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루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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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드니 루멧은 1924년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2011년 사망한 미국의 영화 및 텔레비전 연출가이다. 1950년대 텔레비전 드라마 연출로 경력을 시작하여, 1957년 영화 《12인의 노한 사람들》로 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그는 사회 정의, 심리 드라마, 사실주의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주로 연출했으며,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를 이끌어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루멧은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4번, 명예 아카데미상을 수상했으며, 《12인의 성난 사람들》, 《뜨거운 오후》, 《네트워크》 등 다수의 작품으로 평단과 대중의 호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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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루멧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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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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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시드니 아서 루멧 |
출생일 | 1924년 6월 25일 |
출생지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
사망일 | 2011년 4월 9일 (86세) |
사망지 | 미국 뉴욕 |
학력 | 컬럼비아 대학교 |
직업 | 영화 감독, 각본가, 제작자, 배우 |
활동 기간 | 1930년–2007년 |
배우자 | 리타 갬 (1949년–1955년, 이혼) 글로리아 밴더빌트 (1956년–1963년, 이혼) 게일 존스 (1963년–1978년, 이혼) 메리 김벌 (1980년 결혼) |
아버지 | 바루크 루멧 |
자녀 | 2명 (장녀 제니 루멧) |
친척 | 제이크 카나베일 (손자) |
수상 | 전체 목록 |
경력 | |
주요 작품 | 12인의 성난 사람들 전당포 필사의 도망자 언덕 형사 서피코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뜨거운 오후 네트워크 에쿠우스 마법사 프린스 오브 시티 데스트랩 심판 모닝 애프터 가족 비즈니스 그날 밤 |
수상 내역 | |
블루 리본상 | 외국어 작품상 (1959년, 12인의 성난 사람들) |
골든 글로브상 | 감독상 (1976년, 네트워크) |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 | 감독상 (1981년, 프린스 오브 시티) 생애 공로상 (2007년) |
로스앤젤레스 영화 비평가 협회상 | 감독상 (1975년, 뜨거운 오후), (1976년, 네트워크) 생애 공로상 (2007년) |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 파시네티상 (1981년, 프린스 오브 시티) |
베를린 국제 영화제 | 황금곰상 (1957년, 12인의 성난 사람들) 국제 가톨릭 영화 사무국상 (1957년, 12인의 성난 사람들) |
아카데미상 | 공로상 (2005년) |
전미 비평가 협회상 | 감독상 (1982년, 심판) |
미국 감독 조합상 | D.W. 그리피스상 (1992년) |
기타 수상 | 빌리 와일더 상 (1996년) |
기타 정보 | |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 해당 |
2. 생애
시드니 루멧은 1924년 6월 25일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폴란드계 유대인으로, 이디시 극장의 연극인이었다. 아버지 바루크 루멧은 아들이 감독한 영화 《전당포》(1964년)와 《그룹》(1966년)에 출연했다.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이주하여 그곳을 거점으로 활동했다.
루멧은 4세에 라디오 드라마에 출연하며 아역 배우로 데뷔했고, 5세에 이디시 예술 극장 무대에 섰다. 10대부터는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아역 배우로 활동했다. 1939년에는 영화에도 출연했다. 1942년 컬럼비아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동시에 육군에 입대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종전 후,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일라이 월릭, 율 브린너 등과 배우 그룹을 결성했는데, 이 그룹은 훗날 액터스 스튜디오의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1950년대에 CBS에서 초기 텔레비전 드라마 제작에 참여하며 연출가로 전향했다. 1957년에는 영화 《12인의 노한 사람들》로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여 베를린 국제 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하고,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오르며 단숨에 인기 감독 대열에 합류했다. 그는 텔레비전 연출가에서 영화 감독으로 전향한 선구자이자, 비 할리우드 영화 세력인 뉴욕파의 기수로 평가받는다.
1960년대에는 여러 문학 작품을 영화화했다. 1962년에는 캐서린 헵번 주연의 《밤으로의 긴 여로》를 통해 가족 간의 애증을 그려 칸 영화제에서 주요 배우 전원이 연기상을 받았다. 1964년에는 홀로코스트를 다룬 《전당포》와 동서 냉전 시기 핵의 공포를 그린 《미지의 비행》을 발표했다. 《전당포》는 주연 로드 스테이거에게 베를린 국제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겨주는 등 비평적으로 성공했지만, 《미지의 비행》은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와 유사한 내용으로 개봉이 늦춰지고 흥행도 저조했다.
1970년대에는 아메리카 뉴 시네마의 흐름을 타면서도 오락 영화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알 파치노를 주연으로 기용하여 경찰 부패를 다룬 《서피코》(1973)와 실제 은행 강도 사건을 그린 《뜨거운 오후》(1975)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오리엔트 특급 살인》(1974)은 앨버트 피니, 잉그리드 버그만, 숀 코너리 등 화려한 캐스팅으로 흥행에 성공했고, 잉그리드 버그만에게 세 번째 아카데미상을 안겨주었다. 매스 미디어의 이면과 광기를 다룬 《네트워크》(1976)는 출연 배우 3명에게 아카데미상을 안겨주며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성공했다.
이후 리처드 버튼 주연의 《에쿠우스》(1977)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고, 첫 뮤지컬 영화인 《위즈》(1978)에서는 마이클 잭슨이 호평을 받았다. 1980년대에도 《프린스 오브 시티》(1981)와 《심판》(1982)으로 다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며 사회파 감독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지옥의 묵시록》(1988)에서는 리버 피닉스가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그러나 1990년대에는 이전과 같은 평가를 받지 못했고, 특히 《글로리아》(1999)는 샤론 스톤이 골든 라즈베리상 후보에 오르는 등 혹평을 받았다.
하지만 2007년 마지막 작품인 《그날 밤, 당신이 없는》으로 왕년의 긴장감 넘치는 연출을 선보이며 평론가들로부터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아 건재함을 과시했다.
루멧은 아카데미 감독상 4회,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감독상 3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4회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2005년 아카데미 명예상을 수상하며 업적을 인정받았다.
2011년 4월 9일, 림프종으로 뉴욕 자택에서 사망했다.[64][65]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시드니 루멧은 1924년 6월 25일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맨해튼의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서 자랐다.[4] 프로페셔널 칠드런스 스쿨과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연극 연기를 공부했다.[5][6]
그의 부모 바루흐와 유제니아(결혼 전 성씨: 베르무스) 루멧은 폴란드계 유대인이자 이디시 극장의 배우였다.[7] 바르샤바 출신인 아버지 바루흐 루멧은 배우, 연출가, 프로듀서, 작가로 활동했다.[8] 무용가였던 어머니는 루멧이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누나가 있었다.[9]
루멧은 4살에 라디오, 5살에 이디시 아트 극장에서 전문 배우로 데뷔했다.[10] 1935년에는 헨리 린의 단편 영화 ''파피로센''(이디시어로 "담배"를 의미)에 출연했는데, 이 영화는 라디오 스타 허먼 야블로코프가 공동 제작하고 동명의 연극과 함께 브롱크스의 맥킨리 스퀘어 극장에서 상영되었다.[11] 어린 시절 브로드웨이 극장의 ''데드 엔드''(1935)와 쿠르트 바일의 ''영원한 길'' 등에도 출연했다.[7] 1939년에는 15세의 나이로 장편 영화 ''... 한 국가의 3분의 1...''에 출연했다.[12][13]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루멧은 미국 육군에서 4년간 복무했다.[14] 인도와 버마에서 레이더 수리공으로 복무(1942–1946)한 후, 액터스 스튜디오와 관계를 맺고 자신의 연극 워크숍을 설립했다. 오프 브로드웨이 그룹을 조직하여 연출을 맡았고, 서머 스톡 극장 연출과 예술 고등학교 연기 지도를 병행했다.[12]
2. 2. 연극 및 초기 텔레비전 경력
루멧은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연출 경력을 시작하여 텔레비전 연출가로 성장했다. 그는 친구이자 당시 연출가였던 율 브리너의 조수로 일한 후 1950년에 텔레비전 연출을 시작했다. 그는 텔레비전에서 요구되는 높은 생산성 때문에 "번개처럼 빠른" 촬영 방식을 개발했다.[15] 그 결과, 그는 CBS에서 ''위험''(1950–1955), ''엄마''(1949–1957), 그리고 월터 크롱카이트가 초기에 출연한 주간 시리즈인 ''유 아 데어''(1953–1957) 등 수백 개의 에피소드를 연출했다. 루멧은 앵커 역할을 위해 크롱카이트를 선택했는데, 그는 "그 쇼의 전제가 너무 어리석고 터무니없었기 때문에, 가장 미국적이고, 소박하고, 따뜻한 편안함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15]그는 또한 ''플레이하우스 90'', ''크래프트 텔레비전 극장'', 그리고 ''스튜디오 원''을 위해 오리지널 연극을 연출하여 약 200개의 에피소드를 감독했는데, Turner Classic Movies에 따르면 이는 그를 "업계에서 가장 다작하고 존경받는 연출가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51] 그의 빠른 작업 능력은 영화 경력에도 이어졌다.[51]

배우 활동에 싫증을 느낀 루멧은 1950년대에 연출가로 전향하여, CBS에서 초기 텔레비전 드라마 제작에 수완을 발휘하여, 잘나가는 연출가가 되었다. 이 시기의 루멧은 5년 동안 약 500편의 작품을 연출했다고 한다.
3. 영화 경력
1957년 텔레비전 방송국을 그만 둔 후, 12인의 노한 사람들로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였다. 첫 감독 작품이었지만, 텔레비전 드라마 연출 경험을 바탕으로 밀실극을 무대로 배심원 제도를 통해 인간의 양심을 묻는 이 작품으로 베를린 국제 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하고, 아카데미 감독상에도 후보로 오르며 단숨에 인기 감독 대열에 합류했다. 텔레비전 연출가에서 영화 감독으로 전향한 선구자이자, 비 할리우드 영화 세력인 뉴욕파의 기수로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는 많은 문학 작품을 영화화했다. 1962년 캐서린 헵번 주연의 밤으로의 긴 여로는 가족의 애증을 그려 제15회 칸 영화제에서 주요 배우 전원이 연기 부문 상을 받았다. 1964년에는 홀로코스트를 다룬 전당포와 동서 냉전 시기 핵의 공포를 그린 미지의 비행 두 편을 발표했다. 로드 스테이거가 주연한 전당포는 베를린 국제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는 등 비평적으로 성공했지만, 미지의 비행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와 내용이 유사하여 개봉이 늦춰지고 흥행도 저조했다.
아메리카 뉴 시네마의 흐름을 타면서도 오락 영화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서피코 (1973년), 뜨거운 오후 (1975년)에서는 알 파치노를 주연으로 기용하여 실감나는 연기를 이끌어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명작을 영화화한 오리엔트 특급 살인 (1974년)에서는 앨버트 피니, 잉그리드 버그만, 숀 코너리, 로렌 바콜 등을 기용하여 흥행에 성공했으며, 잉그리드 버그만에게 세 번째 아카데미상을 안겨주었다. 매스 미디어의 이면과 광기에 초점을 맞춘 네트워크 (1976년)에서는 출연 배우 3명에게 아카데미상을 안겨준데 이어 흥행 및 비평 면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에쿠우스 (1977년)에서는 리처드 버튼에게 아카데미상 노미네이트를 안겨주었으며, 위즈 (1978년)에서는 마이클 잭슨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80년대에는 『프린스 오브 시티』(1981년)와 『심판』(1982년)으로 다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며 사회파 감독으로서의 평가를 더욱 높였다.
아카데미 감독상에 4번,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감독상에 3번, 칸 영화제황금종려상에 4번 노미네이트되었지만, 수상에는 이르지 못했다. 2005년 그의 생애 업적을 기려 아카데미 명예상을 받았다.
3. 1. 1950년대: 영화 데뷔와 초기 성공
루멧은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연출 경력을 시작하여 텔레비전 연출가로 성장했다. 1950년에 텔레비전 연출을 시작하여 CBS에서 ''위험''(1950–1955), ''엄마''(1949–1957), ''유 아 데어''(1953–1957) 등 수백 개의 에피소드를 연출했다. ''유 아 데어''의 앵커는 월터 크롱카이트였는데, 루멧은 "그 쇼의 전제가 너무 어리석고 터무니없었기 때문에, 가장 미국적이고, 소박하고, 따뜻한 편안함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그를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15]그는 ''플레이하우스 90'', ''크래프트 텔레비전 극장'', ''스튜디오 원'' 등에서 약 200개의 에피소드를 감독하여 "업계에서 가장 다작하고 존경받는 연출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그의 빠른 작업 능력은 영화 경력에도 이어졌다.[51] 텔레비전 드라마 중 일부는 영화로 각색되기도 했다.
그의 첫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1957)은 CBS 라이브 연극을 바탕으로 한 법정 드라마로, 비평적으로 성공하여 그를 영화 연출가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루멧의 영화 중 절반은 연극에서 시작되었다.[31]
''12인의 성난 사람들''을 연출한 결과, 텔레비전에서 영화로 성공적으로 전환한 최초의 연출가 그룹을 이끌게 되었다.[16] 1960년에 연출한 ''사코와 반제티 이야기''는 매사추세츠주로부터 비난을 받았는데, 이는 유죄 판결을 받은 살인자들이 사실 완전히 무죄였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 논란은 루멧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어, 권위 있는 영화 배정을 받게 되었다.[17]
그는 말론 브란도, 조앤 우드워드, 안나 마냐니를 주연으로 한 ''도망자''(1959)를 통해 영화와 텔레비전 모두를 위해 고전 연극을 각색하기 시작했다.
3. 2. 1960년대: 다양한 장르 탐구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드니 루멧은 많은 문학 작품을 영화화했다.1962년 캐서린 헵번 주연의 밤으로의 긴 여로는 가족의 애증을 그려 제15회 칸 영화제에서 주요 배우 전원이 연기 부문 상을 받았다.
1964년에는 홀로코스트를 다룬 전당포와 동서 냉전 시기 핵의 공포를 그린 미지의 비행 두 편을 발표했다. 로드 스테이거가 주연한 전당포는 베를린 국제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는 등 비평적으로 성공했지만, 미지의 비행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와 내용이 유사하여 개봉이 늦춰지고 흥행도 저조했다.
3. 3. 1970년대: 사회 비판과 사실주의
아메리카 뉴 시네마의 흐름을 타면서도 오락 영화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경찰의 부패에 맞서는 실존 형사를 소재로 한 사회파 영화 서피코 (1973년)와 실제로 일어난 은행 강도를 그린 뜨거운 오후 (1975년)에서는 알 파치노를 주연으로 기용하여 실감나는 연기를 이끌어내 파치노와 함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명작을 영화화한 오리엔트 특급 살인 (1974년)에서는 소설의 인지도에 필적하는 캐스팅 (앨버트 피니, 잉그리드 버그만, 숀 코너리, 로렌 바콜 등)을 기용하여 흥행에 성공했으며, 잉그리드 버그만에게 세 번째 아카데미상을 안겨주었다. 또한 매스 미디어의 이면과 광기에 초점을 맞춘 네트워크 (1976년)에서는 출연 배우 3명에게 아카데미상을 안겨준데 이어 흥행 및 비평 면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매년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면서 동시에 높은 평가와 흥행 성공을 거두고, 나아가 배우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안겨주면서 미국 영화계의 거장 반열에 올랐다.
이후에도 에쿠우스 (1977년)에서는 주연을 맡은 리처드 버튼에게 아카데미상 노미네이트를 안겨주었으며, 자신에게 첫 뮤지컬 영화가 된 위즈 (1978년)에서는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조연으로 출연한 마이클 잭슨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3. 4. 1980년대-2000년대: 후기 작품 활동
1980년대에도 영화를 잇따라 발표했다. 『프린스 오브 시티』(1981년)와 『심판』(1982년)으로 다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며 사회파 감독으로서의 평가를 더욱 높였다. 1988년 『지옥의 묵시록』에서도 리버 피닉스가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는 등 호평을 받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예전과 같은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되었고, 특히 1999년 공개된 『글로리아』는 주연 여배우 샤론 스톤이 골든 라즈베리상 후보에 오르는 등 졸작이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루멧 자신도 끝난 감독으로 여겨지는 결과를 낳았다.그러나 마지막 작품이 된 2007년 『그날 밤, 당신이 없는』에서는 왕년의 긴장감 넘치는 연출이 부활하여 평론가들로부터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루멧의 건재함을 각인시켰다.
루멧은 아카데미 감독상에 4번,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감독상에 3번, 칸 영화제황금종려상에 4번 노미네이트되었지만, 이들 모두 수상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2005년에는 그의 생애 업적을 기려 아카데미 명예상을 받았다.
4. 연출 스타일 및 주제
루멧은 대공황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고, 뉴욕에서 가난하게 자라면서 빈곤과 부패를 직접 경험했다.[36] 이러한 경험은 그에게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의의 중요성에 대한 신념을 심어주었고, 이는 그의 영화에서 주요 주제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영화 산업 자체가 세상을 바꿀 힘이 있다고 믿지 않았으며, "연예 산업에는 처리해야 할 '쓰레기'가 많지만, 훌륭한 작업의 비결은 정직함과 열정을 유지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36]
영화 역사학자 데이비드 톰슨은 루멧의 영화에 대해 "정의의 취약성과 경찰의 부패라는 확고한 주제를 가지고 있다"고 평했다. 톰슨은 루멧이 ''Fail Safe,'' ''전당포,'' ''언덕''과 같은 큰 문제들을 다루면서 존경을 받았지만, "지루함과 연민 사이에서 갈등하는 듯했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톰슨은 루멧이 "1970년대의 희귀한 존재"였으며, "자신의 소재에 기꺼이 봉사하는 감독이었지만, 그것에 의해 감동받거나 변화하지 않는 듯했다"고 덧붙였다. 또한 톰슨은 루멧을 "배우에 대한 그의 감수성과 도시의 리듬은 그를 1950년대 네오리얼리스트 전통과 윤리적 책임에 대한 긴급한 헌신을 이어받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후손"이라고 평했다.[35]
조안나 라프에 따르면 루멧은 카메라 자체가 눈에 띄는 "장식적인 모습"을 좋아하지 않는 자연주의 또는 사실주의를 선호했다. 그는 카메라가 눈에 띄지 않도록 영화를 편집했다. 그의 촬영 감독 론 포르투나토는 "시드니는 너무 예술적인 모습을 보면 뒤집어진다"고 말했다. 루멧은 시네마스코프를 싫어했으며, 1.85:1보다 넓은 화면비로 촬영한 적이 없었다.
비평가 데이비드 톰슨은 그를 "뉴욕 영화 제작의 견고한 인물 중 한 명"이라고 평가하며, "좋은 시나리오를 얻으면 거기에 따른다"고 말했다.[35] 비평가들은 그의 영화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보였지만, 루멧의 작품은 일반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12]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그를 훌륭한 안목과 스타일을 실험할 용기, 그리고 "배우를 다루는 재능"을 가진 섬세하고 지적인 감독이라고 묘사했다.[12]
루멧은 연출의 물류를 강조하며, 영화 제작을 모자이크에 비유했다. 그는 "각 세트는 작은 타일과 같다"며, "당신은 그것에 색을 입히고, 모양을 만들고, 가능한 최선을 다해 다듬는다. 당신은 이러한 작업을 6~7백 번, 어쩌면 천 번이나 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문자 그대로 그것들을 붙여서 당신이 하려고 했던 대로 되기를 바란다"고 설명했다.[39]
비평가 저스틴 창은 2007년 루멧의 마지막 영화까지 그의 감독으로서의 기술과 훌륭한 이야기를 개발하는 능력이 계속되었다고 평가했다. 창은 루멧이 "출연자들을 능숙하게 다루고, 한 손으로는 따뜻함과 활기 넘치는 유머를 끌어내고, 다른 손으로는 그들을 점점 더 어둡고 고통스러운 감정의 극단으로 이끌어내는 그의 능력"이 그의 마지막 영화에서 잘 드러났다고 썼다.[40][41]
4. 1. 사실주의와 에너지
영화 평론가 오웬 글레이버먼은 루멧을 1950년대 황금기 텔레비전 시대에 훈련받았기 때문에 역동적인 연출 스타일로 유명해진 "강인한 정직가"라고 평했다. 그는 "시드니 루멧"과 "에너지"라는 단어가 동의어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그 에너지는 가장 조용한 순간에도 존재했다. 그것은 루멧이 사람들에게서 관찰하고 그들에게서 끌어낸 내면의 에너지, 존재의 웅웅거림이었다... [그가] 뉴욕 거리에 나섰을 때... 그는 그 거리를 전기로 만들었다."[19]루멧은 할리우드의 지배를 꺼리고 뉴욕시에서 작업하는 것을 선호했다.[36] 감독으로서 그는 뉴욕시와 강하게 동일시되었다. 그는 "나는 항상 우디 앨런의 세계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는 "도시의 다양성, 다양한 민족 지역, 예술과 범죄, 세련됨과 부패, 아름다움과 추함 모두가 그에게 영감을 준다"고 주장했다.[36] 그는 창작을 위해서는 매일 현실에 직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루멧에게 "뉴욕은 현실로 가득 차 있고, 할리우드는 환상의 세계이다."[36]
자신의 출신지이기도 한 뉴욕을 무대로, 사회의 어두운 면을 다룬 작품을 꾸준히 제작했다. 또한, 사실주의에 입각한 진중한 연출이 특징이며, 배우에게도 철저한 역할 분석을 요구했다.
4. 2. 배우와의 협업

영화 역사가 프랭크 R. 커닝햄은 루멧이 영화의 협업적 성격을 존중하고, '개인적'인 감독의 지배력을 비웃기도 했다고 썼다. 루멧은 작가, 배우, 다른 예술가들과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데 열린 태도를 보여 배우와 촬영 감독 모두에게 명성을 얻었다. 커닝햄은 루멧이 뛰어난 배우들을 훌륭하게 연출하는 데 있어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다고 덧붙였는데, 많은 배우들이 연극 출신이었다. 그는 랄프 리처드슨, 말론 브란도, 리처드 버튼, 캐서린 헵번, 제임스 메이슨, 소피아 로렌, 제럴딘 피츠제럴드, 블라이스 대너, 로드 스타이거,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폴 뉴먼, 숀 코너리, 헨리 폰다, 더스틴 호프만, 앨버트 피니, 시몬 시뇨레, 앤 밴크로프트와 같은 배우들로부터 강력한 연기를 끌어낼 수 있었다. 영화 평론가 믹 라살은 "그에게 훌륭한 배우를 주면, 그는 그 안에 숨어 있는 위대한 배우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썼다.[20]
루멧은 훈련받지 않은 배우를 선택하기도 했지만, "90% 이상은 최고의 도구, 즉 배우, 작가, 조명 기사, 카메라 기사, 소품 기사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이 부족한 배우들을 기용할 때에도 그는 훌륭하고 기억에 남는 연기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는 닉 놀테, 앤서니 퍼킨스, 아만드 아상테, 제인 폰다, 페이 더너웨이, 티모시 허턴 및 앨리 맥그로와 함께했는데, 맥그로는 그를 "모든 배우의 꿈"이라고 불렀다.[55] 제인 폰다는 "그는 거장이었다. 그의 기법을 완벽하게 통제했다. 그는 강력하고 진보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었고, 결코 배신하지 않았다"고 말했다.[21]
루멧은 영화가 예술이라고 믿었고, "영화에 쏟는 관심의 정도는 질 좋은 영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23] 그는 배우로 경력을 시작했기 때문에 "배우의 감독"으로 알려졌고, 수년에 걸쳐 최고의 배우들과 함께 작업했다.[36] 연기 학자 프랭크 P. 토마술로도 동의하며, 배우의 관점에서 연기를 이해할 수 있는 많은 감독들이 모두 "훌륭한 소통가"라고 지적했다.[24]
영화 역사가 제럴드 마스트와 브루스 카윈에 따르면, 루멧의 "배우에 대한 감수성과 도시의 리듬에 대한 감각은 그를 1950년대 네오리얼리즘 전통과 윤리적 책임에 대한 긴급한 헌신의 가장 오래 살아남은 미국의 후손으로 만들었다"고 한다.[25] 그들은 그의 영화 ''언덕''(1965)을 "1960년대 가장 정치적이고 도덕적으로 급진적인 영화 중 하나"라고 언급했다. 루멧 영화의 사회적 갈등 아래에는 "사랑과 이성이 결국 인간사에 승리할 것이고", "법과 정의가 결국 실현될 것이다 – 아니면 아닐 것이다"라는 "확신"이 있다고 덧붙였다.[25] 그의 데뷔작인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1950년대 자유주의적 이성과 연대의 모델을 제시하며 호평을 받았다.[35] 이 영화와 루멧은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으며, 감독 조합상 후보에도 올랐다.[12]
''세계 인물 전기 백과사전''은 그의 영화에 종종 메소드 연기를 연구한 배우들이 등장하며, 소박하고 내성적인 스타일로 묘사되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언급한다. 그러한 "메소드" 배우의 대표적인 예는 알 파치노인데, 그는 경력 초기에 메소드 연기 전문가 리 스트라스버그에게서 배웠다. 루멧은 배우와 설정 모두에서 즉흥적인 모습을 선호했으며, 작품 대부분을 현장에서 촬영함으로써 영화에 즉흥적인 느낌을 주었다.[26]
루멧은 리허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배우가 제대로 리허설을 하면 즉흥성을 잃지 않는다고 믿었다. 평론가 이안 버나드에 따르면 루멧은 리허설이 배우에게 "역할의 전체적인 흐름"을 제공하여 "마법 같은 우연"을 발견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고 생각했다.[27] 피터 보그다노비치 감독은 그에게 촬영 전에 광범위하게 리허설을 하는지 물었고, 루멧은 촬영 전에 최소 2주간의 리허설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36] 페이 더너웨이는 1976년 영화 《네트워크》에 출연했는데, 그 기간 동안 그는 촬영 기사와 함께 장면을 연출했다고 회상했다. 그녀는 "그가 촬영하는 동안 단 1분도 낭비되지 않으며, 이는 스튜디오 예산뿐만 아니라 연기의 추진력에도 나타난다"라고 덧붙였다.[28] 그녀는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네트워크》에서의 그의 연출 방식을 칭찬했다.
배우들이 충분히 리허설을 했기 때문에 그는 제작을 빠르게 실행할 수 있었고, 작품을 적은 예산으로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예를 들어, 《프린스 오브 시티》(1981)를 촬영할 때 130명이 넘는 대사 배역과 135개의 다른 촬영 장소가 있었지만, 그는 전체 촬영을 52일 만에 조정할 수 있었다. 역사학자 찰스 하폴과 토머스 샤츠는 배우들이 그와 함께 일하기를 열망했는데, 그를 "뛰어난 배우 연출 감독"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영화의 주연 배우 트리트 윌리엄스는 루멧이 "정력적"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하폴은 "많은 감독들이 리허설을 싫어하거나 배우들에게 캐릭터를 구축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싫어했지만, 루멧은 둘 다 뛰어났다"라고 덧붙였다.[23] 그는 이를 통해 배우들에게 그들의 능력을 보여주는 영화적 쇼케이스를 제공하고 연기에 더 깊이를 더할 수 있도록 도왔다. 영화 《데드트랩》(1982)에 함께 출연한 배우 크리스토퍼 리브는 루멧이 기술적인 언어를 구사할 줄 안다고 지적했다. "그가 원하는 대로 일할 수 있습니다. 그는 메소드 연기에 대해 알고 있고, 즉흥 연기를 할 줄 알며, 그 모든 것을 똑같이 잘합니다."[36]
조앤나 라프는 《심판》(1982) 촬영에 대해 글을 쓰면서, 루멧이 배우들에게 많은 개인적인 관심을 기울였다고 말한다. 그녀는 루멧과 주연 배우 폴 뉴먼이 주요 세트에서 떨어진 벤치에 앉아 뉴먼이 신발을 벗고 곧 촬영될 중요한 장면에 대해 개인적으로 논의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루멧의 배우들은 카메라가 돌기 전에 장면을 걸어 다녔다. 루멧은 한두 번의 테이크로 장면을 촬영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준비가 이루어졌다. 뉴먼은 그를 "스피디 곤잘레스"라고 불렀으며, 루멧은 필요 이상으로 촬영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는 자신을 보호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럴 겁니다."라고 뉴먼은 말했다.[36]
영화 평론가 벳시 샤키도 동의하며 "그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이를 존경받는 전문 분야로 만들기 수년 전에 한두 번의 테이크로 촬영하는 거장이었다"라고 덧붙였다. 샤키는 "[페이] 더너웨이가 한때 루멧은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것처럼 너무 빨리 일했다고 말했습니다. 큰 심장이 만들어내는 질주하는 맥박이었습니다."라고 회상한다.[30]
4. 3. 사회 정의와 심리 드라마
조앤 라프는 루멧이 "체제에 도전할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사람, 체제에 맞서는 작은 사람"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것을 좋아한 독립적인 감독이었다고 언급했다.[36] 여기에는 영화 《가르보 톡스》(1984)에서 앤 밴크로프트가 연기한 "모든 종류의 대의를 위한 헌신적인 활동가로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활기차고, 솔직하며, 용감하고, 편의를 위해 순응하는 것을 거부하며, 삶에 대한 이해를 통해 품위 있게 죽는" 캐릭터도 포함된다.[36]루멧은 열정과 헌신을 따르는 데 따르는 "인간적인 대가, 그리고 그 열정과 헌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하는 대가"에 항상 매료되어 왔다고 말했다.[36] 라프는 이 주제가 뉴욕시 경찰의 부패에 관한 실화 영화나 《다니엘》(1983)과 같은 가족 드라마 등 그의 대부분의 영화의 핵심을 이룬다고 언급했다.
영화 역사가인 스티븐 볼스는 루멧이 가벼운 오락물보다는 진지한 심리 드라마 연출에 가장 편안함을 느꼈다고 믿는다. 그의 아카데미상 후보 지명작들은 첫 영화인 《12인의 성난 사람들》부터 《심판》에 이르기까지 모두 위기에 처한 인물 연구에 대한 것이었다.[31] 루멧은 드라마를 스크린에 담아내는 데 뛰어났으며, 그의 등장인물 대부분은 정의, 정직, 진실 추구, 질투, 기억, 죄책감 등 강박이나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31]
루멧의 주인공들은 반영웅이 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집단이나 제도에 반항하는 고립되고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루멧에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사람들의 행동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이 진실하고 개인의 양심에 의해 정당화되었는지 여부였다. 내부 고발자 프랭크 서피코는 루멧이 "대의를 가진 반항아"라고 묘사한 전형적인 루멧 영웅이다.[32]
심리 드라마의 초기 사례로는 로드 스테이거가 출연한 《전당포》(1964)가 있다. 스테이거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역할을 맡아 정신이 황폐해지고 할렘에서 전당포 매니저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루멧은 이 영화를 통해 회상 장면과 함께 스테이거의 등장인물이 겪는 심리적, 정신적 상처를 다루었다.[33] 스테이거는 이 영화가 배우로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말했다.[34]
《뜨거운 오후》(1973)는 루멧이 1970년대에 만든 4편의 "획기적인" 영화 중 첫 번째 작품으로, 그를 "그의 세대 최고의 영화 제작자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51] 이 영화는 이상주의적인 경찰이 불가능한 역경에 맞서 싸우는 뉴욕시 경찰의 권력과 배신에 대한 이야기였다.[51]
루멧은 대공황 시대에 아이였고, 뉴욕시에서 가난하게 자라면서 빈곤과 부패를 목격했다.[36] 그는 어린 나이에 민주주의를 위한 정의의 중요성에 대한 신념을 심어주었고, 이는 그가 영화에 담으려고 노력한 주제였다. 그러나 그는 영화 사업 자체가 어떤 것을 바꿀 힘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고 인정했다.[36] 영화 역사학자 데이비드 톰슨은 그의 영화에 대해 언급했다.[35]
그는 뉴욕을 무대로, 사회의 어두운 면을 다룬 작품을 꾸준히 제작했다. 또한, 사실주의에 입각한 진중한 연출이 특징이며, 배우에게도 철저한 역할 분석을 요구했다.
4. 4. 유대인 테마
다른 뉴욕 출신 유대인 감독들, 예를 들어 우디 앨런, 멜 브룩스, 폴 마주르스키와 마찬가지로, 루멧의 등장인물들은 종종 당시 논쟁적인 문제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들은 영화 제작자로서 제약감을 느끼지 않았고, 그들의 예술은 "그들의 유대인 의식을 통해 여과되었다"라고 영화 역사가 데이비드 데서는 썼다.[38] 루멧은 다른 감독들과 마찬가지로 때때로 유대교적 주제에 의존하여 미국 문화의 특징인 민족적 감수성을 발전시켰으며,[38] 이는 "독특한 긴장감과 문화적 다양성"을 역동적으로 강조했다. 이는 루멧이 도시 생활에 몰두했던 것과 부분적으로 관련이 있다.[38] 예를 들어, 영화 ''어 스트레인저 어몽 어스(A Stranger Among Us)'' (1992)는 잠입 경찰관 여성과 그녀가 뉴욕시의 하시디즘 공동체에서 겪는 경험에 대한 이야기이다.데서는 "죄책감"이라는 주제가 루멧의 많은 영화에서 지배적이라고 설명한다. 배심원단이 한 젊은 남자의 유죄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그의 첫 장편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1957)부터 변호사가 이단적인 경찰의 죄책감과 책임에 대한 질문을 결정해야 하는 ''Q&A(1990)''까지, 죄책감은 그의 많은 영화를 관통하는 공통적인 주제이다.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Murder on the Orient Express)'' (1974)에서는 모든 용의자가 유죄이다.[38]
그의 영화는 또한 가족 생활에 대한 강한 강조를 특징으로 하며, 종종 가족 내의 갈등을 보여준다.[38] 가족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서피코(Serpico)'' (1973), ''프린스 오브 더 시티(Prince of the City)'' (1981), ''Q&A''로 구성된 경찰 3부작과 같은 "대리 가족"을 포함했다. "전통적이지 않은 가족"은 ''뜨거운 오후(Dog Day Afternoon)'' (1975)에서도 묘사된다.[38]
5. 개인사
루멧은 네 번 결혼했으며, 처음 세 번의 결혼은 이혼으로 끝났다. 1949년부터 1955년까지 배우 리타 갬과 결혼했고,[51] 1956년부터 1963년까지 예술가이자 상속녀인 글로리아 밴더빌트와 결혼했으며, 1963년부터 1978년까지 레나 혼의 딸인 게일 존스와 결혼했고, 198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메리 베일리 김벨(피터 김벨의 전 부인)과 결혼했다. 존스와의 사이에서 두 딸을 두었는데, 첫째 딸 에이미는 1990년부터 1993년까지 P.J. O'Rourke와 결혼했고, 둘째 딸이자 배우 겸 시나리오 작가인 제니은 그의 영화 ''Q&A''에서 주연을 맡았다. 제니 루멧은 영화 ''레이첼, 결혼하다''(2008)의 각본을 썼으며,[12][43] 알렉스 커츠만과 함께 ''양들의 침묵''의 속편 ''클라리스''와 ''스타 트렉: 스트레인지 뉴 월드'' 두 편의 텔레비전 시리즈를 공동 제작하기도 했다.
루멧은 2011년 4월 9일, 림프종으로 86세의 나이에 맨해튼 자택에서 사망했다.[5][22] 1997년 인터뷰에서 "어떻게 떠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에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종교적이지 않다. 나는 어떤 공간도 차지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안다. 나를 태워 재를 카츠 델리카트슨에 뿌려달라."라고 답했다.[44] 루멧이 사망하고 몇 달 후, 뉴욕 링컨 센터에서 그의 작품을 기리는 회고 행사가 열렸으며, 많은 연설자와 영화 배우들이 참석했다.[45] 2015년, 낸시 버스키는 그의 경력을 다룬 다큐멘터리 ''시드니 루멧''을 연출했으며,[46][47] 이 다큐멘터리는 2017년 1월 PBS의 ''아메리칸 마스터스'' 시리즈의 일부로 방영되었다.[48][49][50]
6. 사망
루멧은 2011년 4월 9일, 림프종으로 86세의 나이에 맨해튼 자택에서 사망했다.[5][22] 1997년 인터뷰에서 "어떻게 떠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에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종교적이지 않다. 나는 어떤 공간도 차지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안다. 나를 태워 재를 카츠 델리카트슨에 뿌려달라."라고 답했다.[44]
사망 몇 달 후, 뉴욕 링컨 센터에서 그의 작품을 기리는 회고 행사가 열렸으며, 많은 연설자와 영화 배우들이 참석했다.[45] 2015년, 낸시 버스키는 그의 경력을 다룬 다큐멘터리 ''시드니 루멧''을 연출했으며,[46][47] 이 다큐멘터리는 2017년 1월 PBS의 ''아메리칸 마스터스'' 시리즈의 일부로 방영되었다.[48][49][50]
7. 유산 및 평가
영화 역사가 스티븐 보울스에 따르면, 루멧은 "등장인물의 행동이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이 진실한지 여부"를 연출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드라마 영화 제작자로서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행동이 "개인의 양심에 의해 정당화될 때, 이것은 그의 영웅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압력, 학대, 불의에 맞서 견딜 수 있는 특별한 힘과 용기를 준다."고 보았다.[31] 그의 영화는 "동료 집단의 권위에 반항하고 자신의 도덕적 가치관을 주장하는 전형적인 영웅"을 보여주었다.[31]
''할리우드 백과사전''에 따르면, 루멧은 1957년 연출 데뷔 이후 평균적으로 연간 한 편 이상의 영화를 연출한 현대 시대의 가장 다작의 영화 제작자 중 한 명이다.[37] Turner Classic Movies는 그의 "배우들에 대한 강력한 연출", "활기찬 스토리텔링"과 그의 최고의 작품에서 "사회적 현실주의"에 주목한다.[51] ''시카고 선타임스''의 영화 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그를 "모든 영화 감독들 중 가장 훌륭한 장인이자 따뜻한 인도주의자 중 한 명"이라고 묘사했다.[52] 루멧은 "배우들의 감독"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경력 동안 최고의 배우들과 함께 작업했다.[36] 그의 영화 다섯 편에 출연한 숀 코너리는 그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감독 중 한 명이자 "비전"을 가진 감독으로 여겼다.[53]
루멧이 영화 인생에 대해 쓴 회고록 ''Making Movies''(1996)는 "영화 제작 자체에 대한 열정으로 매우 경쾌하고 전염성이 있다"고 보울스는 쓰고 있으며, "대부분의 그의 영화의 분위기와 스타일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고 평가했다.[31] Associated Press의 작가 제이크 코일도 이에 동의하며 "루멧은 수년 동안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되었지만, 배우들은 그의 지도하에 일관되게 가장 기억에 남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캐서린 헵번부터 페이 더너웨이, 헨리 폰다에서 폴 뉴먼까지, 루멧은 배우들의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54]고 평했으며, 알리 맥그로우는 그를 "모든 배우의 꿈"으로 여겼다.[55]
스티븐 스필버그는 루멧을 "영화의 오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한 명"이라고 묘사하며, 루멧의 "매력적인 이야기와 잊을 수 없는 연기가 그의 강점"이라고 평가했다.[57] 루멧의 사망 소식을 들은 알 파치노는 그의 영화에 대해 "그는 훌륭한 유산을 남겼지만, 그 이상으로 그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는 내가 아는 가장 교양 있는 인간이자 가장 친절한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라고 말했다.[57] ''보스턴 헤럴드''의 작가 제임스 버니어는 "미국 영화 산업이 얼마나 낮아질 수 있는지 보려고 하는 시대에, 시드니 루멧은 도덕적으로 복잡한 미국 드라마의 거장으로 남아 있다"고 언급했다.[58] 그의 죽음 이후, 우디 앨런과 마틴 스코세지는 모두 루멧에게 경의를 표했다. 앨런은 그를 "전형적인 뉴욕 영화 제작자"라고 불렀고, 스코세지는 "우리의 도시의 비전은 ''서피코'', ''뜨거운 오후''와 ''프린스 오브 더 시티''와 같은 고전 작품을 통해 향상되고 깊어졌다"고 말했다.[59] 루멧은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 시장에게 "우리 도시의 위대한 연대기 작가 중 한 명"이라는 칭찬을 받았다.[59]
그는 개인 아카데미상을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2005년에 아카데미 명예상을 받았고, 그의 영화 14편이 다양한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다. ''네트워크''는 10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4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2005년, 루멧은 "시나리오 작가, 배우, 그리고 영화 예술에 대한 뛰어난 공헌"으로 아카데미 평생 공로상을 받았다.[60]
2011년 4월 루멧의 사망 몇 달 후, TV 해설가 로렌스 오도넬은 루멧에게 헌정하는 방송을 내보냈고,[61] 그의 작품을 회고하는 행사가 뉴욕 링컨 센터에서 열렸으며, 많은 연설자와 영화 배우들이 참석했다.[45] 2011년 10월, 휴먼 라이츠 퍼스트는 TV 프로그램 ''굿 와이프''에 "시드니 루멧 엔터테인먼트 정직상"을 제정했으며,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일해 온 두 명의 중동 활동가에게도 상을 수여했다. 루멧은 TV에서 고문과 심문에 대한 묘사와 관련된 미디어 프로젝트에서 휴먼 라이츠 퍼스트와 함께 일했다.[62]
8. 수상 및 후보
시드니 루멧은 미국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에서 다음과 같은 인정을 받았다.
- 제30회 아카데미상(1957): 감독상 후보, ''12인의 성난 사람들''
- 제48회 아카데미상(1975): 감독상 후보, ''뜨거운 오후''
- 제49회 아카데미상(1976): 감독상 후보, ''네트워크''
- 제54회 아카데미상(1981): 각색상 후보, ''프린스 오브 시티''
- 제55회 아카데미상(1982): 감독상 후보, ''심판''
- 제77회 아카데미상(2004): 명예 아카데미상, '''수상'''
루멧은 ''12인의 성난 사람들''로 베를린 국제 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1] 그는 영화 ''밤으로의 긴 여로''(1962), ''언덕''(1965), ''약속''(1969), ''우리 중 낯선 자''(1992)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에 4번 올랐다.[1] 그는 또한 ''프린스 오브 시티''(1981)로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 후보에 올랐다.[1]
상 | 연도 | 부문 | 작품 | 결과 |
---|---|---|---|---|
베를린 국제 영화제 | 1957년 | 황금곰상 | 12인의 성난 사람들 | 수상 |
국제 가톨릭 영화 사무국상 | 수상 | |||
아카데미상 | 1957년 | 감독상 | 12인의 성난 사람들 | 후보 |
1975년 | 감독상 | 뜨거운 오후 | 후보 | |
1976년 | 감독상 | 네트워크 | 후보 | |
1981년 | 각색상 | 프린스 오브 시티 | 후보 | |
1982년 | 감독상 | 심판 | 후보 | |
2006년 | 명예 아카데미상 | 수상 | ||
골든 글로브상 | 1957년 | 감독상 | 12인의 성난 사람들 | 후보 |
1975년 | 감독상 | 뜨거운 오후 | 후보 | |
1976년 | 감독상 | 네트워크 | 수상 | |
1981년 | 감독상 | 프린스 오브 시티 | 후보 | |
1982년 | 감독상 | 심판 | 후보 | |
1988년 | 감독상 | 어떤 방문 | 후보 | |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 1957년 | 작품상 | 12인의 성난 사람들 | 후보 |
1966년 | 작품상/영국 작품상 | 언덕 | 후보 | |
1974년 | 감독상 | 오리엔트 특급 살인, 세르피코 | 후보 | |
1975년 | 감독상 | 뜨거운 오후 | 후보 | |
1976년 | 감독상 | 네트워크 | 후보 | |
미국 감독 조합상 | 1957년-1976년 | 장편 영화 감독상 | 12인의 성난 사람들, 밤으로의 긴 여로, 노름꾼, 세르피코, 오리엔트 특급 살인, 뜨거운 오후, 네트워크 | 후보 |
1992년 | 수상 | |||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 | 1957년 | 감독상 | 12인의 성난 사람들 | 차점 |
1981년 | 감독상 | 프린스 오브 시티 | 수상 | |
2007년 | 평생 공로상 | 수상 | ||
캔자스시티 영화 비평가 협회상 | 1981년 | 감독상 | 프린스 오브 시티 | 수상 |
전미 영화 비평가 협회상 | 1981년 | 감독상 | 프린스 오브 시티 | 2위 |
전미 비평 위원회 | 1982년 | 감독상 | 심판 | 수상 |
1996년 | 빌리 와일더 상 | 수상 | ||
로스앤젤레스 영화 비평가 협회상 | 1975년 | 감독상 | 뜨거운 오후, 네트워크 | 수상 |
2003년 | 평생 공로상 | 수상 |
9. 작품 목록
연도 | 영화 | 배급사 |
---|---|---|
1957 | 12인의 성난 사람들 |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
1958 | 무대 공포증 | RKO 픽처스 |
1959 | 그런 종류의 여자 | 파라마운트 픽처스 |
1960 | 도망자 |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
1962 |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 | 컨티넨탈 필름 |
1962 | 밤으로의 긴 여로 | 엠바시 픽처스 |
1964 | 전당포 | 파라마운트 픽처스 |
1964 | 실패의 위험 | 컬럼비아 픽처스 |
1965 | 언덕 |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 |
1966 | 더 그룹 |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
1967 | 치명적인 사건 | 컬럼비아 픽처스 |
1968 | 안녕, 브레이버맨 | 워너 브라더스 |
1968 | 갈매기 | 워너 브라더스 |
1969 | 약속 |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 |
1970 | 마지막 모바일 핫샷 | 워너 브라더스 |
1971 | 앤더슨 테이프 | 컬럼비아 픽처스 |
1972 | 어린 시절 | 파라마운트 픽처스 |
1973 | 반항 |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
1973 | 뜨거운 오후 | 파라마운트 픽처스 |
1974 | 러빙 몰리 | 컬럼비아 픽처스 |
1974 | 오리엔트 특급 살인 | 파라마운트 픽처스 |
1975 | 뜨거운 오후 | 워너 브라더스 |
1976 | 네트워크 |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 /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
1977 | 에쿠우스 |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
1978 | 위즈 | 유니버설 픽처스 |
1980 | 원하는 대로 말해줘 | 워너 브라더스 |
1981 | 프린스 오브 시티 | 워너 브라더스 / 오리온 픽처스 |
1982 | 데드라인 | 워너 브라더스 |
1982 | 심판 | 20세기 폭스 |
1983 | 다니엘 | 파라마운트 픽처스 |
1984 | 가보 토크스 |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 |
1986 | 파워 | 20세기 폭스 |
1986 | 다음 날 아침 | 20세기 폭스 |
1988 | 런닝 온 엠티 | 워너 브라더스 |
1989 | 패밀리 비즈니스 | 트라이스타 픽처스 |
1990 | Q&A | 트라이스타 픽처스 |
1992 | 우리 안의 낯선 사람 | 부에나 비스타 픽처스 |
1993 | 죄와 같은 | 부에나 비스타 픽처스 |
1996 | 맨해튼에 밤이 오면 | 파라마운트 픽처스 |
1997 | 크리티컬 케어 | LIVE 엔터테인먼트 |
1999 | 글로리아 | 컬럼비아 픽처스 |
2004 | 강제 심문 | TV 영화 |
2006 | 파인드 미 길티 | 프리스타일 릴리징 |
2007 | 악마가 너를 죽이기 전에 | 씽크필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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