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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부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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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주부 초상은 1713년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의 의원 박위보의 초상화이다. 이 초상화는 18세기 초 조선과 일본 간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로, 특히 의술을 통해 맺어진 사제 관계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박주부 초상은 국립해양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일본인 인위 조린이 박주부에게 의학을 배우고 초상화를 제작하여 존경을 표한 사연을 담고 있다. 이 초상화는 한일 관계사 및 동아시아 회화 교류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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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부 초상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박주부 초상 정보
박주부 초상
박주부 초상
국가대한민국
위치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자료
지정 번호113
지정일2020년 1월 29일
주소부산광역시 영도구 해양로 301번길 45
소유자국립해양박물관
수량1점
문화재청 ID31,01130000,21

2. 지정 사유 및 역사적 배경

국립해양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초상화는 조선 시대 종6품 주부(主簿) 벼슬을 지낸 박위보(偉甫)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림의 족자에는 1713년(숙종 39년) 64세의 나이로 왜학 역관으로서 대마도에 문위행(問慰行)으로 다녀온 박재창(朴再昌, 1649~1720년 이후)이 쓴 제사(題辭)가 남아 있어 그림의 내력과 의미를 더한다. 현재 초상화는 화면 왼쪽 상단과 하단부 바탕지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등 손상이 진행 중이며, 인물의 의복에는 덧칠하거나 호분금니로 지우고 고친 흔적이 보인다.

박재창이 남긴 제사를 통해, 이 초상화는 박주부의 일본인 제자 인위 조린(仁位朝隣)이 부산 초량 왜관의 의원이었던 스승 박주부를 그리워하며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박재창은 조카인 박주부와 인위 조린의 사제 관계에 감탄하여 제사를 남겼으며, 이들은 대대로 왜어 역관과 의관을 배출한 무안 박씨 중인 가문 출신이었다. 이 일화는 당시 일본 의원이 조선 의학에 대해 가졌던 학문적 관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초상화 속 인물은 흉배와 품대(品帶)를 착용한 관복 차림이지만, 흉배의 문양이나 금대(金帶) 등은 실제 조선의 복식 규정과는 차이가 있다. 이는 그림을 그린 이가 조선의 관복 제도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 형식만을 기억하여 표현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림 양식은 당시 일본 화단의 주요 유파였던 카노파(狩野派) 화풍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인물을 신선처럼 묘사하여 존경심을 표현하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박주부 초상은 1713년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며, 18세기 초 조선인 스승과 일본인 제자 사이에 맺어진 국경을 넘은 정과 학문적 교류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물이다. 특히 의술을 통해 맺어진 인연을 담은 최초의 작품이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조선 의사 초상화라는 점에서 높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 1. 박주부와 인위 조린의 만남

초상화 위쪽에 기록된 제사(題辭)는 그림 속 인물과 관련된 중요한 사연을 담고 있다. 이 글은 자(字)가 도경(道卿)인 박재창(1649~1720년 이후)이 작성한 것이다. 박재창은 1713년(계사년) 문위행의 일원으로 대마도에 파견된 왜어 역관이었다. 그는 당시 예조에서 대마도주에게 보내는 사절단의 수석 통역관(堂上譯官)을 맡았다.

박재창은 대마도에 머물던 중 다음 해인 1714년 2월, 일본인 인위 조린(仁位朝隣)을 만나게 되었다. 인위 조린은 박재창에게 초상화 한 폭을 보여주며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과거 부산초량 왜관에 머물렀을 때, 종6품 주부 직책에 있으며 자호가 위보(偉甫)인 박씨 성의 조선인에게 학문을 배워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었다고 했다. 박주부가 의원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인위 조린이 배운 학문은 의학 지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 사람은 헤어진 뒤에도 인위 조린은 스승 박주부를 잊지 못하여 직접 초상화를 제작하고, 아침저녁으로 그 앞에 술잔을 올리며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은 박재창은 그림 속 주인공 박주부가 바로 자신의 조카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스승을 향한 인위 조린의 지극한 정성에 깊이 감탄하며 "세상에 어찌 이렇게 지극한 정성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라고 말하고 초상화에 직접 글(제사)을 남기게 되었다. 인위 조린은 박재창이 박주부의 숙부라는 사실을 알고 일부러 찾아와 초상화에 제사를 부탁했을 가능성이 있다.

제사를 쓴 박재창과 초상화의 주인공 박주부는 모두 무안 박씨 본관을 가진 인물이다. 이는 제사 말미에 찍힌 본관과 세계(世系)를 나타내는 도장인 '무안후인(務安後人)' 인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들 가문은 대대로 왜어 역관이나 의관을 배출한 대표적인 중인 집안이었다. 인위 조린이 박주부를 만나 학문을 배운 초량 왜관은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과 교류하던 주요 거점이었으며, 이 일화는 당시 일본 의원들이 조선 의학계에 가졌던 학문적 관심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 초상화는 1713년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며, 18세기 초 조선인 스승과 일본인 제자 사이에 맺어진 깊은 정을 보여주는 한일 교류의 중요한 상징물이다. 특히 의술을 통해 맺어진 인연을 담은 최초의 작품이자, 조선의 의사를 그린 가장 오래된 그림 중 하나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2. 2. 18세기 초 한일 의학 교류

박주부 초상은 18세기 초 조선일본 사이의 의학 지식 교류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1713년(숙종 39년), 왜학역관이었던 박재창(朴再昌, 1649~1720년 이후)은 조선 통신사의 일원으로 대마도에 파견되었다. 그는 다음 해인 1714년 2월, 대마도에서 仁位朝隣|인위 조린일본어이라는 일본인을 만나게 되었다.

인위 조린은 박재창에게 초상화 한 폭을 보여주며 그 사연을 설명했다. 그는 과거 부산의 초량 왜관에 머물렀을 때, 종6품 주부(主簿)이자 의원이었던 박위보(偉甫, 박주부)에게 학문을 배우며 사제의 연을 맺었다고 밝혔다. 헤어진 후 스승을 잊지 못해 초상화를 제작하고 아침저녁으로 추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박주부의 숙부였던 박재창은 이 사연에 깊이 감동하여 초상화에 제사(題辭)를 써주었다.

이 일화는 당시 일본인 의원이 조선 의학에 대해 가졌던 학문적 관심을 잘 보여준다. 인위 조린이 박주부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배웠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박주부가 의원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의학 지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조선의 의술이 일본에 전파되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박주부 초상은 이처럼 의술을 매개로 하여 맺어진 조선인 스승과 일본인 제자의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물이다. 이는 18세기 초 한일 간 문화 교류의 한 단면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의술 교류를 나타내는 최초의 작품이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조선 의사 초상화라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3. 초상화의 미술사적 특징

이 초상화는 조선시대 종6품 주부(主簿) 박위보를 그린 것으로 추정되지만, 미술사적으로 여러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복식은 조선관복과 유사하게 그려졌으나, 흉배의 문양이나 품대 등 세부적인 부분에서 실제 제도와 맞지 않는 오류가 발견된다. 이는 화가가 조선의 복식 제도를 정확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렸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화풍에서는 당시 일본 화단의 주요 유파였던 카노파(狩野派)의 영향이 엿보이며, 인물의 자세나 선 처리 방식 등에서 그 특징이 나타난다. 또한, 실제 인물을 그리면서도 도교의 신선이나 성현(聖賢)의 복식을 차용하여 표현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대상 인물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일본 초상화에서는 비교적 일찍부터 나타난 기법이다.

이러한 특징들을 종합해 볼 때, '박주부 초상'은 1713년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18세기조선인과 일본인이 맺었던 사제 간의 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한일 교류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의술을 통해 맺어진 인연을 담은 최초의 작품이자, 조선의 의사를 그린 가장 앞선 시기의 작품 중 하나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3. 1. 복식 및 표현 기법

초상화 속 인물은 흉배(胸背)가 달린 관복과 비슷한 옷을 입고 품대(品帶)를 차고 있어, 조선이나 명(明)의 관복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품계를 나타내는 흉배의 문양이 공작과 유사하고 종6품 주부가 찰 수 없는 금대(金帶)를 착용하고 있으며 그 속 문양 또한 실제 조선의 복식 규정과는 맞지 않는다. 이는 그림을 그린 이가 조선의 관복 제도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형식만을 기억하거나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렸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인물화 자체는 당시 일본 화단의 주요 유파이자 어용 화가 집단으로 활동한 카노파(狩野派) 화풍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물이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앉아 있는 자세나, 외곽선을 자유롭게 처리한 방식 등은 이러한 특징을 보여준다. 특히 이러한 기법은 카노 츠네노부(狩野常信, 1636~1713)가 1711년에 그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태억 초상과 유사한 면이 있다.

복식의 세부적인 표현에서도 독특한 점이 발견된다. 관복 형태의 옷에는 당초문과 같은 문양이 들어가 있어 마치 도교의 신선이 입는 옷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양 어깨 등 옷 곳곳에 있는 원형의 금색 문양은 왕의 옷에 사용되는 보(補)와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 신고 있는 신발 역시 성현이나 신선의 모습에서 자주 등장하는 방리(方履)와 비슷하다. 이처럼 실제 인물을 그리면서 성현이나 신선의 복장을 입히는 것은 해당 인물을 존경하고 숭상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이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엄격한 초상화법을 따랐던 조선에서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조금씩 나타나지만, 일본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사용되었다.

3. 2. 카노파 화풍과의 연관성

초상화 속 인물은 흉배(胸背)가 달린 관복과 비슷한 옷을 입고 품대(品帶)를 차고 있어 조선이나 (明)의 관복(官服)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품계를 나타내는 흉배의 공작 같은 문양이나, 종6품 주부가 찰 수 없는 금대(金帶)와 그 안의 문양은 실제 조선시대의 복식 규정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그림을 그린 이가 조선의 관복 제도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 형식만을 기억하거나 참고하여 그렸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림의 화풍은 당시 일본 화단의 주요 유파이자 막부의 어용 화가 집단이었던 카노파(狩野派)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물이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앉아 있는 자세나, 굵기 변화와 끊김이 자유로운 외곽선 표현 방식 등에서 카노파 화풍의 특징이 나타난다. 이러한 특징은 카노 츠네노부(狩野常信, 1636~1713)가 1711년에 그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태억 초상에서도 유사하게 발견되어, 두 작품 간의 연관성을 짐작하게 한다.

복식의 세부 표현 역시 흥미롭다. 관복 형태를 띠면서도 당초문 같은 무늬가 들어가 있어 마치 도교의 신선이 입는 옷처럼 보이기도 한다. 옷에 그려진 원형의 금색 문양, 특히 양어깨에 있는 것은 왕의 옷에 사용되는 보(補)와 유사하며, 신발 또한 성현이나 신선의 모습에서 자주 보이는 방리(方履)와 비슷하다. 실제 인물을 그리면서 이처럼 신선이나 성현의 복식을 차용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표현은 조선에서는 초상화법이 엄격하여 18세기 후반에야 조금씩 나타나지만, 일본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사용되었다. 누가 이 초상화를 그렸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러한 화풍과 표현 방식은 18세기 초 조선일본 사이의 회화 교류, 특히 일본 화풍이 조선 인물 표현에 영향을 미친 사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3. 3. 성현 및 신선 이미지 차용

초상화 속 박주부는 흉배(胸背)가 달린 관복과 비슷한 옷을 입고 품대(品帶)를 차고 있어, 조선이나 (明)의 관복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품계를 나타내는 흉배의 공작 같은 문양이나, 종6품 주부가 찰 수 없는 금대(金帶)와 그 속 문양 등은 실제 조선의 복식 규정과는 맞지 않는다. 이는 화가가 조선의 관복 제도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억이나 지식에 의존하여 형식적으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복식의 세부적인 표현은 도교의 신선이나 성현(聖賢)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옷에 그려진 당초문 같은 문양은 도교 선인이 입는 도포(道袍)를 떠올리게 하며, 금색 원형 문양, 특히 양어깨에 그려진 것은 의 옷에 장식되는 (補)와 유사하다. 또한, 박주부가 신고 있는 신발은 성현이나 신선의 모습에서 자주 보이는 방리(方履)와 비슷하다.

이처럼 실제 인물의 초상화에 성현이나 신선의 복식을 입혀 표현하는 방식은 해당 인물을 존경하고 숭배하는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러한 표현법은 초상화 제작 규범이 엄격했던 조선에서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조심스럽게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일본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초상화의 화풍은 당시 일본 화단의 주요 유파이자 어용 화가 집단이었던 카노파(狩野派)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인물이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앉아 있는 자세나, 굵기 변화와 끊김이 자유로운 외곽선 표현 방식 등에서 카노파의 특징이 나타난다. 이는 가노 쓰네노부(狩野常信, 1636~1713)가 1711년에 그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태억 초상과 유사한 점이 있다.

4. 초상화의 가치와 의의

국립해양박물관이 소장한 이 초상화는 조선 시대 종6품 주부(主簿) 박위보(偉甫)를 그린 작품이다. 그림 상단에는 박주부의 숙부이자 왜학역관이었던 박재창(朴再昌, 1649~1720년 이후)이 1714년에 쓴 제사(題辭)가 남아 있어, 초상화의 주인공과 제작 배경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 제사에 따르면 초상화는 1713년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박주부 초상화는 단순한 인물화를 넘어 역사적, 문화적, 예술적으로 다층적인 가치와 의의를 지닌다. 우선, 18세기 초 조선인 스승(박주부)과 일본인 제자(인위 조린) 사이에 맺어진 국경을 넘은 사제의 정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물로서, 당시 한일 교류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특히 의술이라는 전문 지식을 매개로 한 교류를 보여주는 최초의 사례로 평가받는다.

또한, 조선 시대 의원을 그린 가장 오래된 초상화 중 하나라는 점에서 조선 의학사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비록 초상화 속 복식 표현이 실제 조선의 관복 제도와는 다소 차이를 보이지만, 이는 당시 일본 화가(카노파 화풍 추정)가 조선 인물을 그리면서 나타난 특징으로 해석되며, 동아시아 회화 교류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인물을 신선처럼 이상화하여 표현한 방식 역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이처럼 박주부 초상화는 개인적인 사연을 넘어 18세기 초 동아시아의 문화 교류, 특히 한일 간의 학술 및 예술 교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작품이다.

4. 1. 한일 관계사적 중요성

부산광역시 초량에 머물던 대마도 사람 인위 조린(仁位朝隣)은 조선의 종6품 관리이자 의원이었던 박주부(朴主簿, 자호: 偉甫)에게 학문을 배웠다. 스승과 헤어진 후에도 그를 잊지 못한 인위 조린은 박주부의 초상화를 제작하여 아침저녁으로 예를 갖추며 그리워했다고 전해진다. 박주부가 의원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인위 조린이 배운 학문은 의학 지식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당시 일본 의원이 조선 의학계에 가졌던 학문적 관심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연은 박주부의 숙부인 박재창(朴再昌, 1649~1720년 이후)이 1713년 문위행(問慰行)의 당상역관으로 대마도에 파견되었을 때 밝혀졌다. 박재창은 다음 해인 1714년 2월, 인위 조린을 만나 초상화를 보고 그에 얽힌 사연을 들었다. 그는 국경을 넘어선 사제의 정에 깊이 감탄하여 그림 위쪽에 제사(題辭)를 남겼다. 이 제사를 통해 초상화의 주인공이 박주부이며, 그와 인위 조린 사이에 깊은 존경과 그리움의 관계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박재창과 박주부는 무안 박씨 가문 출신으로, 이 가문은 대대로 역관과 의관을 배출한 중인 집안이었다.

박주부 초상화는 1713년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며, 18세기 초 조선인 스승과 일본인 제자 사이에 맺어진 특별한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물이다. 특히 의술이라는 전문 지식을 매개로 형성된 양국 간의 교류를 보여주는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한일 관계사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조선 시대 의사를 그린 가장 오래된 초상화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4. 2. 조선 의학사 연구 자료

이 초상화는 조선 시대 의학사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자료이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부산 지역에서 활동했던 의원 박주부(朴主簿, 자호: 偉甫 위보)로 확인된다.

초상화 상단에 적힌 박재창(朴再昌, 1649~1720년 이후)의 제사(題辭)는 이 그림의 내력을 상세히 알려준다. 박재창은 박주부의 숙부이자 왜학역관으로, 1713년 문위행(問慰行)의 일원으로 대마도에 파견되었다. 그는 다음 해인 1714년 대마도에서 인위 조린(仁位朝隣)이라는 일본인을 만났다. 인위 조린은 자신이 과거 부산 초량에 머물 때 박주부에게 학문을 배워 사제의 연을 맺었으며, 헤어진 후 스승을 잊지 못해 초상화를 그려 기렸다고 밝혔다. 박재창은 이러한 사연에 감탄하여 초상화에 글을 남겼다.

인위 조린이 박주부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배웠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박주부가 의원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의학 지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당시 일본 의원이 조선의 의학에 대해 가졌던 학문적 관심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박주부와 박재창은 무안 박씨 가문 출신으로, 이 가문은 대대로 왜어 역관이나 의관을 배출한 중인 집안이었다. 인위 조린이 박주부를 만난 초량은 당시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왜관 지역이었다.

초상화 자체는 조선의 관복과 유사한 옷을 입고 있지만, 흉배의 문양이나 종6품 주부가 찰 수 없는 금대(金帶) 등 복식의 세부적인 표현은 실제 법식과 차이가 있다. 이는 그림을 그린 이가 조선의 복식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형식만을 기억하여 그렸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화풍은 당시 일본의 가노파(狩野派)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초상화는 1713년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의 의사를 그린 가장 오래된 작품 중 하나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또한, 의술이라는 학문을 매개로 조선인 스승과 일본인 제자 사이에 맺어진 정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18세기 초 한일 교류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4. 3. 동아시아 회화 교류 연구 기여

이 초상화는 18세기 초 조선일본 사이의 개인적인 교류와 문화적 접점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의학회화 분야에서의 교류 양상을 파악하는 데 기여하는 바가 크다.

초상화 제작 배경에는 대마도 사람인 인위 조린(仁位朝隣)과 부산 초량의 의원이었던 박주부(朴主簿) 사이의 사제 관계가 있다. 인위 조린은 스승 박주부에게 의학 지식을 배운 후, 그를 잊지 못해 초상화를 제작하여 기렸다고 한다. 이후 1714년, 박주부의 숙부이자 역관이었던 박재창(朴再昌)이 문위행(問慰行)으로 대마도에 갔을 때 인위 조린을 만나 이 초상화와 사연을 접하게 되었다. 박재창은 인위 조린의 정성에 감탄하여 초상화에 제사(題辭)를 남겼고, 이 기록 덕분에 초상화의 주인공과 제작 경위가 밝혀졌다. 이는 당시 일본인이 조선 의학에 대해 가졌던 학문적 관심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회화 양식 측면에서는 당시 일본 화단의 주류였던 카노파狩野派일본어 화풍과의 관련성이 주목된다. 인물의 자세, 외곽선 처리 방식 등에서 카노파의 특징이 나타나며, 특히 카노 츠네노부狩野常信|카노 쓰네노부일본어가 그린 조태억 초상(1711년)과 유사한 점이 발견된다. 이는 일본 화가가 조선 인물을 그리는 과정에서 자국의 화풍을 적용했음을 보여준다.

다만, 초상화 속 인물이 입은 복식은 조선이나 (明)의 관복과 유사해 보이지만, 흉배 문양이나 품대(品帶) 등 세부적인 묘사에서는 실제 조선의 복식 규정과 차이를 보인다. 이는 화가가 조선의 복식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형식적인 특징만을 바탕으로 그렸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인물을 신선이나 성현처럼 묘사하기 위해 실제와 다른 복식을 입히는 표현 방식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존경하는 인물을 이상화하여 표현하는 기법으로 일본에서는 비교적 일찍부터 나타난 특징이다. 조선에서는 초상화 제작 규범이 엄격하여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표현이 조금씩 등장한다.

결론적으로 박주부 초상화는 18세기 초 한일 간 개인적 차원의 깊은 교류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물이다. 특히 의술을 매개로 맺어진 사제의 정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최초의 사례이자, 조선 의원의 모습을 담은 가장 오래된 그림 중 하나라는 점에서 동아시아 의학사 및 회화 교류사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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