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3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슈테판 3세는 몰다비아 공국의 통치자로, 보그단 2세의 아들이었다. 그는 1457년 몰다비아의 통치자가 된 후, 폴란드, 오스만 제국, 헝가리와 복잡한 관계를 맺으며 통치했다. 그는 왈라키아와의 관계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오스만 제국에 맞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며 유럽에서 중요한 인물로 부상했다. 슈테판은 내정 개혁을 통해 중앙 정부를 강화하고 군사력을 증강했으며, 건축과 문화 발전을 장려했다. 그는 1504년에 사망했으며, 루마니아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루마니아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5세기 루마니아 사람 - 블라드 3세 체페슈
블라드 3세 체페슈는 15세기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로서 "드라큘라"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며 잔혹한 통치로 "체페슈"라고도 불리며 오스만 제국에 맞섰으나 체포되어 유폐 후 전사했고 그의 통치는 과장되어 흡혈귀 드라큘라 신화의 원형이 되었으며 왈라키아 역사와 국제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5세기 루마니아 사람 - 후녀디 야노시
후녀디 야노시는 15세기 헝가리의 귀족이자 군사 지도자로, 트란실바니아 공작과 헝가리 왕국 섭정을 지내며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맞서 헝가리를 방어했고, 특히 베오그라드 공방전 승리로 유럽에 명성을 떨치며 헝가리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 루마니아의 군주 - 페르디난드 1세 (루마니아)
페르디난드 1세는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 출신으로 루마니아 국왕으로 재위하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에 가담, 영토를 확장하고 국내 정치 변화를 겪었다. - 루마니아의 군주 - 카롤 2세
여성 편력과 방탕한 사생활로 유명했던 루마니아 국왕 카롤 2세는 권위주의적인 통치와 영토 할양으로 퇴위 및 망명 생활을 했으며, 전제군주제 강화와 삼권분립 폐지 등으로 역사적 논란이 많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슈테판 3세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스테판 대공 |
로마자 표기 | Ștefan cel Mare (슈테판 첼 마레) |
다른 표기 | Ștefan al III-lea (슈테판 3세) |
통치 | |
군주 | 몰다비아 공 |
재위 기간 | 1457년 4월 14일 – 1504년 7월 2일 |
이전 통치자 | 페트루 3세 아론 |
다음 통치자 | 보그단 3세 |
가문 | |
왕가 | 무샤트 |
왕조 | 왕조 |
아버지 | 보그단 2세 |
어머니 | 마리아 올테아 |
배우자 | |
배우자 | 마루슈카 (?) 키예프의 에브도키아 망구프의 마리아 왈라키아의 마리아 보이치타 |
자녀 | |
자녀 | 알렉산드루 보그단 3세 페트루 라레슈 |
출생 및 사망 | |
출생일 | 1433년 1월 9일 또는 16일 – 1440년 |
사망일 | 1504년 7월 2일 |
사망지 | 수체아바 |
매장지 | 푸트나 수도원 |
종교 | |
종교 | 동방 정교회 |
군사 경력 | |
소속 군대 | 몰다비아 군대 |
주요 전투 | 바이아 전투 몰다비아-오스만 전쟁 바슬루이 전투 발레아 알바 전투 킬리아 공성전 (1484년) 카틀라부카 전투 리프니크 전투 몰다비아 원정 (1497–1499) 코스민 숲 전투 |
2. 초기 생애
슈테판 3세는 몰다비아 통치자 보그단 2세의 아들이었고, 보그단 2세는 알렉산드루 1세의 아들이었다. 슈테판의 어머니는 왈라키아 공들과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32년 알렉산드루 1세의 죽음 이후 20년 이상 왕위 계승 위기가 지속되었다. 1449년, 슈테판의 아버지 보그단 2세는 후녀디 야노시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슈테판은 아버지의 헌장에서 "보이보드"로 불리며, 아버지의 상속자이자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보그단 2세는 1450년에 후녀디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1451년 10월, 페트루 아론이 보그단 2세를 살해하자 슈테판은 헝가리로 도망쳤다. 1456년, 블라드 체페슈는 헝가리의 지원을 받아 왈라키아를 침공하여 왕위를 찬탈했다. 슈테판은 블라드와 함께 군사 작전에 참여했거나, 블라드가 왈라키아 통치자가 된 후 합류했다.
1457년 봄, 슈테판은 블라드의 도움을 받아 6,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몰다비아를 침공했다. 몰다비아 연대기에 따르면 "저지방 사람들"이 그에게 합류했다. 그리고레 우레케에 따르면, 슈테판은 돌제슈와 오르빅 전투에서 페트루 아론을 격파하고 몰다비아를 차지했다.
2. 1. 출생과 가족
슈테판 3세는 몰다비아 통치자 보그단 2세의 아들이었고, 보그단 2세는 알렉산드루 1세의 아들이었다. 슈테판의 어머니 마리아 올테아는 역사가 라두 플로레스쿠에 따르면 왈라키아의 공들과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슈테판의 출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사가들은 그가 1433년에서 1440년 사이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한다.한 교회의 이중첩에 따르면, 그는 형제 요아힘, 요안, 크리스테아와 자매 소레아, 마리아 등 다섯 명의 형제가 있었다. 슈테판의 일부 전기 작가들은 정치가 루카 아르보레의 아버지인 커스테아 아르보레가 왕자의 네 번째 형제이거나, 커스테아와 요아힘이 동일 인물이라고 추측한다. 1485년에 사망한 마리아는 수체아바의 문지기였던 쉔드레아의 아내였고, 슈테판의 또 다른 매제인 이사이어도 그의 궁정에서 높은 직책을 맡았다. 이와 같이 높은 지위에 있던 몰다비아 보야르들과의 관계는 결혼을 통해 유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2. 왕위 계승 위기와 망명
슈테판은 몰다비아 통치자 보그단 2세의 아들이었고, 보그단 2세는 알렉산드루 1세의 아들이었다. 슈테판의 어머니 마리아 올테아는 역사가 라두 플로레스쿠에 따르면 왈라키아의 공들과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슈테판의 출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사가들은 그가 1433년에서 1440년 사이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1432년 알렉산드루 1세의 죽음은 20년 이상 지속된 왕위 계승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슈테판의 아버지는 헝가리 섭정-총독 후녀디 야노시의 지원을 받아 1449년에 왕위를 차지했다. 슈테판은 아버지의 헌장에서 "보이보드"로 불렸는데, 이는 그가 아버지의 상속자이자 공동 통치자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보그단은 1450년에 후녀디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슈테판은 1451년 10월에 페트루 아론(알렉산드루 1세의 아들)이 보그단을 살해한 후 헝가리로 도망쳤다.
블라드 체페슈 (보그단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몰다비아에 거주)는 1456년에 헝가리의 지원을 받아 왈라키아를 침공하여 왕위를 찬탈했다. 슈테판은 블라드와 함께 군사 작전에 왈라키아로 갔거나, 블라드가 왈라키아의 통치자가 된 후에 그와 합류했다. 블라드의 도움을 받아 슈테판은 1457년 봄에 6,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몰다비아로 쳐들어갔다. 몰다비아 연대기에 따르면 "저지방 사람들" (몰다비아 남부 지역)이 그와 합류했다. 17세기의 그리고레 우레케는 "슈테판은 4월 12일에 돌제슈에서 페트루 아론을 격파했지만, 페트루 아론은 슈테판이 오르빅에서 두 번째 패배를 안겨준 후에야 몰다비아를 떠나 폴란드로 갔다."라고 기록했다.
3. 통치
슈테판 3세는 1433년경 몰다비아 공 보그단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457년, 블라드 체페슈의 지원을 받아 몰다비아 공위에 올랐다. 즉위 후 중앙 집권 정책을 추진하며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려 했으나, 도나우 강 하구의 킬리아를 두고 블라드와 갈등을 빚었다. 1462년 6월, 킬리아를 공격했지만 부상만 입고 퇴각했고, 1465년 1월에는 라두 3세로부터 킬리아를 탈환했다.
1467년, 바이어 전투에서 페트루 아론을 사로잡아 처형했다. 이후 바사라브 3세 라이오타를 지원하여 왈라키아 공위에 앉혔으나, 라두 3세와 번갈아 공위를 뺏고 빼앗기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1475년에는 바슬루이 전투에서 오스만 군대를 대파하여 교황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전사"라는 칭호를 받았다.
1476년, 블라드 체페슈의 복위를 도왔으나, 블라드는 그해 말 전사했다. 이후에도 오스만과의 전쟁을 계속했으며, 루마니아 정교회에 많은 교회와 수도원을 헌납했다. 푸트나 수도원은 몰다비아의 중요한 문화, 예술, 종교 중심지가 되었으며, 슈테판 3세의 묘소도 이곳에 있다. 1504년 사망했고, 아들 보그단 3세가 공위를 계승했다.
3. 1. 초기 군사 활동
슈테판 3세는 즉위 후 초기인 1458년에 폴란드를 공격하여 카지미르 4세가 페트루 아론을 지원하는 것을 막았다. 역사가 조나단 이글스에 따르면, 이 첫 번째 군사 작전은 "그의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을 확립"했다. 그러나 킬리아 탈환을 주요 목표로 삼았기에 폴란드와의 장기적인 갈등은 피하고자 했다. 킬리아는 1448년 몰다비아의 페트루 3세가 헝가리에 넘겨준 다뉴브 강의 중요 항구였다.1459년 4월 4일, 슈테판은 드네스트르 강에서 폴란드와 조약을 체결하고 카지미르 4세의 종주권을 인정하며 타타르족 약탈자들에 대항하여 폴란드를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카지미르는 슈테판을 보호하고 페테루 아론의 몰다비아 귀환을 금지할 것을 약속했다. 페테루 아론은 폴란드를 떠나 헝가리 왕국으로 가서 트란실바니아의 세케이 랜드에 정착했다.
1461년, 슈테판은 여러 차례 세케이 랜드를 침입했다. 헝가리의 마차시 1세는 페테루 아론을 지원하며 부다에서 피난처를 제공했다. 1462년, 슈테판은 오스만 제국과의 좋은 관계를 강조하며 프란체스코회를 몰다비아에서 추방했다. 또한 선임자가 시작한 오스만 제국에 대한 연간 공물 지불을 계속했다. 1462년 3월 2일, 수체아바에서 폴란드와 새로운 협정을 맺어 카지미르 4세에게 직접 충성을 맹세할 것을 약속했다. 이 조약은 카지미르가 몰다비아의 유일한 종주국임을 선언하고, 슈테판이 그의 허락 없이 몰다비아 영토를 양도하는 것을 금지했다. 또한 킬리아와 같이 잃어버린 영토를 탈환할 의무를 부과했다.
1462년 초, 슈테판과 블라드 체페슈의 관계는 긴장되었다. 같은 해 4월 2일, 제노바 공화국의 카파 총독은 폴란드의 카지미르 4세에게 슈테판이 블라드 체페슈가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왈라키아를 공격했다고 알렸다. 오스만 술탄 메흐메트 2세는 1462년 6월 왈라키아를 침공했다. 메흐메드의 비서 투르순 베그는 블라드 체페슈가 왈라키아-몰다비아 국경 근처에 7,000명의 병사를 배치하여 "몰다비아 적들로부터 자신의 나라를 보호"해야 했다고 기록했다. 투르순과 라오니코스 칼코콘딜레스는 슈테판의 군대가 메흐메드에게 충성했으며 침공에 직접 관여했다고 언급했다. 다뉴브 삼각주에 오스만 함대가 주둔한 것을 이용하여 슈테판은 6월 말 킬리아를 포위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이스탄불 사절 도메니코 발비에 따르면, 슈테판과 오스만군은 8일 동안 요새를 포위했지만 "헝가리 수비대와 체페슈의 7,000명의 병사"가 그들을 격파하고 "많은 터키인"을 죽였기 때문에 함락시킬 수 없었다. 슈테판은 포위 공격 중에 왼쪽 종아리 또는 왼쪽 발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 평생 치유되지 않았다.
1465년 1월 24일, 슈테판은 다시 칠리아를 포위했다. 몰다비아 군대는 이틀 동안 요새를 포격했고, 수비대는 1월 25일 또는 26일에 항복했다. 술탄의 봉신인 왈라키아의 보이보드 잘생긴 라두는 칠리아를 주장했고, 항구 점령은 헝가리, 왈라키아, 오스만 제국과의 갈등을 야기했다. 1465년 또는 그 이전에 슈테판은 폴란드로부터 드네스트르 강변의 호틴 요새(현재 우크라이나의 호틴)를 평화적으로 되찾았다. 칠리아 점령을 기념하기 위해 슈테판은 1466년 푸트나 강 강가에 성모 승천 교회를 세우도록 명령했다. 이 교회는 1467년 슈테판이 확장하여 비코브 마을을 기증하고 1470년 9월에 완공된 푸트나 수도원의 중심 기념물이 되었다.
마차시 코르비누스의 지시로 헝가리 국회는 "내실의 이익"으로 알려진 세금과 관련된 모든 이전 면제를 폐지했다. 개혁을 자신들의 특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한 트란실바니아 세 민족의 지도자들은 1467년 8월 18일에 자신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슈테판은 그들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코르비누스 왕이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한 후 저항 없이 코르비누스에게 굴복했다. 코르비누스는 몰다비아를 침공하여 바야, 바커우, 로만, 터르구 네암츠를 점령했다. 슈테판은 군대를 소집하여 12월 15일 바야 전투에서 침략자들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겼다. 이 사건은 당시 헝가리 연대기에 슈테판 군대의 패배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코르비누스는 자신과 합류한 몰다비아 귀족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전장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귀족 집단이 하위 국가에서 슈테판에 대항하여 봉기했지만, 그는 연말까지 20명의 귀족과 40명의 다른 지주들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1468년 7월 28일, 슈테판은 수체아바에서 폴란드 특사 앞에서 다시 카지미르 4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는 1468년부터 1471년 사이에 트란실바니아를 상대로 습격을 감행했다. 1469년 2월 카지미르가 직접 경의를 표하기 위해 리비우에 왔을 때 슈테판은 그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같은 해 또는 1470년 초, 타타르족이 몰다비아를 침공했지만, 슈테판은 드네스트르 강 근처 리프니크 전투에서 그들을 격퇴했다. 강을 따라 방어 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슈테판은 같은 시기에 올드 오르헤이와 소로카에 새로운 요새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왈라키아 군대가 칠리아를 포위했지만 몰다비아 수비대가 항복하도록 강요할 수 없었다.
마차시 코르비누스는 슈테판에게 평화 제안을 보냈다. 그의 사절은 1469년 말 피오트르쿠프 트르부날스키에서 열린 폴란드의 세임 (또는 총회)에서 코르비누스의 제안에 대한 카지미르 4세의 조언을 구했다. 슈테판은 왈라키아를 침공하여 1470년 2월 브러일라와 터르굴 데 플로치 (다뉴브 강변의 가장 중요한 왈라키아 상업 중심지 두 곳)를 파괴했다. 페트루 아론은 세켈리 군대를 고용하여 1470년 12월 몰다비아로 쳐들어갔지만, 그의 공격은 아마도 슈테판에 의해 예상되었을 것이다. 보이보드는 터르구 네암츠 근처에서 그의 라이벌을 물리쳤다. 페터 아론은 전장에서 포로로 잡혔고, 그의 몰다비아 지지자들과 함께 슈테판의 명령에 따라 처형되었다. 잘생긴 라두도 몰다비아를 침공했지만 슈테판은 1471년 3월 7일 소치에서 그를 물리쳤다.
1471년 초, 카지미르 4세와 마차시 코르비누스의 관계는 긴장되었다. 슈테판이 폴란드를 지원하지 않자 카지미르 4세는 몰다비아에 대사관을 파견하여 슈테판이 자신의 의무를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슈테판은 7월 13일 바슬루이에서 폴란드 사절을 만나 폴란드 귀족들이 국경에서 저지른 적대 행위를 상기시키고 폴란드로 도망간 몰다비아 귀족들의 인도를 요구했다. 동시에 그는 코르비누스와 협상을 시작하기 위해 헝가리에 자신의 사절을 보냈다. 그는 1472년 1월 3일에 트란실바니아의 코로나에서 온 작센족 상인들에게 상업적 특권을 부여했다.
3. 2. 왈라키아와의 관계
슈테판은 1465년에 왈라키아의 보이보드(군주)인 잘생긴 라두로부터 칠리아를 빼앗았다. 이로 인해 헝가리뿐만 아니라 왈라키아 및 오스만 제국과의 갈등이 발생했다. 1470년 2월, 슈테판은 왈라키아를 침공하여 브라일라와 다뉴브 강변의 중요한 왈라키아 상업 중심지였던 터르굴 데 플로치를 파괴했다. 잘생긴 라두 역시 몰다비아를 침공했지만, 슈테판은 1471년 3월 7일 소치에서 그를 물리쳤다.슈테판은 다네슈티 가문의 바사라브 3세 라이오타를 지원하여 1473년 11월에 왈라키아 공위에 앉혔지만, 12월에는 라두 3세에게 공위를 빼앗기는 등 바사라브 3세의 정권은 안정되지 않았다. 라두 3세와 바사라브 3세는 번갈아 가며 공위를 뺏고 빼앗기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3. 3.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슈테판은 1465년 1월 24일에 다시 칠리아를 포위했다. 몰다비아 군대는 이틀 동안 요새를 포격했고, 수비대는 1월 25일 또는 26일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술탄의 봉신인 잘생긴 라두는 왈라키아의 보이보드로 칠리아를 주장했고, 항구 점령은 헝가리뿐만 아니라 왈라키아와 오스만 제국과의 갈등을 야기했다. 1465년 또는 그 이전에 슈테판은 폴란드로부터 드네스트르 강변의 호틴 요새(현재 우크라이나의 호틴)를 평화적으로 되찾았다. 칠리아 점령을 기념하기 위해 슈테판은 1466년 푸트나 강의 강가에 있는 푸트나 강에 성모 승천 교회를 세우도록 명령했다.이 교회는 1467년 슈테판이 확장하여 비코브 마을을 기증하고 1470년 9월에 완공된 푸트나 수도원의 중심 기념물이 되었다.
1470년대 초, 오스만 제국은 슈테판에게 킬리아와 체타테아 알버(현재 우크라이나의 빌호로드-드니스트로우스키)를 포기하라고 압박했다. 슈테판은 이러한 요구에 따르는 대신, 1473년 술탄의 칙령에 연간 조공을 보내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1472년부터 아크 코윤루의 술탄 우준 하산과 친분을 맺고 반 오스만 동맹을 맺으려 했다. 슈테판은 메흐메트가 아나톨리아에서 우준과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 오스만의 지지를 받는 무슬림 개종자이자 종속국인 라두 첼 페르(Radu the Fair)를 몰아내고 자신의 후원자인 바사라브 3세 라이오타를 옹립하기 위해 왈라키아를 침공했다. 그는 1473년 11월 18일부터 20일까지 3일간 벌어진 전투에서 람니쿠 사라트에서 왈라키아 군대를 격파했다. 4일 후, 몰다비아 군대는 부쿠레슈티를 점령했고, 슈테판은 바사라브를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라두는 그 해 말 오스만의 지원을 받아 왈라키아를 되찾았다. 바사라브는 1475년에 다시 라두를 왈라키아에서 몰아냈지만, 오스만은 다시 그가 돌아오도록 도왔다. 왈라키아인들은 몰다비아 일부 지역을 약탈하여 복수했다. 슈테판은 바사라브를 복위시키기 위해 10월에 왈라키아에 새로운 원정을 시작하여 라두를 공국에서 도망치게 만들었다.
메흐메트 2세는 룸멜리아의 베일레르베이(총독)인 하딤 술레이만 파샤에게 몰다비아를 침공하라고 명령했다. 약 12만 명의 오스만 군대가 1475년 말 몰다비아를 침공했다. 왈라키아 군대도 오스만 군에 합류했고, 슈테판은 폴란드와 헝가리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침략자들에 비해 세 배나 열세였던 슈테판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1475년 1월 10일 바슬루이 근처 포둘 이널트(높은 다리)에서 하딤 술레이만 파샤와 전투를 벌였다. 전투 전에 그는 자신의 나팔수들에게 적 전열 뒤에 숨어있도록 했다. 그들이 갑자기 나팔을 불자, 침략자들 사이에 공황 상태가 일어나 그들은 전장에서 도망쳤다. 그 후 3일 동안 수백 명의 오스만 군인들이 학살되었고 생존자들은 몰다비아에서 퇴각했다.
역사학자 알렉산더 미카베리제에 따르면, 바슬루이 전투에서 슈테판의 승리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유럽의 가장 큰 승리 중 하나"였다. 메흐메트 2세의 계모인 마라 브란코비치는 오스만 제국이 "그보다 더 큰 패배를 겪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슈테판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유럽 통치자들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 몰다비아가 "기독교의 관문"이자 "헝가리와 폴란드의 요새이자 이 왕국의 수호자"라고 상기시켰다. 교황 식스토 4세는 그를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옹호자''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교황도 다른 유럽 강국도 몰다비아에 물질적인 지원을 보내지 않았다. 슈테판은 또한 메흐메트에게 평화 제안을 했다. 얀 드워고시 연대기의 논란의 여지가 있는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또한 이 침략을 술탄이 처벌하기를 원하는 "몇몇 도망자들과 강도들"의 행동으로 축소했다.
한편, 슈테판의 매형인 알렉산더는 몰다비아 군대를 이끌고 크림 반도의 테오도로 공국을 점령했다. 슈테판은 또한 몰다비아 침공 당시 오스만을 지원했던 바사라브 라이오타를 왈라키아에서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7월에 마티아스 코르비누스와 동맹을 맺어, 1462년 헝가리에 억류되었던 바사라브의 경쟁자 블라드 체페슈를 풀어주도록 설득했다. 슈테판과 블라드는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사이의 갈등을 종식시키기로 합의했지만, 코르비누스는 그들이 왈라키아를 침공하는 것을 지원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은 1475년 말까지 테오도로 공국과 크림 반도의 제노바 식민지를 점령했다. 슈테판은 테오도로의 알렉산더와 그의 몰다비아 측근의 학살에 대한 복수로 몰다비아에 있는 오스만 포로들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그 후 1463년부터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여온 베네치아인들은 슈테판을 주요 동맹국으로 여겼다. 그들의 지원을 받아 슈테판의 사절단은 성좌가 마티아스 코르비누스에게 자금을 보내는 대신 슈테판의 전쟁에 직접 자금을 지원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베네치아 시뇨리아는 "슈테판이 사태의 전개에 어느 쪽으로든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며 반 오스만 동맹에서 그의 탁월한 역할을 언급했다.
메흐메트 2세는 1476년 여름 몰다비아에 대한 새로운 침공을 직접 지휘했다. 이 군대에는 라이오타 휘하의 12,000명의 왈라키아인과 슈테판의 형제라고 주장하는 알렉산드루 휘하의 몰다비아인들이 포함되었다. 크림 타타르족은 술탄의 명령에 따라 몰다비아를 처음 침략했지만, 슈테판은 그들을 격파했다. 그는 또한 대 오르다의 타타르족이 크림 반도를 침략하도록 설득하여 크림 타타르족이 몰다비아에서 철수하도록 강요했다. 술탄은 1476년 6월 말 몰다비아를 침공했다.
코르비누스가 보낸 군대의 지원을 받은 슈테판은 초토화 작전을 펼쳤지만, 정면 대결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7월 26일 라즈보예니에서 벌어진 발레아 알바 전투에서 패배하여 폴란드로 피신해야 했지만, 오스만 제국은 수체아바 요새를 점령할 수 없었고, 마찬가지로 네암츠 앞에서 실패했다. 충분한 식량 부족과 오스만 진영의 콜레라 발생으로 인해 메흐메트는 몰다비아를 떠나야 했고, 이로 인해 보예보드는 폴란드에서 돌아올 수 있었다. 민간 전승에 따르면 슈테판은 또한 지역 여성 투도라 "바바" 브란치오아이의 일곱 아들 주위로 모인 푸트나 현의 자유 농민들로 구성된 새로운 군대를 약속받았다. 이 부대는 오도베슈티에서 오스만 제국의 측면을 공격했다고 전해진다. 우레케가 반복한 또 다른 이야기는 마리아 올테아가 아들에게 승리하여 돌아오거나 죽으라고 강요하여 다시 전투에 참여시켰다는 것이다.
비잔틴 역사가 게오르기오스 스프란체스는 메흐메트 2세가 몰다비아 침공 동안 "승리보다 패배를 더 많이 겪었다"고 결론지었다. 1475년 여름부터 폴란드와 헝가리 사이의 경쟁이 일시 중단되는 동안 슈테판은 헝가리에 충성을 맹세했다. 헝가리의 지원을 받아 슈테판과 블라드 체페슈는 왈라키아를 침공하여 1476년 11월 바사라브 라이오타를 도망치게 만들었다. 슈테판은 블라드를 보호하기 위해 몰다비아 군대를 남겨두고 몰다비아로 돌아왔다. 오스만 제국은 바사라브 라이오타를 복위시키기 위해 왈라키아를 침공했다. 체페슈와 그의 몰다비아 측근들은 1477년 1월 10일 전에 학살되었다. 슈테판은 다시 왈라키아를 침공하여 바사라브 라이오타를 바사라브 4세 더 영거로 교체했다.
슈테판은 요한 참블락을 포함한 사절들을 로마와 베네치아로 보내 기독교 세력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계속하도록 설득했다. 그와 베네치아는 또한 반 오스만 동맹에 대 오르다를 참여시키고 싶었지만 폴란드인들은 타타르족이 그들의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그의 국제적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슈테판은 1479년 1월 22일 폴란드와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여 카시미르 4세가 특별히 요구할 경우 콜로메아(현재 우크라이나의 콜로미야)에서 그에게 직접 충성을 맹세할 것을 약속했다. 베네치아와 오스만 제국은 같은 달에 평화를 맺었고, 헝가리와 폴란드는 4월에 평화를 맺었다. 바사라브 더 영거가 술탄에게 경의를 표한 후, 슈테판은 오스만 제국과 화해해야 했다. 1480년 5월, 그는 1473년에 지불을 중단했던 연간 조공을 갱신하겠다고 약속했다. 슈테판은 이 평화를 이용하여 오스만 제국과의 새로운 대결을 준비했다. 그는 다시 왈라키아를 침공하여 바사라브 더 영거를 미르체아(아마도 슈테판의 아들)로 대체했지만, 바사라브는 오스만의 지원을 받아 왈라키아를 되찾았다. 왈라키아인들과 그들의 오스만 동맹국들은 1481년 봄 몰다비아를 침공했다.
메흐메트 2세는 1481년에 사망했다. 그의 두 아들, 바예지드 2세와 젬 사이의 갈등은 슈테판이 6월에 왈라키아와 오스만 제국으로 진격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라므니쿠 벌체아에서 바사랍 젊은 공을 격파하고 블라드 체페슈의 이복형제인 블라드 커루걸(수도승 블라드)을 왕위에 앉혔다. 바사랍 젊은 공이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돌아오자 슈테판은 왈라키아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마지막 시도를 했다. 그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왈라키아로 진격하여 바사랍 젊은 공을 격파했고, 그는 전투에서 사망했다. 블라드 커루걸이 복위되었지만 곧 술탄의 종주권을 받아들여야 했다. 새로운 오스만 공격을 예상하여 슈테판은 왈라키아와의 국경을 강화하고 모스크바 대공인 모스크바의 이반 3세와 동맹을 맺었다.
마티아스 코르비누스는 1483년 10월 바예지드 2세와 5년 휴전 협정을 맺었다. 이 휴전은 항구를 제외한 모든 몰다비아에 적용되었다. 바예지드는 몰다비아를 침공하여 1484년 7월 14일 또는 15일에 킬리아를 점령했다. 그의 봉신인 멩글리 1세 기라이도 몰다비아로 쳐들어가 8월 3일에 체타테아 알바를 점령했다. 두 항구의 점령은 오스만 제국의 흑해 지배를 확고히 했다. 바예지드는 슈테판이 직접 그에게 경의를 표하러 온 후에야 몰다비아를 떠났다. 이러한 굴복은 몰다비아의 독립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킬리아와 체타테아 알바의 상실은 몰다비아가 중요한 무역로를 통제하는 것을 끝냈다.
코르비누스는 바예지드와의 휴전을 깨고 싶어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 자신의 서부에서의 전쟁에 대한 오스만의 묵시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트란실바니아의 치체우와 체타테아 데 벌타를 포함하는 영토를 그의 봉신에게 선물했다. 여러 해석에 따르면, 이 교환은 1484년 또는 그 이후에 이루어졌으며, 슈테판이 항구를 잃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의도되었다. 중세 학자 마리우스 디아코네스쿠는 체타테아의 임대 시기를 1482년으로 잡았는데, 당시 코르비누스는 몰다비아가 오스만에게 함락될 경우 슈테판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기로 동의했고, 치체우는 1489년에야 슈테판의 성이 되었다. 두 요새 모두 세 민족과 코르비누스 간의 분쟁 이후 몰수된 토지에 있었다. 치체우는 소송 중인 로손지 가문의 봉토였고, 체타테아는 슈테판 이전의 마지막 소유주가 덴게레그의 요한 퐁라치였던 트란실바니아의 보이보드의 특별 영지였다.
그 무렵, 폴란드와 오스만 간의 전쟁이 준비 중이었고, 1484년에 양측 간에 충돌이 발생했다. 역사가 세르반 파파코스테아는 카지미르 4세가 슈테판과 오스만 간의 분쟁 동안 항상 중립을 유지했지만, 드니에페르와 다뉴브 강 어귀에 대한 오스만의 통제는 폴란드를 위협했다고 지적한다. 파파코스테아는 또한 왕이 몰다비아에 대한 종주권을 강화하고 싶어했고, 이것이 그가 슈테판을 위해 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카지미르는 또는 튜턴 기사단의 마지못한 지원을 받은 반 오스만 동맹을 결성했다. 역사가들은 이 문제에 대해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로버트 니스벳 베인에 따르면, 카지미르의 개입은 오스만을 몰다비아에서 몰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베니아민 초바누는 폴란드의 개입은 군사적이지 않고 순전히 외교적이라고 주장한다.
카지미르는 2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콜로메아로 진격했다. 슈테판은 그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콜로메아로 가서 1485년 9월 12일에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 의식은 천막 안에서 거행되었지만, 슈테판이 카지미르 앞에서 무릎을 꿇는 순간 커튼이 걷혔다. 슈테판의 충성 서약 3일 후, 카지미르 4세는 슈테판의 동의 없이는 오스만이 킬리아와 체타테아 알바를 점령한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슈테판이 폴란드를 방문하는 동안 오스만은 몰다비아로 쳐들어가 수체아바를 약탈했다. 그들은 또한 가짜 왕위 계승자인 피터 흐로노다를 왕위에 앉히려고 시도했다.
슈테판은 폴란드에서 돌아와 11월에 캐틀래버가 호수에서 폴란드의 지원을 받아 침략자들을 격파했다. 그는 1486년 3월에 슈케아에서 다시 오스만과 대치했지만, 킬리아와 체타테아 알바를 되찾을 수 없었다. 그는 전통적으로 모빌레슈티 가문의 가주로 알려진 아프로드 푸리체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역사가 바실레 머르쿨레츠는 슈케아가 몰다비아에게 군사적 승리가 아니었지만, 전반적으로 그의 적 이스켄데르 파샤에게 상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는 오스만 자료와 의견을 같이한다. 몰다비아인들은 재앙을 간신히 피했고, 반대하는 보야르들에게 보이보드로 인정받은 흐로노다가 붙잡혀 참수되었기 때문에 그날 승리했다고 보고했다. 결국 슈테판은 술탄에게 연례 조공을 지불할 것을 약속하며 포르테와 3년 휴전 협정을 맺었다.

연구자 V. J. 패리는 폴란드가 대 오르다에게 끊임없이 시달렸기 때문에 슈테판을 도울 입장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결국 1486년 말, 폴란드는 얀 올브라흐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십자군"을 실제로 시작할 계획을 발표했고, 슈테판은 이 문제에 몰다비아의 역할을 협상하기 위해 세임에 접근했다. 그는 관여하지 않았고, 원정대는 리비우에서 방향을 바꿔 타타르족을 공격했다. 폴란드는 1489년 오스만 제국과 평화 조약을 맺어 슈테판의 동의 없이 킬리아와 체타테아 알바의 손실을 인정했다. 비록 조약이 몰다비아의 국경을 확인했지만, 슈테판은 이를 1485년 카지미르 4세와의 합의 위반으로 간주했다. 그는 조약을 받아들이는 대신 마티아스 코르비누스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그러나 코르비누스는 1490년 4월 6일에 예기치 않게 사망했다.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과 카지미르 4세의 두 아들인 얀 올브라흐트와 블라디슬라우스를 포함한 네 명의 후보가 헝가이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슈테판은 막시밀리안 1세를 지지했는데, 그는 트란실바니아의 세 민족에게 슈테판에 대항하여 협력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헝가리 영주와 고위 성직자들은 9월 21일에 왕으로 즉위한 블라디슬라우스를 지지했고, 막시밀리안은 11월에 헝가리에서 철수해야 했다. 얀 올브라흐트(그의 아버지의 폴란드 상속자)는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슈테판은 헝가리와 폴란드 사이의 개인적인 연합을 막기 위해 블라디슬라우스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폴란드를 침략하여 포쿠티아(현재 우크라이나의 포쿠티아)를 점령했다. 그는 이전에 몰다비아의 봉토였던 이곳의 수입이 오스만 제국에 대한 조공을 지불하는 데 사용될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슈테판은 또한 코르비누스 사후 여러 차례 헝가리를 침략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블라디슬라우스를 지원했다. 그 대가로 블라디슬라우스는 슈테판의 트란실바니아의 치세우와 체타테아 데 발타에 대한 주장을 확인했다. 얀 올브라흐트는 1491년 말에 그의 형제를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해야 했다.
카지미르 4세는 1492년 6월 7일에 사망했다. 그의 막내아들 중 한 명인 알렉산데르는 리투아니아를 계승했고, 얀 올브라흐트는 8월 말 폴란드 왕으로 선출되었다. 모스크바의 이반 3세는 변경 지역의 공국에 대한 그의 권위를 확장하기 위해 리투아니아를 침략했다. 다음 몇 년 동안 이반과 슈테판은 외교를 조율하여 이반이 1494년 2월에 알렉산데르가 모스크바에 상당한 영토의 손실을 인정하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압력은 또한 헝가리와 폴란드 간의 화해를 가져왔다. 블라디슬라우스는 1494년 4월 리비우(현재 슬로바키아의 레보차)에서 얀 올브라흐트, 지그문트를 포함한 네 형제를 만났다. 그들은 오스만 제국에 대한 십자군을 계획했다. 그러나 얀 올브라흐트는 몰다비아에 대한 폴란드의 종주권을 강화하고 슈테판을 지그문트에게 유리하게 폐위시키려 했고, 이로 인해 폴란드와 헝가리 사이에 새로운 긴장이 발생했다. 회의 직후 얀 올브라흐트는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킬리아와 체타테아 알바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몰다비아를 정복하는 것이 얀 올브라흐트의 실제 목적이라고 두려워한 슈테판은 그의 원정을 막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다. 이반 3세의 지원을 받아 그는 리투아니아의 알렉산데르가 얀 올브라흐트와 관계를 맺지 않도록 설득했다. ''비호비에츠 연대기''에 따르면, 리투아니아의 마그나트들도 전쟁을 비난했고, 단순히 남부 부그강을 건너는 것을 거부했다.
한편, 폴란드군은 1497년 8월 드니에스트르강을 건너 몰다비아로 진군했다. 술탄은 슈테판의 요청에 따라 500~600명의 예니체리를 몰다비아로 보내 로마에 집결한 몰다비아군에 합류시켰다. 슈테판은 그의 재무관 아이작을 얀 올브라흐트에게 보내 폴란드군을 몰다비아에서 철수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얀 올브라흐트는 아이작을 투옥했다. 그런 다음 폴란드군은 9월 24일에 수체아바를 포위했다. 이 원정은 실패했다. 튜턴 기사단의 증원은 도착하지 못했고, 요한 폰 티펜은 가는 길에 사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폴란드 진영에 역병이 돌았고, 헝가리의 블라디슬라우스는 12,000명의 군대를 몰다비아로 보내 얀 올브라흐트가 10월 19일에 포위를 풀도록 강요했다.
폴란드군은 폴란드를 향해 행진하기 시작했지만, 슈테판은 10월 25일과 26일에 부코비나의 협곡에서 매복하여 그들을 전멸시켰다. 그 후 몇 달 동안 리비우, 야보리우, 프셰미실을 약탈하는 등 폴란드를 여러 차례 습격하여 그의 승리를 확고히 했다. 이것들은 슈테판이 명령하고 지시했거나, 말코초을루가 지휘하는 오스만-타타르-몰다비아 불규칙 병력의 연합군을 통해 수행되었다. 슈테판은 폴란드와 헝가리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새로운 동맹을 맺은 후에야 얀 올브라흐트와 평화를 맺었고, 몰다비아는 리비우 시장에 직접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오스만 원정은 혹독한 겨울이 기근을 유발하면서 재앙으로 끝났다. 다양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보고서는 또한 슈테판이 공황에 빠진 이전 동맹국을 상대로 위장 공격을 명령했다고 제안한다.
3. 4. 헝가리, 폴란드와의 관계
슈테판은 1465년 1월 24일에 칠리아를 포위했다. 몰다비아 군대는 이틀 동안 요새를 포격했고, 수비대는 1월 25일 또는 26일에 항복했다. 술탄의 봉신인 잘생긴 라두는 칠리아를 주장했고, 항구 점령은 헝가리뿐만 아니라 왈라키아와 오스만 제국과의 갈등을 야기했다. 1465년 또는 그 이전에 슈테판은 폴란드로부터 호틴 요새를 평화적으로 되찾았다.마차시 코르비누스의 지시로 헝가리 국회는 "내실의 이익"으로 알려진 세금과 관련된 모든 이전 면제를 폐지했다. 개혁을 자신들의 특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한 트란실바니아 세 민족의 지도자들은 1467년 8월 18일에 자신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슈테판은 그들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코르비누스 왕이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한 후 저항 없이 코르비누스에게 굴복했다. 코르비누스는 몰다비아를 침공하여 바야, 바커우, 로만, 터르구 네암츠를 점령했다. 슈테판은 군대를 소집하여 12월 15일 바야 전투에서 침략자들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겼다.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코르비누스는 자신과 합류한 몰다비아 귀족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전장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슈테판은 1468년 7월 28일 수체아바에서 폴란드 특사 앞에서 다시 카지미르 4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는 1468년부터 1471년 사이에 트란실바니아를 상대로 습격을 감행했다. 1469년 2월 카지미르가 직접 경의를 표하기 위해 리비우에 왔을 때 슈테판은 그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같은 해 또는 1470년 초에 타타르족이 몰다비아를 침공했지만, 슈테판은 리프니크 전투에서 그들을 격퇴했다.
마차시 코르비누스는 슈테판에게 평화 제안을 보냈다. 그의 사절은 1469년 말 피오트르쿠프 트르부날스키에서 열린 폴란드의 세임에서 코르비누스의 제안에 대한 카지미르 4세의 조언을 구했다. 슈테판은 왈라키아를 침공하여 1470년 2월 브라일라와 터르굴 데 플로치를 파괴했다.
1471년 초, 카지미르 4세와 마차시 코르비누스의 관계는 긴장되었다. 슈테판이 폴란드를 지원하지 않자 카지미르 4세는 몰다비아에 대사관을 파견하여 슈테판이 자신의 의무를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슈테판은 7월 13일 바슬루이에서 폴란드 사절을 만나 폴란드 귀족들이 국경에서 저지른 적대 행위를 상기시키고 폴란드로 도망간 몰다비아 귀족들의 인도를 요구했다. 동시에 그는 코르비누스와 협상을 시작하기 위해 헝가리에 자신의 사절을 보냈다. 그는 1472년 1월 3일에 트란실바니아의 코로나는 현재 브라쇼브에서 온 작센족 상인들에게 상업적 특권을 부여했다.
바슬루이 전투와 네암츠 요새 포위전도 참조
오스만 제국은 1470년대 초 슈테판에게 킬리아와 체타테아 알버를 포기하라고 압박했다. 슈테판은 이러한 요구에 따르는 대신, 1473년 술탄의 칙령에 연간 조공을 보내는 것을 거부했다.
메흐메트 2세는 룸멜리아의 베일레르베이인 하딤 술레이만 파샤에게 몰다비아를 침공하라고 명령했다. 약 12만 명의 오스만 군대가 1475년 말 몰다비아를 침공했다. 왈라키아 군대도 오스만 군에 합류했고, 슈테판은 폴란드와 헝가리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침략자들에 비해 세 배나 열세였던 슈테판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1475년 1월 10일 바슬루이 근처 포둘 이널트(또는 높은 다리)에서 하딤 술레이만 파샤와 전투를 벌였다.
역사학자 알렉산더 미카베리제에 따르면, 바슬루이 전투에서 슈테판의 승리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유럽의 가장 큰 승리 중 하나"였다. 슈테판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유럽 통치자들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 몰다비아가 "기독교의 관문"이자 "헝가리와 폴란드의 요새이자 이 왕국의 수호자"라고 상기시켰다. 교황 식스토 4세는 그를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옹호자''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교황도 다른 유럽 강국도 몰다비아에 물질적인 지원을 보내지 않았다.
슈테판은 1476년 7월에 마티아스 코르비누스와 동맹을 맺었다.
메흐메트 2세는 1476년 여름 몰다비아에 대한 새로운 침공을 직접 지휘했다. 크림 타타르족은 술탄의 명령에 따라 몰다비아를 처음 침략했지만, 슈테판은 그들을 격파했다. 그는 또한 대 오르다의 타타르족이 크림 반도를 침략하도록 설득하여 크림 타타르족이 몰다비아에서 철수하도록 강요했다. 술탄은 1476년 6월 말 몰다비아를 침공했다.
코르비누스가 보낸 군대의 지원을 받은 슈테판은 초토화 작전을 펼쳤지만, 정면 대결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7월 26일 라즈보예니에서 벌어진 발레아 알바 전투에서 패배하여 폴란드로 피신해야 했지만, 오스만 제국은 수체아바 요새를 점령할 수 없었고, 마찬가지로 네암츠 앞에서 실패했다.
1475년 여름부터 폴란드와 헝가리 사이의 경쟁이 일시 중단되는 동안 슈테판은 헝가리에 충성을 맹세했다.
슈테판은 요한 참블락을 포함한 사절들을 로마와 베네치아로 보내 기독교 세력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계속하도록 설득했다. 그의 국제적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슈테판은 1479년 1월 22일 폴란드와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여 카시미르 4세가 특별히 요구할 경우 콜로메아(현재 우크라이나의 콜로미야)에서 그에게 직접 충성을 맹세할 것을 약속했다. 베네치아와 오스만 제국은 같은 달에 평화를 맺었고, 헝가리와 폴란드는 4월에 평화를 맺었다. 바사라브 더 영거가 술탄에게 경의를 표한 후, 슈테판은 오스만 제국과 화해해야 했다. 1480년 5월, 그는 1473년에 지불을 중단했던 연간 조공을 갱신하겠다고 약속했다.
메흐메트 2세는 1481년에 사망했다. 그의 두 아들, 바예지드 2세와 젬 사이의 갈등은 슈테판이 6월에 왈라키아와 오스만 제국으로 진격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티아스 코르비누스는 1483년 10월 바예지드 2세와 5년 휴전 협정을 맺었다. 이 휴전은 항구를 제외한 모든 몰다비아에 적용되었다. 바예지드는 몰다비아를 침공하여 1484년 7월 14일 또는 15일에 킬리아를 점령했다. 그의 봉신인 멩글리 1세 기라이도 몰다비아로 쳐들어가 8월 3일에 체타테아 알바를 점령했다.
코르비누스는 바예지드와의 휴전을 깨고 싶어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 자신의 서부에서의 전쟁에 대한 오스만의 묵시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트란실바니아의 치체우와 체타테아 데 벌타를 포함하는 영토를 그의 봉신에게 선물했다.
그 무렵, 폴란드와 오스만 간의 전쟁이 준비 중이었고, 1484년에 양측 간에 충돌이 발생했다.
카지미르는 2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콜로메아로 진격했다. 슈테판은 그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콜로메아로 가서 1485년 9월 12일에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슈테판의 충성 서약 3일 후, 카지미르 4세는 슈테판의 동의 없이는 오스만이 킬리아와 체타테아 알바를 점령한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슈테판이 폴란드를 방문하는 동안 오스만은 몰다비아로 쳐들어가 수체아바를 약탈했다.
슈테판은 폴란드에서 돌아와 11월에 캐틀래버가 호수에서 폴란드의 지원을 받아 침략자들을 격파했다. 그는 1486년 3월에 슈케아에서 다시 오스만과 대치했지만, 킬리아와 체타테아 알바를 되찾을 수 없었다. 결국 슈테판은 술탄에게 연례 조공을 지불할 것을 약속하며 포르테와 3년 휴전 협정을 맺었다.
1498년경부터 몰다비아의 권력은 루카 아르보레와 이온 터우투를 포함한 일련의 보야르와 행정가 집단으로 조용히 이동했다. 스테판의 아들인 공동 통치자 보그단 3세도 아버지로부터 통치자로서의 책임을 떠맡았다. 그는 폴란드와의 평화 조약에 대한 협상을 진행했다. 스테판이 1499년 헐러우에서 비준한 이 조약은 몰다비아에 대한 폴란드의 종주권을 종식시켰다. 스테판은 1500년에 다시 오스만 제국에 대한 조공 납부를 중단했지만, 그 무렵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다.
스테판의 군대는 다시 오스만 제국으로 쳐들어갔지만, 킬리아 또는 체타테아 알버를 재탈환할 수 없었다. 위대한 호르데의 타타르족이 몰다비아 남부를 침공했지만, 스테판은 1502년에 크림 타타르족의 지원을 받아 그들을 격파했다. 그는 또한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우기 위해 헝가리에 지원군을 보냈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폴란드와의 조약이 더 이상 시행되지 않아 스테판은 1502년에 포쿠티아를 재탈환하게 되었다. 헝가리와 오스만 제국은 1503년 2월 22일에 몰다비아를 포함하는 새로운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그 후 스테판은 다시 오스만 제국에 연간 조공을 바쳤다.
3. 5. 내정 개혁
슈테판은 1465년 1월 24일 칠리아를 다시 포위했다. 몰다비아군은 이틀 동안 요새를 포격했고, 수비대는 1월 25일 또는 26일에 항복했다. 술탄의 봉신인 라두 3세는 칠리아를 주장했고, 항구 점령은 헝가리뿐만 아니라 왈라키아와 오스만 제국과의 갈등을 야기했다. 1465년 또는 그 이전에 슈테판은 폴란드로부터 드네스트르 강변의 호틴 요새(현재 우크라이나의 호틴)를 평화적으로 되찾았다. 칠리아 점령을 기념하기 위해 슈테판은 1466년 푸트나 강 강가에 있는 푸트나에 성모 승천 교회를 세우도록 명령했다. 이 교회는 1467년 슈테판이 확장하여 비코브 마을을 기증하고 1470년 9월에 완공된 푸트나 수도원의 중심 기념물이 되었다.마차시 코르비누스의 지시로 헝가리 국회는 "내실의 이익"으로 알려진 세금과 관련된 모든 이전 면제를 폐지했다. 트란실바니아 세 민족의 지도자들은 개혁을 자신들의 특권 침해로 간주하여 1467년 8월 18일에 자신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슈테판은 그들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코르비누스 왕이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한 후 저항 없이 코르비누스에게 굴복했다. 코르비누스는 몰다비아를 침공하여 바야, 바커우, 로만, 터르구 네암츠를 점령했다. 슈테판은 군대를 소집하여 12월 15일 바야 전투에서 침략자들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겼다. 이 사건은 당시 헝가리 연대기에 슈테판 군대의 패배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코르비누스는 자신과 합류한 몰다비아 귀족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전장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귀족 집단이 하위 국가에서 슈테판에 대항하여 봉기했지만, 그는 연말까지 20명의 귀족과 40명의 다른 지주들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1468년 7월 28일 슈테판은 수체아바에서 폴란드 특사 앞에서 다시 카지미르 4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는 1468년부터 1471년 사이에 트란실바니아를 상대로 습격을 감행했다. 1469년 2월 카지미르가 직접 경의를 표하기 위해 리비우에 왔을 때 슈테판은 그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같은 해 또는 1470년 초에 타타르족이 몰다비아를 침공했지만, 슈테판은 드네스트르 강 근처 리프니크 전투에서 그들을 격퇴했다. 슈테판은 강을 따라 방어 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같은 시기에 올드 오르헤이와 소로카에 새로운 요새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왈라키아 군대가 칠리아를 포위했지만 몰다비아 수비대가 항복하도록 강요할 수 없었다.
마차시 코르비누스는 슈테판에게 평화 제안을 보냈다. 그의 사절은 1469년 말 피오트르쿠프 트르부날스키에서 열린 폴란드의 세임 (또는 총회)에서 코르비누스의 제안에 대한 카지미르 4세의 조언을 구했다. 1470년 2월 슈테판은 왈라키아를 침공하여 브라일라와 터르굴 데 플로치 (다뉴브 강변의 가장 중요한 왈라키아 상업 중심지 두 곳)를 파괴했다. 1470년 12월 페트루 아론은 세켈리 군대를 고용하여 몰다비아로 쳐들어갔지만, 그의 공격은 아마도 슈테판에 의해 예상되었을 것이다. 보이보드는 터르구 네암츠 근처에서 그의 라이벌을 물리쳤다. 페터 아론은 전장에서 포로로 잡혔고, 그의 몰다비아 지지자들(그중에는 슈테판의 ''보르닉''이자 매형인 이사이야와 재상 알렉사)는 슈테판의 명령에 따라 처형되었다. 라두 3세도 몰다비아를 침공했지만 슈테판은 1471년 3월 7일 소치에서 그를 물리쳤다. 보고에 따르면, 그는 전투에서 포로로 잡은 왈라키아 귀족 중 두 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죽였다.
1471년 초, 카지미르 4세와 마차시 코르비누스의 관계는 긴장되었다. 슈테판이 폴란드를 지원하지 않자 카지미르 4세는 몰다비아에 대사관을 파견하여 슈테판이 자신의 의무를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슈테판은 7월 13일 바슬루이에서 폴란드 사절을 만나 폴란드 귀족들이 국경에서 저지른 적대 행위를 상기시키고 폴란드로 도망간 몰다비아 귀족들의 인도를 요구했다. 동시에 그는 코르비누스와 협상을 시작하기 위해 헝가리에 자신의 사절을 보냈다. 그는 1472년 1월 3일에 트란실바니아의 코로나는 현재 브라쇼브에서 온 작센족 상인들에게 상업적 특권을 부여했다.
4. 문화 발전
슈테판 3세는 47년 이상 몰다비아를 통치하며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여 오스만 제국, 폴란드, 헝가리를 견제했다. 그는 반항적인 귀족들을 억압하고 중앙 정부를 강화했으며, 노예 제도를 공고히 하는 한편, 로마니족과 타타르족 노예를 활용하고 동화시키기도 했다.
슈테판은 자유민을 정착시키고, 아르메니아인과 이탈리아인을 받아들여 몰다비아의 다문화 사회를 조성했다. 그는 트란실바니아 작센족과의 무역 특권을 갱신했지만, 보호 무역 장벽을 도입하기도 했다. 그의 궁정에는 외국 전문가들이 있었지만, 1470년대에는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유대인, 후스파에 대한 종교적 박해를 가하기도 했다.
슈테판은 왕실 토지를 회복하고 교회와 하위 귀족들에게 토지를 하사하여 중앙 정부의 지지 기반을 강화했다. 그는 몰다비아 전역을 순회하며 직접 재판을 열어 자신의 권위를 높였다.
그는 알렉산데르 1세 시대에 건설된 요새들을 복원하고 새로운 요새를 건설하여 국방을 강화했다. 요새 사령관인 ''파르컬라비''는 행정 및 사법 권한을 가진 왕실 행정의 중요한 기둥이었으며, ''아르마슈''가 이들의 업무를 통제했다. 슈테판은 용병을 고용하고 농민에게 무기 휴대를 의무화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
슈테판 3세는 루마니아 정교회에 많은 교회와 수도원을 헌납했으며, 그중 푸트나 수도원은 몰다비아의 문화, 예술, 종교 중심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슈테판 3세의 묘소는 이 수도원에 있다.
5. 유산
슈테판 3세는 47년 이상 몰다비아를 통치했는데, 이는 "루마니아 공국의 정치적, 영토적 취약성을 고려할 때 그 자체로 뛰어난 업적"이었다. 그는 외교에 능숙하여 오스만 제국, 폴란드, 헝가리를 서로 견제할 수 있었다. 역사가 키스 히친스는 슈테판이 "오스만 제국에 조공을 바쳤지만, 그것이 유리할 때만 조공을 바쳤고... 폴란드의 카지미르 왕에게 그가 종주권을 갖는다는 것을 현명하다고 판단했을 때 경의를 표했으며... 다른 방법이 실패했을 때 무력을 사용했다."라고 평가했다.
슈테판은 반항적인 귀족들을 억압하고 중앙 정부를 강화했으며, 종종 말뚝형을 포함한 가혹한 처벌을 가했다. 그는 노예 제도를 공고히 하고, 로마니족을 포획하기도 했지만, 타타르족 노예를 선택적으로 해방하고 동화시키기도 했다. 그는 두 공동체를 모두 "궁정의 노예"로 사용하여 그들의 전문 기술을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한 민속 전설은 슈테판이 술리차의 홍수를 완화하기 위해 로마니족 노예를 대상으로 인신 제사를 행했다고 주장한다. 마르친 비엘스키에 따르면, 1498년 폴란드 원정에서 보이보드는 최대 10만 명의 포획에 참여하거나 적어도 묵인했다. 이들 중 적어도 일부는 몰다비아에 정착했다. 역사가 미르체아 치우보타루에 따르면, 여기에는 체르나우카(현재 우크라이나의 초르니우카), 도브로바츠, 립니크, 루시-치우테아, 그리고 헐러우 외곽의 마을 무리가 포함될 수 있다.
슈테판은 자유민을 정착민으로 받아들여 수체아바를 포함한 몰다비아에 최초의 아르메니아인 식민지를 건설했고, 이탈리아인들도 정착시켰는데, 그들 중 일부는 오스만 노예 무역에서 도망친 사람들이었다. 그는 트란실바니아 작센족의 상업적 특권을 갱신했지만, 이후 보호 무역 장벽을 도입했다. 그의 궁정에는 마테오 무리아노와 이탈리아 은행가 도리노 카타네오를 포함한 외국 전문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1470년대의 "십자군"으로서 슈테판은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유대인, 후스파에 대한 종교적 박해와 착취를 장려했는데, 그들 중 일부는 오스만 제국의 지지자가 되었다.
슈테판은 알렉산데르 1세 시대 이후 내전으로 상실된 왕실 토지를 구매하거나 몰수하여 회복했다. 그는 교회와 하위 귀족들에게 많은 토지를 하사했다. 그의 순회 생활 방식은 몰다비아 전역에서 직접 재판을 열 수 있게 해주었고, 이는 그의 권위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1502년 무리아노와 대화하면서 슈테판은 36번의 전투에서 싸웠고, 단 두 번만 졌다고 언급했다. 그는 비대칭 전쟁 전술과 게릴라전을 펼쳤다. 그는 조국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알렉산데르 1세 시대에 건설된 요새를 복원하고, 새로운 요새를 포함한 여러 성을 세웠다. 요새의 ''파르컬라비''(사령관)는 행정 및 사법 권한을 부여받았고 왕실 행정의 중요한 기둥이 되었으며, ''아르마슈''에 의해 통제되었다.
슈테판은 요새 관리를 위해 용병을 고용하여 귀족 수행원의 몰다비아 군대 군사적 역할을 줄였다. 그는 3,000명 규모의 개인 경호대를 설치했고, 아르메니아인으로만 구성된 부대를 설치했다. 몰다비아 방어를 위해 농민에게 무기 휴대 의무를 부과했다. 몰다비아 연대기에는 "그가 화살, 활, 칼을 소지하지 않거나 말에 박차를 하고 군대에 오지 않는 농민을 발견하면, 그는 그 남자를 가차 없이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군사 개혁으로 몰다비아 군사력이 증강되어 슈테판은 4만 명이 넘는 군대를 소집할 수 있게 되었다.
슈테판 3세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벌인 이후의 몇 년은 "문화 정책"과 "건축 붐"의 시기로 묘사된다. 1487년 이후 슈테판의 주도로 10개 이상의 석조 교회가 세워졌다. 보로네츠 수도원은 1488년에 지어졌고, 타즐러우의 수도원은 1496년부터 1497년까지 지어졌다.
새로운 교회 양식은 슈테판 통치 시대에 "진정한 현지 건축가 학교"가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비잔틴 및 고딕 건축 요소들을 차용하여 현지 전통의 요소들과 혼합했다. 별 모양의 기단을 가진 채색된 벽과 탑은 슈테판의 교회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였다. 왕자는 트란실바니아와 발라키아에 교회를 짓는 데 자금을 지원하여 몰다비아 건축이 공국의 경계를 넘어 확산되도록 기여했다. 푸트나 수도원의 묘실은 슈테판 가족의 왕실 묘지로 지어졌다. 슈테판의 묘비는 아칸서스 잎 (비잔틴 미술에서 채택된 모티프)으로 장식되었으며, 이는 다음 세기 동안 몰다비아 미술의 특징적인 장식 요소가 되었다.
슈테판은 몰다비아의 역사학과 교회 슬라브어 문학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공국의 연대기를 수집하도록 명령하고, 적어도 세 개의 슬라브어 연대기의 완성을 시작했다. 비잔틴 문학의 관습을 없애고 새로운 스토리텔링 기준을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비스트리차 연대기''는 1359년부터 1506년까지 몰다비아의 역사를 기록했다. ''푸트나 연대기''의 두 가지 버전은 1359년부터 1526년까지의 기간을 다루었지만, 푸트나 수도원의 역사도 기록했다. 일부는 슈테판의 초상화(1473년 후모르 수도원 ''복음서'')와 그의 측근 이오안 터우투(''무카체보 시편'', 1498)와 같은 미니어처로 장식되었다. 네암츠 수도원에서 가브리일 우리크의 제자들에 의해 개발된 "몰다비아 양식"은 러시아 삽화가와 서예가들 사이에서 유행을 만들어냈다.
5. 1. 루마니아 민족주의의 상징
슈테판은 죽은 직후 "대공"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534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그문트 1세는 그를 "저 위대한 슈테판"이라고 불렀다. 폴란드 역사가 마르틴 크로메르는 그를 "몰다비아 공의 위대한 군주"라고 언급했다. 1580년경 마치에이 스트리코프스키에 따르면, 발라키아인과 몰다비아인 모두 슈테판을 기리는 발라드를 불렀고, 그의 초상화는 부쿠레슈티 궁정에 전시되었다. 다만 발라키아에 대한 그의 습격은 그러한 증언에서 일반적으로 간과되었다. 그는 솜씨로 존경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지위와 나이를 나타내는 별칭으로 주로 알려졌다. 16세기 몰다비아와 발라키아에서는 그를 "슈테판 첼 베치"와 "슈테판 첼 바트란"("고대 슈테판" 또는 "노인")이라고 편하게 불렀다. 구전 역사에서도 종종 그를 "황제" 또는 "몰다비아의 ''크라이''(왕)"라고 부르며, 슈테판의 비잔틴식 자기 지칭을 유지했다.17세기 중반, 그리고레 우레체는 슈테판의 장례식에 대해 "은인이자 지도자"라고 묘사했다. 보야르 출신인 우레체는 또한 슈테판의 독재적인 잔혹함, 성질, 작은 체구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이는 학자 루치안 보이아에 따르면 그가 권위주의적인 군주를 혐오했기 때문일 수 있다. 이와 함께, 지역 민속은 슈테판을 귀족과 외국 침략자로부터 농민을 보호하는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 수세기 동안, 자유 농민들은 그들이 전투에서 용맹함을 보여 슈테판으로부터 토지를 부여받은 조상들로부터 토지를 상속받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선례들은 몰다비아와 발라키아의 몰다비아-발라키아 연합 공국을 추구했던 루마니아 민족주의와 경쟁적인 몰도바주의에서 슈테판을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19세기 초, 몰다비아 지역주의자 게오르게 아사치는 슈테판을 역사 소설, 대중 인쇄물, 문장 재구성에 대한 주제로 삼았다. 아사치와 테오도르 발쉬는 발라키아의 침략에 대한 저항을 나타내는 슈테판 대공의 동상 건립을 위해 캠페인을 벌였다. 몰다비아 분리주의자 니콜라에 이스트라티는 슈테판 숭배에 기여한 여러 연극 작품을 썼다. 분리주의를 피한 다른 몰다비아인들은 중세 영웅에게 경의를 표했다. 1840년대에 알레쿠 루소는 루마니아 역사에 대한 "진실의 근원"이라고 믿었던 슈테판에 대한 민속을 수집하고 재발행하는 노력을 시작했다. 보이보드를 다룬 최초의 서사시 중 하나는 콘스탄틴 네그루치의 "아프로드 푸리체"였으며, 이는 슈케이아 전투를 허구화했다. 러시아 제국에 의해 몰다비아에서 분할된 베사라비아 현에서는 농민과 지식인 계급 모두 슈테판을 저항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의 "황금기"는 알렉산드루 하이데우와 보그단 페트리체이쿠 하슈데우에게 언급되었다. 후자는 그에게 그의 모국어인 러시아어로 쓰여진 시에서 슈테판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루마니아어 역사 소설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을 헌정했다.
그때까지 슈테판의 "애국적 미덕"에 대한 숭배는 이에나키차 바케레스쿠와 게오르게 라자르에 의해 발라키아에 소개되었다. 발라키아 학자 니콜라에 벌체스쿠는 슈테판을 국민 영웅으로 묘사한 최초의 루마니아 역사가였다. 벌체스쿠는 그의 통치가 루마니아인이 거주하는 땅의 통일에 중요한 단계였다고 주장했다. 그 시기에 슈테판은 안드레이 무레샤누의 낭만주의 시에 명시적으로 언급되었으며, 특히 루마니아의 미래 국가에서 묘사된 "강력한 그림자"로 언급되었다. 1850년대 발라키아에서 디미트리에 볼린티네아누는 슈테판이 전투에서 도망가고 그의 어머니 올테아가 그를 돌려보내는 내용의 발라드를 만들었는데, 이 곡은 음악으로 만들어진 후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그의 후기 작품 또한 민족주의적 숭배에 기여하거나 그의 에로틱한 삶을 허구화했다. 슈테판에 대한 민족주의적 투자는 그 당시 게오르게 파누, 요안 보그단 그리고 주니메아 회원과 같은 다른 작가들에 의해 저항을 받았으며, 이들은 낭만적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을 선호했다. 파누의 작품에서 슈테판은 단지 "폴란드 봉신"으로 나타난다. 전 주니미스트 A. D. 제노폴은 또한 킬리아의 손실과 발라키아에 대한 그의 배신 혐의에 대해 보이보드를 꾸짖었다.
슈테판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의 기념일은 1870년대부터 공식적으로 기념되었으며, 1871년에는 푸트나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부코비나를 합병에 대한 항의를 포함한 단호한 연대 시위가 있었다. 이는 테오도르 V. 슈테파넬리에 의해 조직되었고, 시인 미하이 에미네스쿠가 참석했다. 민족주의적 해석은 여전히 우세했으며, 특히 1881년 이후 에미네스쿠가 그의 시 ''도이나''(전통 도이나의 스타일로 쓰여짐)를 슈테판에게 헌정하여 그에게 무덤에서 일어나 다시 그의 백성을 이끌라고 외쳤을 때 더욱 그러했다. 그의 동상은 결국 1883년 이아시에 세워졌다.
1904년, 보이보드의 죽음 400주년 기념식에는 브란치오아이아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지역 주민들이 바르셰슈티에 돌 기념비를 세우는 행사가 포함되었다. 또한 그때 니콜라에 이오르가는 슈테판의 전기를 출판했다. 제노폴의 평결에 반대하여 이오르가는 슈테판의 승리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모든 백성의 진정한 단결"에 기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루마니아 왕국과 루마니아인이 거주하는 다른 지역에서 더 많은 문학 작품이 등장하여 슈테판의 문화 유산을 공고히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한 기여 중 하나는 바르부 슈테파네스쿠 델라브란체아의 1909년 연극 ''아푸스 데 소아레''였으며, 대중의 마음속에서 역사적인 슈테판에게 기인한 조언을 포함했다.
슈테판을 죽어가는 현인으로 묘사하면서, 델라브란체아의 다른 두 연극이 이어졌으며, 이들은 왕자의 실용적인 잔혹함과 이것이 그의 계승에 미치는 영향을 주장했다. 그때까지 슈테판은 국가 원수로서 루마니아 왕 카롤 1세의 길고 안정적인 통치에 대한 기준점이 되었다. 그 후 30년 동안 슈테판의 업적은 이오르가, 미하이 코드레아누, 특히 미하일 사도베아누의 문학 작품의 영감이 되었다. 1930년대에 철위대는 슈테판 대공 숭배를 기독교 군주로서의 그의 공헌에 특별한 강조를 두어 자체 목적으로 받아들였다.
슈테판을 범루마니아 민족주의자로 읽는 것은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후반기에 절정에 달했다. 초기에 정권은 슈테판이 농민을 대하는 방식을 낮게 평가했으며, 그의 동슬라브족과의 관계나 보이아르 억압만을 강조했다. 이러한 입장은 국가 공산주의에 의해 뒤집혔다. 처음에는 검열은 소비에트 베사라비아 또는 포쿠티아에 있는 그의 유산에 대한 언급을 줄이거나 삭제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공식 역사가들은 슈테판이 문자 그대로 "모든 루마니아인의 군주"라고 주장했다. 이오르가의 책은 슈테판의 죽음 500주년을 포함하여 여러 번 재출판되었다. 같은 기념일에 슈테판은 몰도바 공화국에서 "국가 정체성, 독립 및 민족 간 조화"의 상징으로 제시되었으며, 그는 또한 "몰도바 특수주의" 또는 "몰도바 애국심"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따라서 슈테판은 루마니아 정체성을 선호하는 몰도바 인민전선과 몰도바주의 공산당 모두에 의해 소환되었다. 후자는 슈테판을 "몰도바 국가의 창시자"라고 묘사하며, 그의 공국에서 현재의 국가로의 직접적인 연속성을 주장한다.
이글스(Eagles)가 언급한 바와 같이, "슈테판은 루마니아와 몰도바 모두에서 항상 존재하는 아이콘"이다. "그의 모습의 동상이 풍부하고, 정치인들은 그를 모범으로 인용하며, 학교와 대학교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고, 마을과 도시의 주요 간선 도로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며, 부쿠레슈티 중심부에 슈테판 첼 마레 지하철역이 있으며, 그의 왕관을 쓴 머리는 소련 이후 몰도바 공화국의 ''모든'' 지폐를 장식했다." 1999년 여론 조사에 따르면, 참가자의 13% 이상이 슈테판 대공을 "루마니아인의 운명에 더 좋은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여겼다. 7년 후, 루마니아 텔레비전에서 ''100명의 가장 위대한 루마니아인''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그는 "역대 가장 위대한 루마니아인"으로 선정되었다.
5. 2. 성인 추대

아토스산의 전설, 루마니아 이야기, 몰다비아 연대기 모두에서 슈테판의 오스만 제국 및 헝가리에 대한 승리는 신성한 영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졌거나, 게오르기우스, 데메트리오스, 프로코피우스, 메르쿠리우스와 같은 성인들의 직접적인 후원하에 놓였다고 여겨졌다. 슈테판 자신에 대한 존경은 1570년대에 처음 기록되었지만, 그리고리에 우레케에 따르면 그는 장례 직후 성인으로 여겨졌는데, "그의 영혼 때문이 아니라... 그는 죄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가 이룬 위대한 업적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우레케의 보고서의 긍정적인 뉘앙스는 미론 코스틴에 의해서도 반복되었다.
푸트나 수도원의 아르티몬 보르트니치 주교는 1851년 수도원의 묘실 조사를 시작했으며, 러시아와 몰다비아의 중요한 성소를 언급했다. 1857년(슈테판의 무덤이 열린 지 1년 후) 사제이자 언론인인 이라클리에 포룸베스쿠는 이미 "푸트나의 거룩한 유골"에 대해 썼다. 1903년에 증명된 적어도 일부 전설에서 슈테판 3세는 불멸의 잠자는 영웅 또는 천국의 통치자로 묘사된다. 그러나 슈테판 3세는 루마니아 정교회가 1950년대에 첫 번째 루마니아 성인을 성인으로 추대했을 때 무시되었다.
테옥티스트 루마니아 총대주교는 1992년 6월 21일 부쿠레슈티의 성 스피리돈 신 교회에서 12명의 다른 성인들과 함께 슈테판을 성인으로 추대했다. 이 자리에서 총대주교는 슈테판이 기독교의 수호자이자 그의 백성의 보호자였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한 슈테판이 통치 기간 동안 교회를 세웠다고 강조했다. 슈테판의 축일은 루마니아 정교회 달력에서 7월 2일(그의 사망일)이다. 성인으로 추대된 후 첫 번째 축일에 푸트나에서 슈테판 3세와 성인을 기념하기 위한 새로운 행사가 열렸다. 15,000명(당시 루마니아 대통령 이온 일리에스쿠와 두 명의 장관 포함)이 행사에 참석했다. 테옥티스트 총대주교는 "과거에 슈테판이 우리를 같은 깃발 아래로 모았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같은 하늘 아래로 모으셨다"고 언급했다.
6. 가족 관계
항목 | 내용 |
---|---|
부친 | 보그단 2세 |
모친 | 마리아 올테아 (왈라키아 공들과 연관 추정) |
출생 연도 | 1433년 ~ 1440년 사이 (정확한 연도 불명) |
형제 | 요아힘, 요안, 크리스테아, (커스테아 아르보레: 일부 기록에서 형제 또는 요아힘과 동일인으로 추정) |
자매 | 소레아, 마리아 |
친척 (높은 지위) |
슈테판 3세는 보그단 2세의 아들이었으며, 보그단 2세는 알렉산드루 1세의 아들이었다. 슈테판 3세의 어머니 마리아 올테아는 왈라키아의 공들과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슈테판 3세는 요아힘, 요안, 크리스테아라는 형제와 소레아, 마리아라는 자매가 있었다. 일부 전기 작가들은 정치가 루카 아르보레의 아버지인 커스테아 아르보레가 슈테판 3세의 네 번째 형제이거나, 커스테아와 요아힘이 동일 인물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슈테판 3세의 친척들은 몰다비아에서 높은 지위를 가졌는데, 1485년에 사망한 마리아는 수체아바의 문지기였던 쉔드레아의 아내였고, 또 다른 매제인 이사이어도 궁정에서 높은 직책을 맡았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