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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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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주왕은 백제의 제23대 왕으로, 475년부터 477년까지 재위했다. 개로왕의 아들로, 고구려의 침략으로 수도 한성이 함락된 후 웅진으로 천도하고, 신라에 원병을 요청하는 등 위기 상황에서 국가를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탐라국에 대한 종주권을 확립하고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한 체제를 갖추려 했으나, 477년 해구의 쿠데타로 인해 암살당했다. 그의 아들 삼근왕이 뒤를 이었으나, 문주왕의 사망으로 백제의 왕권은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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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왕
문주왕
백제 군주 (20-26대)
백제 군주 (20-26대)
기본 정보
이름문주왕
본명부여도(扶餘都)
출생일미상
사망일477년 9월
재위 기간475년 9월 ~ 477년 9월
자녀삼근왕
부친개로왕 혹은 비유왕
모친미상
왕비미상
전임자개로왕
후임자삼근왕
종교불교
호칭어라하
작위제22대 백제 국왕
한국어 표기
한글문주왕
한자文周王
로마자 표기Munju-wang
일본어 표기
히라가나ぶんしゅうおう
가타카나ムンジュワン
기타
관련 정보백제
백제 군주

2. 생애

생년월일과 출생지는 미상이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이름은 문주이다. 그런데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의 사서인 양서에는 그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있고, 남조의 다른 사서인 송서 백제전에는 여도(餘都)라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문주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라 한다. 그런데 일본측 기록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일본서기의 유라쿠조에 의하면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생이라 한다. 오오치씨와 토요타씨 족보에는 문주왕의 별칭인 문원왕은 개로왕의 아들로 나타난다. 중국측 기록인 《양서》 백제전에는 문주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라 한다. 그의 어머니와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문주왕의 성격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결단력이 부족하였으나 백성을 사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3] 개로왕의 태자가 되었으며, 즉위하기 직전에는 부왕 개로왕으로부터 상좌평에 임명되어 정사에 참여하였다.

475년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한성을 공격하자 문주는 개로왕의 명을 받아서 신라에 가서 원병을 요청하였다. 군사 1만명과 함께 돌아와 고구려의 군대가 물러갔으나, 수도 한성이 파괴되었다. 일설에는 개로왕이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문주왕을 피신시킨 것이라는 설도 있다. 개로왕이 죽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475년 음력 10월, 수도를 한성에서 웅진으로 옮겼다. 476년 여름 4월,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쳐오자 왕이 기뻐하여, 그 탐라국 사신을 보답으로 은솔(恩率)[4]로 임명하였다. 탐라왕에게 백제의 높은 벼슬인 좌평(佐平)[5]으로 임명하였다.

문주왕은 백제의 남은 방어 시설을 재정비하고 고구려에 대항하는 국가의 입지를 강화하려 했다. 그는 476년에 제주도탐라 왕국에 대한 종주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고구려에 대비하기 위한 체제를 갖추기 위해, 476년 2월에 대두산성(충청북도청주시)을 수리하고 한강 북쪽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3월에는 송(남조)에 의지하고자 조공사를 보냈으나, 도착하지 못해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수도 천도 이후, 전통적인 부여계 귀족과 현지 마한계 씨족 간의 갈등으로 백제의 권력 구조는 혼란에 빠졌다. 이전 강력한 왕들에 의해 억압되었던 기존 귀족 내부의 경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국내에서는 실력자인 해구를 병관좌평에, 왕의 동생인 곤지(昆支王)를 내신좌평에 임명하고, 장자 삼근(三斤王)을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곤지는 곧 죽었다.

477년 4월 아들 삼근을 태자로 삼았는데, 9월에 당시 정권을 장악했던 병권좌평 해구의 쿠데타에 의해 암살을 당했다. 해구의 쿠데타 이유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러한 불안정 속에서, 최고 장군이자 병부령인 해구가 군권을 장악하고 477년에 문주왕의 동생 부여곤지를 살해했다. 그 후 해구는 백제를 사실상 지배하였다. 같은 해, 문주왕은 해구의 사주를 받은 자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의 뒤는 왕족들의 추대를 받은 아들 삼근왕이 계승하였다. 재위 3년.[3] 선왕의 죽음과 도읍 이동으로 인해 왕권은 약화되었고, 왕권의 회복은 무령왕의 즉위(501년)까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2. 1. 출생과 가계

개로왕의 아들로, 곤지는 그의 형제이다. 동성왕곤지의 아들이므로 동성왕은 문주왕의 조카가 된다.

관계이름
아버지개로왕
형제곤지
조카동성왕


2. 2. 즉위와 웅진 천도

문주왕의 이름은 문주(文周)이다. 중국 남조의 《양서》에는 모도(牟都), 《송서》에는 여도(餘都)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개로왕의 아들이라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 유라쿠조에는 개로왕의 동생이라 한다. 오오치씨와 토요타씨 족보에는 문주왕의 별칭인 문원왕은 개로왕의 아들로 나타난다. 《양서》 백제전에는 문주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라 한다.[3]

문주왕은 결단력이 부족하였으나 백성을 사랑하였다고 한다.[3] 개로왕의 태자가 되었으며, 즉위 직전 상좌평에 임명되어 정사에 참여하였다.

475년 고구려한성을 공격하자 신라에 원병을 요청하여 1만 명의 군사를 지원받았으나, 수도 한성이 파괴되고 개로왕이 사망하여 왕위에 올랐다.[3]

475년 음력 10월, 수도를 한성에서 웅진으로 옮겼다.[3] 476년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쳐오자 왕이 기뻐하여 사신을 은솔(恩率)로 임명하였다.[4] 탐라왕에게는 백제의 좌평(佐平) 벼슬을 주었다.[5]

일본서기》에는 웅략천황 20년(476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멸망시켰고, 같은 해 21년(477년) 3월에 웅략천황이 구마나리(곰나리, 웅진을 가리킴)를 백제의 문주왕에게 하사하여 나라의 재건을 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477년 4월 아들 삼근을 태자로 삼았으나, 9월에 병권좌평 해구의 쿠데타로 암살당했다.

2. 3. 통치와 암살

문주왕의 성격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결단력이 부족하였으나 백성을 사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3] 개로왕의 태자가 되었으며, 즉위하기 직전에는 부왕 개로왕으로부터 상좌평에 임명되어 정사에 참여하였다.

475년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한성을 공격하자 문주는 개로왕의 명을 받아서 신라에 가서 원병을 요청하였다. 군사 1만명과 함께 돌아와 고구려의 군대가 물러갔으나, 수도 한성이 파괴되었다. 일설에는 개로왕이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문주왕을 피신시킨 것이라는 설도 있다. 개로왕이 죽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475년 음력 10월, 수도를 한성에서 웅진으로 옮겼다. 476년 여름 4월,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쳐오자 왕이 기뻐하여, 그 탐라국 사신을 보답으로 은솔(恩率)[4]로 임명하였다. 탐라왕에게 백제의 높은 벼슬인 좌평(佐平)[5]으로 임명하였다.

문주왕은 백제의 남은 방어 시설을 재정비하고 고구려에 대항하는 국가의 입지를 강화하려 했다. 그는 476년에 제주도탐라 왕국에 대한 종주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고구려에 대비하기 위한 체제를 갖추기 위해, 476년 2월에 대두산성(충청북도청주시)을 수리하고 한강 북쪽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3월에는 송(남조)에 의지하고자 조공사를 보냈으나, 도착하지 못해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수도 천도 이후, 전통적인 부여계 귀족과 현지 마한계 씨족 간의 갈등으로 백제의 권력 구조는 혼란에 빠졌다. 이전 강력한 왕들에 의해 억압되었던 기존 귀족 내부의 경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국내에서는 실력자인 해구를 병관좌평에, 왕의 동생인 곤지(昆支王)를 내신좌평에 임명하고, 장자 삼근(三斤王)을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곤지는 곧 죽었다.

477년 4월 아들 삼근을 태자로 삼았는데, 9월에 당시 정권을 장악했던 병권좌평 해구의 쿠데타에 의해 암살을 당했다. 해구의 쿠데타 이유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러한 불안정 속에서, 최고 장군이자 병부령인 해구가 군권을 장악하고 477년에 문주왕의 동생 부여곤지를 살해했다. 그 후 해구는 백제를 사실상 지배하였다. 같은 해, 문주왕은 해구의 사주를 받은 자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의 뒤는 왕족들의 추대를 받은 아들 삼근왕이 계승하였다. 재위 3년.[3] 선왕의 죽음과 도읍 이동으로 인해 왕권은 약화되었고, 왕권의 회복은 무령왕의 즉위(501년)까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3. 가계

백제 개로왕을 아버지로 두었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부여곤지는 문주왕의 형제이며, 동성왕의 아버지이다. 부여곤지는 461년 일본으로 파견되어 일본 여성과의 사이에 아들을 두었다. 왕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부여삼걸/부여임걸은 문주왕의 삼촌이며, 삼근왕이다.

4. 평가

4. 1. 긍정적 평가

4. 2. 부정적 평가

4. 3. 종합적 평가

5. 기타

참조

[1] 서적 Samguk Yusa: Legends and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of Ancient Korea Silk Pagoda 2006
[2] 기타
[3] 서적 삼국사기
[4] 웹인용 삼국사기/106문주왕 https://web.archive.[...] 2012-01-05
[5] 웹인용 26세 담 왕(聃 王) (453~483) http://www.jejugo.co[...] 2012-01-05
[6] 저널 『日本書記』에 인용된 百濟三書에 관한 연구 http://academic.nave[...] 199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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