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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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와씨는 일본의 씨족으로, 스와 대사 상사의 최고 제사장인 오호리(大祝)를 배출한 가문이다. 스와씨의 기원은 여러 설이 존재하며, 오오쿠니누시의 후예인 미와씨와 동족이라는 설, 아리카즈의 후예라는 설 등이 있다. 중세 전승에 따르면 스와 묘진이 아리카즈를 신격화했다. 스와씨는 가마쿠라 시대에 무사 가문으로 성장하여 막부의 가신으로 활약했으며, 센고쿠 시대에는 다케다 씨족과 대립했다. 에도 시대에는 스와 번의 다이묘 가문과 오호리 가문으로 분리되었으며, 메이지 시대에는 자작 작위를 받았다. 2002년 마지막 오호리가 사망하면서 오호리 가문의 대는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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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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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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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한국어) | 스와 씨 |
성씨 (일본어) | 諏訪氏 |
성씨 (로마자 표기) | Suwa-shi |
가문 정보 | |
본거지 | 시나노국 |
가문의 기원 (전설) | 다케미나카타 |
가문의 기원 (역사) | 불명 |
창립 연도 | 불명 |
해체 연도 | 1871년 (한 제도 및 세습 신관직 폐지) |
주요 봉행 | 상사 스와 신사의 고위 제사장 (오호리) 다카시마 번의 다이묘 |
모가 | 가나사시 씨? 오미와 씨? |
분가 | |
분가 | 스와 씨 (諏方氏) (소멸) 다카토오 씨 호시나 씨 지노 씨 |
2. 기원
스와씨(諏訪氏)는 대대로 스와 대사 상사(上社)의 '''대축(大祝)'''을 맡아온 일족이다.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오오카미씨(大神氏)의 동족 또는 카네사시씨(金刺部氏)의 지류로도 생각된다.
가전(家伝)에 따르면, 스와 대사의 제신 타케미나카타노카미(建御名方神) 혹은 그 신에게 선택된 동남(童男)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후세에는 간무 천황을 시조로 하거나 세이와 겐지(清和源氏)의 미나모토노 미츠요시(源満快)를 시조로 칭하기도 했다. 하지만, 황윤이나 섭관가(摂関家) 등 공경(公卿)의 후예를 칭하는 무가(武家)가 많은 가운데, 제신의 혈통을 칭하며 존귀한 혈통으로 여겨진 특이한 가계라고 할 수 있다.
상사 대축을 맡았던 스와씨(진씨)의 유래에 대해서는, 오오쿠니누시(大国主神)의 후예로 여겨지는 미와씨와 동족이라는 설과, 킨메이 천황조나 스이코조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 초기에 시나노국 지방 정치에서 활동을 했던 '''아리카즈'''(有員)의 후예라는 설이 있다.
중세 전승에 따르면, 스와 묘진(타케미나카타노 카미)이 8세의 어린아이에게 어의를 입혀 자신의 "어정체"(일종의 몸)로 신격화시켰다고 한다. 스와묘진화사(1356년)와 신씨 계도(마에다씨 본)(무로마치 시대 초기)에 따르면, 이 어린아이는 '''아리카즈'''라는 이름의 인물이다.
아리카즈를 조상으로 하는 설 외에도, 오오미와씨를 출자한다는 설도 있다.[54] 시오지리시 시바미야에서 미카와국·토토우미국에서 보이는 삼원식 동탁의 출토가 있어[55], 덴류강 경유로 사람의 이동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축(호리)"이라는 신관의 호칭이나 "미와"라는 씨족명을 가지고, 본전을 갖지 않는 신사, 뱀 신앙의 존재 등 오오미와씨나 미와산(오모노누시노 카미) 신앙과의 공통점도 지적되고 있다.[56] 실제로 1865년(겐지 2년)의 『스와 신사 기동소 재건 취지서』에는 당시 대축인 '''스와 요시타케'''가 "스와대축대삼륜아소미 요시타케"라고 칭했다.[57]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어느 경우든 진씨가 되는 씨족은 시모이나 지방에서 스와로 진입해 온 것으로 생각된다. 고분 시대 후기(6세기)에 들어가면 시모이나에는 많은 원통형 분구가 세워졌고, 이것들은 말 관련 부장품이 많았다. 6세기 후반에 스와 지방에 출현하여 재지형 주구묘(소위 후네고분형 고분)을 대신하는 고분에서도 마구의 출토가 많기 때문에, 이나 계곡에서 스와로의 말 사육 집단의 이동이 있었다고 추측된다.
『일본 서기』에서 지토조(7세기 후반)에는 이미 스와의 신이 조정으로부터 두터운 숭경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축은 한때 상사 전궁 경내에 있는 '고도(神殿)'라고 불리는 관에 살았다. 그곳은 '고바라(神原)'라고 존칭되었으며, 대대로 대축 즉위식 외에도 많은 제사가 거행되었다. 대축은 제사와 정치를 모두 관장했기 때문에 이곳은 스와 지방의 정치 중심지이기도 했다.
무로마치 시대에 스와 씨가 총령가와 대축 가문으로 나뉘었을 때, 정치 중심지는 총령가 거성인 '''우에하라성'''으로 옮겨졌다. 대축의 저택도 후에 상사 본궁 근처 미야타와타리(현 스와시 나카스 진구지)로 이전했지만, 제사는 계속 전궁에서 거행되었다.
에도 시대에 들어가면서 번주 가문 거처인 '''다카시마성'''이 스와 번(다카시마 번) 정청이 되었다.
2. 1. 전설
스와 대사 상사(上社 ''카미샤'')의 최고 제사장 가문인 스와씨는 전통적으로 신사의 신인 타케미나카타(스와 다이묘진으로도 알려짐)의 후손으로 여겨졌다.[2] 그러나 이 가문의 실제 역사적 기원은 불분명하다.''고지키''와 ''센다이 구지 혼기''에서 타케미나카타는 오쿠니누시의 아들로 묘사되며, 아마테라스 여신을 대신하여 아버지의 땅을 요구하기 위해 천국의 신들이 보낸 타케미카즈치에게 패배한 후 스와로 도망쳤다.[3][4][5][6] 그러나 다른 신화(대부분 중세 시대의 유래)는 스와 신을 다른 관점에서 묘사한다. 한 이야기에서 스와 다이묘진은 상사의 제사장 가문 중 하나인 모리야(守矢氏) 가문의 신화적 조상인 모리야로부터 스와의 지배권을 빼앗은 침입자로 묘사된다.[7][8][9] 또 다른 신화에서는 이 신이 여덟 살 소년을 선택하여 자신의 옷을 입힘으로써 그의 사제(祝, ''호리''; 역사적 표기법: ''하후리'')가 되게 하고 살아있는 화신이 되게 했다고 한다. 이 소년은 결국 스와 가문의 창시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10][11][12][13][14]

중세 전통에서는 보통 헤이안 시대 초, 간무 천황(781-806 재위), 헤이제이 천황(806-809), 사가 천황(809-823)의 통치 기간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진 아리카즈(有員)라는 반 전설적인 인물이 이 아이였다고 여겼다.[15][16][11][17] 예를 들어, ''스와 다이묘진 에코토바''(1356)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신의 현현의 시작에서 그는 자신의 옷을 벗어 여덟 살 소년에게 입히고 '대사'(''오호리'')로 불렀습니다. 신은 "나는 몸이 없으니 이 사제(''호리'')를 내 몸으로 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
> 이 [소년]은 미와(진) 가문의 창시 조상인 신성한 옷(御衣祝 ''미소기호리'')의 사제인 아리카즈(有員)입니다.
그러나 1884년 ''오호리''의 거주지에서 발견된 스와 가문의 계보 기록에 첨부된 짧은 텍스트[18]는 아리카즈를 시나노 국의 ''쿠니노미야츠코''(지방 장관)의 아들인 쿠마코(神子 or 熊子)의 후손으로 묘사하며, 그는 요메이 천황(585-587) 재위 기간에 상사를 세웠다고 주장한다.[19]
> 쿠마코가 여덟 살이었을 때 존경받는 신이 나타나 그의 옷을 벗어 쿠마코에게 입혔습니다. "나는 몸이 없으니 너를 내 몸으로 삼겠다"고 선언한 후 그는 사라졌습니다. 이 [쿠마코]는 미와(진) 가문의 아리카즈, 즉 ''미소기호리''의 조상입니다. 요메이 천황 2년에 쿠마코는 호수의 남쪽 산기슭에 성소를 지었습니다.
큐슈의 아소 신사의 아소 가문(阿蘇氏)의 또 다른 계보 기록(1956년 발견)은 유사하게 오토에이(乙頴)를 '쿠마코'라는 별칭으로 지정하여 "스와의 위대한 신의 ''오호리''"(諏訪大神大祝)로 식별하고 위에 언급된 것과 동일한 전설을 이야기한다.[20] 그러나 최근 이 두 계보에 대한 재평가는 역사적 자료로서의 진정성과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다.[21][22][23][24][25][26]
이 후보들과 별도로, 이 가문은 또한 세이와 겐지에서 미나모토노 쓰네모토의 아들 중 한 명인 미나모토노 미쓰야스을 통해 파생되었다고 주장되어 왔다.[27][28]
역사학자 다나카 다쿠가 1956년(쇼와 31년)에 발견한 『아소씨 약계도(이본 아소씨 계도)』와 1884년 (메이지 17년)에 발견된 『진씨 계도(오오하타케 본)』에는 시나노 국조 (조부•카미야이미노미코토) 가문 출신의 진자|쿠마코일본어(「쿠마코」「쿠마코」라고도 표기된다.) 또는 오토에이|오토에이, 오토카히일본어라는 사람이 요메이 천황 2년 (587년)에 스와 호의 남쪽에 사단을 세워 초대 오오하타케가 되었다고 하며, 유원이 그 자손이라고 한다.
『아소씨 약계도』와 『오오하타케 본 진씨 계도』를 바탕으로 카나이 노리미 등은 진씨를 카네사시씨의 분가로 하는 설을 주장했고, 이것이 한때 주류 설이 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 이것에 대한 반론이 나왔고, 그 위에 양 계도를 위서로 보는 견해가 나왔다.
테라다 시즈코・와시오 테츠타 (2010년 (헤이세이 22년))는 이 설에 대해
- 국조라는 정치적 지배자인 카네사시씨가 「게샤」라는 일견 종속적인 위치에 있다고 생각되는 사단의 오오하타케가 되어 있는 것
- 조사에 「진씨와 모리야씨의 이중 체제」라는 복잡한 구조가 있는 것
- 본가인 카네사시씨가 맡고 있는 게샤가 신계 승진에 있어서 자주 조사의 뒤를 쫓는 것
- 조사와 게샤의 신앙 내용이 다른 것(조사는 미샤구지 신앙과 수렵을 중심으로 하고, 게샤는 물의 영혼 신앙과 벼농사를 중심으로 함)
을 지적하고, 「이러한 요소를 무시하고 하나의 「계도」에 의해 「카네사시씨 창시」 설을 주장하는 것은 매우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라는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또한, 『아소씨 약계도』와 『오오하타케 본 진씨 계도』를 발견한 다나카 다쿠 자신도, 「이들 여러 씨족의 계보의 결합에 의해 구성된 광범위한 동족적 계보 관계는 물론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그 결합에 사용한 하나하나의 씨족의 계도의 기재도, 역시 거기에 기재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는 이것을 경솔하게 신용할 수는 없다」라고 말하며, 이것을 부정하고 있다.
무라사키 마치코는, 『아소씨 약계도』와 『오오하타케 본 진씨 계도』는 에도 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초기에 걸쳐, 이이다 타케고가 문안을 만들고, 나카타 노리부미가 계도로 한 것을 상정하고 있으며, 신빙성에 의문을 품고 있다.
사토 유이치도, 이상의 다나카나 무라사키의 연구로부터, 「그 기재와 사실과의 관계에 신중한 태도를 취해야 하며, 현 단계에서는 본 계도를 바탕으로 한 고찰을 하는 것은 어렵다」라고 말하고 있다.
마에다 료타로는, 『아소씨 약계도』가
- 교토의 스와씨가 쇼토쿠 태자 신앙을 받아들여 창작한 계도(정미의 난의 해(요메이 천황 2년)에 타케미나카타노카미의 후손인 유원이 스와 대사를 모셨다고 하는 마에다 본 「진씨 계도」)
- 스와의 스와씨가 계승하고 있던 전설(헤이조 천황기(다이도 원년, 806년)에 진무 천황의 후손인 유원이 활약했다고 하는 전승(『카네사시씨 약계도』나 『스와 묘진 심비 어본사 대사』 등)
- 에도 시대 이후에 모토오리 노리나가 등에 의해 국학자나 신관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고지키』
- 「에도 시대에 창작된 『선대구사본기대성경』
에 영향을 받아 성립했다고 밝혔다.
이상과 같이, 현재의 학계에서는 『아소씨 약계도』와 『오오하타케 본 진씨 계도』를 부정하는 학자가 많으며, 「이들 계도가 고대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고(후략)」, 「고대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힘을 갖고 있지 않다」라고 증명되어 있다.
『신씨 계도(마에다 가 본)』와 이것과 거의 비슷한 『신가 계도(치노 가 본)』(『스와 사료 총서 권 28』에 수록)에서는 신씨의 시조가 '''유원'''으로 되어 있다. 유원에서 그 14대 손인 대축(大祝)・요리노부까지의 계도는 헤이안 시대에 분실되어 불명으로 남아 있다.
> 아, 스와 대명신의 수적의 일, 이설이 있다. 혹은 타국 응생의 영, 혹은 아침 근본의 신, 구기의 이단, 범려 측량하기 어렵다. 이에 『선대구사본기』에 이르기를, 스사노오노 미코토의 손자・오호쿠니누시노카미의 둘째 아들, 타케미나카타노카미이다. 신대의 의는 유묘하여 이를 기록하기 어렵다.(중략)
별지 있으니, 신슈 스와군에 신행하는 것은, 인황 32대・요메이 천황의 어년이다. 때에 여덟 살의 동자가 있어, 〔후에 유원으로 자함〕 명신에 수종한다. 모리야 대신과 다투어, 모리야 산에 이르러 어합전이 있었다. 동자 신병을 거느리고 모리야를 쫓아 떨어뜨린다. 곧 저 산록에 사단을 구성하여, 아 신 어의를 동자에게 벗어 입히고, "나에게 몸이 없으니, 축으로 몸을 삼는다"라고 신칙이 있어, 어신을 숨기신다. 즉 저 동자를 신체로 하여 미소기하후리|미소기하후리일본어라고 이름한다. 신씨의 시조이다. 명신은 후겐, 동자는 몬주이다.(『신씨 계도』 서문, 원 한문)
『마에다가 신씨 계도』와 『치노가 신가 계도』에서
미소기하후리・유원 (스와 대축 원조) |
14대략 (타메나카의 시대에 분실) |
요리노부 (미노 곤노카미) |
대축・타메나카 (신다) (대축의 군외 불출의 율을 깨고 신벌을 받다) |
『신씨 계도(마에다 가문본)』와 『신가 계도(치노 가문본)』에 따르면, 진가와 나카(스와 타메나카)는 고3년의 역에 참전할 때, 신씨 가문에 전해지는 계도를 아내의 아버지인 미나모토노 타메키미에게 맡겼으나, 이를 분실하여 아리토와 요리노부(타메나카의 조부) 사이의 14대가 불분명하게 되었다.
타케미나카타부터 有員까지의 계보 또한 불명확하다고 여겨진다.
2. 2. 여러 학설
스와 대사 상사(上社)의 최고 제사장 가문인 스와씨는 타케미나카타(스와 다이묘진)의 후손으로 여겨졌지만, 그 기원은 불분명하다.[2]''고지키''와 ''센다이 구지 혼기''에서는 타케미나카타가 오쿠니누시의 아들이며, 아마테라스의 명을 받은 타케미카즈치에게 패배한 후 스와로 도망쳤다고 묘사된다.[3][4][5][6] 그러나 다른 전승에서는 스와 신을 침입자로 묘사하거나, 여덟 살 소년을 사제로 삼아 살아있는 화신으로 만들었다고 전한다.[7][8][9][10][11][12][13][14]
중세 전승에서는 헤이안 시대 초기의 아리카즈(有員)라는 인물이 이 소년이었다고 여겼다.[15][16][11][17] ''스와 다이묘진 에코토바''(1356)는 신이 소년에게 옷을 입혀 '대사'(''오호리'')로 삼았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1884년 발견된 스와 가문 계보 기록에는 아리카즈가 시나노 국 ''쿠니노미야츠코''의 아들 쿠마코(神子)의 후손으로, 요메이 천황 재위 기간에 상사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18][19] 큐슈 아소 신사의 아소 가문(阿蘇氏) 계보에도 유사한 내용이 있으나,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20][21][22][23][24][25][26]
이 외에도 스와씨가 세이와 겐지의 미나모토노 쓰네모토의 아들 미나모토노 미쓰야스을 통해 파생되었다는 주장도 있다.[27][28]
상사 대축을 맡았던 스와씨(진씨)는 오오쿠니누시노 미코토의 후예인 미와씨와 동족이라는 설과, 킨메이 천황·스이코 천황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 초기 시나노국에서 활동했던 '''아리카즈'''(有員)의 후예라는 설이 있다.
중세 전승에 따르면, 스와 묘진(타케미나카타노 카미)이 8세 어린아이에게 옷을 입혀 자신의 "어정체"로 신격화했다. 스와묘진화사(1356년)와 신씨 계도(마에다씨 본)(무로마치 시대 초기)에 따르면, 이 어린아이는 '''아리카즈'''였다.
아리카즈 외에도, 오오미와씨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54] 미카와국·토토우미국에서 보이는 삼원식 동탁이 시오지리시 등에서 출토되어[55] 덴류강을 통한 인구 이동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축(호리)"이라는 신관 명칭, "미와"라는 씨족명, 본전 없는 신사, 뱀 신앙 등 미와산 신앙과의 공통점도 지적된다.[56] 1865년 당시 대축 '''스와 요시타케'''는 자신을 "스와대축대삼륜아소미 요시타케"라고 칭했다.[57]
진씨가 되는 씨족은 시모이나 지방에서 스와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고분 시대 후기(6세기) 시모이나에는 말 관련 부장품이 많은 원통형 분구가 세워졌다. 6세기 후반 스와 지방에 나타난 고분에서도 마구가 많이 출토되어, 이나 계곡에서 스와로 말 사육 집단의 이동이 추정된다. 이 부족을 카네사시씨라고 하는 설이 있지만, 여러 종류의 고분이 있어 하나의 씨족이 아닌 여러 집단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 서기』 지토 천황조(7세기 후반)에는 이미 스와 신이 조정의 숭경을 받았으나, 많은 기록이 진씨 시조 아리카즈를 9세기 인물로 기록하고 있어 문제가 있다. 대축직이 요메이 천황조에 시작되었다는 『진씨 계도(마에다씨 본)』을 따르는 설 외에, 상사 대축이 특정 일족이 아닌 달라이 라마처럼 선택되다가 헤이제이 천황조에 세습제로 바뀌었다는 야마토 이와오의 설이 있다.[59]
스와 지방에서는 타케미나카타노 카미가 토착 모레야 신을 이기고 통치권을 양도받았다는 전승이 있는데, 이는 재지 호족 모리야씨가 외래 진씨에게 항복하여 제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사건으로 추정된다.[60]
역사학자 다나카 다쿠가 발견한 『아소씨 약계도』와 『진씨 계도(오오하타케 본)』에는 시나노 국조 가문 출신 또는 라는 사람이 요메이 천황 2년(587년) 스와 호 남쪽에 사단을 세워 초대 오오하타케가 되었고, 유원이 그 자손이라고 한다.[61]
『아소씨 약계도』와 『오오하타케 본 진씨 계도』를 바탕으로 카나이 노리미 등은 진씨를 카네사시씨 분가로 보는 설을 주장했고, 한때 주류 설이 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반론이 나왔고, 양 계도를 위서로 보는 견해[62][63][64]가 나왔다.[65]
테라다 시즈코·와시오 테츠타(2010년)는 카네사시씨 분가설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다나카 다쿠 자신도 『아소씨 약계도』와 『오오하타케 본 진씨 계도』를 부정하고 있다.[66]
무라사키 마치코는 두 계도가 에도 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초기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했다.[66]
사토 유이치도 위 연구들을 바탕으로 신중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말한다.[66]
마에다 료타로는 『아소씨 약계도』가 여러 요소에 영향을 받아 성립했다고 밝혔다.[67]
현재 학계에서는 『아소씨 약계도』와 『오오하타케 본 진씨 계도』를 부정하는 학자가 많으며, 고대 역사 사실을 밝히는 힘이 없다고 증명되었다.[68]
대축제는 한때 상사 전궁 경내에 (''고도'')라고 불리는 관에 살았다. 그곳은 ('고바라')이라고 존칭되었으며, 대축제 즉위식 등 제사가 거행되었다. 대축제는 제사와 정치를 모두 관장하여 스와 지방 정치 중심지였다.
무로마치 시대 스와 씨가 총령가와 대축제 가문으로 나뉘자, 정치 중심지는 총령가 거성 '''우에하라성'''으로 옮겨졌다. 대축제 저택도 상사 본궁 근처 미야타와타리(현 스와시 나카스 진구지)로 이전했지만, 제사는 전궁에서 계속되었다.
에도 시대 번주 가문 거처 '''다카시마성'''이 스와 번(다카시마 번) 정청이 되었다.
『신씨 계도(마에다 가문본)』[77][78]와 비슷한 『신가 계도(치노 가문본)』(『스와 사료 총서 권 28』 수록[79])에서는 신씨 시조가 '''유원'''이다. 유원에서 14대 손 요리노부까지 계보는 헤이안 시대에 분실되어 불명이다.
> 스와 대명신 수적에 대해 여러 설이 있다. 타국 응생의 영, 아침 근본의 신 등 여러 설이 있어 측량하기 어렵다. 『선대구사본기』에는 스사노오노 미코토의 손자 오호쿠니누시노카미의 둘째 아들 타케미나카타노카미라고 한다. 신대의 뜻은 깊어 기록하기 어렵다. (중략)
>
> 별지에 따르면, 신슈 스와군에 신행한 것은 요메이 천황 때이다. 여덟 살 동자(후에 유원으로 자람)가 명신을 모셨다. 모리야 대신과 싸워 모리야 산에서 합전했다. 동자는 신병을 이끌고 모리야를 쫓아냈다. 산록에 사단을 세우고, 신의 옷을 동자에게 입혀 "나에게 몸이 없으니, 축으로 몸을 삼는다"라고 하여 신체를 숨겼다. 동자를 신체로 하여 미소기하후리라 하고, 신씨 시조이다. 명신은 후겐, 동자는 몬주이다. (『신씨 계도』 서문, 원문 한문)
『신씨 계도(마에다 가문본)』와 『신가 계도(치노 가문본)』에 따르면, 진가와 나카(스와 타메나카)는 고3년의 역 참전 시 신씨 가문 계도를 아내 아버지 미나모토노 타메키미에게 맡겼으나 분실하여 아리토와 요리노부(타메나카 조부) 사이 14대가 불분명해졌다.
타케미나카타 신부터 유원까지 계보 또한 불명확하다.
3. 스와 오호리(大祝)
스와 오호리(大祝)는 스와 대사 상사(上社)의 최고 제사장으로, 신사의 신인 스와 다이묘진의 살아있는 화신으로 숭배받았다.[14][29] 오호리는 어린 나이(8~15세)에 즉위하여 모리야 씨족의 진초칸(神長官) 등 5명의 제사장의 보조를 받았다.[30][31]
무로마치 시대에 스와 씨가 총령가와 대축 가문으로 나뉘면서 정치 중심지는 총령가의 거성인 우에하라성으로 옮겨졌다. 대축의 저택도 상사 본궁 근처의 미야타와타리(현 스와시 나카스 진구지)로 이전했지만, 제사는 계속 상사 마에미야에서 거행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번주 가문의 거처인 다카시마성이 스와 번(다카시마 번)의 정청이 되었다.
3. 1. 역할과 권한
고대에는 스와 씨족이 스와 상사(上社, ''카미샤'')의 최고 제사장인 ''오호리''(大祝, '대제사장', 고어: おほはふり ''오호하후리''; ''오하후리''라고도 표기)를 배출했으며, 그는 재임 기간 동안 신사의 신의 살아있는 화신으로 숭배받았다.[14][29]전통적으로 어린 나이(이상적으로 8세에서 15세 사이)에 그 지위에 오른 ''오호리''는 모리야 씨족의 ''진초칸''(神長官)을 수장으로 하는 5명의 제사장의 보조를 받았다. 그들은 상사(上社)의 종교 의식을 감독했고, 그 중 많은 의식이 미샤구지라고 불리는 농업 및 다산 신 숭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30][31] ''진초칸''은 그 존재가 필요할 때마다 미샤구지를 개인과 사물에 소환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고 여겨졌다.[30][31]
공식적으로는 상사(上社)의 최고 제사장이자 화신 신으로서 숭배의 대상이었지만, 스와 ''오호리''는 미샤구지와의 독특한 관계와 구두로만 사무실 계승자에게 전해지는 엄중히 보호된 비밀 전통에 대한 지식을 가진 모리야 ''진초칸''의 손에 달려 있는 신사 업무에 대해 거의 권한을 행사하지 못했다.[32] 사실, 후자가 취임식에서 미샤구지를 ''오호리''에게 소환한 덕분에 후자가 살아있는 신이 되었다.[33][34]
임기 동안 현직 ''오호리''(Ōhōri)는 스와 다이묘진의 육체적 현현으로 여겨졌다. 1186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부하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호리''를 신의 화신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오호리''의 명령은 신의 명령과 같다고 선언했다.[42]
''오호리''는 의례적인 청결의 삶을 살아야 했으며, 신의 징벌을 받아 스와 지역의 경계를 벗어나는 것도 금지되었다.[43][44] 재임 기간 동안 ''오호리''는 원래 스와 ''마에미야'' 근처의 '고도노'(Gōdono, 神殿)로 알려진 건물에 거주했다. 화신으로 여겨지는 신의 거주지였기에, 중세 시대에는 ''마에미야'' 지역과 그 주변이 '고바라'(Gōbara, 神原), 즉 '신의 밭'으로 알려졌다.[45][44]
현직 ''오호리''가 재임 중에 사망하면, 그의 시신은 즉시 우치노미타마덴으로 옮겨져 의례적으로 은퇴하게 되었다. 이는 ''오호리''의 영혼이 새로운 후보자가 선택될 때까지 임시적으로 신사에 안치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46] 원래, 사망한 사제는 스와 다이묘진이 입었다고 하는 사냥복과 수염을 깎지 않은 채 매장되었으나,[47] 1465년 당시 ''오호리'' 요리나가(頼長)가 사망하면서, 지역 사제단은 화장의 불교 관습을 채택하기 시작했다.[47] 17세기 초에 이르러, ''오호리''의 거처는 ''마에미야''에서 현재의 나카스, 스와시에 있는 [https://www.google.co.jp/maps/place/%E3%80%92392-0015+Nagano-ken,+Suwa-shi,+Nakasu,+%E5%A4%A7%E7%A5%9D%E5%B1%8B%E6%95%B7/@36.000373,138.1261382,18z/data=!4m5!3m4!1s0x601c56f08ec073dd:0x2f127865a478c42a!8m2!3d36.0003473!4d138.1271388 한 장소]로 옮겨졌다.
대축제는 한때 상사 전궁 경내에 있는 신전(고도)이라고 불리는 관에 살았다. 그 거관 주변은 신원(고바라)이라고 존칭되었으며, 대대로 대축제 직위식 외에도 많은 제사가 거행되었다. 대축제는 제사와 정치를 모두 관장했기 때문에, 이곳은 스와 지방의 정치 중심지이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호리(大祝)는 스와 명신의 신탁에 의해 몸에 신이 깃든 현인신으로 여겨졌으며, 대대로 정1위의 신계를 계승하여 신앙의 대상이었다.
초대 오호리의 전승에서 볼 수 있듯이, 오호리는 동남(童男)을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호리는 즉위 후 부정에 닿아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엄격한 금기에 따르며 심신을 청정하게 유지했다. 또한 재위 중에는 스와군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여겨졌다. 다케미나카타노카미가 다케미카즈치노카미에게 스와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는 『고지키』에 나오는 설화는 이 율법과 관련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69]
가미샤 마에미야의 경내사 내어옥전(우치노미타마도노, 우치미타마덴)에는 스와 명신이 지녔다고 전해지는 신보(마스미의 거울・야사카의 방울・안장・재갈)가 소장되어 있었다. 오호리는 매년 2번(3월 사(巳)의 날과 9월 하순의 인(寅) 또는 신(申)의 날) 거울을 향해 방울을 울리며 천하태평을 기원했다. 내어옥전(=어령전)에는 오호리의 조령(스와 명신의 사키미타마와 쿠시미타마)이 깃든다고 전해지며, 신임 오호리가 자신이 신의 「어정체」가 되었다고 고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오호리가 만약 재직 중에 사망하면, 그 유해는 먼저 내어옥전 앞에 놓이는데, 이는 오호리의 영을 후계자의 즉위식까지 여기에 보존하는 의미로 보인다.[69]
사망한 오호리는 옛날에는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지 않고 스와 명신의 모습이라고 전해지는 장복(에보시・카리기에・구두・유키)으로 토장되었지만, 에도 시대에는 오호리가가 불교식 장례를 채택했다.[69]
3. 2. 취임 의식
고대에는 스와 씨족이 스와 상사(上社, ''카미샤'')의 최고 제사장인 ''오호리''(大祝, '대제사장', 고어: おほはふり ''오호하후리''; ''오하후리''라고도 표기)를 배출했으며, 그는 재임 기간 동안 신사의 신의 살아있는 화신으로 숭배받았다.[14][29]전통적으로 어린 나이(이상적으로 8세에서 15세 사이)에 그 지위에 오른 ''오호리''는 모리야 씨족의 ''진초칸''(神長官)을 수장으로 하는 5명의 제사장의 보조를 받았으며, 그들은 상사(上社)의 종교 의식을 감독했고, 그 중 많은 의식이 미샤구지라고 불리는 농업 및 다산 신(들) 숭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30][31]
공식적으로는 상사(上社)의 최고 제사장이자 화신 신으로서 숭배의 대상이었지만, 스와 ''오호리''는 미샤구지와의 독특한 관계와 구두로만 사무실 계승자에게 전해지는 엄중히 보호된 비밀 전통에 대한 지식을 가진 모리야 ''진초칸''의 손에 달려 있는 신사 업무에 대해 거의 권한을 행사하지 못했다.[32] 사실, 후자가 취임식에서 미샤구지를 ''오호리''에게 소환한 덕분에 후자가 살아있는 신이 되었다.[33][34]
오호리(大祝)는 스와 명신의 신탁에 의해 몸에 신이 깃든 현인신으로 여겨졌으며, 대대로 정1위의 신계를 계승하여 신앙의 대상이었다.
초대 오호리의 전승에서 볼 수 있듯이, 오호리는 동남(童男)을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호리는 즉위 후 부정에 닿아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엄격한 금기에 따르며 심신을 청정하게 유지했다. 또한 재위 중에는 스와군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여겨졌다. 다케미나카타노카미가 다케미카즈치노카미에게 스와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는 『고지키』에 나오는 설화는 이 율법과 관련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69]
가미샤 마에미야의 경내사에는 스와 명신이 지녔다고 전해지는 신보(마스미의 거울・야사카의 방울・안장・재갈)가 소장되어 있었다. 오호리는 매년 2번(3월 사(巳)의 날과 9월 하순의 인(寅) 또는 신(申)의 날) 거울을 향해 방울을 울리며 천하태평을 기원했다. 내어옥전(=어령전)에는 오호리의 조령(스와 명신의 사키미타마와 쿠시미타마)이 깃든다고 전해지며, 신임 오호리가 자신이 신의 「어정체」가 되었다고 고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오호리가 만약 재직 중에 사망하면, 그 유해는 먼저 내어옥전 앞에 놓이는데, 이는 오호리의 영을 후계자의 즉위식까지 여기에 보존하는 의미로 보인다.[69]
중세 후기에 행해진 ''오호리''(Ōhōri) 직에 대한 완전한 취임 의식은 다음과 같았다.
1. 후보자가 먼저 상사(上社)의 두 구성 신사 중 하나인 ''마에미야''(前宮, '옛 신사')에서 22일 동안 엄격한 의례적 정화 기간을 거친다.
2. 의식 당일, ''진초칸''(Jinchōkan)은 ''오호리''(Ōhōri)의 임기 동안 그의 거처였으며, ''마에미야'' 서쪽에 위치한 ''고도노''(神殿) 서쪽에 있는 신성한 나무 앞으로 후보자의 손을 이끈다.
- 그 아래에는 '요석'(要石, '중요한 돌')으로 알려진 평평한 바위가 있었다.
- 의식 동안, 이 바위는 임시 울타리나 오두막으로 둘러싸였고, 그 위에 갈대 매트가 놓여 소년이 앉게 했다.[35]
3. 울타리 안에서, ''진초칸''(Jinchōkan)은 소년에게 다음과 같은 완전한 의례 복장을 입혔다.
- 전통적인 화장(''오시로이''(oshiroi), ''오하구로''(ohaguro), ''베니''(beni) 및 ''마유즈미''(mayuzumi))
- 칙칙한 황록색 ''소쿠타이''(sokutai)
- ''하카마''(hakama)
- 관(''칸무리''(kanmuri)).[36]
4. ''진초칸''(Jinchōkan)은 미샤구지(자연령으로서 바위와 나무에 나타난다고 믿어짐[30])를 비밀 주문을 통해 ''요석''(kanameishi)으로 소환했다.
5. 바위를 통해, 미샤구지는 아이의 몸에 들어가 그를 살아있는 신으로 변하게 했다고 믿어졌다.[37][38]
6. 성별된 후, ''오호리''(Ōhōri)는 상사 단지의 다양한 신사를 방문했다.
- ''마에미야'' 지역의 또 다른 신사인 내어옥전(內御靈殿)에는 스와 다이묘진 자신이 이 지역으로 가져왔다고 추정되는 상사의 신성한 보물(종, 거울, 재갈 및 안장)이 보관되어 있었다.[39]
- ''오호리''(Ōhōri)는 자신이 신의 새로운 '몸'이 되었으며 앞으로 부정을 피할 것이라는 의례적인 선언(신립(申立), ''모시타테''(mōshitate))을 했다.[40]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의식은 점점 더 단순해졌고, 나중에는 심지어 완전히 생략되어 ''오호리''(ōhōri)가 어떤 의식 없이 단순히 그 지위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41]
4. 역사
스와 씨족은 대대로 스와 대사 상사(上社)의 대축(大祝)을 맡아온 일족이다. 출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오오카미씨(大神氏)의 동족 또는 카네사시씨(金刺部氏)의 지류로도 생각된다. 가전(家伝)에서는 스와 대사의 제신 타케미나카타노카미(建御名方神, 스와 명신) 혹은 그 신에 선정된 동남(童男)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후세에는 간무 천황을 시조로 한다거나 세이와 겐지(清和源氏)의 미나모토노 미츠요시(源満快)를 시조로 한다고 칭했지만, 황윤이나 섭관가(摂関家)를 비롯한 공경(公卿)의 후예를 칭하는 무가(武家)가 많은 가운데 제신의 혈통을 칭하면서 극히 존귀한 혈통으로 여겨진 특이한 가계라고 할 수 있다.
스와 씨는 무사(武士)와 신관(神官) 양쪽의 성격을 함께 지닌 존재였다.
스와 대사의 신관직을 세습하며 군사적 역할 또한 수행하던 스와 씨는, 겐페이 합전 무렵의 당주 스와 모리시게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섬겨 가마쿠라 막부의 고케닌이 되었고, 호조 도쿠소케의 고우치닌(피관)이 되었다. 또한 시나노국(信濃国)의 무사단 신토(神党)를 조직했다.
겐무 신정기 당주 요리시게는 호조 토키유키를 받들어 나카센다이의 난을 일으켜 일시 가마쿠라를 점령했지만, 결국 아시카가 타카우지에게 빼앗겼다. 남북조 시대에는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 무네나가 친왕을 받들어 남조 측 무장 가문으로서 활약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총령가(惣領家)와 대축가(大祝家)로 분열되었지만, 총령가의 요리미츠가 양가를 통일했다. 오닌의 난 후 하사(下社) 대축의 카네사시씨를 공격하여 전 스와(諏訪)를 영유했다.
센고쿠 시대에는 다케다씨와 다투었지만, 덴분 11년(1542년)에 요리시게가 다케다 신겐에게 모살당한 것으로 한 번 단절되었다.
덴쇼 10년(1582년)에 다케다씨가 멸망하고, 그 유령을 장악한 오다 노부나가도 혼노지의 변으로 멸망하자, 다케다의 유령을 둘러싼 다툼이 일어났다. 그 속에서 요리시게의 사촌 요리타다가 구신(舊臣)들에게 추대되어 스와 씨를 재흥(再興)하고 구령을 회복했다. 그 후, 고호조씨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시나노국(信濃国)의 대부분을 지배하에 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도 본령을 안도받았다. 덴쇼 18년(1590년)에 이에야스가 간토(関東)로 이봉(移封)되자, 요리타다도 무사시국(武蔵国) 나라시 1만 2000석으로 이봉되었고, 분로쿠 원년(1592년)에는 고즈케국(上野国) 소우샤(총사)로 이봉되었다.
4. 1. 헤이안 시대부터 센고쿠 시대까지
스와 씨족은 헤이안 시대부터 센고쿠 시대까지 군사적 경력을 쌓으며 성장했다. 씨족 출신의 첫 무사 중 한 명은 젠쿠넨 전쟁(1051-1063)과 고산넨 전쟁(1080년대 후반)에서 미나모토노 요시이에 휘하에서 복무한 타메나카였다.[48][49][50] 그는 사제 신분이었던 아버지 타메노부의 명령으로 참전했으나, 부하들의 싸움 후 수치심에 자결했다.[48][49][50]타메나카의 아들 타메모리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오호리 지위를 물려받지 못했고, 타메나카의 세 동생에게 계승되었다. 그중 가장 어린 동생인 타메사다가 사제직을 자신의 후손들에게 성공적으로 물려주었다.
가마쿠라 시대에 이르러 씨족은 사제 가문이자 무사 가문으로 가마쿠라 막부의 고케닌이 되었고, 호조 씨족의 후원 아래 번성했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의 몰락과 남북조 시대의 남조 패배와 함께 쇠퇴했다.
무로마치 시대 동안 스와 씨족은 북조를 지지하는 카나사시 씨족과의 불화와 '오호리-케'(大祝家)와 종가('소료-케') 사이의 분쟁에 연루되었다. 카나사시 씨족의 패배와 종가가 오호리 지위를 되찾으면서, 씨족은 다이묘가 되었다.
센고쿠 시대 동안, 스와 씨족은 원래 동맹이었던 다케다 씨족과 충돌했다. 1542년 스와 요리시게가 다케다 신겐에게 패배하고 1544년 자결하면서 주 가문이 단절되었다. 그러나 요리시게의 사촌 요리타다가 살아남아 다케다 가문이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맹에 의해 멸망한 후,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고 1601년 자신의 가문의 영지에 복귀했다.[27][28]
4. 2. 에도 시대 이후
요리타다의 장남 요리미즈는 스와 번을 다스린 최초의 다이묘가 되었고, 오호리 직위는 그의 넷째 아들 요리히로에게로 넘어갔다. 이로써 씨족은 실질적으로 다이묘 가문과 오호리 가문으로 분리되었다. 사제 가문은 다이묘 가문과 구별하기 위해 성씨의 한자 중 하나를 변경했다(諏'''訪'''에서 諏'''方'''으로).[51]총 10대에 걸쳐 스와 번의 다이묘가 재임했으며, 메이지 시대에 반체제가 폐지될 때까지 지속되었다.[51]
한편, 국가 신도의 수립으로 스와 대사를 포함한 신토 사제직의 세습 전통이 폐지되었다. 스와와 같은 지역 씨족들은 정부에서 임명한 사람들이 국가의 통제를 받게 된 신사를 관리하게 되면서 신사의 전통적인 사제직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고, 이 직위는 결국 폐지되었다.
요리히로 이후 15대째인 마지막 스와 오호리는 2002년에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52]
세키가하라 전투 후, 요리타다의 적남 요리미즈는 전공으로 인해 구영지인 시나노국 다카시마번(스와번) 주 2만 7000석에 봉해졌다. 그러나 게이초 6년(1601년)에는 사가(社家)와 무가(武家)의 분리를 명받아, 요리타다의 서자 중 한 명인 요리히로가 분가하여 스와 상사 오호리를 세습하는 오호리 가문의 조상이 되었다.
다카시마번 주 가문은 오사카 전투의 공으로 5000석을 가증받았지만, 메이레키 3년(1657년)에 2대 번주 타다츠네의 차남 요리카게와 삼남 요리히사에게 1000석씩 분지하여 3만 석이 되었다. 이후 다카시마번은 폐번치현까지 3만 석의 표고로 존속했다. 다카토리번 주 가문의 분가인 스와 상사 오호리 가문은 미야진령 1000석을 영유했다.
1868년(메이지 원년)에 마지막 다카시마 번주를 상속한 다다히로는 보신 전쟁에서 관군에 종군하여 전공을 세워 상전금 2000냥을 하사받았다. 다다히로는 1869년(메이지 2년) 6월 20일에 반적봉환에 따라 다카시마 번 지사로 전임됨과 동시에 화족에 열하고, 1871년(메이지 4년) 7월 15일의 폐번치현까지 번 지사를 맡았다.
메이지 전기에는 당시 당주 다다마사의 거처는 도쿄부기타토요시마 군가네스기 촌에 있었다.[75] 1884년(메이지 17년)의 화족령 시행에 따라 화족이 오작제가 되면서, 다다마사는 구 소번 지사로 자작에 서임되었다. 쇼와 전기에는 스와 자작가의 저택은 도쿄시나카노구 히카와정에 있었다.
분가의 오호리 집안의 메이지 시대 당주 오호리 요리타카와 그의 아들인 다이쇼 시대 당주 스와 요리카타 (그 또는 요리타카 중 한 명이 오호리에서 스와로 복성한 것으로 보인다)는 스와 신사나 다카시마 신사의 신직을 맡으면서, 화족 편열 청원 운동을 했지만 결국 그 집안이 화족이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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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sah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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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後の大祝
http://yatsu-genjin.[...]
[53]
문서
続群書類従巻七十三 諏訪大明神絵詞
https://dl.ndl.go.jp[...]
続群書類従完成会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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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古諏訪の祭祀と氏族
人間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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柴宮銅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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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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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蛇: 不死と再生の民俗
冨山房インターナショナ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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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日本の神々―神社と聖地〈9〉美濃・飛騨・信濃
白水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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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偽書が描いた日本の超古代史
河出書房新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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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信濃古代史考
名著出版
[60]
서적
古諏訪の祭祀と氏族
人間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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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諏訪信仰の発生と展開
人間社
[62]
간행물
所謂『阿蘇氏系図』について
信濃史学会
[63]
문서
異本阿蘇氏系図試論
ヒト・モノ・コトバの人類学 国分直一博士米寿記念論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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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濃古代の通史叙述をめぐっ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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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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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神社史料の諸問題 : 諏訪神社関係史料を中心に
[66]
서적
古代信濃の氏族と信仰
吉川弘文館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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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大祝本『神氏系図』・『阿蘇家略系譜』再考―再構成される諏訪の伝承―
北海道大学国文学会
2023-08
[68]
간행물
大祝本『神氏系図』・『阿蘇家略系譜』再考―再構成される諏訪の伝承―
北海道大学国文学会
20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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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諏訪市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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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勝山記
山梨県史
[71]
문서
「神使御頭之日記」
[72]
문서
高白斎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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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白斎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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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高野山成慶院『甲斐国供養帳』-『過去帳(甲州月牌帳)』-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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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明治華族名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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深沢堅二
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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姓氏家系大辞典 第2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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姓氏家系大辞典刊行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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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諏訪史 第2巻前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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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濃教育会諏訪部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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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氏系図 前田古写本之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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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州デジタルコモンズ 所蔵:長野県立歴史館
2020-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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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家系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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諏訪教育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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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所謂『阿蘇氏系図』について
信濃史学会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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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本阿蘇氏系図試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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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濃古代の通史叙述をめぐっ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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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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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神社史料の諸問題 : 諏訪神社関係史料を中心に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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