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호 (18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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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병호는 1885년 황해도 장연군에서 출생하여 기독교 신앙을 갖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그는 경신학교, 해서제일학교, 대성학교 등에서 교사로 활동했으며,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및 내무위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자금 모금에 힘썼고, 상하이에서 교육 사업과 대한적십자회 활동을 펼쳤다. 1947년 귀국 후에는 경신학교 재단 이사장, 경신중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며 교육 활동을 이어갔다. 1968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며,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서병호는 황해도(현 황해남도) 장연군에서 목회자 서경조(본명은 서상우)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기독교인이었다. 큰아버지 서상륜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 생부 서경조와 양아버지 서상륜은 황해도 소래교회의 창설자 중 한 사람이다. 아버지 서경조는 한국 장로교 최초의 7명의 목사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그는 어려서 유아 세례를 받았는데, 이는 최초의 유아세례자 중 한 명이 되었다.[1]
2. 생애
1905년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 서경조가 세운 황해도 해서제일학교의 교사가 되었으며, 안창호의 평양 대성학교, 윤치호의 한영서원, 경성의 중앙학교, 경신학교, 중앙 YMCA 기독교청년회 등에 교사로 출강하였다. 1911년 105인 사건 이후 기독교 선교자들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자 1914년 여행 목적으로 중국으로 출국했다가 상하이에서 망명, 난징 금릉대학에 입학하였다. 1918년 금릉대학을 졸업하고 신규식 등과 신아동제사에서 활동하였다.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발표 이후 1918년 11월 상하이에서 김규식, 선우혁, 신채호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그 당수에 추대되었다. 그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 등을 신한청년당의 대표자로 프랑스에 파견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수립되자 황해도 지역구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달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의정원 제헌의정원 내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1] 제헌의정원 내무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국내에 잠입하여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데 힘쓰다가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피해 그해 말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다.[1] 같은 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대한적십자회를 창설하여 독립운동가 가족들의 어려운 생활을 돕고 구호 활동을 펼쳤다.[1]
1947년에 귀국하여 서울에 정착, 새문안교회 장로로 시무하였고, 경신학교 재단 이사, 서울 YMCA 기독청년회 이사 등에 피선되었다.[1] 1950년 경신학교 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1] 6·25 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 전쟁 중 맹인협회 재단 이사장, 농아자협회 재단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1] 1953년 서울 수복 후에 기독교학교연합회를 조직하였다.[1] 1953년 경신학교가 경신중고로 나뉘자 경신중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1960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재직하였다.[1]
1960년 경신학교에서 정년퇴직한 뒤 대한예수교장로회 경기노회 부회장에 피선되었다.[1] 전쟁 이후의 재난, 기근 구호 사업에 참여하였고, 기독교아동복지회 재단이사 및 안양기독보육원 재단이사 등을 맡아 사회 사업을 맡아보기도 했다.[1]
2. 1. 생애 초반
황해도(현 황해남도) 장연군에서 목회자 서경조(본명은 서상우)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기독교인이었다. 큰아버지 서상륜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서경조의 둘째 아들인 그가 어려서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 생부 서경조와 양아버지 서상륜은 황해도 소래교회의 창설자 중 한 사람이다. 아버지 서경조는 한국 장로교 최초의 7명의 목사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그는 어려서 유아 세례를 받았는데, 이는 최초의 유아세례자 중 한 명이 되었다.[1]
처남 김윤방은 한국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다른 이름은 박에스터),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의 아버지였다. 고황경은 그의 둘째 처남 김윤오의 외손녀였고,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이며 임시정부의 부주석인 김규식은 그의 동서이자 처제 김순애의 남편이었다. 처제 김필례의 남편인 목사 최영욱을 통해 광주 출신 중국의 음악가 정율성과도 인척관계를 형성한다.[1] 아들 서재현도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이다.
2. 2. 교육 활동과 망명 생활
1905년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 서경조가 세운 황해도 해서제일학교의 교사가 되었으며, 이어 안창호의 평양 대성학교, 윤치호의 한영서원, 경성의 중앙학교 등에 교사로 출강하였다. 다시 자신의 모교인 경신학교 교사로도 출강하였으며, 그밖에 중앙 YMCA 기독교청년회에도 출강하였다.
1911년 105인 사건 이후 기독교 선교자들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자 1914년 여행 목적으로 중국으로 출국했다가 상하이에서 망명, 난징 금릉대학에 입학하였다. 1918년 금릉대학을 졸업하고 신규식 등과 신아동제사에서 활동하였다.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발표 이후 1918년 11월 상하이에서 김규식, 선우혁, 신채호, 신성모, 신규식, 신석우, 여운형, 이광수, 장덕수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그 당수에 추대되었다.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화받은 그는 그해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 문제를 논의하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 여운홍, 김탕 등을 신한청년당의 대표자로 프랑스에 파견하였다.
2. 3.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지원 활동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수립되자 황해도 지역구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달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의정원 제헌의정원 내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1] 제헌의정원 내무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국내에 잠입하여 동지들과 연락하고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데 힘쓰다가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피해 그해 말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다.[1] 같은 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대한적십자회를 창설하여 독립운동가 가족들의 어려운 생활을 돕고 구호 활동을 펼쳤다.[1]
2. 4. 해방 이후 교육 활동
1947년에 귀국하여 서울에 정착, 새문안교회 장로로 시무하였고, 경신학교 재단 이사, 서울 YMCA 기독청년회 이사, YMCA 중앙기독청년회 이사 등에 피선되었다.[1] 1950년 경신학교 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1] 6·25 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 전쟁 중 피난지 부산에서 YMCA 기독교청년연맹 전시 비상대책위원장, 맹인협회 재단 이사장, 농아자협회 재단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1] 피난지에서도 기독청년운동을 하였으며 음지에서 많은 사회봉사 활동을 하였다.[1] 1953년 2월 서울 수복 후에 기독교학교연합회를 조직하였다.[1] 1953년 경신학교가 경신중고로 나뉘자 경신중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1960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재직하였다.[1]
1960년 경신학교에서 정년퇴직한 뒤 대한예수교장로회 경기노회 부회장에 피선되었다.[1] 전쟁 이후의 재난, 기근 구호 사업에 참여하였고, 기독교아동복지회 재단이사 및 안양기독보육원 재단이사 등을 맡아 사회 사업을 맡아보기도 했다.[1]
3. 독립운동 공적과 서훈
4.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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