쇼와 3년)에는, 이미 운행되고 있던 기센누마, 가마이시 방면의 항로에 더하여, 구시로, 하코다테와의 사이에 정기 항로가 개설되었다. 전후가 되면서 시오가마항은 그때까지의 상항으로서의 기능에 더하여 공업항과 어항의 기능도 정비되어 갔다.[30]

이시노마키항은 메이지 시대부터의 키타카미가와 하구에 퇴적하는 토사의 문제와 하구항이기 때문에 확장성의 한계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시노마키시는 1940년대 후반부터 이것에 대신하는 신항만의 건설을 모색하고, 또 미야기현도 이시노마키에 공업항을 설치하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입지의 선정이나 예산의 문제도 있었지만, 키타카미가와 하구에서 서쪽의 가마 지구에 파내는 식의 공업항을 건설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1960년(쇼와 35년)에 건설 공사가 시작되어 1964년(쇼와 39년)에 중요항만으로 지정되어 1967년(쇼와 42년)에 개항했다. 항만 배후지에는 이시노마키에 전전부터 있던 제지업에 더하여, 주로 경공업의 공장이 입지했다. 그 후, 부항으로서 히바리노 지구에 히와항이 계획, 설치되었다.[31]

1960년(쇼와 35년) 이케다 하야토 내각이 「소득 배증 계획」을 내놓은 것을 배경으로, 1964년(쇼와 39년) 센다이만 지역이 신산업도시로 지정되었다. 이 안에서 센다이시 동부의 해안에 파내는 식 인조항의 센다이항의 건설이 내걸어지고, 센다이항은 중화학 공업이 집적하는 공업항이 될 것이 상정되고 있었다. 1967년(쇼와 42년)에 건설이 시작되었지만, 건설 중인 1969년(쇼와 44년)에 센다이항으로의 페리 부두 설치가 중앙항만 심의회에서 결정되고, 또 도쿄만에 집중하는 물류의 완화를 목적으로 센다이 등에 종합적인 기능을 가진 국제 무역항을 만든다는 각의 결정이 내려지는 등, 당초의 공업항으로서의 계획은 변경되었다. 이렇게 공업항과 상업항의 기능을 겸비한 항만으로서 센다이항은 1971년(쇼와 46년)에 개항했다. 항만의 배후지에는 화력 발전소나 석유 정제소, 가스 공장 등이 입지하고, 1973년(쇼와 48년)에 도마코마이, 나고야와 사이에 페리가 취항했다.[32] 2001년(헤이세이 13년)에는 특정 중요 항만으로 지정되었다.

4. 어업 및 해양 활동

센다이만은 다양한 어업 활동과 해양 레저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주요 어업 자원으로는 가자미, 붕장어, 피조개, 개조개, 성게류, 등이 있으며, 고래 또한 풍부하게 서식한다. 마쓰시마만에서는 굴 양식업이, 센다이만 남부에서는 양식이 이루어진다. 동일본대지진 이후 꽃게 어획량이 증가하기도 했다.[35] 여름철에는 범고래혹등고래가 출몰하며, 밍크고래 연구 포경도 이루어진다.[36] 센다이만 남부는 서핑(서핑)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

4. 1. 어업

센다이만에서는 가자미, 붕장어, 피조개, 개조개, 성게류, 등이 주요 어업 자원으로 꼽힌다. 마쓰시마만에서는 굴 양식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센다이만 남부 해안에서 2km 떨어진 외해에서는 양식이 이루어진다. 동일본대지진의 영향으로 센다이만 남부에 진흙이 광범위하게 퇴적되면서 꽃게 개체수가 급증했고, 2015년에는 일본 내 꽃게 어획량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35]

센다이만은 고래 개체수도 풍부하여 여름철에는 범고래혹등고래 여러 개체가 출몰한다. 또한 센다이만 내 여러 항구에서는 밍크고래 연구 포경이 이루어지고 있다.[36]

4. 2. 해양 레저

센다이만 남부는 외양에 면한 형상이기 때문에 너울(うねり)이 직접 들어와 파도(波)가 크다. 이 때문에 파도막이 블록(消波ブロック)이 없는 장소에서는 해수욕(海水浴)이 금지되어 있는 반면, 서핑(サーフィン)에는 적합한 지역이 되고 있다.[5]

주요 서프 스팟은 센다이시의 센다이항, 후카누마 해안, 와타리정의 아라하마(후카누마 해안이 있는 지역의 이름도 아라하마이기 때문에 와타리정의 아라하마와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이다. 이전에는 어느 해변에도 차량 진입이 가능했기 때문에 센다이만 남부에서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현재는 무료 주차장이 있으며, 해수욕객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이 세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센다이항에서는 매년 프로 서핑 대회가 개최된다. 아마추어 대회는 와타리정의 아라하마, 나나가하마정의 쇼부타 해안, 나토리시의 유리아게 비치에서 개최된 적이 있다.

센다이만에서는 남동쪽에서 들어오는 굴곡파에 의한 직접파와 태평양으로 돌출된 방파제의 반사파가 합쳐져 방파제 남쪽에서 큰 파도가 되는 경향이 있다. 센다이항, 아라하마, 유리아게 비치 3곳은 이 합성파가 발생하는 서프 스팟이며, 센다이항의 방파제가 가장 길게 태평양으로 돌출되어 있기 때문에 센다이항의 파도가 가장 크다. 센다이항은 시치키타가와, 유리아게 비치는 나토리가와 하구에 가깝지만, 유리아게 비치는 방파제 북쪽에 하구가 있기 때문에 파고에는 거의 영향이 없다. 센다이항은 방파제 남쪽에 하구가 있지만, 방파제에서 다소 떨어져 있기 때문에 중간의 "쿠이마에"라고 불리는 곳이 가장 파고가 크다고 한다.
: 일본 국내에서 유명한 서프 스팟 중 하나이며, 프로 서핑 투어 개최지이기도 하다. 2003년부터 투어 중에서 가장 역사와 권위가 있는 "올 재팬 프로"의 개최지로 연속해서 선정되었다. 6월부터 10월까지 파도가 높지만, 일년 내내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센다이시 도심부에서 차로 30분 정도 거리이기 때문에, 파도가 높고 근무 시간 외인 새벽과 저녁에 많은 서퍼들이 몰린다. 경사가 완만하기 때문에 파도와 파도 사이가 넓어지고, 파도가 천천히 밀려오므로 롱 라이드가 가능하다. 하지만 파도가 큰 여름철에는 롱보드에는 적합하지 않아 서퍼의 거의 100%가 숏보드를 사용하고 있다.

  • 후카누마 해안

: 파도가 거세기 때문에 해수욕장 부분에는 해안과 평행하게 파도 제어 블록이 늘어서 있다. 이 후카누마 해수욕장 북쪽이 서프 스팟이 되고 있다. 해저가 급경사이기 때문에 파도와 파도 사이가 좁아지고, 또한 썰물이 강해지므로 파도가 갑자기 밀려온다. 따라서, 활강하는 파도의 경사가 상당히 가팔라지고, 고속의 숏 라이드가 되므로, 숏보드 전문 파도라고 할 수 있다. 파도가 잔잔한 날을 선택하지 않으면 초급자에게는 어렵다.

  • 아라하마(→토리노우미 참조)

: 아부쿠마가와 하구 남쪽에 있는 토리노우미가 바다와 연결되어 있는 수로를 사이에 두고 그 일대의 사빈이 서프 스팟 아라하마이다. 수로에서 외해 방향으로 뻗어 있는 방파제와 남동쪽에서 오는 굴곡파와의 관계로 수로의 남북에서 파고에 큰 차이가 있다. 남쪽은 굴곡파가 직접 들어오고, 또한 방파제의 반사파와의 합성으로 파고가 커지지만, 북쪽은 파도가 작다. 파도의 질에서는 미야기현 제2의 서프 스팟이지만, 센다이시에서 다소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서퍼의 수는 적다.

  • 유리아게 비치

: 나토리가와 하구 남쪽에 최근에 개설된 해수욕장. 센다이 공항에서도 가깝다.

5. 쓰나미 피해

센다이만 및 이에 접한 연안 지역은 수백 년 주기로 일본 해구를 진원으로 하는 산리쿠 해역 지진, 미야기현 해역 지진 등으로 일어나는 쓰나미를 지속적으로 겪는 지역이다.[37] 2011년 3월 11일 일어난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의 경우 8~9m의 쓰나미가 들이닥쳐 해안선에서 3~4km 안쪽까지 해일이 들어와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38]

6. 주요 항구


  • 이시노마키항
  • 센다이시오가마항 (특정주요항만)
  • * 센다이항
  • * 시오가마항
  • 소마항
  • 아라하마 항

7. 센다이만의 지자체



참조

[1] 웹사이트 仙台湾とは https://kotobank.jp/[...] 2021-05-25
[2] 웹사이트 せんだいわん【仙台湾】 {{!}} せ {{!}} 辞典 https://kids.gakken.[...] 2021-05-25
[3] 서적 仙台市史
[4] 웹사이트 仙台湾(コトバンク、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小項目事典の解説他) https://kotobank.jp/[...] 2018-05-26
[5] 서적 仙台市史
[6] 웹사이트 ワタリガニ 宮城で急増中! 異変のわけ|NHK NEWS WEB https://web.archive.[...]
[7] 웹사이트 2007年度JARPNII 三陸沖鯨類捕獲調査の結果概要報告 http://www.icrwhale.[...]
[8] 논문 宮城県石巻市南境貝塚出土の「船」を描いた線刻礫について--宮城県教育委員会1969『埋蔵文化財第4次緊急調査概報--南境貝塚』資料の検討 東北歴史博物館 2011
[9] 서적 仙台市史
[10] 서적 宮城縣史
[11] 서적 石巻の歴史
[12] 서적 仙台市史
[13] 서적 仙台市史
[14] 서적 仙台市史
[15] 문서 내호, 내천이라고도 했다.
[16] 문서 慶長 연간 초기에 가와무라 손베에가 만들었다는 설도 있지만, `센다이시시`에서는 당시 불안정한 사회 정세로 인해 이 설에 대해 어려운 점이 있다고 하고 있다.
[17] 서적 仙台市史
[18] 문서 만들어진 시기는 불명이지만, 그 목적에서 배들이 들어오는 도랑과 같은 시기일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19] 서적 仙台市史
[20] 서적 仙台市史
[21] 서적 仙台市史
[22] 서적 仙台市史
[23] 서적 宮城縣史
[24] 서적 仙台市史
[25] 서적 仙台市史
[26] 서적 石巻の歴史
[27] 서적 牡鹿町誌
[28] 서적 牡鹿町誌
[29] 서적 牡鹿町誌
[30] 서적 宮城縣史
[31] 서적 石巻の歴史
[32] 서적 仙台市史
[33] 서적 仙台市史 仙台市 1994-00-00
[34] 서적 仙台市史 仙台市 1994-00-00
[35] 뉴스 ワタリガニ 宮城で急増中! 異変のわけ https://www3.nhk.or.[...] NHK 2018-06-06
[36] 웹인용 2007年度JARPNII 三陸沖鯨類捕獲調査の結果概要報告 https://www.icrwhale[...] 三陸沖鯨類捕獲調査団 2007-06-01
[37] 웹인용 地震情報で用いる震央地名(日本全体図) http://www.data.jma.[...] 일본 기상청 2018-05-10
[38] 웹인용 平成23年(2011年)東北地方太平洋沖地震津波の概要(第3報) http://www.jwa.or.jp[...] 日本気象協会 2011-04-2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