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 마카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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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테판 마카로프는 러시아 제국의 해군 제독, 해양학자, 해군 전술가이다. 1849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1863년 러시아 해군에 입대하여 여러 함대에서 복무했으며, 특히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어뢰정 전술을 성공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세계 일주 항해를 통해 해양 연구를 진행하고, 『해군 전술론』을 저술하여 해군 전술 분야에 기여했다. 1904년 러일 전쟁 중 태평양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기뢰에 의해 전사했다. 그의 업적을 기려 여러 기념비가 세워졌고, 함선에 그의 이름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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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마카로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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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스테판 오시포비치 마카로프 |
원어 이름 | Степа́н О́сипович Мака́ров (러시아어) |
출생일 | 1849년 1월 8일 (구 러시아력 1848년 12월 27일) |
사망일 | 1904년 4월 13일 (구 러시아력 3월 31일) |
출생지 | 러시아 제국 헤르손 현 미콜라이우 (현재의 우크라이나 미콜라이우 주 미콜라이우) |
사망 장소 | 청나라 여순항 근처 |
별칭 | 마카로프 할아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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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경력 | |
소속 | 러시아 제국 해군 |
복무 기간 | 1863년 – 1904년 |
최종 계급 | 중장 |
주요 지휘 | 러시아 태평양 함대 |
참전 | 러시아-튀르크 전쟁 러일 전쟁 (전사) |
훈장 | |
훈장 | 성 게오르기우스 훈장 |
2. 생애
스테판 마카로프는 1849년 1월 8일 러시아 제국 헤르손현(현재 우크라이나 미콜라이우)에서 해군 준사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58년 가족과 함께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로 이주하여 항해사 학교에 입학, 1865년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해군 사관 후보생이 되었다.
1863년 러시아 제국 해군에 입대하여 러시아 태평양 함대에서 복무를 시작했고, 1866년 희망봉을 경유하는 세계 일주 항해에 참여했다. 이후 발트 함대(1872년)와 흑해 함대(1876년)에서 근무하며 경력을 쌓았다.
1877년부터 1878년까지 이어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는 어뢰정 모함 Великий князь Константин|벨리키 크냐즈 콘스탄틴ru을 지휘하며 자신의 어뢰 전술 이론을 실전에 적용했다. 특히 1878년 1월 14일, 바투미에서 오스만 제국의 경비함 Intibakh|인티바흐tr를 상대로 화이트헤드 어뢰를 이용한 세계 최초의 성공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다.[1] 이후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 작전에도 참여했으며(1879년-1880년), 여러 함선의 함장을 역임했다.
마카로프는 해군 연구 분야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해양학 및 해군 전술에 관한 5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했으며,[2] 두 차례에 걸쳐 세계 일주 해양 탐험을 지휘했다(1886년-1889년, 1894년-1896년). 1890년 러시아 해군 역사상 최연소 소장으로 진급했고,[2] 해군 병기 총감으로 재직하며 철갑탄의 관통력을 높이는 "마카로프 캡"을 발명했다. 1896년 중장으로 진급한 후에는 쇄빙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세계 최초의 극지 쇄빙선 예르마크의 설계를 제안하고 건조를 감독했으며, 이를 이용해 1899년과 1901년 북극 탐험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2][3][4][24]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2월 24일 러시아 태평양 함대 사령관으로 뤼순에 부임했다.[7] 그는 탁월한 리더십과 공격적인 전술로 침체되었던 함대의 사기를 높이고 적극적인 작전을 펼쳤으나,[8][11][12] 1904년 4월 13일 기함 페트로파블로프스크를 타고 일본 함대를 추격하여 뤼순항으로 귀환하던 중, 일본군이 부설한 기뢰에 접촉하여 함선이 폭발, 침몰하면서 전사했다.[15][16][17][18][19][20][21][22] 그의 유해와 다른 장교들의 유해는 일본 구조팀에 의해 수습되었고, 1913년 뤼순의 군사 묘지에 안장되었다.
사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고향인 우크라이나 미콜라이우를 비롯하여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크론시타트 등지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또한 여러 척의 군함과 쇄빙선, 국립 조선해양대학교, 국립 해양 아카데미 등에 그의 이름이 명명되어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다.
2. 1. 초기 생애 및 해군 경력
스테판 마카로프는 1849년 1월 8일(율리우스력 1848년 12월 27일) 당시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던 우크라이나 헤르손현 니콜라예프(현재의 미콜라이우)에서 해군 준사관(프라포쉬치크, прапорщик по Адмиралтействуrus)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1858년 러시아 태평양 연안의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로 이주했고, 마카로프는 그곳의 항해사 학교에 입학했다. 1865년 항해사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항해사가 아닌 해군 사관 후보생이 되었다.
1863년 러시아 제국 해군에 입대하여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클리퍼에서 사관 후보생으로 복무를 시작했다. 1866년에는 코르벳 Аскольд (корвет)|아스콜드rus에 승선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희망봉을 거쳐 크론슈타트까지 항해하는 세계 일주에 참여했다.
1867년 러시아 태평양 함대에 정식 배속되었고, 이후 1872년에는 발트 함대로, 1876년에는 흑해 함대로 전속되었다. 발트 함대에서는 1867년부터 1876년까지 제독 안드레이 포포프 휘하에서 기함 함장으로 복무했다.
1870년 마카로프는 선박의 선체에 구멍이 났을 때 이를 막기 위한 충돌 매트 설계를 고안했으며, 이 발명품은 1873년 빈 세계 박람회에 전시되기도 했다.
1876년 흑해 함대로 옮긴 후, 증기선 Великий князь Константин (минный транспорт)|벨리키 크냐즈 콘스탄틴rus의 함장을 맡았다. 그는 러시아 해군 내 어뢰정 운용 및 전술 분야의 전문가 중 한 명이었으며, 자신의 제안으로 이 배를 함재 어뢰정 4척을 탑재한 어뢰정 모함으로 개조했다. 1877년부터 1878년까지 이어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참전하여 이 어뢰정 모함과 함재 어뢰정을 실전에 투입했다. 초기에는 실패를 겪었으나, 1877년 8월 12일 흑해의 수후미 항구 외곽에서 오스만 제국 해군의 장갑함 "아사르 셰브케트"에 외장 어뢰를 사용하여 손상을 입혔다. 또한 그는 새로 발명된 자항 어뢰에 주목하여 해군 대신에게 요청해 이를 확보하고 함재 어뢰정에 탑재했다. 1878년 1월 14일 심야, 바투미 항구 외곽에서 오스만 제국의 포함 '인티바흐'(İntibah|인티바흐tur)를 함재 어뢰정 2척으로 공격하여 격침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어뢰를 사용하여 적함을 격침시킨 사례로 기록되었다.[24]
1879년부터 1880년까지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 기간 동안 해군 임시직으로 복무했으며, 1880년부터 1881년까지는 아할테킨의 중앙 아시아 탐험대에 참가했다. 1881년 1월 1일 대위로 승진했으며, 1881년부터 1882년까지는 증기선 '타마니', 1885년에는 프리깃 '포자르스키 공'의 함장을 역임했다.
1886년 코르벳 Витязь (корвет, 1884)|비탸지rus의 함장으로 임명되어 1886년부터 1889년까지, 그리고 1894년부터 1896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세계 일주 항해를 했다. 이 항해 동안 종합적인 해양 조사를 실시하고 그 연구 결과를 『비탸지 호와 태평양』이라는 책으로 정리하여 발표했다. 그는 해군 전술 이론가로서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저서 『해군 전술론』은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었다. 특히 일본 제국 해군에서는 도고 헤이하치로나 아키야마 사네유키를 비롯한 많은 장병들이 필독했으며, 도고 제독은 직접 필사한 『해군 전술론』을 전함 미카사의 사령관실에 보관했다고 전해진다.
1890년 소장으로 승진하여 발트 함대 최연소 제독이 되었고, 1891년에는 해군 포술 주임 검찰관을 맡았다. 1894년 전함 Император Николай I (броненосец)|임페라토르 니콜라이 1세rus에 승선하여, 1895년 극동 지역 함대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1899년과 1901년에는 북극 탐험을 이끌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쇄빙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세계 최초의 현대적 극지 쇄빙선 Ермак (ледокол, 1898)|예르마크rus의 건조를 지시했다.[24] 또한 시베리아 횡단 철도 건설 과정에서 바이칼 호를 횡단하기 위한 쇄빙선 두 척의 설계를 주도했다. 북미 오대호의 유사 선박을 연구하여 설계한 이 배들은 1897년에 건조된 열차 페리 Байкал (паром-ледокол)|바이칼rus과 1900년경 건조된 여객 및 화물 증기선 Ангара (ледокол)|앙가라rus였다.[5][6] 영국 뉴캐슬어폰타인의 암스트롱 휘트워스 사에서 제작된 부품들을 바이칼 호반의 리스트뱐카로 운반하여 현지에서 조립했으며, 보일러와 엔진 등 주요 부품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제작되었다.[6] '바이칼'은 길이 64m에 15개의 보일러와 4개의 굴뚝을 가졌으며, 중앙 갑판에 철도 차량 24량과 기관차 1량을 실을 수 있었다.[5][6] '앙가라'는 그보다 작은 크기였다.[5][6] '바이칼'은 러시아 내전 중 소실되었으나,[5][6] '앙가라'는 현재까지 보존되어 이르쿠츠크에 정박하여 박물관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5]
2. 2. 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1876년 흑해 함대로 전속되었고, 증기선 Великий князь Константинru의 함장으로 임명되었다. 마카로프는 러시아 제국 해군에서 어뢰정 운용 및 전술론에 관한 전문가 중 한 명이었으며, 자신의 아이디어로 이 배를 함재 어뢰정 4척을 탑재한 어뢰정 모함으로 개조했다.1877년부터 1878년까지 이어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어뢰정 모함 Velikiy Knyaz Konstantinru의 함장(스키퍼)으로서 어뢰정 운용과 전술 이론을 실전에 적용했다. 전쟁 초기에는 개조된 모함과 함재 어뢰정을 운용하며 몇 차례 실패를 겪었으나, 1877년 8월 12일 흑해의 수후미 항구 외곽에서 오스만 제국 해군의 장갑함 Asar-ı Şevkettr에 외장 어뢰를 사용하여 손상을 입혔다.
마카로프는 당시 새로 발명된 자항 어뢰(화이트헤드 어뢰)의 가능성에 주목하여 해군성에 요청해 이를 확보하고 함재 어뢰정에 탑재했다. 1877년 12월 16일, 바투미 항구 외곽에서 자항 어뢰를 처음으로 실전에 사용했으나, 어뢰 1발은 닻줄에 충돌해 탄두가 분리되고 다른 1발은 화약 불량으로 불발하면서 실패했다.
그러나 1878년 1월 14일 심야, 다시 바투미 항구 외곽에서 함재 어뢰정 2척으로 오스만 제국의 포함 Intibakhtr를 공격했다. 각 어뢰정에서 발사된 어뢰 중 1발이 명중하여 폭발했고, 인티바흐는 침몰했다.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자항 어뢰를 사용하여 적함을 격침시킨 성공적인 사례로 기록되었다.[1]
마카로프는 이 전쟁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어뢰정 함대를 운용하는 아이디어를 최초로 받아들이고 실전 경험을 쌓은 지휘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2. 3. 해군 연구 및 탐험 활동

마카로프는 약 20년 동안 해군 연구에 전념하며 해양학 및 해군 전술에 관한 5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했다.[2]
1886년에는 코르벳 ''비탸즈''의 함장에 취임하여 1889년까지 세계 일주 해양 탐험을 지휘했다. 이 항해 동안 종합적인 해양 조사를 실시했으며, 연구 성과를 『비탸즈 호와 태평양』이라는 책으로 정리하여 발표했다. 그는 해군 전술론의 대가로도 세계적으로 알려졌으며, 그의 저서 『해군 전술론』은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었다. 특히 일본 제국 해군에서는 도고 헤이하치로나 아키야마 사네유키 등 많은 장병이 반드시 읽어야 할 명저로 여겨졌으며, 도고는 직접 필사한 것을 전함 미카사의 사적실에 보관했다고 전해진다.
1890년 소장(해군)으로 진급했는데, 이는 러시아 해군 역사상 최연소 기록이었다.[2] 같은 해부터 1894년까지 해군 병기 총감으로 근무하면서 철갑탄의 관통력을 높이기 위해 탄두 앞부분에 부착하는 "마카로프 캡"을 발명했고, 이는 곧 여러 나라 해군에서 채택되었다. 1894년부터 1895년까지는 지중해 함대 사령관을 역임했으며,[2] 1895년에는 극동에 부임하여 함대 사령 장관으로 취임했다. 1895년부터 1896년까지는 해군 훈련을 담당했다.
1894년부터 1896년까지 두 번째 세계 일주 항해에 나섰다. 1896년에는 중장(해군)으로 진급했으며, 특히 유럽과 동아시아 사이의 북극 항로 개설에 필요한 쇄빙선과 같은 새로운 군함 설계를 시작했다.[2] 1897년에는 오비강과 예니세이강 하구를 탐사하는 원정대를 이끌었다. 쇄빙 방법 연구의 일환으로 1898년 북아메리카의 오대호를 방문하여 겨울철 기차 페리에 사용되는 방법을 연구했다.[3] 그는 세계 최초의 극지 쇄빙선 ''예르마크''를 제안하고 건조를 감독했으며, 1899년 처녀 항해를 지휘했다.[24] 1899년과 1901년에는 ''예르마크''를 지휘하여 북극 탐험을 수행했으며, 노바야 제믈랴와 프란츠 요제프 랜드 해안을 탐사했다.
1900년 1월에는 크론시타트 사령관 겸 군정관으로 임명되었다.[4]
마카로프는 또한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바이칼 호를 가로질러 연결하기 위해 두 척의 쇄빙 증기선을 설계했다. 북미 오대호에서 유사 선박을 연구한 경험을 바탕으로, 1897년에 건조된 열차 페리 ''바이칼''과 1900년경 건조된 여객 및 화물 증기선 ''앙가라''를 설계했다.[5][6] 영국 뉴캐슬어폰타인의 암스트롱 휘트워스에서 이 선박들을 조립 키트 형태로 제작하여 바이칼 호의 리스트뱐카로 보내 재조립했다. 보일러, 엔진 등 기타 부품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제작되었다.[6] ''바이칼''은 15개의 보일러와 4개의 굴뚝을 가졌으며, 길이는 64m였고 중앙 갑판에 철도 차량 24량과 기관차 1량을 실을 수 있었다.[5][6] ''앙가라''는 두 개의 굴뚝을 가진 더 작은 배였다.[5][6] ''바이칼''은 러시아 내전 중 소실되었으나,[5][6] ''앙가라''는 현재까지 남아 복원되어 이르쿠츠크에 영구 정박되어 사무실과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5]
2. 4. 러일 전쟁 참전과 전사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제1차 뤼순 공격에서 일본 제국 해군의 기습을 허용하여 해임된 오스카르 스타르크 사령관의 후임으로 1904년 2월 24일 러시아 제국 해군 태평양 함대 사령관으로 부임했다.[7] 그는 기함으로 페트로파블로프스크를 지정했다. 마카로프는 공격 정신이 풍부하고 계획성이 있으며 최첨단 기술에 대한 이해가 깊어 러시아 해군에서 뛰어난 명장으로 평가받았다. 그의 부임은 일본의 연합 함대에게 큰 위협이었고, 태평양 함대의 사기도 크게 올랐다. 그의 지휘는 이전의 러시아 해군 장교들과는 달리 적극성과 다양성을 보였으며, 부하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 능력이 뛰어났다.[7]마카로프는 지휘권을 인수한 후, 뤼순의 방어를 강화하고 러시아 함대의 활동을 크게 늘렸다.[8] 이전까지 소극적인 존재 함대 전략을 취했던 것과 달리[10], 그의 지휘 아래 러시아 함대는 거의 매일 출항하여 훈련하고 기동했으며, 뤼순 해안 포대의 보호 범위 밖에서 기습당하지 않도록 경계했다.[11] 그는 일본군과의 교전을 적극적으로 모색했고[12], 함선들을 뤼순항 내에 전투 대형으로 배치했다.[13]
1904년 3월, 일본 순양함들이 황해에서 뤼순을 포격했을 때, 마카로프의 순양함들은 격렬하게 반격하여 일본 함대를 철수시켰다. 같은 달, 일본 해군이 항구 입구를 차단선으로 봉쇄하려 시도했을 때도, 입구를 방어하던 러시아 순양함들이 일본 호위함들을 추격하여 격퇴했다.[14] 뤼순 부임 직후 일본 해군에 의한 제4차 뤼순 공격 당시, 마카로프는 자군의 어뢰정 스테레구시치가 공격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순양함 노비크에 탑승하여 출격했다. 비록 스테레구시치를 구하지는 못했지만, 항상 진두지휘하는 그의 모습과 꾸밈없는 인품은 부하 장병들에게 큰 호감을 얻어 "마카로프 할아버지"라고 불리며 따르게 되었다. 그는 사기가 저하된 장병들의 의식을 개선하고 체제를 개혁하는 데 힘썼으며, 부하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함대의 현황 파악에 노력했다.

한편, 제2차 뤼순항 폐색 작전에 실패한 일본 연합함대는 뤼순 봉쇄를 위해 기뢰 부설 작전을 실시했다. 1904년 4월 13일, 기뢰를 부설하던 일본 구축함 4척과 정찰 중이던 러시아 구축함 스트라스니가 조우하여 교전이 벌어졌다(제7차 뤼순 공격).[15] 스트라스니는 곧 격침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마카로프는 즉시 순양함 바얀을 지원하도록 보내는 한편, 자신은 기함 페트로파블로프스크에 탑승하여 전함 5척, 순양함 4척, 구축함 부대를 이끌고 생존자 구조와 일본 함대 공격을 위해 황해로 출격했다.[16] 급히 항구를 빠져나가면서 마카로프는 기뢰 확인을 소홀히 했지만, 귀항 전에 해당 구역의 기뢰를 제거하도록 명령했다.[17]
마카로프 함대는 일본 군함을 추격하며 나아갔으나, 곧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이끄는 일본 주력 함대(전함 5척과 순양함 6척 추가)가 나타났다. 바다를 덮고 있던 짙은 안개가 걷히면서 일본 함대의 전모가 드러나자, 마카로프는 즉시 함대를 돌려 뤼순 항구로 퇴각했다.[18] 그러나 뤼순항 입구에 거의 다다랐을 때, 기함 페트로파블로프스크는 일본군이 부설하고 미처 제거되지 못한 기뢰에 접촉하여 폭발했다.[19] (일설에는 아키야마 사네유키가 마카로프 함대의 예상 항로에 미리 기뢰를 부설했다고도 한다.) 연이어 2차 폭발이 발생하면서 페트로파블로프스크는 순식간에 침몰했고, 마카로프 제독은 유명한 전투 화가 바실리 베레샤긴을 포함한 500여 명의 승무원과 함께 전사했다.[20][21][22]
마카로프의 전사는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장병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일본에서는 마카로프의 전사 소식이 전해지자 도시에서 승전을 축하하는 등롱 행렬 등이 벌어졌다.[25] 그러나 일부 일본 지식인들은 적장이었던 마카로프의 죽음을 애도하기도 했다.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마카로프 제독 추도의 시"를 지어 『태양』 8월호에 발표하고(당시 제목은 "마카로프 제독 추도"), 이듬해 시집 『동경』에 수록했다.[27] 다쿠보쿠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적장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대를 생각하니, 몸은 적국의
동해 멀리 떨어진 일본의 한 시인,
적이나 다름없이, 괴로운 소리 내어
높이 외치노라, (귀신도 꿇어앉아,
적도 아군도 그대의 창을 땅에 엎드려,
마카로프의 이름 앞에 잠시나마 엎드리라.)
아아 위대한 패장, 군신의
선택을 받은 러시아의 고독한 영웅,
무정한 바람은 진실로 그대의 몸에
정말 무정한 날개를 펼쳤네, 라고.
이 작품에 대해, 야마모토 켄키치가 "적이지만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자세"라고 평한 데 대해, 이와키 유키노리는 다쿠보쿠의 자세는 "훌륭함"의 원의인 "애처로움"에 포함된 동정이 아니라, "고독한 영웅"이라고 표현한 마카로프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웅장하게 싸운" 인물로 묘사하며, 동시대 일본의 시가 작품과 다른 점을 지적하고 있다.[26]
미국에 특사로 파견되었던 가네코 겐타로는 연설에서 마카로프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하며 미국 여론의 지지를 얻는 데 활용하기도 했다.[28][29]
마카로프 제독과 5명 장교의 유해는 일본 구조팀에 의해 페트로파블로프스크의 잔해에서 수습되었다. 1913년, 일본 순양함 아키쓰시마의 장교와 승무원들은 뤼순의 군사 묘지에서 마카로프 제독의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마카로프를 기리는 기념비는 그의 출생지인 우크라이나의 미콜라이우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크론시타트 등 여러 곳에 세워져 있다. 또한 여러 척의 군함에 '아드미랄 마카로프'(마카로프 제독)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크론시타트 군항의 동상에 새겨진 시는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가 원전이라는 설도 있었으나, 연구자들의 현지 조사를 통해 러시아 시인의 작품으로 확인되었다.
3. 업적 및 평가
이후 20년 동안 마카로프는 해군 연구에 전념하여 해양학 및 해군 전술에 관한 5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했다.[2] 마카로프는 코르벳함 ''비탸즈''의 함장으로 1886년부터 1889년까지 세계 일주 해양 탐험을 지휘했다. 마카로프는 1890년에 소장(해군)으로 진급했는데, 이는 러시아 해군 역사상 최연소 기록이었다.[2] 1890년부터 1894년까지 마카로프는 해군 병기 총감으로 근무하면서 모든 해군이 곧 모방한 "마카로프 캡"이라는 장갑 관통 탄을 발명했다. 1894년부터 1895년까지 마카로프는 지중해 함대 사령관을 역임했다.[2] 1895년부터 1896년까지 마카로프는 해군 훈련을 담당했다. 그는 1896년에 중장(해군)이 되었고, 특히 유럽과 동아시아 사이의 북극 항로 개설에 필요한 쇄빙선과 같은 새로운 군함 설계를 시작했다.[2] 마카로프는 1897년에 오비강과 예니세이강 하구를 탐사하는 원정대를 이끌었다. 쇄빙 방법 연구의 일환으로 마카로프는 1898년에 북아메리카의 오대호를 방문하여 겨울철 기차 페리에 사용되는 방법을 연구했다.[3] 그는 세계 최초의 극지 쇄빙선 ''예르마크''를 제안하고, 건조를 감독했으며, 1899년 처녀 항해를 지휘했다. 1899년, 마카로프는 또한 1900년 1월에 크론시타트 사령관 겸 군정관으로 임명되었다.[4] 1901년, 마카로프는 ''예르마크''를 지휘하여 노바야 제믈랴와 프란츠 요제프 랜드 해안을 탐사하는 북극 탐험을 수행했다.
일본 제국 해군의 1904년 2월 9일 뤼순(Port Arthur) 기습 공격 이후, 마카로프 제독은 2월 24일에 그곳에 주둔한 러시아 제국 해군 전투 함대를 지휘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며, 그의 기함으로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를 지정했다. 그의 지휘는 이 전쟁 동안 다른 어떤 러시아 해군 장교와도 크게 달랐으며, 다양성, 공격성, 그리고 ''"부하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 능력"'을 보여주었다.[7]
1904년 초 지휘권을 인수한 후, 마카로프는 러시아 함대의 활동과 뤼순의 일반적인 방어를 크게 강화했다.[8] 그때까지 러시아 함대는 일반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9], 존재 함대로 존재했다.[10] 마카로프의 지휘하에, ''"러시아 함대는 거의 매일 출항하여 끊임없이 이동했고, 뤼순의"'' 해안 포대의 보호 밖에서 결코 기습을 받지 않도록 했다.[11]
전임자들과 달리, 마카로프는 일본군과의 교전을 모색했고,[12] 뤼순의 정박지에 그의 함선들을 전투 대형으로 배치했다.[13] 3월에 일본 순양함들이 황해에서 뤼순을 포격했을 때, 그의 순양함들은 격렬하게 반격을 가하여 일본 함선들이 철수해야만 했다. 같은 달에 일본 해군은 항구의 입구를 봉쇄하기 위해 낡은 증기선들을 항구 채널에 차단선으로 침몰시키려 했다. 입구를 보호하기 위해 배치된 러시아 순양함들은 호위하던 일본 군함을 추격하여 재빨리 격퇴시켰다.[14]
1904년 4월 13일,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던 러시아 구축함 ''스트라스니''는 뤼순의 입구로 다시 들어가려 했으나 일본 구축함에 의해 가로막혔다.[15] 양측 구축함 간의 교전이 시작되었고, 마카로프는 이를 관찰한 후 즉시 순양함 ''바얀''을 ''스트라스니''를 지원하도록 보냈으며, 자신은 3척의 전함, 4척의 순양함, 그리고 구축함 그룹을 이끌고 일본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끄는 주변 적 군함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황해로 나섰다.[16] 항구를 급히 빠져나가는 동안, 마카로프는 기뢰 확인을 소홀히 했지만, 돌아오기 전에 해당 구역을 기뢰 제거하도록 명령했다.[17]
일본 군함들은 마카로프의 추격을 받으며 철수했다. 마카로프가 일본 함대에 접근했을 때, 바다를 덮고 있던 짙은 안개가 걷히면서 일본군의 함정이 드러났다. 도고 제독은 그의 주력함과 5척의 추가 전함, 그리고 6척의 추가 1급 순양함을 후방에 대기시키고 있었다. 마카로프는 재빨리 함대를 돌려 뤼순 항구의 안전한 곳으로 도주했다.[18] ''페트로파블롭스크''가 항구 입구에 가까워지자, 그가 지시했던 대로 그의 부하들이 제거하지 못한 일본 기뢰가 폭발했다.[19] 잇따라 2차 폭발이 발생했고 ''페트로파블롭스크''는 침몰했으며, 마카로프 제독도 함께 사망했다.[20][21][22]
제독의 유해와 5명의 장교들의 유해는 일본 구조팀에 의해 ''페트로파블롭스크''의 잔해에서 수습되었으며, 1913년, 선의의 표시로 일본 순양함 ''아키츠시마''의 장교와 승무원들이 뤼순의 군사 묘지에서 제독의 장례식을 거행했다.
4. 추모
사후 소련의 우표 도안으로 사용되었으며, 그의 고향인 우크라이나 미콜라이우를 비롯하여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크론시타트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노르덴시욀드 군도의 치볼크 군도에 있는 한 섬에도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여러 선박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905년 프랑스 라 시니 조선소에서 건조된 순양함 어드미럴 마카로프호는 1908년 취역하여 발트 함대에 배치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 해군과 교전하다 1922년 해체되었다. 또한 세 척의 쇄빙선이 마카로프의 이름을 사용했다. 첫 번째는 1941년 'V. 몰로토프'로 건조된 증기 쇄빙선으로, 1956년 '아드미랄 마카로프'로 개명되었다. 두 번째 아드미랄 마카로프는 1975년에 건조되어 현재도 운행 중이다. 세 번째는 '스테판 마카로프'로, 2016년에 완공된 쇄빙 대기선이다.
우크라이나 미콜라이우의 국립 조선해양대학교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국립 해양 아카데미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우크라이나 드니프로 시의 두 개 거리도 마카로프의 이름을 땄으나, 2023년 2월 22일 드니프로 시의회는 이 거리들의 이름을 변경했다.[23] 캐나다 매니토바주의 마카로프(Makaroff) 역시 그의 이름을 딴 지명이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약 약 8.05km 떨어진 서스캐처원주에는 토고라는 지역 사회가 있는데, 이는 일본의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의 이름을 딴 것이다.
마카로프의 전사는 러시아 태평양 함대 장병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일본에서는 전사한 마카로프를 애도하는 시와 단가가 신문에 실렸다.[26] 특히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1904년 6월 13일 "마카로프 제독 추도의 시"를 지어 잡지 『태양』 8월호에 발표했고(당시 제목은 "마카로프 제독 추도"), 이듬해 1905년 5월 시집 『동경』에 수록했다.[27] 이 시에서 다쿠보쿠는 다음과 같이 적장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대를 생각하니, 몸은 적국의
:동해 멀리 떨어진 일본의 한 시인,
:적이나 다름없이, 괴로운 소리 내어
:높이 외치노라, (귀신도 꿇어앉아,
:적도 아군도 그대의 창을 땅에 엎드려,
:마카로프의 이름 앞에 잠시나마 엎드리라.)
:
:아아 위대한 패장, 군신의
:선택을 받은 러시아의 고독한 영웅,
:무정한 바람은 진실로 그대의 몸에
:정말 무정한 날개를 펼쳤네, 라고.
이 작품에 대해 야마모토 겐키치는 "적이지만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자세"라고 평했고, 이와키 유키노리는 다쿠보쿠가 마카로프를 "고독한 영웅"으로 묘사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웅장하게 싸운" 인물로 그린 점이 동시대 다른 일본 시가 작품과 다르다고 지적했다.[26]
미국에 특사로 파견되었던 가네코 겐타로는 연설에서 마카로프에 대한 애도를 표하며 미국 여론의 지지를 얻는 데 활용하기도 했다.[28][29]
크론시타트 군항의 동상에 새겨진 시문이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를 원전으로 한다는 설이 있었으나, 연구자들의 현지 조사를 통해 러시아 시인의 작품임이 확인되었다.
5. 추가 정보
이후 20년 동안 마카로프는 해군 연구에 전념하여 해양학 및 해군 전술에 관한 5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했다.[2] 마카로프는 코르벳함 ''비탸즈''의 함장으로 1886년부터 1889년까지 세계 일주 해양 탐험을 지휘했다. 마카로프는 1890년에 소장(해군)으로 진급했는데, 이는 러시아 해군 역사상 최연소 기록이었다.[2] 1890년부터 1894년까지 마카로프는 해군 병기 총감으로 근무하면서 모든 해군이 곧 모방한 "마카로프 캡"이라는 장갑 관통 탄을 발명했다. 1894년부터 1895년까지 마카로프는 지중해 함대 사령관을 역임했다.[2] 1895년부터 1896년까지 마카로프는 해군 훈련을 담당했다. 그는 1896년에 중장(해군)이 되었고, 특히 유럽과 동아시아 사이의 북극 항로 개설에 필요한 쇄빙선과 같은 새로운 군함 설계를 시작했다.[2] 마카로프는 1897년에 오비강과 예니세이강 하구를 탐사하는 원정대를 이끌었다. 쇄빙 방법 연구의 일환으로 마카로프는 1898년에 북아메리카의 오대호를 방문하여 겨울철 기차 페리에 사용되는 방법을 연구했다.[3] 그는 세계 최초의 극지 쇄빙선 ''예르마크''를 제안하고, 건조를 감독했으며, 1899년 처녀 항해를 지휘했다. 1899년, 마카로프는 또한 1900년 1월에 크론시타트 사령관 겸 군정관으로 임명되었다.[4] 1901년, 마카로프는 ''예르마크''를 지휘하여 노바야 제믈랴와 프란츠 요제프 랜드 해안을 탐사하는 북극 탐험을 수행했다.
마카로프는 또한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바이칼 호를 가로질러 연결하기 위해 두 척의 쇄빙 증기선을 설계했다. 1897년에 건조된 열차 페리 ''바이칼''과 1900년경에 건조된 여객 및 소포 화물 증기선 ''앙가라''는 북아메리카의 오대호에서 유사한 선박을 연구한 것을 바탕으로 설계되었다.[5][6]
영국 뉴캐슬어폰타인의 암스트롱 휘트워스에서 이 선박들을 조립 키트 형태로 제작하여 바이칼 호의 리스트뱐카로 보내 재조립했다. 보일러, 엔진 및 기타 부품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제작되었다.[6] ''바이칼''은 15개의 보일러, 4개의 굴뚝을 가지고 있었으며, 길이가 64m였고, 중앙 갑판에 철도 차량 24량과 기관차 1량을 실을 수 있었다.[5][6] ''앙가라''는 두 개의 굴뚝을 가진 더 작은 배였다.[5][6]
''바이칼''은 러시아 내전 중 불에 타 파괴되었다.[5][6] ''앙가라''는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복원되어 이르쿠츠크에 영구적으로 정박되어 사무실과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5]
마카로프 기념비는 그의 고향인 우크라이나 미콜라이우, 블라디보스토크, 크론시타트에 있다. 다수의 선박이 ''아드미랄 마카로프''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노르덴셸드 군도의 치볼크 군도에 있는 섬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미콜라이우의 스테판 마카로프 국립 조선해양대학교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스테판 마카로프 국립 해양 아카데미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세 척의 쇄빙선이 마카로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첫 번째는 1941년에 ''V. 몰로토프''로 건조된 증기 쇄빙선으로, 1956년에 ''아드미랄 마카로프''로 개명되었다. 두 번째 ''아드미랄 마카로프''는 1975년에 건조되었으며 2015년 기준으로 현재도 운행 중이다. 세 번째는 ''스테판 마카로프''로, 2016년에 완공된 쇄빙 대기선이다.
우크라이나 드니프로 시의 두 개의 거리가 마카로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2023년 2월 22일, 드니프로 시의회는 이 거리들의 이름을 변경했다.[23]
캐나다 매니토바의 마카로프(Makaroff)는 아드미랄 마카로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약 8.05km 서쪽 서스캐처원에는 토고라는 지역 사회가 있는데, 이 지역 사회는 일본의 아드미랄 도고 헤이하치로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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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 Huron (MI) Daily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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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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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imesmach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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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shal Malinovsky remains: 26 streets were renamed in Dnipro
https://dp.inform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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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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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人はこうして戦争をしてき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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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が称賛する 国際派日本人
扶桑社
2016
[29]
간행물
平成新時代の啄木研究展望
おうふう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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