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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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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상좌평은 백제 시대에 존재했던 관직으로, 기록상 최초의 상좌평은 부여신이다. 부여신은 전지왕 대에 상좌평에 임명되어 군사와 정사를 담당했으며, 이후 해수, 문주왕, 사택기루, 사택지적, 사택천복 등이 상좌평을 역임했다. 백제 멸망 후에는 사택소명이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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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좌평
일반 정보
백제 문장
백제 문장
국가백제
명칭상좌평 (Sangjwapyeong)
설치일408년
역할좌평 회의 의장
직위 관련 정보
초대 상좌평부여신
소속백제 조정
직무좌평 회의 의장

2. 역대 상좌평

사택천복은 660년 백제 멸망과 함께 의자왕, 부여융 및 왕족, 대신, 장수들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간 백제의 마지막 대좌평이다. 여러 기록에서 성씨가 다르게 나타나지만, 당평제비(唐平濟碑)와 《일본서기》를 통해 사(沙)씨임을 확인할 수 있다.삼국사기》에서는 성씨가 생략된 채 '천복(千福)'으로, 《삼국유사》에는 '정복(貞福)'으로 등장한다.


  • '''번외: 사택소명(沙宅紹明: ?~673년 음력 6월 6일)'''


사탁소명(沙矺昭明)으로도 불린다.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유민 사택소명은 《일본서기》에서 671년 부여자신(扶餘自信)과 함께 법관대보(法官大輔)로서 대금하(大錦下: 고대 일본 26관등 중 9관등)의 관직을 받는 것으로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회풍조》에서 그는 학사로서 오오토모노오우지(大友皇子)의 빈객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673년 음력 6월 6일 사택소명이 사망하자 텐무 덴노는 그에게 외소자(外小紫)의 관위와 본국(백제)의 관위인 대좌평 관위를 내렸다. 기록을 보건대 당시 수재로 지혜롭고 총명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문장이 뛰어나 후지와라노 가마타리(藤原鎌足)의 비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2. 1. 부여신 (扶餘信: ? ~ 429)

백제의 왕족이자 기록상 최초의 상좌평이다. 407년 2월, 전지왕에 의해 내신좌평에 임명되었고, 408년 정월에는 상좌평에 임명되어 군사와 정사를 맡았다. 이후 429년 10월 사망할 때까지 21년간 재임했다.

아신왕의 서자이자 전지왕의 이복동생으로, 405년 아신왕 사후 벌어진 '설례의 난'을 진압하고 전지왕을 옹립하는데 해씨 세력의 도움이 컸다. 왜국에서 백제로 귀국할 때 설례의 배신을 전지왕에게 보고한 해충(解忠)은 달솔로 임명되었고(406년 9월), 전지왕의 친척으로 기록된 해수(解須)와 해구(解仇)는 각각 내법좌평병관좌평에 임명되었다.

진사왕과 아신왕 대에 고구려에 많은 영토를 잃어 왕권이 위기에 놓이자, 전지왕은 자신의 친족인 부여신을 기용하여 왕권 강화를 꾀했다. 전지왕이 8년간 왜국에 체류하여 정치적 공백이 있었고, 부여신이 전지왕의 옹립에 깊이 관여했기 때문에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위한 조치로 해석되기도 한다.

2. 2. 해수 (解須: 생몰년도 미상)

부여신의 뒤를 이어 상좌평에 임명된 인물은 406년 내법좌평으로 임명된 해수이다. 이는 전지왕 옹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해씨가 상좌평에 올라 정치적 정점에 섰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후 해수에 대한 기록은 없고, 해씨에 대한 기록은 47년 뒤인 문주왕 대의 병관좌평 해구에서 다시 나타나기 때문에 비유왕-개로왕 대 해씨 세력의 행보는 알기 어렵다.

455년 비유왕의 의문사와 458년 개로왕에 보낸 조서를 통해 짐작하면, 해씨 세력은 개로왕의 왕권 강화 과정에서 밀려났을 가능성이 크다. 458년 개로왕은 송에 사신을 보내 11명의 신하에 대한 봉작을 요청했는데, 이들 중 8명은 백제 왕족이고 여곤(餘昆)과 여도(餘都)는 각각 개로왕의 형제인 곤지문주왕으로 비정된다. 문주왕 원년 기록을 통해 문주왕이 개로왕 즉위 후 상좌평에 임명된 것을 볼 때, 비유왕의 죽음과 함께 해씨 일족이 일시적으로 실권하고, 개로왕은 종친 세력을 기용하여 그 공백을 메꾼 것으로 보인다.

2. 3. 문주왕 (文周王) 부여모도 (扶餘牟都: ? ~ 477, 재위: 475 ~ 477)

훗날 백제의 문주왕으로 기록된 부여모도는 개로왕의 동생으로, 문주왕 즉위 기사에 따르면 개로왕의 즉위와 함께 상좌평에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문주왕은 한성 함락(475년) 시점까지 상좌평 직을 역임했다. 그는 신라로 파견되어 구원군 1만을 얻어 백제로 향했으나 한성은 이미 함락된 뒤였고, 폐허가 된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해 문주왕으로 즉위했다.

문주왕으로 즉위한 그는 동생인 부여곤지를 내관좌평에 임명해 정치를 보좌하게 했으나 부여곤지가 477년 7월 사망한 뒤 문주왕 또한 같은 해 9월 군사권을 바탕으로 횡포를 일삼던 병관좌평 해구에 의해 살해당하고 만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동성왕 대까지 이어졌다가 무령왕 대에 안정되었다.

2. 4. 사택기루 (沙宅己婁: 생몰년도 미상)

사택기루는 백제 성왕(?~554) 대의 인물로 《일본서기》 흠명기 4년(543년)에 상좌평으로 기록되어 있다. 해당 기록에는 중좌평(中佐平) 목례마나(木刕馬那), 하좌평(下佐平) 목윤귀(木尹貴) 등과 함께 백제 군신 회의에 참석하여 왜가 요청한 임나 부흥 안건에 대해 논의했다는 내용만이 남아있다.

기록상 가장 먼저 언급되었고, 관등 역시 상좌평인 점으로 보아 성왕 대의 최고위 귀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백제 대성팔족 중 하나인 사(沙)씨 가문 출신이다. 사(沙)씨는 한성백제 시기인 아신왕 대에 좌장(左將)에 임명된 사두(沙豆)가 기록상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백제에 복속된 마한계통의 귀족으로 추정되며 사비시대에 가장 큰 권세를 누렸다.

다만, 일각에서는 사택기루의 상좌평에 대해 당시 백제가 3좌평 체제였으나 이후 추가되어 6좌평이 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2. 5. 사택지적 (砂宅智積: ? ~ 641년 11월/654년 11월)

사택지적은 백제 무왕, 의자왕 대에 활약한 인물로, 대좌평(大佐平)에 이르렀다. 금석문과 역사서 모두 기록이 확인되는 인물로, 학계에서는 대좌평 지적과 사택지적을 동일인물로 보고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642년 7월 그의 아들과 함께 일본에 방문했다고 하는데, 이미 641년 11월 사망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어 기록의 신빙성이 의심되고 있다.

사택지적비에 따르면 사택지적은 최소 654년 정월까지 생존했던 것으로 새겨져 있다. 이는 일본 측 기록의 오류로 볼 수 있는데, 641년의 사망 기록을 오기로 보는 견해와 의자왕의 왕권 강화 혹은 친위 쿠데타에 연루되어 정계에서 밀려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후자의 견해를 채택할 경우(일본서기의 '백제대란(百濟大亂)' 기록을 전제로) 사택지적의 사망년도는 654년 11월로 추정된다.

무왕의자왕 대의 사택씨는 미륵사 금동사리봉안기에 나오는 사택적덕의 딸이 백제 무왕의 왕후가 되었고, 의자왕 시기에도 사택손등과 사택천복이 좌평을 역임하는 등 권세가 절정에 달했다.

2. 6. 사택천복 (沙宅千福: 생몰년도 미상)

660년 백제 멸망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간 백제의 마지막 대좌평이다. 여러 기록에서 성씨가 다르게 나타나지만, 당평제비(唐平濟碑)와 《일본서기》를 통해 사(沙)씨임을 확인할 수 있다.삼국사기》에서는 성씨가 생략된 채 '천복(千福)'으로, 《삼국유사》에는 '정복(貞福)'으로 등장한다.

3. 번외: 일본으로 건너간 상좌평

사택소명(沙宅紹明)은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유민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671년 부여자신과 함께 법관대보(法官大輔)로서 대금하(大錦下: 고대 일본 26관등 중 9관등)의 관직을 받았다. 《회풍조》에는 학사로서 오오토모노오우지(大友皇子)의 빈객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673년 음력 6월 6일 사택소명이 사망하자 덴무 덴노는 그에게 외소자(外小紫)의 관위와 본국(백제)의 관위인 대좌평 관위를 추증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수재로 지혜롭고 총명한 인물이었으며, 문장이 뛰어나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비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3. 1. 사택소명 (沙宅紹明: ? ~ 673년 음력 6월 6일)

사택소명(沙宅紹明: ? ~ 673년 음력 6월 6일)은 사탁소명(沙矺昭明)으로도 불린다.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유민으로, 《일본서기》에 따르면 671년 부여자신과 함께 법관대보(法官大輔)로서 대금하(大錦下: 고대 일본 26관등 중 9관등)의 관직을 받았다. 《회풍조》에는 학사로서 오오토모노오우지(大友皇子)의 빈객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673년 음력 6월 6일 사택소명이 사망하자 덴무 덴노는 그에게 외소자(外小紫)의 관위와 본국(백제)의 관위인 대좌평 관위를 추증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수재로 지혜롭고 총명한 인물이었으며, 문장이 뛰어나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비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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