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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예지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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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예지드 2세는 1447년에 태어나 1512년에 사망한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다. 그는 메흐메트 2세의 아들이자 무라드 2세의 손자로서, 1481년부터 1512년까지 재위했다. 바예지드 2세는 동생 젬 술탄과의 왕위 쟁탈전을 거쳐 즉위했으며, 통치 기간 동안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해군력을 강화하는 등 영토 확장에 힘썼다. 또한, 그는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을 받아들이는 등 관용적인 정책을 펼쳤으나, 사파비 왕조의 시아파 선교로 인한 샤 쿨루의 반란을 겪기도 했다. 바예지드 2세는 아들 셀림 1세에 의해 폐위된 후 사망했으며, 그의 치세는 안정적인 경제 발전과 문화적 번영을 이루었으나, 말년에는 종교적 갈등과 권력 다툼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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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예지드 2세
기본 정보
16세기경 파올로 베로네세가 그린 바예지드 2세
바예지드 2세, 16세기경 파올로 베로네세 그림
칭호바실레우스 및 아우토크라토르
오스만 제국의 술탄 (파디샤)
재위 기간1481년 5월 22일 ~ 1512년 4월 24일
즉위식알 수 없음
선임자메흐메트 2세
섭정알 수 없음
후임자셀림 1세
배우자시린 하툰
휘스뉘샤흐 하툰
뷜뷜 하툰
니가르 하툰
귈루흐 하툰
귈바하르 하툰
무흐테레메 페라흐샤드 하툰
기타
자녀아이니샤흐 술탄
아이셰 술탄
셰흐자데 아흐메트
게브헤르뮐뤼크 술탄
셰흐자데 코르쿠트
셀림 1세
전체 이름바예지드 빈 메흐메트
왕조오스만 왕조
아버지메흐메트 2세
어머니귈바하르 하툰
출생일1447년 12월 3일
출생지디메토카, 오스만 제국
사망일1512년 5월 26일
사망지아발라르, 합사, 오스만 제국
매장일알 수 없음
매장지이스탄불, 바예지드 2세 모스크
서명 유형투그라
종교수니파
서명
로마자 표기
오스만어Bāyezīd-i s̱ānī
터키어II. Bayezid

2. 생애

1447년 메흐메트 2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456년 동생 무스타파와 함께 할례를 받았고, 같은 날 메흐메트는 아나톨리아의 베일리크들을 초대한 대연회를 열었다. 이 축연은 메흐메트가 베오그라드 포위전에서 대패하고 귀국한 직후였으며, 연회를 연 것은 패배를 잊기 위한 의미도 있었다.[27] 디디모티코에서 태어난 바예지드 2세는 아마시아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후 27년 동안 그곳에서 베이로서 복무했다. 오스만 제국 황자 관례에 따라 아마시아 지사를 역임했고, 1473년 오틀루크벨리 전투에서 아크 코윤루와 싸웠다. 1473년 카라코윤루와의 바슈켄트 전투(en:Battle of Otlukbeli)에서는 예니체리와 유럽인으로 구성된 부대를 지휘하여 우준 하산의 조카가 이끄는 기병대와 교전했다.[28]

메흐메트 재위 중, 중앙 집권화와 국제화에 반발하는 운동이 이슬람 종교계와 바예지드 2세에 의해 전개되었다.[29] 아마시아에 있는 바예지드 2세의 궁정에는 메흐메트의 독재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정책에 반대하는 당파가 형성되었고, 메흐메트는 반대파를 감시할 수는 있었지만, 그들을 해산시킬 수는 없었다.

바예지드 2세의 동생 젬


바예지드 2세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왕위를 주장하며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군사적 지원을 구한 그의 동생 젬 술탄과의 다툼이었다. 1481년 메흐메트 2세가 이탈리아 원정 도중 사망하자, 그의 동생 젬 술탄(젬)과의 황위 계승 분쟁이 시작된다. 바예지드와 젬에게 모두 메흐메트의 죽음을 알리는 사자가 파견되었지만, 젬보다 먼저 이스탄불에 입성한 바예지드는, 1481년 5월 21일 정식으로 술탄으로 즉위했다.

황위를 놓친 젬은 부르사를 점령하고 독립을 선포하며, 바예지드에게 제국의 분할 통치를 조건으로 한 평화를 제안했다. 바예지드는 젬의 제안을 거절하고 예니셰히르 전투에서 젬의 군대를 격파했다. 패한 젬은 이집트의 마무룩 왕조에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하지만 실패하고, 로드스의 성 요한 기사단에 의탁했다. 결국 기사단은 젬을 교황 인노첸시오 8세(1484~1492)에게 넘겨주었다. 교황은 젬을 이용하여 터키인들을 유럽에서 몰아낼 생각을 했지만, 교황의 십자군이 결실을 맺지 못하자 젬은 나폴리에서 죽었다. 바예지드는 젬이 망명한 북아프리카와 유럽의 여러 세력과 협상을 벌였고, 1495년 젬이 병사한 후 그의 생모, 아내, 딸을 보호했다.

1485년부터 1491년까지 맘루크 왕조와의 전쟁에서, 아나톨리아 남부에 군대를 파견했지만 패배했고, 아다나, 타르수스 내의 요새를 빼앗겼다. 전쟁 이후 평화 제안에 대해 진군으로 답했고, 세 번 패배했지만, 하프스 왕조의 중재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바예지드 2세는 오스만 육군과 해군을 개혁했다.[73] 대항해 시대에 접어든 유럽 각국과 대치하는 동시에 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들을 정복하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베네치아에 대항할 전력을 축적했다.[33] 1495년 바르바리아 해적 등 지중해와 에게 해에서 활개 치던 무슬림 해적을 오스만 해군에 편입시켰다.[41] 이때 오스만 해군에 편입된 대표적인 해적으로 케말 레이스, 피리 레이스 등이 있다. 또한 서구에서 적극적으로 조선 기술을 도입하여 신형 함선을 설계했다.[41]

해군 강화 중에는 베네치아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꾸준한 협상을 진행했지만,[41] 1499년 바예지드는 베네치아 영토인 레판토로 친정했고, 같은 해 8월 12일 존키오(존키오) 성 근해 해전에서 오스만 해군의 갤리선이 베네치아의 갈레아스선을 격파하는 승리를 거두었으며, 기독교도들은 이 전투를 「존키오의 비참한 전투」( :en:Battle of Zonchio)라고 기록했다.[44] 1500년에 모레아 반도에 있는 베네치아 영토인 모돈(:en:Methoni, Messenia), 코로니(:en:Koroni), 나바리노(:en:Pylos)를 획득했다.

16세기이란에서 흥성한 사파비 왕조는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으며, 초기에는 오스만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였다.[40] 그러나 곧 사파비 왕조는 아나톨리아 지역으로의 진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사파비 왕조의 이스마일 1세는 아나톨리아 공격의 포석으로, 신하들에게 아나톨리아 전역에서의 시아파 포교를 지시했다.[46] 바예지드는 처음에는 사파비 왕조의 포교 활동을 방관하고 있었으며,[48] 1511년에 샤 쿨루("사파비 왕조의 샤의 노예"를 의미함)를 자칭하는 자가 반란을 일으키자 상황이 급변했다.

1509년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지진으로 도시가 폐허가 되었고,[13][14] 바예지드 2세의 아들들인 셀림 1세와 아흐메트 사이에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다.

바예지드 2세의 장례식


크림반도에서 돌아온 셀림은 예니체리의 지원을 받아 1512년 4월 25일 아버지를 퇴위시켰다. 바예지드는 고향인 디메토카로 은퇴했지만, 1512년 5월 26일 하브사에서 퇴위 한 달 만에 사망했다. 그는 이스탄불의 바예지드 모스크 옆에 묻혔다. 셀림에 의한 독살설이 유력하다.[55]

2. 1. 초기 생애

바예지드 2세는 셰흐자데 메흐메트(후일 메흐메트 2세)와 알바니아 출신 후궁 귈바하르 하툰의 아들이었다. 무라드 2세가 사망한 1451년에 그의 아버지가 술탄이 되었다.[4][5]

뮈크리메라는 공통된 중간 이름 때문에 바예지드가 시티샤 하툰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하는 자료들이 있다.[6] 이는 바예지드의 배우자 중 한 명인 아이셰 하툰을 바예지드 2세의 사촌으로 만든다. 그러나 시티샤 하툰의 결혼은 바예지드가 태어난 지 2년 후에 이루어졌고[7] 메흐메트는 이러한 정략결혼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1447년 메흐메트 2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456년 동생 무스타파와 함께 할례를 받았고, 같은 날 메흐메트는 아나톨리아의 베일리크들을 초대한 대연회를 열었다. 이 축연은 메흐메트가 베오그라드 포위전에서 대패하고 귀국한 직후였으며, 연회를 연 것은 패배를 잊기 위한 의미도 있었다.[27] 디디모티코에서 태어난 바예지드 2세는 아마시아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후 27년 동안 그곳에서 베이로서 복무했다. 오스만 제국 황자 관례에 따라 아마시아 지사를 역임했고, 1473년 오틀루크벨리 전투에서 아크 코윤루와 싸웠다. 1473년 카라코윤루와의 바슈켄트 전투(en:Battle of Otlukbeli)에서는 예니체리와 유럽인으로 구성된 부대를 지휘하여 우준 하산의 조카가 이끄는 기병대와 교전했다.[28]

메흐메트 재위 중, 중앙 집권화와 국제화에 반발하는 운동이 이슬람 종교계와 바예지드 2세에 의해 전개되었다.[29] 아마시아에 있는 바예지드 2세의 궁정에는 메흐메트의 독재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정책에 반대하는 당파가 형성되었고, 메흐메트는 반대파를 감시할 수는 있었지만, 그들을 해산시킬 수는 없었다.

2. 2. 즉위 이전

바예지드 2세는 셰흐자데 메흐메트(후일 메흐메트 2세)와 알바니아 출신 후궁 귈바하르 하툰의 아들이었다. 바예지드 2세가 태어났을 당시 그의 할아버지 무라드 2세는 술탄이었다. 1451년 할아버지가 사망하자 그의 아버지가 술탄이 되었다.[4][5]

몇몇 자료에서는 두 여성의 공통된 중간 이름인 뮈크리메 때문에 바예지드가 시티샤 하툰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6] 이 주장에 따르면 바예지드의 배우자 중 한 명인 아이셰 하툰은 바예지드 2세의 사촌이 된다. 그러나 시티샤 하툰의 결혼은 바예지드가 태어난 지 2년 후에 이루어졌고,[7] 메흐메트는 이러한 정략결혼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디디모티코에서 태어난 바예지드 2세는 아마시아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후 27년 동안 그곳에서 베이로서 복무했다. 1473년, 그는 오틀루크벨리 전투에서 아크 코윤루와 싸웠다. 1447년에 메흐메트 2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456년에 동생 무스타파와 함께 할례를 받았고, 같은 날 메흐메트는 아나톨리아의 베일리크들을 초대한 대연회를 열었다. 이 축연은 메흐메트가 베오그라드 포위전에서 대패하고 귀국한 직후였으며, 연회를 연 것은 패배를 잊기 위한 의미도 있었다.[27] 오스만 제국의 황자 관례에 따라 아마시아의 지사를 역임했고, 1473년에 일어난 카라코윤루와의 바슈켄트 전투(오틀루크벨리 전투)에서는 예니체리와 유럽인으로 구성된 부대를 지휘하여 우준 하산의 조카가 이끄는 기병대와 교전했다.[28]

메흐메트 재위 중, 중앙 집권화와 국제화에 반발하는 운동이 이슬람 종교계와 바예지드 2세에 의해 전개되었다.[29] 아마시아에 있는 바예지드 2세의 궁정에는 메흐메트의 독재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정책에 반대하는 당파가 형성되었고, 메흐메트는 반대파를 감시할 수는 있었지만, 그들을 해산시킬 수는 없었다.

2. 3. 젬과의 권력 투쟁



바예지드 2세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왕위를 주장하며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군사적 지원을 구한 그의 동생 젬 술탄과의 다툼이었다. 메흐메드 2세의 마지막 대베지르였던 카라마니 메흐메드 파샤는 술탄의 죽음을 알리고 바예지드에게 왕위에 오르라고 초청했다.[8] 동생의 군대에 패한 젬은 로드스의 성 요한 기사단의 보호를 구했다. 결국 기사단은 젬을 교황 인노첸시오 8세(1484~1492)에게 넘겨주었다. 교황은 젬을 이용하여 터키인들을 유럽에서 몰아낼 생각을 했지만, 교황의 십자군이 결실을 맺지 못하자 젬은 나폴리에서 죽었다.

1481년 메흐메트 2세가 이탈리아 원정 도중 사망하자, 그의 동생 젬 술탄(젬)과의 황위 계승 분쟁이 시작된다(또 다른 동생 무스타파는 1474년에 암살되었다[30]). 바예지드와 젬에게 모두 메흐메트의 죽음을 알리는 사자가 파견되었지만, 젬의 사자가 친척인 총독(베일레르베이) 시난에 의해 발이 묶였다[31], 젬보다 먼저 이스탄불에 입성한 바예지드는, 입성 전 젬을 옹립하려 했던 대베지르 메흐메트 카라마니가 예니체리에 의해 살해되었으며[32], 예니체리와 메흐메트의 정책에 반대하는 신하들의 지지를 받아[32] 1481년 5월 21일 정식으로 술탄으로 즉위했다. 즉위 과정에서 예니체리에게 특권과 상을 부여했고[33], 반대파의 요구에 양보해야 했다[34].

황위를 놓친 젬은 부르사를 점령하고 화폐와 후트바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독립을 선포하며, 바예지드에게 제국의 분할 통치를 조건으로 한 평화를 제안했다. 바예지드는 젬의 제안을 거절하고 대결 의지를 보였으며, 전쟁 전에 젬 측 사령관들을 포섭했고[35], 같은 해 6월 20일 예니셰히르 전투에서 젬의 군대를 격파했다. 패한 젬은 이집트의 마무룩 왕조에 망명하여, 백양 왕조에 망명해 있던 카라만 베일리크의 왕족 카심 베이와 협력하여 재기를 도모하지만 실패하고, 이집트를 떠나 로도스 섬의 성 요한 기사단에 의탁했다. 바예지드는 젬이 망명한 북아프리카와 유럽의 여러 세력, 즉 마무룩 왕조, 성 요한 기사단, 프랑스의 발루아 왕조, 교황청과 협상을 벌였고, 성 요한 기사단과의 협상에서는 기사단 측의 요구에 따라 거액의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젬의 아들 오우즈와 젬파 고관들을 숙청했고[36], 1495년 젬이 병사한 후 그의 생모, 아내, 딸을 보호했지만, 남자 후손들은 로도스 섬에 남아 있던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교수형에 처해졌다.[37].

1495년 젬이 죽을 때까지, 오스만 제국과 망명 중인 젬을 보호한 마무룩 왕조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마무룩 왕조와는 젬의 처우 외에도, 메카 수로의 수리 요청을 거절당한 것과, 인도에서 온 선물을 가진 사절이 마무룩 왕조의 영토를 통과할 때 지다의 태수에게 물건을 빼앗긴 것으로 관계가 악화되었고,[38], 바예지드는 두르카딜 베일리크의 알라 아드다우라가 마무룩 왕조의 술탄 아슈라프 카이트바이와 대립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1485년 아나톨리아 남부에 파병하여 아드다우라를 도왔다. 오스만-두르카딜 연합군은 말라티야 근처에서 마무룩 왕조군과 싸웠지만 패배하고, 오히려 아다나, 타르수스 내의 요새를 빼앗겼다. 전쟁 후 마무룩 왕조로부터 평화가 제안되고, 화해를 권하는 칼리프의 친서와 함께 빼앗긴 선물도 전달되었지만, 바예지드는 이 제안에 대해 진군이라는 답을 했다. 오스만 군은 우즈바크 빈 타타흐가 이끄는 마무룩 왕조군에게 세 번 패배하는 불리한 상황에 있었지만, 마무룩 왕조도 장기간의 전쟁으로 재정이 악화되었고, 1491년 하프스 왕조의 중재로 화의가 체결되었다[39].

2. 4. 맘루크 왕조와의 전쟁 (1485년 ~ 1491년)

1485년, 바예지드 2세는 두르카딜 베일리크의 알라 아드다우라가 맘루크 왕조의 술탄 아슈라프 카이트바이와 대립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아드다우라를 돕기 위해 아나톨리아 남부에 군대를 파견했다. 오스만-두르카딜 연합군은 말라티야 근처에서 맘루크 왕조군과 싸웠지만 패배했고, 오히려 아다나, 타르수스 내의 요새를 빼앗겼다.[39]

전쟁 후 맘루크 왕조는 평화를 제안했고, 화해를 권하는 칼리프의 친서와 함께 빼앗긴 선물도 전달했지만, 바예지드 2세는 진군으로 답했다. 오스만 군은 우즈바크 빈 타타흐가 이끄는 맘루크 왕조군에게 세 번 패배하는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하지만 맘루크 왕조 역시 장기간의 전쟁으로 재정이 악화되었고, 결국 1491년 하프스 왕조의 중재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39]

2. 5. 오스만 해군의 발전

바예지드 2세는 오스만 육군과 해군을 개혁했다.[73] 14세기 말부터 화기를 도입했던 오스만 제국은 바예지드 2세 시기에 이르러 야전에서도 화기를 사용하게끔 하는 군제 개혁이 이루어졌다.[72] 화기 사용은 훗날 셀림 1세가 이집트의 맘루크조나 이란의 이스마일에 대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다.[73]

바예지드 2세는 대항해 시대에 접어든 유럽 각국과 대치하는 동시에 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들을 정복하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베네치아에 대항할 전력을 축적했다.[33] 1495년 바르바리아 해적 등 지중해와 에게 해에서 활개 치던 무슬림 해적을 오스만 해군에 편입시켜 그들의 지식과 경험을 군 내부에 도입했다.[41] 이때 오스만 해군에 편입된 대표적인 해적으로 케말 레이스, 피리 레이스 등이 있다. 또한 서구에서 적극적으로 조선 기술을 도입하여 신형 함선을 설계했다.[41]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에서 유래하는 해상 용어는 거의 그대로 오스만어로 받아들여져 해군에서 사용되었다.[42] 바예지드 2세 시대에 도입된 무기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기독교도 기술자 야니가 베네치아의 기술을 도입하여 설계한 2척의 대형 함선이 있으며,[43] 길이 32m, 너비 13.7m의 크기를 자랑했다.[43]

해군 강화 중에는 베네치아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꾸준한 협상을 진행했지만,[41] 1499년 바예지드는 베네치아 영토인 레판토로 친정했고, 별동대로 다우드 파샤가 이끄는 함대가 아드리아해에서 출발했는데, 함대에는 2척의 대형 함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같은 해 8월 12일 존키오(존키오) 성 근해 해전에서 오스만 해군의 갤리선이 베네치아의 갈레아스선을 격파하고, 야니의 함선은 포위 공격을 감행한 베네치아 함선을 격침시키는 승리를 거두었으며, 기독교도들은 이 전투를 「존키오의 비참한 전투」( :en:Battle of Zonchio)라고 기록했다.[44] 다우드 파샤의 함대는 바예지드의 본대와 합류하여 8월 28일 레판토를 오스만의 지배하에 두었다.

1500년에 모레아 반도에 있는 베네치아 영토인 모돈(:en:Methoni, Messenia), 코로니(:en:Koroni), 나바리노(:en:Pylos)를 획득했다.

2. 6. 사파비 왕조와의 관계

사파비 왕조는 16세기 초 이란에서 흥성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는데, 초기에는 오스만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였다.[40] 그러나 곧 사파비 왕조는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진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스마일 1세는 아나톨리아 공격의 포석으로 신하들에게 아나톨리아 전역에서 시아파 포교를 지시했다.[46] 터키어로 포교 시를 짓고 선교사(할리페)를 통해 아나톨리아에 시를 전파했다.[47] 바예지드는 처음에는 사파비 왕조의 포교 활동을 방관했으며,[48] 고관들도 사파비 왕조의 동향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49] 그러나 1511년 샤 쿨르(사파비 왕조 샤의 노예)를 자칭하는 자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바예지드 통치하의 오스만 제국에서 확립되어 가던 수니파에 불만을 품거나, 엄격한 이슬람 교리에 불만을 가진 민중들이 반란에 참여하여,[46] 그 군세는 10000명에 달했다.[50]

2. 7. 샤 쿨루의 반란 (1511년)

16세기이란에서 흥성한 사파비 왕조는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으며, 초기에는 오스만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였다.[40] 그러나 곧 사파비 왕조는 아나톨리아 지역으로의 진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사파비 왕조의 이스마일 1세는 아나톨리아 공격의 포석으로, 신하들에게 아나톨리아 전역에서의 시아파 포교를 지시했다.[46] 이스마일 1세는 직접 터키어로 포교 시를 짓고,[47] 선교사를 통해 아나톨리아에 시를 전파했다. 바예지드는 처음에는 사파비 왕조의 포교 활동을 방관하고 있었으며,[48] 1511년에 샤 쿨루("사파비 왕조의 샤의 노예"를 의미함)를 자칭하는 자가 반란을 일으키자 상황이 급변했다. 바예지드 통치하의 오스만 제국에서 확립되어 가고 있는 수니파에 불만을 품거나, 그가 추진하는 엄격한 이슬람 교리에 불만을 가진 민중이 반란에 참여했고,[46] 그 군세는 10000명에 달했다.[50]

간신히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하둠 알리 파샤, 사령관 하이달르 파샤 등 주요 지휘관들이 전사하여 지휘관 부족으로 반란을 완전히 진압할 수 없었고, 반란군 대부분은 사파비 왕조로 망명했다.[49]

2. 8. 폐위와 죽음

1509년 9월 14일,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지진으로 도시가 폐허가 되었고,[13][14] 바예지드 2세의 아들들인 셀림 1세와 아흐메트 사이에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다. 아흐메트는 카라만을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지만, 셀림은 트라키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바예지드에게 패배하고 크림반도로 도망쳤다. 바예지드 2세는 아흐메트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아들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입성을 막았다.

크림반도에서 돌아온 셀림은 예니체리의 지원을 받아 1512년 4월 25일 아버지를 퇴위시켰다. 바예지드는 고향인 디메토카로 은퇴했지만, 1512년 5월 26일 하브사에서 퇴위 한 달 만에 사망했다. 그는 이스탄불의 바예지드 모스크 옆에 묻혔다. 셀림에 의한 독살설이 유력하다.[55]

3. 정책

바예지드 2세는 아버지 메흐메트 2세와 마찬가지로 서양과 동양 문화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다른 술탄들과는 달리 내정을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 "정의로운 자"라는 칭호를 얻었다.[9]

바예지드 2세는 베네치아 공화국모레아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 여러 차례 원정을 수행했는데, 이 지역을 동부 지중해에서 오스만 해군력의 미래를 위한 핵심 지역으로 보았다. 1497년에는 폴란드와 전쟁을 벌여 몰다비아 원정에서 8만 명에 달하는 폴란드군을 크게 무찔렀다. 1499년부터 1503년까지 이어진 전쟁은 1501년 바예지드 2세가 펠로폰네소스 전역을 장악하면서 끝났다.

바예지드 2세의 재위 기간 동안 키질바시의 반란과 같은 동쪽의 반란이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이란의 이스마일 1세는 오스만 국가의 권위를 약화시키기 위해 시아파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아나톨리아의 오스만 당국은 심각한 위협을 받았으며, 바예지드 2세의 베지르 하디므 알리 파샤가 샤쿨루 반란과의 전투에서 사망하기도 했다. 하디므 알리 파샤의 죽음으로 권력 공백이 발생했고, 많은 정치인들이 카라뵈쥐 파샤에게 비밀리에 충성을 맹세했다.[10]

1492년 7월, 스페인은 스페인 종교 재판의 일환으로 유대인과 무슬림 인구를 추방했다. 바예지드 2세는 케말 레이스 제독에게 오스만 해군을 스페인으로 파견하여 그들을 안전하게 오스만 영토로 대피시키도록 명령했다. 그는 제국 전역에 난민들을 환영해야 한다는 선포를 발표하고,[11] 난민들에게 오스만 제국에 정착하고 오스만 시민이 될 수 있도록 허가했다. 그는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1세를 조롱하며 "페르디난드를 현명한 통치자라고 부르는 당신들을 보니 놀랍군요. 그는 자신의 나라를 빈곤하게 만들고 나의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었으니!"라고 말했다.[12] 바예지드는 유럽 속주 총독들에게 피르만을 발표하여 스페인 난민들을 친절하게 환영하라고 명령했으며,[12] 유대인들을 혹독하게 다루거나 제국으로의 입국을 거부하는 자들을 사형에 처하겠다고 위협했다. 모세 캅살리는 망명자들을 돕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여러 유대인 공동체를 순방하며 부유층에게 세금을 부과하여 박해의 희생자들을 구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알안달루스의 무슬림과 유대인들은 새로운 아이디어, 방법, 장인 기술을 도입하여 오스만 제국의 부상에 크게 기여했다. 1493년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에 최초의 인쇄소가 세파르딤 유대인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바예지드 치하에서 유대인들은 탈무드 학자이자 과학자인 모르데카이 콤티노, 천문학자이자 시인인 솔로몬 벤 엘리야 샤르비트 하-자하브, 샤바트 벤 말키엘 코헨, 그리고 전례 시인 메나헴 타마르 등의 학자들이 있었던 문화적 번영기를 누렸다.

성 요한 기사단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젬이 유럽 여러 국가에 13년 동안 인질로 머물렀던 점과, 아버지 시대의 적극적인 영토 확장으로 인한 국가 재정 고갈로 인해 바예지드 2세 시대에는 전쟁이 전대에 비해 크게 줄었다.[37] 아버지 시대에 확장된 영토의 기반을 다지는 것이 주요 정책이 되었다. 국고를 재건하기 위해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고, 메흐메트 2세가 도입한 신세를 폐지하여 사회 불만을 억제하려 했다. 또한 레콩키스타 이후 박해로 고국을 떠난 유대인들 중 일부를 이스탄불로 피난시켜 기술자로 받아들였다.[56][57][58]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바예지드와 교류하려 했던 유럽 기술자 중 저명한 인물이다. 다 빈치는 골든혼, 보스포루스 해협에 다리를 놓는 것을 제안했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59]

메흐메트 2세 시대에 건설된 마드라사에서 배운 이슬람 법학자(울레마)의 영향력이 증가하여, 그들은 국정과 입법에서 힘을 가지게 되었다.[62] 바예지드 시대에 편찬된 법전은 "입법자" 쉴레이만 1세 시대의 법전의 기초가 되었고,[60] 대표적인 법령으로 티마르 제도를 정비하기 위한 문서가 있다.[61]

4. 평가

바예지드 2세는 15세기 후반 사마르칸트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와 메흐메트 2세와 바예지드 2세의 궁정에서 일했던 서기 아브뒤르레작 바흐쉬(Abdürrezzak Bahşı)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는 차가타이어와 구 위구르 문자를 사용하여 가젤(ghazal)을 썼다.[15][16]

خۇش يۇرسەم بولور مەن خۇش يۇرسەم بولور مەن|후쉬 유르셈 볼루르 멘 후쉬 유르셈 볼루르 멘chg

قۇتۇلۇبان ھەر قايسى قورقۇنچ ۅغۇررىدىن|쿠툴루반 헤르 카이시 코르쿤츠 오구르딘chg

شاھىم سېنىڭ ʿعدلڭنىڭ داڭقى ېلگە كەتتى|샤힘 세닝 아들렝닝 당키 엘게 케티chg

چىن ۅ ختن ۅ ماچىنغه ۅ ماچىنغه|친 오 호탄 오 마친게 오 마친게chg

شكراللٰه دۇركيم باردۇر سېنىڭدەك شاھىم|슈크랄라 두르킴 바르두르 세닝데크 샤힘chg

سلطان بايزيد خان ئولۇردى تخت اۇزە|술탄 바예지드 칸 올루르디 타흐트 우제chg

بۇ مُلك انڭا ازلدىن ېدى ېدى|부 물크 앙아 아잘딘 에디 에디chg

كيم ديسە مُلكىنى مُنكر بولۇبان|킴 디세 물키니 문케르 볼루반chg

بولغاي ۅ باشى ۅ دارغه ۅ دارغه|볼가이 오 바쉬 오 다르게 오 다르게chg

كۇلەردۇر يۇزى مخلصڭ بحشى ٴى وار|쿨레르두르 유치 무흘리스렝 바흐쉬 이 바르chg

كۇفّار يولى بيلە يۇرىسە یرى تامۇغ|쿠파르 يول리 빌레 유르세 예리 타무그chg

바예지드 2세는 토프카프 궁전의 사서 알 아투피(al-ʿAtufi)에게 등록부 준비를 명했고,[17] 도서관의 다양한 소장품은 백과사전적인 범위의 세계주의를 반영한다.[18]

바예지드 2세의 묘, 이스탄불

4. 1. 긍정적 평가

바예지드 2세는 아버지 메흐메트 2세처럼 서양과 동양 문화의 후원자였다. 많은 술탄과 달리 내정을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해 노력하여 "정의로운 자"라는 칭호를 얻었다.[9] 15세기 후반 사마르칸트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와 메흐메트 2세와 바예지드 2세의 궁정에서 일했던 서기 아브뒤르레작 바흐쉬(Abdürrezzak Bahşı)는 차가타이어와 구 위구르 문자를 사용하여 바예지드를 칭찬하는 가젤(ghazal)을 썼다.[15][16]

바예지드 2세는 토프카프 궁전의 사서 알 아투피(al-ʿAtufi)에게 등록부 준비를 명했고,[17] 도서관의 다양한 소장품은 백과사전적인 범위의 세계주의를 반영한다.[18]

황태자 시절과 즉위 초기, 바예지드 2세는 향락과 미식에 빠졌고,[49] 마약을 즐겼다는 이야기도 있다.[62] 하지만 쾌락에 대한 열정은 종교에도 향했다. 독실한 무슬림이었던 그는 우상숭배를 혐오했고,[64] 궁궐에 있던 그림들을 매각하거나 파기하여 젠틸레 벨리니 등이 이스탄불에서 제작한 많은 작품들이 사라졌다. 바예지드는 궁정에서 이슬람 신비주의(수피즘)와 운문에 심취했고,[65] 학자 보호에도 열심이었다.[65] 그가 보호한 인물로는 아라비아 서예의 6가지 기본적인 서체를 독자적인 기법으로 재해석한 서예가 셰프 함두둘라가 있다.[66]

4. 2. 부정적 평가

바예지드 2세는 황태자 시절과 즉위 초기에 향락과 미식에 빠져 있었고,[49] 마약을 즐겼다는 이야기도 있다.[62] 독실한 무슬림이었던 그는 우상숭배를 혐오했고,[64] 궁궐에 있던 그림들을 매각하거나 파기하여 젠틸레 벨리니 등이 이스탄불에서 제작한 많은 작품들이 사라졌다. 오스만 제국 내 이슬람 학문 연구 수준은 향상되었지만, 동시에 이슬람 법학이 권위화됨에 따라 국내 규정이 샤리아(이슬람 법)의 제약을 받게 되었다.[67] 모든 백성이 바예지드와 이슬람 학자들이 추진하는 교리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고, 샤 쿨의 반란에 참여한 민중들 중에는 정부의 종교 정책에 부정적인 사람들도 많았다.[46]

5. 가족 관계

배우자자녀
쉬린 하툰 (Şirin Hatun)
퓔뉘샤 하툰 (Hüsnüşah Hatun)
뷸뷸 하툰 (Bülbül Hatun)
니가르 하툰 (Nigar Hatun)
귤루흐 하툰 (Gülruh Hatun)
아이셰 귤바하르 하툰 (Ayşe Gülbahar Hatun)
무흐테레메 페라흐샤드 하툰 (Muhtereme Ferahşad Hatun)
아이셰 하툰
귤펨 하툰
뮤흐르나즈 하툰
불명


6. 연표

7. 대중문화 속 바예지드 2세


  • 역사 소설 ''술탄의 선장(The Sultan's Helmsman)''에는 바예지드 2세의 정치적 수완, 관용, 지적 능력이 묘사되어 있다.[1]
  • 비디오 게임 ''어쌔신 크리드: 레벨레이션''에서는 바예지드 2세와 그의 아들 셀림과의 갈등이 주요 부차적 줄거리로 등장한다.[2] 게임에서 바예지드가 콘스탄티노플에 없는 동안 비잔티움인들은 몰래 도시로 돌아와 제국을 부흥시키려 한다.[2] 게임 후반부에 바예지드는 아들 셀림에게 왕위를 넘겨준다.[2]
  • ''스타즈'' 시리즈 ''다 빈치의 악마''에서는 아킨 가지(Akin Gazi)가 술탄이 되기 전 바예지드 2세를 연기했다.[3] 그는 시스투스 4세에게 조롱당하고 굴욕을 당하며, 이는 나중에 오트란토 전투의 구실이 된다.[3]
  • 다큐멘터리 시리즈 ''제국의 부상: 오스만''에서는 에디즈 차간 차키로그루(Ediz Cagan Cakiroglu)가 술탄이 되기 전 바예지드 2세를 연기했다.[4] 그는 2시즌에 아버지 메흐메트 2세에게 영감을 받은 어린 왕자로 등장하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함께 전투에 참여하고 싶어 한다.[4]

참조

[1] 서적 The Last Muslim Conquest: The Ottoman Empire and Its Wars in Europe
[2] 서적 Bu mülkün kadın sultanları: Vâlide sultanlar, hâtunlar, hasekiler, kadınefendiler, sultanefendiler https://books.google[...] Oğlak publications
[3] 서적 The Imperial Harem: Women and Sovereignty in the Ottoman Empire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4] 서적 The Imperial Harem: Women and Sovereignty in the Ottoman Empire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5] 서적 The Ottoman Historical Monumental Inscriptions in Edirne https://books.google[...] Brill
[6] 서적 Bu mülkün kadın sultanları: Vâlide sultanlar, hâtunlar, hasekiler, kadınefendiler, sultanefendiler https://books.google[...] Oğlak publications
[7] 이미지 Wedding portrait http://nauplion.net/[...]
[8] 웹사이트 Bayezid II – Biyografi https://gulhansozluk[...] 2022-11-27
[9] 웹사이트 Sultan Bajazid's (i.e., Beyazit's) Mosque, Constantinople, Turkey http://www.wdl.org/e[...] 1890-01-01
[10] 서적 The Ottoman Empire: The History of the Turkish Empire that Lasted Over 600 Years https://books.google[...] Creek Ridge Publishing
[11] 서적 A History of the Muslim World Since 1260: The Making of a Global Community Prentice Hall
[12] 서적 The Jewish Encyclopedia: a descriptive record of the history, religion, literature, and customs of the Jewish people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present day Funk and Wagnalls
[13] 백과사전 The Encyclopædia Britannica
[14] 웹사이트 Britannica, Istanbul http://concise.brita[...]
[15] 서적 Turks: A Journey of a Thousand Years, 600–1600
[16] 서적 Archivum Ottomanicum 20 (2002)
[17] 서적 Treasures of Knowledge: an Inventory of the Ottoman Palace Library (1502/3–1503/4) Brill
[18] 논문 Review of Treasures of Knowledge: an Inventory of the Ottoman Palace Library (1502/3–1503/4)
[19] 서적 Bayezid II in The Structure of the Ottoman Dynasty
[20] 논문 Stjepan/Ahmedpaša Hercegović (1456? – 1517.) u svjetlu dubrovačkih, talijanskih i osmanskih izvora https://hrcak.srce.h[...] 2017-10-05
[21] 서적 XV–XVI. asırlarda Edirne ve Paşa Livası: vakıflar, mülkler, mukataalar Üçler Basımevi
[22] 서적 Studies on the Ottoman Architecture of the Balkans Variorum Publishing Group
[23] 서적 オスマン帝国 イスラム世界の「柔らかい専制」
[24] 서적 メフメト2世 ほるぷ出版
[25] 서적 成熟のイスラーム社会
[26] 서적 オスマン帝国, 成熟のイスラーム社会
[27] 서적 メフメト2世 トルコの征服王
[28] 서적 メフメト2世 トルコの征服王
[29] 서적 メフメト2世 トルコの征服王
[30] 서적 オスマン帝国500年の平和
[31] 서적 メフメト2世 トルコの征服王
[32] 서적 メフメト2世 トルコの征服王
[33] 서적 オスマン帝国500年の平和
[34] 서적 オスマン帝国の時代
[35] 서적 トルコ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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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서적 エジプト マムルーク王朝
[39] 서적 トルコ 2
[40] 서적 改訳 トルコ史
[41] 간행물 15・16世紀オスマン海軍による火器技術の受容
[42] 간행물 15・16世紀オスマン海軍による火器技術の受容
[43] 서적 バルバリア海賊盛衰記 イスラム対ヨーロッパ大海戦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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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서적 トルコ 2
[46] 서적 成熟のイスラーム社会
[47] 서적 オスマン帝国
[48] 서적 オスマン帝国500年の平和
[49] 서적 トルコ 2
[50] 서적 成熟のイスラーム社会
[51] 서적 改訳 トルコ史
[52] 서적 トルコ 2
[53] 서적 オスマン帝国500年の平和
[53] 서적 改訳 トルコ史
[54] 서적 オスマン帝国500年の平和
[55] 서적 オスマン帝国
[55] 서적 成熟のイスラーム社会
[55] 서적 オスマン帝国500年の平和
[56] 간행물 15・16世紀オスマン海軍による火器技術の受容
[57] 서적 オスマン帝国500年の平和
[58] 간행물 15・16世紀オスマン海軍による火器技術の受容
[59] 서적 成熟のイスラーム社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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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서적 オスマン帝国500年の平和
[62] 서적 成熟のイスラーム社会
[63] 서적 オスマン帝国
[64] 서적 メフメト2世 トルコの征服王
[65] 서적 オスマン帝国500年の平和
[66] 서적 オスマン帝国の栄光
[67] 서적 オスマン帝国
[68] 서적 イスタンブール
[69] 서적 イスタンブール
[70] 서적 イスタンブール
[71] 서적 イスタンブール
[72] 서적 Islamic Gunpowder Empires: Ottomans, Safavids, and Mughals Westview Press
[73] 서적 Ottoman empire: the clasical age 1300 - 1600 Phoenix Press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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