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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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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정은 고려 시대에는 토지를 경작하는 일반 농민을, 조선 시대에는 도살업을 주로 하는 천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고려 시대의 백정은 국가로부터 토지를 받지 못하는 농민이었으나, 조선 시대에는 호적에서 제외되어 차별받는 계층이었다. 조선 시대 백정은 도살, 피혁 제조 등 천한 직업에 종사하며 사회적으로 멸시받았고, 신분 차별과 억압을 받았다. 갑오개혁으로 법적으로 신분은 폐지되었으나, 사회적 차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1923년 백정들은 형평사를 조직하여 신분 해방 운동을 펼쳤다. 현대 사회에서 백정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일부 식당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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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

2. 고려 시대의 백정

고려 시대 백정은 토지를 직접 경작하는 일반 농민을 의미했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토지를 분급받지 못했지만, 군호나 역정에 편입되어 정호를 받기도 했다.[10] 조선 세종 이전까지 백정은 최하층 민중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었다. 한자어 백정(白丁)은 원래 "평민"을 뜻했으며, 중국어와 일본어에서도 그 의미를 유지하고 있다. 고려사의 정보를 바탕으로 학자들은 백정을 "의무(역, 役)를 지지 않는 사람"으로 추정한다. 백정은 백(白, 흰, 순수한, 빈)과 정(丁, 사람)의 합성어로, 국가로부터 특정 의무를 부여받지 않아 토지를 받지 못한 농민 집단을 의미했다.[10]

고려 시대에는 양수척(楊水尺), 수척(水尺), 화척(禾尺) 또는 화채(禾菜), 무자리(물과 자리의 합성어로 추정)라고 불리는 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은 훗날 백정으로 알려지게 된다.[12][13] 이들은 고려 초 거란이나 여진족에서 유래했으며[14], 공동체 생활을 하며 여러 지역을 이동하며 임시 거처에서 생활했다.[15] 이들은 전국에 분포했지만 특히 평안도황해도에 집중적으로 거주했으며, 호적에 등록되지 않았다.[15]

2. 1. 고려 백정의 경제적 지위

백정은 고려 때에 토지를 직접 경작하던 일반 농민이었다. 백정은 특정한 직역(職役)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로부터 토지를 분급(分給)받지 못하는 특수한 농민층이었다.[10]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군호(軍戶)에도 편입시켰고, 또 역정(驛丁)에도 보충하여 이들에 대해서만은 일정한 토지를 주어 정호(丁戶)가 되기도 했다. 그들은 공전이건 사전이건 간에 그들에게 맡겨진 토지를 경작하여 조(租)를 바치고 남은 수확으로써 삶을 영위하는 전호(佃戶)였다. 또 신간지(新墾地)를 개척하거나 족친(族親)이라는 혈연을 유대로 하는 의부관계(依附關係 : 더부살이)에 의지하여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2. 2. 고려 백정의 사회적 지위

고려 시대의 백정은 땅을 직접 경작하는 일반 농민이었다. 이들은 특정한 직역(職役)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로부터 토지를 받지 못하는 특수한 농민층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군호나 역정에 편입되어 일정한 토지를 받고 정호가 되기도 했다. 이들은 공전이나 사전에 관계없이 토지를 경작하여 조(租)를 바치고 남은 수확으로 생활했다. 또한, 새로 개간한 땅을 경작하거나 족친(族親)이라는 혈연 관계를 바탕으로 의부관계(더부살이)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10]

고려 시대 백정(白丁)이라는 한자어는 원래 "평민"을 뜻했으며, "의무(역, 役)를 지지 않는 사람"으로 추정된다. 백(白, 흰, 순수한, 빈)과 정(丁, 사람)의 합성어로, 국가로부터 특정 의무를 부여받지 않아 토지를 받지 못한 농민 집단을 의미했다.[10]

3. 조선 시대의 백정

조선 시대의 백정은 사천(私賤)의 하나로, 재우군(宰牛軍)이라고도 불렸다. 이들은 호적에서 제외된 천민 계급으로, 주로 가축 도살을 생업으로 삼았으며, 부업으로 고리를 제작했다.[10]

세종은 양수척을 평민으로 대우하기 위해 백정에 편입시켰으나, 일반 민중은 이들을 신백정(新白丁)이라 부르며 차별했다. 이로 인해 '백정'은 천민을 가리키는 말로 변질되었다.[37] 백정은 각 지방으로 흩어져 무질서한 생활을 했으며, 《대전회통》에 따르면 매년 실태 조사를 통해 서울과 각 지방에 배치하고 명부를 작성하여 엄격히 감독했다. 평민 중 생활이 어려워 백정이 되는 자들이 늘면서 백정의 수는 점차 증가했다.

조선 시대 백정은 칠반공천, 팔반사천 중 최하위에 위치한 차별받는 계층이었다.[36] 이들은 사회적으로 여러 제약을 받았는데, 주요 차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백정에 대한 차별[39]
차별 내용
족보를 가질 수 없음
도축, 육류 상인, 피혁업, 골세공, 버드나무 세공(삿갓, 보따리 등) 외의 직업에 종사할 수 없음
상민과의 결혼 금지
햇볕이 잘 드는 곳이나 고지에 거주할 수 없음
기와지붕을 가진 가옥에 거주할 수 없음
글자를 알거나 학교에 다닐 수 없음
다른 신분의 사람에게 존댓말 외의 말을 사용할 수 없음
이름에 인, 의, 예, 지, 신, 충, 군의 글자를 사용할 수 없음
을 가질 수 없음
공공장소에 출입할 수 없음
장례식에서 을 사용할 수 없음
결혼식에서 독을 사용할 수 없음
를 상민보다 높은 곳이나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만들 수 없음
묘비를 세울 수 없음
일반 백성 앞에서 당당하게 보행할 수 없음 (백정걸이 강요)



이러한 금기를 어기면 엄벌을 받았고, 심지어 린치를 당해 살해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살해범은 아무런 벌을 받지 않았다.[39] 백정은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39]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는 법적으로 폐지되었으나,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계속되었다. 백정의 호적은 별도로 관리되었고, 직업란에는 "도살자(屠漢)"라는 글이나 붉은 점이 표시되었다.[18] 1896년 개정된 규정에 따라 백정 외의 사람들도 도살업 면허를 취득할 수 있게 되면서 많은 백정들이 직업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조선 말기 백정들의 상부상조 단체인 승동도가(承洞都家)가 설립되어 백정 문제 해결, 개선 협의, 법률 문제 대표 등의 활동을 했다.[17]

3. 1. 조선 백정의 기원

조선 시대 백정의 기원은 북방 민족 귀화인(양수척, 화척) 설이 유력하다. 정약용[9] 백정이 타타르 계통이라고 주장했는데, '타타르'는 몽골, 만주 등 모든 북방 민족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였던 것으로 보인다.[9] 그의 저서에는 백정의 기원이 고려 시대의 유목 민족인 양수척(楊水尺) 또는 무자리로[9] 거슬러 올라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방인이었던 양수척은 일반 백성과 거의 동화되지 못하고,[9] 버들 바구니를 만들고 파는 일, 동물 도축, 사냥 등에 종사했다.[9]

1423년 세종은 양수척을 평민으로 대우하기 위해 백정에 편입시켰다.[37] 세종은 이들을 호적에 올리고 농사지을 땅을 주어 정착시키려 했으나,[10] 일반 민중은 이들을 신백정(新白丁)이라 부르며 차별했고,[37] 이는 백정이라는 명칭이 천민을 가리키는 말로 변질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세종의 정책은 천민 차별에 대한 백성들의 편견을 극복하지 못했고, 관리들조차 왕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16]

백정들은 기존 생활 방식을 쉽게 바꾸지 않아[16] 정착 후에도 농사 대신 버들가지 제품 생산 및 판매, 도살, 노래와 춤 등에 종사했다.[16] 이로 인해 백정의 일반 농민 통합은 어려웠고, 차별과 억압은 계속되었다.[16]

3. 2. 조선 백정의 직업과 생활

조선 백정은 주로 도살업, 피혁 제조, 유기(柳器) 제조 등을 주업으로 삼았다.[23]宰牛軍한국어(재우군)이라고도 불렸다.[10] 부업으로는 고리, 즉 버들가지 제품을 만들었다.[16] 이들은 불교 신자라면 꺼리는 동물 관련 일을 도맡아 했으며,[23] 특히 동물 도살, 가죽 제작과 같은 일은 다른 한국인들이 피했기 때문에 백정들이 맡게 되었다.[23] 조선 후기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부모 상을 당했을 때 3년 동안 도살을 하지 않기도 했다.[24]

조선 시대 백정은 차별받는 계층으로, 생활 전반에 걸쳐 여러 제약이 있었다. 우선 거주 지역이 제한되어 일반 마을이 아닌 도시나 마을 외곽에 집단으로 거주해야 했다.[40] 또한, 다음과 같은 차별을 받았다.[39]

조선 백정에 대한 차별[39]
차별 내용
족보를 가질 수 없음
도축, 육류 상인, 피혁업, 골세공, 버드나무 세공(삿갓, 보따리 등) 외의 직업에 종사할 수 없음
상민과의 결혼 금지
햇볕이 잘 드는 곳이나 고지에 거주할 수 없음
기와지붕을 가진 가옥에 거주할 수 없음
글자를 알거나 학교에 다닐 수 없음
다른 신분의 사람에게 존댓말 외의 말을 사용할 수 없음
이름에 인, 의, 예, 지, 신, 충, 군의 글자를 사용할 수 없음
을 가질 수 없음
공공장소에 출입할 수 없음
장례식에서 을 사용할 수 없음
결혼식에서 독을 사용할 수 없음
를 상민보다 높은 곳이나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만들 수 없음
묘비를 세울 수 없음
일반 백성 앞에서 당당하게 보행할 수 없음 (백정걸이 강요)



이러한 금기를 어기면 엄벌을 받았고, 심지어 린치를 당해 살해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살해범은 아무런 벌을 받지 않았다.[39] 백정은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39]

백정은 호적이 없어 세금이나 군포(징병 대신 바치는 포)도 면제되었지만,[40] 의복에도 제한이 있어 비단옷을 입을 수 없었고, 대신 삿갓을 써야 했다.[41] 여성은 비녀를 꽂을 수 없었고, 혼례 때 가마를 타거나 상여를 사용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41] 길을 걸을 때는 허리를 굽히고 빨리 걷는 '백정걸이'를 강요받았다.[41]

3. 3. 조선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

조선 시대에 백정은 심각한 사회적 차별을 받았다.[25] 이들은 비천하고 더러운 존재로 여겨져 다른 사람들의 기피 대상이었다.[25] 백정은 기와집에서 살 수 없었고, 비단옷, 가죽신, 갓을 착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26] 외출 시에는 패랭이나 대갓을 써야 했다.[26] 양인 앞에서 몸을 낮춰야 했고, 양인 앞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26]

결혼과 장례에도 차별이 있었다. 백정은 결혼식 때 가마나 말을 탈 수 없었고, 기혼 여성은 비녀를 꽂을 수 없었다.[26] 장례식에서는 상여를 사용할 수 없었으며[41], 묘비 설치도 금지되었다.[26]

이름에도 제약이 있었다. 백정은 성을 가질 수 없었고, 이름에 인(仁), 의(義), 예(禮), 지(智)와 같은 특정 글자를 사용할 수 없었다.[26] 백정의 시신은 양민과 섞이지 않도록 따로 매장해야 할 정도로 이들은 불결한 존재로 여겨졌다.[26]

이러한 차별은 조선 사회에서 백정이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다음은 조선 시대 백정이 받은 차별을 정리한 표이다.

차별 내용상세 설명
거주 제한일반 마을에 살 수 없었고, 도시나 마을 외곽 변두리에 집단 거주[40]
직업 제한도축, 육류 상인, 피혁업, 세공, 버드나무 세공 외 직업 종사 불가[39]
복장 제한비단옷, 가죽신 착용 금지, 갓 대신 패랭이나 대갓 착용[26], 여성은 비녀 착용 금지[41]
혼인 제한상민과의 혼인 금지[39], 결혼식 때 가마나 말 사용 불가[26]
장례 제한장례식에서 사용 금지[39], 묘비 설치 금지, 상여 사용 금지[41]
언어 및 행동 제한양인 앞에서 몸을 낮춰야 함, 양인 앞에서 흡연 및 음주 금지[26], 존댓말 이외의 말 사용 금지[39], 백정걸이 강요[39]
이름 제한성(姓)을 가질 수 없음, 이름에 특정 글자(인, 의, 예, 지 등) 사용 금지[26]
기타공공장소 출입 금지[39], 글자를 알거나 학교에 다닐 수 없음[39]


4. 갑오개혁과 백정의 신분 해방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법적으로 폐지되었으나,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18] 조선 왕조 말기에는 백정들의 상부상조 단체인 승동도가(承洞都家)가 여러 지역 대표들과 함께 설립되어, 백정들의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을 조직하고 개선을 협의하며 법률 문제에서 백정들을 대표하는 역할을 하였다.[17]

1909년 한국통감부가 설치되면서 호적제도를 도입,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백정을 비롯한 천민 계층에도 성을 허용하여 신분 차별을 폐지했다.[42] 또한, 신분이 해방된 백정도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대해 양반들은 이 정책을 인정하지 않고 저항 운동을 벌였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단호하게 진압했다.[42]

4. 1. 갑오개혁 이후 백정의 호적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법적으로 폐지되었으나,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사라지지 않았다. 백정의 호적은 별도로 관리되었고, 직업란에는 "도한(屠漢)"이라는 글자나 붉은 점으로 표시되었다.[18]

4. 2. 갑오개혁 이후 백정의 사회적 지위

1894년 갑오개혁으로 한국의 신분제가 법적으로 폐지되었지만,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사라지지 않았다.[18] 백정의 호적은 여전히 별도로 관리되었고, 직업란에는 “도살자(屠漢)”라는 글이나 붉은 점으로 표시되었다.[18] 그러나 갑오개혁은 백정들이 능력이 있다면 관리, 학자, 예술가가 될 수 있도록 보장하였다.[19] 여전히 전통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1896년 개정된 규정에 따라 백정 이외의 사람들도 도살업 면허를 취득할 수 있게 되면서, 결국 많은 백정들이 그나마 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직업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5. 형평사 운동

갑오개혁으로 제도상 신분적 평등권을 얻었지만, 백정들은 여전히 사회적 차별을 받았다. 이에 1923년 5월 경상남도 진주에서 백정들의 결사(結社)인 형평사를 조직하고, 사회적 신분 향상과 직업의 자유를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했다.[30][31]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부터 백정들은 사회적 차별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1900년, 16개 군의 지도자들은 진주 시장에게 다른 사람들과 같은 옷과 모자를 착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원했다.[30] 한국의 산업화가 발전하면서, 특히 일본이 도축장을 장악하고 백정들을 종업원으로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특정 직종에서 백정들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다.[30]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백정들은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지만, 차별 완화는 다른 백정들이 변화로부터 이익을 얻게 하여 변화를 위한 노력에 자금을 지원할 수 있게 했다.[30] 또한, 차별과 긴밀한 사회적 네트워크를 통해 형성된 오랜 유대 관계로 인해 조직력도 강화되었다.[30]

이러한 인적 및 재정적 자원, 진보적 모델에 대한 강조, 사회적 박탈감과 차별감 속에서 백정들은 변화를 위해 동원될 여건이 성숙해졌다.[30] 1910년 장지필이 정육업 노동조합 설립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30] 1921년에는 한국과 일본 기업가들이 정육업 종사자들을 위한 빈곤 구제를 시도하는 집성조합이 설립되었으나, 곧 더 광범위한 목표를 가진 단체에 의해 overshadow되었다.[30]

1926년 조선총독부의 통계 조사에 따르면, 당시 조선반도에서 예전에 “백정”이라고 불렸던 계층은 8211가구, 3만 6809명이었다. 직업별로는 육류 판매업이 27.8%로 가장 많았고, 도축, 제혁, 제화 등 소와 관련된 직업을 합치면 48.8%였다. 농업은 25.2%, 유기 제조는 10.6%, 음식점이나 저급 여관 경영은 5.8%였다.

5. 1. 형평사 운동의 목표

형평사는 1923년 4월 23일 진주에서 출범하였으며, "계급과 경멸적인 호칭의 폐지, 회원들의 계몽, 그리고 회원들 간의 상호 우정 증진"을 목표로 하였다.[31] 형평사는 도시화산업화와 같이 공동체를 원자화할 위험이 있는 변화 속에서도 백정 집단이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인식하에 개인의 시민권과 공동체 유대감 모두를 옹호했다.[31] 따라서 형평사는 인권의 평등과 더 넓은 대중 속으로 동화될 권리 모두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공통된 정체성을 구축하고자 노력했다.[31]

5. 2. 형평사 운동의 전개 과정

형평사는 개인의 시민권과 공동체적 유대감을 모두 옹호했는데, 도시화산업화와 같은 변화 속에서 공동체가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었다.[31] 따라서 형평사는 인권의 평등과 더 넓은 대중 속으로 동화될 권리 모두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공통된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31]

1927년, 형평사 회원 여러 명이 지하 비밀결사 조직 설립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이들의 부재는 1920년대 후반 조직이 사회주의 좌파로 이동하는 데 일부 원인이 되었다.[31] 조직 내 권력은 여러 차례 이동했는데, 1925년 교육 개혁을 주장했던 원래 진주파에서 전통적인 직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 개혁에 더 관심이 많은 서울 지식인 그룹으로 이동한 것이 포함된다.[31]

1931년 전국 대회에서 그들은 조직이 원래 목표를 버리고 자신들을 지휘하는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목표를 옹호한다고 느껴 해산 제안을 제시하여 운동 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31] 그들은 해산이 노동조합으로 대체됨에 따라 자신들의 이익에 더 잘 부합할 것이라고 믿었다.[31] 해산 제안은 실패했지만, 이미 한국의 광범위한 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운동의 보수적인 회원들을 더욱 소외시키지는 않았다.[31]

운동에 더욱 치명적인 것은, "형평사 청년전위대"라는 비밀 공산주의 조직을 설립했다는 혐의로 여러 젊은 급진적인 회원들이 체포된 것이었다. 당국은 이 조직이 봉건주의에 대한 투쟁과 사유재산 폐지를 요구했다고 말했다.[31] 이 혐의와 관련된 재판은 4년 동안 계속되었고, 피고인들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조직"이 일본 당국이 가죽을 필요로 하는 중국 침략에 대한 접근을 방해하지 않도록 형평사의 노동 부문을 억제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31] 그 결과 형평사는 우파로 이동하여 진보적인 이상을 버리고 1935년에 최종적으로 해산되었으며, 운동의 목표가 성공적으로 달성되었다고 주장했다.[31]

급진적인 세력의 성장하는 힘은 운동을 분열시켰고, 특히 육류와 가죽 무역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대공황의 압박 속에서 더 부유한 백정들이 제공하는 경제적 지원의 상당 부분이 철회되었다.[32]

6. 종교와 백정

동학 농민 운동과 기독교는 백정에게 평등주의와 사회적 평등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여 사회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6. 1. 동학 농민 운동과 백정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은 백정들이 차별적인 모자를 더 이상 쓰도록 강요받지 않고 과부가 재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요구하는 등, 백정들의 인권 문제 해결에 영향을 주었다.[27] 이 봉기는 비록 실패했지만, 갑오개혁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특정 집단에 대한 법적 제한을 두었던 계급 구조를 폐지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백정은 노예와 같은 다른 집단에 비해 이러한 변화로부터 훨씬 적은 혜택을 받았다.

6. 2. 기독교와 백정

일부 선교사들은 백정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면서 모든 사람이 하느님 밑에서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주장했다.[28]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도 모든 사람이 평등했던 것은 아니었고, 선교사들이 백정을 예배에 참여시키려 할 때 반발이 일어나기도 했다. 비백정들은 그러한 시도가 전통적인 사회적 지위에 대한 생각에 무감각하다고 여겼다.[28] 이처럼 동학과 기독교는 백정들에게 평등주의와 사회적 평등이라는 개념을 제시해 주었고, 이는 백정들의 인권 의식 향상에 기여했다.

7. 현대 사회의 백정

현대 한국 사회에서 "백정"이라는 용어는 여전히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생고기를 다루는 직업에서 부정적인 사회적 낙인으로 사용되기도 한다.[20] 한국전쟁 이후 사회 혼란과 이주, 산업화 과정에서 도시로의 인구 이동으로 인해 백정만의 집락이 모두 소멸하고 구분이 어려워짐에 따라 대한민국에서 차별받는 계층으로서 완전히 사라졌지만, 현재에도 여전히 욕설로 "백정(백정한국어)", "백정놈(백정놈한국어)"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7. 1. 현대 사회에서 백정의 의미 변화

"백정"이라는 용어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생고기를 다루는 직업과 관련하여 부정적인 사회적 낙인으로 사용되기도 한다.[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정"은 생고기를 양념하여 테이블에서 직접 구워 먹는 바비큐 식당의 이름으로 널리 사용되기도 한다.[21] 이러한 맥락에서 "백정"은 단순히 설명적인 용어이며 부정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

7. 2. 북한의 백정 문제 (추가)

북한은 공식적으로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백정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차별 의식이 남아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43] 예를 들어, 한국 대통령을 "인간 백정"이라고 비난하는 등 차별적인 표현이 사용되기도 한다.

미국의 북한인권위원회는 북한이 1946년부터 모든 국민을 지배 계급, 평민, 피차별민의 3계층으로 나누는 출신 성분 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는 조선 시대의 봉건적인 신분 제도와 유사하다고 보고 있다.[43]

7. 3. 백정과 관련된 속담 및 비유

한국에서는 할아버지, 조부모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양쪽에게 차별받는 손자를 "백정의 손자"에 비유하기도 한다. 친손자 취급도, 외손자 취급도 못 받는,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처지를 백정에 빗댄 것이다.[1]

7. 4. 백정 관련 문학 작품 및 예술

제중원은 19세기 한국을 배경으로 한 의학 드라마이다. 주인공은 도축업에 종사하는 백정이며, 의복과 주거 등의 묘사를 통해 다른 신분과의 차이가 강조되어 있다.[1]

참조

[1] 뉴스 Castes in a Global Perspective - Is Caste Only a Hindu Problem? (Part 6) - ChakraNews.com http://www.chakranew[...] 2012-09-09
[2] 웹사이트 화척(禾尺) http://encykorea.aks[...] 2021-09-13
[3] 웹사이트 Baekjeong(白丁) - Korean National Culture Encyclopedia http://encykorea.aks[...] 2018-04-14
[4] 웹사이트 National Korean Language Institute - Standard Language Encyclopedia http://stdweb2.korea[...] 2018-04-14
[5] 뉴스 Prosecutors alleged the lobby to finish checking two people indicted without detention ... 'anticlimax' http://www.hani.co.k[...] 2018-04-18
[6] 웹사이트 Human Baekjeong, criticism of Sejo of Joseon http://www.ohmynews.[...] 2011-10-25
[7] 웹사이트 Kang Ho Dong BAEKJEONG http://www.baekjeong[...]
[8] 논문 벽초『임꺽정』에 나타난 백정의 실체와 문학적 형상화 http://www.riss.kr/l[...] 2011
[9] 논문 THE PAEKCHONG: "UNTOUCHABLES" OF KOREA. http://www.asj.upd.e[...] 1974
[10] 논문 "조선시대 백정"의 기원에 대한 역사사회학적 고찰 http://kiss.kstudy.c[...] 2013
[11] 논문 고려時代 白丁에 대한 再檢討 http://www.riss.kr/l[...] 2001
[12] 서적 A Korean-English dictionary Yale University Press
[13] 웹사이트 Yangsuchuck(楊水尺) - Korean National Culture Encyclopedia http://encykorea.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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